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귀여운 계략
"엄마, 돈은 내가 잘 해결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세영은 건물 앞에 나와 엄마와 통화를했다.
뭉치가 배를 까고 누워서도 세영의 손길에 자지러지며 물고기처럼 팔딱 댔다.
-정말? 어떻게? 너 또 투잡 뛰고 그러는거 아니지?
"아니야, 회사에서 대출, 승인 받았어요. 그러니까 엄마야 말로 가사 도우미 일 그만 둬요."
파출부 일로 고생하는 엄마를 알고 있었다.
엄마보다 나이 어린 고용주들이 갑을 관계를 따지며 엄마를 무시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세영은 엄마의 걱정을 덜어 주려고 '무이자'라는 걸 말할 뻔하다가
빚에 익숙한 부모님을 너무 안심시키는 것도 안 될 것 같아 단어를 삼켰다.
-우리 세영이 불쌍해서 어쩌냐. 너희 아빠 보증 때문에 우리 세영이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미안하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코끝이 찡했지만, 세영은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에게 부러 더 시선을 주며 말했다.
"세호는? 공부 잘 된대요?"
세영의 동생 세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기에
그녀가 목돈을 들여 거금의 학원비를 지원해 주었는데
어쩐 일인지 2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결과가 별로인가 봐. 집에 들어 와서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어.
"인터넷강의 듣는 거겠지"
-그런건 아닌 거 같아.
세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생 만큼은 고생 안시키고 공부를 시키겠노라 다짐했건만,
줄곧 머리가 좋았던 녀석은 공무원 시험과 적성이 영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 야지. 누나 고생하는 거 뻔히 알면서.
엄마가 혀를 찼다. 세영에게 미안해서 세호를 더 나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3년은 봐야한다고 했으니까 1년 더 지켜 봐요. 애 너무 나무 라지 말고.
세호도 심란 할텐데, 철없는 애는 아니니까. 생각이 있겠지. "
-생각이있는 애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니다, 우리 세영이 심란하게. 미안.
지금 일하는 중이지? 엄마도 일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딸, 고마워. 사랑해.
"그래요, 엄마. 나도. "
세영은 전화를 끊었다. 참 화목한 집안이었다.
엄마는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고 집안의 대들보인 세영에게 식구들 모두 감사해 할 줄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단하나, 집안의 그 누구도 세영 말고는 돈을 벌 재간이 없다는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심성이 나쁜건 아닌 가족들을 돈 벌줄 모른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빈곤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 보겠다며 파출부 일을하면서
떡집 차릴 돈을 모으는게 보기에 안타까워 세영이 나서서 떡집을 차려 주었던게 화근이었다.
이제 제발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안에서 부소장님이 찾으시는데."
언제와 있던건지 무혁이 그녀의 곁에서 뭉치를 내려다 보며 얘기했다.
"지금요? "
혹시 전화 통화소리를 모두들은게 아닌가싶어 얼굴이 홧홧해졌다.
어째서 무혁앞에선 자꾸 구질구질 한 모습만 보이는걸까.
애초에 삶 자체가 빈곤해서 그런걸까.
연애를 시작한 생기 넘치는 연인이 아니라 빈곤에 찌든 가난뱅이로 보여 정이 떨어질까봐 마음이 저릿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세영은 무혁과 뭉치를 남겨둔 채 사무소로 들어갔다.
세영이 사라진 걸 확인한 무혁이 뭉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물어."
무혁은 뭉치의 입에 커다란 손을 내밀었지만, 순한 노견은 그의 손등을 귀엽게 할아 댈 뿐이었다.
"네가 나 좀 도와 줘. 물어라. 응?"
영문을 모르는 뭉치는 설상가상 배까지 드러내며 만져 달라 자지러졌다.
"하, 씹."
다시 세영이 나올까 봐 마음을 졸이던 무혁은 슈트 안주머니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냈다.
"네가 도와주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이유도 없잖아. 응?"
무혁은 뭉치를 만지 던 손을 거두고 휴대용 칼을 펴서 손등을 쿡쿡 쑤 셨다.
선연 한 피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
무혁은 무감한 표정으로 칼에 묻은 피를 손수건에 쓱쓱 닦고는 나이프를 접어 다시 슈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생각해도 미쳤다.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려고 멀쩡한 손등을 칼로 쑤시고 있다.
그래도 세영이 고시원에 사는꼴을 지켜보는것 보단 해보는데까지 해보는게 나을성싶다.
이제 세영이 빨리 나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봐줘야하는데.
"이사님?"
다시 바깥으로 나온 세영이 피를 흘리는 무혁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세영이 무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무혁의 단단한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세영은 당황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가락을 꽉 눌러 지혈했다.
"괜찮으세요? 어떻게해. 피나요. 설마…?"
순하디 순한 강아지가 물었을거라고는 의심조차하지 않으려드는 세영에게 무혁이 쐐기를 박았다.
“개가 사람을 무네요. "
"어쩜 좋아. 이사님 손길이 낯설었나 봐요.
여러번 주인한테 버림 받았던 애라 겁이 많아서 그런건데 죄송합니다. 어떡해. 많이 아프세요?
피가 흐르는데 당연히 아프지. 바보같은 질문을 했어요. 죄송해요. "
세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손을 가슴으로 잡아 끌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네. 제법 아픕니다."
"그, 그렇죠? 병원부터가요."
세영이 말을하자 무혁이 뭉치를 한손으로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말했다.
"사람 무는개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키워서는 안될텐데."
"네…?"
세영의 얼굴이 사색이되었다. 틀린말이 아니었으니까.
건축주를 물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깜깜 할테지.
"그러니 우리 집으로 데려 갑시다."
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건가싶어 넋을놓고 앉아있는 세영을 뒤로한채
무혁이 먼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뭐합니까? 가져갈 용품들 정리해서 가지고 나오세요."
"아 .. 네…."
무혁은 세영의 답도 듣지않고 사무소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세영은 뒤늦게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 무는 개를 회사에서 키울 수 없다는 핑계가 어설프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에 먼저 강아지를 챙겼다.
다행인것은 피가 흐르는 무혁의 손을보고 세영이 개주인으로서의 염치 없음에 굴복했다는 사실이다.
"이사님이 왜 뭉치를 안고 계세요?"
사무실로 올라 오자 최성수 대리가 무혁의 품에 안긴 개를 빼앗을 기세로 잡아 끌었지만,
무혁은 강아지를 내어주지 않았다.
"뭉치가 이사님 손가락을 물어서요. 피가 날 정도로 물어서
아무래도 사람도 많이 오가는데 풀어놓기 위험해서요.
강아지가 사람을 물 때는 어디가 아프다는 신호라던데 걱정되기도 하고요."
세영이 걱정을 한가득 담은 얼굴로 설명하자 최성수 대리가 얄밉게 떠들었다.
"뭉치 야, 아빠 집으로 갈까? 아빠랑 살래?"
최성수 대리는 제가 '아빠'라는 걸 강조하며 떠들어 댔다.
세영이 개 엄마인데 제가 개 아빠면 둘 사이는 뭐라는 뜻인가.
아무튼, 거슬리는 새끼.
내가 소장 만되면 최성수 새끼부터 자른다.
"됐습니다. 개는 내가 데리고 가죠."
무혁은 성수의 말을 바로 잘랐다.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최성수 대리의 집이 아무래도 개와 살기에는 적합 할 듯했지만,
세영이 그 사실을 생각 해낼 시간을 줄 수 없었다.
"이사님이… 개를 키우신 다고요?"
놀란 최성수 대리의 물음에 일순간 전 직원의 시선이 무혁에게로 꽂혔다.
개가 뭐라고 그리도 놀랄 일인지.
"내가 못 미덥습니까?”
"아, 아니요 ..”
"사무실이 동물농장도 아니고. 퇴근시간 됐으니 잡담하지 말고 일이나하세요."
"네, 이사님."
성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하나 둘 일어서는 디자이너들을 뒤로 한 채 무혁은 세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세영의 품에는 뭉치가, 무혁의 양손에는 강아지 용품이 바리바리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