〈 28화 〉28화. 계획 (2)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교단에는 던전과 몬스터 연구의 천재라는 강효린 박사가 서 있었다.
저번에 급한 일이 있다고 사라진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수업을 이제야 복귀하게 됐어요."
강효린 박사는 정말 힘들었나 본지 다크서클이 눈 밑으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래도 힘내서 진도를 나가보죠! 저번에 봤던 쪽지 시험은 아직 채점이 안 끝나서 오늘은 전략적 체스를 진행할 거예요."
"아아…."
생도들 사이에서 탄식이 퍼진다.
전략적 체스는 그만큼 생도들이 싫어하는 복잡한 실습이었다.
"좋아, 기다리던 전략적 체스!"
"…?"
같은 동아리가 되면서 루시와 루미와 가까워졌다. 바로 옆자리는 아니고, 내 앞자리에 루시와 루미가 나란히 앉아있고 나는 바로 뒤에 혼자 앉아있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수업 중에 은은히 풍기는 쌍둥이의 향기때문에 수업에 집중이 안되는 자리다.
내가 루시의 말에 의문을 표한 이유는, 루시는 공부에 강한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법사라고 모두 공부에 강한 건 아니다. 마법진처럼 무조건 외워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웬만한 건 재능에 맡기는 게 마법사란 족속이다.
항상 이론 수업마다 으아아 하면서 머리를 잡고 있는 게 루시의 캐릭터였는데 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심지어 그 어렵다는 전략적 체스에서 말이다.
개인 책상에 장착돼있는 홀로그램 모니터가 떠오르면서 체스판 형식의 필드를 형성한다.
'와, 오랜만이네. 진짜.'
전략적 체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실습 중 하나다. 내가 공략 대장이 되어서 공략대를 운용해 던전을 돌파하는 게임 같은 시스템이다.
'게임이 시험이었으면 좋겠다~.' 고 학생 때 많이 생각했었는데, 게임은 게임으로 즐겨야 재밌는 법.
게임을 못 하면 좋은 대학을 못 가고 게임을 못 하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다면 '아, 게임 대신 공부나 하고 싶다.'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전략적 체스도 마찬가지다.
체스 같은 턴제 게임으로, 대원들을 한 번씩 움직이면서 상대의 몬스터들을 모두 잡아내면 승리다.
원작 게임에서도 전략적 체스는 악명이 높았다.
전략적 체스에는 3요소가 있다.
배경이 되는 던전.
상대 역할인 몬스터.
내가 조종하는 공략대.
셋 다 50가지가 넘는 패턴을 가지고 있고 랜덤으로 돌아간다.
난이도는 쉬움에서 극악까지 있다.
아마도 처음이니까 쉬운 문제를 낼 것 같지만, 저번에 난이도 극악의 쪽지 시험을 내면서 학생들의 고통을 즐기던 강효린 박사라면 또 모르겠다.
"자, 실습 시작합시다~."
강효린의 말과 동시에 내 눈앞에 있던 홀로그램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 던전은 [밀림] 상대는 [바나나 적혈 원숭이 2마리] 내 공략 대는 [근접 전사 10 저주마법사 5 지원형 마법사 5] 조합이었다.
"이게 뭐야."
시너지가 좋은 조합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난이도가 어렵진 않았다.
바나나 적혈 원숭이는 보스형 몬스터로, 강하긴 하지만 지능이 높지 않다.
근접 전사를 앞세우고 저주 마법사로 저주를 중첩하면 적은 피해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뭐야! 엄청 쉬운데?"
"응. 그러게. 교수님이 처음이라 난이도를 조절하셨나 봐."
"루미.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 테니까 잘 보라구 알겠지?"
"응응. 화이팅."
'흐음."
저번 쪽지 시험 때 봤던 교수의 얼굴을 생각해보면 그럴 거 같지가 않은데.
그때 다른 생도가 손을 들고 말했다.
"어? 뭐야! 교수님, 제 공략 대원이 말을 안 들어요!"
강효린 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었다.
"괜찮아요. 이번 문제의 설정은 겁이 많은 대원들이랍니다. 정말 안전하고 위험이 없을 것 같은 작전이 아니면 따르지 않아요."
"네, 네에? 그게 무슨, 위험이 없는 작전이 어딨어요!"
"그건 알아서 하셔야죠."
"……!"
"뭐, 여러분의 창의성과 지휘력을 보려는 거니까, 마음 편히 하세요.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에요. 뭐라도 좋으니 시도해보세요~."
아무리 저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걸 푸는 생도 입장에서 부담이 안 될 수는 없다.
"어차피 못 깨겠지만, 동기부여를 위해서. 클리어하는 생도에겐 추가 점수를 부여할게요~."
저게 동기부여를 하겠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나저나, 이건 난이도 극악인데?'
원작 게임을 할 때도 중요한 건 본대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거다.
그래야 점수가 높게 나오고, 그래야 퇴학에서 멀어지니까.
게다가 엘리스 루트를 타려면 시험 성적에서 엘리스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심했다.
"으에? 왜 말을 안 듣니 얘들아…?"
자신만만하던 루시는 넋을 놓고 움직이지 않는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아악! 아니 거기서 파고들면 죽일 수 있는데 왜 안 파고드는 거야!"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
비명을 지르곤 처음부터 다시 하는 생도들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강효린 박사의 모습이 약간 무서웠다.
아무리 봐도 약간 S 성향 인 것 같은데.
나도 내 문제를 천천히 분석했다.
개 같은 야겜인 '섹스 아카데미'에서는 시나리오를 진행하려면 이 전략적 체스를 5번 이상 깨야 한다.
매번 모든 요소가 바뀌어서 암기도 못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루트를 공략했고, 이 전략적 체스도 수없이 클리어해 봤다.
바나나 적혈 원숭이의 특징도 꿰고있다.
바나나 적혈 원숭이는 부부가 동시에 출현한다.
주식은 바나나기 때문에, 바나나를 건드리는 외적들을 매우 경계한다.
둥지에는 새끼가 있다.
하지만 새끼를 건드리면 안 된다. 새끼들이 죽으면 바나나 적혈 원숭이가 광폭화에 들어가서 더욱 공략하기 어려워진다.
"으으음… 할만하겠네."
내 공략대원과 몬스터의 분석이 끝난 후. 내 대원들을 움직였다.
안전하지 않은 명령은 받지 않는 놈들이었으니, 근접 전사 5명은 멀리서 바나나 나무 테러를 시켰다.
이것도 처음엔 명령을 안 듣길래 한명이 5그루씩만 썰고 바로 도망가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명령을 듣고 나무를 베러 갔다.
나머지 근접 전사 5명과 지원형 마법사 5명, 저주마법사 5명을 데리고 원숭이의 둥지 쪽으로 나아갔다.
지원형 마법사 한 명이 세명에게 쉴드를 걸 수 있으니, 그나마 안전한 상황이었다.
조용히 숨어서 둥지를 관찰하고 있다보니, 원숭이들이 바나나 나무를 공격하는 외적을 처리하기 위해 둥지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미 나무를 베는 근접 전사들은 다 도망갔을거다.
바나나 적혈 원숭이가 둥지를 비운 사이에 나머지 병력들을 데리고 둥지에 들어가서 아직 어린 새끼 원숭이 들에게 저주를 중첩해서 걸었다.
생명에 지장이 가는 저주보다는 전염성이 강하고 몸을 마비시키는 저주를 걸고 빠르게 둥지를 나와 도망쳤다.
"이제 3배 속으로 돌리면 끝."
새끼 원숭이에게 박힌 저주는 바나나 적혈 원숭이에게 천천히 퍼질 것이다.
쓸데없이 모성애가 강한 놈들은 자기 몸이 저주때문에 움직이지 못 할때까지 새끼원숭이를 돌봐준다.
그럼 그 때 병력을 진입시켜서 죽여버리면 공략 완료.
이 공략방법의 핵심은 기다림이다. 3배속을 한 후에 계속 기다려야 한다.
30분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옆 칸 이동을 반복해야 원숭이도 둥지 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서서히 저주에 오염된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점수가 좀 깍이겠지만, 확실하게 끝내고 피해도 없는 방법은 이것 뿐이다.
"으악!"
앞에서 들리는 비명에 깜짝 놀라서 앞을 봤더니, 루시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저번 주 내내 전략적 체스만 연습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래!"
"…."
"흐엉엉. 다 망했어."
"우, 울지마. 루시… 괜찮을 거야."
앞에서 신파극을 찍는 동안 내 공략대원들은 저주에 걸려서 몸을 못 가누는 원숭이의 목을 잘랐다.
예에-
승리! 라는 문구가 내 홀로그램에 나오면서 전략적 체스가 종료됐다.
"어? 벌써 클리어한 사람이 있다고?"
강효린 박사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생도들도 경이로운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본다.
"쩝. 약속은 약속이니까. 추가 점수 1점이에요."
강효린 박사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괜히 쑥쓰러워서 가만히 있는데, 엎드려서 우는 척을 하고있던 루시가 확! 하고 뒤돌았다.
그리고 내 앞에 떠있는 승리! 문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운이 좋았어. 쉬운 문제였거든."
바나나 적혈 원숭이의 특성만 알고 있으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물론 새끼가 다쳐도 계속 껴안고 있다는 특성을 알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나한테도 꿀팁 좀…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더 열심히 하자!"
나한테 팁을 달라고 하던 루시가 강효린 박사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하고는 다시 앞을 보며 열정을 불태웠다.
30분 뒤.
"안 되잖아! 안 된다고! 이거 누가 만든거야!"
흐엉엉-
다시 엎드려서 울고 있는 루시를 보면서 생각했다.
'다행히 공부를 못하는 설정은 안 바뀌었네.'
*
방과후, 루시는 놀자 동아리의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신입 부원을 받기 위해 이호연에게 꼭 오라고 얘기했지만.
- 미안, 오늘 꼭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그거만 마치고 갈게.
이런 말을 하면서 급하게 기숙사로 달려갔다.
루미는 쿠키가 다 떨어졌으니 베이커리에서 쿠키를 사온다고 했다.
"아아앙, 심심한데."
루시는 태생부터 돌아다니는 걸 좋아 했고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동아리도 하나 만들었는데, 오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한 찰나에 신입 부원이 들어온다니 굉장히 기뻤다.
똑 똑 똑
"네~ 누구세요?"
"저, 펠릭스 인데요."
"아! 지금 열어줄게!"
루시가 문을 열자 그 곳엔 순박한 눈의 백금발 소년이 서있었다.
"아직 다 안 왔는데, 앉아서 기다리자."
"네, 넷."
펠릭스는 아직도 이 곳이 어색한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살며시 소파에 앉았다.
친화력이 좋은 루시는 소심한 펠릭스를 알뜰살뜰 챙겨주면서 대화를 나눴다.
"응응, 우리 동아리는 이호연이란 남자애랑 내 동생 루미랑 세명이야."
"이호연이라는 분이면 혹시… 학생회 홍보부인 그 분인가요?"
"맞아. 우리 동아리는 학생회 임원이 있는 동아리라구."
으쓱. 별 거 아니지만 초대 동아리 회장인 루시의 어깨가 올라갔다.
"아하… 그래서 동아리에 사람이 안 오는… 흡."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확실히 들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해봐. 우리 동아리에 사람이 안 오는 이유를 알아?"
루시는 평소같지않게 진지한 눈으로 펠릭스를 바라봤다.
펠릭스는 실수했다는 듯이 고개를 밑으로 내리깔고서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제가 말 하는 건 꼭 비밀로 해주셔야 되요."
"응. 걱정마. 무슨 얘기인데?"
"실은… 그 이호연 이라는 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아요."
"… 안 좋은 소문이라니?"
"일단 유명한 건 여자 관계에요. 학생 회장님, 임솔 교수님, 같은 홍보부인 엘리스 양 까지 안 좋은 소문이 많아요."
"…."
"그리고 동급생하고 모텔에 가는 걸 봤다는 소문도 있어요."
루시는 남을 소문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자기가 본 것만 믿는 타입이었다. 그녀가 본 이호연은 오해로 시작한 인연이었지만, 착하고 성실한 생도였다.
하지만 처음의 오해.
루시의 가슴을 만졌던 사고가 사고가 아니라면?
"확실히… 생각해보면 이호연의 주변은 거의 다 여자야."
루시도 이성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호연이 김영한 이라는 남생도 한 명 빼고 남자와 말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렇죠? 제 생각엔 그래서 여자생도들이 여기에 안 들어오는 것 같아요."
"… 그럴지도 몰라."
동아리를 만든 이후, 루시와 루미의 몸을 보고 접근한 남자들은 많았지만, 여자 생도가 가입을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뭐, 모두 확실한 얘기는 아니니까요. 그냥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그래도 루시 양과 같은 동아리라니, 다 헛소문이면 좋겠네요."
"응. 그러게."
이호연이 들었으면 복창을 터트릴 말을 하면서 펠릭스는 루시에게 웃음을 지었다.
띠링-
그 때 루시의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도착했다.
"그런 소문이 있을 줄이야…. 일단 루미랑 이호연 둘 다 온다니까 기다리고 있어! 난 마중갔다 올게."
"네."
루시가 호다닥 동아리방을 나서고, 방에 혼자 남은 펠릭스는 미소를 지우고 눈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사귀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루시와 이호연이 사귀지 않더라도 적어도 썸타는 사이라고 생각한 펠릭스는 둘을 갈라놓기 위해 직접 헛소문을 생산해서 퍼트리고, 그걸 루시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냥 친구사이였기에 루시에게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펠릭스는 입맛을 다시며 탁상에 놓여있던 음료를 빨았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해봐야겠어."
루시.
그녀는 마인인 펠릭스가 한 눈에 반한 여자다.
아카데미에 잠입이라는 위험한 짓을 하게 만든 여자.
지금 여기 있는 것도 꽤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이지만, 그녀의 매력적인 얼굴과 풍만한 가슴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쿵 쿵 쿵
그 때 밖에서 발 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다시 순수한 얼굴로 돌아간 뒤, 음료수를 내려놓고 긴장한 듯이 소파에 앉았다.
"오, 깨끗해졌네?"
이호연이 동아리방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나랑 루미랑 얼마나 열심히 청소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흐흥."
"고생했네. 나한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하지그랬어."
"루미가 절대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떡해~."
"그치만… 호연 씨가 없었으면 저희 동아리도 없었을 거에요…."
"에이. 이제 부담되니까 그 얘기는 그만해도 된다니까."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기껏 헛소문을 퍼트렸는데 별 다를 게 없었다.
펠릭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그 쪽을 돌아봤다.
"아, 맞다! 이번에 신입부원으로 뽑으려는데, 네 의견도 물어보려고 불렀어. 어때? 착해보이지?"
루시가 이호연에게 펠릭스를 소개했다.
이호연과 펠릭스가 서로를 처음 인지했다.
둘이 눈을 마주 보고, 이호연이 씩 미소를 짓는다.
루시는 그 모습을 보고 당연히 긍정의 말이 나올거라고 예상했지만, 이호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