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동거제안
가슴을 쿡쿡 칼로 쑤시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그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다.
가난과 사투하는 여자에게 돈을 줄테니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했다.
무혁은 자신도 모르는사이, 세상 모든여자를 돈 때문에 떠난 어머니처럼 취급했고
세영에게 마저 모욕을 준 것이었다.
운전석에 앉고서도 무혁은 한참이나 출발 할 수 없었다.
몰랐다는 말로 변명할 수 없는 상처를 그녀에게 준 것이다.
집으로 데리고갈걸. 하다못해 호텔이라도.
씻지 않고 짐승처럼 그녀를 덮쳤다.
본능을 이겨낼 수 없어 세영을 안고 보았는데 돌이켜 보니 그녀를 존중하지 않은 거였다.
갑자기 한세영이라는 여자가 가여워 심장이 뻐근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무지는 유죄였으나 빈곤은 무죄였다.
도대체 왜 죄없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어머니가 부린 패악의 여파가 왜 아직까지도 유령처럼 살아남아 세영에게로 불똥이 튄 걸까.
대출금이 필요하다는 세영의 사정을 오히려 이용하려했던 제 모습은
그가 그렇게 나 경멸하던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었다.
돈으로 가정을 저버린 모친과 돈으로 가정을 꾸리려는 제 모습은
좌우 만 반전 된 모습으로, 다른 듯 거울처럼 쏙 빼닮아 있었다.
무혁은 불 꺼진 세영의 창문을 어림짐작했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방의 창문중 아마도 그녀의 방일 거라고 짐작되는 네모 난 유리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그녀를 끌고이 닭장에서 빠져 나오게하고 싶었지만.
'저 자존심 상하고 있어요.' 가진 거 라곤 오직 자존심 밖에 없던 무혁의 가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가 가진 자존심 마저 상처 입힐 순 없었다.
무거운 돌덩이가 심장을 압박했다. 당장 에라도 세영에게로 달려 가고싶었지만,
나가 달라며 속삭이던 그녀를 더이상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이곳에 머무는 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어제 잠은 푹 잤어요?"
최성수 대리가 커피를 세영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어제 택시에서의 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네. 푹 잤어요."
실은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지만, 괜한말로 대화가 길어지길 원치 않았다.
"근데 안색이 어두워요."
커피를두고 사라지려나 했더니 성수는 아예 그녀의 책상에 걸터앉아 잡담을 늘어 놓았다.
"요즘 일이 좀 있어서요."
안색이 어둡다는 말에 세영은 책상위에 놓인 거울을 힐긋 쳐다보았다.
분명 무혁이 제주도에서 한달음에 날아와서 행복했는데 초라한 모습을 보여 부끄러웠다.
성수에게 안색이 어둡다는 말까지 들으니 동양화인지 원지하는 그 이야기가 또 떠올랐다.
무혁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그렇지 않아도 감히 우러러 볼 수없는 사람이라는 걸
저 스스로 가장 잘 알고있는 데 고시원 방구석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성수의 말에 세영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서있던건지 무혁이 세영의 발치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님.?"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무혁이 성수의 이야기를 꺼내며 탐탁지 않아했는데 하필 성수와 잡담을 나누는사이 그와 마주쳤다.
평소엔 정말 성수와 별다른 친분이 없었는데,
어쩐지 무혁의 앞에서 자꾸 못난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아, 이사님. 송서림 사인은 받아 오셨어요?"
성수의 말에 무혁이 그를 지그시 쳐다 보았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성수를 응시 하더니 이내 무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아쉽네요. 어제보니까 세영씨가 송서림 배우팬이라고 하더라고요. 다음에 부소장님께 부탁해 봐야겠다."
위계질서가 엄격하지 않은 사무소 분위기 였지만, 무혁은 직원들과 잡담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그런 불문율을 잊기라도 한건지 성수는 쓸데없는 말로 두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다.
세영은 송서림의 잡지를 찢었던걸 들키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혁을 힐긋거렸다.
정말 예쁘고 성숙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무혁에게 보여 주는건 구질구질하고 경솔한 모습 뿐인 걸까.
"기회되거든 준비해 보도록 하죠."
무혁의 대답에 세영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평소였다면 누가 농담을 던져도 못들은체 지나쳤을 그가 세영을 위해 사인을 준비 해보겠다니.
"아, 아니에요. 저, 송서림 배우, 안좋아해요."
하지만 감동적인 말이 마냥 감동적이지만은 않았다.
세영은 무혁이 송서림에게 사인을받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래요? 근데 어제 잡지…”
"저 진짜 싫거든요? 정말 싫어요. "
성수가 잡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세영은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너무 흥분해서 평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간 음성에 성수가 화들짝 놀랐다.
"한세영 씨, 잠깐 따라오세요. "
"네. "
결국, 성수가 세영의 자리를 떠나지 않자 세영이 먼저 제 자리를 떠나는 꼴이 되고말았다.
무슨 얘기를하려고 이사실로 부르는건지. 평소 무혁과의 업무 접점이 없었기에
그가 개인적으로 호출하는 건 처음이라 다른 직원들도 두 사람을 힐긋 거렸다.
가장의 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건 물론 성수였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4층 이사실로 무혁이 먼저 들어섰고 세영이 뒤를 따랐다.
무혁은 세영을 소파로 안내하고는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대출 승인 되었습니다."
대출이 승인되었다는 말에 세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그런데 벌써요?"
복지 차원에서 올해부터 사내 무이자 대출제도를 만들긴했는데 아직 신청한 사람이 없어서
법률상 규정 검토와 세법검토가 흐지부지 미뤄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차진명 소장에 이어 정경열 부소장까지 입원하는 바람에 김우식 실장에게만 넌지시
사내 대출이 유효한지 물어 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 신청서 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신청서 양식이 없었으니까.
"저, 그런데 아직 신청서를 안 냈는데요?"
"세영씨 급한 사정을 김우식 실장님이 부소장님 한테 잘 설명한 모양입니다.
부소장님이 검토 필요없이 바로 승인하라고하셨습니다."
감동이 차올랐다. 괴짜라는 소리를 듣는 정경열 부소장은 여느 회사임원 답지않게 인간냄새를 폴폴 풍겼다.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넘쳐나는 업무를 감수하고도 직원들이 이직을 잘하지않는 이유이기도했다.
강아지 '뭉치'를 사무소에서 키울 수 있도록 허락 해줬을 때만큼이나 감사 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무이자 대출이었다. 허리띠를 졸라 매기만하면 만기인 2년안에 대충 해결할 수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저기 윗사람한테하고."
"아, 그렇네요."
세영이 싱글벙글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그의 앞에서 시무룩한 모습을 숨길 수가 없었는데
마음의 짐을 내려 놓았다는 생각에 초라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행복하기까지했다. 이젠 떳떳한 마음으로 무혁을 만날 수있다.
갚아야 할 돈 때문에 팔려가는듯한 느낌으로는 도저히 당당한 연애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리고 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사를하는 게 어때요. 단독 주택이라 내 집에도 별채가 따로 있는데
아버지가 입 원하시는 바람에 창고로 방치하고 있거든요."
갑자기 지난 밤의 굴욕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건."
"물론 공짜로 지내라는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를 낼 생각이었는데
부동산 들를 시간이 없기도하고 알다시피 내가 예민한 편이라 모르는 사람과
대문을 공유하는 게 불편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해서, 아예 남 보단 세영씨가 들어오는 게 어떨지 생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