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심상치 않은 몸매
세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돈 때문에 쉬지 못하는 세영은 일이좋아 쉬지못하는 그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밖에 모르는 남자와 함께하는 결혼 생활이 눈에 선했다.
세영이 백발이 될 때까지 일밖에 모르는 무혁은 쉬는 법이 없겠지! 엄마와 아빠는 가난하긴해도 쉬는날이면
둘이 고스톱도 치고 등산도 하고 집에서 고기도 구워 먹으며 지지고 볶다가 깨까지 볶았는데
무혁과 그런 일상을 기대할 수 없을거다.
세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모든 걸 다 갖춘 남자의 문제.
일밖에 모른다는 것.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술과 도박, 여자 문제를 일삼는 남편이 일하는건 싫어해서
집구석에서 놀기만하면 그건 더 큰 문제다. 그러니까 차라리 완벽한 남편이 일만 좋아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정말이 남자는 연애나 사랑을 하고 싶은게 아닌 모양이다. 일하느라 바쁘고 귀찮으니까
동양화인지 화투패인지처럼 생긴 나를 데려다 앉혀 놓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게 할 심산인가 보다.
이젠 차무혁이 '사랑'이라는걸 할 수 있는 족속인지 의심마저 든다.
우스갯소리로 회사 사람들이 차무혁이 사는 완벽하지만,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과 사고하는 방식이 약간 다르다나.
건축을 하기위해 수학, 과학, 예술, 철학까지 모르는 분야 없이 두루 박학할 뿐만 아니라 외모마저 훌륭하지만,
그는 사람에게 선을 긋는다던 동료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영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차무혁이 부족한 건 딱 하나 사람 냄새이지만, 세영이 부족한건 수없이 많았다
무혁과 비교하자면 교양도 한참 부족한 것 같았고,
경리 치고 수학도 썩 잘하진 않아 마감이 급한 순간에도 더블체크는 필수였다.
꼼꼼하고 싹싹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농담 알아듣는 센스는 부족했고 부족한 걸로 따지자면
집에 돈도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런 주제에 언감생심 차무혁을 평가하려 들다니.
세영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제 모습에 실망하며 다시 무혁을 힐굿 쳐다보았다.
엄마는 보증을 마음대로 선 아빠를 구박 하긴 했어도 돈이 없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하며 사람을 평가한건지. 세영은 속물 같은 자신에게 실망했다.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무혁의 모습이 숨 막히게 멋있었다.
저런 완벽한 사람이 사회성마저 충만하다면 세영과 주말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을거다.
그러니 먼저 다가와 준 그에게 고마워하며 그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피워 보자 다짐했다.
그런데 예쁘지도 않고 교양도 부족하고 연애도 모르는 나란 인간을 어떻게 사랑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차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건설 현장으로 들어섰다.
얘기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절경에 세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취미 이야기를 끝으로 두 사람은 계속 말이 없긴했다.) 시동을 끈 무혁이 인사도 없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래도 초겨울인데 히터는 틀어주고 가야지…라며 투덜거리려는 사이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 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전벨트도 내가 풀어줘야 합니까?”
"아니요. 내릴게요."
휴게소도 거치지 못하고 달려왔던터라 몸이 찌뿌둥했다.
현장 사무소에 들러 물을 마시고 시공사 현장소장과 도면을 점검하는 무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현장소장은 세영을 견학차 감리업무를 수행 나온 디자이너 쯤으로 짐작했는지 관심조차 두 않았다.
무혁은 안전모를 머리에 쓰고는 여분의 안전모를 세영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세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설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무혁은 앞장서서 현장소장과 함께 건설중인 건축물로 향했다.
아직 미술관이라기엔 철근구조물로 가득찬 흉흉한 현장이었지만,
광활한 바다가 보이는 풍경만큼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바닷바람이 정면에서 불어 닥치자 제법 쌀쌀해 코트를 여미었더니
언제 본 건지 무혁이 제 코트를 벗어 세영에게 무심하게 건넸다.
그 모습에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이렇게나 다정하다니.
팔을 걷어붙인 무혁의 팔뚝에 힘줄이 불퉁하게 솟아 있었다.
설계도 앞에만 앉아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살짝 드러난 팔만 봐도 하루 이틀 운동을 한 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휴게실에서는 밤이기도 했고 너무 떨려서 미처 곱씹을 수 없었지만, 그의 몸이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일을 하는 무혁의 모습을 보며 지난 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줄자를 들고 무심하게 이곳저곳을 살피는 무혁의 모습에서 야성미가 넘쳤다.
현장일을 하는 현장소장 조차 두 손을 모은 채 긴장하는 모습으로 무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줄자를 거칠게 집어 던진 무혁이 발로 철근을 위협하듯 내리치며 현장소장을 노려보았다.
"패널. 뭡니까? "
해명하라는 무혁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현장 소장의 낯빛에 껄렁껄렁한 조소가 맴돌았다.
세영은 처음 보는 무혁의 매서운 표정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현장일을 하며 거친 삶을 살아온 소장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니, 현장 일이라는 게 그렇지. 책상에만 앉아있는 샌님들이 뭘 안다고 화부터내시나. 그럴게 아니라 이리와서 여길보면… "
"이거 다 철거해. "
"뭐? 하. 지랄병 나셨나. 철거가 애들 장난이야?”
"씨발. 이 새끼들이 지금 푼돈 챙기자 고 장난 하나."
무혁의 형형한 눈빛에 얼어 붙은건 비단 현장 소장 만은 아니었다.
차무혁의 우아한 입에서 터진 험악한 욕설에 세영마저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괴팍하기로 유명한 현장 소장을 눈빛 하나로 제압하는 그의 모습이 세영을 사로잡고 말았다.
음악이라고는 클래식밖에 안듣는다는 저 먼 세상에 있는 것 같았던 남자가 어쩐지 현실 남자로 느껴졌다.
생각보다 교양이 없는 그의 말투에서 인간미와 남성미가 폴폴 풍겼다.
"아, 아니, 이사님…. 하지만 이제 와서 이걸 H빔으로 바꾸기에는 .."
"당신이 뭘 알아서 마음대로 지껄여. 책상 앞? 한글 배우기도 전부터 이 바닥에서 굴렀어.
세월로 따지자면 당신보다 내가 더오래 현장에 있었다고. 알아 들어?"
공사판 수컷의 세계는 살벌했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설계도를 따르지 않으려는 시공사를
기싸움에서 제압하지 않으면 건축주의 안전은 위태로워진다.
다소 과격 하긴했으나 상대를 우습게 보고 마음대로 자재를 바꿔치기 한 시공사를 겁주지 않으면
건축물은 심각한 안전 문제를 지닌 채 완공될 터였다.
"시정하겠습니다."
무혁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현장소장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무혁은 안전모를 내던지듯 집어 던지고는 세영을 바라보았다.
살기가 흐르던 그의 눈이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그녀를 응시했다.
"바다라도 보라고 데려왔는데 험한꼴 보여 미안합니다. 가죠."
무혁은 욕을 하는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그녀는 그 모습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험악한 사내를 단번에 제압하는 수컷의 우월한 승리를 보자 그에게 또다시 반해 버렸다.
취향이 지나치게 우아해서 초라 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날것의 모습을 보자니 흥분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온 무혁이 그녀의 머리에 쓴 안전모를 벗겨 주었다.
세 영은 안전모를 벗기는 무혁의 손이 턱에 살짝 닿자 발끝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