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화. 루미
특히나 실기 1위인 남다은이 같은 조에 있는 건 꽤 이득인데, 아무래도 나랑 이병훈이라는 짐 덩어리 때문인 것 같다.
일단 조끼리 모이라고 했으니 나도 7조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야, 진짜? 나도 거기 출신이야."
"앞으로 잘해보자. 나는 근접이고…"
주변은 서로의 조원과 친분을 다지느라 어수선하다. 적어도 한 학기 동안은 같이 가야 하는 만큼 편해질수록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법이다.
"이야, 남다은님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같은 조가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
"..."
"..."
"아차, 제 소개를 빠트렸네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유서 깊은 투사 길드의 장남으로서…"
그런데 우리 조는 왜 이럴까?
조를 구성한 뒤로 이병훈이라는 남자 혼자 주구장창 떠들고 있다. 그것도 나랑 루미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남다은만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고, 아까 말했듯이 첫 과제는 같은 조원들과 식사하고 사진 찍어 오기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금방 합을 맞춰야 하는 게 프로 헌터다."
그게 밥 먹고 사진찍기와 큰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과제를 받았으니 해야 하는데, 이걸 어떡하지?
다른 조들은 이미 삼삼오오 모여서 뭐 먹을지 정하고 있거나, 밥 먹으러 떠났다.
이병훈은 계속 남다은한테 말을 걸고 있고, 남다은은 끝까지 무시하며 가방을 싸고 있다.
루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병훈과 남다은 사이에서 고개를 휙휙 돌리면서 우물쭈물하고 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호연.
'내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고민끝에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음, 얘들아? 우리 밥 뭐 먹을래?"
벌떡.
최대한 고심해서 무난한 말을 골랐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다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메고 강의실 문으로 향했다.
"남다은. 아는 식당이라도 있어?"
"... 애들 장난에 어울릴 생각 없어."
"어?"
진짜 저 말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지? 아니, 과제 하자니까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병훈은 남다은이 나가고 우리 둘을 곁눈질하면서 보더니 "흠흠, 사실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
이미 다른 학생들은 같은 조원끼리 밥 먹으러 떠났고, 나랑 루미만 강의실에 덜렁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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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시무룩한 루미 위로하기!]
아카데미 데뷔를 하려던 루미의 야망이 깨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요. 루미를 위로하여 루미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세요!
- 보상 : 랜덤 능력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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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눈앞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시무룩한 루미 위로하기?
"첫 친구 만들기, 망해버렸어... 이 바보, 떡볶이가 좋다고 왜 말을 못 해. 힝."
옆을 보니 루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뭐 잘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짜피 남다은은 중반부가 넘어가야 꼬실 수 있고, 저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나는 남자는 버려도 된다.
"음, 루미야? 쟤내들은 가버렸으니 우리끼리 밥 먹으러 가자."
"네... 넵? 저랑 같이 드시려구요?"
"응, 조끼리 밥 먹고 사진 찍는 게 과제였잖아."
"그,,, 남다은 양은 가버렸는데요."
지금 남다은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그리고 얘도 그 이병훈인가 하는 애는 신경을 안 쓰는구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떡볶이 좋아해? 내가 아는 떡볶이 맛집 있는데 같이 갈래?"
"네... 네! 갈래요!"
*
내 앞에는 볼이 빵빵하도록 떡볶이를 넣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루미가 앉아 있다. 도토리 먹는 다람쥐처럼 양 볼이 동그랗게 튀어나왔다.
"천천히 먹어도 안 뺏어갈 거야."
"앗, 네. 죄송해요..."
"아니아니, 죄송할 거까지야. 맛있게 먹는 모습 보기 좋네."
"헤헤... 근데 진짜 맛있어요! 저랑 같은 신입생인데 어떻게 이런 맛집을 아시는 거에요?"
왜냐면 게임에서 루미와 데이트할 때 이 떡복이집이 필수코스였거든. 언제까지 먹나 봤는데 게임 끝날때까지 떡볶이만 먹더라. 그 정도로 좋아하는 곳인데 당연히 맛있겠지.
★ 히로인 상태창
[루미]
- [ 호감도 : 35 ]
- [ 성욕 : 30 ]
- [ 식욕 : 15 ]
- [ 피로도 : 40 ]
호감도가 20이나 올랐다. 떡볶이 4번 더 먹고 공략 완료가 되면 좋을 텐데 아쉽다.
식욕도 40에서 15까지 떨어졌으니 이 정도면 다 먹었겠지.
"슬슬 다 먹은 거 같은데,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내꺼 화질이 안 좋아서, 네 핸드폰으로 찍어도 돼?"
"앗, 네. 찍으세요!"
루미의 핸드폰을 받고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루미 옆에 몸을 딱 붙였다.
"어, 어? 그, 너무 가까운 게?"
"한 컷에 둘 다 나와야 인증이 되잖아."
찰칵!
"네명중에 두명이 없긴 하지만, 사진은 잘 나왔네."
피사체가 워낙 좋다보니 대충 찍어도 화보같이 나온다.
"아, 네. 잘 나왔네요오..."
사진 잘 나왔다니까 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냐.
어쨌든, 이제 슬슬 더 잡고 있을 구실도 없으니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루미의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우연히 본 듯 말을 꺼냈다.
"어? 루미야. 그 핸드폰 케이스 아이돌 파티 아니야?"
"네,,, 넵?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나도 그거 좋아하거든. 너도 그거 좋아해?"
"네! 진짜진짜 좋아해요! 저번 한정도 천장 찍어서 먹었고, 애니메이션도 다 봤고, 어... 극장판도 다 봤어요!"
말을 그렇게 더듬던 애가 애니메이션 얘기가 나오니까 말이 엄청나게 빨라졌다.
한정을 천장 찍어서 먹었다는 게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목표는 따로 있다.
"그럼 이번에 개봉하는 극장판 같이 보러 갈까? 마침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거든."
"앗, 여... 영화요?"
"응, 좀 부담되면 나 혼자 가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니아니, 아니요. 꼭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럼 이번 주말에 같이 보러 가자. 번호 좀 줄래?"
"네... 넷!"
핸드폰을 루미에게 내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 핸드폰을 받아든다.
루미는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이 번호를 하나하나 천천히 누르면서 입으로는 "번호 교환... 친구와 번호 교환…." 을 반복하고 있다. 좀 귀엽네.
"여... 여기요."
"고마워. 이따가 연락할게. 밥도 다 먹었으니까 일어날까?"
"네!"
*
화요일 저녁.
루미와 헤어진 후 수련을 위해 트레이닝 센터를 찾았다.
당장 내일부터 제대로 된 수업에 들어갈 텐데 내 수준 파악을 해야한다.
스마트 워치를 찍고 개인 프라이빗 룸에 들어갔다.
[1학년 A클래스 이호연. 입장 확인되었습니다]
원작 게임에서는 주인공한테 어떤 훈련을 시키냐에 따라 그쪽 능력치가 특화된다.
마법사면 마력. 검사면 체력과 힘. 암살자면 민첩 등. 정해진 능력치 위주로 올리면서 육성시킬 수 있었다.
가장 정석이고 쉬운 루트는 검사다.
이유는 주인공의 고유 권능과 관련이 있다.
고유 권능은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능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유 권능을 발현하지 못하지만, 이호연은 주인공인 만큼 꽤 괜찮은 고유 권능을 갖고 있다.
───――「 전투 감각 」───――
▶ 고유 권능
▶'전투'라고 판단되는 모든 행위에 보정을 받는다.
'전투'의 위험도가 높을수록 그 효과가 늘어난다.
───――───――───――───
'전투 감각'
전투 관련 고유 권능으로, 전투와 관련된 모든 행동에서 천부적인 전투 센스와 전투 감각을 발휘하는 재능이다.
전투에 관해서 모든 보정을 받으니, 전투 센스가 가장 필요한 근접 전투에 유리했다.
게다가 나중에 갈수록 인간 혹은 인간형 괴수와 싸워야 하는 일이 많은 만큼 대인 전에서 유리한 검사가 가장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법사를 선택한 이유는, 첫 번째는 [마나감응]이란 걸 특전으로 받아서 마나 운용에 큰 어드밴티지가 생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세계에 악역들이 얼마나 악질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 새끼들하고 가까이서 검을 섞으면서 싸운다? 그거야말로 답도 없는 거다. 게임처럼 리트라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멀리서 뻥뻥 마법으로 선빵이나 치는 게 최고다.
"마법 숙련도 테스트."
[마법 숙련도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내 수준이 게임으로 따지면 어느 정돈지 파악해야 앞으로 행동방침을 정 할 수 있다.
트레이닝 센터에서 제공되는 숙련도 테스트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DB로 내 장점과 단점, 현재 내 수준을 종합해서 판단해준다.
[1단계 테스트입니다. 마나를 얇고 넓게 분사해주십시오]
시스템 음성과 동시에, 사방에 마나로 이루어진 얇은 벽이 생성됐다.
저게 내 마나를 측정하는 모양이다.
'얇고 넓게 마나를 방사하라고?'
해본 적은 없지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양손을 들고 잔잔한 파도처럼 퍼져나가지는 마나를 상상했다.
웅- 웅-
손에서 푸른빛 마나가 방사된다. 파도를 상상하면서 쏘아낸 마나여서 그런지 얇은 마나 파장 아래로 훈련장의 바닥이 훤히 보였다.
[1단계 테스트 완료되었습니다]
1분 정도 마나를 쏘아냈을까? 완료되었다는 음성이 들렸다.
[2단계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정면으로 이어지는 사로 위에 표적이 나타난다.
[표적이 곧 활성화됩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표적을 없애 주십시오.]
[5]
"아니, 준비할 시간을 줘야 될 거 아니야."
내 푸념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무감정하게 카운트를 이어갔다.
[4]
[3]
[2]
[1]
'지금 떠오르는 마법 중에 가장 빠르게 표적을 없앨만한 마법이 뭐지?'
[표적을 활성화합니다. 표적의 개수는 10개입니다.]
더 생각할 틈이 없다. 어제 책에서 봤던 바람의 화살을 떠올린다.
머리 위로 떠 오르는 마력이 바람으로 치환되며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화살의 형태로 응집된다.
츠즈즈즈즈즛-!
화살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듯 바람을 일으킨다.
어깨 위에서 넘실거리던 바람 화살들이 표적들로 쏘아진다.
콰지직!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거세게 날아간 열 개의 화살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표적을 박살 낸 후, 마나로 흩어졌다.
"와우."
사로에 표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 재밌는데?"
*
"흐으으으으음..."
이호연과 헤어져 기숙사로 돌아온 루미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보며 일생일대의 고민중이었다.
'잘 들어갔냐고 문자를 보내도 될까?'
"역시 밥 먹고 번호교환까지 했으면 친구 맞겠지...? 아니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너무 빠른가?"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었던 루미는 바깥 활동보단 집안을 좋아하는 집순이였다. 나이와 다르게 성숙했던 가슴 탓에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소심한 성격과 합쳐져서 집순이가 되었다.
쌍둥이 언니인 루시는 항상 같이 다니면서 루미를 과보호했다. 그 덕에 이상한 사람들의 접근은 많이 줄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친구도 만들지 못한 채 아카데미에 입학해버렸다.
그런 우울한 나날들을 이겨내고! 멋지게 아카데미 데뷔를 하려고 했던 루미였지만... 처음 만들어진 조가 개판 나면서 다시 우울해지려던 그때, 이호연이 나타난 것이다!
"분명 주말에 영화를 보자고 했어. 역시 친구맞지? 으으으, 모르겠어. 검색이라도 해볼까?"
루미는 핸드폰을 켜고 초록 검색창에 '남자가 영화 보자고 해요.'라고 검색했다.
[별로 안 친한 남자가 영화 보자고 해요]
"오! 이거야!"
마침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Q. [남자가 영화 보자고 하는데 호감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요?]
A. [영화를 보자고 한 것을 보면 싫어하는 상대는 아닌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좀 더 많은 걸 알아가면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궁금한 걸 보면 질문자님도 그 사람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겠죠? 영화 보는 것도 좋은 기회이니 이 기회를 통해서 서로에게 더 호감이 생기는 계기가 되면 좋겠네요^^]
"호…. 호감?"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귄 적이 없는 루미가 연애를 해봤을 리가 없다. 그녀에겐 이 질문과 대답이 인생의 진리 같았다.
"맞아, 생각해보면 싫은 사람이랑 영화를 보러 가진 않을거야. 으으, 호연이가 나한테 마음이 있나?"
이호연. 사실 이성과 단 둘이 밥을 먹은 것도 처음이라 당황해서 제대로 얘기를 나누질 못했다. 중간에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도 부담스러워서 그러질 못했다.
"근데 그렇게 잘 생긴 애가 왜 나같은 애랑... 에잇, 문자나 보내보자."
[ 나 :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강아지가 배꼽인사 하는 이모티콘) ]
[ 이호연 : 응, 잘 들어갔지? ]
두근 두근.
별거아닌 답장이었지만, 루미는 친구와 하는 문자조차도 설렜다.
"으, 답장을 뭐라고 보내야 되지? 다시 검색해봐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