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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구애행위 (22/40)

22화.구애행위

"지금 어딥니까?"

-나 집에있기 답답해서 회사나왔지. 애들데리고 회식중. 

"부하 직원이 제주도까지 와서 성희롱 당하고 있는데 술이 넘어갑니까?"

-어, 그랬어? 그럼 이참에 송서림씨랑 잘해봐. 

"회식 할 기운 있으면 답사도 직접 하시죠. 올라갑니다."

-차 이사, 왜 그래? 그렇게 기분 나빴어? 

"기분이 안 나쁘게 생겼습니까?"

평소 엔 차분하지만, 현장에서 화가 날 때면 무혁의 성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알고있는 정경열 부소장은 멋쩍게 웃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한세영씨도 같이 있습니까?"

-뭐? 누구? 세영씨? 

뜬금없는 무혁의 화제전환에 경열이 잠시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웅성웅성 들렸다. 

'세영씨 어딨냐?', 

'어? 성수랑 갔어?'

'아무래도 둘이 사귀는거 같은데.'

'성수놈이 오래 공들이더니 드디어 고백했나?'

따위의 말이 들려오자 무혁은 잠시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송서림 때문에 기분이 역겹던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세영이 성수와 나갔다는 말이 무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문득, 송서림이 차무혁의 세상을 어지럽히던 불쾌감보다 

한세영이 다른 남자의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세영 씨 갔나 본데? 세영 씨는 왜. 무슨일있어? 

무혁은 대답도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기분은 뭘까. 아무리 호텔 예약자라고해도 투숙자명단도 확인 안하고 

마음대로 스위트룸의 문을 열어준 호텔직원의 행태를 프런트에 가서 따질 마음도 들지않았다. 

무혁은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어린시절 열심히 설계했던 설계 공모에서 아이디어만 빼앗겼을 때도 이런기분이 들진 않았다.

힘들게 일을하는 순간순간에도 세영이 떠올라 혼자 미친놈처럼 피식 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그녀는 지금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니 심장이 저릿했다. 

다른놈이랑 어울리느라 전화 한번을 먼저 안한건가. 씨발. 

그러고보니 언제 부턴가 한세영 전화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있다.

'세영씨 어딨냐? ','어? 성수랑 갔어?'

'아무래도 둘이 사귀는거 같은데. ','성수놈이 오래 공들이더니 드디어 고백했나? '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왱왱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기분에 당황하며 무헉은 휴대폰을 들었다. 

일밖에 모르는 그에게는 친구조차 없었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오로지 일과 관련된 사람일 뿐인지라 사적으로 누군가와 통화를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타입도 아니었기에 이 시간에 누군가에게 용건없이 전화를 거는건 

무혁으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신호 대기음을 들으며 무혁은 잠시 이상한 생각에 휩싸였다. 

송서림이 무혁에게  했던것처럼 최성수 대리가 세영을 유혹하는건 아닐까. 

성급하게 아이부터 갖자고했던 무혁의 제안에 세영이 선택을 망설였던 걸 알고있다. 

만약 최성수 대리같은 성실한 남자가 세영에게 남들이하는대로 연애부터 차근차근하자면 그녀는 어떻게 나올까. 

마음이 흔들리는건 아닐까. 이럴줄 알았더라면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한이 있더라도 

남들처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어야하는건 아니었나 후회가되었다. 

사회적 규범을 따르며 살지 않는 차무혁이라 할지라도 세영마저 그런건 아니었으니. 

왜 무턱대고 돈 얘기부터 꺼냈을까. 멍청하게 키스부터 했을까. 

여자가 몸으로들이 대는걸 이렇게나 혐오스러워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몸부터들이 댄걸까. 

차무혁 인생에서 이토록 비굴한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내 것이 아니라는 주의였다. 

굳이없는 인연을 붙들면서까지 억지로 설계를 의뢰 받으려하지 않았다. 

세영은 가난했고 그를 한때 짝사랑했으며 무혁은 부유했기에 

적어도 결혼을하면 돈 때문에 그녀가 떠날 일은 없다는 자만도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세영이 다른 남자, 

그것도 그녀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

-여보세요. 

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이내 조용한 주변의 소리를 깨닫고는 다시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 이쳐졌다. 

"납니다."

-네, 말씀하세요. 

어딘가 조심스러운듯한 세영의 대답에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는 무혁의 전화가 반갑지 않은걸까. 

그는 지금 송서림의 만행을 핑계 삼아 세영에게로 달려가고 있건만. 

"어딥니까?"

-아, 택시예요 ……. 

택시인데도 이토록 무감한 반응이라면 분명 곁에 최성수 대리와 함께있는거겠지. 

세영이 술은 얼마나 마신건지 걱정스러운 한편, 

순진한 세영에게 농담삼아 가깝게 다가가려는 최성수 대리의 속셈이 눈에 빤히 보였다. 

"옆에 누가 있군요?"

-네…. 

역시 그녀는 곤란한듯 대답했다.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무혁은 혹시나 세영의 마음이 변한건 아닐지 조마조마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무혁은 공항으로 출발했다. 제주도에서 한시라도 더머물고 싶지 않았다. 

IV. 구애 행위 

세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무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 그 짧은 시간이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하지만 무혁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자정 무렵.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왔는데 그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마음이 시큰거렸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테니 방해를 받기싫어 전화기를 꺼놓을 수도 있는 거겠지만, 

한번 불안해진 마음에 자꾸 송서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전화까지 끄고 송서림과 함께있는건 아니겠지.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못난자신이 미워져 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샤워도구를 챙겼다. 

물론, 정경열 부소장의 통화소리가 탐탁지 않은면은 있었지만, 상대는 차무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남자를 두고 왜 이렇게 못난 상상을하며 홀로 땅굴을 파는건지 모를 일이다. 

세영은 떠오르는 비참한 생각들을 지우려 애쓰며 방에서 빠져 나와 고시원 공용욕실로 향했다. 

세영은 뜨거운 물 아래에서 몸을 씻으며 중얼 거렸다. 

"다시 한번 못난 생각하면 넌 진짜 이사님이랑 사귈 자격 없다."

첫 연애 란 이런 걸까. 

사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초조해하고 혼자 불안해하고. 

아무래도 차무혁은 저와 사귀기에 너무나도 멋진 남자라 자꾸만 홀로 자격지심에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부족하다고해서 무혁이 의심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직 서툴지만, 세영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일은 먼저 전화도 걸어보고 다정하게 문자도 보내 보는거야. 

세영은 홀로 다짐하며 조용히 욕실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서 아는 얼굴과 눈인사를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세영은 바로 잠들 수 없었지만, 다시 한번 다짐했다. 

좋아한다고 먼저 말 해야지. 

물론, 이미 먼저 말하긴했지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첫연애 였지만, 못난 마음으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이 연애를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다. 아빠가 엄마를 '미친놈'처럼 쫓아 다녔다지만, 

내가 차무혁 이사님을 '미친년'처럼 쫓아 다닌다고 이상할 것도 없잖아. 

사랑만 이루어진다면. 

이불속에서 한참 뒤척이던 세영은 새벽 즈음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이제 막 꿈을 꾸려던 것 같은데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세영씨 

세영은 아직 잠결인가 싶어 눈을 비비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새벽에 전화가 올 때는 언제나 나쁜 소식뿐이었는데.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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