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3화. 문수린 (2)
나는 문수린이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낙월(落月).
"어서오세요-!"
실내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여자들이 꽤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다.
메뉴판에는 처음 보는 음료수들이 많았다.
그린쉬라즈티, 저지방지옥딸기우유, 랄프 로렌 라떼 ……
메뉴를 둘러보는 데 한 메뉴가 내 시선을 끈다.
[끌레르 로즈 라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메뉴인데?'
기억났다.
문수린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다. 원래 세계의 민트초코보다도 더욱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료수다.
"끌레르 로즈 라떼 하나 주세요."
"네엡!"
음료를 시키고, 문수린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가까운 곳에 앉으면 의심당할 테니 딱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앉았다.
다행히도 노트북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보니 그녀는 아직 카페를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를 노리면 된다.
[히로인 상태창을 켜시겠습니까?]
"흡!"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알림에 먹던 라떼를 뿜을 뻔했다.
뭐야, 히로인 상태창이란건 처음 들어보는데?
아무래도 히로인인 문수린과 관련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켜보기로 했다.
마음 속으로 히로인 상태창을 킨다고 생각하니,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20 ]
- [ 성욕 : 1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아, 일하기 싫어.
아무래도 이게 히로인 공략 시스템인가보다. 원작 게임에 이런 시스템은 없었다.
30분 정도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하는 척 하다가, 반 정도 남은 음료 잔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내 자리에서 카운터를 가려면 문수린의 자리를 꼭 지나가야만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수린의 자리 앞까지 간 뒤, 일부러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문수린에게 음료를 쏟았다!
발을 헛딛음과 동시에 크게 소리를 질러 내 존재를 알리는 것도 잊지않았다.
"으아앗ㅡ!"
다행히 앞에서 들린 비명소리를 들은 문수린은, 내가 발을 헛디뎌서 자신에게 끌레르 로즈 라떼가 쏟아지려는 상황을 보자마자 마력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커피를 막아냈다.
역시 이사장 손녀딸!
혹시나 반응하지못해 몸에 커피를 쏟아버리면 무릎이라도 꿇으려 했지만 역시나 재능충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안 다치셨어요?"
"하아, 예, 괜찮습..."
하던 일에 대한 집중이 깨져 굉장히 짜증 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그제서야 내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문수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하지. 난 주인공이고 넌 히로인이야.
내 얼굴은 남자인 내가 봐도 놀랄 정도로 잘 생겼다.
귀가 빨개진 걸 보니 자신이 내 얼굴을 보고 순간 말문이 막힌 걸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게임이랑 다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똑같이 취향에 맞나보다.
"어떡하지, 혹시 옷은 괜찮나요? 제가 배상해드릴게요."
"아, 아니. 괜찮아요 막았으니까."
"잠시만요. 바닥 닦을 걸레를 받아올게요."
"가만히 있어요."
문수린의 손끝에서 마력이 방출된다.
바닥에 쏟아져 있던 음료들이 둥둥 떠오르더니 작게 압축되더니, 증발해버렸다.
"와, 감사합니다."
"근데... 아카데미 신입생이신가 봐요?"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생도 얼굴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요. 모르는 얼굴은 신입생이죠."
얼굴을 다 외우고 있다니, 역시 학생회장인가.
"아, 선배님이셨군요. 혹시나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면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래요.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만나면 인사라도 나누죠. 저는 문수린 이라고 해요."
아무래도 자신이 학생회장에다가 이사장 손녀라는 걸 말할 생각은 없나 보다.
원래 권력자들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즐기는 편이다.
나중에 자신이 이사장 손녀라는 걸 내가 알았을 때 반응이 궁금하겠지.
내 놀라는 얼굴을 기대하고 있을 테니, 오늘부터 놀라는 연습이라도 해야겠다.
"전 이호연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서브 퀘스트도 클리어했고, 애초에 내 존재를 알려주는 게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문수린은 원작게임에서 '가장' 공략하기 쉬운 히로인이기때문이다.
*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났다.
할아버지라는 사람은 손녀에게 일을 맡기고 놀러 갔고, 아버지란 사람은 길드를 운영하느라 아카데미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거의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해야 했다.
이럴 때마다 나에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도와주기 위해 일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고맙다면서 미안해하던 어른들도 내가 혼자서도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자, 점점 나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많아졌다.
이제는 내가 인간인지 일하는 기계인지 헷갈릴 정도다.
거기에 무엇이든 완벽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성격 탓에 일을 대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섰다.
맘 같아선 모든 걸 때려치고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일을 하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집무실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항상 가던 카페로 향했다.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할 때마다 오는 카페.
뻥 뚫린 통창이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여기에서만 파는 음료가 있다.
"끌레르 로즈 라떼 한 잔 주세요."
카페의 창밖으로는 하하 호호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들 내 또래 같은데 왜 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할까.
"하아..."
익숙한 두통이 느껴진다. 얼마 전부터 노트북 앞에 앉기만 해도 두통이 느껴졌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일을 해야 한다는 걸 내 머리도 알고 있으니 거부반응을 보내는 게 아닐까?
두통을 참으며 아무리 처리해도 끝나지 않는 일들을 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테이블 바로 앞에서 이상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앗ㅡ!"
커피잔과 커피가 날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비명이 빨리 들린 탓에 마력방어막으로 몸이 젖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내 몸이 젖었다면 그렇게 만든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 참 다행이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안 다치셨어요?"
"하아, 예, 괜찮습..."
일의 집중을 깬 놈의 낯짝에다가 한마디 해주려고 고개를 든 순간, 숨이 막혔다.
목소리에 꿀이라도 덕지덕지 바른듯한 미성도 그렇지만, 정말... 너무 잘생겼다.
내가 사람의 얼굴만 보고 놀란 적이 있었나?
살면서 잘생긴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지만... 눈앞의 남자는 차원이 다른 잘생김이었다.
만약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세계를 만드는 데 사용한 시간의 1/10 정도는 이 남자를 만드는데 사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예술작품이었다.
'헉!'
사람을 앞에 두고 얼굴을 뻔히 바라보는 실례를 저지르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떡하지, 혹시 옷은 괜찮나요? 제가 배상해드릴게요."
다행히, 상대도 당황해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아, 아니. 괜찮아요. 막았으니까."
"잠시만요. 걸레를 받아올게요."
"가만히 있어요."
바닥에 떨어진 음료를 압축해서 고열로 증발시켰다.
"와, 감사합니다."
"근데... 아카데미 신입생이신가 봐요?"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생도 얼굴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요. 모르는 얼굴은 신입생이죠."
다른 사람이었다면 굳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겠지만, 눈앞의 남자와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아카데미의 신입생이라면 나를 모를 리가 없으니, 솔직히 반응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아, 선배님이셨군요. 혹시나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면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래요.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만나면 인사라도 나눠요. 저는 문수린이라고 해요."
"전 이호연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다음에 봬요!"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어딘가 급하게 달려갔다.
신입생인데 학생회장인 나를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왠지 모를 서운함과 섭섭함이 느껴졌다.
나름대로 아카데미 밖에서도 꽤 유명인이고 잡지 모델 일이나 인터뷰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인플루언서 활동을 더 늘려야 하나?
'아니 잠시만,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처리를 못 해서 쌓여있는 일이 얼만데 인플루언서 활동이라니?
아무래도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정신을 잠시 놓았나 보다. 다시 일이나 하자.
바닥에 쏟아진 음료수. 분명 끌레르 로즈 라떼 였다.
'그 사람도 끌레르 로즈 라떼를 좋아하는 건가...?'
안돼. 집중이 안돼!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어째서 눈앞에 방금 사라진 이호연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걸까?
분명 오늘 처음 본 사이고, 그와 나 사이에 어떠한 교류도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 남자 생각만 하면 내 볼이 뜨거워지는 거야?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이 빨라짐이 느껴졌다.
혹시 일을 너무 하다가 스트레스에 머리가 돌아버린 걸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
노트북 앞에 앉을 때마다 느껴지는 두통이 사라졌다.
유명한 의사도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두통의 치료는 '스트레스 자체를 없애거나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는 말밖에 못 하던 두통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호연이라고 했지 분명.'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네, 김 비서님. 이번 신입생 중 한 명을 조사해주셨으면 해서요. 네. 이름은 이호연이고..."
뚝
내가 왜 오는 처음 본 남자 뒷조사를 시켰을까?
"그냥 두통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야. 음."
문수린은 볼이 살짝 붉어진 채로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