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슴이 떨려
세영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거울앞에서 옷을 갈아 입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양화'같은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아 오늘은 '서양화'처럼 보이고싶어 오랜만에 화장도했다.
회사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복장만큼은 언제나 블라우스에 펜슬스커트를 고수했다.
넘쳐나는 야근과 출장업무로 흐트러져있는 디자이너들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부유한 건축주들을 사무소로 안내하는건
세영의 몫이었기에 정경열 부소장은 그녀의 의상만큼은 격식을 갖춰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언젠가 사놓고 한번도 입어본적 없었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꺼내입었다.
잠깐 점심에 짬을내어 식사만 하자는건데 왜이리도 긴장되는건지.
아직 약속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 무혁에게서 전화가왔다.
휴대폰에 떠있는 '차무혁 이사님'이라는 글자를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번도 문자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전화는 할 줄 아는가보다.
"여보세요."
-차무혁입니다.
"네, 이사님."
-갑자기 현장 감리를 가게되어서 점심 식사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김우식 실장님 아이가 다쳤다더군요.
일방적인 무혁의 이야기에 온갖기대가 무너져내렸다.
현장에 일이 터졌다면 당연히 달려 가야한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차무혁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려거든 아마도 평생 감수해야하는 일이겠지.
"네.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 .."
-옷 편하게 입고 나 오세요.
"네?"
옷을 편하게 입고 나오라는 건 무슨 말일까. 설마….
-점심은 어려울것 같고 함께 현장 들렀다가 저녁식사 같이하죠.
무혁의 말에 세영의 얼굴에 미소가 만발했다.
하지만 너무 티를 내고 싶진 않아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잠깐 짬을내어 점심만 같이 먹을줄 알았는데 드라이브 겸 현장에 같이 갔다가
저녁을 먹는다면 정말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될 수도 있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으니 잘만하면 술도 마시면서 함께 밤을 지새울 수도 있었다.
갑자기 거창해진 데이트 계획에 세영의 심장이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터질 듯이 박동했다.
"언제 출발하나요?"
-지금 갑시다. 상도역 앞입니다.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집을 나서려던 세영은 거울앞에 멈춰 섰다. 옷을 편히입고 나오라는 무혁의 주문을 떠 올렸다.
건설 현장에 가는거라면 아무리 차에서 기다린다고해도 원피스차림은 적절하지 않았다.
사실이기는 하지만 감리업무에 데이트 상대를 데리고 다니는 건축가라는 소문이 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옷을 편히입고 나오라는 무혁의 말 역시 그런 뜻일 터였다.
세영은 한숨을 내쉬며 원피스를 벗었다.
평소 감리 업무를 나가던 디자이너들의 차림새를 떠올리며 편한 청바지에 검은색 후드티, 회색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캐주얼한 옷을 입은건 정말이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캐주얼한 제옷만 생각했는데 매번 슈트차림인 무혁의 캐주얼한 차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조수석옆에 선채 깊은생각에 빠진듯한 무혁의 모습이 숨막히게 매력적이었다.
각이 딱 맞게 떨어지는 우아한 슈트차림의 그를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완벽해서 다가설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바지에 넥타이 없이 검은색 옥스퍼드 셔츠를 입고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까마득한 직장상사가 아니라 데이트를 나서는 연인처럼 보였다.
훤칠하게 쭉뻗은 다리가 청바지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탄탄한 가슴 근육과 광활한 어깨가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
건축가보다는 여자친구와 드라이브를 가는 전성기의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이런 남자라면 설사 사랑받지않는다 해도 매일 바라보는것 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지.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곁에 있으면서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꼼찍 할 수도 있겠지.
"세영씨."
상념에서 빠져나온 무혁이 세영을 발견했다.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또 한번 심장이 철렁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무혁은 고개를 까딱하며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다정하게 문을 열어주는 모습에 이미 한번 떨어졌던 심장이 또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안전 벨트를 매는사이 무혁이 운전석에 앉았다. 히터를 틀어 놓았던 차는 따뜻했다.
가슴이 하도 떨려 제법 썰렁한 날씨에 열이올라 땀까지 날 지경이었다.
"미안합니다."
사과도 할 줄 아는구나.
"네?"
"멋대로 약속을 바꿔서."
"아, 아니에요. 드라이브도 할 겸 좋죠. 그런데 어디로가는 거예요?"
"소장님이 맡고 있던 미술관이요. 동해."
"아."
무혁의 말에 온몸이 활활 타 들어 갔다.
강원도라면 지난번처럼 자연스럽게 하룻밤을 보낼 수도있다.
폭우가 쏟아지면 좋겠다.
술을 먹어서 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무작정 무혁에게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이 지혜의 조언 때문인지
그와 기필코 하룻밤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습 키스했다고 뺨까지 때려놓고는 별생각을 다하고있다.
그렇지만 그생각, 정말 멈출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늦지 않게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아, 아니요."
"네?"
"아니, 그러니까, 그게, 과속하지는 마시고요."
무슨일이 있어도 데려다 주겠다는 말에 세영은 살짝 실망했지만,
속내를 들킬 수 없어 과속하지 말라며 얼버무렸다. 무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했다.
무혁은 말없이 차를 출발했다. 야속하게도 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햇빛이 찬란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지난번에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 졌으니까.
일주일만에 무혁과 두 번이나 강원도로 향했다.
동해에 짓고있는 박물관은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는데 업무를 빙자한 데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연인이 되어도 무혁은 말이 없었다.
지난번엔 무혁의 침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창밖을 구경했지만, 이번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음악 같은건 안 들으세요?"
"일할때 영감이 필요하면 가끔 듣습니다."
"어떤 음악이요?"
"클래식 듣습니다."
클래식이라면 베토벤의 <운명> 말고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도 도입부의 '빠 바바 밤'정도만. 그다음에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기억도 없다.
"세영씨는요?"
"아…. 저는 그냥… 신곡 좋아해요."
"단테의 <신곡>이라면…. <일 트리 티코 (II Trittico)>는 뉴욕에서 일할 때 종종 듣곤했습니다."
"아…. "
세영이 말하는 신곡은 최신곡이었지만, 그녀도 클래식 얘기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혁의 말을
정정 했다간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아무 래도 음악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는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과묵한 그가 <신곡>에 대해 질문 같은 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취향이 차이 나는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도 무혁은 잘난체를 한다거나 사람을 기죽인적도 없는데
너무 고고한 그의 취향 앞에서 어쩐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또 다시 정적.
세영은 화젯거리를 떠올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취미! 부부는 취미가 같아야 평생 함께 지내도 지루할 틈이 없다고했다. (주부 잡지에서 읽은 내용이다.)
"이사님은 취미가 뭐예요?"
'취미'라는 단어를 기점으로 정적이 몰아쳤다. 이번에도 불길했다.
굳이 답을 듣지않아도 두 사람의 취향이 참으로 맞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음, 그럼 쉬는날은.… 주로 뭘하세요?"
"글쎄요."
"하긴. 피곤하셔서 잠 보충하셔야겠어요."
"쉬어 본 적이 없어서.”
"한번도요?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