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네가 있어야 할 곳.
[-부고-
별세 차 진명 (차진명 건축사 사무소) 한국 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특실 1호 발인 일 ..]
세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신애 여사의 비수 같은 말이 귓가를 맴돌며 가슴을 후벼 파 무혁의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예 근거없는 말이라면 차라리 무시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몸 누울 방 하나 없는 제 신세를 보니 확인 사살을 당한 것 같아 한없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전화를 피했는지도 모른다. 무혁의 아버지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있는 동안,
그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할망정. 하지만 더는 지체 할 수 없었다.
세영은 천근 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약을 잔뜩 주워 먹고 나왔지만, 몸은 사시 나무 떨리듯 떨렸다.
병원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영 씨, 왔어요?"
"어, 세영 씨도 왔네."
돌아 보니 최성수 대리와 회사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급히 장례식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세영의 잠긴 목소리와 퉁퉁 부은 얼굴을보고 최성수 대리가 걱정스럽다는듯 다가왔다.
주말 새 핼쑥해진 세영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픈데 어떻게 왔어요. 오늘은 집에서 쉬고 발인 전에만 잠깐 들르지."
세영은 성수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몸을 돌려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슬픈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 왔지만,
막상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보니 이신애 여사에게 문전 박대를 당하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무혁의 얼굴을 봐야만했다. 효심이 깊은 무혁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했던 그의 희망이 산산이 조각난 것도 사과하고 싶었다.
차라리 무혁의 제안을 바로 받아 들였다면 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그의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텐데.
아이. 그러고 보니 이제 더 이상 무혁에게 아이는 필요 없겠지.
바보처럼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화목한 가정을 이룬 모습을 보여 드리고싶어 세영에게 결혼을 제안했던 무혁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은 돌아가셨고 이제 무혁의 제안은 ..
상 주석에 홀로 서서 쏠쓸하게 조문객을 맞이하는 무혁의 모습이 보였다.
주말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얼마나 고생을했던건지.
한숨도 자지 못한 무혁의 얼굴이 파리해 보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여전히 단단하게 서 있었지만, 그의 어깨가 어딘지 쓸쓸 해 보였다.
회사 사람들이 세영을 지나쳐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뒤늦게 세영을 바라본 무혁이
갑자기 그녀에게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차 이사."
"얼마나 상심이."
회사 사람들의 인사도 들리지 않는듯 그는 사람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세영을 와락 끌어 안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영은 커다란 무혁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원래 주말에 아버님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너무 아파서…. 핑계 밖에 대지 못하고 .. 죄송 해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아버님께 마지막 효도 이뤄 드리지 못해 죄송 해요.
"왜 왔어."
무혁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오지도 말라는 뜻인 걸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올려다 보자
무혁이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내며 충혈된 눈을 내리 떴다.
"목소리가 이게 뭐야. 얼굴은 왜 이렇게 창백하고, 어디 있던거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지 않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우리집인데 미안해. 내가 미안해."
회사 사람들은 커 다래진 눈들을 깜빡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못들은 척 안으로 들어 갔다.
세영은 눈물을 훔치며 그를 안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버님 께 효도하는 모습도 못 보여 드리고.”
"얘기는 나중에하고 일단 들어가서 쉬어. 너 이러다가 쓰러지 겠어. "
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가족도 없는 건지.
세영을 그렇게나 나무 라던 이신애 여사는 어디로 간 건지.
상 주석에 홀로 쓸쓸하게 서 있던 그가 가슴 아팠다
."저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 ·? "
"안 돼. 이렇게 아픈 몸으로. 산 사람이 우선이야. "
"무혁 씨 한테 아버님은 특별 했잖아요…. "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나 한테 특별한 건 한세영 너야. "
세영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무혁이 이렇게 생각 해주는 줄도 모르고 홀로 떠나야하는 건 아닌지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아버님이 사경을 헤매는 줄도 모르고 '우리 집'을 떠나 몸 누울 공간이 없다며 슬픔에 잠겼다.
이젠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킬 게요.
그래도 되나요? 당신곁에 남아도 되나요?
"저도 빈소 지킬래요. "
"돌아가래도. "
"이제 제가 필요 없나요. ·? "
세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가 필요 없을테니까. 이제 아버님 께 보여 드릴 가정도 필요 없어진 걸까.
"그런 거 아니야. 너.이 아픈 몸으로. "
무혁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차피 지금 세영을 돌려 보내면 발인 때까지 해명 할 시간이 없을 테고
그녀가 무혁의 곁을 영영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응급실 다녀와. "
"네? "
"아픈 몸으로 여기있다가 큰 병 나서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응급실부터 다녀와. "
"그럼 발인 때까지 같이 있어도 돼요? "
"그래. "
"헌화부터하고 다녀 올게요. "
무혁은 세영의 얼굴을 다시 한번 가슴으로 끌어 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들렸다.
고마워요, 무혁 씨.
미안 해요.
좋아해요. 사랑해요.
회사 사람들이 차례로 헌화와 재배를 마치고 세영이 영정사진 앞에섰다.
꽃을 올리며 세영은 잠시 아버님을 위해 묵념했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 뵙기로 해놓고 약속 지키지못해 죄송해요.
무혁씨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해요. 화목 한 가정 이루는 모습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 해요.
눈물을 훔치며 세영은 절을 올렸다.
"고생 많았어요. 아버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
"고마워. "
"금방 다녀 올게요. "
세영은 담담하게 서있는 무혁과 인사를하고 약속했던대로 응급실로 향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이신애 여사는 장례식장 입구를 서성이며 눈물을 훔쳤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해도 감정을 내색하지 않던 무혁 이기에 아들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다.
언제 아들의 마음을 생각했다고. 이제 와서 무혁의 주변을 서성이는 건 위선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신애 여사에게 중요한건 항상 자신의 감정이었을뿐.
남겨진 사람의 마음은 안중에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난 지금, 마음은 아팠지만, 그
때로 돌아 간다고해서 다른 행동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으니. 그렇다고 무혁에게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 배로 낳은 사랑하는 자식. 비록 신애에겐 자신의 감정이 영순위 였지만, 아들을 사랑했다.
그녀가 할 수있는 마지막 용서를 구하기로했다.
늦었지만. 진심을 담아. 아들에게 준 상처를 조금 이나마 어루 만지고 싶었다.
응급실에선 제 발로 걸어온 감기 환자를 반겨주진 않았지만,
세영은 발인까지 무혁의 곁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버텼다.
링거를 맞으며 지혜에게 연락했다.
며칠 만 더 강아지를 돌보아달라고. 미안 하다며 전화를거니 그녀는
장례식장에 당장 오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세영을 위로 해주었다.
그래도 주사를 맞고 있으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진통제와 해열제 덕분에 한기도 사라지고 쑤시던 몸도 가뿐해졌다.
"한세영씨?"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세영이 놀라 몸을 일으키자 이신애 여사가 한풀 풀이 죽은 얼굴로 그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겁 먹지 말아요. 사과하려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