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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질투 (21/40)

21화. 질투

"나 집에 있기 답답해서 회사 나왔지. 애들 데리고 회식 중. 어, 그랬어? 그럼 이참에 송서림씨랑 잘해봐."

얼굴이 창백해진 세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 나왔다. 

대화 전부를 들은것도 아닌데 왜 배신감이 드는건지 모르겠다. 

왜 이시간까지 함께 있는걸까. 그것도 호텔에서. 

아무리 무혁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해도 연인이있는 남자가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있는건 아니지 않은가. 

연애라는건 참으로 이상했다. 하루 종일 들뜬 사람처럼 무혁이 떠올라 가슴 설레다가 

이렇게 확인되지도 않은일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매사 단순하게 생각하는 세영이었다. 누군가를 의심 해본적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너무 믿어 문제라는 소리도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무혁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와의 관계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만난 지 일주일인데 혼자 하루에도 열 번씩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혼자만 마음 졸이고 혼자만 기뻐하고 혼자만 슬퍼한다. 무혁은 자신이 궁금하지도 않은 건지. 

다른 여자와이 시간까지 호텔에 함께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하는 건지. 

마음이 저릿했다. 

아빠는 결혼 전에 엄마를 '미친놈'처럼 따라다녔다던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 고, 설거지하는 엄마를 보면서도 심심하다며 귀찮게 뒤에서 매달리며 

치대는 아빠였으니까 엄마가 '미친놈'이라 불러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영씨, 집에가요?"

세영을 붙드는 성수의 목소리에 그녀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최대리님?" 

"나도 같이가요. 김 실장님이 붙잡 으실 까 봐 부리나케 쫓아 왔어요."

세영은 울적해진 표정을 애써 숨기며 성수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혼자 걷고 싶었다. 

세영의 마음을 알리없는 성수는 그녀의 곁에 붙어서 속도를 맞췄다. 

"버스 저쪽에서 타시잖아요." 

"많이 취한거 같은데 택시타요. 가는길에 내려 줄 게요."

세영이 사는 상도동과 성수가 사는 역삼동은 택시 타고가는 김에 내려 줄만한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상사에게 대뜸 부담스럽다거나 연인이 있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방향이 한참 다르잖아요." 

"상관 없어요. 술도 깰 겸. 취해서 들어가면 아무래도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요."

한 번 더 거절하려는 사이 이미 택시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고 성수는 뒷좌석 문을 열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어서타요."

세영은 우물쭈물 가방을 챙기며 택시에 올랐다. 

차라리 고백을 하면 속 시원하게 거절할텐데 이런상황은 곤란했다.

하지만 대놓고 말을 꺼내자니 남자 고백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전적이있어서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혁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돈은 없어도 활기는 넘치던 세영이 일주일만에 남자 때문에 이렇게 풀이 죽을줄은 상상도하지 못했다. 

연애란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연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연애라서 그렇 겠지만. 

"무슨 고민 있어요?"택시가 출발하자 성수가 세영의 옆 얼굴을 보며 물었다.

 속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다행히도 어두운 택시 안에서 빨개진 얼굴색을들 키진 않았다.

"아니요." 

"갑자기 기운이 없어 보이네. 술 많이 마셨나 봐요." 

"조금 피곤해서요."

세영은 대화를 모면하려고 한 대답이었는데 피곤하다는 그녀의 대답이 오히려 성수에게 용기를 준 모양이었다. 

"세영씨." 

"네, 대리님." 

"제가 실은요."

성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는 순간, 가방 속에 있던 세영의 휴대폰이 적막속에서 진동했다. 

"잠시만요."

이시간에 누가 전화를 했을까. 휴대폰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세영은 그대로 얼어 붙고 말았다. 

[차무혁 이사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시작했다. 

연인 사이가 되었으면서도 그가 어려워서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세영이었다. 

연락하겠다고 말했던 무혁 이었지만 내심 그가 연락을 하지 않을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예상이 어긋난다는 일이 이렇게 짜릿할 줄이야. 

세영은 혹시라도 성수가 무혁의 목소리를 들을까봐 휴대폰 볼륨을 줄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납니다. 

나른한 저음을 듣는것 만으로도 손끝이 떨렸다. 

고막을 자극하는 묵직한 음성에 그와 함께했던 밤이 겹쳐졌다. 

"네, 말씀하세요."

옆에 성수가 있는게 천추의 한이었다. 

지금 혼자 있었더라면 조금 더 다정하게 전화를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인건 무혁이 송서림과 함께있는건 아닐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돌려 보낸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세영에게 전화 할리가 없을테니까.

-어딥니까? 

"아, 택시예요"

잠시 택시 안에도, 전화기 속에서도 정적이 흘렀다. 

세영은 옆 자리에 앉은 성수를 힐긋 보았다. 

정면을보고 있지만, 세영의 통화 소리에 잔뜩 집중하고있는 그의 표정이 느껴졌다

"옆에 누가 있군요?"

"네…. "

"알겠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

무혁은 인사도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세영은 고개를 푹숙였다. 

기껏 기다리던 무혁의 전화를 받았건만. 옆에있는 성수때문에 모든걸 망쳐 버렸다. 

누굴 원망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 최성수대리가 원망스러웠다.

"이 시간에 남자친구인가 봐요." 세영을 떠보는 성수의 질문에 그녀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네."

택시가 세영의 고시원 근처에 도착할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았다. 

세영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무혁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따라 집으로 향하는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대지 답사를 돌고 현지 시공사 소장과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뒤 느지막이 호텔로 돌아온 무혁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송서림을보고 터지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장난 하나." 

뉴욕에서도 난잡한 미망인 건축주의 유혹을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한국에서까지 이런 더러운 경우를 겪을 줄은 몰랐다. 아슬아슬한 슬립만 입은채 

무혁의 스위트룸을 침입한 송서림은 여전히 거슬리는 눈망울을 치켜 뜨며 날카롭게 웃었다. 

"욕도 잘 하시고. 또 다른건 뭘 잘할지 궁금하네요. 이리와요. 

내가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재미 좀 보자는건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설마 뉴욕에서 생활했다더니 게이, 뭐 그런거야?”

무혁은 송서림에게는 시선조차주지 않고 캐리어를 들었다. 

이딴 여자도 건축주라고 꼴같지않게 나대는데 짐도 풀 시간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난다. 

캐리어를 가볍게 든 무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정경열 부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이 받아 폭발하기 일보직전인데 요양중일 거라 생각했던 경열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진다.

"차무혁입니다. "

-어, 차 이사. 무사히 도착했고? 

한술 더 떠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자하니 평소의 무혁답지 않게 분노가 치밀었다

"도착한지가 언젠데."

"지금 송서림이 어디에있는 줄압니까?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내침대 위에 저여자가 도대체 왜 누워있는 겁니까?"

상사인 정경열 부소장이라해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송서림씨랑 지금 같이있다고? 

"이 호텔에선 투숙자 확인도 안하고 예약자랍시고 아무나 스위트룸을 열어 준답니까? 소름끼쳐서 정말.”

-호텔에서? 적극적이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차이사 좋다고 작년부터 난리였잖아.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건배소리에 무혁의 눈빛에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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