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그녀의 빈자리
"미안해, 뭉치 야. 뭉치 야, 미안. 엄마가 미안해."
아이처럼 엉엉 우는 세영을 보며 간호사가 멋쩍게 웃었다.
"주인분 오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칩에 입력 된 연락처로 전화하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 더라고요."
"아! 네. 배터리가 나가서."아차 싶었다.
뭉치의 몸에 연락처를 담은 전자 칩을 장착했던걸 이제야 떠 올렸다.
강아지가 혹시 차 사고라도 나면 안된다는 생각에 너무 경황이 없어서 휴대폰부터 충전 할 생각을하지 못했다.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비 맞고있는 거보고 데리고 왔어요. 강아지가 너무 떨어서 목욕시키고 털도 보송 보송하게 말렸는데."세영이 안는 바람에 뭉치는 다시 홀딱 젖고 말았다.
엄마를 찾았는데도 버림 받았다는 생각에 놀랐는지 여전히 뭉치는의 기소 침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여기 목욕비 계산 해주세요."
세영은 카드를 내밀었다. 간호사는 명함을 내밀며 웃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가시고 다음에 건강 검진하러 오세요."
"감사합니다. 저희 뭉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다시 인사 드리러 올게요."
세영은 몇 번이나 인사를하고 뭉치를 품에 안고 병원을 나왔다.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았다.
세영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이미 고시원 방은 뺐고 짐도 모두 무혁의 집에 있었다.
애초에 개를 데리고 고시원에 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혁의 모친이 있는 그 집으론 절대 가고싶지 않았다.
설사 뭉치를 데리고 다시 무혁의 집으로 돌아 간다고해도 무혁의 모친에게 문전 박대를 당할 게 뻔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처량하니, 우리. 강아지 한 마리 책임지지도 못할 형편에.
무슨 아이를 낳겠다 고 설 쳐댄 건지. 무혁에게 어머니가 있는지없는지도 모르면서
동거부터 덜컥하겠다고 이사부터 한 건지. 경솔하다, 경솔 해.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고 무혁과 연락이 닿을 길조차 없을만큼 얄팍한 사이에 도대체왜 이리도 가볍게 행동 한 건지.
무혁의 모친이 날렸던 비수 같은 말들이 이제야 실감났다. 비록 가슴 쓰라린 말이 기는했지만,
틀린 말 하나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뭉치 야, 미안해. 엄마가 너 하나 책임질 능력이 없어서."
눈물이 주룩 주룩 흘렀다. 급하게 나오느라 애견 용품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일단 휴 대폰을 충전해야했다. 세영은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탔다.
강아지 때문에 두 번의 승차 거부를 당하고서야 간신히 지혜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지헤 야, 이렇게 불쑥 찾아 와서 정말 미안해. 나 주말 만 좀 재워 줘.”
연락도없이 방문한 젖은 몰골의 세영을 보며 지혜는 화들짝 놀랐다.
게다가 세영의 품에는 뭉치가 추운 듯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 웬 강아지? 세 영아. 너 울었어? "
지혜를 보자 마자 아이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어머니에게들은 악담과 제 한 몸조차 책임질 수 없는 처지가 비참해 가슴이 미어졌다.
"강아지 내려 놓고. 앉아, 앉아. "
뭉치는 기가 죽은 듯 세영의 옆에 엎드렸다. 세영은 눈물을 홍 치며 훌쩍였다.
"나 왜 이렇게 무능하니.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스무 살부터 하루도 안 쉬고 일했는데이 넓은 서울 땅에 월세방 하나없는 게 말이 돼? "
지혜는 세영을 토닥 거렸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 어. 가족들 때문에 그랬지. "
"나 진짜하고 싶은 거 다 참고 돈만 벌었어. 쉬고 싶어도 못 쉬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숨만 쉬면서 살았어. 그렇게 모은 돈인데 그 돈 다 어디로 갔을까. "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인이 우는게 안 쓰러 운지 뭉치는 세영의 낑낑 거리며 품으로 파고 들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개는 또 뭐고? "
"이사님이랑 같이 살기로해서 고시원 방을 뺐는데 이사님 어머님 한테 쫓겨 났어. "
"뭐? 누가 누굴 쫓아? "
지헤가 커다래진 눈으로 세영을 바라 보았다.
어이없는 상황에 그녀가 더 화를 냈다.
"어른들 허락도 안받고 같이 산다고. 경우 없는 집안이라고,
나 때문에 우리 가족들까지 욕먹고. 강아지까지 내쫓았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여러번 버림받은 유기견 인데, 내가 경솔하게 행동해서 강아지까지 또 버림 받았어. "
지혜는 세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세 영아, 그러지 마. 네가 경솔 하긴. 동거를 어른들 허락 받고하는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서. 이사님은 뭐라시고. "
"지금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연락도 못 했어. "
"그럼 빨리 전화 해."
"배터리가 없어."
"휴대폰 줘. 아, 우리 휴대폰 기종 다르지. 충전기있어?"
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회사에서 들고 왔던 핸드백 말고는 아무것도 챙겨 오지 못했다.
"그럼 일단 넌 씻고있어. 감기 걸리겠다. 내가 편의점 가서 충전기부터 사올테니 까.
강아지는 여기에두고, 그만 울어.”
"미안해, 지헤야."
"미안하긴. 빨리 씻어. 알았지? "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룸에 사는 지혜의 집도 강아지를 데리고 오기 적절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무능함에 염치 쯤은 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빈곤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했다.
부모의 빈곤이 세영의 삶을 무겁게 짓눌렀고 이젠 친구인 지혜에게 민폐를 끼치고있다.
이럴 줄 알고 무혁이 결혼 하자는 말에도 내심 이루어질수 없는 사이라며 스스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였으니까.
바라보기 엔 너무 높은 곳에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무혁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신애 여사의 모욕적인 말에 열심히 살아온 그동안의 인생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문자남깁니다. 난 아직 일이 안끝나 운전 중입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보고 싶어요.]
세영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무혁이 문자를 남긴 이후로 그녀 에게선 짧은 답장만 도착한 상태였다.
[저는 잘 있으니 일 잘보고 올라 오세요. 항상 운전 조심 하시고요.]
다시 전화를 걸자 이번엔 전원을 켜 놓은 건지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받지 않았다.
사적인 일로 전화 통화를하는게 익숙하지 않은 무혁이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세영이 내내 신경 쓰였다.
그동안 여자들이 하루의 일상을 전화로라도 공유해야한다는 말에 질겁했던 무혁이었지만,
이젠 그야말로 세영의 일상 공유가 간절했다. 그녀가 궁금하고보고 싶었다.
무슨 일로 연락이 힘든 건지 불안하기까지 했다.
설상가상 2박 3일로 예정되어 있던 출장 스케줄이 하루 늘어났다.
공사 대금을 받고 잠적 한 시공사 때문에 중간에서 난처한 입장이되었다.
월요일 오전에 변호사와 함께 고소를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 서울로 올라 왔다.
양아치 같은 시공사를 상대로 도둑잡듯 쫓다가 겨우 잡아 내 달래도보고 겁도 줘 봤지만,
통하지 않아 법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횡령 했다는 사실도, 그런 사람과 법적싸움을 해야한다는 사실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비 오는 내내 운전을하며 돌아 다니느라 피로가 밀려 들었다.
연락이되지 않는 세영 때문에 문득 불안한 생각이 피어 오르기도했다.
그래서 더더욱 세영을 집으로 데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고시원에 사는 데 연락이 닿지 않았으면 아마도 위험한 일을당한건 아닌지
별의별 상상을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집으로 가서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무혁은 회사로 향했다. 세영의 얼굴을보고 세시간 만 기다렸다가 함께 퇴근 할 생각이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3층으로 올라서 자 직원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렸다. 하지만 세영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