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랑을 하는법
실로 마음이 불편했다. 차무혁이라는 완벽한 수컷에게 드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으로 한가롭게 연애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3개월 안에 '결혼'을 하리라는 전제 없이 그와 만났다가 확신이 들지 않아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무혁은 아버지에게 화목한 가정을 보여주는 마지막 효도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게나 진지한 말인 줄도 모르고 섣불리 결정한 자신의 발언이 이제야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아직은 꽃다운 나이 스물일곱.
인생이 매사 꽃답지는 않았지만, 결혼 생각은 커녕 남자와 손잡는 일조차
처음인 세영으로서는 쉽게 마음 먹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무혁의 아이를 낳기위해 그의 사랑없이 결혼한다는 건 어딘가 비참했다.
태어날 아이에게도 미안했고 무엇보다 외롭게 늙어 갈 자신에게 가장 미안할 것 같다.
"저,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한데요.“
대뜸 사과부터 하고보는 세영의 말에 무혁의 목울대가 깊게 요동쳤다.
항상 냉정을 유지하던 무혁이 동요하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었다.
"저는 아버님이 위독 하신줄도 모르고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해보자고 말씀드렸던거 같아요.“
계속하라는듯 무혁이 눈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미안 하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욕심이 나는 상대이긴 하지만
한때 열병을 앓을 정도로 좋아했던 첫사랑과 한번쯤 사귀어보고 싶다는 분수 넘치는 욕심만으로
무혁의 마지막 효도를 방해할만큼 세영은 탐욕스럽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시라면 저 말고 다른 상대를 찾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손에 쥔 사탕을 버리지 못해 끙끙거리는 아이가 된 심정이었다. 심지어 그 사탕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 있는데.
세영은 그녀의 손을 붙든 무혁의 손을 뿌리 치려했지만,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더 해졌다. 마치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무슨 상대."
"그러니까…. 당장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맞선 상대 같은거요.“
부연하지 않아도 차무혁이 손만 뻗으면 그에게 달려들 여자가 널리고 널렸다는 사실은 피차 서로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한세영."
"네.“
차마 미안해 그의 눈을 바라 볼 수 없었다. 고백을 먼저 한 건 세영이었는데
7년이지나 거절을 하는 것도 세영이었다. 둘의 관계는 참 이상했다.
"내가 말했을텐데.“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각같이 깎아 놓은듯한 깊은 눈매에 고독감이 스며들었다.
"아이를 낳아 줄 다른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한세영씨가 내 아이를 낳아줬으면 좋겠다고.“
다시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되었든 아이를 낳아 줄 여자가 필요한게 아니라
세영이 꼭 제 아이를 낳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그녀를 좋아한다는 뜻일까.
아니, 하지만 지난번에 차 안에서 좋아하냐고 물었을땐 좋아한다기보단 ‘나쁘지않다'고 대답 했었는데.….
"왜요?"
세영은 이 기묘한 사고 회로를 정리해야만 했다.
도대체 차무혁은 무슨 생각으로 세영이 석 달 안에 저와 결혼 해 아이를 낳아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결혼상대는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겁니다.“
하지만 답변이야말로 세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건축가는 알쏭달쏭 한 말로 세영을 흔들어 댔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그 모호한 답변에 세영의 얼굴이 빨갛게 물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세영은 그의 말뜻을 곱씹었다. 홀로 행복회로를 돌리며 좋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건 아닌지 골똘히 고민했다.
그랬다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차진명 소장의 얼굴을 상기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혁의 깊은 눈과 조각같은 콧날,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에 취해 덜컥 승낙하기에는 여전히 너무도 무거운 제안이었다.
무혁과 결혼한다면 그의 말 마따나 안정적인 경제력으로 고생하지는 않고 살아가겠지만,
아무리 가난하다고해도 남편의 사랑도 없이 팔려가듯 결혼을 하고싶진 않았다.
지금까지도 빚잔치에 치여 청춘과 돈을 바꾼 기분인데 결혼까지 팔려가 듯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려면 서로 알아 가야 하지 않을까요?"
"3개월 알아 갑시다."
"그렇게 시간을 정하기엔.…. 제가 아직 한번도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사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도 하고요 .."
"7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더 알아야 할게 있습니까?“
세영은 대답을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망울만 깜빡 거렸다.
알고 지낸 건 7년이라고해도 단둘이 사적인 대화를 나눈적 조차 없었건만,
이렇게 쉽게 얘기 할 줄이야.
"제 연락처는 아세요?“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따지듯 물었다. 무혁은 그게 대수냐며 미간을 좁혔다.
"압니다."
"그런데 왜 연락은 안하세요?"
"하죠, 연락.“
졸지에 연락이 오지 않아 섭섭했던 마음을 실토하는 꼴이되고 말았지만, 순순히 연락하겠다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신랑감으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말하세요.“
"그게 아니라….“
무혁의 질문에 세영은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외도, 도박, 중독 같은 것만이 결혼 생활에 문제가 되는걸까.
훌륭한 외모와 일밖에 모르는 성미, 천재적인 예술성과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력 따위는
차무혁이 일등 신랑감이라는 것을 증명 해주고 있었지만.
"저는 아직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 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한다면 제 남편이 절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잠시 세영의 말을 반추하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연애 해보자고 했잖습니까."
"네?"
"한세영씨가 연애 건너뛰고 사랑 건너뛰고 아이 엄마는 할 수 없다고해서 연애 해보자고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사랑도 해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허술했던 마음의 성벽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도 해보자는 차무혁의 말에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식탁 밑으로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앞으로는 그의 말을 조금 더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짤막한 무혁의 말 행간에 숨은 의미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밥 먹죠."
"네, 이사님."
"내일 점심에 잠깐 짬이 나는데 같이 식사를 했으면 하는데.”
짧은 식사를 데이트라고 하기엔 소박했지만, 일에 치일대로 치여 바쁜 무혁이 시간을 쪼개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세영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네. 내일 시간 괜찮아요.“
무혁은 그제야 세영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가 잡았던 손등에 홧홧하게 열꽃이 피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사랑은 어떻게 해보는거지?
이렇게 또 그때 물었어야 할 이야기가 한참이나 뒤늦게 떠오르고 말았다.
공동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고시원 방으로 들어온 세영은
사랑을 어떻게 해보는 건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야근은 일상이며 출장은 주간 행사와도 같은 차무혁 이사의 아버지가 아프시다.
병원에도 가야 할 테고 퇴근하고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런 남자를 붙잡고 데이트를 하며 서로를 알아 가고 사랑을 키워 보자 종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짝사랑하는 마음을 접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시작은 무려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사랑을 해보는건 세영쪽의 문제가 아니라 무혁쪽에 달린 문제였다.
세영은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친구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지혜야. 너의 지혜가 필요하다.“
-뭐야. 또 아부지 돈 필요 하시대? 세영은 입술을 뾰로통 내밀며 웅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곱씹어 보니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럼 뭘까? 우리 속 좋은 한세영 심사가 왜 뒤틀렸을까?
"내가 이사님이랑 사귀는데….”
-지금 갈게.
"응?“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전에 지혜의 전화가 끊어졌다.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세영은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