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그럼, 빨아(Prologue.포함) (1/40)

1화. 그럼, 빨아

상사가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Prologue.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세영은 회식 자리에서 홀로 빠져나와 사무실로 돌아왔다. 

월세가 밀렸다는 엄마의 전화로 속이 상해 술을 마시다 보니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기엔 과하게 취하기도 했고 할증이 붙은 택시비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첫차가 다닐 때까지 잠시 쉬었다 갈 작정이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기껏 술로 잊었던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도피하고 싶었다.

차진명 건축사 사무소는 언제나 야근하는 디자이너들로 넘쳐나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지만, 

회식이 있던 오늘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간이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3층 휴게실로 들어섰다.

추적추적 희미하게 들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침대를 더듬는 순간, 

세영의 손을 잡는 낯선 감각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세영 씨."

고막을 자극하는 묵직한 저음에 세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세영의 손을 잡은 남자의 단단한 손이 다시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차무혁 이사님. ……?"

먼저 간이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차무혁 이사라는 사실에 갑자기 얼굴에 불길이 일었다.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죄송합니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오늘 회식 자리에도 불참한 차무혁 이사가 휴게실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세영은 뒤늦게 무혁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거센 악력으로 그러쥐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이. 

"아직도 나 좋아합니까?"

무혁의 질문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창피해서인지 취기 때문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차진 명 건축사 사무소에 경리로 입사한 세영은 

감히 소장의 아들인 무혁을 짝사랑했다. 철이 없었던 거다.

언감생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며 꿀꺽꿀꺽 군침을 흘렸더랬지. 

당시 건축과 대학생이었던 무혁은 사무실에 종종 나오며 일을 배웠는데 세영의 고백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무혁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민망하게 마주칠 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고, 

그사이 세영은 그를 잊고 철도 들었다.

그러던 중 무혁과 재회했다. 건축가가 된 무혁은 부친의 건축사무소 이사가 되었고 세영은 여전히 사무실의 유일한 경리였다. 

처음엔 스무 살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라 막연히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얼핏 웃음이 났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무슨 염치로 좋아했던 건지. 그래도 티 없이 순진했던 어린 시절,

사랑에 조건 같은 게 있는 줄 몰랐던 스무 살이었기에 그에게 고백할 용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운 추억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묻어 두었던 옛날 일을 불쑥 내뱉는 무혁의 물음에 세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도 좋아할 리가. 벌써 시간은 7년이나 흘렀고 

세영은 이제 무혁이 자신과 어울리는 부류가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무혁은 촉망받는 건축가로 성장했고 세영은 세월 속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세영은 밑 빠진 독에 청춘을 부어 가며 일했건만, 형편은 나날이 어려워졌다.

"나 아직 좋아하냐고.“

무혁은 다시 한번 세영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의 뜬금없는 질문보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당혹감을 느끼며 무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차무혁의 눈동자가 세영의 마음을 꿰뚫듯 응시했다. 

"저는..." 

대답을 잇지 못하는 입술 위로 무혁의 입술이 살포시 다가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닿는 순간,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분명히 이젠 무혁을 향한 짝사랑을 접은 지 오래인데 어쩐 일인지 그의 키스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무혁을 밀어내기엔 지독하게 취했다. 

달콤한 입맞춤이 지친 하루를, 아니 지친 청춘을 위로해 주었다. 

그래, 키스니까. 키스뿐 이니까. 

아주 오래전 지독하게 짝사랑했던 상대와 한 번쯤 선을 넘는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매일 밤 그와 키스하기를 꿈꾸던 어린 소녀를 위한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이제와서 무혁을 밀어내기엔.. 첫 키스는 너무도 황홀했다. 

녹아든 입술이 엉겨 뜨겁게 짓눌리고 잇새를 타고 다디 단 살덩이가 깊이 파고들었다. 

얼어붙었던 육신이 따스하게 녹아들었다. 무혁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입맞춤이 너무도 포근해서 온 마음을 다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가슴에 안겨 기대고 싶었는데 마침 첫사랑인 무혁이 품을 내 어준 것이다.

달콤하게 젖어 들던 입술이 점점 더 깊게 뒤엉켰다.

무혁은 어느새 간이침대에 세영을 눕히고 더운 키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쏟아지는 빗소리, 뒤엉킨 숨결, 달콤한 입술. 모든게 황홀했다. 

스무 살 꾸었던 꿈만큼이나. 달뜬 마음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현실의 무게로 질식할 것만 같았던 순간, 눈을 감으니 스무 살의 소녀가 되살아났다. 

어려운 삶의 고난도 노력으로 멋지게 이겨낼 수가 있을거라 믿었던 소녀가 돌아왔다. 

세영은 동화 속 해피 엔딩을 꿈꾸는 순수하고 티 없는 소녀가 되어 떨리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무혁은 파르르 떠는 세영의 허리를 단단하게 손으로 감싸 잡고 입술을 깊게 얽었다. 

키스란 이토록 황홀한 걸까. 한때 좋아하긴 했지만, 이젠 이성으로서 생각지도 않았던 무혁과의 키스가

이렇게나 달콤할 줄이야. 무혁은 세영의 밭은 숨결마저 집어삼켰다. 

차무혁의 갈급한 입맞춤에 세영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혁은 넥타이를 성 마르게 풀어 헤치며 세영의 몸 위에 완전히 올라탔다.

키스까지만, 키스까지만은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슈트 재킷을 벗어 던지는 그를 보며 세영의 이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스름 노란 조명이 무혁의 탄탄한 상체 위로 떨어졌다.

스무 살 소녀가 짝사랑하던 한 청년이 어느새 완연한 수컷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코를 따라 인중과 입술, 턱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선이 은은한 조명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깊은 눈매로 세영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문득 완벽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게 마치 잘생긴 얼굴을 훔쳐보는 것처럼 느껴져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세영은 그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열기를 느꼈다.

190cm에 육박하는 훤칠한 키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슈트를 단단하게 채운 근육질의 몸을 직접 목도하자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광활한 어깨 아래로 떨어지는 탄탄한 대흉근, 군살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잔근육으로 갈라진 조각 같은 복근, 

하반신으로 굴곡지게 이어진 장골까지 흠잡을 구석이라곤 어디 하나 없었다. 

상의를 벗은 무혁이 세영의 입술을 살포시 머금었다. 

입술이 닿자 떨리는 마음에 흠칫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세영의 행동이 묘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는 앙다문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를 쑤시듯 밀어 넣었다. 

"흡, 으웃." 

"빨아.“

단정한 무혁의 입에서 사뭇 적나라한 명령이 내려졌다. 

"이사, 님.…….?”

슬슬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달콤하게 엉겨 붙던 호흡이 발정기를 맞이한 짐승처럼 치미는 흥분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대답을 갈구하는 무혁의 숨결이 초조하게 흩어졌다. 

세영은 답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아니, 실은 그와 키스를 한 순간부터 스무 살의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사님을 좋아……해도 되나요?" 

무혁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날 좋아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

주량을 넘긴 취기에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묵직하게 부푼 무혁의 하반신만큼이나 그의 밑에 깔린 세영 역시 흥분했을 뿐이다. 

세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젓자 무혁이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맞댄 채 속 삭였다.

"그럼 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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