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화. 1대1 대련
오후 1시, 대련장에 A반 신입생들이 3열로 정렬해있었다.
1대1 대련. 다른 말로 대인전 훈련.
생도끼리 짝을 지어서 서로 대련하는 단순한 수업이다.
"대진표는 즉석에서 랜덤으로 정한다. 개인간 상성은 전혀 고려하지않는다. 평생 상성이 유리한 상대랑만 싸울순 없다. 안전하게 상성이 불리한 상대와 싸울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으니, 불리한 상대가 걸리면 오히려 좋아할 일이다."
"옙!"
신입생들이라 그런지 이럴때는 다들 군기가 잡혀있다.
"하지만 첫 대련을 나서서 하는 사람에겐 특별히 도전권을 주겠다. 원하는 사람을 지목할 권리를 주지."
여기서 나서서 주요인물들하고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않지만, 아직 내가 대인전을 얼마나 잘 할지 미지수다. 오늘 수업은 조용히 넘어가자.
"제가 지목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지목해봐라 루시."
루시가 총총 교관 옆에 서서 학생들을 눈으로 훑었다. 찾는 사람이 눈에 안보이는지 눈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호연학생 지목하겠습니다!"
네? 저요?
"이호연? 쟤를 갑자기 왜?"
"근데 오전 수업보니까 의외로 좀 하던데?"
"전에 임솔 교수님한테도 칭찬받았잖아."
"그냥 고백하는거 아니냐? 사람들 다 있는데서 고백으로 혼내주려고."
"와, 루시 의외로 공격적인데?"
공개고백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둘다, 대련장으로 올라와라. 무기는 알아서 챙겨오고."
어짜피 루시도 나도 마법사다. 써본 적도 없는 무기를 챙겨봤자 괜히 몸만 무거워진다.
그래서 맨 몸으로 가려다가, 가벼워 보이는 단검이 있길래 하나 집어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혹시 쓸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원형의 대련자의 정면에서, 강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루시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고있다.
사실 노려보는 것 자체는 귀여운데, 나를 노려보는 저 눈동자에서 맹수가 비쳐보였다.
미남미녀 둘이 마주보고 대치하고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밑에선 난리가 났다.
다들 우리 둘에게 시선이 고정되있다.
예상은 했던 일이다. 대련수업이 많은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 루시와 붙을 일이 언젠가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루시도 히로인중 한명으로 엄청난 재능충이다.
동생 루미는 방어마법 특화, 언니인 루시는 공격마법 특화다.
그녀의 후반부 전투능력은 공격일변도긴하지만, 전장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불태우는 모습은 귀여운 외형과 대비되는 맹수 그 자체다.
물론 이 시점에서 그녀는 아직 꽤 강한 유망주 수준에 불과하지만, 실전 경험이 전무한 내가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엑스트라 상대로 경험을 쌓고 싶었는데... 하아.'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20 ]
- [ 성욕 : 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20 ]
어제 사과 한 이후로 호감도가 2에서 20까지 올라갔다.
이해가 안되네. 화가 난거 같진 않은데 왜 대련신청을 한거지?
"사과할 준비 됐어?"
루시가 맞은편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사과는 대련장에서 하는게 유행인가봐."
"사실 별로 화는 안나. 그때 니 상태를 봤으니까. 어제 사과도 진심인거 같았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루시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근데 말이야, 미안하면 대가를 치러야지. 사과는 대련 후에 받을게."
아무래도 사과를 받을 생각은 있는거 같은데, 상황이 상황이더라도 가슴을 만진건 열받으니 벌은 받으라는 건가?
대련장의 마나필드에선 공격을 받아도 육체적으로 상처가 남지 않는다.
하지만 실전감각을 위해 고통은 그대로 느껴진다. 실제 상황에서 고통때문에 실력발휘를 못하면 안되니까.
될 수 있으면 마법에 맞기는 싫은데... 진짜 아플거 같다.
"자, 마나필드에 문제 없고, 서로 준비는 다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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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이제는 언니까지 공략!]
루미랑 친해졌다고 방심하기는 금물!
루시는 동생처럼 말 몇마디 걸어줬다고 호감도를 높일 수 없어요. 대련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서 나쁜 남자가 되어 보는건 어떨까요?
- 보상 : 루시의 호감도 소폭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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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시작 할 대련을 위해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아니, 대련을 압도적으로 승리한다고 해서 나쁜 남자가 될 수 있는거 맞아? 이거 아닌거 같은데.
"이호연! 준비가 되었으면 대답을 해라!"
"아, 옙!"
교관의 호통이 나를 정신차리게 했다. 뭐, 실패한다고 패널티는 없는 것 같으니 해볼까?
괜히 몸이라도 풀어보려고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해봤지만,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벨트에 달려있는 단검이 걸을때마다 내 허벅지를 툭 툭 친다.
은근히 불편하다. 쓰지도 않을 것 같은데 괜히 가져왔네.
"3, 2, 1. 시작!"
펑!
서로를 막고있던 결계가 깨지면서 대련이 시작됬다.
시작 신호가 들리자마자 마나를 구현했다.
루시는 불속성마나를 사용한다. 나도 주로 불속성 마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성은 반반.
물론 다른 속성도 사용할 수 있다. 훈련소에서 해봤는데 쉽게 되더라.
근데 지금 여러 속성을 보여주는건 너무 눈에 띈다.
'과한 관심은 너무 일러.'
루시는 마나를 불화살형태로 구현했다. 나중에는 저런 화살따위 수백, 수천개까지도 쉽게 쏘아낸다.
슈슈슉!
10개정도 되는 불화살이 나를 향해 쏘아져온다.
나는 미리 구현하고있던 불의 장벽으로 화살들을 막아냈다.
화살들은 장벽과 부딪힌 후에 그 힘을 잃고 소멸했다.
가벼운 탐색전 같은 공방.
"꽤 하네? 마법사로 전향한다길래 협회 공무원이라도 노리는 줄 알았는데."
"칭찬 고마워."
방금 공방에서 캐스팅 속도는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나는 루시의 불화살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하지만 루시는 아직 여력이 넘쳐보였다. 그녀에겐 방금 공방이 정말 가벼운 탐색전이었다.
확실히 경험이 없는 나보다 침착했고, 마법도 능숙했다. 내가 좀 더 경험이 있었다면 마력구체를 이용해 불화살을 효율적으로 격추시켰겠지만, 아직은 마법을 10개이상 나눠서 컨트롤 할 능력이 안된다.
"빨리 끝내자. 우리 뒤에 기다리는 사람 많아."
화르륵-!
루시의 머리 위로 수십개의 불화살이 떠오른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루시도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서 마법을 구현했다.
압도적인 수의 불화살. 그 웅장한 자태와 그것들이 곧 나에게 날아온다는 압박감.
한 번 맞아주고 끝낼까, 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그냥 맞아줄순 없다.
그걸로 루시와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몇 번이고 맞아주겠지만, 한 대 맞아주고 사과한다고 해서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정말정말, 차라리 시스템말대로 나쁜 남자가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뭐라도 해보자.
두근!
각오를 다지자 마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내 몸이 이 세계의 '주인공'인 '이호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두근!
가슴 깊은 곳 부터 피가 빠르게 순환되고 온몸으로 활기를 퍼트린다.
서서히 올라오는 내 권능. [전투 감각]
제대로 써보는건 처음이지만, 빠르게 적응했다.
꿇어오르는 [전투 감각]은 몸에 적당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었다.
머리가 냉철해진다. [뚜렷한 정신력]은 포기라는 감정을 지워내고 이 상황을 파훼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나감응]은 눈 앞에 보이는 불 화살들을 최대한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다.
온 몸이 고양감에 휩싸인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보다도 컨디션이 좋아진 듯 하다.
'이길 수 있어. 아니, 이겨야해.'
이호연의 재능인 [전투감각]. 게임에서는 이 권능 하나만으로도 말도 안되는 변수들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특전으로 받은 [마나감응], [뚜렷한 정신력]까지 합쳐졌다.
원래라면 이뤄지지 않았을 변수와 변수의 만남은, 또 다른 변수를 낳았다.
『고유스킬이 개화합니다.』
『고유스킬 : [개안]을 습득했습니다.』
---------『 개안 』---------------------------
▶ 고유 스킬
▶마나를 눈에 집중시켜 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마나가 깃든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고 구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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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
"포기한거야? 패기있는줄 알았는데 시시하네."
루시는 가만히 서있는 내 모습을 의아한듯이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불화살을 나에게 날렸다.
나에게 불화살이 날아오고, 나는 [개안]을 발동시켰다.
눈에 마나를 집중시키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큭."
눈에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통증을 참지 못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지잉-
그와 동시에 마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마나의 시각화를 인식한 순간 내 시야가 넓어졌다.
마치 얼굴 양 옆에 눈이 하나씩 더 생긴것 처럼, 시야각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넓어졌고, 대기에 녹아있는 마나를 내 의지대로 관측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시야의 변화에 당황하기 전에, 날아오는 불화살들을 처리해야 했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불의 화살.
지잉-
그 마법을 제대로 응시함과 동시에 시야에 왜곡이 발생했다. 나에게 날아오는 마법의 원리와 마나의 구조식이 이해된다.
이 마법이 어디서 날아오고 있는지, 어디까지 그 화력이 피해를 주는지, 그 파괴력은 어느정도인지가 머릿속에 강제로 박힌다.
이미 마법으로 대응하기에는 늦었다. 피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피해야 하지? 라고 생각한 순간, 자연스럽게 최적의 루트가 눈에 보였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불화살. 그 마법의 길이 보였다.
슈우욱-.
약 30개의 붉은 선들이 보인다. 그 붉은 선 중 나를 관통하는 선은 약 15개. 나머지 15개는 내 도주루트를 막고있다.
하지만 길이 보인다면 피하기는 쉬운 법이다.
가장 붉은 선이 적은 방향인 앞으로 뛰어 나갔다.
대부분의 화살은 나를 빗겨지나갔고, 이제 남은건 3개의 붉은 선.
왼손과 오른손에 빠르게 마나구체를 구현해 맞대응 한 후, 하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꺽으면서 피해낸다.
"운이 좋네!"
다시 루시의 머리 위에 불의 화살이 생성된다.
하나씩 날아오는 불의 화살. 방금보다 수는 적지만 그만큼 컨트롤에 신경을 쓰기에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내 눈에는 길이 보였으니까.
왼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며 화살을 피한 뒤, 발 끝에 마나를 서서히 집중시켰다.
'틈이 보인다...!'
또 다시 날아오는 20개의 불 화살. 처음보다 수가 적었지만 화살 사이의 틈을 좁혔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날아오는 마법들. 마법 사이에 간극이 없는 것 같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내 어깨 폭보다 조금 넓은 틈. 그 사이로 뛰어들어야 한다.
발끝에 마나를 한번에 폭발시켜 얻은 추진력으로 붉은 선의 틈으로 정확히 뛰어들었다.
화르륵-!
그 마술같은 광경에 루시도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앙 깨물고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다음 마법도, 그 다음 마법도, 최소한의 움직임과 방어로 마법을 회피하면서 루시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나와 루시의 거리가 거의 가까워졌을때, 그녀는 장벽을 구현하고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그 마법을 영창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스윽
아까 챙겨뒀던 단검을 그녀의 목에 갖다댄다.
가까이서 마법으로 승부를 가릴 수도 있지만, 루시를 공격하기는 싫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승리에는 퍼포먼스도 중요한 법이다.
털썩-
루시가 다리에 힘이 빠진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련장 밖을 보자 학생들이 경악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패기넘치던 담임교관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교관님, 승자 판정 부탁드립니다."
"어, 어 그래. 승자 이호연. 둘 다 내려오도록."
대련을 이겼는데 박수소리도 안들리고, 관중으로써의 자세가 안되있구나 이놈들.
루시는 아직도 주저앉은 채로 넋이 나가있다.
『퀘스트 완료! 루시의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28 ]
- [ 성욕 : 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20 ]
호감도가 3 상승했다. 근데 왜 28이지? 아까 분명히 20이었는데, 8이나 올랐네.
설마 진짜 대련을 압도적으로 이겨서 나쁜남자에 빠진건 아니지?
일단 멍때리고 있는 루시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루시, 괜찮아?"
"하, 복수하려고 했는데 역으로 깨져버렸네."
"이겨놓고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진짜 위험했어."
루시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하아. 그래서, 그 멋있는 눈은 뭐야?"
내 눈? 내 눈이 뭐 어때서?
스마트 워치의 거울기능으로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내 눈동자는 부드러운 금색으로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