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속도위반 (14/40)

14화. 속도위반

"조심해요. 정경열 부소장님이 다친 곳이 여깁니다." 

"네…."

물론 그녀가 휘청인건 그의 손길 때문이었지만 그런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혁은 세영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손만잡고 걷는건데 키스를 할 때 만큼이나 온몸이 짜릿했다. 

동공에서 시작된 지진이 머리를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무혁 앞에 선 항상 가슴이 떨렸는데 이젠 손까지 떨려왔다. 

사랑에 빠지는게 이런 기분일까. 알면 알수록 차무혁이라는 남자가 멋있게 보이기만 했다. 

세영의 목표는 무혁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는데 같이 있을수록 세영만 사랑에 빠지는 것 같았다.

평소 과묵하다가도 시공업자의 무례한 불법 행위를 참지 않고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그의 모습이 여심을 뒤흔들었다. 

어릴 때부터 공사판에서 굴렀다나. 학구적인 엘리트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보니 그의 근육질의 몸이 심상치 않았다. 

더 알고 싶었다. 차무혁이라는 남자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혼자만 사랑에 빠지면 안되는건데. 

이렇게 순식간에 빠져들다가 눈 깜빡하고 나면 결혼식장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여전히 그는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거 같은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잠시 수컷의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무혁의 눈빛을 곱씹느라 세영은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진작 물어야 했는데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그의 날것 같은 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려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울로 갑니다." 

기껏 동해까지 와서 바다도 안보고 가겠다고? 

"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

"아…. 약속되게 잘 지키시는구나…. "

"네. "

세영의 결심이 허망하게도 흔들리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으니 바다를 보며 식사를 하고 술을 한 잔 곁들이면 그를 유혹할 용기가 날 것 같았다. 

차무혁이라는 남자는 정말 위험했다. 

하루아침의 순진한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 놓을 줄이야. 

지혜는 세영에게 사랑에 깊이 빠지기 전에 속궁합부터 제대로 확인해 보라는 음흉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3개월.

7년이나 앞선 사랑의 속도 차이. 

일주일만에 세영은 무혁에게 빠져들고 있었고

앞으로 3개월이 흐르면 그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결정하기엔 결혼이라는 건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었다. 

차라리 속궁합이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결혼 생각을 접는게 낫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영은 무혁의 모든 행동에 심장이 떨려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섣불리 안기려들다가 헤픈여자 취급을 당하고 '결혼 상대자감'이 아니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두려웠다. 

물론 마음만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런 취급을 당하기엔 세영은 무혁과의 키스조차 처음이었으니까! 

세영은 생활력만큼은 강했고 비록 연이은 불운으로 또 빚을지게 생겼어도 

어디 가서 돈 문제로 호락호락하게 당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 만큼은 백치미를 폴폴 풍겼다. 

무혁 말고는 남자랑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는데 침대로 상사를 유혹해야 한다니. 

'저녁같이 먹을래요?' 

5년 전쯤이었나. 야근을 하러 가던 디자이너가 세영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물은적이 있었다.

'아니요. 저는 삶의 질을 위해서 칼퇴 하겠습니다.

'세영은 정말 삶의 질을 위해 퇴근한것 뿐이었다. 

야근을 할 필요가 없으니 굳이 회사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그는 식사를 권했고 세영은 칼퇴를 선택했다. 

그게 호감 표현이라는 걸 뒤늦게 지혜와 얘기 하다가 깨닫게 되었다. 

사실을 알았을 땐 그 디자이너는 이직한지 오래였다. 

그런 둔한 감각으로 남자를 어떻게 침대로 불러들이냔 말이다. 밀당이 싫었다. 

밀당을하며 머리를 쓰기 엔 세영은 회사에서 머리를 쓰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만난다면 차라리 직진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팍팍한 생활만으로도 고단한데 

다른 고민을 추가하지 않고 사랑 만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직진을 넘어 보통 속도위반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사랑이 없다는거였고. 운전은 또 왜 이렇게 잘하는 건지. 

신호는 용케 지키면서도 막힌 차 사이사이를 가르며 속도를 내 주말 저녁인데 벌써 서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세영은 지혜의 조언은 잊기로 했다. 

속궁합만이 대수는 아니겠지. 함께 있기 만해도 이렇게 떨리는데. 

키스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는데. 괜한 짓으로 다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은 너무 떨려서 그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키스했다고 뺨 때린 주제에 뭘 하겠다고 덤비겠어. 

술에 취해 안기려들려 해도 또 뺨 맞을까 봐 무혁이 그녀를 곱게 보낼 수도 있는 일이고. 

차는 청담동으로 향했다. 아는 동네가 나오자 가슴이 더욱 콩닥거렸다. 

"회사 근처에서 먹죠.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해서." 

"네."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둘이 함께 밤을 보내는 건 무리였다. 

주말에 출장까지 다녀와서는 쉬지도 않고 다시 일이라니. 

이 사람은 정말 일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했다. 

"3주 동안 출장을 갑니다. 제주도로." 

"네…. 네? 추, 출장이요? 제주도?"

3주 동안 출장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세영은 고개를 돌려 무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의연하게 운전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3개월 서로를 알아보자던 사람이 3주나 출장을 가겠다고? 

그럼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2개월 남짓이라는 뜻인데! 

"그러니까 제주도,로 가신다고요?"

불안했다. 3주라는 긴시간도 불안했지만, 제주도라면….

"네. 작년에 거절했던 작업이라 정경열 부소장 님이 저 대신하기로 했는데 

알다시피 부소장님이 입원을 해버려서.”

눈앞이 깜깜했다. 작년에 거절한 제주도 건축물이라면 끈질기게 무혁에게 치근대던 

영화배우 송서림의 의뢰일텐데. 차무혁은 아이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송서림은 오늘이라도 당장 무혁의 아이를 낳아 줄 수있을 듯 행동 할테다. 

무혁이 세영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얘기했다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바심이 났다. 

당장 무혁의 아이를 낳을 용기는 없었지만, 스스로 결정하기도 전에 

송서림 때문에 고민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조건을 비교해 봐도 송서림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 언제요? "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세영은 말까지 더듬었다. 무혁은 여전히 정면만을 응시 한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일 오전에 출발합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직진도 모자라 속도위반으로 달려드는 무혁의 앞에 대형 덤프트럭이 떡하니 길을 막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부소장님까지 아프셔서 무혁이 제주도로 가야한단 말인가. 

건축 사무소에 악재가 든 게 분명하다. 세영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조수석 시트에 몸을 푹 기대었다. 

심장을 날카로운 것으로 쿡쿡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저릿저릿해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3주 동안 무슨마음으로 무혁을 기다려야 하는걸까. 

무혁은 무사히 송서림의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설령 그런다 한들 2개월만에 그를 얼마나 알아 갈 수 있을까. 

그가 2개월만에 세영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만나면 만날수록 혼돈을 주는 남자. 직진하는 남자를 원했지만, 

세영은 그를 따라가기도 바빠 숨이 찼다. 

그런데 정작 그의 마음은 세영의 속도 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섰다.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무혁이 조수석 문을열며 세영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안전벨트를 풀지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안전벨트를 풀어주려 몸을 숙였다.

"저기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