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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빨아달라고 하더니 (5/40)

5화. 빨아달라고 하더니

어떻게 된게 매달리는법 하나없이 녹취라도해서 증거라도 남겨주시겠다는 말이 쉽게도 나온다. 

물론, 그런 한세영이 마음에 들어 결혼 이야기를 꺼낸거긴 하지만 막상 이런 얘기를 듣고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날 난 안 취했습니다.”

물론, 취했다. 

맞선 상대가 떠들어대는 꼴이 보기 싫어 그날 술을 과하게 마셨지만 불리한 이야기를 인정 할 필요는 없겠지.

"아…."

"난 금요일 회식에 참석도 안했습니다."

"아…." 

뭐야. 설마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걸 모르고 있던 건가. 

올해 들어 단 한 번도 회식에 나간 적이 없었건만! 

하긴. 언제 적 짝사랑인데 여태껏 그에게 신경 쓸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날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이사님을 좋아…해도 되나요?’

수줍게 묻던 그 얼굴을 떠올리며 밤새 수음까지 했었다.

"아버지가 종용해서 맞선을 보러 다니고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아는 여자 중에 한세영씨 만 한 여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죠.“

구차한 설명까지 덧붙여 그녀에게 청혼했다.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왜요? “

평소의 세영답지 않게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질척거리지 않을진 몰라도 일할 때 만큼은 

상냥하고 싹싹했는데 무혁의 청혼엔 무뚝뚝하다 못해 차갑고 뺏뻣하기까지. 

7년전의 고백을 떠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을 꺼낸 무혁이었지만,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고백에도 유통기한이 있을테지만, 지난밤의 뜨거웠던 열기를 상기하며 아직 기한이 살아있을 거라고 자만했다. 

7년전의 고백은 이미 유통 기한이 지나다 못해 썩어 버린 걸까. 

그렇다고 생각해 보겠다는 여지도 없이 '제가 왜요?'라니. 

하지만 기왕 말을 꺼낸 이상 물러설 순 없었다. 

일단 한세영과의 미래를 그리고 났더니 다른 소란스러운 여자들과 맞선을 볼 상상을 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맞선은 집어치우고 빨리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며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녀와 못다 한 정사도 마저 해치우고 싶었다.

"7년전에 날 좋아한다고 했잖습니까. “

"그건 7년전 일이죠. “

"금요일엔 날 좋아해도 되냐고 물었잖아요. 난 그래도된다 했고. “

"그날은 취했어요. “

이게 아닌데. 

무심해서 마음에 들었던 여자가 그에게 무심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자 오기가들었다. 

그렇다고해서 한세영이 제게 매달린다면 질려버릴텐데, 

벌레라도 보듯 사람을 쳐다보니 기분이 찝찝하고, 이거 도대체 무슨 심보지.

금요일엔 분명 저에게 적극적으로 안겨들며 빨아달라고, 안에다 사정 해달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취해서 거짓말 한겁니까?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리 벌렸어요?“

다소 공격적인 단어에 세영이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한테… 사귀자고 물으시는 거예요?“

"아니, 결혼합시다. 맞선보고 싶지않고 보러 나간다고해도 한세영 씨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세영 씨가 내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법 명확해진 답안지에 세영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흰 피부가 울긋불긋 물드는 걸 보니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열꽃이 피던 그녀의 속살이 떠올라 하반신이 뻐근해졌다. 

하, 씹. 손 으로라도 한번 빼고 가든가 해야지 도대체 운전을 할 수가 없다. 

"저 지금 놀리시는 거죠?" 

"내가 한세영 씨 한테 농담 한 적 있습니까?"

"없죠."

"그런데 이게 농담으로 들립니까?" 

"저를, 좋아하세요?" 

"나쁘지 않습니다.“

무혁의 대답에 세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좋아해도 어려운 게 남녀사이인데 나쁘지 않다고요?" 

"나쁘지 않으니 좋아지겠죠." 

"그래서. 좋아지기도 전에 연애도 건너뛰고 사랑도 건너뛰고 대뜸 아이 엄마를 찾으세요?" 

"연애나 사랑을 하고 싶다는게 아니라 가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결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 물론, 당황스럽겠지. 나도 아버지의 결혼 재촉에 당황스러웠으니 그 심정 이해한다만…. 

어쩐 일인지 근 한달들어 말을 가장 많이 한 하루같다. 

아무튼, 이제 설득은 무혁의 몫이다. 

"김우식 실장 한테 사내 대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이었지., 아마. 급전이 필요하다며 세영이 김우식 실장에게 사내 대출에 대해 문의했다. 

경리팀의 유일한 경리인 세영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김우식 실장에게 물어봤는데 

수다스러운 김우식 실장 덕분에 이야기가 무혁에게까지 들어왔다. 

"그건." 

"돈이 필요하면 해결해 주겠습니다. 용돈도 부족하지 않게 주고 생활비 카드도 따로 줄게요. 

가사 도우미 나 육아 도우미는 따로 고용할테니 세영씨 손에 물 묻힐 일은 없을 겁니다. 

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플러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내 재산과 건축사무소 역시 당신 몫이 될테지. 

돈 쓸 시간 없이 일하는 나 대신 돈을 쓰는 건 당신이 될 테고. 이 정도 딜이라면 없던 결혼 생각도 들지 않을까 싶은데 

어째 이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하다. 

"쇼윈도 부부… 같은걸 하고 싶으신 건가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세영의 물음에 무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건 질색입니다. 만나는 남자, 혹시 있습니까?”

"아, 아니요. 그런건 아니고….” 

"나 역시 그럴 생각 없지만, 바람을 피우는 건 봐줄 생각 없습니다. 지금 대답하지 말고 시간을 줄 테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죄송합니다. 저는 당장 연애도 안해보고 결혼 같은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녀는 무혁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무혁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7년전 그를 좋아했던 그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걸까. 

거절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무혁은 무모했던 제 생각을 깨달았다. 

금요일의 열기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걸 인정할 시간이었다.

"날 좋아해도 되냐고 묻길래. “

"결혼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

세영의 말을 끝으로 다시 차 안에 정적이 휘몰아쳤다. 

햇빛은 여전히 찬란했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무혁의 머리엔 금세 먹구름이 가득 찼다. 

차가 태백의 별장으로 들어섰다. 맑았던 하늘에 느닷없이 번개가 번쩍이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함백산 1,000m 고지에 위치한 별장은 무혁이 건축사 사무소로 들어오면서 처음 설계한 건축물이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창밖의 풍경은 각각 한 폭의 동양화였다. 

극도로 절제된 모던함 속에서 자연과 어울리는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의 곡선과 어우러진 별장은 

그 하나로서의 완벽한 예술품이었다. 

무혁은 건축주의 손때가 묻은 집 안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무혁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설계 도면이 

어느새 실존하는 건물이 되었고 이젠 그 안을 터전삼아 사람들이 안식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감각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차무혁의 인생이었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간을 형태로 만들어 낸 차무혁이 마치 창조주처럼 느껴졌다. 

단순하게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상은 햇살이 들어오는 각도와 폭우가 쏟아지는 풍경마저도 계산된 숨 막히게 아름다운 나라였다. 

차무혁 이사를 칭송하는 동료들의 이야기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가 세운 건축물 안에 실제로 들어와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곳에 있었던 차무혁에게 이제 경외감마저 느껴진다고 할까. 

무혁은 건축주와 극도로 절제된 분위기의 건물 곳곳을 둘러 보았고 뒤를 따르는 세영은 그런 무혁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차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은듯한 평온한 그의 얼굴에 어쩐 일인지 세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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