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한방에 임신할 수 있도록
"강아지 데리고 비 오는 날 거리를 헤매는데
비를 피할 내집 하나 없다는게 너무 구질구질 했어요.….
실은 처음부터 그랬어요. 무혁 씨를 오래전부터,
아마도 무혁씨한테 차였던 7년 전부터 줄 곧 계속 좋아하면서도 눈도 마주 칠 수가 없었어요.
제 삶이 너무 초라하고 구질구질해서.
어차피 안 될 사람 이니까 구차하게 매달려도 소용 없다는거 아니까."
"가난은 구질구질 한게 아니야. 구질구질 한 건 사랑없는 내 삶 이었지.”
무혁의 말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나 좀 구제 해 줄래?
나 더 이상 구질구질하지 않게 네가 내 삶을 채워줘. "
세영은 무혁을 꼭 안았다.
"사랑 해요. 사랑 해요 .. 평생 무혁씨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
세영은 초라하던 자신의 모습이 더는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무혁이 곁에 있는데. 그녀 만 바라 보는 차무혁이 사랑을 갈구하는데.
"사랑합니다. "
발인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결국, 쓸쓸하게 땅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다시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한다.
기운 내라며 둘을 위로 하듯 하늘에선 첫눈이 내렸다.
깁스를 푼 정경열 부소장이 3층으로 내려왔다.
유난히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근질 거리는 입술을 달싹 거리던 정경열 부소장은 세영을 불렀다.
"세영 씨, 그 얘기 들었어? "
"네? "
책상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던 세영은 경열의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쳐다 보았다.
언제 나타난 건지 무혁도 경열의 뒤에 서 있었다.
"차 소장, 결혼한다는데. "
"네? "
세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장례식장에서의 일 이후로 회사 사람들이 모두 무혁과 세영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무혁의 지위를 생각해 굳이 둘 사이를 캐묻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고 이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장이 된 무혁이
정경열 부소장에게 먼저 알리기로했는데 갑자기이게 무슨 질문인지 어안이 벙벙 해졌다.
"차 소장이 결혼한다는데 세영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
세영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였다.
무혁이 결혼 할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는 건지
"차 소장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세영 씨를두고 결혼을 한다니. 세영씨, 빨리 화좀 내. "
"소장님 정말 결혼하세요? 누구랑요? "
한술 더 떠 김우식 실장이 물었다.
무혁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싸늘하게 김우식 실장을 노려 보았다.
그제야 3 층에 웃음 소리가 터졌다.
"와! 진짜 미치겠다. 두분 완전 천생연분이시네.”
"세영씨는 장난을 못 알아 듣고 소장님은 장난에 상대도 안 해주고. 이렇게 보니 두 분 정말 최고의 궁합입니다. "
잠자코 서 있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그게 웃깁니까? "
무혁의 싸늘한 말투에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이 일순간 입을 꾹 다 물었다.
"난 오늘 세영 씨 본가에 마지막 테스트가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세영씨,가죠. "
무혁의 말에 순간적으로 세영이 꺄르르 웃음을 터 뜨리고 말았다.
오늘은 세영의 부모님께 인사 드리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번 섹스도 테스트였냐며 묻던 그의 장난이 떠올라 세영은 연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둘만 아는 농담에 둘만 웃는 커플을 보자 회사 사람들이 닭살이라며 유난을 떨기시 작했다.
무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경열에게 인사를하고는 세영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때 그거, 그거 테스트 정말 아니 었어요. "
"아쉽네. "
무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네? "
"일일 테스트 하는 줄 알았더니. "
세영은 그의 장난기 섞인 말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재 개그같은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세영이었지만,
무혁의 개그만큼은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일일 테스트인데 왜 하루에 세번씩 하려고 하세요? "
"네번 하려는 거 간신히 참는건데. "
세영은 미간을 잔뜩 찡 그렸다.
하라고하면 당연히 하겠다며 달려들기세였다.
"지나치게 잦은 테스트는 학생한테 과도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거 몰라요? "
"테스트를 많이해야 실전에 강해지지. "
"실전 이요? "
알아 듣지 못한 세영이 눈을 깜빡이자 그가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아이 낳을 때, 한 방에 임신 할 수 있도록. "
세영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결혼하면 정말 언젠간 그와 아이를 낳 게 될 텐데. 아직도 이런 말은 여전히 부끄럽다.
"아, 테스트 안하면 자신 없으신가 보죠? "
세영이 무혁을 도발하자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밤에 봅시다, 한세영 씨. "
말장난 으론이긴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긴 것 같지가 않다.
오늘 밤 잠잘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서 오세요! 어, 세영 이구나? 우리 딸, 왔어?"
경쾌한 풍경 소리와 함께 무혁과 세영이 떡집으로 들어섰다.
임대료 낼 돈도 없어보기 좋게 망했던 떡집이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세영의 모친, 박효진 여사가 세영을 부둥켜 안았다.
한참 끌어 안고 나서야 멋쩍은 듯 웃으며 무혁의 손을 잡았다.
"우리 차 서방. 어서 앉아."
공무원 시험 준비를 그만 둔 세영의 동생 세호가 한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길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가하게 게임이나하는 줄 알았던 동생이 사업 구상을했던 모양이었다.
세영이 보태 주었던 학원비를 환불 받아 일을 꾸미고 있던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세호는 세영에게 뒤늦게 허락없이 학원비를 환불받은 걸 실토하며 사과했지만,
인터넷으로 판로를 뚫어 엄마가 만든 떡을 팔고있는 동생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SNS를 통해 알음 알음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던 떡이 이젠 제법 유명 해졌고
겨울을 지나 봄이되고서는 방치 해 두었던 가게를 리모델링 해 떡집에서 '떡 카페'로 거듭났다.
물론, 가게를 리모델링하는 건 무혁이 업체를 연결해 모두 도와 주었다.
"어, 우리 차 서방 왔어?"앞치마를 두른 아버지도 무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실 하긴하지만, 돈을 벌 방법을 몰라 매번 고배를들이 켜던 부모님은 다행히도 세호 덕분에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이번엔 세호가 판매 전략을 맡았고 부모님은 떡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기로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세호는 믿음직 스러웠다.
세영은 이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매형, 여기 아메리카노에 마카롱 크림떡 드셔보세요.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제품이에요."
세호는 손수 떡과 커피를 서빙했다.
무혁은 청첩장을 꺼내 부모님께 가장 먼저 내밀었다.
"저희 청첩장 나왔습니다."
"제일 먼저 보여 드리는 거예요."
청첩장을 받아 든 부모님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렇그렁 차 올랐다.
무혁은 작은 반지 케이스를 두 분께 내밀었다.
"그동안 세영이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뭔가? "
"작은 선물입니다. "
무혁이 건넨 반지 선물에 기어코 박효진 여사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이 빚더미에 올랐을때 엄마는 결혼 반지 마저도 팔아야했다.
언젠가 무혁에게 세영의 집안 이야기를 했던걸 떠올린 그가 부모님께 결혼반지를 선물 한 것이었다.
"고맙네. 고마워. 내가 무슨 복이있어서 우리 세영이 같은 딸이 나 한테 태어 났나 했는데 자네까지.…"
박효진 여사의 말에 세호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쳤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비록 돈 버는 일엔 융통성 없는 가족들이긴했지만,
그들은 세 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해했다.
"떡은 조금만 먹고 얼른 같이퇴근 하세.”
"천천히 마무리 하십시오.”
"오늘 저녁은 소갈비 먹자고."
부모님들을 활짝 웃으며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영은 곁에 앉은 무혁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