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사랑해
세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했던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내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저 사람…. 조금 더 살았을 수도 있었겠죠."
자책하는듯한 이신애 여사의 모습은 지난 밤의 득의양양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조금 제멋대로라서. 아직 난 내 남편과 무혁이가 날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 했어요 남편은 언제나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무혁이는 줄곧 아니었나 봐요."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무혁의 상처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가여운 사람.
'세영 씨는 그렇게 쉽게 개를 버립니까?' '나도 버리 려고요?'
언젠가 무혁이 했던 말을 이제야 헤아릴 수 있었다.
언제나 버림 받았던 사람이었다.
받아 준 적도없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고 또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자신을 꽁꽁 숨겨 왔던 것이다.
"이제 정말로 떠나 려고요. 내가 남는다고 무혁이가 기뻐할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앙금이 남은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 줘야 무혁이는 편할 거예요.
그리고 떠나기 전에 세영 씨 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는해야 할 거 같아서 왔어요."
세영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엄마 한테 버림 받고 아파했을
무혁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저 가슴이 아팠다.
"내가 나이만 먹었지 아직도 참 바보 같아요. 내마음만 생각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 사람 죽고나니 이제야 정신이 드네요.
무슨 염치로 내가 찾아왔나. 미안 해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그대로라는 말이 이렇게 부끄러운 말인 줄 몰랐네요."
이신애 여사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모진 사람 이었지만, 사과는 진심이었다.
연인을 잃은 나약한 여인이되어 눈물을 흘리는 이신애 여사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그리 자라지 않는 모양이다.
내 사랑이 아프 듯, 그들의 사랑도 아팠던게지.
이제야 아들의 상처를 깨달은 신애는 더 이상 무혁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제가 철없이 사랑과 이별을 반복 할 때마다 아들은 외롭게 훌쩍 어른이되어 버렸다.
혼자 자라 버린 아들에게 감히 어른 행세를 할 수 없겠지.
"무혁이 잘 지켜주세요. 이런 부탁 할 자격도없는 엄마지만."
사과를 남긴 이신애 여사는 그렇게 돌아 섰다. 세영은 무혁이보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액을 확인한 세영은 간호사를 불렀다.
당장 달려가 외롭게 조문객을 맞이 하고있을 차무혁을 안아주고 싶었다.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세영은 대기실에 비치 된 옷으로 갈아 입고 조문객을 맞이 했다.
무혁이 말릴 새도없이 그녀는 그의 곁을 단단히 버티고 서서 묵묵히 장례식장을 지켰다.
발인을 앞둔 새벽이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둘만 남았다.
상주석에 나란히 앉아 세영은 무혁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무혁은 그녀의 머리 칼을 쓰다듬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
"아플 때 이렇게 고생 시켜서 미안해요. "
"서로 힘들때 같이 있어야 가족이죠
아프다고 더 힘든 사람 혼자두고 먼저 집에 돌아가 쉬는 건 가족이 아니 잖아요.
우리집엔 우리가 같이 돌아가야죠."
"나 세영 씨가 생각하는 효자가 아니에요.
"무혁의 말에 세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차무혁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아무래도 처음 인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 했어요.
폭풍 같은 사랑 이었죠. 어린 나로서는 그런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지금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이 가요.
잠시 세영 씨와 연락이 안되었던 순간, 미쳐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
"무혁 씨… "
"어머니는 다른 남자에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아버지는 그때마다 매번 어머니를 받아줬고 제 의견은 상관 없었죠.
난 항상 어머니와 이유도없이 이별 해야했고 용서하지 않아도 어머니를 받아 들여야만 했어요. "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을 단한 번 겪는 것만으로도 충격은 이루 말하지 못할테다.
하지만 어렸던 무혁은 그 일을 수도없이 반복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어머니조차 믿을 수 없는데 세상 그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어릴 땐 아버지 역시 원망스러웠죠.
한 번의 이별로 족한데 아버지가 계속 받아 주니 이별 역시 계속 반복 되었으니까요. "
세영은 아무런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무책임하게 떠난 아내를 원망하면서도
그녀를 받아 줄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성인이되어서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 했어요.
어머니처럼 무책임하게 날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도 날 버리지 않았거든요.
물론, 혹시라도 어머니가 돌아올까봐 날 버리지 못했을 거라는 의심도 있었지만요. "
"아닐 거예요…. 아버님은.… 무혁 씨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았어요.… "
"그래서 나도 아들로서 최소한의 형식적인 효도를하고 싶었어요.
어머니 때문에 날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빛 같았던 양육 방식이
가끔은 짐짝처럼 무거웠거든요. 날 사랑해서 어머니를 받아주는 건지.
어머니를 사랑해서 날 키우는 건지. 장성한 날두고 이번에도 어머니를 받아 준
아버지를 보니 후자 였다는 걸 이제 깨달았지만요. 난 항상 그게 무거웠어요.
어린 내게 어머니가 필요하니까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거라고 생각 했죠. "
가슴이 저릿했다. 그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저, 아버지에게 마지막 효도를 다 하고픈 아들의 효심 인 줄 알았다.
"그래서 세영씨 한테 너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하자고 얘기했습니다. "
세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세영은 부모님의 일 때문에 그날 너무 마음이 무거워 과음했고 무혁과 실수를 저질렀다.
두 사람의 시작은 제법 많이 엇갈려 있었다.
"어차피 사람을 믿지 않았어요. 내가 사랑 같은걸 할 수 있다는 생각 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날 한때 좋아했던 세영씨 한테 쉽게 결혼하자고 말했습니다.
7년 동안 한회사에 머문사람이니 내 어머니처럼 쉽게 집을 나갈 것 같지 않았어요.
그리 고 세영 씨는 돈이 필요했고 난 돈이 있으니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혁씨.."
그런 마음인 줄은 몰랐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봐 닫아왔던 마음.
세영의 가난이 족쇄가 되어 그의 곁에 머문다고해도 상관 없을만큼 상처받은 무혁의 마음.
아팠다.
그의 그런 고백이 상처가 되지 못할 정도로 무혁의 상처받은 마음만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제 아이는 필요 없어요."
"그렇 겠네요.….”
숨이 턱 막혔다. 아이가 필요없는 사람에게 이제 해줄 수있는 건….
"그런데 당신은 필요해. "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랑이 필요해. "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언가 채울 수 없었던 마음의 틈새가 이제야 가득 메워지는 느낌이었다.
"한세영이 필요하다.”
"무혁 씨…"
세영의 눈동자에 무혁이 가득 드리웠다.
"사랑해, 세영아."
"사랑 해요 .."
무혁은 세영을 와락 끌어 안았다.
그의 품이 따뜻했다.
평생 버림받은 기억만 남아 외롭고 고독하던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날 떠나지 말아요. 내 곁에 평생있어 줘요."
"그럴 게요. 평생"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세영은 무혁의 몸을 살짝 밀어 냈다.
무혁이 그녀에 고백했듯. 이제 세영도 그에게 말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