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누구니?
어젯밤 무혁과 함께 고시원으로 가서 짐을 챙겨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밤새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새벽이 되 자마자 무혁은 세종으로 떠났다.
집에 혼자 남은 세영은 뭉치의 밥을 챙기고 여유롭게 출근했다.
빗길에 운전은 힘들지 않았는지, 잘 도착은했는지, 일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한 게 많긴했지만, 집중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연락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연락을하지 않아도 전처럼 불안 하진 않았다. 그의 집에서 함께 살게되었는데 불안 할 건 없었다.
아침부터 쏟아 지던 겨울비는 퇴근 시간이 다되어 가도록 그치질 않았다.
"세영 씨, 오늘 회식있는 거 알지?"
목발을 짚은 정경열 부소장이 가방을 챙기는 세영을 보며 말했다. 세영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 일이 좀있어서 오늘은 일찍 가볼 게요."
집에 일이 있긴했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계신 본가 말고 무혁의 집에.
강아지 사료를 챙겨 줘야해서 빨리 가고 싶었다.
그리고 짐이라고 할게 별로 없긴하지만 옷도 세탁하고 짐 정리도하고 싶었다.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있어?"
"그런 건 아니 고요."
"어쩔 수 없지. 금요일 회식은 역시 센스 없었나?"
정경열 부소장의 말에 김우식 실장이 꼬리를 흔들며 일어 섰다.
"센스는 요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한우면 게임 끝이죠."
"한우는 무슨. 삼겹살이나 먹으러가자."
티격태격하는 상사들을 보며 세영은 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심상치 않았다.
비가 내리고 나면 추위가 밀려들 것 같았다. 세영은 코트를 바짝 여미고 우산을 썼다.
세영은 택시를 타고 무혁의 집으로 향했다. 비가 너무 험하게 내려서 언덕을 걸어 올라가긴 무리였다.
조금 아깝 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택시를 탔다. 이젠 '우리 집'이 된 그곳으로가는 길이 설레었다.
무혁에게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충전기가 제대로 꽃혀 있지 않았던 건지 배터리가 간당 간당했다.
[저는 지금 퇴근 해요.]
문자를 보내고 이런 저런 생각을하다 보니 어느새 택시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무혁이없는 '우리 집'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섰다. 하늘 에선 우르르 쾅,하고 천 둥 번개가 쳤다.
우산을 접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낯선 여자의 하이힐이 눈에 띄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우리 집 '에 찾아온 낯선 여자 라니 손이 차가워졌다.
누가 오기로되어 있던 거라면 무혁이 미리 귀띔을 해주었을 텐데.
세영은이 상황이 당황 스러웠다.
"너 누구 니?"
주방에서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
하얗게 얼어 붙은 세영은 눈만 껌뻑 거리며 그녀를 쳐다 보았다.
60대 중반의 여자는 와인 빛으로 염색 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린 모습이었다.
현관에 놓여 있던 하이힐의 주인인듯했다.하지만 우아한 차림새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여자는 자기 소개를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보아 무혁의 모친임이 틀림 없었다.
이 목 구비가 닮은 건 아니었지만, 여자의 차가운 분위기는 무혁과 닮아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가 무혁 이랑 만나는 애니?"
"네. 한세영이라고합니다. '
"난 무혁이 엄마야. "
"안녕하세요, 어머님. "
세영의 '어머님’이라는 말에 여자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불쾌 함을 감추지 않는 표정에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내가 왜 네 어머님이니? "
"죄송합니다…. "
입 에선 반사적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무혁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제대로 들어 보지도 못했고
병원에서도 그녀를 본 적이 없어 그저 어머니가 안계신줄로만 알았다.
무혁의 어머니를 맞닥뜨린 세영은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너 설마 우리 집에서 사니? "
세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혁과 세영의 '우리 집'은 어느새 여자의 '우리 집'이되어 있었다.
세영이 대답을하지 못하자 여자가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나 없다고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여자의 조소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갑자기 대역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어디 어른들 허락도 안 받고 마음대로 여자가 집에 드나드니? "
허락을 받지 않았던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할 수있는 말이 없었다.
"제대로 된 집안이면 딸을 남자랑 동거나 시키진 않겠지. 안 봐도 뻔 하네. 너 뭐 하는 애니? 됐다. 됐어. "
제대로 된 집안. 세영은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비록 가난 하긴해도 착한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왜 이 여자의 앞에서 가족들 마저 모욕을 받아야하는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정말 무혁의 어머니가 집에 계실 거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했다.
그런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동거를 할 결심을 하진 않았을 텐데.
왜 무혁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걸까. 묻지 않은 제 잘못 일까.
이야기 해주지 않은 그의 잘못 일까.
갑자기 나타나 다짜고짜 비난하는 무혁의 모친 때문에 잘못의 근원이 어디인지 고민하게되었다.
"어쩐지 집에 웬 개새끼가 돌아 다닌다 했더니. "
혀를 쯧 차는 여자의 말에 세영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평소 같으면 작은 기척에도 자지러지며 먼저 달려 들었을 뭉치가 어쩐지 보이지 않았다.
세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강아지는 요?"
"뭐?"
무혁의 모친, 이선애 여사는 세영을 쏘아 보며 되물었다.
"강아지는, 어딨어요.…?"
"무혁이가 개라면 딱 질색 인 거 몰라서 그러니?"
그것도 몰랐다. 먼저 개를 데리고 오자고 한 건 무혁이었는데….
"내쫓았다. 더럽게 집 안에 다 늙은 개를 풀어 놓고있어. 어?
아무리 여자에게 눈이 뒤집혔기로서니. 결혼도하기 전에 여기가 어디라고 늙은 개새끼까지 데리고 기어 들어와?"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렴. 앞으로는 내가 무혁이나 바깥 양반 보살 필테니까."
세영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혁과 세영의 '우리 집'은 아무래도 '우리 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겨울비가 너무도 차가웠다.
성북동 골목은 벌써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고 개는 늙고 약했다.
지나가는 차도 적지 않았고 저녁도 먹지 못한 개가 어디서 방황할지 심장이 쓰라렸다.
세영은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 나갔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전원이 나가있어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뭉치 야! 뭉치 야!"
세영은 뭉치의 이름을 부르며 뛰기 시작했다. 우산이 거추장 스러웠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 쳐서 우산을 써도 옷이 흠뻑 젖고 말았는데
작고 늙은 강아지가 어디서 방황할지 심장이 아팠다.
"뭉치 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가 또 다시 버림받은 줄 알 텐데.
버림에 익숙해 진 개는 쉽게 자포자기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텐데.
엄마는 널 절대 버리지 않아. 뭉치 야, 어디 있니.
"뭉치 야!"
세영은 목이 쉬도록 동네를 뛰어 다녔다. 두 갈래로 갈린 골목이 나올 때마다 하늘이 원망 스러웠다.
강아지가 어느 길을 선택했을지 생각 해보려해도 머리 만 하얘졌다.
차가 쌩하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멀리 바닥에 떨어진 흰색 쓰레기만 보아도
뭉치가 죽은 건줄 알고 마음이 찢어졌다.
"뭉치 야!"이젠 뛰어 다닐 기운도 남지 않았다. 뭉치를 부르는 목소리 마저 빗소리에 잠기고 말았다.
제발, 뭉치를 게 도와주세요.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세영은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돌아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 러던 중 멀리 동물 병원이 눈에 띄었다. 세영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동물 병원으로 달려 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강아지를 잃어 버려서… 뭉치 야!"
새하얀 뭉치가 세영을 향해 달려왔다. 세영은 비에 젖은 몰골로 뭉치를 번쩍안고 눈물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