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속궁합부터 봐야지
세영과 지혜는 고시원 옆 건물의 편의점 파라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맥주를 마셨다.
맥주 한 캔에 비해 안주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어차피 안주였기에 별 상관 없었다.
"넌 짝사랑을 했으면서 왜 나한테 이제야 말하는데?"
"7 년이나 된 일인데 뭘.”
"고백했었다며.“
"차여서 너한테 말하기 창피했어.”
"근데 너 의외다. 누구 좋아해도 혼자 속으로 끙끙 앓을 줄 알았지 먼저 고백도 했어?"
"그땐 어려서. 우리 둘이 안 어울리는 줄도 모르고."
"근데 그 안 어울리는 남자가 이제 와서 애를 낳아달라고했다고?”
"응. “
스물 일곱 나이에 무려 연애 경험이 여섯 번이나 되는 지혜 역시 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뭐, 결혼이 급하긴 한가 보네. 맞선 시장에 안 먹힐만큼 외모가 별로인가?
배나오고 머리 까졌으면 아무리 회사 이사라고해도 좀 그렇긴하지.“
세영이 한 번도 차무혁에 관한 이야기를 지혜에게 해준 적이 없어서
‘이사'라는 직함만 듣고 그녀는 그의 외모를 제멋대로 상상했다.
"그렇진 않아.“
세영은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에 포털 사이트 인물 검색에 나오는 무혁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지혜의 눈이 대번에 커다래졌다.
"이 얼굴에 회사 이사님이라고? “
"응.”
“그런데 대뜸 애를 낳아달라고했다고?”
세영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무혁의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이고 그는 3개월 뒤에 결혼을 원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 사랑을 해보기로 했다는 문제의 발언까지.
"이사님도 널 오래 좋아하셨던 건 아닐까?"
"그건 아니야. 소장님이 자꾸 맞선 보라고 종용하셨나 봐. 결혼이 급한 거 같아.“
세영이 무혁의 얘기에 넋을 놓았을 때처럼, 지혜 역시 세영의 얘기에 넋을 놓았다.
"그럼 뭘까. 허울만 좋은가? 이사이긴 한데 빚이 많은 그런 거 있잖아.”
"내 1년치 연봉보다 한달 월급이 많으셔. 우리 건축사무소 소장님 아들이잖아.
실질적으로 따지자면 언젠간 사무소도 이사님이 갖게 되겠지. 그리고 우리 집 빛, 다 갚아 주겠대.“
"뭐? 그건 이상한데. 사기꾼들이 여자 꼬실 때 하는 멘트 아니야? 순진한 여자 밝히나?
너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소장님도 뵙고 왔다니까. 그리고 이사님이 여자 만나는거 한번도 본적없어.
작년엔 영화 배우 송서림이 대놓고 따라 다니는데도 칼같이 거절하더라고,“
입을 삐죽이던 지혜가 냉동피자에 인스턴트 떡볶이를 돌돌 말아 세영에게 건넸다.
"뭐야, 이 괴식은?”
“잡 쉬봐.”
"어? 얘 먹을 줄 아네.”
세영은 피자와 떡볶이의 오묘한 조합에 감탄하며 쫄깃한 식감을 음미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이 얘기만 듣고도 난 벌써 사랑에 빠지겠다."
"그런가?"
"속궁합만 확인하고 그냥 바로 결혼해."
"뭐, 뭘 확인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지혜의 표정에 세영은 아연실색 했다.
차마 속궁합을 이미 확인했다는 부연은 덧붙이지 못했다.
"배우 뺨치는 외모에, 돈도 많아,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해. 너도 이사님 좋아했다며. 걸리는 건 그거 하나네.”
"뭐가 걸려?“
"성 기능에 문제 있는거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그렇게 완벽한 남자를 여자들이 왜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뒀을까?
사지 멀쩡한 남자가 경제력 운운하면서 과정 건너뛰고 애부터 낳자고 했는지 솔직히 의심이 드는데? “
부끄러운 단어를 쏟아 내는건 지혜인데 얼굴이 빨개지는 쪽은 세영이었다.
"실은”
"실은?"
"회사 휴게실에서 잠깐…"
"잠깐? 잠까 아안?“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지혜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아니, 뭐. 그렇게 됐어. “
"그래서. 어땠는데? “
"좋긴 좋았는데.…. “
"왜? 뭐가 별로야? “
"아니, 너무 좋았는데… 인기척이 들려서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나와버렸어.“
"잘됐네. 한번 해봤으니 두 번은 더 쉽지 뭐. “
"그래도 처음에 너무 쉽게 했으니까 두 번째는 서로를 좀 알아가고 해야하지 않을까? “
찔리는 바가 있어 살짝 발을 뺐지만, 지혜는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지 바보야. “
"응? “
"정 들기전에 확인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괜히 미련 생기기 전에 작별 인사 해야지. “
"아니, 그래도 “
"그게 너한테도 좋고 남자쪽한테도 좋은 거지. 막말로 석 달 사귀어서 있는대로 정 다 들었는데
속궁합 안 맞는다고 헤어지면. 남자는 더 비참할걸? 게다가 이사님은 가정이 필요하다며.
3개월 안에 결혼해야 한다며. 아니다 싶으면 뜻맞는 사람 찾으라고 차라리 빨리 놓아줘야지.”
"그런가?"
"네 쪽도 그래. 정들었다고 속궁합 안 맞는데 억지로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리 우리가 팍팍해도 돈 보고 결혼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
“그건 그렇네.”
지혜의 청산유수에 세영의 귀가 팔락거렸다.
"마음주기 전에 잠부터 자봐. 밖에서 얼렁뚱땅하는 그런거 말고 제대로 분위기 잡고 말이야.
별로면 끝내도 아쉬울거 없잖아. “
"그런데 지혜야. “
"응. “
"내가 결혼 할 수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스물 일곱살이면 결혼 적령기라는 소리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급격하게 비혼 인구가 늘었고 남녀 불문 혼인연령도 높아졌다.
세영도 막연하게 언젠간 결혼을 해야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 같았다.
석 달 만에 결혼을 하고 아이부터 낳자는 남자의 말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이사님 그냥 보내 버리고 몇년뒤에 나이차서 결혼하려고 결심했을 땐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가 이사님이랑 비교되어서 후회할 거 같은데. “
"그렇긴 하겠지.“
"그냥 맞선 본다고 생각해. 좀 특이한 고백이긴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맞선이랑 다를것도 없네.“
"맞선? 그렇네… “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하면 그런 것부터 얘기한다고 하던데.
아이를 바로 낳을 수 있는지. 생활비는 얼마를 줄지.
그렇다면 그렇게 이상한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차무혁이사와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당장 아이를 낳을 것. 생각을 갈무리하던 세영은 이번엔 적시에 생각 난 결정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하지? 같이 자자고 말해?“
지혜는 이 순진한 중생을 어디부터 가르쳐야 할지 혀를 끌끌 찼다.
"이 언니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야동 인생이 몇년인데 아직 그런걸 물어?“
"야동엔 서론이 없잖아. 그거 하는것만 보여주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는 안 나오잖아.”
"그렇지. 서론은 중요한게 아니니까."
"뭐?"
"서론 보여 주면 그거 누가보고 앉아있어. 빨리 감기로 본론만 볼텐데.“
세영과 지혜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 거렸다.
"그래도 여자는 서사가 중요한데."
"어쩌겠어. 너희 이사님께서 못 알아들어서 그동안 남자랑 연애 못했던거 아냐?
본론 구경하기도 전에 영화 끝난다. 앞부분은 그냥 빨리 감기 해야지.”
쌓으실 시간이 없으시다는데. 서사 지혜가 남자친구를 여섯명이나 갈아 치우며
만리장성을 쌓고 또 쌓고 여섯놈이랑 쌓고 쌓는 동안 세영은 얼떨결에 술에 취해 무혁과 몸을 섞은게 남자 관계의 전부였다.
남자와 진도를, 그것도 아주 빨리 나가기위해 어떤방법을 써야할지 아직도 머리가 새하얬다.
"현승이랑 사귈 때 말이야."
"누구?"
"아 왜, 걔 있잖아. 나 첫 직장 동아리에서 만났던."
"아!“
지혜의 지난 역사를 갈무리하던 세영은 간신히 기억을 떠 올렸다.
"걔랑 사귀기 전에 먼저 잤거든."
"그랬나?“
남자가 하도 자주 바뀌어 그런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 난 소주 한 병 마시고 만취했어."
"그리고?"
"그리고는 뭘 그리고요야. 나 잡아잡수쇼, 하고 안기다가 키스하고
그 뒤론 고자가 아닌이상 남자가 알아서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