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아이를 낳았으면 합니다. (6/40)

6화. 아이를 낳았으면 합니다.

무혁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금요일 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수십 번 떠 올라 떨리기도 하고 설레는 기분이었는데 

이젠 차라리 외근을 빨리 끝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볕이 좋은 날 오셔야 했는데. 이 창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하루가 지나갑니다.“

유명 정유 업체의 사장이었던 건축주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별장에서 노년을 즐기는 중이었다. 

예술품 속에서 지내는 하루 하루는 어떨까. 

세영은 작품이나 다름없는 건축물 안에서 예술 그 자체로 살아가는 느낌이 차마 실감 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서울 땅에서 몸 하나 누울 공간을 마련하기도 힘이 드는데 누군가는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공간을 홀로 차지하고 살고 있다니. 

"하늘이 뚫리기라도 했나. 초겨울에 무슨 비가 이리 내린다. 일단 식사부터 하십시다.“

과묵한 차무혁과 초로의 건축주 사이에서 고요하게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액자 밖 풍경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조차 아름답긴 했지만, 

벌써 어둑어둑해진 밤에 차를 타고 1,000m 고지를 내려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했다. 

아홉개의 방이 있는 대별장에서 하루를 묶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게스트룸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던 세영은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혜성처럼 나타나 건축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차무혁이 설계 한 별장에서 하루를 묵는건 돈을 주고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짝사랑하는, 아니 짝사랑 '했던' 남자와 수학여행을 가듯 외딴곳에서 잠을 자는데 

여행보다도 설레야 할 시간이 어쩐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세영씨가 내 아이를 낳았으면 합니다.‘

차무혁의 묵직한 저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설령 아이를 낳고 싶은 게 진심이라고 할지라도 결혼을 전제한 만남을 갖고 싶다며 사귀자는 말로에 둘러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 사람 눈치 안보고 하고싶은말 필터 없이 하는 건축가로서니 부하 직원에게 아이를 낳아 주었으면 한다니. 

그것도 '경제력'을 운운했지, 아마. 

솔직한 말로 가슴이 떨리긴했다. 왜 그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나 후회가 들만큼이나.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무혁 이었으니까. 열병을 앓을 만큼이나 사랑했던, 이젠 좋아하지 않을 차무혁 .. 

대학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그길로 학업 대신 취업의 길을 택했다. 

이제 빚을 모두 갚고 모은 돈으로 엄마의 평생 소원이었던 떡집을 차려 드렸는데 

창업 2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춘을 바쳐 일하고도 돈이 없어 사내 대출을 알아 보았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며 돈을 대줄 테니 결혼을 하잔다. 

모르겠다. 아마도 일말의 자존심일지도. 첫사랑과 결혼하는건 꿈만 같은 일 이겠지만,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그건 돈이 없는 것 보다 더 서글플 것 같다.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렇게 쉬워 보였나. 돈을 주면 덥석 좋다고 애를 낳아 줄만큼 가벼운 여자로 보였나. 

7년전 그를 좋아했다고해서 지금도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금요일에 너무 쉽게 안겨서 그녀를 쉬운 여자쯤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나 스스로에게 자신이있는 건가. 여러모로 화가났다.

7년전 차무혁을 홀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한세영이었다면 앞뒤 생각할 겨를없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영은 이제 너무 많은 걸 알고있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 마저도. 급작스럽게 무혁의 호출에 따라 나오는 터에 

여분의 옷이 라거나 속옷은 없었다. 샤워 가운을 여미고 나온 세영은 침대에 걸터 앉아 무혁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었다. 

'연애나 사랑을 하고싶다는게 아니라 가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일에 미친 남자들에게 가정은 안정을 위한 장소라는 걸 알고 있다. 

아내는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남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희생 해야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건축가 차무혁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하는건 영광이겠지만, 

사랑도 없이 내조해줄 여자를 찾고 있는 그를 보자니 무혁은 아내가 아니라 집사나 가정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 띄는 미인도 아니었거니와 바쁜 건축 사무소 업무로 그 흔한 손톱 관리 조차하지 못하는 세영이었다.

오늘도 맨 얼굴에 립만 바른 채 출근 했으니 한눈에 보기에도 조각 같은 차무혁과 어울릴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요즘 들어 고민이 많아 혈색도 안 좋았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건 인정한다. 

어른들에게 싹싹하고 상냥한 편이라 맏며느릿감이라는 소리를 제법 듣긴 했지만,

연애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돈은 넉넉하게 줄 테니 아이엄마로 삼고 싶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차마 차무혁 이사를 남편감으로 생각 해본 적 없었다. 

무혁의 부친 소유인 차진명 건축사 사무소를 떼어 놓고 생각해도 그랬다. 

매달 무혁이 설계하는 건축물을 소개하는 건축 매거진과 사무실 한편에 놓인 그의 건축상 상패만 보아도 그가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있었다. 

뉴욕 건축 거장의 사무소에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던 그가 무슨 일로 그 모든 영예를 버리고 

한국에서 일하는지 건축가가 아닌 세영으로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무혁이 회사로 들어온 이후 사무소는 국내 굴지의 기업가들의 수주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완벽한 외모까지 두루 갖춘 그를 따르는 여자들도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작년 여름 화려한 외모의 유명 여배우가 사무소로 나타났다. 

차무혁을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그 배우는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제주도에 별장을 지어 달라며 의뢰했다.

하지만 무혁은 그녀의 질척거리는 설계 의뢰뿐만 아니라 끈질긴 구애까지도 단칼에 거절했다. 

보는 사람이 선득해질 정도로 무서운 거절이었다. 

세영은 당시 무혁이 대단히 눈이 높은 남자라 그런 아름다운 영화배우조차 눈에 차지 않을 거라며 지레 짐작했을 뿐이다. 

무자비한 거절을 목도하며 차라리 7년전 무시에 가까운 고백 거절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 차무혁 이사가 도대체 자신에게 어째서. 

설마 돈을 줄테니 현대판 씨받이라도 되라는 소리였을까?

왜 그 자리에서 바로 따지지 못했나 분한 심정까지 들기 시작했다. 

억울함을 맞닥 뜨렸을 때 받아 칠 말은 꼭 샤워를 할때 생각 나곤한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차갑게 받아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혼자 남은 세영은 머리만 뜯었다. 

거울에 비치는 제 수수한 모습이 초라해져 보여 고개를 휙 돌리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무혁입니다.“

불청객의 등장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관리인이 옷을 세탁해준다며 가져간 터에 옷이 없었다. 

세영은 샤워 가운을 바짝 여미며 문을 살짝 열었다. 

"네?“

방으로 각자 헤어진 지 한참이었는데 무혁은 여전히 슈트 차림 그대로였다. 

젖은 몰골의 세영을 바라보면서도 무혁의 시선은 차분했다. 

냉기마저 서려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여자로서의 매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는 걸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 들어 심장이 서늘했다. 

세영 역시 친절할 마음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를 보면 무조건 반사처럼 심장이 마구 뛰긴하지만.…. 

그래. 이건 좋아서 뛰는게 아니라 화나서 뛰는거다. 

그런 소리를 듣고 화가 안나면 비정상이지! 

"잠시 들어갈게요." 

"죄송한데 제가 지금 옷이 없어서요.“

따박 따박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속옷도 입지않은 

샤워 가운 차림으로 상사를 방에 들일 수는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무혁이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차에서 했던 얘기 마저하고 싶은데.”

무혁의 말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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