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화. 루미와 데이트
일요일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 뒤, 스트레칭으로 잠든 몸을 깨웠다.
오늘은 루미와 영화 약속이 잡혀있다. 무려 아이돌 파티 극장판.
솔직히, 아이돌 파티가 뭔지도 모르고 무슨 내용인지도 하나도 모른다. 워낙 그런 쪽에 관심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그 영화를 보러 가는데 사전 조사는 해야겠지. 그게 루미한테도 예의일 테고.
너무위키에 '아이돌 파티'를 검색했다.
"아이돌 파티… 뭐야, 이건?"
망할 위기에 처한 학교의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아이돌 유닛을 만들어 유명해지고, 마침내 학교를 살리는 내용이다.
뭐 이딴 애니메이션이 있냐.
덕분에 한정이나 가챠가 뭔지도 알게 됐다.
오타쿠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치밀하다.
혹시라도 거짓말이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캐릭터나 잡아서 최애캐로 정했다.
최애캐의 개인 문서까지 들어가서 프로필부터 시작해 노래, 춤, 주로 하는 헤어 스타일 까지 다 외웠다.
"이 정도면 완벽한 오타쿠다."
나는 완벽한 오타쿠 빙의에 성공했다.
시간을 보니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다.
이미 준비는 다 해놨으니 외투만 걸치고 기숙사를 나왔다.
만나기로 한 영화관이 아카데미에서 가까운 덕에 금방 도착했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는데 루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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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기념할 만한 첫 데이트!]
당신의 첫 데이트 상대는 루미!
루미는 친구와 첫 사적인 약속을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루미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주세요!
- 보상 : 랜덤 능력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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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퀘스트 떴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니, 뭔가 어려운 것 같은데?
퀘스트를 받고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여자랑 데이트 하는 게 얼마 만이지?
갑자기 긴장되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자각하고 나니까 긴장된다.
두근두근.
심장도 뭔가 빨리 뛰는 거 같고.
"이게 도움이 될 날이 오네."
미친 약사 노인네가 챙겨준 청심환을 한 정 꺼내먹었다. 물도 같이 꿀꺽꿀꺽.
"뭐 드세요?"
"콜록콜록! 캐흡!"
"괘,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 아니야. 괜찮아."
루미는 화사한 원피스에 검은색 긴 생머리는 빨간 리본머리끈으로 묶고 왔다. 사복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솔직히 설렜다.
청순한 매력이 흐르는 듯 하면서도 귀여움을 주는 아담한 체구와 숨기지 못 할 볼륨감이 주는 언밸런스는 잔뜩 힘줘서 꾸몄다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근데 뭐 드신 거에요? 사탕?"
"청심환 먹었어. 긴장돼서."
"청심환이 뭔데요?"
"음, 긴장도 풀어주고, 몸 온도도 낮춰주고 하는 약이라고 생각하면 돼. 나는 루미랑 데이트할 생각하니까 긴장돼서 먹었어."
내 말을 들은 루미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네, 네? 데이트요? 그, 뭐랄까. 그런 건 서서히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그, 물론 호연 씨가 싫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긴 하지만…."
양 손가락을 마구 교차시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엄청 귀여웠다.
"농담인데, 혹시 진짜 데이트 하고 싶어?"
"네? 아니, 으으으… 놀리지 마세요."
루미가 내 얼굴을 보고 놀림받는거라고 알아챘다. 웃음 좀 참을걸.
"빨리 들어가자. 자리가 넉넉하다고 해도 혹시 모르니까, 팝콘도 사야 하고."
"네, 빨리 가요!"
영화관에 들어갔다.
무인매표기에서 매표를 하려는데, 매표기 옆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커플석 이용하는 커플에겐 이미지 보드와 포토 카드를 추가로 증정해드립니다!]
곧 루미의 시선도 포스터에 닿았다.
"으읏!"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포스터와 기계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랑 눈을 맞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말하지 않아도 의사가 느껴진다.
여기선 내가 한 번 맞춰줘야지. 오타쿠인 척 하고 왔으니까.
"루미, 혹시 커플석 할래? 이미지 보드랑 포토 카드 준다는데."
"앗, 네! 좋아요! 커플석으로 하죠!"
커플석을 했다는 이유로 텐션이 급격하게 올랐다.
저게 그렇게 좋은가?
어쨌든, 커플석으로 표를 예매하고 팝콘까지 사 들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남녀 커플이 우리밖에 없는데?"
"…그러게요."
놀랍게도 쭈르륵 놓여있는 10개 정도의 커플석이 다 남남 커플로 차 있었다.
이상한 야광봉도 들고 있고, 영화관에 야광봉이 왜 있는거지?
루미는 또 왜 저걸 보고 눈에서 빛을 내는거야?
*
"흑, 흑…."
"…울지마."
루미는 정말 아이돌 파티에 진심인 것 같다.
이게 시리즈에서 마지막 극장판이라면서 끝나기 전 10분쯤 부터 훌쩍훌쩍하더니 영화관을 나오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자, 내 카드 줄게. 이거 받고 뚝 해."
커플석이라고 받은 카드랑 기본 특전인 포스터, 게임에서 쓸 수 있는 쿠폰까지 다 내밀었다.
"호연 씨! 이런 귀한 거 남한테 함부로 주는 거 아니에요!"
"줄 때 받아. 거절하면 다시는 안 줄 거니까."…
"죄송해요… 거절하고 싶은데 너무 가지고 싶어요… 흑."
울면서도 챙길 건 챙기는 루미. 귀여운 강아지 같다. 돈만 있었어도 더 사줬을 텐데 보육원에 후원까지 했더니 진짜 돈이 없다.
"대신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네! 제가 맛있는 떡볶이집 쏠게요! 가요!"
또 떡볶이냐. 나도 떡볶이를 싫어하진 않으니 뭐, 그냥 가자.
"여기에요! 여기~!"
떡볶이 먹을 생각에 호다닥 달려간 루미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은 '역전할아버지소주' 라는 가게였다.
"루미, 이거 아무리 봐도 술집 아니야?"
"여기 떡볶이가 그렇게 맛있대요. 에브리데이에서도 유명해요!"
"그래? 그렇다면야."
루미와 함께 가게에 들어갔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네."
"저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구석진 2인 자리로 안내받았다.
"여기 차돌 곱창 떡볶이 하나 주세요!"
"네, 주문받았습니다!"
"그게 그렇게 유명한 떡볶이야?"
"네! 에브리데이에서 엄청 난리였어요. 저도 와보고 싶었는데 루시가 떡볶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아, 친구가 없어서 혼자 못 왔구나. 나도 예전에는 혼자서 식당에 가기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적응하니까 오히려 편하던데.
생각해보니 여긴 술집이라 혼자서 못 오나?
"루미는 뭔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러세요?"
똘망똘망 나를 바라보는 루미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저기다 대고 너한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줄거야. 라고 말하는건 너무 범죄같은데.
"뭐, 그냥 평소에 해보고 싶었는데 못 했던거, 지금 같이 하면 좋으니까?"
"아하, 호연씨 너무 착해요…. 근데 저는 지금도 너무 신나요!"
에휴, 됐다. 애가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내 입으로 꺼내기가 좀 그렇다.
"떡볶이 나왔습니다!"
마침 직원이 떡볶이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그 쪽으로 넘어갔다.
"우와우와, 차돌이랑 곱창을 떡볶이에 넣을 생각을 하다니!"
루미는 젓가락으로 차돌과 곱창, 떡을 한 번에 끼워서 입에 넣었다.
"으음~"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흔든다. 강아지가 물을 터는 거 같다.
왜 이렇게 루미만 보면 강아지가 생각이나지? 강아지상은 아닌데 하는 짓이 완전 강아지다.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는걸 보니 맛있나 보네. 머리는 안 어지러운가?
맛이 궁금해진 나도 조금 집어 먹어봤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그쵸그쵸! 너무 맛있어!"
텁텁함 없이 고소하고 쫄깃한 곱창, 한번 굽고 넣은 건지 불 향이 묻은 차돌박이, 그리고 쫄깃한 떡까지. 진짜 맛있다.
"진짜 술 땡기는 맛이네."
"술 땡기는 맛이요?"
"응, 여기에 소주 한잔하면 딱인 맛."
"... 그럼 술도 시킬까요?"
"술? 나는 괜찮은데, 술 잘 먹어?"
"실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요. 헤헤."
찾았다. 잊지 못할 추억. 처음 술을 배운 거면 잊지 못할 추억 아닐까? 이렇게 순수한 아이에게 술을 가르쳐줘도 될까 싶지만, 언젠가 배워야 할 술. 나쁜 놈들에게 걸려서 큰 일 날바에는 내가 지켜주겠어.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같이 해보자."
"네! 좋아요!"
딩동-
"사장님! 여기 소주 두 병 갖다주세요!"
"네에~"
근데, 술을 처음 배우는 애한테 소주는 너무 쓰지않나?
"사장님, 여기 한 병은 자몽 소주로 갖다주세요!"
어디서 과일 소주를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한 병은 자몽 소주로 바꿨다.
술과 잔이 나오고, 루미한테 소주를 따라줬다.
루미한테도 술을 한 잔 받았다. 이쁜 여자한테 술을 받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소주를 받으면서 칙칙한 남정네 얼굴을 보는게 아니라 여자 가슴을 훔쳐보는 날이 오다니, 감개무량하다.
"자, 짠 한 다음에 소주잔으로 건배하고 먹는 거야. 짠."
"짠!"
꼴딱꼴딱.
"크으."
이 세계에 빙의하고 처음 마시는 술.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너무 쓰다.
이호연의 몸이 술을 한 번도 안 마셔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앞에 루미는 잔을 반도 비우지 못했다.
"으아, 너무 써요. 우엑."
"떡볶이 좀 먹어. 그리고 다음엔 이거로 따라줄게. 이건 좀 달달할거야."
"네에... 근데 이건 너무 써서 못 먹겠어요..."
"줘, 내가 먹을게."
루미의 잔을 들고 반 정도 남은 소주를 원 샷 했다.
"그, 그거 제가 입대고 마신 건데..."
"앗. 미안해. 못 마신다길래 아까워서."
"괘, 괜찮아요."
냠
루미는 볼이 붉어진 채로 떡볶이를 콕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크흠, 자몽 소주 한번 먹어볼래? 진짜 괜찮을 거야."
원래 잠깐 어색해졌을 때는 한 잔 더 마시면 괜찮아 진다.
"네. 한 잔 따라주세요."
루미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마냥 소주병과 소주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소주 한잔 먹는 거 가지고 쓸데없이 비장하네.
루미는 자몽 소주, 나는 그냥 소주를 따라서 다시 건배했다.
짠!
꼴딱꼴딱.
"음, 약간 쓰긴 한데, 달아서 먹을만해요."
"다행이다. 하나는 그거로 시키길 잘했네."
"근데, 술은 마시면 취한다던데 저는 언제 취해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뭔가 기분이 좋아지거나 얼굴이 뜨거워지진 않아?"
"우웅… 그런 건 없눙거 가툰뎅…"
루미는 자기 손을 이마에 갖다 대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벌써 혀가 꼬이는 거 같은데요. 루미씨.
"저 술 잘 마시눈 거 가튼데 한잔 더 해요오!"
"조금 천천히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짠!"
*
"으에에…."
"내가 천천히 마시자고 했잖아."
"끄애앵… 머리아파…."
토닥토닥
술집을 나온 후, 거리 한복판에서 루미의 등을 천천히 두들겨주고 있다.
천천히 마시자니까 기어코 5잔을 연속으로 마시더니 완전히 가버렸다.
이렇게 술이 약하면 보통 얼굴이 뜨거워지든지 머리가 아프든지 뭐든 느낄텐데, 술에 잘 취하는건 히로인의 어쩔수 없는 숙명인가?
"졸려어…."
"안돼, 여기서 잠들면 입 돌아가. 루미야, 루미야?"
"으어어…."
풀썩. 주저 앉은 루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서 일으켜 세웠다.
이리저리 흔들어봐도 도저히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으에에엥…."
"…제대로 가버렸네."
완전히 꼬라 버렸다. 여기서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어떡하지 이걸?
"…."
한 블록 앞에 밝게 빛나는 간판이 보였다.
[그랜드 모텔]
"어쩔 수 없어. 응. 어쩔 수 없지."
진짜 어쩔 수 없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