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호텔에서 적극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을 때마다 가난 속에서 사투했다.
어머니가 떠 난 순간, 아버지의 삶에 모든 색채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묵묵히 일만했고 무혁을 돌 보면서도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우직하게 기다리는 아버지는 언제든 떠날 어머니를 알면서도 받아줄만큼 경솔했고
언제든 떠날 준비가되어 있으면서도 욕구에 휘둘리 며 돌아 오는 어머니는 경박했다.
하지만 무혁 역시 어머니를 남몰래 기다렸기에 그런 경솔한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무혁을 버릴 수 있음에도 그를 키우는 아버지가 감사하기도 했으며
어쩔 껄 땐 무혁을 무기 삼아 어머니가 돌아 오길 바라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했다.
변치 않는 사실은 봄바람에 나부끼는 어머니가 끔찍하다는 것이다.
무혁은 화가인 어머니를 닮아 어릴 적부터 동양화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그는 그림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있어 특출 난 기량을 보였다.
미술을 좋아했던 무혁은 건축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건축설계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마침 가난을 딛고 일어나 건축사무소를 차린 아버지를 보며
무혁은 자연스럽게 건축과로 진학했고 유학을 떠나게되었다.
뉴욕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으며 무혁은 온갖 건축 상을 휩쓸었다.
수많은 여자가 젊은 건축 천재 차무혁의 예술 세계에 찬사를 보냈고 또한 현장에서 다져진
그의 거칠고 날것 같은 육체를 탐 냈다.
벗고 달려든 여자도 있었고 어마 어마한 금액의 돈과 마천루 설계를 제시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치던 미망인도 있었다.
하지만 무혁에게 그녀들은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세계를 생명력으로 덧입혀주지 못했기에
그는 시선 한번주지 않고 제 창작 세계에만 전념했다.
무혁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 위기에 몰린 순간에,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도망친자가 어머니였다.
사랑은 언제나 변할 수있는 것이었다. 가벼운 감정.
매년 추워 질 때면 기어들어 오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 때면 뛰쳐 나가는 한없이 경솔한 본능.
그런 불안정한 감정 에제 마음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여성 혐오증 이라기 보단, 하루 아침에 변할 수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신했다.
그렇다고 남자로서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상상하며 수음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밤새 몽정을 해서 옷을 적시는게 귀찮기에 샤워를하며 손으로 욕구를 해결하곤했다.
소변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로 정액을 배출해내는게 전부였을뿐.
그에게 자위는 번거로운 하루의 의무일 뿐이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건축물들로 가득 차있어 음욕에 할당 할만 할 여분의 용량이 없었다.
그런 무혁이 처음으로 여자를 안았다.
밤새 여러번이나 욕구를 쏟아냈지만, 그것도 모자라서 세영을 집으로 보낸 뒤에 또 손으로 정욕을 해결해야했다.
그러고도 이렇게 그녀를 떠올리고있다.
"이것도 인연인가 봐요. 그렇게 거절 하시더니 여기 직접 나타나시고."
조수석에 앉은 송서림의 비음섞인 목소리에
등황색, 군청색, 혈암 색으로 울긋불긋 물들어 나가던 무혁의 심장이 다시 무채색으로 생기를 잃었다.
송서림은 운전을하는 무혁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들이 밀며 말을이었다.
"웃는 모습도보고. 좋네요. 가슴 설레게."
무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 치우세요. 너 보여 주려고 웃는 거 아니니까."
송서림이 입을 틀어 막으며 놀란 눈을 치켜 떴다.
무혁이 대꾸조차하지 않자 그녀가 날카롭게 웃었다.
"이러니까 내 심장이 남아 나질 않지."
무혁은 송서림의 숨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세영의 호흡은 사 람을 편하게 해주 었는데,이 여자는 모든 것이 거슬린다.
짜증 난 무혁의 표정을 알아챈 송서림은 비로소 입을 다 물었다.
차 안에서 무혁은 다시 세영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한 번 흐트러진 집중력은 돌아 오지 않았다.
이럴땐 상상하려 애쓸 필요없이 그녀를 옆에두고 다니면 좋으련만.
무혁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튕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3주동안 이런 기분으로 일이 잘 풀릴 지 벌써 걱정이다.
[이제 일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씻고 전화 할게요.]
일과를 보고하는 무혁의 문자 메시지에 세영은 들뜬 가슴을 부여 잡았다.
이미 읽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다가 누가 볼 세라 휴대폰을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정경열 부소장의 사무소 복귀기념으로 월요일 밤부터 회식이 열렸다.
급한 불을 꺼야하는 인원은 소고깃집에서 식사만하고 돌아갔고 남은 여덟 명의 사람만 2차 자리로 향했다.
틈을 타 슬쩍 도망치려 던 세영은 최성수 대리에게 붙잡혀 회사 근처 맥줏집까지 따라갔다.
"연애 상담해 줘야죠. 어딜 가세요."
"대리 님, 저 연애 상담 해드릴 처지가 아니에요."
세영의 말에 성수가 눈빛을 반짝였다.
"왜요? 설마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죠?"
세영이 대답하려는 순간, 맞은 편에 앉아있던 김우식 실장이 끼어들었다.
"세영씨 연애 사정을 최대리가 왜 이렇게 궁금해하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세영씨 나이라서요."
성수의 말에 김우식 실장이 의심의 눈길을 쏘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세영씨 나이가 아니라 세영씨 좋아하는거 아니냐, 너? 그러고 보니 요즘 수상해."
"제가 세영씨 좋아한다고 뭐 세영씨가 저한테 눈길 한번 주나요."
"오, 부정도 안 하시겠다?"
"말이 그렇다는거죠."
성수의 말은 모호했지만, 세영은 드디어 깨달았다.
무혁과 밤을 보내는 사이, 왜 그가 성수의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의 행동을 보아하니 성수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게 분명했다.
그런데 타인의 일에 관심이라고는 없는 무혁이 언제 그런걸 눈치 채고 있던걸까.
더군다나 주로 4층 이사실에서 일하는 무혁은
3층에서 일하는 세영이나 성수를 매순간 지켜 보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그렇다고 성수에게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미리 거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제 무혁과 사귀기로한지 막 일주일이 지나는 차에 상의도 없이 둘의 관계를 떠벌릴 수도 없었다.
세영에게 시선이 쏠려있는 지금은 곤란하지만, 나중에 성수와 단둘이 있을 때
서로 민망하지 않도록 슬쩍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언급해야 겠다며 생각했다.
"어, 차 이사. 무사히 도착했고?"
상념에 빠져 있던 세영은 전화를 받는 정경열 부소장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씻고 세영에게 전화를 걸겠다더니 아마 일 때문인지 정경열 부소장에게 먼저 연락 한 모양이다.
"송서림 씨랑 지금 같이있다고?”
잠시 행복한 미래를! 세영은 반갑지 않은 이름 석 자에 얼굴이 굳어 버렸다.
밤 10시가 다 된 늦은 시간에 무혁은 무슨 이유로 송서림과 함께 있는걸까.
더군다나 세영에게는 일이 끝나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라고했는데
여전히 송서림과 함께 있다는 말에 가슴이 쿡쿡 쑤 셨다.
"호텔에서? 적극적이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차이사 좋다고 작년부터 난리 였잖아.”
이어지는 정경열 부소장의 말에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송서림이 무혁을 유혹했던건 사무소 사람들 모두가 알고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단둘이 제주도에 남겨진 두 사람을 떠올리니 기분이 비참했다.
도대체 뭘 하길래 '호텔에서 적극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낸터라 상상하지 않으려해도 자연스럽게
무혁과 송서림이 침대를 뒹구는 모습이 떠올랐다.
무혁이 정경열 부소장에게 전화까지해서 그런 일을 떠벌 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송서림과 비교하자니 세영은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