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발정 난 짐승처럼
무슨 생각으로 한세영을 떠올린 건지 모르겠다.
7년전 그녀가 고백했던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고 운명처럼 한세 영이 들어섰다.
'아직도 나 좋아합니까?‘
세영에게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부터 빨았다.
변덕스럽고 소란스러운 여자들을 상대하다가 고요하리만치 무심한 한세영을 보자니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치밀었다.
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맞선을 본 여자들을 맞춰 주다가 고요한 세영을 보자니 반갑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뒤론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무표정한 한세영의 입술이 달콤할 줄이야. 입술이 닿을 때마다 붉어지는 하얀 살결이 색정적 일 줄이야.
왈칵왈칵 애액을 쏟아 내는 음란한 구멍이 숨 막히게 맛있을 줄이야.
30년 차무혁 인생. 그를 따르는 여자는 많았지만,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업량이 넘쳐나는 건축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 전에 건 사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그는 건축 외에 다른 것엔 일절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거니와 무혁의 흥미를 끄는 건 오직 건축뿐 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세영의 몸이 지독하게 짜릿했다. 육욕을 인내하지 못하는 발정 난 짐승처럼 그녀의 옷을 벗기고 올라타 생식기를 맞댄 채 비벼 댔다.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차무혁이 그녀의 안에 사정까지 하고 말았다.
세영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차마 회사에서는 못다 한 정사를 마무리하리라 작정했건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마 그녀가 안에 다 사정해달라는 말이 그대로 끝내고 집으로 가겠다는 뜻인 줄 알아챘더라면 그렇게 일찍 정사를 마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정만 했을뿐, 무혁은 끝을 보지 못했건만, 세영은 볼일을 다 본 사람처럼 바쁘게 사라졌다.
그리고 주말 내내 한세영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게 또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다.
이 여자라면. 일로 바쁜 차무혁을 귀찮게 할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겨우 맞선 자리에서 밥 한번 같이 먹은 것 뿐인데 부부가 되려면 서로의 하루를 모두 공유해야 한다며
나오는 저돌적인 여자들에게 지쳐 있던 무혁은 주말내 고요한 휴대폰을 보며 평화를 느꼈다.
당연히 무혁에게 전화할 리 없는 세영이었건만, 마땅한 것에도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런 여자라면. 마음에 없는 결혼이긴 해도 아버지가 구해 오는 시끄러운 여자들을 상대하느니 차분한 한세영이라면 결혼 생활,
그까짓거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본디 결혼 상대란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주말 동안 맞선 본 여자들을 모조리 정리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무혁은 외근 길에 세영을 호출했다.
"이사님, 저 왔습니다.“
세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상념에 빠져 있던 무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날 밤의 일이 떠올라 하반신이 뻐근해졌다. 역시 나쁘지 않다.
안기려들지 않는 여자를 역설적으로 안고 싶은 마음이든달까.
피차 아는 것 없이 결혼할 맞선 상대보다야 7년이나 알고 지냈고
육체적으로 호기심이 이는 한세영과 결혼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이다.
여전히 무심해 보이는 한세영의 얼굴은 마치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기 만해 되레 기분이 초조해졌다.
"타세요.“
무혁의 목소리는 그의 몸집만큼이나 무게감이 있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운전석으로 오르는 그를 따라 세영도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곧장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고 실내엔 정적만이 가득했다.
겨울의 초입. 하늘이 청명하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고 두 사람이 탄 차가 서울을 유유히 빠져 나갔다.
외근이라 해도 업무의 연장선상일 뿐이었지만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퇴근후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기에 굳이 그녀를 핑계 삼아 불러냈다.
차 안에는 음악 소리 나 라디오 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세영은 무혁이 사랑해 마지않는 적막을 깨고 싶지 않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요히 조수석을 점령했다.
세영은 가만히 차창에 얼굴을 기댄 채 쏟아지는 햇볕을 음미했다.
그런 그녀의 차분한 모습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차가 막 태백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익숙해진 침묵을 가르고 무혁이 세영에게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원의 도시 태백입니다.‘ 라는 이정표를 발견한 세영이 침묵을 깨뜨리는 낮은 음성에 힐긋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뒤로 세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살짝 불안해진 마음에 무혁이 그녀를 향해 눈짓했다.
"이사님, 저한테 물으셨어요? “
핸들을 잡은 무혁은 미간을 좁혔다. 이 공간에 한세영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핸즈프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그녀는 영 제게 무관심 해보였다.
"당연히 한세영씨한테 물었습니다.”
"다른분이랑 통화 하시는 줄 알았어요."
"나한테 관심이 없나 봅니다."
"저한테 물을만한 이야기가 아닌 거 같아서요."
"물어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기대한 대답이 있건만, 세영은 답이 없다. 7년전 고백이 여전히 유효할리 없지만
지난밤 몸을 맞댔을 때 느꼈던 짜릿한 감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그녀는 어쩐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사람 같다.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됐네요.“
아무렴, 잘된 일이다. 한세영 같은 여자라면 무혁의 관심을 종용하려 떼를 쓰지도 않을 테고
그녀와 잘만 된다면 더 이상 지긋지긋한 맞선을 보러 다닐 이유도 없다.
그리고 7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한 우직함 만 보더라도 변덕스러운 여자는 아닐 것이다.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부부 관계도 굳이 의무가 될 필요 없을 테다.
아마도 지난밤만 같다면 참지 못하고 먼저 그녀에게 달려들겠지.
"뭐가 잘 됐…?"
"결혼했으면 합니다.“
세영은 들어서는 안 될 얘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한세영을 알고 지낸지 7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소녀같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한번도 여자로서 생각해본적 없던 여자를 다시 여자로 생각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제법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다. 아내로서 손색이 없다. 거기에 진 중하 고 침묵을 사랑하기까지.
아니, 한세영은 확실히 맞선 상대들과 비교하자면 무혁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여자다.
"결혼을요? 이사님이 결혼을 하고 싶으신데 그게 저랑 무슨…“
무혁은 미세한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무혁은 그저 입을 열어 나긋나긋한 저음의 음성으로 대답 할 뿐이었다.
"아이를 낳았으면합니다.“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일렁이는 무혁의 목울대를 보며 세영은 사색이 되었다.
정작 말을 내뱉은 차무혁은 여전히 태연한데 이야기를 들은 세영의 표정만 변화무쌍했다.
얼어붙었던 세영은 다시 정면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녀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날 일로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세영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불쾌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날 일이 불편해서 이러는 거 같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그날 많이 취했고 밤도 늦었었고 이사님도 취하셨을 테고. 쌍방 실수니까요.
그 일을 트집삼아 불편하게 해드릴 마음 없습니다. 고소라든가 그런게 걱정되시면 녹취로 증거를 남겨 드릴 수도 있어요."
"그날 일을 무마하려고 아이를 낳자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고?"
"아무래도 요즘 사회 분위기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지금 제가 그날 벌인 일로 후환이 생길까 봐 두려워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