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진한입맞춤
문이 열리고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 탔다. 세영은 핸드백을 다리 위에 올리며 말했다.
"부소장님이 건물 앞에서 담배 피우고 계셔서 빨리 못 왔어요. 한참 기다리 셨죠?"
"좋았습니다."
"네?"
"한세영 기다리는거."
세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잠시 짬이 날 때도 일 생각에 빠져 있던 무혁이 어느덧 세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하지는 않을게요."
"그래요."
기다리는 일도 즐겁지만, 그녀와 함께있는 시간은 더 즐거우니까.
한시라도 세영과 떨어져있는 순간이 아쉬울 뿐이다.
그녀와 함께있는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 버릴테지.
무혁은 세영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무혁은 기쁨을 머금고 차를 출발했다.
"안녕하세요, 한세영입니다. 아버님.”
세영은 어렵게 입을 뗐다. 소장님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건 무혁의 이름을 부를 때만큼이나 떨리고 어려웠다.
"어, 그래. 우리 세영이 왔구만. 동양화처럼 예뻐."
어르신은 지난번보다 밝은 얼굴로 세영과 무혁을 맞이했다.
겉으로 보아 선 여전히 환자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 아버지. "
동양화 같은 아가씨. 이번엔 정말 견딜 수없이 궁금해졌다.
세영은 어르신에게 조심스레 그 뜻을 물었다.
"아버님, 동양화 같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
무혁의 부친, 진명은 웃으며 아들을 힐긋 보았다.
"저 녀석이 어릴 때 동양화를 그렸거든. "
"정말요? "
세영은 무혁을 다시 보았다. 그와 짧은 시간에 친밀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다.
동양화를 그리는 차무혁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녀석 엄마가 동양화를 그리던 화가였지.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잘 그렸어. "
"그러셨구나. "
"무혁이가 뉴욕에서 자리를 잡지 않고 돌아온 이유도 그거였지, 아마.
동양화로 그리던 세상이 뉴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거.
내 생각엔 이 녀석 머리로 그리는 세상은 동양화 일거야. 그렇지?”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의 정서를 구축하여 건축 세계를 창조해 내는데,
뉴욕의 풍경은 그의 어린 시절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부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 그런 것쯤은 무시하고 머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창작 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고 보니 무혁의 어머니 이야기도, 어린시절 이야기도,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적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영 역시 그에게 가족 얘기 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 본적 없었다.
아무래도 무혁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저는 동양화를 닮았다고 하시 길래 평면적으로 생겼다는 소리인줄 알고 오늘 화장도하고 왔어요."
붙임성 넘치는 세영의 말에 진명은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내 저으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이 녀석은 영감이 필요하다고 어릴 적에 살다가 경매로 넘어 갔던 집을 다시 사서 허물고는
제 손으로 다시 지어서 사는 놈인걸. 내 아들이지만 아주 지독 한 놈이라고."
지금 무혁이 사는 집터는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었다.
비록 원래 있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짓긴했지만, 동네의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영씨가 저 녀석 모친을 닮아 했던말이네.”
"정말이요? "
세영은 그제야 안도하며 진명을 따라 웃었다.
무혁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이 기분 좋았다.
남자들은 엄마를 닮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도 있지않은가.
그럼 무혁도 그녀의 외모에 호감을 느꼈던 걸까.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영 씨는 어머니를 닮지 않았습니다. "
화기애애 한 분위기에 적막이 내려 앉았다.
무혁은 차갑게 선을 그으며 진명에게 말했다.
"닮지 않기는. 너희 엄마 젊었을 때랑 아주 똑 닮았는걸. "
미간을 좁히고 앉은 무혁이 대꾸도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무안해진 세영이 눈을 깜빡 거리며 진명의 표정을 살폈다.
어머니 닮았다는 말이 그를 기분 나쁘게 한건지.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식사는 잘 챙겨 드셨어요? "
세영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화제를 전환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명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 아가라고 불러도 될까? "
세영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
"고마워. 우리 무혁이 녀석, 여자한텐 통 관심이 없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가까이 있었어. 이제 내가 마음 편히 눈 감을 수있을 것 같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진명의 말이 마음 아팠다.
"아버님, 오래 오래 사셔야죠. 다시 사무소에도 나오셔야 하고요. "
"새 아가, 우리 무혁이 잘 부탁 하네. "
"아버님. "
"무혁이가 상처가 많아서 사람 한테 마음을 열지 못 했어. 여자를 만나는 것도 자네가 처음이고.
알겠지만, 무혁이에겐 친구도 없네."
진명의 말에 세영은 가슴이 아팠다. 무혁에게 자신이 첫 여자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놀라웠지만,
그걸 신경 쓸 수 없을만큼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친구도 없을정도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무혁의 상처가 무얼 지 궁금했다.
"세영 씨, 이만 돌아 갑시다."
잠시 병실을 나갔다가 돌아온 무혁이 그녀를 불렀다.
"벌써 요?"
"내일 출장이 잡혀서 지금 돌아가 봐야 겠어요."
세영은 진명의 손을 붙들며 활짝 웃었다.
"아버님, 앞으로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또 봅시다."
무혁도 아버지를 보며 인사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해."
"예, 아버지."
두 사람은 병실에 우두커니 남은 진명을 돌아 서서 병원을 빠져 나왔다.
무혁의 상처는 무엇일까. 세영은 오늘 따라 고독 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조심 스레 올려다 보았다.
"갑자기 출장이 잡혔습니다."
침묵을 깨뜨리며 무혁이 세영의 손을 잡았다.
언제쯤되면 그와 편하게 가족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무혁이 세영에게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하지 않듯, 세영 역시 구질구질 한 가족 얘기를하기 껄끄러웠다.
그런 마음을 알면서 그에게만 상처에 관한이 야기를 묻기는 어려웠다.
주차장에 도착한 무혁이 세영을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여전히 가끔 어려울 때가 있긴하지만, 그의 다정한 모습 만큼은 변함 없었다.
운전석에 앉은 무혁을 보며 세영이 조심 스레 물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세요?"
"세종으로갑니다. 2박 3일.”
매일 회사에서 보는 얼굴인데도 2박 3일 동안 떨어져 있어야한다는게 벌써 아쉬웠다.
무혁은 세영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일렁 거리는 그의 깊은 눈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
무혁은 엄지 손가락으로 세영의 입술을 지그시 어루 만졌다.
매혹적인 그의 표정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세영의 입술이 스르르 열렸다.
입술 틈새로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녀의 여린 살결을 살살 간질였다.
"앞으로 우리 집에있는 게 어때. "
"무혁 씨 집에요? "
"뭉치 밥도 챙겨 줘야하고. "
무혁은 세영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벌어진 입술에 손가락 대신 입술을 맞대고는 속삭였다.
"내 집에 세영씨가 있었으면 좋겠어."
맞닿은 입술사이로 달콤한 이야기가 스며들었다.
두 번은 거절했지만, 도저히 거절 할 수없는 세번째 제안이었다.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게요. 뭉치 밥도 줘야 하니까…”
혀와 혀가 깊게 얽혀 들었다.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엄마 품을 파고들 듯 세영의 품으로 파고 드는 커다란 그가 어딘가 안 쓰러웠다.
세영은 무혁의 등을 토닥이며 그가 퍼붓는 진한 입맞춤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