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술 취하면 게임 끝
"또 술 마셔?" "취하는거 싫으면 취한척이라도 하든가."
"그런데 잤다가 만약에 이사님이 없던일로 하자고하면 어떻게해? 그거 좀 비참할거 같은데."
"비참하긴 별게 다 비참하네. 너도 즐겼으니 된거지. 막말로 이 얼굴, 이 피지컬. 거절 할 이유가 없는데?
너 혼자 사랑에 빠져서 비련의 여주인공 되는거보다 즐겨보고 아니다 싶으면 끝내는게 나은거 아니야?"
어딘가 허술한 지혜의 성적인 지혜가 살짝 의심스럽긴했지만, 딱히 다른방법이 떠오르진 않았다.
연애고자인 세영으로서 어차피 맨 정신에 무혁에게 속궁합부터 보자고 말할수는 없을것 같았다.
지난번처럼 술에 취하면 어떻게든 일이 벌어지겠지.
"소주란 말이지…."
금세 피자 반 판을 뚝딱 해치운 지혜는 본격적으로 떡볶이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영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늦은감이 있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탄수화물을들이 붓기엔 몸매관리가 절실한 순간이었다.
7년만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무심한 세영이 마음에 들어 결혼하자고 했건만,
그녀는 무심하다못해 무혁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오랜만에 고요해진 휴대폰을 보며 평화를 찾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일에 여념없는 자신은 그렇다고쳐도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는걸 뻔히 아는데 문자메시지 한번 보낼성의가 없단 말인가.
자각하고 보니 여자의 연락을 기다리고있는 제 행태가 영락없이 스스로 차버린 맞선 상대들과 다를바 없는 모습이었다.
무혁은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3층으로 내려갔지만, 그녀는 인사도하지 않고 퇴근 할 작정이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하려고했다. 애초에 무심한 한세영에게 끌렸던거니까 그녀를 나무라기엔 양심없는 짓이지.
그런데 기껏 아버지에게 만나는 사람이라고 소개 했더니 결혼 상대는 맞선 나가서 찾으란다.
하아…. 우습게도 초조했다.
무심한 여자가 좋아 결혼하자고 매달렸는데 무심하게 차이는 꼴이라니.
설마7년전 일로 복수하는건 아닌지 괘씸한 생각까지들던 찰나에 그녀가 제 연락처는 아냐며 따지듯물었다.
다른 여자들이 무혁에게 똑같이 물었을 땐 진절머리 나고 짜증만 났는데 세영이 묻는말엔 어쩐일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연락을 하겠다고했다. 그러고도 불안해 그녀와 식사약속까지 잡았다.
짬이 날리가 없었다. 그래도 짬을냈다. 다른 여자들한텐 절대 안나던 짬이 한세영에겐 났다.
언제부터 이랬던걸까. 분명 7년전, 그녀가 고백했을때만해도 얼굴조차 가물가물 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정식으로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멋을내지 않은 검은색 생머리가 찰랑 거릴 때마다 반사되는 빛을 보았다.
마치 그녀에게서 빛이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컴퓨터 앞에 목을 빼고 앉아있는 회색 인간들 사이 사이로
세영이 요리조리 바쁘게 움직이며 "집에서 직접 만든떡인데요, 드셔보세요."라며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다.
"어때요?"
"글쎄. 설탕 빼 먹은거야?"
"설탕 넣었어요."
"그냥 무맛인데?"
"아….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아니, 그렇다고 안 건강하게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 고요.…."
"세영씨 놀라는것 좀 봐. 농담이야. 엄청 맛있네. 팔아도 되겠어. 집에서 이런걸 했어?"
"제가 한 건 아니고 엄마가요."
"아…. 어머니가 하신거야? 농담이었어, 농담. 어쩐지 단맛이 덜해서 건강한 맛 이더라. 건강떡이지?"
"네? 네."
사람들의 농담에 얼굴이 붉게 물드는 세영을 보며서 화지에 붉은 물감이 번지는 수묵 담채화를 떠올렸다.
무혁은 농담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항상 건축 설계 도면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일얘기가 아닌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우연히 농담을 듣는다고해도 웃음을 지을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영이 사람들의 농담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알았다.
역시나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상사들의 장난에 수채화처럼 울긋 불긋 꽃같은 물감이 번져가는 그녀의 볼을 보며,
무혁은 그녀가 수묵 담채화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세영은 언제나 분주하게 일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은 수묵화에 채색을 입혀가는것처럼 생기가 피어 올랐다.
쏟아지는 햇빛 사이 사이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먼지를 환기 시키려 창을 열었다.
그녀가 오면 먼지는 더 이상 현란한 춤을 추지 않았다.
야근으로 우중충해진 사무실 곳곳에 꽃을 놓아두고 어느 날은 아예 화분을 들여 놓기시 작했다.
건축사 사무소 건물 앞에 길 고양이 밥을 챙기기 시작 하더니 언젠가는 안락사 당하기 직전인 유기견을 데려왔다.
'저희집에서 키우고 싶은데 개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죽는 것 보단 나으니까 사무실에서 키우면 될까요? "
그렇지 않아도 건축사 사무소에 개를 키우자며 노래를 부르던 정경열 부소장은
대답대신 하얀 솜뭉치같은 몰티즈를 안아들었다
"건축사무소에 개 한마리 정도는 키워줘야 럭셔리해 보이긴해. 어때. 나 좀 여유있는 부소장 같지않아? 그렇지?"
무혁의 동의를 구하는 정경열 부소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순간, 또 한세영의 볼에 붉은 빛 물감이 번졌다.
아무튼, 무혁에게있어 한세영은 7년동안 변함없이 수묵화 닮은 여자일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녀가 7년전 이후로 그에게 다시는 고백하지 않아 독설을 날릴 일은 없었다.
무혁의 머릿속엔 언젠간 짓고 싶은 수천채 빌딩들의 설계 도면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뇌에는 그가 창조한 세계가 존재했다.
한국의 자연과 어우러진 건물중심에는 그가 언젠간 설계하고 싶은 마천루도 존재했다.
하지만 무채색의 생기없는 공간만 존재할뿐. 공간을 채우는 사람은 그의 세계에 없었다.
건물은 그의 설계로 실체가 생기지만, 사람이 생활함으로 비로소 하나의 예술품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무혁은 제가 설계 한 건축물에 사람의 흔적이 새겨 졌을때쯤 꼭 다시 방문해 보곤했다.
무혁은 제가정에 한세영이 생기를 불어 넣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생각은 평생 해본적 없었지만,
낳아야한다면 그녀가 낳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집에 있으면, 사람 냄새가 가득 할 것 같았다.
7년이나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킨 그녀가 그의 집에 평생 머무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혁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서로의 삶에 안정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세상에서 건축물말고 무혁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에겐 일이 전부였으니까. 아이를 출산하기까지 구애를거쳐 연애와 결혼이라는 순서를 지켜야한다는걸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기위해 속내를 숨겨가며 사회적 관습에 자신을 맞춰 말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사기 결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마음을 속이는 건 오래 갈 수 없을테니까.
'날 아직도 좋아합니까?' 세영과 처음 키스했던 지난 밤, 무혁은 그녀에게 물었지만
어쩌면 그 물음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한세영이라는 여자가 시나브로 제 마음에 젖어 들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 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천하의 차무혁이 한낱 여자에게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의뢰인의 별장에서 부적절한 키스를했고 세영은 그의 뺨을 때렸다.
'그만 좀하세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을 줄테니 결혼을하자는 제안은 거절 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지만,
키스를 거절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오래전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낳아 달라는 제안을 거절 당했을 때와는 달리 갑자기 심장이 뻐근 해졌다.
처음 느껴보는 아릿한 통증에 무혁은 잠시 당황했다. 이성적인 고백뒤에 생각지도 못했던 욕구에 휩싸였다.
의식하지 못하는사이, 차무혁의 무채색 육체에도 붉은물감이 서서히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