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보쌈
트렁크에 짐을 실은 무혁이 운전석에 올랐다.
강아지를 안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세영을 보자 강아지를 핑계 삼아
그녀를 보쌈해가는 기분이 들어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뭉치야. 아빠가 잘할게. 고맙다. 네가 누명을 쓰긴했지만, 그만큼 잘해줄게.
정경열 부소장이 소식을 듣고 붙잡을까봐 부리나케 차를 출발하는데
세영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이사님."
"뭐가 죄송합니까?"
"회사를 동물 농장처럼 만들어서.…. 뭉치가 너무 불쌍하기도했고
소장님이 사무실에서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
이사님 의사는 여쭙지도 않고 무작정 뭉치 키우자고 데리고 왔던거요.
죄송합니다. 이사님이 강아지 싫어 하실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래도 제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말실수를 했구나. 동물 농장이라고 했던건
최성수 대리가 강아지를 빼앗아갈까봐 일부러 대꾸하지 못하도록
차갑게 던진 말이었는데 세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강아지 한테 누명을 씌우고 세영을 납치하는 기분이 들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데 강아지가 싫긴.
여자한테 빠지니 칼로 손등을 쑤시질 않나, 하다못해 여자가 키우는 개까지 예뻐 보일 지경인데.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무안해 할까봐 생각해서 해주시는 말인줄은 아는데요.
그냥 최성수 대리님한테 키우라고 할까요? 사람 무는건 역시 주인 탓인데
제 앞에서 이사님을 물었으니 저도 할 말이 없고… .. "
세영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회사에서 키우는한이 있어도 최성수 그 새끼는 .. 절대 안된다.
"세영씨는 그렇게 쉽게 개를 버립니까? "
"네? 아,아니요. 뭉치를 버리 다니요. 그건 절대 아니고요.
제가 대리님 집으로 찾아가면 되기도하고, 아니, 이사 할 때까지만 잠시 맡기 겠다는."
"나도 버리려고요? "
어쩐지 버림받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뭉치야. 나도 그 심정 잘안다.
"네? "
하얗게 질린 세영이 커다란 눈만 끔뻑 거렸다.
너무 감정이입을 한것 같아 무혁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운전대만 손가락으로 튕겨댔다.
갑자기 세영이 까르르 웃었다.
왜 웃지. 뭐가 웃긴 거지. 난 가슴이 서늘해 지는데 왜 세영은 웃는 거지.
그녀가 갑자기 웃는걸 보니 속내를 모두 들킨것 같아 약간은 창피한 기분이 들었지만,
세영이 자꾸 오해를하고 속상해하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창피하더라도 그녀가 웃는게 좋았다.
"설마 이사님 질투하시는 건 아니죠? "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질투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내가 최성수 대리를? "
"아니, 자꾸 최대리님 말씀을 은연중에 꺼내시니까요. "
"그놈 마음에 안듭니다. "
"아. 그러시구나.”
세영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무혁을 쳐다 보았다.
그동안 최성수 대리를 향한 불쾌한 감정이 질투였다는걸 깨닫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실은 저도 최 대리님 별로예요."
최성수 대리가 별로라는 말에 왜 이리도 안도가 되는건지.
민망함에 정면만 응시하던 무혁은 미소를 삼키며 세영을 힐긋쳐다 보았다.
"최성수 대리님은 뭉치 예쁘다고 쓰다듬을 줄만 알았지 개껌 한번 준적 없거든요.
밥도 안 주면서 왜 아빠래? 예뻐만 하는건 누구나 다하지.
궂은일은 하나도 안하면서 아빠라니 말도 안 돼. 그렇죠, 이사님?"
물론 무혁은 뭉치를 쓰다듬은 적도 오늘이 처음이긴했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밥주면. 아빠해도 됩니까?"
무혁의 질문에 세영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이사님이 뭉치밥 챙겨주시게요?"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뭉치야, 너 아빠 생겼다. 신나지? 우리 뭉치 말년에 호강하네?
초년에 조금 고생스러워도 말년복이 최고래. 우리 뭉치 오래오래 살자."
세영이 뭉치를 끌어 안으며 생기 발랄하게 얘기했다.
세영의 남편이 될 수 있다면 개아빠 쯤이야. 감사하게 할 수 있다.
"아, 근데 아빠 하시려면요. 밥도주고 씻겨야하고 오줌 똥도 치워야 해요."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았던거지만, 낮엔 집으로 들르는 가사 도우미가 알아서 처리 할테니 문제될건 없다.
웃돈을 쥐여 주며 산책도 부탁하면 될 것이고. 밤엔 무혁이 책임 져야 할 테지만,
최성수가 개를 핑계로 세영에게 알짱거리는걸 보느니 행복한 임무를 즐길 테다.
"그러죠."
"농담이에요. 제가 매일 와서 할게요."
세영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해맑게 웃으며 재잘거렸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혁 역시 기뻤다.
물론, 그녀가 매일 오겠다는 소리가 더욱 기뻤고.
"사료는 이렇게 한컵 주면 돼요. 자동 배식기도 있긴한데 뭉치는 밥주는 사람을 따르거든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직접주는 게 좋아요."
세영의 설명을들은 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앞치마를 두르기 시작했다.
홈웨어에 앞치마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소화시키는 남자라니.
완벽한 모습을 잠시 감상하던 세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혁에게 물었다.
"설마 요리도하세요?"
"세영씨는 밥주는 사람 안따릅니까?"
무혁의 농담에 세영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밥주는 사람 당연히 따르죠."
"그럼 거기 앉아 있어요. 밥 줄테니까."
"근데 밥은 맨날 줘야 따라요. 한 번 준다고 따르진 않아요. 주다 안주면 안돼요."
"바라던 바입니다."
"근데 제가 이사님 따라 다녀도 돼요?"
"밥도 주는데 안따라 다닐겁니까? 개도 의리를 지키는데 세영씨도 의리를 지키죠."
"저 의리 있거든요. 이거보세요. 지금도 쫓아 다니고 있잖아요."
세영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무혁이 부산하게 움직이는걸 지켜 보았다.
영 무뚝뚝하기만 한줄 알았는데 가깝게 지내다 보니 무혁도 제법 유머러스 한 사람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그의 농담을 듣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이었고.
아닌가. 문득, 세영은 송서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혁과 송서림 사이에 별일이 없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정경열 부소장이 무혁과 전화 통화를했을 때가 생각났다.
'호텔에서? 적극적이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차이사 좋다고 작년부터 난리였잖아.'
일의 진위도 묻기 전에 혼자 땅굴을 파며 시무룩했던 자신을 반성했었다.
이젠 그에게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물을 용기가났다.
무혁은 여전히 어렵긴했지만, 세영이 묻는말은 다정하게 대답 해주는 남자였으니까.
“이사님, 저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
"말해요. "
무혁이 냉장실에서 고기를 꺼내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다행히 요리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물을 용기가 생겼다.
“제주도 가셨을 때요. 그 송서림 배우가 건축주 였잖아요.…?”
세영의 물음에 무혁이 고기를 팬 위에 올리고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던걸까? 그의 표정을 보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송서림 배우팬이라고 하더니. 사인 받아줘요? "
"아, 아니요. 저 팬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실은 받아달라고해도 곤란해져서.”
"왜요…?”
"내 호텔방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허락도없이 침대에 누워 있길래 욕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마 부소장님도 그 일 못하게 될것 같고."
"와, 말도 안돼."
"단단히 화내고 돌아섰어요. 그 여자한테도. 부소장님 한테도. 불안해 할거 없습니다."
화가나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거렸다.
말도 안되지. 어떻게 허락도 받지않고 남자방에 들어가서 누워 있을 수가 있지?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라고 다 그러는건 아닐텐데.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정도가 있지.
세영은 씩씩 대면서도 무혁이 욕을하며 서울로 돌아 왔다는 이야기에 안도했다.
기분 나쁜 진실이긴하지만, 가감없이 얘기해 줘서 안심되었다.
"질투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