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뜨겁고 커다란 손으로
"하아“
그런데 변한건 설레는 세영의 마음일 뿐. 무혁의 행동은 고백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태백에 다녀온 날은 세영을 집으로 데려다 주자마자 건설중인 아트홀 감리건으로 부산까지 1박 2일의 출장을 떠났다.
그 다음날은 사고로 입원한 정경열 부소장 대신 건축주를 만나 파주까지 대지를 확인하러 갔다.
건축 사무소의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스케줄이야 7년째 일하고 있는 세영이야말로 잘 알고있는 사실이기에
연애를 시작한 연인에게 연락을 보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회사에선 아무런 내색하지 않기로 했으니 전화 외엔 대화할 방법이 없는데 무혁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물론, 세영이 먼저 연락을 하면 되는 일이지만, 바쁜 무혁을 뻔히 알면서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참고 희생하는 일이라면 한세영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키스하다가 저리 가라고 뺨을 때려서 마음이 바뀐건 아닐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술에 취해 그와 휴게실에서 옷을 벗고 뒹군 것도 세영답지 않았는데 기습 키스를 당했다고
뺨을 때린건 정말이지 곱씹을수록 경솔한 일이었다. 경솔했다. 정말 경솔했다! 경솔의 아이콘이 따로 없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이대로 주말이 되었다고 차무혁에게서 연락이 올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면 세영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지옥 같은 주말을 보낼 터였다.
연애란 밀고 당기는 게임이라지만, 세영은 그런건 서툴렀다. 그날의 키스가 꿈이었나,
나쁜 남자가 자기 좋다는 여자한테 키스 한번 해보려고 장난을 친건가,
돈으로 여자를 유혹해보려는 질나쁜 남자인가, 말도 안되는 상념들로 스스로를 들볶고 있었지만,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 빛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연애를 한답시고 고민거리만 하나 더 추가한것 같았다.
3층에 드디어 세영 홀로 남은 순간, 그녀는 입술을 질겅거리며 핸드백을 챙겼다.
이사실에서 일에 여념 없을 무혁을 그대로 두고 소심하게 퇴근하려는데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한세영씨?“
세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복숭앗 빛으로 익고 말았다.
연이은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차무혁의 얼굴엔 피로감조차 비치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산 같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세영은 최대한 감정을 숨기며 그를 경계했다.
"이사님.…?"
"인사도 안하고 갈 생각이었습니까?”
"인사요? “
언제 인사를 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건지. 그의 냉정한 한숨에 가슴 한구석을 날카로운 것으로 긁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세영씨. 나랑 연애하는거 맞습니까?“
그건 세영이야말로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세영은 3층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못마땅한듯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아마, 맞겠죠?“
줄곧 무표정하던 무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일렁거렸다.
무혁은 세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말했다.
"시간 있으면 같이 갑시다."
"네? 어딜요?"
"왜. 애인이랑 주말에 같이 나가기 싫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사귀기로한거 무르기라도 하려고?”
사귀기로한걸 무를거냐는 말에 세영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겉으론 내색 못하고 있지만, 그와 사귀게 되어 꿈만 같았고 연락 없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먼저 연락할 자신감도 없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혁은 설명은 생략한채 세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커다란 그의 손에 손을 잡히는 순간 이상하게도 섭섭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 들었다.
뜨겁고 커다란 손이 그녀를 바짝 잡아끌었다.
그저 손을 잡은것 뿐인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키스를 했던 그날처럼,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은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누가 두 사람이 손잡은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지만, 그의 손을 떼어 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완벽한 남자의 손에 이끌려 걷는 걸음 걸음이 숨 막히게 떨렸다.
무혁의 차가 도착한 곳은 회사 근처의 대학 병원이었다. 호텔을 방불케하는 VIP 병실은 일찌감치 조도가 낮아져 있었고
커다란 침대에는 차진명 소장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누워있었다.
위독하다던 소장님은 다행히도 두 사람이 도착할 무렵,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아마 환자복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환자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진명 소장은 무혁처럼 커다랗고 단단해 보였다. 환자답지 않게 떡 벌어진 어깨와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
형형한 안광까지. 죽음을 앞에 둔 환자에게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채 만 한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은 기력이 느껴지건만 여명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단다.
7년이나 함께 일한 차 진명 소장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면회는 싫다며 극구 직원들의 방문을 거부하는 터에 병실에 누운 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픈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니 어쩐지 눈가가 촉촉 해졌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아버지, 한세영씨와 만나고 있습니다.“
차진명 소장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맞선은 지긋지긋 하다더니 다른 꿍꽁이가 있었구나.
내 이제 우리 아들 선 자리 내놓으라고 친구들 들쑤실 필요는 없겠어.
우리 세영씨는 동양화 같은 처자지. 딱 마음에 든다.“
동양화 같다는건 무슨 뜻일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두고하는 말씀일까.
화장을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를 보고하는 말씀일까.
생기가 없어보이나. 대출 걱정때문에 안색이 나빠보이나. 들어오기전에 립이라도 촉촉하게 바르고 올 걸 그랬나보다.
무혁 역시 진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문득 세영은 말의 함의가 궁금해졌다. 무혁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동양화 같다는 말은 칭찬일까. 잠시 호흡상태가 나빠졌던 노인은 무혁을 보자 곧장 잠이 들었다.
금세 평화롭게 꿈을꾸는 아버지를 뒤로한채 무혁이 안도하며 세영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병원 근처 한정식집 식탁에 마주 앉은 무혁은 꼿꼿하게 앉아 세영을 바라보았다.
"많이 아프신가 봐요."
위독한 아버지의 병실까지 세영을 데리고 왔다는건
그녀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와도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지하다는 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1년 남았다고 하더군요."
"아….“
세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안 좋아서 입원한 줄로만 알았는데 소장님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둔 남자를 두고 한낱 연락을 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끔찍할 만큼 철없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에게 연락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3개월 안에 결혼을 했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무혁의 말에 세영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가정을 빨리 아버지에게 안정적인 마지막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 아들의 마지막 효심인걸까.
"한세영씨와 가정을 꾸리고.”
식탁 위에 올려 둔 세영의 손등 위로 무혁의 커다란 손이 포개어졌다.
"아이를 낳았으면합니다.“
그 단단한 손바닥의 질감에 마치 맹수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먹잇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이제야 세영은 무혁이 했던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다.
‘세영 씨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
세영의 방점은 '연애'에 있었지만 차무혁의 방점은 '결혼'에 있다는 사실을 일주일이 다 되어서야 알아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