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7 - 107.아아! 나의 스폰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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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그라노프는 어떡해서든 아이카에게 이기고 싶었다.
적어도 아이카만 잘된 꼴은 아나스타샤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건 한때 같은 그룹일 때 방향성의 차이로 헤어진 이후 계속 차곡차곡 쌓아온 일종의 고집이었다.
어제 아이카가 먼저 루벨트에게 말을 걸어 대련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분했다.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도 루벨트는 자신의 새 아이돌 인생을 펴게 만들어준 소중한 스폰서.
아이카와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더군다나 사장들한테까지 연락을 해서 말리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아나스타샤 또한 아이카처럼 불안해하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괜히 불안에 떨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아이카에게 앞질러지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아나스타샤는 생각했다.
'아이카보다 더 대담하게 가야 해!'
아이카가 한 대련 신청보다 더 대담한 것.
좀 더 루벨트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수단.
아나스타샤가 선택한 수단은 바로 상담이었다.
'아이카처럼 바보같이 치고받는 게 아니라 좀 더 긴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예정을 세운 아나스타샤는 아이카가 몬스터와 대치하고 있을 때를 이용해 루벨트에게 말을 건 것이다.
"상담하고 싶은 일?"
"네, 이런 건 루벨트 님이 잘 아실 거 같아서…."
약간 말을 흐리며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심각한 고민이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알았어. 나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럼 방과후에… 음, 어디서 할까?"
"…!"
순조롭게 루벨트의 동의를 얻어내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나스타샤는 눈을 빛냈다.
"아, 제가 아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해주세요!"
"그럼 수업이 끝나면 같이 가자."
"네! 고맙습니다, 루벨트 님!"
"뭘. 같은 생도끼리 도와야지."
"아아…!"
'역시 상냥하신 분이야!'
자신과 아이카의 싸움을 말릴 때는 순간 욱했었지만, 나중에 냉정히 생각해보면 루벨트의 행동에 잘못은 없었다.
객관적으로 옳은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 연예계에서는 신이나 다름없는 스폰서라는 지위가 아나스타샤의 마음에서 루벨트의 위상은 끝없이 올라갔었다.
방과후.
"그럼 가볼까, 그라노프."
"네, 루벨트 님!"
"뭐?"
루벨트가 나서서 아나스타샤에게 동행을 권유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카는 입을 쩍 벌리며 믿기지 않은 걸 본 듯한 경악한 얼굴을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이카의 그 얼굴이 너무나도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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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몬스터 퇴치 실습이 끝난 후에 시훈이나 다른 인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나스타샤가 고민이 있어서 상담하게 됐다는 얘기는 자연스럽게 털어놨다.
엘리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카구라와 유메도 같은 반 생도가 실력이 뛰어난 나에게 상담하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치사키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래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무래도 내가 여자 꼬시려고 받아들인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공략을 위해서니 그 생각이 맞긴 하지.
아나스타샤에게 말을 걸었을 때 바로 근처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카의 표정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유메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 시훈이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완전히 개그나 다름없는 경악한 표정을 보고 나도 모르게 뿜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카페는 그리 멀지도 않았기에 나는 리제를 먼저 리무진에 태우고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아나스타샤와 둘이서 걸어가며 카페로 향했다.
참고로.
"…."
아이카가 우리 뒤를 몰래 미행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만이 알았지만 딱히 아나스타샤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편이 두 명의 공략이 순조로울 거고 무엇보다… 재밌으니까.
"이제 곧 도착하겠네, 그라노프."
"네?! 네! 맞아요. 이제 카페에 곧 도착할 거예요!"
아나스타샤나는 걸어가는 도중 긴장해서 나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아마 말 걸기까지는 좋았는데, 가는 도중 무슨 말을 꺼낼지 정하진 않은 상태로 보였다.
하지만 도착할 때까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 아나스타샤도 생각했는지 황급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루, 루벨트 님!"
"왜?"
"괜찮으시다면 저도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저는 그편이 더 익숙하니까요!"
"아, 확실히 아이돌이니까 그편이 더 익숙하겠네. 알았어, 아나스타샤."
"네!"
방긋 웃으며 몰래 아나스타샤가 왼 주먹을 뒤로 숨기며 불끈 쥐는 게 보였다.
내가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게 한 게 상당히 기쁜 모양인데.
이런 미소가 난 좋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게 아닌 상대방이 내가 좋아서 마음에 들려고 하는 상황이 감미로운 우월감을 체감시켜주기 때문이다.
여태껏 쌓아온 지위, 명성, 능력이 지금 한창 인기인 아이돌도 친해지기 위해 머리를 굴리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내가 좋아했던 블블의 히로인을.
이런 건 언제 맛봐도 정말 기분 좋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시간 괜찮아? 스케줄 있지 않아?"
"아! 괜찮아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엔 헌터 활동도 해야 되니까 스케줄 조정은 다 끝내놨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아이돌은 그만두지 않는 거지?"
"네, 아이돌은 제… 본업이니까요. 끝까지 할 거예요. 아, 그렇다고 헌터가 싫다는 건 아니에요!"
"응, 그러겠지. 안 그러면 아카데미 다니지도 않을 테니까."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대단하네. 아이돌도 헌터도 둘 다 열심히 하고."
"아… 가, 감사합니다!"
"으득…!"
미리 강화해서 늘어난 청각에서 미행하고 있는 아이카가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한때 같은 그룹인 두 사람은 분해하는 버릇도 똑같았다.
카페에 들어가고 적당히 음료를 주문했다.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아이카는 언제 준비했는지 바바리코트랑 선글라스를 낀 채 아나스타샤의 뒷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상담을 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나스타샤가 나에게 상담하고 싶은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아이돌로서도 헌터로서도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다니고 또한 던전에 들어가면서 헌터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움이 가득한 건지 체감했다.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돌로서도 헌터로서도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는 거다.
그러니.
"루벨트 님. 루벨트 님처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트렌저를 거의 홀로 쓰러뜨릴 정도의 강자인 나에게 강함의 비결을 알고 싶다는 거였다.
겉으로 보면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
하지만 난 이게 오늘 상담하기 위해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나스타샤의 성적은 나쁘지 않으니까.
모든 블블 히로인을 모두 실시간으로 살필 순 없지만 적어도 같은 반인 아이카와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내 시선에 두고 있었다.
대련할 때도 몬스터 처치 실습할 때도 아나스타샤는 전혀 기죽거나 망설이던 모습은 없었다.
거기에다.
"내숭 떨고 있네… 저번 던전 갈 때도 신나게 몬스터한테 총 쐈으면서…."
강화한 청력을 통해 아나스타샤의 뒤에서 자그맣게 중얼거리고 있는 아이카의 목소리도 들어보면 명백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맞지만 나한테 얘기한 것처럼 마음이 급박한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걸 밝혀내거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추궁할 생각은 없다.
이런 거짓말 같은 이유도 나에겐 좋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우선 고민하듯 턱을 엄지로 쓸며 입을 열었다.
"강해지는 법이라… 이건 나도 섣불리 대답할 순 없어, 아나스타샤. 사람마다 적성에 맞는 게 있고 강해지는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난 여러 무기를 쓸 수 있어. 그중에는 물론 아나스타샤처럼 권총도 있으니까 조금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럼!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응. 같은 반 생도니까 서로 도와야지."
"아아! 감사해요, 루벨트 님!"
"도와줄 방법 말인데. 나도 아나스타샤의 전투 방법은 자세히 알아야 하니까… 그래. 다음에 던전에 갈 때 같은 파티를 짜보는 건 어떨까?"
"좋아요! 그럼 다음 던전 때…."
"아이카도 끼워주세요!"
"뭣?!"
아나스타샤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바바리코트와 선글라스를 벗은 상태의 아이카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 아이카!? 너, 언제부터…!"
당황하며 아이카를 바라보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아이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연히! 듣게 됐어! 그보다… 아나스타샤가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다니 다 진짜 처음 들었어~."
"윽…."
"사실은~ 아이카도 루벨트 님과 대련한 뒤 내 실력이 뒤처진 걸 절실~히 느꼈거든! 루벨트 님! 아이카도 다음 던전 때 같은 파티가 되고 싶어요! 루벨트 님도 아이카랑 같은 대검도 쓰니까 부디… 아나스타샤처럼 도움받고 싶어요! 안 될까요?"
"야! 아이카 왜 멋대로…!"
아이카가 자신의 깔아놓은 작전에 수저를 얹으려는 모습에 성을 내려는 아나스타샤.
물론 내 대답은.
"좋아. 그럼 아이카도 다음에 같은 파티를 하자."
동시에 두 사람을 공략할 수 있기에 아이카의 의견을 수락했다.
"야호!"
"뭣!? 루, 루벨트 님!"
"이것도 모처럼 기회니까. 게다가… 내가 추천한 두 사람하고 같은 파티가 되는 것도 기뻐서. 안 될까?"
"…윽! 아, 아니요. 괜찮… 아요."
"헤헷, 잘 부탁해, 아나스타샤~."
"으득!"
"아참, 아이카."
"네! 아이카에게 무슨 볼일이신가요, 루벨트 님!"
"같은 파티가 됐으니까 아나스타샤하고 좋은 포메이션 기대할게."
"…네?"
"둘이 같은 그룹이었잖아? 분명 호흡도 척척 맞겠지?"
"어. 그게…."
"사실 말하자면 난 둘이 싱어 아이돌 그룹 시절 때부터 좋아했었거든. 그래서 추천했었어."
아이카와 아나스타샤가 동시에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놀라 했다.
"네!?"
"저, 정말이요?"
"응. 아참. 도와준 대가라고 하면 좀 치사하겠지만… 다음에 둘이 같은 그룹이었을 때 노래 나한테 들려줄 수 있을까? 꼭 생으로 듣고 싶어서."
아나스타샤와 아이카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떻게든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괜찮지?"
"무, 물론이에요! 루벨트 님이 도와주는 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치! 아, 아이카!"
"다, 당연하지! 아이카는 한 번 부른 노래는 절~대로 잊지 않으니까!"
"고마워. 두 사람의 팬으로서… 정말 기뻐. 아, 더 마시고 싶거나 먹고 싶은 디저트 있어? 내가 쏠게."
"아뇨, 괘, 괜찮아요! 더 이상 루벨트 님의 시간을 낭비할 순 없으니까요!"
"아이카도 마침 우연~히 들른 거라 슬슬 가야 하거든요!"
"그래? 아쉽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쏠게."
"네! 상담받아주셔서 고마워요, 루벨트 님!"
"아이카도 고마워요!"
두 사람은 황급히 카페를 나갔다.
그 모습이 블블에서 만담을 나누던 두 사람을 생생히 보는 거 같아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웨이터가 내 것과 황급히 나가버린 아나스타샤가 시킨 음료를 가지고 왔다.
"아, 고맙습니다."
남아버린 아나스타샤가 시킨 음료까지 내가 맛있게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