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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사랑하고있었어 (36/40)

36화.사랑하고있었어

"한세영 씨는, 어디 갔습니까?"

3박 4일의 출장에서 돌아온 무혁이 다짜고짜 세영부터 찾자 사람들이 힐긋 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요새 이사님이 부쩍 세영씨를 찾으시네요."

김우식 실장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무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영 씨 아파서 오늘 출근 못한다고 전화 왔어요. 얼마나 아픈 건지 목소리까지 잠겨서 말도 잘 못 하더라고요."

옆 자리에 있던 성수가 대신 대답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파서 혼자 끙끙 앓느라 전화를받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걱정이 밀려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면 주말 내내 쉬고도 월요일까지 아파 출근조차 못 할 지경 인 건지. 

아프다고 얘기도 못 할 사이 였던가. 

아마 세영은 그녀가 아프다고하면 그가 출장을 팽개치고 서울로 단숨에 올라올 걸 알고 전화를 피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잠길 정도 였다면 그녀가 거짓 말을해도 알아 챘을테니까. 

무혁은 정경열 부소장에게 인사도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소를 빠져 나갔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도대체 아직 뭐가 남은 걸까. 

세영이 무혁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눈치를 본다는 것도.하지만 아픈 것조차 말 못할 사이 였던가. 

아픈 세영이 걱정되어 미치겠는 한편으로 화가 치밀었다. 이제 함께 사는 사이인데. 

아픈 몸을 의지 할 수없는 사람처럼 선을 긋는 세영이 야속했다. 

어떻게 운전 했는지도 모르게 집에 도착했다. 

차고에서 나온 무혁은 정원을 가로 질러 들어가 다급하게 현관 문을 박차고 들어 섰다. 

세영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쯤이면 먼저 달려 들었어야 할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세영아!"세영의 이름을 부르며 거실을 지나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이신애 여사의 모습에 무혁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무혁 아, 왔니?" 10여 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는 마치 지난 세월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인사했다. 

무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인사없이 사라 지던 어머니는 언제나 뻔뻔하게 돌아 왔고 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귀가에 감사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이 집은 무혁의 가정이었고 어머니가 돌아올 곳은 없었다.

이 가정을 지켜야 할 여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한세영이었다. 

사랑. 그래. 사랑이었다. 

무혁은 이제야 깨달았다. 한세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여긴 어떻게 들어 왔습니까." 

"어떻게 오긴. 내가 못올 데라도 왔니? 너희 아버지 한테 열쇠 받아왔다."

무혁은 다시 한번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10년 만에 나타나서는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에게까지 다녀왔다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정신을 정녕 또 한 번 휘둘렀다고! 

"네. 못 올데 오셨네요." 

"얘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차가울까."

무혁은 헛웃음을 쳤다. 

그래. 아마도 닮은 걸 찾는다면 떠난 아내를 매번 받아주는 아버지 보단 

가족에게 인사도없이 사라지는 당신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끔찍했다. 그래서 세영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끔찍하게도 차가운 어머니를 닮은 제 모습과 상처 투성이인 과거를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과거를 숨기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영에게 만큼은 가여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세영이는 어딨습니까." 

"누구? 아, 그 여자애? 너는 아무리 너희 아버지가 아프기로서니 여자를 그렇게 함부로 집에 들이니?" 

"함부로?"

무혁이 단어를 짓씹십으며 되물었다. 살기 어린 아들의 눈빛에 이신애 여사는 멈칫했다. 

마지막 만났던게 아들이 고등학생때였다. 

장성한 무혁은 어린 시절의 말없던 아이가 아니었다. 

"오, 오해하지 마. 그래, 우리가 오랜만에 보긴했지만, 너희 아버지랑은 종종 연락하며 지냈어."

아버지에게는 듣지못했던 이야기였다. 

무혁이 성인이되며 뉴욕으로 떠났었고 그간 부모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을두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온 거 다 너희 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 아니겠어? 

세상에 널린게 집인데 굳이 여기로 돌아온거 보면 말이야. 항상 여기있는 너랑 너희 아버지 알고있어. 

고마워. 너한테 미안한거 많지만 남녀 사이라는게 그렇다. 너희 아버지 아픈 거 보니 

나도 마음이 더 모질지는 못해. 너희 아버지 돌아 가실 때까지만 여기있을거야."

모친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정녕 무혁이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하고 

많은 집 중에 다시이 집을 찾아 돌아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언젠간 돌아올 어머니를 기다리기 위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었다. 세 가족이 화목했던 시절이 그립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함께 있던 시간 보단 둘만 남겨진 부자의 고독한 시절이 훨씬 길었다. 그걸 기다렸다고? 

내가 기다렸던건 평온한 삶이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갈대 같은 당신이 아니라 계절이 변해도 언제나 곁에있는 따스한 햇별을 기다렸을 뿐이다. 

무혁을 짝사랑하면서도 마음을 티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한세영. 

그 조심스럽고 한결같은 여자가 제 가정에 들어 오길 바 랐을 뿐이지 

당신이 이곳을 침범하길 감히 단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아버지의 삶을 드나 들며 한 사람의 인생을 폐허로 만든 것도 모자라 

내 인생까지 뒤 흔들려하지 마세요. 경고합니다. 당장 나가세요." 

"무, 무혁 아….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화 났니? 그래도 너희 아버지 랑은 .." 

"아버지 1년 남았다는 얘기 듣고 기어 들어왔습니까? 유산이라도 챙기려고?”

"얘! 넌 나를 뭘로보고! 부부 사이의 문제를 자식은 모르는거야. 우린 사랑했지만, 고난이 많았어! 

그래도 우린 헤어질 수있는 사이가 아니야. 매번 결국 네 아버지 한테 돌아 오는 이유. 그게 뭔지 모르겠니? "

"당신이 떠날 때마다 아버지와 내가 남겨 져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나 해요? 

그 얄팍한 마음을 감히 사랑이라 칭하지 마세요! "

"무, 무혁 아…!”

"그 여자 언제 내쫓았어요! 갈데도 없는 그 여자 어디로 내 쫓았 냐고요!"

분노가 치밀었다. 강아지를 안고 아픈 몸으로 그녀는 어딜 간걸까. 

얘기를 듣지 않아도 주말 내내 쏟아지는 겨울비를 맞으며 길을 헤맸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세영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였다. 무혁의 곁이었다. 

어째서 우리의 집을 떠나 그녀가 방황 한단 말인가! 

더욱 기가 막힌 건 세영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막막하다는 사실이었다. 

무혁이 그녀에게 가정사를 숨겼기에 그녀의 가정사 역시 듣지 못했다. 

아니, 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의 가정사를 외면 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무작정 세영을 찾으러 나가려던 무혁은 슈트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세영의 연락인가 싶어 급히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수화기에서 흘러 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VI. 아이를 낳고 싶어요 

무거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세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오후 5시가 다되어 가고있었다. 

2박 3일의 출장을 떠난다던 무혁은 하루를 더 세종에서 머물렀다. 

겨울비를 맞아 지독한 감기에 걸려 차마 전화를받을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힘들게 일하고있을 무혁이 눈에 선해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 잘 있다는 문자만 보내고 전화를 무시했다. 

실은, 전화를 받기조차 힘들 정도로 주말 내내 끙끙 앓았다. 출근을 한 지혜에게 미안했다. 

주말 동안 뭉치를 다시 사무소에 데려다 놓고 고시원을 알아 본다고 호언 장담 해놓고 이렇게 아파서는 

그녀의 침대까지 차지하고 말았다. 지혜는 걱정하지 말고 쉬라며 말했지만, 

세영은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 아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무혁에게 세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고 회사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세영은 손을 떨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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