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 35.입학식은 보람차게!
허리까지 내려간 기다란 백은발 뒤통수 부근에는 사범님이 어릴 적 선물해준 푸른 리본을 나비 모양으로 묶어서 달고 있다.
푸른 전기와도 같은 벽안에 장난기가 다분해 보이는 미소에는 승부를 좋아하는 호전적인 느낌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 다, 당신은 대체 뭡니까! 루벨트 님에게 하, 하, 한판 뜨자니! 그런 무, 무례하고 파렴치한…!"
"엘리 아가씨. 그런 뜻이 아닙니다."
"네?"
"…이런 뜻입니다."
속닥속닥
"아, 아아! 그런 뜻이군요! 어쨌든 무례해요!"
엘리가 나랑 하고 난 뒤에 발상이 좀 야해졌다.
그런 엘리도 무척 귀엽다.
"갑자기 루벨트한테 시비야? 고등학교 때도 그렇지만 이런 것도 인기 있네, 루벨트."
고등학교 때도 내 넘치는 인기에 시비를 걸어온 녀석들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훈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여차할 때는 자신이 대신 나서려고 하고 있다.
여태껏 쌓은 우정의 결과다.
"이, 입학 날부터 싸우면 안 돼!"
"루벨트 내가 대신 나설까? 수련의 성과를 보여주겠어."
유메는 최대한 일을 크게 벌이지 않기 위해 덴라이 치사키를 말리려고 하고 카구라는 덴라이 치사키를 노려보고 있다.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덴라이 치사키는 오히려 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오오~ 역시 인기 많네~. 상대할 사람이 많아서 난 좋은데… 그래도 첫 상대는 루벨트 도련님이 좋은데~."
"당신…!"
엘리가 화를 내며 더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제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덴라이 치사키 사저."
""사저?""
리제를 제외한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치사키를 번갈아 봤다.
"오, 예의 바르네? 부잣집 도련님이어서 건방질 줄 알았는데."
"지위에 맞는 교양 또한 배웠습니다, 덴라이 치사키 사저."
"그렇게 불면 기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 동갑인데 말도 놓고 으으~ 징그러."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치사키."
"저기… 루벨트 님? 이분은 대체 누구신가요? 사저라니…."
"내가 과외를 받고 있는 텐라이류 사범. 덴라이 사토루 사범님의 자녀이신 덴라이 치사키야. 나보다 먼저 사범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사저지."
"어머, 그랬어요?"
"뭐야, 그럼 아까 그 말도 대련하자 그런 거였네."
"그런 거야?"
"루벨트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네."
내 설명에 다들 긴장이 풀어졌다.
한편 덴라이 치사키는 카구라의 말에 손을 저었다.
"친분이 있긴~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인걸? 하지만…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지. 우리 아빠가 전통까지 깨가며 애지중지 키웠던 사제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말이야."
눈을 살짝 얇게 뜨며 호기심이 그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나… 가르치고 싶어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전통을 깬 건 돈의 힘이다.
사범님이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하는 건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안 서니까 대충 둘러댄 것 같다.
"응? 한 판 뜨자? 너도 좋지?"
"좋아, 나도 항상 사범님이 자랑하시던 치사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어."
"정말? 히히, 그럼… 뜨는 거지?"
"그래, 같은 사문끼리 대련해보자.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니. 실습시간에 하는 건 어때? 그때라면 기회는 많으니까."
"말이 잘 통하네. 좋아~ 그럼 실습시간에 보자. 실력 기대할게, 루벨트 도련님~."
대답에 만족했는지 싱긋 웃은 덴라이 치사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좀… 특이한 사람이네."
"나도 개성적이라 조금 놀랐어."
거짓말이다.
덴라이 치사키가 저런 성격인 건 이미 알고 있다.
"루벨트 님! 저 건방진 사저라는 사람한테! 루벨트 님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주세요! 응원할게요!"
"나, 나도!"
"힘내라, 루벨트! 흥! 저 여자에겐 팜플렛은 안 나눠줄 거다!"
카구라.
그런 말 할 거면 예비 손님을 한 명 놓쳤다는 아쉬운 표정은 짓지 마.
그런 반응이 재밌긴 하지만.
◈
입학 첫날 오전에는 이론 수업 위주로 진행됐다.
던전에 대한 기초설명.
몬스터를 대치했을 때의 전술 이론.
간단한 스킬이나 마법에 대한 설명 등.
나나 엘리 그리고 리제에게 있어선 이미 배운 것들의 복습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점심시간.
우리는 급식소로 가서 식사를 했다.
이 세계에서 헌터란 그야말로 귀중하고 귀중한 인류 자원의 희망.
그리고 원작과 다르게 돈 투자도 빵빵하게 됐기에 복지는 매우 훌륭하다.
"우와, 이게 뭐냐. 킹크랩하고 로스트비프가 공짜야? 원하는 거 누르기만 하면 돼?"
"그래."
"프로메테우스 아카데미 진짜 최고다."
급식소에서 나눠주는 점심은 모두 공짜.
메뉴도 다양하고 요리하는 자들도 모두 체력도 탄탄한 은퇴헌터였던 일류 쉐프다.
원작 게임에서는 어느 정도 돈을 내야 했지만 지금은 엘드라가 지원하고 있어서 다 공짜다.
아카데미에서의 내 영향력을 펼치려는 이유도 있지만.
이제부터 열심히 아카데미에서 공략 말고도 최종보스를 위한 노력도 해야 하는데 밥이 맛없는 건 참을 수 없다.
사람은 밥심이야.
"우오오오! 밥이다! 밥!"
"아카데미 최고! 와아!"
"칼로리를 생각하면…."
"이거 오늘만 이러는 거 아니지?"
아카데미의 호화로운 식사에 다른 학생들이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투자한 보람이 느껴지는 목소리들이다.
식권을 뽑고 우리는 음식을 받은 우리는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
"나도 실례할게~."
서슴없이 덴라이 치사키가 끼어들었다.
"또 당신인가요?"
"무슨 일이지?"
"응? 같이 밥 먹으려는 거지~ 나도 뭐? 사제인 루벨트 도련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장난스럽고 능글맞게 말하는 덴라이 치사키.
내 사랑하는 약혼자 엘리는 첫인상 때문에 치사키를 그리 좋은 시선을 보내진 않았다.
"그러실 거면 처음 대화할 때 좀 더 교양있게 할 순 없나요? 시정잡배처럼 시비를 거는 말투가 아니라요."
"오오~ 루벨트 도련님 약혼자께서 화나셨네? 미안하다니까~ 그치만 실력이 궁금한 걸 어떡해."
"궁금하다고 해도 조금 적대적으로 들렸는데."
카구라의 지적에 치사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이해해줘~ 우리 검술은 일인전승이 기본인데 아빠는 과외해야 한다고 외출 잦아지고~ 나도 실력 궁금하다고 말해도 절대 만나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아놔서 진짜 궁금했어."
그건 사범님의 팔불출 때문에 그렇다.
"게다가… 저번에 뇌명주라고 엄청 좋은 술을 가져왔으면서 술 좋아하는 아빠가. 루벨트 님과 첫 잔을 나눠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 모금도 안 줬단 말이야! 게다가 뇌명주 마셨다고 말한 날에는 다 마셔버리고! 나도 마시고 싶었는데!"
시비조로 말한 이유가 술 때문이었네.
"그렇게 마시고 싶다면 한 병 더 마련할 수 있어. 이번에는 사범님과 부녀끼리 사이좋게 마시지 그래."
"어! 정말?"
"내가 사범님과 마신 술 때문에 사범님의 가정의 불화가 일어나는 건 싫으니까. 가뜩이나 사범님의 딸 사랑은 나도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절히 알고 있어."
"와아~ 우리 사제 알고 보니 엄청 성격도 좋고 통도 크고 외모도 응! 남다르네~! 사제 최고최고!"
조금 시비를 걸던 기색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치사키는 엄지를 세우며 나를 추켜세웠다.
비꼬는 투로 말했던 루벨트 도련님이란 호칭도 사제로 바뀌었다.
뇌물이 잘 먹히는 건 사범님을 똑 닮았네.
"뭐… 뇌명주는 잘 받긴 해도 대련을 당연히 할거지?"
"물론."
"크으! 아빠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해! 응응!"
"대체 이 사람 뭐예요?"
"요란한 사람이네."
바로 태도가 바뀐 치사키를 엘리와 시훈이가 질색하며 바라봤다.
◈
점심식사 후.
오후 수업에는 신입생만이 아닌 생도 모두가 다시 강당으로 모였다.
"지금부터 헤파이를 지급한다! 한 사람씩 나와서 받아라!"
대부분의 생도들이 나란히 줄을 섰다.
이번 연도부터 도입된 헌터계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도구 헤파이.
아카데미에서는 이번 연도부터 도입하지만 헌터 업계에서는 한 달 전부터 도입이 시작됐고 그 편리성과 안전성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수준이 되었다.
가장 주목받는 건 무기를 마음대로 꺼내거나 교체해서 손이 편해지는 것과 피부에 달라붙는 마력 배리어 덕분에 패션에 자유가 대폭 넓어진 점이다.
뭐 실용성 중시하는 헌터라면 마나 배리어에 더 장갑을 뒤덮어 안전을 중시하지만.
평소에 갑갑한 장갑을 내던지고 자신만의 패션을 뽐내거나 속도 중시인 헌터들에게는 그야말로 호재라고 할 수 있겠지.
헤파이의 소문을 접하지 않은 신입생들도 점심시간 전에 헤파이에 대한 안내를 받았기에 모두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
물론 사전에 받은 나나 리제, 시훈이와 유메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루벨트, 우리도 서야 하지 않아?"
"이미 있는데 뭘 서. 이미 교사진에겐 얘기해놨으니까 걱정 마."
"아니, 대체 언제?"
"입학하기 전 엘드라의 이름으로 우리 이름 적어서 사전지급했다고 통보했지. 그래야 아카데미 측에서도 쓸데없이 더 헤파이를 들여올 필요도 없으니까."
"으음~ 왠지 우리만 새치기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
"유메,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전에 받았다고 하여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럴까?"
모든 생도들이 헤파이를 받는 걸 기다리는 동안 몰래 리제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리제."
"네, 도련님."
"오늘 아카데미 끝나면 엘리하고 카구라, 그리고 유메를 데리고 카페에 가서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해봐."
"알겠습니다. …도련님을 위한 포석도 깔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역시 리제는 사랑하는 최고의 메이드다.
내가 추가로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척척 알아서 해준다니까.
그리고 지급이 다 끝난 후.
"그럼 지금부터! 헤파이의 연습시간을 가진다! 각자 1시간 동안 자유롭게 헤파이의 성능을 확인해봐라!"
"사제~! 빨리 떠보자~!"
교사의 안내가 끝나자마자 치사키가 이쪽으로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