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사내연애를 권장합니다. (19/40)

19화.사내연애를 권장합니다.

"송 서림 좋아해요?"

"네? 아, 네. 좋아 해요."

세영은 지레 찔려서 뜯은종이를 고이접어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잡지를 덮어 원래자리에 꽃아 두었다. 

걸레들 들고 일어 서려하자 최성수대리가 그녀의 손을 툭툭 치며 불렀다. 

"세영 씨,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세영은 거리낌없이 칼퇴하겠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몇 년전 다른 동료도 그녀에게 시간되냐 물었던게 데이트 신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정신을 바짝차렸다. 

"저녁 엔 왜요?"

물론, 이젠 무혁이 있기에 누구라도 데이트 신청을 하려한다면 확실히 선을 그을 작정이었다. 

"같이 식사할까 해서요." 

"저랑요?"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성수 대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잡아 먹어요, 세영 씨." 

"네?" 

"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영 씨 또래거든요. 스물 일곱 살."

"아."

"그래서 세영씨 또래는 뭘 좋아하나 연애상담 좀하고 싶어서요."

참으로 난감했다. 뜬금없이 연애상담을 하려드는 성수를 보니 마음이 갈팡질팡 했다. 

상담을 들어주자니 혹시 이게 고백의 전조 일까봐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피하자니 괜한 오해를 하는 것 같기도했다. 

고백도 못알아 듣는 둔탱이가 될 것이냐, 아무나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도끼병 환자가 될 것이냐.

"야! 사내 연애는 안된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속닥거리고있는 세영과 성수를 보며 김우식 실장이 버럭소리를 질렀다. 

"그런거 아닙니다. 실장님!"

지레 놀란 세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목발을 짚고 나타난 정경열 부소장도 한몫 거들었다. 

"우리 회사 사내연애 상관 없어. 아니지. 권장하는바이지. 성수야, 언제 국수 먹여 줄래?" 

"열심히 국수 끓이고 있는데 세영씨가 도통 관심이 없네요. 국수가 퉁퉁 불어 터지고 있습니다, 소장님." 

"성수야, 국수가지고 유혹이 되겄냐? 스테이크라도 썰면서 돈 자랑을 해야지. 

마음의 크기와 물질의 크기는 비례하는법이다.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보겠냐고, 

네 마음을 돈으로 표현해.”

"받아 적었습니다. 부소장님."

사색이 된 세영의 얼굴을 보며 김우식실장과 최성수대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 세영씨 놀리는 재미로 산다니까. "

"실장님, 오해하시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부소장님, 벌써 출근하세요? "

"어, 누워있기 답답해서 왔어. 우리 뭉치도보고 싶고. "

목발을 짚은 정경열 부소장 주위를 뱅뱅 도는 뭉치가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며 까무러 친다. 

"커피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그럼 땡큐지."

결국, 세영은 농담을 못알아 듣는 둔탱이가 됨으로써 어색한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송서림의 건축의뢰는 작년부터 거절하고 있었다. 

그건 송서림이 여자로서 질척 거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무혁이 추구하는 건축스타일과 동떨어진 설계를 의뢰했기에 

돈은 원하는대로 주겠다는 그녀의 제안 역시 의미없었다. 

돈이나 명예를 원했다면 애초에 한국으로 돌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무혁이 추구 하는 삶은, 그저 제 세계를 구축하는 하루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자는주의였다. 

미래의 거창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하며 오늘 하루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벽에 부딪힌 송서림은 결국 무혁 대신 정경열 부소장에게 건축 설계를 의뢰했는데 

하필 대지 답사를 앞두고 정경열 부소장이 다쳤다. 

VIP 건축주를 홀대하는 느낌을 줄 수 없다며 경열은 극구 무혁을 제주도로 보냈다. 

설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지 답사만 무사히 마무리 해달라는 경열의 말에 

무혁은 어쩔 수없이 제주도로 향했다. 

겸사 겸사 제주도에있는 시공사를 돌며 처리해야 할 업무들도 해결해야했다. 

소장과 부소장이 비슷한시기에 입원을하며 무혁이 없으면 건축사무소는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출장을 떠나는 순간이 이토록 끔찍 하긴 처음이었다. 

무혁은 단지 제가 맡고싶지 않은 일을 점검하기 위해 제주도로 간다는게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끈질기게 질척 거리는 송서림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한몫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착각이었다. 

렌탈 한 SUV에 오르는 순간, 그는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한세영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짜증 난다는 걸 깨달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그의 공간에 색감을 물들이는 한세영과 달리 

송서림은 인사를 한순간부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듯한 향수 냄새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출장을 미뤄 보긴 처음이었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에 미루는 것도 부담감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니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혁은 세영의 얼굴을 떠 올렸다.

존재만으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던 자그마한 여자가 지난밤 제 육체 속에도 생기를 불어 넣었다. 

일하는 데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존재감없는 한세영이 

그의 몸에 생명력을 불러 일으킬거라고는 미처 예상 한 바가 아니었다.

예상과는 약간 빗나간 상황이었지만, 즐거운 오산이었다. 

아니, 즐겁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벅찬순간이었다. 

먹색의 평면적인 차무혁의 세계에 석관주 붉은 혈암이 퍼져 나가며 절제된 공간 안에 입체감이 살아났다. 

무혁은 세영을 안으며 건축물을 세우며 느끼던 희열 그 이상의 무엇을 느꼈다.

죽은 건축물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자취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건물은 의미를 가진다. 

무혁의 공간에 사람이 들어 찼다. 

그녀의 색으로 번져 나갈 심장이 벌써 생명력을 얻어 팔딱거린다. 

치열했던 어린 시절엔 여자라는 생물과 가까이 지낼 기회 자체가 없었다. 

남학교를 나오기도했고 아버지의 사업이 휘청 거릴 때마다 어린 나이에도 현장일을 도왔으니까. 

무혁은 남부러울 것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물론, 태생은 그랬으나 아버지의 사업에 기복이 생길때마다 집안엔 불화가 생겼다. 

건축가인 아버지의 사업은 경기 흐름에 민감했다. 

대금 지급이 밀려 사업이 위태로워졌을 때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아내가 가출을 했는데도 아버지는 태연 해 보였다. 

무혁은 그런 아버지가 원망 스러웠다. 

아내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일만하는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가 당연하다는 생 각까지했다. 

'엄마, 어딨어요. 엄마. 엄마…. 엄마보고 싶어. ……'

어린 무혁은 흐느껴 울었지만, 

엄마는 돌아 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말없이 돈을 벌고 밥을 차려 줄 뿐이었다.

하지만 무혁은 어느날 아버지가 홀로 울고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무혁 앞에선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침실에 혼자 남겨졌을땐 그저 연인을 잃은 가여운 남자에 불과했다. 

사업이 다시 일어날 무렵,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다. 무혁 부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다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졌을때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같은 일이 몇 번이나 계절처럼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무혁을 책임 졌으나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아내 때문에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무혁이 성인이 되던해에 또 가출 한 어머니는 영원히 돌아 오지 않았다. 

부모의 잦은 이별과 만남마다 상처받는 건 무혁이었다. 

연인이 실연당하는 끔찍한 감정을 아들 인 무혁도 고스란히 느꼈다.

가벼운 이별과 신중하지 못한 만남을 거듭하며 무뎌지는 어른처럼, 

어린 무혁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신하게되었다. 

사랑 한번 안 해본 어린아이가 간접 경험만으로 만남과 이별에 선을 긋게되었다.

부자는 매번 절망했고 아픔 속에서 슬퍼했으나 서로에게 티내지 않았다. 

비로소 남겨진 부자는 어른이 된 것이었다. 너무 늦게 어른이 된 아버지.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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