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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끝낸 뒤 나는 교재를 먼저 방에 갖다 놓으라고 벨에게 맡겨 놓은 뒤 레오를 데리고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네 권의 책을 신중하게 골라 레오에게 넘기고 혼자 대욕탕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를 워낙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가 점심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 왕궁에서의 좋았던 서비스를 떠올리며 수증기로 노곤해진 몸을 향나무 의자에 뉘였는데, 목욕 중이라 머리에 수건 한 장을 두른 헤이지와 티아가 가까운 테이블 뒤로 보였다.
"어머, 유이나? 너도 목욕하러 왔니?"
헤이지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나른하게 물었다. 나는 살짝 상체를 일으켜 대답했다.
"아, 으응……."
"우린 여기서 간단히 뭐 좀 먹을 생각이거든. 너도 같이 어때?"
건너뛰려고 했지만, 간단한 음식이라면 좀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지는 친절하게 의자를 빼내 주기까지 했다. 티아는 약간 껄끄러운 상대지만 헤이지는 무척 친절했기 때문에 거절하기에도 애매하다.
대욕탕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밖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과일 카나페와 삼등분한 클럽 샌드위치 정도. 차가운 음료와 함께 카나페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때 티아가 내게 말을 먼저 걸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무시하고 말을 섞지 않으면 그만인데, 항상 경쟁하는 식으로 날카롭게 따지듯 내게 질문하곤 한다.
"넌 며칠동안 얼굴 보기 힘들던데, 방에 틀어박혀 뭐 하고 있었길래?"
그림 그리는 취미를 잠깐 쉬기로 한 이후로 휴일은 거의 방에만 있는 편이라, 티아는 그걸 알고서 단정짓듯 말했다. 나는 명백하게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난처해하며 대꾸했다.
"아, 이번에는 남편이랑 며칠 동안 밖에서 지내다 왔거든. 방에 있지 않았어."
"어머, 그래? 하긴 전에 남편이 있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직업이 뭔데?"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지 비웃듯 물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칼리온에서 일한다고만 대답했다. 칼리온에는 일반 공무원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 대답에 그녀들은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칼, 칼리온이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와, 방위군 출신 애인도 있는데 거기다가 칼리온의 남편까지 있단 말야? 정말 대단하다!"
"아니. 그, 그렇게 높은 사람은 아닐 거 아냐. 넌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평상시 크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던 헤이지마저도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티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남편이 칼리온의 유명 집행기사라고 밝힌 것도 아니고, 평범한 공무원들도 많은 칼리온 출신이라고만 어중간하게 말했을 뿐인데 이 정도의 파급효과를 불러올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칼리온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해?"
"당연하지! 그걸 모르고 결혼했단 말야? 누가 소개시켜 준 건데? 말단급도 상관 없는데, 나도 좀 소개받으면 안 될까, 응?"
헤이지가 티아를 밀쳐내고 소리쳤다. 연이어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 주느라 나는 무척 쩔쩔맸다. 티아는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당연하게도 소화는커녕 오히려 점심식사를 하다가도 체할 정도로 긴장하고 말았다. 두 시간 가까이 그녀에게 질문만 받다가 축 늘어져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쉬러 갔는데 제대로 쉬질 못한 느낌이었다.
티아는 분한지 따가운 시선을 계속 내게 고정시킨 채였고 헤이지는 티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눈을 반짝이며 끈덕지게 매달렸는데, 그 상태로 둘 사이에 앉아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고문이었다.
"하아……."
방문을 열자마자 소년종 두 명이 나를 맞이했다.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레오가 지난 며칠간의 일을 보고했다.
"낮에 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무슨 손님?"
"여성분이셨는데, 다음 주 텔루스의 날, 켄틴이라는 분의 친목회에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한다고……, 아, 그리고 확인하지 못하신 편지도 두 장이나 있답니다."
나는 벨이 전달해 주는 편지를 손가락만 움직여 받아 펼쳤다. 자줏빛의 카드 한 장, 그리고 은박으로 반짝이는 반 접히는 편지가 한 장. 자줏빛의 카드에는 세리나움의 친목회 초대장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은박 편지는 키셸이 보낸 것이었다. 친구들과 친목회를 여는데 올 거면 자리를 만들어 둘 테니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다 달랐지만 솔직히 말해 켄틴의 친목회에는 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부담스러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부담감을 어마어마하게 피부로 느끼다 왔기 때문에 두 번이나 같은 장소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레오와 벨에게 말했다.
"난 이번 켄틴의 친목회에는 안 갈 생각이니까, 혹시 누군가 또 찾아오면 그렇게 말하도록 해."
"네, 유이나님."
"알겠습니다, 유이나님."
그리고 세리나움의 친목회는 2주 뒤, 꽤 늦은 시간에 열린다. 입장 조건은 초대장 지참이라고 쓰여 있다. 초대장을 갖고 있는 사람오직 본인만 들어올 수 있는 엄격한 회원제 친목회라고 한다. 여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이니 일단 보류했다.
마지막으로 키셸의 친목회. 특별히 정해진 명칭은 없지만 키셸이 보낸 초대 편지이니 키셸의 친목회로 칭한다. 다음 주였다. 어차피 당분간은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여기에나 들러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답장을 위해 펜을 들었다.
키셸이 알려준 친목회 장소는 도서실에 작게 딸린 응접실이었다. 보통 안쪽에서 커튼이 쳐진 채 자물쇠로 잠겨 있는 편인 이 응접실은 4계급 이상 여성의 경우 자유롭게 신청하여 사용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도 키셸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소년종 네 명이 테이블보를 정돈하고 있었다. 먼저 흰 테이블보를 깔고 주름을 펼쳐 가지런하게 당긴 뒤 그 위에 웨건으로 끌고 온 은쟁반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친목회 시간은 3시 정각이었지?"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아 소년종들을 지켜보던 키셸이 날 발견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너무 일찍 왔나? 키셸은 좀 어수선하지만 앉아 있으라고 손짓했다.
"여긴 딱 정해진 시간동안만 빌릴 수 있어서 준비를 미리 해 놓을 수가 없다고. 얘들아, 그래도 손님께서 기다리시니 서두르렴."
키셸의 경고를 들은 소년종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한 소년종이 옮기는 크리스털 잔은 굉장히 값비싸 보였는데, 그들이 조심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가벼운 냅킨이 올라간 접시를 사이에 두고 잔 두 개씩을 세팅했다. 자리는 총 3석이었다.
'겨우 3석?'
주최자인 키셸을 제외한 인원이 두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키셸 포함 두 명이었던 것이다. 정말 작아도 너무 작은 친목회였다. 소년종들은 저들끼리 소근거리며 마지막 체크를 끝마쳤다.
"다음부터는 너무 일찍 올 필요 없어. 늦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앗, 미안."
"사과할 일도 아니잖니. 세리아가 아직 안 왔지만 우리끼리 먼저 들도록 하자."
나와 키셸이 자리에 앉았을 때, 문이 열리며 남은 한 손님이 들어왔다. 키셸이 말했던 세리아라는 여자인 듯 하다. 그녀는 오렌지빛 블론드를 길게 길러 늘어뜨리고 그 위로 붉은 색과 금빛 보석이 박힌 장식을 끼고 있었다. 목에는 기다란 쉬폰 스카프를 둘렀는데 스카프 끝에는 황금 구슬 장식이 죽 늘어져 있다. 상체는 전반적으로 가느다란 편이었지만 하체가 풍성했고, 옷차림도 하반신을 강조하는 헐렁한 스커트를 둘렀다.
"오랜만이야, 키셸. 오늘 새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지?"
성숙해 보이는 눈매나 얼굴 생김새와 달리 목소리는 상당히 높고 발랄한 소녀 같았다. 한색 계통의 복장을 선호하는 듯한 차분한 키셸과는 대비되는 스타일이다.
키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나야.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재상 카스칼의 예비 며느리지."
"어머나, 그 젊은 아저씨의? 난 아들보다는 본인 쪽이 더 취향이던데."
세리아는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그 아저씨가 취향? 농담이겠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유이나라고 해요……."
"편하게 말해도 좋아. 키셸의 친구면 나에게도 친구니까. 아, 나는 세리아야. 여기 온 지는 3년이 넘었고, 키셸과 다르게 머리가 나빠서 스칼라 시험엔 통과하지도 못 했어. 사실 1년정도 공부하다가 포기했어. 난 그런 건 영 젬병이라니까."
소년종들이 각각의 잔에 새 음료를 따라주었다. 진한 붉은 빛이 도는 음료였다. 소년종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설명했다.
"서리 딸기로 담근 35년분 와인입니다. 이 쪽은 도수가 약한 복숭아 체리 칵테일입니다."
은접시에는 설탕을 잔뜩 묻혀 새하얀 과일 조각들과 초콜릿, 색깔별로 나뉘어 담긴 포도알과 치즈 쿠키가 있었다. 또 다른 접시로는 뼈를 발라낸 오리를 얇게 썬 것, 알알이 절인 과일이 올라간 아주 작은 케이크, 새우가 장식된 매끄러운 표면의 테린이 있었다.
칵테일은 거의 음료나 다름없었고 새빨간 와인은 낮부터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운 듯 했지만 막상 마셔 보니 너무 향미가 괜찮았다. 미식가인 그녀답게 최고의 것들로만 준비된 자리였다.
"어머, 이 와인 괜찮다."
세리아가 감탄하며 입술을 살짝 가렸다.
"집에서 가끔씩 가볍게 마시곤 해. 유이나는 와인 잘 마시던가?"
"으응, 그렇게 자주 마시는 건 아닌데 이 와인은 맛있네."
맛있는 음식과 음료로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고 난 뒤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세리아는 에레도스라는 이름의 리드 계급 약혼자가 있어 3년 내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에레도스가 그녀의 후원자였으며, 키셸과 달리 한 곳의 가문에서 맡아 육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남자들과 약혼을 맺은 상태라고 한다.
"원래 에레도스는 레마슬레이그가 아니라 남부의 세피라 지역 왕족인데, 나는 딱 한번이지만 세피라로 여행을 가 본 적 있어. 정말 좋았었는데."
"세피라는 어떤 곳인데?"
"여기보다 좀 더 습하고 열대 과일들이 굉장히 많아. 가까운 곳에 바다도 있는데, 좁지만 해수욕이 가능한 공간도 있고."
여기도 해외 여행이나 관광 여행이라는 개념이 있구나. 지연이가 시골로 내려갈 때와 다르게 편도가 아니라 왕복이었다. 살러 가는 게 아니라 즐기러 가는 거고. 당연히 수많은 남자들의 호위가 있어야만 했다. 그 점만 따져도 경비가 저렴할 리 없었다.
이어서 키셸도 첫 결혼 선물로는 꼭 여행권을 받아낼 거라고 다짐했다. 그 때 키셸이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여행 가 본 적 있어?"
"아직……."
"칼리온 사교 행사도 아직이야?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행 아닌가?"
"칼리온 사교 행사?"
세리아의 질문에 키셸이 대신 대답했다.
"유이나는 칼리온 소속인 남편이 있잖아. 그럼 참석 자격이 당연히 있겠지."
칼리온 남자와 만나는 문제로 얼마 전 친목회 여자들에게서 수많은 질문 세례를 받아 본 입장이라 그 얘기가 밝혀지자마자 흠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키셸은 이미 높은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을 약속한 상태이고 세리아도 왕족의 연인이었다. 그 정도로 새삼스러워 할 리가 없었다.
조금 놀라서 그녀에게 반문했다.
"칼리온 남편이 있다는 얘기는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기억 안 나? 전에 칼리온의 집행관이 널 마중하러 나온 적 있었잖아. 그렇다고 그 집행관 본인과 사귀는 것 같지는 않고. 단순히 마중을 나왔을 뿐이라면 최소 네가 만나는 상대가 하위 집행관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상위 집행관이거나 집행기사라는 건데."
명확한 추리였다. 키셸은 이 세계에 대해 꽤 많은 걸 아는구나 싶었다. 나는 쉽게 수긍했다.
"맞아. 남편의 직업이 집행기사야. 그런데 칼리온 출신 남자와 만나는 거랑 여행을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뭐 당사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칼리온 출신의 남편이나 약혼자가 있으면 칼리온에서 열리는 사교회에 참석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전에 다니던 친목회에서도 칼리온 남편이 넷이나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매년 빠짐없이 칼리온 사교 파티에 참석한다고 자랑을 엄청나게 하고 다녔어. 다녀오는 길에 쇼핑도 어마어마하게 했다고, 이국의 물건들을 꺼내 자랑하곤 했지. 여행만이라면 나도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 별로 부럽진 않았는데 칼리온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장소여서, 조금 부럽긴 했어."
그 키셸이 부럽다고 느낄 정도라니. 나는 놀라워하며 물어보았다.
"왜 아무나 못 드나들어?"
"거긴 일종의 군사기지야. 돈이 많은 것과 상관없이, 출입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은 편이지. 더군다나 수준 높은 남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소문이라, 한 번만이라도 가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어."
상위 계급 여자들 사이에서도 방문 희망자가 넘쳐날 정도면 확실히 대단한 곳이긴 한가 보다. 세이라가 다시 나를 향해 질문했다.
"그래서 집행관이야, 집행기사야? 집행기사면 내 애인이랑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다."
"뭐……, 집행기사쯤 되면 왕족과 친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키셸이 동의했다. 집행관은 일종의 문관, 즉 일반적인 3계급 공무원에 속하는 편이고 집행기사는 여기에 충분한 마력과 무력까지 갖춘 경우였다. 대부분 2계급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집행기사인데, 왕족과 친분이 있다기보다는……, 본인이 왕족이기도 해서. 혹시 일리아나스라고 알아?"
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리아나스? 이름이야, 성이야? 에레도스의 지인 중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우음. 유명한 사람?"
반면 키셸은 이름을 듣자마자 당황하더니 잠시 뒤 반문했다.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공?"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셸이 세리아를 향해 핀잔을 주었다.
"그 사람 엄청 유명하잖아! 남자들 사이에서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세리아, 너 사회 공부를 하긴 한 거야?"
"그, 그렇게 유명해? 생각해 보니 들어 본 것 같기도……."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공의 대표 업적 한 가지만 말해 봐."
"……."
세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키셸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현대사 쪽은 아예 시작도 안 했구나. 그나저나 내가 아는 사실이 맞다면, 그 미켄바르프 공이 이미 너와 결혼한 사이라는 건데, 진짜야? 아니면 약혼 단계? 왜냐하면 난 아직 그 사람 미혼인 걸로 알거든."
다들 왕족이며 상위 계급 남자와 사귀는 게 당연할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라 그냥 말해 버렸는데, 세리아의 반응은 예상 내였으나 키셸이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둘에게 부탁했다.
"결혼……, 한 게 맞긴 한데, 아직 알려지면 곤란한 거라서. 비, 비밀 지켜 줄 거지?"
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굳이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유이나가 아직 어려서?"
키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있겠지. 그나저나 상당히 놀라워. 역사서에 기록될 만한 사건을 내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알게 될 줄이야. 세리아, 사소한 문제가 아니니까 너도 생각 없이 남들에게 말하고 다니지 마."
"알았다고."
세리아가 볼을 불퉁하니 부풀렸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아……."
"그러면 다행이고. 그보다 유이나, 미켄바르프 공이 17살때 변방에서 마수의 대침공을 막아낸 사건 말인데, 그거 사실이야? 아니면 영웅의 어린 시절에 대한 특수성을 부여하기 위해 적당히 부풀려진 얘긴가? 그렇다면 서부 도시의 반란을 해결한 사건은? 역사서에서는 팔할 이상이 미켄바르프 공 혼자 세운 업적이라는데,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짜였지?"
키셸의 질문이 갑작스레 쏟아졌다. 이건 또 예상 못 했던 질문이다. 나는 다른 의미로 쩔쩔매며 질문에 하나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미켄바르프 공의 외모에 대한 찬사가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밖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랬더니 또 둘은 얼마나 잘생겼냐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닮은 사람을 별로 본 적 없어서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화제를 돌린 나는 세리나움의 친목회에 대해 둘에게 물어보았다. 둘 다 고개를 내저었다.
키셸은 세리나움의 친목회에 아직 초대받은 적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리아는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에레도스가 초대장 받아다 줄까, 하고 몇 번 물어봤는데 별로 관심 없어서."
"꽤 유명한 상류 계층 여성들의 친목회 이름 중 하나야. 비슷하게, 대여섯군데 정도 다른 친목회가 있으니 초대장을 받았다고 다짜고짜 방문하기보다는 천천히 모임의 성격을 알아보고 방문하는 편이 좋을 거야. 괜히 남편들의 정치성향과 반대되는 쪽의 모임에 발을 들였다가 난처해지기도 하니까."
"난 이따가 키셸이 자주 참석하는 데가 생기면 거기로 할래."
"그 정도는 스스로 판단해……."
친목회를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선물로 거기서 마셨던 와인 한 병을 받고 나오는데, 키셸의 친목회는 그때그때 각자 번갈아 가며 장소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 만나는 형식이라고 한다. 다음 번에는 세리아가 자신이 잘 아는 살롱을 빌려 거기서 친목회를 열자고 말했다. 두 명이 만나기엔 좀 휑한 곳이었는데 세 명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고. 언젠가 내 차례도 올 텐데, 내가 빌릴 수 있는 장소가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은 칼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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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운 내용은 평상시 그다지 사람들이 입에 올리지 않는, '쇠퇴기'와 관련한 것들이었다.
쇠퇴기는 엘리시온의 생물이 젊음을 잃고 서서히 노화해 가는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보유 마력의 총량이 적을수록 쇠퇴기가 일찍 오고, 길게 유지되었다. 마력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최하층민의 케이스는 이르면 40대 후반부터 쇠퇴기가 찾아와 점차 나이가 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지구인의 인생 사이클과 비슷했다. 생각해 보면 단순한 사실이다. 지구야말로 순수하게 마력이 없는 세계였으니까 말이다.
반면 보유 마력이 높은 상위 계급은 쇠퇴기가 오기 전에 수명이 다해 버린다. 혹은 몇 년 미만으로 아주 짧게 오는 편이거나. 그것은 상위 계급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쇠퇴기에 접어든다고 곧바로 신체 기능에 이상이 생기거나 생식이 불가능해지지는 않았다. 평범한 노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력이 조금만 있어도 이 쇠퇴기가 오기까지의 시간을 상당히 늦출 수 있기 때문에, 길을 걷다 보면 의외로 노인 비중이 꽤 적었다. 하지만 길거리에 노인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이유만이 아니었다.
잘 언급하지 않는 사회의 어두운 면이 여기에 있었다. 쇠퇴기에 들어선 사람들, 오래 쇠퇴기가 유지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젊을 때와 달리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그들은 대부분 사회의 복지를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굶어 죽어 간다. 여자들은 차라리 낫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어도 쭉 디베르타에서 책임지고 일자리를 주기 때문이었다. 디베르타에서는 여자이기에, 생식과 관계 없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굉장히 많았다. 일의 강도는 그렇게 고되지 않고, 게다가 일을 하지 않아도 눈치만 받을 뿐이지 일부러 쫓아내기까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여기서는 노인 복지 같은 게 없는 건가. 하긴, 지구와 달리 모두가 늙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상위 계급은 늙지조차 않으니 노인 부양에 대한 문제에 소홀해질 수밖에.'
그렇다고는 해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집사도 지구 나이로 50살은 넘어 보였는데, 그럼 집사도 곧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거 아냐?'
그 날은 아르트리어 저택에 잠깐 방문했었다. 내 소년종 둘은 이 저택 소속이기도 했고, 에이반이 없는 동안 저택에서 생활만 불가능할 뿐이라 볼 일이 있을 때나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간혹 직접 방문하고는 한다.
에이반이 원정 중 내게 보내 왔던 마물 가죽으로는 집사의 추천에 따라 허리띠를 만들기로 했다. 보통은 구두를 만든다고 들었지만 내가 화려한 구두를 잘 착용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집사는 허리띠를 추천했었다. 가죽 정가운데 가장 무늬가 예쁜 부분을 골라서, 부분부분 꼬아 만든 허리띠가 될 예정이었다.
어차피 디베르타 생활이다 보니 당분간 착용할 생각은 없지만 어제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몸소 들렀다. 주인 없는 집이라도 이 정도 저택을 유지하려면 고용인이 상시 거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집사가 흰 천에 싸인 쟁반을 들고 내 앞에 내려놓았다.
"아직 마감을 하기 전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나 수정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시착을."
집사 곁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장갑 낀 손으로 허리띠를 조심해서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띠 착용을 도와주었다. 골반 라인에서 부드럽게 은빛 가죽 허리띠가 늘어졌다. 은색 가죽으로 이루어진 손가락 두세 개 두께의 허리띠에는 두 줄의 화려한 금사 장식이 달려 있었고, 허벅지 위로 장식이 늘어져 달랑거리는 스타일이었다.
'대체 무슨 생물이길래 가죽이 이렇게 반짝거리는 은색인 걸까? 신기하네.'
얼핏 인조 가죽이 아닌가 싶은 참 신기한 색상이었다. 마감을 끝마치면 더 은은하고 부드러운 광택이 나올 거라고 말했다. 시착을 끝마치고 이대로 완성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자 집사 옆의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신중하게 부드러운 천으로 가죽 허리띠를 다시 감싸 넣었다.
하인 같기는 한데 복장이 다른 하인들과 조금 달랐고, 얼굴도 왠지 낯설었다. 별 생각 없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집사가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집사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제 후임입니다. 그러니까 유이나님께서 처음 보시는 얼굴일 겁니다. 아마도 그가 3년 내로 저를 대신하여 아르트리어 저택의 집사 자리를 물려받게 될 겁니다."
"3년 내로요? 그렇게 빨리?"
"저도 일흔이 넘었고, 슬슬 은퇴해야 할 테니까요. 아직 도련님께서는 그가 집사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만 곧 돌아오시면 알려드리게 될 겁니다."
그렇구나……. 그래도 상류 가문의 집사였으니까 은퇴하고 좋은 집 구해서 지금까지 번 돈으로 노후를 충분히 안온하게 보내겠지? 그렇지만, 지금까지 챙겨 주던 익숙한 사람이 곧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조금쯤은 씁쓸했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당장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아쉬워 할 필요는 없겠지. 집사는 오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쉬다가 디베르타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남자가 없는 집이라고 해도 숙박만 할 수 없을 뿐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건 상관 없었다.
간만에 혼자 식탁에 앉아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하인 대신에 예비 집사라는 그 남자가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집사는 보통 늘 바쁜 편이라서, 가끔 에이반이 식당에 앉아 만찬을 즐길 때 말고는 주인의 시중을 직접 들기보다는 별도의 일을 하기 위해 집무실에 머무르거나 하인들의 감독을 하러 이리저리 복도를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아스벨네 집에는 집사가 여러 명이었지만 아르트리어 저택에는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혼자 처리할 일이 꽤 많았다. 사실 그나마도 에이반이 식당에서 정식으로 오찬이나 석찬을 하는 일은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두세 번 있을까 말까였다. 그래서 하인이 아닌 예비 집사가 내 시중을 든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냅킨을 팔에 얹고 허리를 꼿꼿이 편 집사가 내 앞에 깨끗하게 닦은 식기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블렌딩한 차가운 차를 기다란 금속 잔에 따랐다. 오래간만에 먹는 제대로 된 풀코스 식사는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집사가 따로 예비 집사의 시중이 어땠는지를 물어 보았다. 아마 정식 주인을 모시기 전의 연습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별달리 거슬리는 부분이나 시중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무난했던 것 같아요."
"흐음, 그렇습니까……."
집사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방문한 김에 집사에게 친목회의 참석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혹시 정치적으로 피해야 할 모임이 있는지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에이반이 딱히 눈에 띄는 명확한 정치색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어디에 참석하더라도 특별히 큰 문제는 없을 테니 자유롭게 골라도 좋다고 대답했다. 특히 또래 여성과 어울리는 것은 누구든 상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에이반의 경쟁자는 의외로 꽤나 연식이 있는 나이 많은 2계급 현역들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반이 무척 이르게 출세한 탓이었다.
설탕 절임 두 병과 과일 콤포트가 들어간 도넛 한 바구니를 가지고 디베르타의 방으로 돌아왔다. 도넛은 양이 넉넉해서 소년종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한창 단 걸 좋아할 나이처럼 보였으니까. 레오가 돌아서서 자기 몫의 도넛 절반을 벨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
세리나움의 친목회는 하얗고 풍성한 꽃들이 화단 가득히 피어 있는 널찍한 파빌리온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친목회에 초대받는 조건은 간단했다. 유력자의 아내이거나 약혼녀, 나이는 너무 많지 않을 것. 엘리시온에서는 세대 개념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자그마치 손자나 증손자가 있을 정도로 나이가 있는 귀부인들은 또 그들끼리의 모임이 따로 있었다.
늦은 저녁이지만 푸짐한 파티 음식들이 차려졌으며, 앉을 곳도 아주 넉넉했다. 이곳에서는 쿠션 방석 위에 앉을 수도 있고 낮은 의자나 그냥 러그 위에 마음대로 자리를 잡아도 무방했다. 전에 참석한 친목회는 스탠딩 파티였는데 이 곳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소년종의 동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벨은 일찍 재우고 레오를 데리고 참석했는데 막상 분위기를 보니 다들 소년종을 하나만이 아니라 최소 둘 이상씩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번에는 그래도 구색 맞추기용으로 둘은 데리고 와야겠다.
다들 직접 음식을 가지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소년종을 시켜 이것과 저것, 여러 가지를 가져오게 했다. 꽤 널찍한 공간을 쓰고 있었는데 정작 여자들은 적고 전체 숫자의 절반 이상이 소년종들이었다. 음식 맛을 좀 즐기고 있는데 이번 친목회의 주최자들로 보이는 한 귀부인 무리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세리나움의 친목회는 누군가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다 보니, 특정한 한 명이 계속해서 행사를 주최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친목회에 참여해 온 몇 명의 부인들끼리 각자 돌아가며 손을 보태는 식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세리나움 친목회에 초대받은 신인을 소개할 시간이군요."
희게 탈색한 백발을 구불구불하게 말아 틀어올린 한 귀부인이 가벼운 손짓과 함께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첫 참석인 여자 몇 명이 부름에 의해 그녀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꿀에 졸인 페이스트리가 담긴 접시를 잠깐 소년종에게 맡기고 그 곳으로 향했다. 제일 유명한 여자부터 소개되었다.
"펠리시아 양, 라페스타 국무부 장관의 아드님이신 디올 라페스타 공의 내정자라고 합니다."
밝은 금발을 풍성하고 윤기있게 빗어 늘어뜨린 훤칠한 인상의 젊은 여자였다. 초면에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어필할 만큼 뛰어난 미녀라고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키가 크고 몸매가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디 모난 곳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얼굴 생김새 하며 반질반질한 살굿빛 피부, 시원스러운 체격, 전반적인 이미지는 호감형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그녀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내 남자들과 자그마치 두 번이나 엮이다니……. 본인이 직접 접근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
심지어 남편인 카이제르에게는 라페스타 장관이 몸소 그녀를 소개시켜 주려고 찾아오기까지 했다. 본질적인 적대감을 그녀에게 느꼈지만 나는 최대한 속내를 감추고 덤덤하게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니까. 일순위로 소개를 받은 펠리시아는 인상 좋게 미소를 지으며 조금 크다 싶은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했다.
"다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라페스타 가문의 펠리시아라고 합니다."
적어도 이 자리의 절반은 되는 여자들이 그녀에 대해 이미 들어 보았거나 아니면 다른 모임에서 만난 적 있는 듯 했다. 펠리시아는 첫 참석이라는데도 익숙한 듯 십수 명은 되는 여자들과 눈을 마주쳤다. 여기서 처음 보는 듯한 이들도 그녀의 이름이나 그 약혼자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본 듯 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꽤 많은 여자들이 펠리시아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반면, 내가 서 있는 뒤쪽에는 오히려 그녀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하는 여자들이 자리잡았다. 대개 출세하겠다고 너무 기를 쓰고 과한 '결혼 영업'을 일삼는다는 비난들이었다.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상대 되는 여자들에게는 상당히 적대감을 샀던 모양이다. 특히 그녀들은 자기가 만나는 남자의 가문 쪽에 직접 성교섭 제의를 하러 찾아왔다거나, 눈독 들이고 있는 정계의 유력후보들만 대놓고 만나러 다닌다는 등의 이유로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 듣자 하니 약혼자나 후원자의 중매를 이용하지 않고 그녀가 직접 나선 적도 꽤나 많았나 보다. 나 역시 그와 흡사한 이유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흐음, 라페스타 소공의 내정자란 말이지?"
"아버지인 장관에 비하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장관 본인이 아직까지는 상당한 실세니까 무시하기는 힘들지."
"나중에 몇 마디 정도는 나눠 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지금은 말고."
하지만 어느 정도 중립적인 얘기를 나누는 여자들도 그녀와 '인사'정도는 해 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만큼 장관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거겠지.
펠리시아의 소개가 끝나자 그녀가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떤 순서인지는 모르지만 펠리시아 다음은 내 차례인가 보다.
"그리고, 유이나 양. 이번 분기 신인인데요, 신인인 만큼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아마 그녀가 어느 쪽 소속일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자그마치 군부의 젊은 대령 아르트리어 공, 게다가 동시에 총재 카스칼 공의 아드님이신 카스칼 소공의 내정자이기도 하답니다!"
펠리시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한 번 들은 것 같은 반응을 하던 사람들이 나 때에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잘못된 정보가 아닌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하긴 에이반과 아스벨의 앙숙관계는 남자들 사이에서만 유명했을 것 같지 않았다. 둘이 같은 여자를 약혼녀로 삼을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둘의 여자 취향 자체는 꽤 비슷했다. 그걸 사람들이 몰랐던 이유는 둘 다 여자 쪽에 한해서는 동정이기 때문이었겠지.
"아르트리어 공은 분명 골수 남색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카스칼 소공이라? 세상에, 제가 들은 게 맞아요? 정말 그 두 사람의 여자가 같은 인물일 수가 있나요?"
하지만 그 본인이라는 여자가 떡하니 눈 앞에 있으니, 그들 입장에선 함부로 틀린 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다지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아르트리어 공이 남색을 즐긴다고 해도 후계를 낳아 줄 부인은 필요한 법이고, 정작 두 가문 사이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니 두 가문에서 같은 여자를 육성할 수도 있겠지."
그런가? 그러고 보니 에이반과 아스벨 부친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에이반의 부친은 무척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아들들은 사이가 나쁘지만 아버지들끼리는 꽤나 사이가 좋았나 보다.
"그렇다면 그녀는 상당히 운이 좋은 인물이군요. 아르트리어 공도 그렇고 카스칼 소공도 그렇고 아직 나이가 젊으면서도 벌써 두각을 드러내 이미 한 자리씩 휘어잡은 남자들이잖아요? 어떤 의미로는 장관의 며느리보다 미래성이 더 굉장하겠는데요?"
"뭐, 그거야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나를 두고 주목하는 주변의 시선에 살짝 긴장하며 예의상 미소지었다.
나 뒤로 서너 명쯤 되는 가문의 여자들이 각각 소개되었다. 이후로는 별달리 대단해 보이는 여자들은 없었지만 전부 이름 한두 자씩은 들어 봤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인 양 그녀들에게 접근했다.
어느새 얘기는 기본적인 내 약혼자들의 신상 정보에서 그들의 성적 취향까지 옮겨갔다. 내가 약간 불편해하자 그녀들은 각자 자기 남자들에 대한 얘기를 번갈아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의외로 여자들 모임에서는 쉽게 하는 얘기 같았다. 모임의 성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몇 번이나 들었는지, 한 여자의 뒷 얘기를 다른 여자가 이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독 받아주기 힘든 취향의 남자들 같은 경우는 다들 비난하면서도 긴밀하고 빠짐없이 정보를 나누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자기가 그 남자와 초면에 엮일 기회가 되더라도 충분히 주의할 수 있었다.
"아르트리어 대령님은 어떤가요? 역시 남색을 즐기시니까 애널 쪽을 주로?"
꽤나 조용해 보이던 인상의 여자 한 명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질문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아뇨, 주로……, 라고 말할 정도까진."
"그럼 반반 정도인가요?"
나는 여전히 꺼려지는 소재인 탓에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 한 번도 그의 것을 직접 엉덩이에 넣어 본 적은 없지만, 손가락이나 딜도로 훈련은 잔뜩 했다. 횟수로 따지자면 대략 서너 번 중에 한 번쯤. 그런 뜻을 적당히 담아 말하자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대령님은 여자 상대를 아예 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거든요. 그래서 평범하게 섹스한다고 하니까 꽤 의외에요."
서너 번 중에 한두 번은 꼭 엉덩이에 손을 대는데 그게 평범한 건가? 내가 물었더니 그녀들은 거의 고개를 끄덕였다. 애널 섹스 자체는 여기서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마력 감응제를 통해 애널을 보조적인 성기 역할을 하도록 길들일 수 있는데다가 여자에 비해 남자 비율이 높기 때문에 상대하는 모든 남자들과 성실하게 앞쪽으로만 삽입 섹스를 하면 여자 쪽이 지치기 마련이라고. 더군다나 원치 않는 임신이나 원치 않는 에스트라에 관한 문제도 있다. 처음 애널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해도 3, 4년차쯤 되면 다들 애널을 무난하게 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뭐 그래도 여전히 엉덩이라면 고개를 젓는 여자들도 있긴 했다.
비교적 알려져 있는 에이반의 성적 취향보다 그녀들은 아스벨의 취향을 더 궁금해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스벨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내용이 없었다. 그는 정말 무난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정상위, 가끔 내가 원하는 대로 여성상위. 후배위는 별로 선호하지도 꺼려하지도 않고 도구는 절대 쓰지 않는다. 애널에도 굳이 손댄 적 없었다. 다른 곳을 만지면서 가끔 같이 만지거나 스친 적은 있지만 말이다.
"음……, 아스벨은 그냥 평범해요. 정말 특이한 부분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선호하는 체위도 무난하고 도구나 약을 쓰지도 않고."
유독 달라붙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특이함 축에도 못 든다. 사실 아스벨 외의 다른 남자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선호가 존재했다. 제일 먼저 도구를 자주 사용하는데다가 호불호가 명확한 에이반. 그리고 전에 한 번씩 관계를 가졌던 세리스와 디트리히는 각각 가슴을 유독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타인 앞에서의 공개 섹스를 좋아한다거나, 취향이 전부 달랐다. 심지어 남편인 카이제르만 해도 자기 부인을 침대에서 잔뜩 괴롭히고 쾌감에 반쯤 실신시켜 마지막에는 기어코 소변까지 싸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다들 변태라면 변태적인 취향인데 아스벨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간결한 대답에 그녀들은 그럼 선호하는 분위기나 복장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사실 아스벨이 선물했던 속옷을 입었을 때나 내가 마음에 들어서 샀던 속옷을 입었을 때나 그의 반응에는 유별날 만큼의 차이가 없었다. 사실 그의 반응은 옷에 따라 생각하면 중구난방이었다. 대충 내가 봐도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옷들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긴 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잘 어울리니까 좋아하는 거겠지.'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니 아스벨의 취향을 도통 모르겠다. 아직 사귄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아서 그런가?
"그런 남자들은 아직 어려서 그래요. 경험이 적으니까 자기 취향을 모르는 거죠. 잘만 하면 본인 취향대로 가르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유이나 양께서도 그리 경험이 많은 것 같지는 않네요."
잔느가 자신있게 웃으며 말했다. 각자 자기가 만났던 남자들이나 만나고 있는 남자들에 대해 서슴없이 얘기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취향의 소유자들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떤 귀부인은 소년종 시절부터 길러 온 잘생긴 시종들을 자그마치 열여덟 명이나 보유하고 있었으며 남편이나 약혼자들 못지 않게 자주 유희적인 잠자리를 갖는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그런 여자가 그녀 하나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이나 양."
그 때 누가 봐도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 보이던 한 여자가 내게 필요 이상 간드러지게 물었다. 안 그래도 유독 목소리가 튀는 여자였다.
"카스칼 소공 말고, 부친이신 카스칼 공께서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시던가요?"
"……예?"
갑자기 왜 약혼자의 부친에 대해서 묻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 번 만난 사람도 아닌데다가 보통 그런 걸 알 리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얘기가 나오자 두어 명쯤 되는 여자들이 더 흥미를 가졌다.
다른 장관급 인물과 다르게 총재 카스칼은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미혼인데다 미남이었다. 아들이 아니라 안정기의 나이에 들어선 본인을 욕심 내는 여자가 우리 중에 꽤 많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예비 시아버지에 대한 일을 예비 며느리에게 묻다니.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자유분방한 엘리시온이라고 해도 세대 차이 정도는 존재했고 친족끼리의 성적인 연결관계는 터부에 가까웠다.
"글쎄요. 직접 만나뵌 건 딱 한 번 뿐이라서요."
"나중에라도 듣게 되면 꼭 알려주세요. 너무 궁금하네요, 호호."
나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칼 가문이며 아르트리어 가문의 이름값 덕분에 나는 그리 붙임성 없는 성격임에도 무난하게 자리에 녹아들 수 있었다. 레오를 시키기도 하고 다른 귀부인들의 소년종의 도움을 받기도 하여 몇 접시나 음식을 권유받았다. 처음 먹어 보는 간식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전부 맛있었다. 이 분야에 통달한 전문 제과사가 만드는 고급 디저트들은 아르트리어 저택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케이크는 눈딸기와 카무트 파우더로 만든 거에요.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 눈딸기가 사시 사철 나오는 재료는 아니라서요. 한겨울이나 원정 시기에나 맛볼 수 있지요."
"어머, 정말 맛있네요."
"눈딸기도 좋지만 저는 카무트로 만든 다른 간식들도 무척 좋아해요. 쫀득쫀득해서."
나도 희게만 느껴지는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고 달큰하고 고소하게 퍼지는 맛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녀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우리 자리로 옆의 무리에서 해산한 여자 몇 명이 참여했다. 그녀들 중 핑크색의 얇은 꽃잎 같은 쉬폰 드레스를 걸친 한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다른 모임에서 본 적 있었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나는 잔느가 그녀에게 건넨 말에 내심 당황했다.
"에오사 양, 오래간만이에요. 저번 모임에는 빠지셨더라고요."
그녀는 졸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오사라고 하니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무척이나 예전에 만났던 고위 계급 여성이었다. 도서관 근처 공터의 그늘 아래에서 기분 좋게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녀의 소년종들이 신분을 내세우며 그늘 아래 모여 있던 5계급 여자들을 죄다 쫓아냈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라서 썩 호의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반응도 다른 사람들 반응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예의 그 나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네, 그냥요."
"……뭔가 중요한 일정이 있으셨나 봐요."
"아뇨, 그냥 빠지고 싶어서 빠졌는데요."
그녀는 멍하니 대답하며 접시의 케이크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아아, 이 쪽은 오늘의 신인인 유이나 양이에요. 카스칼과 아르트리어 가문의 내정자죠."
"으응?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니까 방금 전에 신인이라고 말했잖아요."
잔느는 이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태도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건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인물이라서겠지. 사실 이 자리의 모든 여자들은 유력자 남편과 약혼자가 최소 두세 명 이상은 있었다. 누구 한 명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초대장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잠깐 자리에 앉아 있다가 떠나자 잔느는 물론이고 다른 몇 명의 여자들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항상 저런 태도에요.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이고……. 가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죠."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런가요?"
"유이나 양도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충고하건대 그녀와는 깊은 대화를 안 나누는 편이 좋을 거에요."
"그녀의 성격이 많이 나쁜가요?"
"성격이 나쁘다기보다는……, 음, 사실 그녀는 조금 이기적인 편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악의를 보이지는 않아요. 그냥 너무, 심각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게 문제죠."
잔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게 성격이 나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잔느의 말을 이어 옆자리의 다른 여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사실 레마슬레이그의 상위 계급 여자들 중 성격이 나쁜 걸로는 그녀 이상으로 유명한 인물이 있죠. 파라벨라 대부인이라고. 혹시 유이나 양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뇨, 처음 듣는 것 같아요."
그 뒤로는 잠깐 동안 파라벨라 대부인이라는 여자의 험담이 이어졌다. 꽤나 심술궂은 여자인 것 같았다. 단지 성격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그 지위가 어지간한 여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꽤나 그녀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물론 그 성격 때문에 간혹 다수의 빈축을 사기도 했고, 실세이던 그녀의 남편들이 반수 이상 은퇴한 덕에 지금은 나이 든 여자들도 일부러 그녀를 모임에서 빼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물론, 대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큼 여전히 창창한 편이긴 했다.
"사실 저희보다는 저희 선대의 부인들이 그녀와 많은 마찰을 일으켰지요. 몇몇은 대놓고 그 파라벨라 대부인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고."
"정말요, 제 시모도 그 이름만 나오면 학을 떼더라고요. 아들을 군에 보낸 입장에서 감히 장관 집안에 대들 수는 없어서 억지로 참고는 있지만 처음 한동안은 화병으로 앓아누워 사교계 출입도 제대로 못 했었다고."
내가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따로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시어머니가 따로 없었는데, 시어머니가 있는 여자들도 상류 계층에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이 여럿이니 시어머니도 여럿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상류 계층일수록 결혼을 자주 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는 고부 관계처럼 그들이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약혼은 했지만 나와 아스벨의 부친도 얼굴을 본 적이 딱 한 번 뿐이고. 가족 개념이 지구와 많이 다른데다가 고부관계, 자그마치 두 다리나 건너 뛴 여자 대 여자 관계에는 어떠한 강제성도 없었다. 남보다는 자주 얼굴을 보니까 꽤나 친한 경우도 있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서 처음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케이스도 있다고 한다. 사실, 만날 일도 별로 없다.
그녀들은 자기도 파라벨라 대부인의 나쁜 소문을 들었다며 몇 마디씩 덧붙이다가, 어느덧 파라벨라 대부인 외의 다른 평판 나쁜 여자들의 험담을 시작했다. 험담이라고 할까, 실제로 그녀들이 저질렀던 나쁜 짓들에 대해 은근슬쩍 흉을 보는 중이었다.
문득 생각나서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쥬브니엘 부인은 평판이 어떤가요?"
"쥬브니엘……. 혹시 쥬브니에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비슷한 이름이라면 그녀 한 명 뿐인데."
쥬브니엘인지 쥬브니에인지 처음엔 약간 헷갈리긴 했는데, 역시 에이반이 이름을 잘못 알고 있던 거였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한 기억을 되살려, 남편 중 하나의 이름이 세이모어 중령이었다고 덧붙이니 역시 그 쥬브니에 부인이 맞다며 잔느가 확신했다.
"그녀는 굳이 평가하자면 꽤나 조용하고 소심한 편이잖아요?"
"……네?"
"뭐,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겸손하고 배려심 깊고 선한 사람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음, 혹시 인물을 착각한 것 아닐까요?"
지금 주제에는 그리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선지 그렇게 말한 잔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내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던 그 여자가 착한 사람이라고? 물론 잔느도 그녀와 그리 친하거나 잘 아는 사이는 아닌지 몇 차례나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전혀 뜻밖의 얘기에 약간 황당해졌다. 나한테 그렇게 시비를 걸었으니 다른 피해자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쥬브니에 부인은 소속 가문 중에서 유명하거나 장관급인 인물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2계급이긴 하지만 세리나움 친목회에는 초청받지 못했다. 좀 더 큰 범위의 모임에서는 만날 수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아직까지 확실한 건 없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했던 대로 지위로 찍어 누르며 고스란히 되갚아 주고 싶지만, 적어도 그녀가 한 짓거리들에 대한 소문이라도 확 퍼뜨려서 제대로 망신을 주고 싶지만, 일단 그건 상대를 좀 더 파악한 뒤여야겠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렇게 착한 인물은 아닐지도. 뭐, 당한 걸 갚아 주겠다는데 선악이 문제겠는가. 나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너무 늦어지기 전에 자리를 떴다. 몇몇은 소년종을 불러들이거나 가방을 챙겼지만 대부분 한창 즐기고 있었고 잔느도 좀 더 놀다 가라며 붙잡았지만, 내일 스케줄이 있다고 둘러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을 했다.
처음에는 조금 꺼려했었지만 의외로 얻은 정보가 많아서 알찬 친목회였다. 펠리시아라는 화제의 인물도 실제로 만났고 말이다. 그녀는 단지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에 녹아들어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던 나와 달리 첫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잔느처럼 무리의 리더가 되어 자기 곁에 모여든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얘기를 쉴 틈 없이 조잘거렸다.
'절대 만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네……. 뭐, 나야 내 남자들만 안 건드리면 그녀가 여자들을 휘어잡든 남자들을 휘어잡든 상관 없지만.'
굳이 위축될 것까지는 없지만 역시 성격이 나랑은 완전히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게다가 나는 그렇게 사람 많은 모임에 한 번 참여하고 나면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꽤나 피곤해지는데 그녀는 참 기력도 좋구나 싶었다.
소년종의 시중을 받으며 몸을 닦고, 침대에 누워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
앞으로 7주정도만 더 수업을 들으면 딱 디베르타에서의 1년을 채우게 된다. 여기서 숙식하게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특히 이 곳의 대욕탕은 호화로워도 너무 호화로워서 일부러 한적한 아침 시간을 골라서 자주 즐기게 되었다. 물론 진짜 입욕을 즐기고 싶은 시간대는 오후였지만, 그 때는 역시 사람이 너무 붐비는 편이었다.
가끔 모르는 남자들이 말을 걸 때는 조금 짜증나긴 했다. 대부분은 클럽 회원이지만, 가끔 남의 초대패를 보란 듯 손목에 감고서 나를 꼬드기는 남자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불쾌해서 상대에게 보란 듯 경고를 날리고 곧장 자리를 떴다.
그들은 대개 예민한 상태의 내 대꾸를 무척 불쾌해했는데, 굳이 가드를 부르지 않아도 내가 꽤나 위협적으로 큰 마력 불꽃을 피워 보이자 곧장 깨갱하며 꼬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기본적인 아케인 포스, 보라색 마력 불꽃밖에는 피워내지 못하지만 남편인 카이제르와의 몇 번에 걸친 동침 덕분인지 마력량 자체는 무척이나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아케인 포스라고 해도 그 크기와 색깔이 아주 거대하고 짙었다. 이 정도 검보라색이면 확실히 거의 2, 3계급에 준하는 마력량이라고 한다. 아마 아케인 포스 자체보다는 마력량이 나타내는 내 신분에 놀란 거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겁을 줘서 쫓아내고도 당연히 가드에게 보고는 꼬박꼬박 했다.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되니까 말이다.
슬슬 수업 중에 시험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아의 시험이 아니라 디베르타 자체에서 치르는 기초 교육 말미의 사회 적응 시험이었다. 갓 1년차를 마치는 여자들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테스트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으로, 최소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더 이상 꼬박꼬박 언어와 사회 수업을 들으러 디베르타에 등원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시험 이후에는 부족한 부분이나 더 배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원하는 과목만 골라서 일주일에 한두 번, 몇 시간 정도만 디베르타에 와서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특별한 몇 가지만 아니면 거의 무료 수업이었다. 물론 여기서 떨어지면 또 1년을 더 수업을 들으며 매일같이 아침마다 등원해야만 한다. 무난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할 수 있을 만큼의 의사소통이 되는지, 사회 적응이 완료되었는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사실 열 명 중에 세 명, 많게는 네 명도 첫 해의 시험에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주로 언어 쪽 문제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펜던트 로커스 없이도 무난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엘리시엘 실력이 늘었다. 중간중간 쪽지시험을 볼 때도 언어가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들었다. 아마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게 있으니 막판 스퍼트를 올려 공부에 열중했다.
졸업하고 나서 곧장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으니 절대로, 시험에 떨어져서 1년이나 더 레마슬레이그 디베르타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2년차부터는 무조건 모든 수업을 완수해야 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 합격한 과목이 있는 날에는 불참해도 된다고 하는데……. 아니, 안 돼. 2년차부터는 내가 듣고 싶었던 미술 수업도 들을 거고, 마력 운용이랑 여러가지 다른 것도 배워 볼 거니까. 그렇게 어려운 수준도 아니니까 꼭 단번에 합격해야지.'
대부분의 미술이나 취미 기술 수업, 심화 수업 종류는 반드시 기초 사회 교육을 합격한 여자들만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나는 비교적 성실하게 수업에 임한 덕분인지 별로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다. 역시 평소 노력이 중요하다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원정을 갔던 원정대가 예정보다 거의 두 달이나 이르게 레마슬레이그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은 라무스의 요일날 밤, 아스벨과 기진할 때까지 침대에서 즐기고 난 이른 새벽 그가 떠나기 직전이었다. 아스벨은 그 얘기를 하면서 영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걸리적거리는 에이반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그다지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마 숨길 수는 없어 내게 털어놓고야 만 그 심리가 빤히 보여 무척 귀여웠다.
어차피 아스벨과 만나는 날과 에이반과 만나는 날은 각각 서로 달랐다. 그러니까 그가 돌아오더라도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다. 대신 근무 장소 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둘은 같은 수도방위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둘은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거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그러나 생각 뿐, 나는 반쯤 잠에 취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아스벨을 배웅했다.
그 날 오후에도 나는 조만간 있을 시험에 확실히 통과하기 위해 복습하러 도서관이 있는 건물까지 들렀다. 책 몇 권을 꺼내 잠깐 앉아서 훑어 보고, 적당해 보이는 것을 도서 대여 한도인 네 권까지 추려내어 같이 데려온 소년종인 벨에게 넘겼다. 대여한 책은 디베르타 담장 바깥까지 가지고 나가지 않는 한은 자유롭게 두고 읽을 수 있었다.
도서 대여 절차를 밟으려던 때, 레오가 헐레벌떡 도서관으로 뛰어들어와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았다. 나이든 여성인 도서관 사서가 당황했고 입구를 지키던 가드 한 명이 그에게 소란 피우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미안해요, 제 소년종이 조금 놀란 것 같네요. 그나저나 레오, 무슨 일이니?"
나는 가드에게 대신 사과하며 레오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를 낮춰 바깥을 가리켰다.
"주, 주, 주인님께서 지금 엔트런스에서 유이나 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주인님이라면……, 설마 에이반이? 에이반이 돌아왔다고?"
나는 책을 빌리려던 것을 곧장 그만두고 두 소년종을 데리고 엔트런스로 빠르게 걸어갔다. 엔트런스 건물을 나서자마자 키가 훌쩍 큰 흑보랏빛 머리의 남자가 큰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많이 짧아지고 초췌한 인상이며 입가에 눈에 띄는 붉은 흉터가 길게 그어져 있었지만 평소와 같은, 꽤나 신경 쓴 복장 덕분에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에이반!"
나는 그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묵직한 꽃다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실은 그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보고, 몸에도 크게 다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를 온 몸으로 안아드는 에이반의 팔 힘은 아주 강력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유이나.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한참 서로 포옹하고 난 뒤에야 그가 속삭였다. 아주 익숙한 에이반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울렸다. 나는 뺨을 살짝 붉히며 그의 가슴에서 조금 벗어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볍게 접촉만 해도 그의 이리저리 엉킨 탁하고 짙은 에스트라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물과 직접 싸우는 최전선이다 보니 원정대는 그 기간 동안 자위로만 성욕을 해결해야만 했다. 아예 에스트라 해소 없이 싸울 수는 없으니 무조건 혼자서 풀어야만 하는 것이다. 평생 여자 없이 사는 남자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보통 마력이 많을수록 에스트라의 폭주는 참기 어렵다고 하니, 꽤나 힘든 기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는……, 괜찮았지만. 에이반은요?"
"저야 멀쩡합니다. 조금 피곤한 것만 빼면요. 게다가 당신을 안고 있으니 전투의 피로가 한순간에 전부 풀리는 느낌입니다."
그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내 몸을 살짝 옆으로 안아 올렸다. 날 이대로 내려놓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대로 안고 뒤도는 바람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어……, 곧바로요?"
"퇴실 절차와 남은 짐은 소년종에게 지시해 놓지요."
그러고 보니 내 거처는 아르트리어 저택이었다. 몇 달이나 디베르타에서 살았더니 오히려 저택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내 몸을 도저히 떼어 내기 싫다는 듯 꼭 밀착하여 껴안고 마차에 탔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에이반은 내 얼굴과 입술에 뜨겁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한참이나 입을 맞춘 뒤 여전히 키스의 여운을 즐기며 내 입술을 핥던 그가 말했다.
"디베르타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불편한 부분은 없었고?"
"으응, 나쁘지 않았어요."
"저도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당신을 안고 싶습니다."
평소와 달리 그는 아주 저돌적으로 성교섭에 관하여 예고했다. 나는 에이반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제대로 씻을 생각도 않고서 욕실에서부터 내 몸에 그 두껍고 단단하게 선 둔기를 격렬하게 비벼댔다.
부부 방, 그러니까 침실이 아니라 성교섭용의 붉은 벽지가 발린 방에 들어가자마자 에이반은 곧장 무릎을 꿇고 내 엉덩이를 주물러대며 허벅지 위로 입을 댔다. 나는 무릎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에이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침대로 가요."
"으음……, 후……."
"에, 에이반, 침대로……."
나는 두어 번 그를 재촉했지만 에이반은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푹신한 카펫 위에서 바로 나를 안았다. 한 차례 바닥에서 뒤엉켜 섹스한 뒤에야 그는 나를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행위는 침대에서부터였다. 그는 평소보다 은근히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양 팔은 단단히 내 몸을 안고 있었지만 더욱 더를 외치지 않아도 마구 찔러오는 그의 대물에 정신이 혼미했다.
중간에 잠깐 눈을 붙였을 뿐, 새벽부터 내내 그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내게 자극을 주었다. 간만의 성관계라지만 조금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집요한 쾌감의 유도로 인해 고작 하룻밤만에 기진맥진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에이반은 자신의 음낭이 회음부에 눌릴 정도로 뿌리의 뿌리까지 물건을 박아 넣은 채 한참을 뽑지 않았다. 질내 절정에 의한 긴 경련이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질 안의 경련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는 사정 뒤의 페니스에 감겨드는 자극을 한껏 맛보았다.
그의 물건을 박아넣고 몇 차례나 연이어 경련했다. 기절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절정 한참 뒤의 자잘한 떨림까지도 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자세를 고정시킨 상태로 전부 받아냈다. 나는 땀투성이인 그의 등에 팔을 올리고 가늘게 떨다가 애원했다. 젊은 엘리시온 남성인 그가 지금껏 얼마나 욕구불만으로 힘들었을지를 짐작했기 때문에 전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었지만 이젠 한계였다.
"이제, 쉬, 쉴래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탁하고서야 에이반은 여직 길고 단단한 물건을 안에서 뽑아낸다. 핏줄이 울룩불룩 돋은 뿌리가 좁은 입구를 역행하며 통과하고, 그 다음이 길고 끝없는 기둥. 정액과 애액이 섞인 것으로 온통 더러워져 바닥에도 흰 자국을 만들어 버린다. 감미로운 여운 틈에 유난한 자극으로 약간 괴로운 시간이 된다. 역날형의 귀두를 억지로 좁은 질구에서 비틀어 빼낼 때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부분의 자극인데 역시 약간 쓰라릴 때도 있다.
한참이나 두꺼운 물건으로 넓혀져 느슨해진 질구에서 흰 점액이 울컥 쏟아져 나온다. 에이반이 그럼에도 부족한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할 때,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더듬어 옆에 놓인 새 수건을 한 장 끌어와서 다리 사이에 받쳤다. 그가 별 수 없이 몸을 일으키며 곧 대야를 가져 와서 몸을 닦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나는 에이반이 옆자리를 비우자마자 혼자 시트를 덮고 잠들고 말았다.
그가 평소 모습대로 돌아온 것은 저녁 이후부터였다. 내가 지쳐서 내내 낮잠을 자는 동안 휴가 절차를 밟고 돌아온 그는 몸종의 도움을 받아 입가의 흉터와 그을린 살갗에 약을 얇게 펴바르고 있었다. 나는 흰색 속옷만 챙겨 입고 눈을 비비며 에이반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결계 바깥에서 탄 피부는 그냥 내버려 둬도 원래 색으로 돌아오지만, 복구되는 데 적어도 몇 달은 걸리기 때문에 마력감응제 연고를 바르는 것 같았다. 마력감응제는 에이반이 윤활제 대용으로 내 몸에 발라 주는 약이기도 했는데 마력에 의한 부위 변화를 극대화하는 물질이었다. 마력을 통한 여성체의 변화를 빠르게 유도하는 효과도 있지만 상처나 흉터의 빠른 수복에도 쓰이고 있었다. 아니, 아마도 그 쪽이 본래 목적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물론 꽤 고가의 약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넓은 부위에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디베르타에서 배운 바로는 그랬다.
에이반은 약이 다른 곳에 묻어나지 않도록 상의를 입지 않은 채 가볍게 나를 안아들어 무릎에 앉혔다. 부드럽게 속옷 위를 쓰다듬는 손바닥이 평소보다 조금 까슬거렸지만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많이 짧아졌네요."
에이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하자 그가 조금 어색한지 자신의 뒷머리를 살짝 쓸었다. 지금의 에이반은 아스벨보다 더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다. 머리 모양 하나만으로 이미지가 전과 꽤 달라졌다.
"예, 아무래도 원정 중에는 장발을 관리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긴 편을 더 선호하십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에이반은 물론 짧은 머리도 훌륭하게 잘 어울렸지만 긴 쪽이 더 예쁘긴 하다. 남자의 짧은 머리는 지구에서도 흔히 보던 것이고 이곳에서의 남편인 칼도 애인인 아스벨도 마찬가지로 활동적인 짧은 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원래의 차분하고 윤기 흐르는 장발을 가진 에이반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가 밤마다 침실의 소파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브러시로 긴 머리를 빗어내리는 모습과 천천히 잔머리를 정리하며 긴 머리칼을 묶는 모습, 둘 다 무척이나 묘하고 색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에이반이 가볍게 웃었다.
"아니면 단지 낯설어서 그러십니까? 정 긴 머리가 더 좋으시다면 빨리 기를 수 있도록 관리를 해 보겠습니다만."
"으응,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낮에는 아까 말한 대로 긴 머리인 편이 더 마음에 들지만, 반대로 밤에, 짧은 머리의 에이반은 훨씬 더 야성적인 이미지였다. 그에게 안길 때의 짜릿함을 다시 떠올린 나는 달콤함에 취한 표정으로 에이반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애매한 시간대였지만 같이 점심식사를 하며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던 에이반은 도중에 선물했던 마물 가죽으로 무얼 만들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깔끔하게 잘 나온 은빛의 허리띠를 착용하고 보여 주었다. 잘 어울린다고 감탄하며 내 허리 주변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 양쪽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아앗, 에이반……!"
"엉덩이가 조금 더 쫀득하고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꽤나 많이 주물러진 모양입니다?"
"내, 내 엉덩이는 전과 똑같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힘들어요. 오늘 아침까지 했잖아요……."
"많이 힘든가요? 저는 아직도 부족한데."
정말, 이 남자는 금욕을 하면 안 되겠다. 아무리 몇 달만이라지만 어제 밤이 새도록 하고 또 오늘 아침 내내 했으면서 아직도 부족하다니. 에이반은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내 엉덩이를 다시 주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제 것을 완전히 뿌리까지 잘 삼키게 되셨더군요."
"으, 으응……, 칼의 것이 너무 크다 보니까."
정작 카이제르의 것은 아직도 뿌리까지는 넣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에이반의 것이 끝까지 들어오는 걸 보고 나도 어제 꽤 놀랐다. 그는 잘 하고 있다며 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칭찬했다.
"앞은 됐고, 애널 훈련은 꾸준히 잘 하셨습니까? 약은 누구에게 발라 달라고 했지요?"
"그, 그건……, 그냥 혼자서……."
"혼자서?"
나는 얼굴이 발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아스벨이나 카이제르에게 애널을 길들이는 걸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는 껄끄러웠으니까. 에이반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속옷 위를 더듬다가 엄지로 엉덩이 골 사이를 천천히 훑었다.
"혼자서 약이 제대로 발렸으려나 모르겠군요. 유이나, 제가 없을 때 다른 남자와 애널로 섹스한 적이 있습니까?"
"어, 없어요."
"다른 남자들은 모두 이 쪽 취향이 없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모르겠다. 굳이 얘기를 꺼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에이반은 부드럽게 나를 설득했다.
"취향 문제를 떠나서 이 쪽도 슬슬 경험을 시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앞쪽은 저와 하셨으니까, 다른 쪽은 유이나 마음에 드는 다른 남자와 체험하고 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가 지금껏 공들여서 길을 들여 놓은 만큼 뒤쪽 첫 경험도 에이반과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남자와 하고 오라는 말에 나는 살짝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머뭇거리다가 이 쪽도 에이반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에이반은 그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대답했다. 정말 의외였다…….
이번 원정을 다녀 온 원정대원들은 모두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개월의 휴가를 받았다. 에이반은 3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게 매달렸다. 나도 기력이 되는 한 받아 주고는 싶은데, 문제는 지금 내 상황이었다. 바로 다음 주가 시험이다.
에이반의 심각하게 쌓인 에스트라 해소를 돕는 것과 1년째 되는 날의 디베르타 시험, 뭐가 더 중요한지 갈팡질팡이었다.
심지어 휴가라서 그런지 에이반은 매일매일 몸소 나를 디베르타까지 바래다 주고 데려오기를 반복했는데, 마차 안에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 것이다. 지각하기 직전에서야 흐트러진 옷차림을 겨우 바로잡고 붉어진 뺨을 두드리며 마차에서 내리고는 했다. 그가 머리를 식히고 점잖은 행동을 의식하게 되기까지 거의 2주는 소요되었다.
드디어 시험날이었다. 시험은 4일에 걸쳐 치러졌다.
하루에 한 과목씩이었다. 언어 한 과목, 사회 지식과 상식이 두 과목, 마지막으로 마력의 가장 기본적인 활용법 한 과목. 언어의 경우 자유로운 읽고 쓰기가 얼마나 가능한지, 다급하거나 긴박한 상황일 때도 엘리시온의 언어로 재빠르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지가 평가 기준이었다. 사실상 벼락치기로 배워 봤자 소용없는 과목이기도 했다. 사회 과목은 제일 공부할 것이 많았는데, 그만큼 시험 문제도 광범위했다. 합격 커트라인은 50점이었다. 나온 문제 중에 절반은 맞춰야 하는 건데 어려운 법률 문제도 많았는데다 문항 자체가 굉장히 길어서 50점을 넘을지 못 넘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가장 큰 관건이었다. 마력 활용은 시험 내용이 꽤나 간단했다. 특정 인물과 그 인물의 고유 마력을 구분하는 정도, 누구나 마력이 쌓이면 자연스레 해낼 수 있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 다음에는 마력량이 어느 정도로 늘었는지도 각자 검사했는데 이 모든 성과가 디베르타에서 보존되는 개인 기록으로 작성된다고 들었다.
마력량 같은 경우, 측정을 목적으로 제작된 로커스 마법진 위에 올라가서 점차 저울의 눈금이 기울어가는 것을 확인한다. 따로 준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물론 1년차 여자들의 마력이 높을 리 없었기 때문에 전용 마법진은 눈금의 숫자가 낮은 대신 정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올라간 순간 갑자기 눈금이 끝도 없이 기울더니 한도치를 넘어 버렸다. 가장 오른쪽 벽에 막힌 눈금이 그대로 고정된 것을 본 조수가 고장이 났다며 당황하자 측정 담당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여러 명에게서 후원받고 있는 예비 신부의 경우 간혹 이런 일이 있습니다. 3.5까지밖에 표시되지 않는 마법진이거든요."
"확실히 서류에는 피후원자라고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만 이제 겨우 1년차인데요."
그들은 서로 내 서류를 들여다보며 수군거리더니 일단은 최대 수치로 기록한 뒤 나를 돌려보냈다. 2계급 군인들과 집행기사에게서 매번 마력을 받고 있는 만큼, 표준보다는 더 많은 마력량을 가졌겠지만 3.5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 마력인지 의아해졌다.
마지막 시험까지 끝마친 당일, 집으로 돌아가서 그 점에 대해 에이반에게 물어보았다. 과연 에이반은 얼마나 되는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는 서재의 선반에서 꽤 큰 나무상자를 끌어내렸다. 한 쪽 길이만 세 뼘은 되는 상자에는 부드러운 빌로드가 가득 차 있었고 가운데에 육중해 보이는 볼링공 이상 크기의 거대한 유리구슬이 파묻혀 있었다.
그 구슬의 바닥에는 짙은 보랏빛의 기체인지 액체인지 불분명한 물질이 가라앉아 있었다.
"에이반, 이게 뭐에요?"
"슬슬 당신도 알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게 바로 마력을 납세하는 데 쓰이는 스톤입니다. 스톤이 뭔지는 아실 겁니다."
로커스나 비큐스에 붙는 보석을 스톤이라고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순히 보석을 의미하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인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1.0스톤이라고 해서, 보통 손톱보다 조금 작은 규격이라고 정해져 있습니다만 그 안에 가득 차는 정도의 마력 수치가 1입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작네. 그럼 이 거대한 유리구슬에 차 있는 건 양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숫자가 9배씩 커져서, 그 양의 약 9배 되는 수준이 2.0스톤, 81배 되는 수준이 3.0스톤이 되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실질적으로는 9.0스톤, 이론상으로는 최대 12.0스톤까지 계산할 수 있습니다. 보통 4, 5계급 시민들은 적게는 2.8정도, 많게는 3.4정도까지 마력량을 가지는 것이 평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와, 세상에. 같은 계급끼리도 차이가 그렇게 커요?"
"그런 셈이지요. 개인 차이가 꽤 나는 편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4.0은 729배, 5.0은 심지어 6561배가 된다. 나는 종이에 끄적여 가며 단계별로 곱셈을 한 뒤 나온 수치에 숨을 들이켰다.
"3.5를 넘는 수준부터 3계급 군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만, 확실히 경력이나 요령 같은 요소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 가산점을 받으면 마력 수치가 조금 모자라도 근무 조건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4.0를 기준으로는 3계급과 2계급이 갈리기 시작하지요. 이 구슬의 용량은 약 7.2스톤정도 되는데, 제가 한 분기당 납세해야 하는 마력이 이 구슬만큼입니다. 물론 원정을 떠난 해에는 면세를 받게 되지만 채울 수 있을 때 미리 채워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요."
이 거대한 구슬이 7.2스톤이라고? 5스톤을 넘으면 도무지 계산도 하기 힘든 정도의 마력량 수치가 된다. 에이반은 어차피 마력량이 커지면 정확한 측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톤을 사용한 계산법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학술적 목적이 아니라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 나는 지금 3계급 군인 정도 되는 마력량이 있는 거네요."
"예, 아마 그 정도 될 겁니다. 그래도 조금 놀랍군요. 제가 얼핏 느끼기에는 3.4정도 안팎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측이 3.5를 넘게 되다니. 유이나의 마력도 주인을 닮아 얌전한 편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바깥으로 크게 방출되지 않으면 단순 접촉만으로 마력량을 구분하기가 어려우니 말입니다."
에이반이 내 등허리를 살며시 더듬으며 말했다. 그는 나와 자주 몸을 섞기 때문에 단지 그것만으로도 내 마력량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군인과 마력량이 같다고는 해도 관련된 트레이닝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맞붙으면 비교도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추가로 개인 마력량이 5단위를 넘는 사람은 레마슬레이그 전체를 따져 봐도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숫자가 커질 때마다 9배씩 늘어나니까 말이다. 심지어 그 중 하나가 내 남편인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라는 말에 더욱 놀랐다. 국가에서 손꼽힐 정도로 마력이 높은 사람이 내 남편이라니,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시험을 치른 뒤부터는 더 이상 수업을 들으러 꼬박꼬박 디베르타에 출석할 필요가 없었다. 시험에 합격했든 떨어졌든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다른 수업도 거의 없었다. 약 보름 정도 되는, 1년 중 유일한 디베르타의 방학 기간인 셈이다.
나는 방학이 시작되고 사흘 정도 지나 시험 결과를 통지받았다. 결과는 완벽한 합격이었다. 커트라인 기준으로 쳐도 꽤 여유 있게 합격했다고 한다. 주관식 문제가 많아서 고심했는데 정답이 많았던 모양이다.
합격한 것은 기쁘지만 일차적인 목표가 사라지게 되니 이 다음에 무얼 할지가 고민이었다. 배우고 싶은 건 많았지만 결혼식 준비 때문에 오래 수업을 빠지게 될 터라, 당장 아무거나 수업 신청을 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디베르타에 가서 어떤 추가 수업이 개설되는지는 상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미술 수업이 두 종류 있는데 하나는 특강, 하나는 상시였다. 특정 수준의 마법을 2주에서 3주에 걸쳐 배울 수 있는 매직 클래스도 눈에 띄었다. 2주에서 3주 정도면 결혼식을 하러 떠나기 전에 하나쯤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무엇부터 배워 볼지 고민하며 난이도를 고려해 열심히 메모해서 돌아갔더니 뜻밖의 얘기를 에이반에게서 들었다.
상위 계급 여성들은 4, 5계급의 여성들과 달리 배워야 할 마법과 관련 지식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체계적인 과외를 위한 전문 교사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나 같은 경우에는 칼을 통해 왕족의 부인에 대한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칼리온의 과외 교사가 붙을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 절차는 결혼식 이후가 되겠다.
'괜히 메모까지 해 왔네.'
그런 거라면 진작에 얘기해 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디베르타의 최종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꽤 늦게 칼에게 도착했을 것이다. 결과가 나온 날 곧바로 그에게 전보를 부쳤지만 지금 칼리온의 저택에 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나는 우선 일주일에 5일 참석하여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서로 평가하며 코치를 받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상시 미술 수업에 등록했다. 결혼식으로 오래 수업을 빠지게 되어도 별달리 진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 형식의 수업이었다.
미술 재료는 당연히 개인이 직접 구매해야 했는데 물감의 가격이 꽤 비싼 편이라 그런지 수강생들은 어느 정도 돈이 많은 여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수업 수준도 꽤 높았고 다들 조용한 편이라 수업 분위기 역시 무척 괜찮았다.
나는 두 뼘정도 되는 조그만 들국화 꽃 그림 하나를 완성해서 액자에 넣어 걸었는데 내가 봐도 지금까지의 그림 중 가장 사실적으로 잘 그린 것 같았다. 에이반은 입술의 상처도 옅어졌고 그을린 목덜미의 피부 색을 거의 원래대로 되돌렸다. 집사는 예정대로 은퇴하여 시골로 내려갔고 새로운 젊은 집사가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합격 통지 이후부터 2주정도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칼의 답장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에이반이 칼의 편지를 직접 보여 주었다.
얄팍한 흘림체는 칼 고유의 예스러운 필기방식이었다. 얇고 매끄러운 미색의 종이에 디베르타 졸업을 축하하며 이번 달이 끝나기 전에 칼리오네스로 방문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칼은 결혼식에 긴히 초대하고 싶은 인물의 조건이 있다면 미리 알려 달라고 덧붙였다.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은 인물이라면 알겠는데, 조건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에이반, 결혼식에 사람을 초대하는 데에도 조건 같은 게 있어요?"
"아마 일리아나스 공의 말씀은 당신의 이상형을 묻기 위한 것 같습니다. 엘리시온의 결혼식은 신부가 돋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새로운 신랑 후보들과 만나기에도 좋습니다. 원하는 신랑 후보의 스타일이 있다면 미리 천천히 생각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원하는 신랑 후보 말이죠."
나는 혼자 생각하다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일단 키가 크고 잘생기면 좋을 것 같고 성격이 다정할수록 기쁠 것 같았다. 그 외에 가문이라던지 소속 같은 건 그리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물었다.
"음, 후보는 그렇다치고, 혹시 아스벨이나 다른 친구들을 초대할 수도 있나요?"
"레바단 재상 가문인 카스칼에도 일단은 초대장을 발송할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 분의 지위나 성별에 따라서는 초대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칙적으로 보통 결혼식 본식에는 신부 외의 다른 여성이 참여하지 않습니다. 식 며칠 후에 열리는 연회의 경우 여성 지인도 초대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 결혼식은 칼리온에서 열리기 때문에 칼리온 사람 외에는 참여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응, 하긴 아예 다른 지역이니까요."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에 여자 손님을 잘 초대하지 않는 관례에 대해서는 당연히 들어본 적 있었다. 신부가 주인공이기에 다른 여자는 애초에 초대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냥 내 결혼식이 아니라 왕족의 결혼식이기도 했다. 아마 초대받는 사람들의 신분에도 꽤나 까다롭겠지. 일반인들 사이에서 간혹 벌어지는 예외 같은 일에도 엄격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꼭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을 만큼 아주 절친하고 오래된 친구는 없었다.
에이반과 나는 별달리 대단한 것들은 챙기지 않았다. 간단한 준비만 하고 사흘 뒤 칼리온으로 출발했다. 하인 몇 명과 에이반, 마중을 나온 칼리온의 안내인 한 명과의 동행이었다. 레마슬레이그와 칼리온 사이의 길은 비록 결계 바깥에 속하지만 꽤 잘 닦여 있었다. 자주 오가는 편이라 그런 것 같았다. 흔들림이 거의 없는 마차 안에서 창 밖으로 외부 풍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처음 엘리시온에 왔을 때 지나왔던 숲이 생각났다.
물론 그 때는 에아의 소환탑에서 레마슬레이그로 들어오는 길이었지만, 레마슬레이그 결계석 주위를 널찍하게 감싸고 있는 숲 지역을 거쳐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숲 다음은 넓게 펼쳐진 들판이었다. 군데군데 농사를 짓고 있는 구역도 보였다. 왕실 소유인 그리폰 목장도 있었다. 멀리서 얼핏 지나가듯 본 것 뿐인데도 무척 신기했다.
대신 밤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그리 넓지 않은 마차 안에서 잠을 청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목장을 지나는 시점부터는 마차의 흔들림이 조금 심해져서 책을 읽어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살짝 멀미가 나기도 했다. 에이반은 몇 시간마다 내가 마실 차를 데워 주었는데 수면을 유도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확실히 차를 마셨더니 잠이 쏟아져서, 마차 안 소파에 누워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껏 푹 잤다.
여행 내내 너무 자서 그런지 4일째 되는 날 오전, 칼리오네스에 곧 도착할 것을 알았지만 머리가 멍해서 당장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레마슬레이그에서 칼리온까지는 보통 아우카가 끄는 마차로 일주일 미만이 걸리고 그리폰을 타거나 작정하고 강행군을 할 경우 사나흘 정도 걸린다고 들었다. 중간부터 계속 잠만 자서 얼마나 이동 속도가 빨랐는지는 모르지만 4일이면 초반 여유롭게 출발한 것 치고 일찍 도착한 편인 것 같다. 마지막 날은 차도 마시지 않았는데 졸렸다. 하품을 참으며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슬슬 주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칼리오네스는 커다란 강과 운하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한 쪽은 바다와 맞닿은 큰 강이 흐르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높은 산맥과 절벽이었다. 험준한 지형에 만들어졌지만 도시 중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한다.
칼리오네스 변두리에서 제일의 볼거리는 운하였다. 목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범선들이 제각기 큰 돛을 달고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돛은 날치 지느러미나 박쥐 날개 모양과 닮았는데 돛대와 선미는 간혹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기도 했다.
나는 마차의 창 밖으로 바다와 배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저 쪽에는 해변 같은 모래사장도 있네요! 여기서 해수욕을 할 수도 있는 건가요?"
"바다와 맞닿은 하류 쪽은 해수에 사는 소형종 마물들이 거슬러 올라올 수 있어 물놀이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해군들이 수중 훈련을 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는 있을 겁니다. 강 상류가 몸을 담그기에는 안전합니다."
레마슬레이그 역시 작은 강이 도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석조 수로를 파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꾸며 놓았다. 그래서 비록 바다는 아니지만 강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고 하니 기대도 되었다.
"상류에서는 5계급 여성들이 자주 모여서 물놀이나 목욕을 하더군요."
"저도 놀러 가 보고 싶어요."
내 말에 에이반은 그냥 웃기만 했다.
칼리오네스는 이중 성벽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 신분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내성은 칼리온 본부가 있는 곳으로 정말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 외성문에서도 약간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내성을 앞두고는 직접 마차에서 내려 검문을 받아야 했다.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였다. 소년종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일행이 검문을 받았는데 왜 에이반이 시종들을 적게 데려온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왕족의 부인이라 한들 예외는 없었다. 외부인들은 무조건 절차에 따른 질문이 필수였다.
덕분에 조금 지쳤지만, 막상 내성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다. 칼리온 내성 쪽은 바다 냄새 물씬 풍기던 바깥과는 또 다르게 꾸며져 있었다. 넓고 탁 트이지는 않아도 체계적으로 각이 잡힌 거리와 건물들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신분에 따라서도 명확하게 구획이 나뉘어 있는데 4, 5계급 구획은 테라코타 지붕과 적갈색의 벽돌, 지정한 색상의 회칠이 된 아기자기한 건물이 딱 간격에 맞춰 주거지를 구성하고 있어서 멀리서 보니 정말로 인형의 집들 같았다.
"칼의 저택은 어디쯤인가요?"
나는 높아야 2층정도인 벽돌 집들을 넘어서 멀리 보이는 대리석 저택을 향해 중얼거렸다. 에이반이 대답했다.
"칼리온 본부에 있는 일리아나스 공의 거처에는 저도 처음 방문하는 겁니다. 중간 지대에 지어진 정원이 넓은 석조 건물이며 저택의 규모지만 왕족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성이라고 불린답니다."
"중간 지대?"
확실히 그의 집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경사진 지형이다 보니 맨 아래쪽과 맨 위쪽의 높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었다. 높은 장소일수록 더 큰 집이 지어져 있다. 물론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첨탑 같은 건물은 칼리온의 본부라고 들었다.
카이제르의 집은 칼리온 본부에서 아주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곳이었다.
정원이 넓은 석조 건물이라고 들었는데 정원이 정말 다른 저택에 비해 눈에 띄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일정한 크기의 조약돌이 깔린 작은 인공 분수와 활엽 관목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카이제르가 정원 취미가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고풍스럽고 조용하면서 탁 트인 공간이 그와 무척 어울리는 장소 같기도 했다. 레마슬레이그 식대로 꾸며진 아르트리어 저택의 작고 화려한 정원과는 전혀 달랐다. 현란한 빛깔의 꽃은 드물었으며 자잘하고 짙은 녹음보다는 엷고 부드러운 녹색의 긴 잎사귀를 가진 식물들 위주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대문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중을 나온 카이제르와 정확히 마주쳤다. 그는 하인 한 명과 동행한 상태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검문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보길 다행이로군. 잘 오셨소, 부인."
나는 에이반의 곁에 서 있다가 그가 내미는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넓적한 돌로 마련된 길을 따라 그가 저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카이제르는 곧 뒤따라오는 에이반과도 간략한 인사를 나누었다. 에이반과 칼, 그리고 나까지 셋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첫 만남 이후로 지금이 두 번째인가.'
물론 둘이 딱히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칼은 뒤를 따르는 하인에게 말했다.
"아르트리어 경의 숙소는 본관 쪽 객실로 해 주게. 부인의 방은 내가 안내하겠네."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에이반에게 객실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에이반은 이따 보자고 말하며 내 이마에 가볍게 입맞추고 하인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객실은 1층과 별관에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보내고 나서 칼은 계단으로 올라가 내 방을 안내해 주었다. 3층이었다.
고전적인 격자창 달린 큰 응접실은 등받이가 없는 소파와 널찍한 오토만 쿠션이 놓인 것으로 보아 손님을 맞는 용도가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를 위한 장소로 보였다. 응접실을 기준하여 왼쪽이 칼의 방, 오른쪽이 내 방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보다 방이 무척 넓어서 조금 놀랐다. 녹색 실크 벽지의 방이었는데, 딱 봐도 벽지와 장식그림, 가구들은 꽤나 오래되어 보였다. 지저분하거나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주인이 없던 방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부인의 취향을 아직 잘 알지 못해서 따로 꾸며 놓지는 않았는데, 가구가 오래되어 교체하기 전에는 묵을 수 없을 테니 당분간 잠을 잘 때에는 옆에 있는 내 침실을 사용하시오."
"꾸미지 않았다면서 뭔가 이것저것 많네."
화장대에는 트레이와 유리병, 보석함처럼 보이는 작은 상자가 있었고 서랍 안에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런데 칼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일용품은 사용인들이 준비해 둔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과거에 이 방을 사용하던 엘로나 공주의 물건들일 것이오. 백 년도 더 전에 살던 사람이라, 아직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인의 것이니 부인의 뜻대로 해도 좋소."
"백 년이나?"
"이 저택 전 주인의 부인이었다고 하는군. 저택을 수여받을 당시 나는 스물 남짓이었지만 언젠가 왕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부인을 맞이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방을 굳이 처분하지는 않았소. 흥미가 없어 따로 손을 대지도 않았지만 말이오."
그 때의 물건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동안 마냥 방치한 것도 아닌 듯 하고, 사용인들이 매일 관리하고 꾸준히 손질해 온 것 같았다. 사실 백년 전의 골동품이라고 들으니 신기해져서 방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칼은 먼저 결혼식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미 어느 정도 식의 준비가 진행된 상태였지만 내가 관여해야 하는 부분이 꽤 남아 있었다. 일정이 빠듯한 만큼 당장 피로하지 않다면 오늘 안에 몇 가지 얘기를 마쳤으면 하고 그가 바랐다.
응접실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결혼식 장소와 날짜는 대강 정해져 있었다. 장소에 관한 선택권은 별로 없었다. 칼리오네스에는 왕족이 결혼식을 올릴 만한 곳이 딱 두 군데 있었다. 칼리온 본부에 딸린 대 연회장과 바로 이 곳, 칼의 저택. 본부의 연회장은 꽤나 유서 깊은 건물로, 중요한 행사는 거의 여기서 열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저택을 선택했다. 좀 더 편안한 장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소가 잡히자 곧 날짜도 쉽게 정해졌다. 약 2주 뒤였다.
그와 내가 입을 결혼 예복의 디자인을 결정하고, 손님 목록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예복 디자인은 다 거기서 거기 같았고 손님 목록도 어차피 확인해 봤자 칼리온의 고위 관료들을 내가 알 리 없었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끝까지 읽었다.
결혼식은 소개식과 피로연으로 구분되며 내가 알고 있는 결혼식처럼 주례나 서약 같은 절차는 없었다. 대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부를 소개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소개식이란 신부를 손님에게 소개하는 파티라고 보면 되는데 디베르타에서 전통적인 결혼식에 대해 공부할 때에 배웠다. 보통 한 번 치르고 끝내는 일반적인 결혼식과 달리 왕족은 소개식을 4번에 걸쳐 치르는데 신부의 다른 남편과 애인들, 외국에서 초대한 손님들, 고위 관료들, 마지막으로 일반 관료들을 각각 나누어 초대하는 것이라고. 물론 옛 풍습일 뿐으로, 레바단 연합이 성립된 이후부터는 왕족도 다른 시민들처럼 1회에 모든 소개 절차를 끝마치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칼이 결혼식 절차가 적힌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 혹시 더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추가하기는커녕 줄이고 싶은데. 너무 복잡해서 다 외우지도 못 하겠어."
결혼식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 있다면 초야, 즉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결혼식을 치른 당일이 아니라 그 전날 미리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의 마력이 결합한 사실을 하객들에게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날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 전날 밤, 혹은 당일날 아침에 하는 편이 낫다. 나로서는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결혼식에 따라서는 이틀에 걸쳐 두번째 날에 마력의 결합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결혼식 절차 안에 아예 신부와의 결합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 꽤나 드문 형식이었다. 나는 아직 그 정도까지 개방적이 될 수 없었고 칼도 싫어할 게 당연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과 하고 나면 온 몸이 나른해서 제대로 활동하기도 힘들어지는데……. 그 상태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파티에 피로연까지 참석해야 하다니.'
그와 동침한 다음 날에는 고작 평소의 반밖에 활동하지 못하니까, 결혼식 당일은 같은 일을 해도 평소의 2배는 피곤할 것이다. 다음 날 앓아누울 지도 몰랐다.
셋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에 나는 휴식보다는 먼저 내가 당분간 살 저택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결혼식 이후 얼마나 여기서 더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주는 지내야 할 것이다. 칼과 에이반은 또 둘이서 할 얘기가 있는 듯 했다. 앞으로의 일정을 조율하려는 것 같았다.
저택 본관은 상아빛의 화강암으로 지어져 있었다. 듣기로도 상당히 오래된 저택이라는 듯 하다. 그런 것 치고 사용인들이 항상 쓸고 닦는지 구석까지 깔끔하고 맨질맨질했다. 아르트리어 저택보다는 확실히 컸고, 복도와 방들도 큼직큼직했다. 장식이 적고 건물의 색이 통일되어서 무척 넓어 보였다.
결혼식 연회는 별관의 홀만으로 공간이 부족할 것 같아 넓게 마련된 별관 앞 정원도 포함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아직은 준비되지 않아 그저 파릇파릇한 비단 잔디만 깔려 있었지만 곧 연회를 열기 좋게 꾸며질 예정이었다.
뒷뜰에는 돌로 된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었는데 원래의 온실 자리라고 한다. 조각된 기둥은 덩굴 식물이 타고 올라가 약간의 그늘을 만들며 정원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졌다. 또 바로 이 곳에서는 지하수로 퍼올려진 물이 흐르는 조그만 인공 폭포를 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물길을 타고 올라온 지하수가 정문 쪽 정원의 소형 분수가 있는 연못까지 내려가 닿는 것이다.
샌들을 벗고 폭포에서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가 보았다. 시원한 물이 발 사이를 타고 흘렀다. 문득 긴 트임이 있는 스커트의 끝이 젖을 것 같아 치켜올렸다. 이미 얇고 폭이 좁은 스커트의 양쪽 자락에 점점이 짙은 얼룩이 생겨 있었다. 폭포가 떨어지며 물방울을 튀긴 탓이다.
폭포 주위에서 놀다가 시원한 잎사귀 그늘이 깔린 정원에서 옷이 다 마를 때까지 돌아다녔다. 정원을 거의 한 바퀴 돌다시피 하고 돌아왔는데 에이반이 나를 보고 웃었다.
"물놀이는 재미있으셨습니까?"
"어어? 본 거에요? 어떻게?"
"2층 창문으로요.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더군요."
물에 젖었던 내 양 발과 종아리를 힐긋 쳐다보며 에이반이 은밀하게 낮추어 속삭인다. 나는 저택 구경에 정신이 팔려 신경 쓰지 못하고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하인에게서 들었는데 아주 옛날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폭포래요. 마법 동력으로 저 아래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거라는데 진짜 폭포의 축소판 같았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주로 객실이 많은 별관의 인테리어도 볼 만 했다. 결혼식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면 당일날 이 별관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하여 미리 상세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 널찍한 대형 홀과 양 옆으로 이어진 식당은 접대용인 만큼 다른 곳들보다도 화려하게 새 것으로만 꾸며져 있었다. 항상 완벽해 보이도록 사용인들이 많은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려면 사용인 숫자도 어지간해서는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저택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사용인들은 나의 산책 공간에서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약간 거리를 두고 나를 안내하던 하인 한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첫 날은 도착한 당일이라 피곤해서 그런지 칼이 내어 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잔 덕분에 아침부터 내 곁에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칼은 언젠가처럼 침대 옆에 마련된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아 잠깐 동안 내가 정신을 차리기를 말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내가 여덟 번째 연이어 눈을 부볐을 무렵 입을 열었다.
"부인, 아직도 많이 피로한지?"
"으응……, 조금 그런 것 같기도."
"어젯 밤은 피곤할 일도 없었는데 그리 잠이 부족했나?"
나는 마차에서 오는 길에 내내 잔 사실에 대해 그가 얘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칼이 한 말은 어젯밤에 부부간 성교섭이 없었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그럼 오늘 밤은 좀 덜 피곤할 것 같소?"
"어……?"
"괜찮다면 오늘 밤에는 그, 부부 관계를 하면 어떨까…….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감이 없잖아 있으니."
지금까지는 묵고 가라는 등 넌지시 돌려 제안했었는데, 그가 먼저 내게 직접적으로 성교섭을 요청한 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간만에 마차 안이 아닌 푹신한 침대에서 보냈던 어젯밤이 너무나도 평온했기에 오늘도 가능한 한 어제와 같이 혼자 쾌적한 수면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밤이 아니라 낮에 하면 되겠지. 나는 살짝 웃으며 칼에게 손짓했다.
"칼, 오늘 출근은 언제야?"
"이 쪽은 군인이 아니니 정해진 출근 시간은 없소."
"그럼 괜찮겠네. 좀 더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 줄래?"
그가 머뭇거리다 침대 끝에 걸터앉자 나는 칼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가운이 끌려올라가는 것도 아랑곳않고 상체와 허벅지를 그의 몸에 비볐다.
"부, 부인."
그가 살짝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래도 싫다 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카이제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봐 준 뒤 그가 입고 있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맨 윗 단추가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부인, 직접 벗겠소."
그가 스스로 단추를 풀고 있는 사이 나는 아래로 가서 남편의 바지를 벗겨내렸다. 아스벨의 제복을 자주 벗겨 봐서 남자 바지에 달린 두꺼운 벨트를 푸는 법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에이반이나 아스벨이 착용하는 남성용 벨트는 얼핏 복잡해 보여도 요령만 알면 손쉽게 벗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칼의 바지에는 클래식한 벨트 잠금이 달려 있어 의외로 손이 꽤 가는 편이었다. 가죽 벨트를 풀고 속옷의 끈도 풀자 반 정도 딱딱해진 남성기가 드러났다.
그것을 속옷 밖으로 꺼내 부드럽게 손으로 쥐고 쓰다듬었다. 곧 그의 큰 성기가 빠른 속도로 두껍고 단단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낮에 환한 곳에서 보는 안정기 남성의 페니스는 새삼 어마어마했다.
본격적으로 칼을 침대에 눕히고 한 겹짜리 가운을 마저 벗어버린 나는 그의 배 위에 올라 앉아 자리를 잡았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누웠지만 칼은 반복해서 은근한 성행위를 암시하듯 내 허리와 엉덩이를 애무하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잡아 당기는 것밖에 못 하더니 상당히 빨리 배우는 것 같다. 그 동안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칼의 페니스를 활짝 벌린 다리 사이에 끼우고 기둥 뒷부분 돌기를 살에 닿도록 바싹 밀착한 뒤 클리토리스가 자극되도록 앞뒤로 비볐다. 이 쪽의 자극이 정말로 기분 좋았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 역시 적당한 압박감 덕분에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잠깐 즐기던 칼은 가기 직전인 나를 붙잡고 부탁했다.
"부인, 오늘은 내가 직접 빨 수 있게 해 주시오."
"아읏……. 좋아."
몸을 떼자마자 단단하게 솟은 페니스에 투명한 액체가 실처럼 늘어지듯 흐른다. 그는 자신의 물건이 꺼떡대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내 양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충혈되어 가기 직전인 클리토리스를 남편은 입을 대고 격렬하게 빨았다. 나는 엉덩이와 허리를 움찔대며 그의 혀에 그대로 절정을 느꼈다.
나는 절정의 여운 내내 부드러운 그의 혀로 충분히 즐겼다. 칼은 마무리로 주름 사이사이를 훑고는 입술을 뗐다.
"그럼 이제 돌아 누워 보시오."
"이, 이렇게?"
어디를 더 핥으려고 그런 건가 싶었는데 내가 방금의 절정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키고 자세를 바꿔 엎드리자 마자 칼은 나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잡고 벌려 그 사이를 혀로 쑤시듯 핥았다.
머리가 멍해지며 자극받아 부푼 클리토리스를 타고 애액이 줄줄 떨어진다. 에이반에게서 다른 남자와 애널 섹스를 하고 오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굳이 이 쪽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의무적으로 뒤쪽에 마력감응제를 바르지 않는 이상 앞의 자극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오랫동안 금욕하다 성행위를 받아들인 것처럼 뒤쪽 구멍은 조금의 자극만으로도 쾌감에 전율했다.
나는 침대 시트를 붙잡고 엎드린 채 흐느꼈다.
앞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젖은 것을 확인한 그가 잠깐 입을 떼고 자신의 페니스를 내 질 입구에 천천히 밀어넣었다. 빠듯한 굵기에 한순간 실신할 만큼의 만족감을 느꼈다. 양 허벅지와 사타구니 아래에서 칼의 탄탄한 다리 근육이 요동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 이상 박아넣은 페니스가 이번에는 뒤로 빠지며 귀두의 돌기가 질 안쪽 쾌락점을 긁었다.
반복되는 피스톤질에 나는 엉덩이를 치켜올린 채 전신을 쾌감으로 경련시켰다. 뒤에서 한참 박아대던 칼이 이번에는 내 몸을 안아들고 정상위로 바꾸었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는 듯한 얼굴로 내 다리를 들어 발목 뒷부분을 할짝였다. 입에 발목을 살짝 문 채 허리를 다시 격렬하게 움직인다.
'왜, 오, 오늘따라 다리를 그렇게…….'
주로 이런 자세에서는 내 몸을 껴안거나 가슴을 만지는데, 다리, 그것도 발목과 종아리면 집중해서 빨아대는 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만족스레 하얀 종아리 피부를 할짝이는 그의 붉어진 입술이 너무나도 야해 보여서 차마 하지 말라고 말릴 수가 없었다. 뜨겁게 하반신을 점령하는 그의 두껍고 긴 물건에 몇 번이고,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오르가즘을 느꼈다. 세 번, 아니, 짧은 시간에 네 번 이상 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실신할 만큼 단기간에 기쁘게 해 주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첫 사정을 했다. 실제로 계산을 해 봐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거의 석 달은 전이었다. 나는 전신을 절정으로 떨며 끝도 없이 들어오는 그의 정액과 마력을 눈을 감은 채 느꼈다.
그는 사정하고도 한동안 페니스가 커진 채였다. 곧 몸을 떼어내고 자극을 피해 내버려 두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나는 다리를 꼭 조여 그가 몸을 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다리가 마구 얽혔다. 칼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내 몸을 가볍게 안고 팔베게를 받쳐 주었다. 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쾌감에 안쪽 깊숙히 들어온 그의 페니스를 간헐적으로 꽉꽉 조이며 떨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부인, 기분 좋았소?"
칼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칼과 동침할 때는 항상 밤이었고 횟수도 1회에 그쳤다. 끝나고 나면 나는 기절하듯 잠들었고 칼 역시 씻고 따로 취침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다. 그리고 에이반과 지난 몇 주간 했던 것처럼 하루 종일 알몸으로 야한 짓을 하며 서로 엉켜 뒹굴 수도 있었다. 뭐, 칼이 그걸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여기에 넣어 줘."
나는 여전히 쾌락에 함뿍 젖은 목소리로 그를 보며, 지금 이어진 곳에서 조금 아래를 가리켰다. 사실 연습한다고 적당히 탄력 있는 촉감의 딜도를 몇 종류 넣기도 했고 그 중에서는 에이반의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정도에 불과한 것도 있었지만 갑자기 칼의 대물을 넣는다고 하니 일단 긴장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잔뜩 앞쪽 구멍으로 즐긴 뒤라서 지금의 내 몸은 완전히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칼은 내 요청에 조금 난처한 태도였다.
"부인, 그것은……."
"싫어?"
"싫은 것이 아니라, 부인의 몸이 걱정되어 그렇소. 그 쪽 부분은 크기가 많이 작은데 혹시 찢어지기라도 하면……."
"흐흥."
그건 내가 칼과 초야를 보냈을 때 했던 생각과 똑같았다. 이렇게 큰 물건이 과연 들어갈까 걱정되었지. 물론 그런 염려는 전혀 필요없는 것이었다. 칼은 머뭇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앞의 물건을 뽑아냈고 마지막 굴곡이 뽑혀나가며 내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동안 가볍게 흥분한 숨소리를 내며 정액과 애액 묻은 그 끝을 바로 밑에 문질렀다.
"부인, 정말 괜찮겠소?"
말은 그렇게 해도 칼 역시 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괜찮다는 말 없이 그냥 다리를 벌렸다. 도중에 아프면 곧장 그만 시킬 예정이었다. 칼은 신중하게 입구 주변을 문지르며 점차 페니스를 세게 밀어붙였다. 역시 앞쪽은 너무 두꺼워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얕은 돌기가 나 있는 그의 거대한 성기 끝이 애널 입구를 활짝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통증이나 버거움보다는 묘한 쾌감을 우선적으로 느꼈다. 내가 몸을 움찔 떨자 칼은 거의 다 삽입했던 앞부분을 다시 빼냈다. 곧바로 내 안부를 살피려는 그의 어깨를 꽉 쥐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 빼면 싫었다.
칼이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아까 반쯤 늘려 놓았던 그 구멍 안에 다시 단단한 그것을 꾹 눌렀다. 자의로 엉덩이에 힘을 주어 완전히 그의 귀두를 뒤로 삼켰다. 한계까지 늘어난 그 곳이 귀두를 전부 물고 다시 조여들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쾌감에 한참을 바들바들 떨었다.
고작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의 딜도와, 남자의 실제 대물은 확연히 그 느낌이 달랐다. 진짜 뒤쪽 전용의 쾌감이라는 것을 맛본 느낌이었다. 확실히 커서 그 압박감이 대단하긴 했지만 내벽이 돌기에 긁히기 시작하자 이미 완전히 성기로 바뀌어 버린 뒤쪽에서 본격적으로 미끈한 애액이 나와 입구를 적셨다. 오히려 앞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좁은 입구를 후두둑 훑으며 들어오는 기둥의 돌기도, 넓게 벌어지는 두툼한 두께감도 내게는 모두 쾌감이었다.
앞쪽과 달리 분명 뒤쪽은 유연한 편이라 입구를 긁어대는 그 감각이 전혀 괴롭거나 아프지 않았다. 칼은 평소 넣는 만큼의 깊이까지 페니스를 삽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허리를 바싹 당겨 더 깊숙한 곳까지 이끌었다. 배꼽보다 꽤 위까지 닿는 그 길이감에 거의 실신할 것 같았다.
"부인……, 마치 앞쪽으로 할 때처럼 느끼는군. 여기를 많이 좋아하는 편인가?"
나는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입술을 벌리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의 돌기가 애널 안 내벽을 긁을 때마다, 두툼하고 뭉툭한 귀두 끝이 안쪽 몇몇 지점을 꾹 눌러 줄 때마다 나는 허리를 파드득 떨며 경련하듯 느꼈다.
처음에는 내가 원하니까 해 준다는 듯 반응을 천천히 살피던 칼도 점차로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 뒤쪽의 애액은 앞에 비해 미끈미끈한 편이라서 그런지 그의 동작은 훨씬 격렬했다.
아까 한 차례 사정한 탓에 그는 도무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칠고 지속적인 움직임에 압도되어 간헐적인 신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엉덩이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내 몸을 안고 있는 남편의 팔과 어깨를 깨물고 긁으며 전신을 경련했다.
팔에 힘이 빠져 양 옆으로 축 늘어지고 나서야 그 감각이 오르가즘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칼은 애널 입구가 꾹꾹 조여 오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거칠게 안쪽을 쑤셔 주었다. 강제로 두 번째 오르가즘에 치달은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내 반응에 그는 눈에 띄게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작게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안쪽 어느 부분을 눌러야 충분히 내 반응이 나오는지 터득한 칼이 조금 더 자세를 틀어 위쪽을 꾹꾹 누르듯이 문지른다.
"흐아앗, 아앗, 아아!!"
허리가 침대 위에서 살짝 띄워질 정도다. 칼은 내 허리를 잡아채어 더욱 더 자기 몸에 밀착시키며 그 쪽 위주로 자극되도록 유도했다. 내장은 물론이고 머리속까지 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뿌리까지 박아넣은 칼이 엉덩이 살을 꽉 누르며 가장 깊은 곳을 더듬었다. 허벅지를 움찔움찔 떨며 또 한 차례 절정을 느꼈다. 애널 입구가 그의 페니스 뿌리를 잘라낼 듯 급격히 조여왔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가버린 애널로는 기분 좋은 자극만 줄 뿐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아래를 세게 찌른다. 나도 모르게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애널로 연이어 또 한 번 절정을 느끼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울며 칼의 목덜미를 껴안는다.
당연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울어버린 사실을 칼도 알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만족스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부인, 그렇게 좋아? 으응, 그렇게?"
"흐윽, 아하응, 아앗, 흑, 으흣!"
"여기가 좋은 것이지? 부인?"
"아아아앗, 아아!!"
나는 방 바깥까지 들리도록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자극하는 부분이 정답이었다. 칼은 한 차례의 애널 섹스로 내가 느끼는 부분을 이제 완전히 터득한 듯 하다. 쾌감에 실신할 것 같다는 감각을 현재 실감하고 있었다.
칼은 극도로 단단해져 사정 직전인 페니스를 사용하여 나의 배꼽 아랫부분을 뜨겁게 마찰했다. 마찰열만으로 구멍이 뚫릴 정도라고 느껴졌다. 속절없이 제일 느끼는 부분을 자극당한 나는 소변까지 왈칵 뿜어대며 또 한 차례 극치감에 도달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어 오로지 이명 뿐으로, 내가 얼마나 큰 소리를 냈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으로 오로지 쾌감의 잔류만을 느꼈다. 칼은 꽤나 많은 양의 정액을 애널 안 깊은 곳에 사정했다. 그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어코 안쪽 깊숙한 부분에 사정하고, 돌기가 돋아난 페니스를 억지로 빼낼 때도 나는 그저 쾌감에 파드득 떨 뿐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 더 오래 넣고 있어도 되는데, 하고 생각한 순간 칼은 허리를 굽혀 내 아래에 입을 댔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가 줄줄 쏟아져 나오는 소변에 입을 대고 마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가고 있는 것처럼 하반신 전체가 극치감으로 떨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도 그에게 마시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칼은 요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액체를 전부 마신 뒤 요도 주변을 혀로 꾹꾹 쑤셨다. 마치 더 많이 달라는 것 같았다. 쾌감에 덮혀 내게 느껴지는 감각은 거의 없었지만 내 몸만은 그에 응해 남은 액체를 마저 내보냈다.
제정신일 때라면 당연히 수치심을 느꼈을 일도, 오르가즘에 푹 빠진 당장은 그저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칼은 남은 액체까지 남김없이 마신 다음 이미 뒤에서 찔리느라 애액으로 정액이 전부 씻겨내려간 질 입구도, 통로가 꽉 다물려 흰 액체가 새어나올 기미 없는 항문 주름도 차례대로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너무 부끄러워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으나 점차로 절정기가 빠져나가는 몸은 나른히 늘어지긴 해도 잠이 들거나 정신을 잃을 기미는 없었다. 한참 내 몸을 빨던 그는 이제 침대를 정리하는 편이 좋겠다며 내 몸에 얇은 가운을 걸치게 하고, 바깥으로 데려가 오토만 쿠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실 안에서 적당히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음, 그렇지. 부인 몫의 식사는 아침용이 좋을까, 아니면 점심용이 좋겠소?"
그가 소매 커프스를 잠그며 담백하게 말했다. 그 얘기로 보아 이미 바깥 시간은 점심때쯤 된 것 같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도저히 뭘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침실 정리를 하러 온 듯한 하인과, 다른 용무가 있어 보이는 에이반이었다. 그는 응접실로 들어오는 대신 문 밖에서 칼에게 얘기를 하다가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
"이제는 유이나가 슬슬 깨어났을까 싶어서, 아아, 일어나 계셨군요."
에이반이 낮은 쿠션 테두리 너머 파묻힌 나를 보며 말했다.
"아침에 도무지 눈을 뜰 기미가 없으셨다고 해서, 저와 일리아나스 공 둘이서만 아침 식사를 했답니다. 손님이 왔다고 이른 아침부터 진수성찬이 나왔더군요. 유이나도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으응……."
"그나저나 피로해 보이십니다. 아침부터 너무 격렬한 것 아니었습니까?"
대꾸할 기운도 없다. 동부 남편이라고 해도 다른 남편의 부부 침실에 들어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에이반은 바깥에서 짤막하게 재촉했다.
"유이나,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메뉴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달걀 케이크도 있더군요."
"……."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만 흐트러진 가운 차림으로 참여한 식사 자리는 그럭저럭 분위기가 괜찮았다. 나른한 상태로 그저 몇 가지 좋아하는 음식만 조금씩 맛보았다. 확실히 나를 위해 차려진 음식인지 좋아하는 메뉴가 상당히 많았지만 전부 맛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적당히 배부르게 식사하고 널찍한 욕조에서 딱 좋은 온도의 물로 목욕을 즐기고 났더니 조금은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오후쯤에 잠깐 나를 찾았던 칼은, 깔끔해진 침대에서 누워 낮잠을 청하는 나를 보고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부인, 또 주무시려는 것이오?"
"응……."
"탓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평소에도 그렇게 잠이 많은 편인지?"
"……."
나는 귀찮아져서 대꾸하지 않았다. 4일간 종일 이동 뿐인 여행을 한데다가 그 다음 날은 아침부터 상당히 격렬한 섹스를 했다. 그것도 두 번 연이어서. 도저히 오늘 하루는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칼은 조금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부인, 팔 베게를 해 줄까?"
해 달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칼은 내 베게를 빼앗고 그 아래로 두꺼운 팔뚝을 끼워 넣는다. 솔직히 너무 귀찮았지만 포근하게 안아 오는 그 동작에 나도 모르게 안정감을 느꼈는지, 그 뒤로 천천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칼리오네스에 도착한 지 3일째부터였다. 가장 먼저 칼리오네스의 디베르타에 신상 등록을 했다. 여기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지만 관할 구역 2주 이상 거주시 해당 디베르타에 등록은 필수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등록 과정을 거치면서 디베르타를 조금 구경해 보았다. 레마슬레이그보다 사람이 눈에 띄게 적었고 부지 규모도 눈에 띄게 작았다. 건물의 층고는 높았지만, 정원까지 한 눈에 전부 들어오는 수준이다. 그나마 인구 수에 비하면 넓은 편이라고 한다. 이곳 디베르타에는 신인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이 곳에 머무를 자격을 따기 위해서는 칼리온 남편을 먼저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 교육을 실시하지도 않았고,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취미나 에아의 시험과 관계된 것들 뿐이었다. 당연히 거주 구역의 규모도 상당히 작다.
칼리오네스의 디베르타에는 대욕탕 대신 야외 욕조가 존재했다. 각각의 커다란 욕조는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위쪽의 강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 와 일차 정수하여 한 쪽은 강처럼 그냥 흘려 보내고 다른 쪽은 로커스 크리스탈을 이용해 뜨겁게 데운 뒤 흘려보낸다. 야외지만 상류 쪽 구역은 지붕으로 막혀 있어 비가 오는 날에도 입욕이 가능했다. 확실히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실제로 이 욕조를 이용하기보다 소년종을 시켜 물을 떠서 개인 공간의 작은 욕조에서 입욕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긴 매번 씻으러 바깥까지 나와야 한다면 나 같아도 귀찮을 것이었다.
거주 인원도 적고 볼 것도 많지 않아서 디베르타 내부를 한 번 훑어본 뒤 곧 귀가했다. 아직은 많이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저택에는 결혼식 예복의 마지막 체크를 위해 재봉사가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예복은 각 두 벌씩으로 본식 때와 피로연 접대 때의 의상으로 나뉘어졌다. 피로연 접대 때는 본식에 참여하지 못한 많은 인원이 방문하는데 결혼한 남성의 경우 원한다면 파트너 여성을 데려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칼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내 뜻대로 해도 좋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부가 주인공이라지만 파트너가 이미 있는 남자의 시선까지 굳이 독점하는 건 내키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정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신부였기 때문에 초대장을 돌릴 때 손님이 나와 옷이 겹치지 않도록 '신부가 입을 의상의 포인트나 색상은 이것입니다', 하고 덧붙여 써 줄 수 있었다. 남녀의 의복은 확실히 달랐지만 같은 성별끼리는 옷이 겹치면 서로 비슷해 보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엄밀히 말해 드레스 코드라기보다는 입지 않아야 할 스타일의 요구에 가까웠다. 실제로 해당 코드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입구부터 입장이 불가능했다.
나는 신부 의복 색상을 분홍색과 흰색으로 결정했다. 칼의 신랑 의복은 같은 분홍색과 베이지톤이었고. 칼이 공수해 온 분홍빛 비단은 생각보다 색감이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핑크 새틴에 붉은 장미꽃 장식, 그리고 하얀 색 레이스 옷감 배합을 하여 누가 봐도 신랑과 신부처럼 보이도록 구상했다.
뜻밖에도 이 색상은 칼에게도 무척 잘 어울렸다. 안 그래도 밝은 금발에 호수 같은 벽안을 지니고 있어서 파스텔 핑크 예복을 차려입으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단지 입고 싶어서 고른 색이긴 한데 핑크색의 채도가 높지 않아 내게도 꽤 잘 어울려 무척 만족스러웠다.
결혼식 며칠 전, 나는 드디어 완성된 결혼 반지를 받아 손에 끼워 볼 수 있었다. 금테 사이의 알 굵은 연홍빛 보석이 굉장히 비싼 보석임을 자랑하듯 화려하게 반짝였다. 최고의 원석을 이름 있는 세공사가 깎아 만들어낸 브릴리언트 컷의 붉은 다이아몬드였다. 남편의 반지에도 쌍둥이처럼 똑같은 보석이 박혀 있다.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다.
미리 저택의 쉐프가 만들어 시연했던 결혼식 음식도 그렇고 붉은 장미와 분홍 장미로 꾸민 결혼식 장식도, 하나같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게 정말 나의 결혼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혼식 본식 당일, 나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다음 날은 결혼식이고, 전날 미리 동침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너무 체력을 써 버리면 내일의 일정이 걱정되기 때문에 내가 리드해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고 했다. 처음에는 좋았다. 한 차례 제대로 절정을 맞이하고 이만 잠들려는 타이밍에 갑자기 칼이 내 몸 위로 자세를 바꾸어 올라왔다.
'내일이 결혼식이니 그만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고작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했으면서 그렇게나 욕구가 쌓였는지 그는 뜨거운 흥분을 호소하며 앞뒤 양쪽 구멍을 번갈아 세 번에 걸쳐 범했다. 결국 한밤중에야 간신히 끝이 났고,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해서 다섯 시간도 못 잤다.
더 잘 수도 깨어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목욕을 했고 시종의 도움을 받아 옷을 걸쳤다. 머리에는 아스벨이 선물한 화려한 모자에 긴 레이스 리본과 꽃 장식을 더했고 검은 머리칼은 같은 리본을 엮어 부드럽게 땋아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상의는 핑크 새틴에 레이스 옷감이 더해진 짤막하고 노출 있는 뷔스티에였다. 허리에는 사슬 장식이 달렸고 치마는 네 겹으로 길고 주름지게 만들어 불투명한 겉감에만 긴 슬릿을 텄다. 발에는 작은 실크 장미가 자잘하게 달린 굽 있는 샌들을 신었으며 다른 액세서리는 레이스로 된 목 장식과 팔찌, 에이반과의 약혼 반지와 칼과 맞춘 결혼 반지로 끝이었다. 약혼자나 다른 남편이 누구인지도 알릴 의무가 있었기에 다른 반지가 있다면 꼭 착용해야 했다.
장식이 조금 무겁고 의복이 상체를 살짝 죄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불편했으면 불편했지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꼭 입어 보고 싶었던 의상이었다.
칼은 나와 비슷하게 준비를 끝마친 뒤 점잖은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지만 별 수 없이 칼의 장갑 낀 손을 마주 잡은 채 별관의 홀로 입장했다.
홀 내부는 이미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악기 연주를 하는 악단과 초상 화가도 여러 명 초청되어 있다. 하객으로는 칼리온의 고위 계급 남성, 그것도 대부분은 신랑 후보나 신랑 후보의 친족들만 초대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본식은 원칙상 칼리온 사람들만 초대하기로 했기 때문에 에이반은 자리에 없었고 그 역시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다. 몇 명에게만 예외를 두자니 그 예외 때문에 같이 초대해야 할 인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의 모든 남자들은 내게 아주 낯선 인물이었다. 나는 일시에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려드는 것을 알았지만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아, 저 흑발 여성분이 일리아나스 님의 신부……."
"디베르타에서 나온 정보에 따르면 적어도 기존 칼리온 소속은 아니라고 했지요.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요."
"흠, 어딘가 다른 나라의 공주일까요."
"인물의 배경을 명확히 알아야 이후 혹시라도 정략혼 제의를 할 때 유리할 텐데……."
기실 그들 모두가 눈독들이고 있었다. 나 자체보다는 '일리아나스의 신부'를 말이다.
관례상 칼은 내 손을 잡고 홀의 가운데에 서서 나와 그의 짤막한 소개를 했다. 칼에 대한 거야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말 그대로 예의상이었다. 나에 대해서는 이름과 연차, 출신지, 마지막으로 현재 약혼 관계인 아르트리어 대령의 존재를 알리는 것으로 끝냈다. 간단한 소개가 마무리되자 꽤나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들이 차례로 칼과 내게 접근해서 친근하게 대화를 건넸다.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대꾸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칼의 손을 꼭 잡고 옆구리에 찰싹 붙어 서 있었다. 칼은 순서대로 단정히 차려입고 온 남자들을 맞이라며 그들이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 찬찬히 내게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눈을 내리뜨고 상당히 소극적으로 인사했다. 그럼에도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의 신부 유이나는 당일 참석했던 손님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모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선물로 할 의복 사이즈 같은 것을 상세하게 묻는 남자도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나중에 사적으로 꼭 한 번씩 만나 보고 싶어했다. 칼은 선택권을 오로지 부인에게 맡기겠다고 밝혔고 나는 당일 어떤 확답도 내리지 않았다.
이 자리는 칼과 나의 결혼식이고 그렇기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최소한 한 번은 인사와 대화를 나눌 의무가 있었다. 칼과 달리 나는 별로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몇 시간에 걸친 인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완전히 지쳐 버렸다. 슬슬 모두와 한 번씩 대화를 나누었고, 시간도 늦은 오후쯤 되어, 칼은 나 먼저 쉬라고 보낸 뒤 식의 마무리를 도맡았다. 사실 신랑도 굳이 끝까지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책임지고 결혼식 접대를 자청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오직 칼을 보고 방문한 탓도 있었다.
결혼식이 완전히 끝나고 바깥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칼이 답답한 상의 장식을 조금 푼 채 침실로 들어왔을 때 나는 아예 침대에 달라붙어 꼼짝도 못 하고 있었으며 하인 한 명이 내 종아리를 마사지해 풀어 주는 중이었다.
"부인, 뭐 좀 드셨소?"
"……."
대답은 내 다리를 주무르던 하인이 대신 했다.
"사모님께서는 한 시간 전에 과일 무스 케이크 한 조각과 과자를 조금 드셨답니다."
"슬슬 배가 고프지 않소? 자네는 요기할 만한 것을 좀 더 가져오게."
칼은 마사지를 하던 하인을 기어코 내쫓더니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사지를 해 줄까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아까 하인이 주무르던 종아리와 발목 뒤편을 잡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안마라기보다는 그냥 만져대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덕분에 솔솔 잠이 쏟아졌다. 칼은 잠깐 다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식사가 마련되자 억지로 나를 깨워 음식을 1인분 가까이 먹도록 했다. 칼과 같은 방을 쓰며 그다지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혼자 쉴 수 있는 내 방이 절실히 필요했다.
*
결혼식 다음 날 가장 먼저 내가 한 것은 이 저택의 부인 방을 꾸미는 일이었다.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내 새로운 방의 벽지를 전부 뜯어낸 뒤 깔끔하게 보라색으로 새로 발랐다. 방 안의 패널과 침대 가구는 질이 최고로 좋은 호두나무로 통일했으며 화장대와 옷장, 거울은 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실제로 100년이면 이 곳에서는 그렇게 옛날도 아니었다. 공주가 쓰던 것이라 확실히 고급스럽고 튼튼했다.
카페트는 벽지와 같은 보라색, 침대는 차분하게 톤을 낮춘 베이지와 붉은 색이었다. 그림 중에서는 풍경화와 정물화 하나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새로 그려 달기로 했는데, 구매하거나 주문하기보다는 직접 그린 그림을 걸고 싶어서 일단은 빈 캔버스에 액자만 맞추었다.
꽤 많은 장식 가구들을 남긴 덕분인지 방의 전체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고풍스러운 공주의 방 같았다. 전에 비해 새 물건들이 많이 늘어 깔끔해 보이기는 했다. 칼은 아예 싹 갈아 엎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본래의 방도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지금이 딱 좋았다. 그 대신 침대의 위치가 바뀔 예정이었고 큰 침대가 있던 자리가 비워지자 침실은 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방을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저택 내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먼저 칼의 저택에는 다른 곳과 달리 집사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 대신 하인의 계급이 세 가지 정도로 나뉘어 있었다. 심부름꾼, 숙련 하인, 몸종이나 시종, 마지막으로 관리장. 관리장은 보통 15년 이상 근속한 사용인 중에서 칼이 직접 지목한 인물로서 잡무보다는 다른 하인들의 지시를 도맡아 하며 전반적인 업무는 집사가 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 숫자가 하나가 아니었다. 이 저택에만 총 네 명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얼핏 낯설어 보이는 이와 같은 체계는 왕족의 전유물이었다. 왕족이 집사 역할을 하는 시종장을 두셋 이상 데리고 다니던 것을 변형한 체계라고. 나로서는 집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를 불러야 좋을 지 헷갈리기 때문에 영 마뜩찮았다.
'뭐, 그래도 이 집안은 잘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지만.'
조경도 훌륭하고 건물 관리도 살림 관리도 완벽하게 되고 있었다. 나쁜 규칙은 아닌 것 같다.
결혼식 본식이 끝났다고 해서 마냥 마음 놓고 쉴 수는 없었다. 훨씬 더 많은 손님이 참여하는 결혼식 연회가 며칠 내로 잡혀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연회에서는 앉아서 식사할 수도 있고 따로 손님들과 일일히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외부 손님들도 여러 명 참여하는데 그 중에는 재상 카스칼 가문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벨도 이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본식 때와 달리 결혼 연회는 굳이 전날 남편과 동침하여 결합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연회에 내가 입을 옷은 핑크 새틴을 아낌없이 써서 만든 긴 페플럼 드레스였다. 드레스 자락이 아주 긴 대신에 가슴 쪽과 등이 꽤 헐렁하고 깊게 파여 있었는데 이 정도 노출은 오히려 단정한 축에 속했다. 장식으로는 흰색과 하늘색의 반투명한 오건디 리본을 사용했는데 사실 여기에 장식이 더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으나 다들 신부 치고는 옷이 너무 심플해 보인다고 하여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내 옷에 하늘색이 들어간 만큼 연회장의 장식에 아주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바로 하늘색 장미였다. 본래 없는 색상의 장미였지만 흰색 장미에 이틀 전 미리 하늘색 물을 먹여 만들어낸, 손이 꽤 많이 가는 장식이었다. 장미 줄기를 색소가 든 물에 꽂아 색을 입히는 방식은 내가 원래 살던 곳에서는 자주 보던 것이지만 여기서는 다들 신기해했다.
연회는 정오 시작이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기 수십 분 전부터 이미 9할의 인원이 모여든 것 같았다. 인원 수에 거의 맞추어 초대장을 보냈는데 파트너를 대동할 수 있어서인지 예상보다 더 많은 남녀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인파에 압도되어 같은 색의 연회용 예복 셔츠를 걸친 칼의 옷자락을 여며 쥐었다.
"부인, 손을 이리로."
칼은 내 손을 잡아 끌고 계단 위로 올라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에 참석해 주어 고맙다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람들을 향해 신부를 소개했다.
"아내인 유이나입니다. 1년차 조금 넘었으며 혼인한지는 5개월째 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나를 바라보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곧 하인들이 기다란 테이블에 음식을 날라 왔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칼을 따라 가장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끝 제일 상석에 의자가 나란히 두 개. 나와 칼의 것이었다.
그리고 내 대각선 쪽 옆자리에는 에이반이 이미 짙은 색 예복 차림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아르트리어 가의 주인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젊은 대령일 뿐, 원래였다면 아마 조금 더 먼 자리에 앉아야 했다. 신분에 맞지 않지만 신부의 가장 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당연하게도 신부의 다른 남편이나 약혼자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이나 나 다음으로 에이반에게 모여들어 말을 걸거나 질문을 했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워낙 넓어서인가, 분명 지정된 석은 가까운데 여기서 보니 까마득히 멀어 보였다.
에이반의 바로 옆자리에는 딱 한 번 봤던 총재 카스칼이 앉아 있었다. 당연히 그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하지만 아스벨은 같이 안 온 걸까. 하긴 일이 바쁘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낯익은 체취가 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분홍색의 타이를 착용한 아스벨이 내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서 나를 바라본다.
"잘 지냈어? 결혼식 준비 힘들지는 않았고?"
나는 뺨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난스레 꾸민 것은 오히려 아스벨 쪽이 더했다. 짧게 끌어안았던 내 몸을 놓은 아스벨이 이번에는 내 곁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칼은 무표정하게 아스벨을 마주보았다.
"부인, 그가 전에 말했던 카스칼 공자인가?"
"아, 응. 맞아."
"……반갑네. 잘 부탁하지."
의외로 칼은 순순히 악수를 청했다. 아스벨은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악수 중에도 그는 내 남편을 관찰하듯 뜯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놓았다. 칼은 나를 의자에 앉히고 먼저 물을 좀 마시라며 권했다.
몇몇 손님이 재상 카스칼에게 말을 걸었다.
"아드님께서 일리아나스 공의 부인과 만나는 관계셨습니까?"
"카스칼 공의 아드님께서는 청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재상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리아나스 공과 혼담 얘기가 오가기 전부터 만나던 사이였답니다. 우리 아들이지만 안목이 좋긴 하더군요. 누굴 닮았는지, 참."
"……."
분명 그는 처음에 나를 못마땅해하지 않았던가. 뭐 그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는 아마 어떤 여자가 왔어도 그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모든 손님에게 잔이 하나씩 주어지자 다 같이 결혼 연회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생각보다 술이 조금 도수가 있는 편이었는데 먼저 물을 마셔서 그런지 속이 쓰리지는 않았다. 나는 곧바로 나온 전채 요리에 손을 댔다.
"유이나 부인께서는 몇 살이시오?"
그 때 신랑 쪽 자리에서 꽤 가까이 앉은 한 남자가 그렇게 물었다. 저 정도 상석이면 꽤나 지위가 높은 남자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다. 대답은 칼이 대신 해 주었다.
"아내는 스물 한 살이고 이제 1년차 됩니다."
"흐흠, 꽤나 젊은 편이로군. 아니, 그런데 어쩌다 일리아나스 공과 만나게 되셨소?"
"아르트리어 경을 통해 소개받았습니다."
"나는 부인께 묻고 싶소만……."
"부인이 낯을 좀 가리는 편입니다."
칼은 꼬박꼬박 대신 대답하며 그렇게 선을 그었다. 한 편 다른 하객 중 몇 명은 칼에게 모여들어 부탁을 했다. 내게 다른 남자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얘기였다. 칼은 나를 한 차례 쳐다보고는 그들에게 밝혔다.
"남자를 소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부인의 의견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인이 결정할 사항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긴 대화를 나누기에 날이 적절치 않으니 추후 기회가 닿는다면."
칼의 단호한 대처 덕분인지 대부분의 인물은 차마 말도 못 붙이고 손가락만 빨았다. 한 편으로는 내게 접근하는 인물들의 양상도 다양했다. 칼의 옆자리에 딱 붙어 있는데도 본식 때와 달리 연회 때는 하도 하객이 많아서 그런지 적극적인 사람의 숫자도 무척이나 많은 편이었다.
남자들은 자기 아들을 소개시켜 주거나 자신이 직접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여자는 거의 자기가 이끄는, 혹은 참석 중인 친목회에 와 달라는 얘기들 뿐이었다. 나는 적당히 둘러 거절했다.
"저어……, 아직 적응하기에 바빠 당장 여러 가지 결정을 하자니 혼란스럽네요. 식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얘기하지요."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도 어려울 만큼 저돌적으로 제안해 오니 당연하게도 생각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신없던 것 치고 꽤 잘 대처한 것 같았다.
인원수의 제한 때문에 본식 때 초대한 인물은 중요 인물이라고 해도 피로연에는 초대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까지 전부 초대했으면 정원까지도 모자라 저택 부지가 미어터졌을지도 모른다.
연회 말미에는 차나 음료, 술과 디저트를 즐기며 특별한 형식 없이 다들 어울려 대화를 나누었다. 이 때 나와 칼은 에이반, 그리고 카스칼 부자와 함께 자리했다. 재상 카스칼이 칼에게도 에이반에게도 나에게도 한 차례씩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번갈아 인사를 건네자 아스벨은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술에 약한지 다른 하객들보다 더 취한 것 같았다.
"으음……, 유이나 양."
"아, 네?"
"아들을, 내 아들을……."
"아버지, 그만 하시라니까요."
아스벨은 헛기침을 하며 먼저 객실로 돌아가도 될지를 칼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취하지 않았다며 가볍게 저항하는 부친을 이끌고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퇴장하고 나자 에이반은 가볍게 웃었다.
"카스칼 공은 여전하시군요."
"에이반, 재상과 잘 아는 사이였어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시절에 가문끼리 자주 어울렸지요. 뭐, 저와 아스벨루스는 만나기만 하면 치고 받고 싸우긴 했습니다만. 그나저나 유이나, 슬슬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에이반이 넌지시 내게 퇴장 의사를 물어보았다. 나는 시계를 흘긋 쳐다보며 딱 7시까지만 있겠다고 대답했다. 연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그 때 한 나이든 남자와 젊은 남자가 파트너를 데리고 뒤늦게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거의 연회의 막바지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접근하여 칼에게 인사했다.
"일리아나스 공,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하게 됐군."
"괜찮습니다."
칼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이든 남자 쪽은 말투나 지위로 보아 꽤나 높은 사람 같은데도 칼 앞에서 굽신거리며 미안해했다. 그냥 늦은 것 치고는 너무 과한 사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대로 그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나이든 남자가 재촉하자 별 수 없이 몇 마디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보다는 그 둘의 파트너로 참석한 여자 쪽에 더욱 눈길이 갔다. 사실 이곳에 참석한 여자들은 전부 내가 지정한 색인 핑크와 화이트가 절대 묻히거나 죽지 않도록 통일이라도 한 듯 꽤나 칙칙한 색으로 꾸미고 왔다. 이렇게까지 신부 대접을 해 주지 않아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색이야 그렇다 쳐도 상당히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온 것이었다.
옷만 눈에 띌 뿐 아니라 그 미모도 상당했다.
'와……. 무슨 연예인이나 영화배우 같네.'
적당히 혈색이 돌면서 균일한 피부톤에 따로 눈화장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눈매가 무척 선명했다. 이목구비의 곡선은 가늘고 부드러우면서도 자기 주장이 확실했고 눈에 잘 띄는 창백한 긴 금발머리는 색이 연한데도 비단처럼 탄력있고 결이 좋아 보였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까지, 현대 지구에서 태어났더라면 유명 모델이나 배우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갓 도착한 그 셋의 짧은 축언까지 듣고 나서 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도착하셨겠지만 이 쪽은 부인이 많이 피곤해하여 그만 퇴장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렇군. 신경 쓰지 말고 쉬시게. 다시 한 번 너무 늦어 미안하네."
그래도 이제 막 왔는데 주최자로서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칼은 7시가 채 되기 전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리둥절했으나, 그들과 남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가 싶어 적당히 눈치 있게 일어났다.
다음 날, 결혼 선물로 들어온 꽃을 확인하고 입었던 결혼 예복과 장식을 차곡차곡 보관해 넣는 동안 그 일에 대한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칼과 그 나이든 남자, 그러니까 존경받는 칼리온 원로 이제스틱과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문제는 그 아들 부부였다. 특히 아들의 약혼녀이자 예비 며느리인 카레나라는 여자는 보기와 달리 상당한 안하무인으로, 칼과 무척 적대적인 관계라고 한다. 사실 그 관계는 약간 일방적이었다. 하인의 말을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칼은 그녀에게 일말의 흥미도 없었지만 그녀가 칼을 대놓고 유혹한 적도 많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복수를 위해 몇 차례인가 그를 함정에 빠뜨려 망신주려고 한 적도 꽤 많다고. 비록 그런 수작이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다지만 그녀가 오자마자 바로 칼이 자리를 뜰 만도 했다.
다만 워낙 외모가 예쁘다 보니 그녀의 편이 칼리온에 상당히 많았고, 특히 차기 가주인 원로의 아들이 그녀에게 아주 푹 빠져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준다고 한다. 그 두 사람과 칼은 완전히 원수지간이었다. 하지만 원로 가문이다 보니 차마 그 쪽 집안에 초대장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늦은 것은 카레나 때문이었다. 카레나가 아예 칼과 그의 부인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색을 꼭 맞춘 핑크와 화이트 톤의 화사한 드레스로 차려입고 입장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입구에서 초대장을 내미는 순간 지적당해 발도 들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좀 덜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지만 여전히 남의 결혼식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걸 입었길래?'
간신히 세 번째로 바꿔 입어 통과했던 복장이 그렇게 현란했으니, 처음의 두 복장도 대략 짐작이 갔다.
하인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남편 지위가 워낙에 높았으므로 어지간한 결혼식에는 복장 규정을 어기더라도 당당하게 참석이 가능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칼리온뿐 아니라 레바단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웅 일리나아스 미켄바르프의 공식 결혼 연회였다. 이 쪽이 양보해야 할 입장은 아니었다.
하인의 말에 다르면 칼은 평상시 집행기사로 일할 때 워낙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엄하게 군 탓인지 일상에서는 범죄 수준의 잘못이 아니라면 유연하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남의 결혼식을 아예 망치려고 복장 코드까지 완전히 어긴 채 찾아오다니. 그녀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던 나조차도 불쾌하게 느꼈을 정도의 무례한 행동이었다.
'뭐, 이곳 칼리온에 쭉 머무를 것도 아니고, 그 여자를 두 번 볼 일은 아마 없겠지만.'
나는 하인이 이고 지고 들어오는 수많은 꽃더미들을 질리도록 구경했다. 선물로 들어온 꽃이니 한 번쯤은 봐 줘야 했다. 원래는 결혼 선물로 다양한 물건들이 왔어야 했으나 칼은 자신의 직위상 너무 과한 선물의 경우 받는 것이 곤란하다고 밝혔다. 선물의 가격을 하나하나 짐작하는 것도 어떤 의미로 중노동이었고 선물이 아쉬운 입장도 아니었으므로 아예 초대장에 결혼 선물은 필요 없으며 굳이 축하의 의미를 전하려면 오직 축하용의 생화로만 받겠다고 써 놓았다. 그래도 선물 상자를 들고 온 사람들이 있어 전부 거절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들어 버리는 게 안타까울 만큼 화려하고 예쁜 꽃들이 군데군데 많이 보였다. 고작 며칠밖에 안 간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호화로운 꽃들을 골라서 침실에 장식에 달라고 부탁했다. 하인 몇 명이 꽃을 골라내어 다듬는 와중에 칼이 내 방문을 노크했다.
"부인, 잠깐 들어가도 되겠소?"
"응."
칼은 팔에 또 한아름 붉고 분홍빛을 띤 장미를 안고 있었다. 아까 전에 바깥에 놓아 둔 꽃다발에서 꺼내온 것 같다. 장미는 흔한 편이라서 굳이 방으로 가져오지 않았었다.
"그……, 부인."
"여기 있는 꽃 몇 송이만 골라서 방에 장식하려는데 그래도 되지?"
"선물로 들어온 꽃이니 뜻대로 해도 좋소. 그보다 부인."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꽃이 많이 들어와서 그런데, 혹시 장미 목욕은 좋아하는 편이오?"
"장미 목욕? 꽃잎을 띄운 거라면 몇 번 해 본 적 있는데."
"아니. 끓인 장미수를 사용한다고 하는군. 나도 듣기만 해 봤지만……."
칼이 손에 든 장미 다발을 내려놓으며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부인과 이번에 같이 입욕하면 어떨까 싶어서."
"응? 같이? 나 목욕은 남자랑 같이 안 하는데."
조금 냉정하게 대꾸했다. 칼은 내가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에 아주 좋다느니 장미 향이 밴다느니, 장미욕의 효능에 대해 덧붙여 얘기했다. 그렇게까지 나와 같이 목욕하고 싶은가 하는 생각에 살짝 웃음을 참았다. 어차피 신혼 한 때니까 예외 정도는 괜찮을지도.
"그렇게나 좋은 거라면 뭐, 이번만큼은 같이 하자. 언제쯤 준비가 될까?"
"오늘 저녁이면 될 것 같소. 그래서 말인데, 어떤 색의 장미를 좋아하시오? 역시 분홍색일까?"
내가 결혼 반지의 보석도 결혼 예복도 분홍을 택했기 때문에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실제로도 결혼식에 아주 어울리는 색이라고 여기고 있고 결코 싫어하는 색은 아니지만, 장미 목욕에 쓰이는 장미는 단연 붉은 색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장미수가 준비되었다는 하인의 말에 나는 머리카락을 단단히 틀어올려 젖지 않게 감싸고 한 겹짜리 가운으로 갈아입은 다음 욕실로 향했다.
3층에는 욕실 두 군데가 있었는데 좀 더 욕조가 넓은 곳이 칼의 방과 가까운 쪽이었다. 반대로 욕조는 좁지만 공간 자체는 더 넓은 곳이 내 방과 붙어 있었다. 부인 쪽이 자연히 더 자주 목욕하게 되니 그런 것 같았다. 남편 이외의 남자와도 동침하기 전에 입욕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인은 욕조가 넓은 쪽으로 안내했다. 욕조 근처에만 가도 장미 향이 확 퍼져나왔다.
흰 도자기 욕조 속의 물은 완연히 연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장미수라는 것은 장미를 끓여서 우려낸 에센스 같았다. 쪼글쪼글해지고 색이 옅어진 장미가 망사 주머니에 가득 들어있었다.
'생화를 물에 띄우는 게 아니었구나.'
생화 장식도 욕조 주변에 마련되어 있긴 했다. 그래서 욕실 안은 정말로 장미향밖에 나지 않았다. 칼은 하인을 물리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나 역시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향이 좋군, 그렇지 않소, 부인?"
칼이 괜한 소리를 했다. 뽀얀 수증기 위로 그의 표정이 약간 상기된 것이 보였다. 그는 가운을 벗자 가볍게 출렁이는 내 젖가슴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내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 다리를 모으고 앉자, 비로소 작은 한숨을 내쉰다.
물이 평소 입욕하던 온도보다 약간 뜨거웠다. 뜨거운 편이 효과가 더 좋겠지, 하는 생각에 적응해 보기로 했다. 물을 조금 떠서 어깨 위에 한 차례 부었다. 붉은 장미수가 방울지며 살결 위로 흘러내렸다.
진한 분홍빛 유두 끝에 맺힌 붉은 물방울을 남편이 직접 고개를 숙여 빨아먹었다. 나는 가볍게 허리를 틀었다.
"앗, 아직 씻고 있는 중이잖아."
"으음, 내가 씻겨 줘도 되겠소?"
입으로 씻겨 주겠다는 뜻일까. 그건 싫었다. 장미 목욕을 좀 즐기고 싶은데 칼은 애초부터 목적이 그것이었다는 듯 계속해서 내 몸을 지분거렸다. 내 몸을 격렬하게 끌어안고, 장미수에 젖은 양쪽 가슴을 세게 빨았다. 참지 못하고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 안 돼, 안 된다니까. 일단 좀 씻고 나서……. 너무 빨아서 여기가 벌써 빨개졌잖아?"
칼의 얼굴을 살짝 흘겨보고서 나는 자세를 바꾸어 어깨까지 완전히 욕조 물에 잠기게 했다. 방어적으로 등을 반쯤 돌리고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는 내 반응에 조금 충격받은 듯 했다. 눈을 가만히 내리깐 채 사과했다.
"미안하오, 부인. 내가 너무 과했군."
"아니……. 그렇게 아프지 않았으니까 괜찮은데. 적어도 조금만 씻고 나서 하자. 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빨아대면……."
칼은 자책하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부인의 나신을 접하고 있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 부인의 몸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자극적이라 자신을 계속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금방 자제심이 무너져 버리는군."
내 가슴이나 맨몸이 엄청 야하게 생겼다는 얘기는 가끔 듣는다. 그 와중에도 남편의 표현은 어딘가 절제되어 있었다. 마냥 성적인 표현에만 치중해 있지 않고 조금 모호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뜻밖이었다. 다른 애인도 아닌 칼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요즘 그는 처음과 달리 꽤나 섹스에 적극적이 된 것 같았다.
"칼은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네."
"그것은……. 물론 부인이 그리 여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는 내 판단에 약간 불만을 가진 듯 했다. 나는 적당히 몸이 젖은 것 같자 물에서 나와 부드러운 옷감을 덧댄 스펀지에 샤워젤을 얹어 거품을 냈다. 어깨와 팔, 가슴부터 시작해 양 발 끝까지 문질러 닦은 뒤 물로 씻어내기 위해 바가지를 찾았다. 그 모습을 남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앗!"
어느새 욕조 밖으로 나온 남편이 내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거품에 젖은 내 몸을 마음껏 탐했다. 미끄러운 손이 가슴을 뿌듯하게 쥐어 주무르고 아랫배와 허벅지도 연달아 애무하듯 비볐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 아앗!"
"내가……, 내가 씻겨 주겠다고 말했네, 부인……."
"괘, 괜찮다니까. 평소 소년종에게도 씻겨 주는 일은 맡기지 않는데……. 으응, 손 말고 여기 스펀지……."
등 뒤에 남편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일어선 것이 느껴졌다. 몇 가지 음란한 형태의 돌기들이 내 등에 닿고 있었다.
남편의 손이 절반, 내게서 빼앗은 스펀지가 절반 정도의 비율로 몸에 문질러졌다. 하는 수 없이 좋을 대로 하라며 몸을 내맡겼다. 그는 내 알몸을 앞에 두고 명백히 달아올라 있었지만 적어도 일선을 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자기 아내의 팔다리를 문질러 닦아 주었다.
몸의 비누거품을 완전히 씻어낸 다음에는 얼굴이었다. 그는 스펀지와 손으로 내 뺨과 이마, 콧잔등을 신중하게 닦아냈다. 나는 타인의 손에 의해 묻혀지는 비누거품 때문에 중간부터는 그냥 눈을 감았다. 문득 남편의 손이 멈춘 듯 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비누거품이 덜 묻은 입술을 기습적으로 꿀떡 삼켰다.
키스 도중 거품이 그의 얼굴로 잔뜩 옮겨붙어 버렸다. 칼 역시 그것을 느끼고는 자기 얼굴의 거품을 닦아내려고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보다 먼저 장미수에 젖은 손으로 그의 뺨을 닦아내 주었다.
둘 다 몸에 장미향이 밴 채로 그 뒤 침대에서 한껏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뜨거운 장미수에 녹진녹진 늘어진 몸은 유연하게 그의 행위를 받아들였다. 칼은 절정으로 잘게 떨리는 내 전신을 팔다리로 강하게 옭아맸다.
그 날은 지쳤지만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확실히 장미수 목욕의 효능이 괜찮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밤이었다.
결혼식은 모두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그 뒤로도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결혼식을 위해 참석한 손님 중 일부는 저택 객실에 묵고 있었는데, 기왕 여기까지 초대받은 김에 새 신부를 한 번이라도 만나고 가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의 맞선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갓 결혼을 마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신부가 귀찮아하지 않도록 눈치 빠르게 그냥 떠나 줄 인물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칼은 내가 원치 않으면 만남을 자유롭게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칼 본인도 대외적인 손님 접대에는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다가 과거 에이반 때도 그렇듯이 남자들에게 최소한 얼굴을 보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자기 어필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여자가 그 남자를 만나기 싫을 명백한 이유가 있다면야 가차없이 거부해도 무방할 텐데, 그게 아닌 이상 아무래도 과도한 거부는 주변에 이상하게 보여지겠지. 적어도 몇 명은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들어 봐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명단이 많아서야 만날 사람과 만나지 않을 사람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르겠네. 전부 만날 수도 없고, 몇 명만 골라서 만난다고 해도 그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골치 아파.'
결혼식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마다 나에게는 최소 열 통 이상씩의 서신이 전달되었다. 지금까지 쌓인 것을 전부 합하면 백 통은 거뜬히 넘을 것이다. 전부 나와 만남을 가지고 싶다는 편지였다. 같은 여자가 친분을 쌓기 위해 보낸 편지도 있고, 자기 아들을 선보여 주고 싶다는 편지도 있고, 청혼 편지는 물론이고 단순히 직접 만나고 싶자는 편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칼과 에이반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별 수 없이 그냥 아무나 골라서 몇 명만 만나 주거나 한 번에 두세 명을 만나는 게 어떻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둘 다 썩 내키지 않는 방법이다.
한 편으로는 종일 손님 접대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다. 당분간 나는 왕족 부인으로서 기본적인 교육을 성심성의껏 받아야 했다. 엘리시온에서 여성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도 그렇다고 육아나 가사를 맡지도 않으므로 실제로 내가 가지는 의무는 부계 혈통을 훌륭하게 물려받은 알을 품고 낳아 주는 일과 결혼 동맹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 품위를 지키는 일, 최소한의 대외활동을 하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 내에서 남편들을 유연하게 중재하는 일 뿐이었다. 그 점을 위해서 왕족이나 고위 계급의 부인들은 전문 교육인에게 사적으로 특정한 지식과 마법을 교육받았다.
그래서 내 낮 시간의 대부분은 대대로 왕족 부인의 교육 담당을 맡았다는 나이 든 개인교사와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위 계급이라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듣자하니 거의 오늘내일하는 노인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교사직은 나이가 많더라도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배우는 데 큰 문제는 없다지만, 상대에게서 그저 느릿한 말투로 지식만 전수받을 뿐이라 정말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남편들의 정치 철학이 조금씩 다를 경우에는 이렇게 중재하고, 혼침을 선호하지 않는 두 명의 남편이 같은 날에 부부교섭을 원할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누구를 우선으로 해야 하고, 다른 동맹 파벌의 남자들은 통상적으로 이렇게 대해야 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배운 것들이 모두 정답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상황이 이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센스와 세심한 판단이 우선시되었다.
이론 수업 다음에는 마법 수업이라 조금 기대했는데, 안타깝게도 처음 몇 번의 테스트 이후에는 마법 역시 이론 수업과 똑같이 변해버렸다. 마력을 용이하게 다루는 요령이라던가 기본적으로 고위 계급의 부인이 익혀야 할 마법 같은 것들을 단지 글자로만 배우다 보니 머릿속에 제대로 박혀드는 것 같지도 않고 뭔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진도는 빠른 편이 아니었는데 워낙 오랜 시간을 앉아서 수업만 듣다 보니 오히려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에는 대부분 혼자 평온하게 휴식을 취했지만 오늘만큼은 남편과 약혼자들과 함께 오찬을 했다. 아스벨과 아스벨의 아버지인 재상 카스칼이 레마슬레이그로의 귀가 전에 한 번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아스벨과 에이반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라 약간 조마조마했지만 오찬이라는 것은 공식적인 성향이 강한 자리인데다가 칼과 재상까지 한 자리에 참석했으므로 그냥 둘은 서로를 본 체만체했다.
재상 카스칼은 조만간 나와 아스벨과의 약혼 행사를 치르면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어 보았다. 내가 에이반과 치렀던 약혼이 그저 반지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오롯이 둘만의 것이었다면, 그는 아들의 약혼식을 결혼식 못지 않게 화려한 초대회 형태로 치러 주고 싶어했다.
"물론, 유이나 양의 사정만 괜찮다면 말입니다."
"저는 물론 괜찮아요."
나는 조만간 또 한 번 결혼식 못지 않은 고된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스벨의 표정이 더욱 두 눈에 박혔으므로 멍하니 대답했다. 아스벨은 내 손을 꼭 붙잡고 약속했다.
"이나, 내가 꼭 기억에 남는 약혼 파티로 만들어 줄게."
"글쎄, 너무 요란한 행사는 그녀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안 그래도 유이나는 요즘 일리아나스 공과의 결혼식으로 꽤나 심력이 많이 소모되어 있어."
비아냥거리는 에이반의 말에 아스벨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재상 카스칼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아, 물론이네, 에이반 군. 최대한 유이나 양이 피곤하지 않도록 일정을 고려해야겠지. 그런데 유이나 양은 활기가 도는 행사보다는 우아한 행사를 더 선호하는 편인가?"
"둘 다 싫어하지 않아요."
나는 그냥 적당히 예의바르다고 생각될 만한 대답을 했다. 무엇보다 행사 자체에 참여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둘의 차이를 잘 몰랐으니까. 하지만 에이반은 당연히 내가 우아한 쪽을 선호한다고 생각했고, 아스벨은 반대로 활동적인 경험을 더 즐긴다고 여겼다.
카스칼 공은 의외로 친아들 두 명이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대하듯 가볍게 웃으며 둘의 언쟁을 관망했다. 실제로 둘이 한 자리에 있으니 형제 같아서 무척 좋다고도 말했다. 처음과 달리 카스칼 공의 나에 대한 평가가 바뀐 이면에는 아무래도 내가 에이반의 약혼녀라는 부분이 한몫 한 것 같다. 그는 둘이 신부를 공유하며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보기에 둘의 싸움은 결코 티격태격 수준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에이반이 잔뜩 날을 세우는 이유도, 아스벨의 입이 점차 험해지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최근 바빠서 둘과 잠자리를 거의 못 했다. 아마 에스트라가 꽤 쌓여 있을 것이다.
"저기……."
먼저 재상 카스칼과 아스벨이 레마슬레이그로 돌아가기 전 아스벨의 에스트라를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껏 결혼 준비다 뭐다 몇 주나 만나지 못한데다가 또 한 달이상 보지 못할 테니 그를 위해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야만 했다.
"아스는 언제쯤 레마슬레이그로 돌아가는 거야? 그 전에 한 번 둘이서 만나고 싶은데."
"정말?"
내 제안에 아스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대로 에이반은 뚱하니 팔짱을 낀 채 싸늘한 태도로 아스벨을 노려보았다. 아스벨이 은근슬쩍 옆자리에 앉은 내 손등을 감싸쥐며 넌지시 속삭였다.
"다음 주 녹티라의 날까지 휴가니까 그 전에는 아무 때나 괜찮아. 그런데 정말 한 번밖에 시간이 안 될까? 나는 더 가능할 것 같은데?"
은근하게 두 번 이상의 만남을 종용하는 그의 행동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두 번은 무리일 것 같다. 다음 주까지 휴가라면 적어도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는 여기를 출발해야 할 테고, 그러면 정말 여유 시간이 없었다. 에이반이 그 모습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아냥댔지만 아스벨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음……, 그럼 오늘 수업을 좀 일찍 마쳐 달라고 할 테니 저녁 전에 보자."
"널 위해서라면 얼마든 기다릴 수 있어."
그가 녹을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손등에 키스했다. 손등에 맞닿았던 입술이 점차 은밀하게 타고 올라와서 손목과 팔뚝까지 삼키는 바람에 아스벨의 이마를 꾹 밀어내며 웃었다.
에이반은 대놓고 아스벨에게 핀잔했으나 칼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 말 없이 식사를 끝마쳤으므로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꽤나 대단한 오산이었음을 얼마 되지 않아 알 수밖에 없었다.
*
그간 못 해준 것이 어지간히 쌓였는지, 아스벨은 결혼식 참석 때나 낮의 오찬 때 유지하던 점잖은 모습은 간 곳 없이 나를 보자마자 과격하게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장소는 따로 하인들이 준비해 놓은 저택 별관 1층의 한 객실이었으나 나는 윗층에서 겨우 수업을 마무리하고 방금 들어온 참이라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아, 아직 준비가……. 아, 앗……!"
아스벨은 이미 허리에 걸친 수건 한 겹만 벗으면 완전한 알몸인 상태였다. 미리 씻고 향수로 무장까지 한 듯 하다. 반면 나는 종일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돌아온 탓에 아마 조금 더러울 텐데 아스벨은 전혀 개의치 않고 페니스를 세우며 달라붙었다.
"안 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가 달려드는 통에 서 있을 수 없어 비틀거리며 침대까지 기어가다시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다리 사이를 빨고 있는 동안 나는 손으로 꼿꼿하게 선 아스벨의 성기를 위아래로 잡고 쓰다듬어 주었다. 맞부딪혀오는 입술 애무로 연전 자극적인 쾌감이 느껴지는 통에 그의 페니스를 쥐어 주면서도 전신을 움찔댔다.
조금 손으로 만져 줬을 뿐인데 아스벨은 금세 내 손에 한 차례 사정했다. 나는 부분부분 뜨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어 끈적한 흰 점액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액이 닿은 곳마다 선명한 열감으로 화끈거렸다. 아스벨은 내 손에 묻은 흰 액체를 훑어낸 뒤 내 다리 사이에 자리잡고 분홍색 균열에 그것을 꼼꼼하게 발랐다. 정액 묻은 손가락이 간혹 질구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얕은 삽입감에 몸이 떨렸다.
보통 잘 쓰지는 않는 방법이지만 남자의 정액은 상대가 여성일 경우에 한해 마력감응제와 유사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윤활제 겸 흥분제로서는 아주 최적이라는 것이다. 에이반이 훈련할 때 굳이 앞쪽에는 마력감응제를 바르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정액은 에스트라로 이루어져 있고 정제된 마력감응제는 인트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의 차이일 뿐이다. 자신의 페니스에도 정액을 한 차례 펴바른 아스벨이 내 그곳에 문지르던 손가락을 입에 넣고 핥았다.
"이대로? 아니면 자세를 바꿔?"
손바닥까지 빠짐없이 핥던 아스벨이 내 몸을 빨아대는 소리 말고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이 방에 내가 들어온 뒤부터 쭉 입에 내 신체 일부를 머금고 있느라 제대로 말도 뱉지 못하던 상태였다. 나는 단기간에 붉게 단 몸을 여전히 조금씩 움찔대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쿠션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 엎드려 엉덩이를 쭉 치켜세웠다. 완벽한 후배위 자세에 아스벨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길고 단단한 페니스를 내 뒤에 곧장 쑤셔박았다.
"하으으응!!"
배꼽 위까지 단숨에 관통되는 느낌이다. 시야가 일시에 흐려지며 진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스벨은 깊게 박은 물건을 입구 직전까지 뽑아내다가 다시 뿌리까지 그대로 박아버렸다.
"흐아아아……!"
쾌감에 취해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읏……, 이나……, 또 한 번 쌀 것 같아……."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훌쩍이던 아스벨이 허리를 짧게 움직이다가, 깊이가 영 모자랐는지 내 한쪽 허벅지를 쥐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삽입각이 훨씬 넓어지며 안 그래도 기다란 그의 페니스가 더 깊이까지 들어와 버렸다. 불안정한 자세지만 그는 내 한쪽 다리를 놓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앗, 아앗, 흑……."
뒤에서 그가 힘껏 허리를 들이밀면 내 몸도 덩달아 으깨지듯 위로 조금 밀려나고, 그가 페니스를 빼낼 때면 동시에 내 허리도 같이 잡아당겨지는 통에 또 한 번 가벼운 충격이 몸 속을 울렸다. 너무,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 나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흑, 기, 기분, 좋아, 흐윽."
신음조차 뚝뚝 끊어져서 언어가 아니라 콧소리에 가깝게 터져나왔다. 뒤에서 거칠게 박아대는 그의 근육질 몸에 압도되어 저항할 의지조차 없이 그가 주는 욕망을 온전히 받아내었다.
"좋아? 이나, 갈 것 같아?"
아스벨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내게 위협적으로 속삭인다. 이번에는 나와 동시에 느끼고 싶어서 속도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내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자유로워진 손으로 내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자 순식간에 절정치의 쾌감을 돌파해 버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래를 오물오물 경련하며 그의 페니스를 마구 씹어 물었더니 아스벨은 기쁘게 다량의 정액을 사정했다.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사정량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쾌감에 흐느끼며 그가 페니스를 뽑아 줄 때까지 기다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당한 양이다. 평소 주기적으로 만날 때 받는 에스트라의 양은 아스벨이나 에이반이나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한 주라도 거르면 그 차이가 눈에 확 띄었다. 에이반은 자위조차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트라의 배출량이 큰 차이가 없는데 아스벨은 그 사이의 에스트라가 고스란히 몸에 쌓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런 개인적 체질이 둘의 성격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한 번 아스벨을 특히 더 신경 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얕게 신음하면서 돌아누웠다. 아스벨이 내 아랫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빼냈다.
미리 하인들이 방에 구비해 놓았던 젖은 수건 한 장을 꺼내 그가 내 아래를 천천히 닦아 주었다. 닦는데도 끊임없이 정액이 틈새로 새어나온다. 그보다 자기 몸부터 먼저 닦으면 좋겠는데, 나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침대에 늘어져 버렸다.
"너무 급하게 해서 그런지 벌써 조금 부었네. 괜찮아?"
퍽퍽 소리가 나게 박아댔으니 부을 만도 하다. 밤새 느긋하게 당하는 것과 단기간에 격렬하게 당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숨 좀 돌리고 나서 이번에는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기분 좋게 꼭 안아 줄게."
"으응……."
몸이 나른해서 정말로 안아 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아스벨은 한 번으로 모자랐는지 또 한 차례 하겠다는 예고를 했다. 엄청 오랜만이니까 부족하긴 하겠지. 처음 두어 번으로 에스트라를 어느 정도 빼냈다면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남자로서의 음란한 욕망을 내세워 아스벨은 밤이 늦도록 나를 안았다. 이제는 잠을 자지 않으면 나나 아스벨 둘 다 내일 일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 되어서야 간신히 열락의 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
그대로 정신을 놓고 잠들고 싶었지만, 후희의 쾌감으로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행위가 잦아들자마자 하인이 성급히 문을 노크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비틀대며 일어서서 가운을 챙겨 입었다. 아스벨도 마찬가지였다.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은 서둘러 들어와서 뒷정리를 돕겠다고 말하며 나와 아스벨을 떼어 놓고 나를 본관의 침실까지 기어코 데려갔다. 내가 됐다고 하는데도, 뻔히 부인의 침소가 있는데 객실에서 재울 수 없다며 하인들은 심지어 간청씩이나 했다.
"입욕 준비를 해 드릴까요?"
"아니, 그냥 잘래. 나가 줘."
"저녁 식사를 거르셨던데 상을 차려 올릴까요? 아니면 간단히 몇 가지만 가져 올까요?"
"하으음……."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가리며 가볍게 하품했다. 그리고 귀찮게 구는 하인들을 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스벨도 엄연히 내 약혼자고, 그와 계속 밤을 보내느냐 마냐는 내 선택이야. 에이반이 내가 아스벨과 아침까지 함께 있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시켰어?"
짐짓 미간을 찡그리며 묻긴 했으나, 둘의 사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 심술은 그냥 넘어 가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나 오찬 때 내내 나와 아스벨이 눈 앞에서 벌이는 행각을 눈꼴시어 한 에이반이라면 이 정도로 넘어간 게 차라리 다행일 터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건데,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아르트리어님이 아닌……."
"그것은 마님의 종부 되시는 일리아나스님께서 미리 지시하셨습니다. 마님께서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면 아니되니 자정 전에는 침실로 꼭 데리고 오라셨습니다."
"반드시 침대에서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하고, 또 저녁을 거르도록 하지는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졸려서 나른해지는 상황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칼이?"
"……."
"흐응, 칼이 그랬단 말이지? 굳이?"
언제는 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더니, 이건 어떻게 보아도 명백한 참견이었다. 물론 부부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사유도 나름대로 그럴 듯 하다.
"뭐 알겠어. 식사를 거르는 것도 좋지 않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꿀 넣은 우유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
"예, 마님. 곧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칼의 이름을 대자마자 내가 순순히 권유를 받아들이자 하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안도했다. 물론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나는 우유를 반도 채 마시지 못하고 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수업을 듣느라 낮에 아스벨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지 못했다. 일정상 그렇게 될 줄 예상하고 어제 미리 작별인사를 해 두길 잘 했다. 듣자 하니 아스벨과 재상 카스칼은 같이 레마슬레이그에서 초대받았던 손님 몇과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별다른 일정이 없는 이들은 초대받은 김에 좀 더 이 저택에 머무르고 싶어한 것 같았지만, 기왕이면 재상 카스칼과 함께 일행으로 떠나기를 선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택 객실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손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어서 기분이 조금 편안해졌다.
성심껏 오후 수업을 들을 작정으로 다시 공부방에 들어갔는데, 왜인지 오늘도 진도가 상당히 빨랐다. 수업이 평소보다 세 시간이나 일찍 끝났기 때문에 나는 의아하게 질문했다.
"왜 이렇게 일찍 끝난 건가요?"
나이 많은 교사는 빠른 진도가 본인에게도 부담스러웠는지 콜록대면서도 빠르게 수업 자료를 챙겼다.
"오늘은 부군이신 일리아나스 공께서 수업을 좀 빨리 마쳐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녁에 약속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약속?"
그런 일정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있었더라면 아마 하인을 시켜 내게 미리 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칼과 정확하게 마주쳤다.
"부인, 오늘 공부는 아무래도 평소보다 이르게 끝난 것 같소."
일부러 일찍 끝나도록 만든 사람이 모르는 체 하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직접적인 말로 성교섭을 요구하기보다는 은근슬쩍 그런 분위기가 되도록 유도하길 선호하는 편이었다. 어지간히 동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까 궁금해서 나는 은근히 말을 돌렸다.
"그러게, 덕분에 일찍 쉴 수 있겠어. 요즘 안 그래도 수업이 너무 빡빡해서 피곤했는데 잘 됐지 뭐야."
"부인……."
밝은 블론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며 남편의 표정이 모호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며 가볍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마 조금 더 재촉하면 남편이 직접 섹스하고 싶다고 내게 부탁하는 장면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뒤에서 에이반이 갑자기 나타났다.
"유이나, 아까 아래층에서 가정교사로 오신 아슬론 공이 귀가 중인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일과가 끝난 모양입니다?"
그는 칼에게 눈인사를 하고서는 허리를 조금 숙여 나를 빤히 마주보았다.
"어제는 종일 아스벨루스와 했으니 오늘은 제 차례겠지요? 최근 워낙에 바쁘셔서 저 홀로 참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간 많이 쌓였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앗, 아니."
"그럼 얼른 갑시다."
그는 달콤하게 속삭이고는 내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며 칼이 보는 앞에서 뒤돌았다. 갈고리처럼 허리를 감아 쥐고는 거기에 살짝 더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에이반이 내 귀와 뺨에 가볍게 키스하는 그 잠깐 동안 그는 칼을 힐끔거리며 작별의 말을 건넸다.
"일리아나스 공, 실례하겠습니다."
"음……."
칼의 침음을 대답처럼 들었는지 에이반이 빙그레 웃으며 내 허리를 안고 계단을 향한다. 두어 걸음 계단을 내려갔을 때, 문득 에이반이 뒤를 돌아 보았다. 칼은 몇 걸음 정도 따라오던 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께서 유이나의 방 앞에 계셨던 목적도 저와 같은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흐음, 종부이신 일리아나스 공에게 기꺼이 순번을 양보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만, 사정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 안정기에 들어서지 못해 그녀의 도움이 훨씬 절실한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뻔히 자신이 도중에 채어간 것은 알지만 절대 넘겨 주지는 않을 거라는 엄포와도 가까운 발언에 칼의 곧고 반듯한 눈썹 주위로 힘이 들어갔다. 초조한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 때 에이반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공께서도 아쉬우시면, 차라리 둘이 함께 어떻습니까?"
"함께?"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식으로 칼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것은 확연한 거부반응이었다.
"뭐, 내키지 않으신다면 저야 상관 없습니다. 유이나, 가시지요."
에이반은 나를 안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칼이 도중에 방문한 것은 내가 에이반과 한창 몸을 섞고 있을 때였다.
에이반은 내가 아스벨과 섹스한 바로 다음날이라는 것을 감안했다. 그렇기에 시간을 오래 끌면 내 쪽이 먼저 지칠 것을 예상하여 내 몸이 금방 흥분할 수 있도록 아주 익숙한 애무방식을 택했다. 가장 민감한 유두와 음핵에 마력감응제를 조금 발라서 충분히 매끄럽고 부드럽게 만든 뒤 약간 과격하게 문질러 곧 가기 직전까지 만든다. 그리고 첫 삽입은 애널이었다.
"이 쪽의 첫 체험은 변이되어 있는 종부의 음경이셨으니, 그럼, 제 것은 좀 받아들이기 무난하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으응, 앗, 응……!"
"그러니까, 좀 더, 거칠게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읏, 응, 아아아앗!!"
서로의 신음이 고조되던 도중, 노크 소리가 짤막하게 들려왔다.
"부인, ……그리고 아르트리어 경."
문을 사이에 두고 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에이반은 조금 멈칫하더니, 곧 허리를 깊게 쑤셔올리며 작게 대꾸했다. 그 아래에 깔린 나의 목 안에서 황홀한 신음이 얕게 터져나왔다.
"일리아나스 공이십니까? 좋습니다, 들어오셔도."
한참 뒤에야 나는 에이반이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문이 열리고 뒤늦게 나는 몸을 움찔댔으나, 에이반의 팔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미 에이반의 뜨거운 페니스가 내 애널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었다.
처음 애널이 뚫릴 때 가볍게 한 번, 방금 전에 또 한 번, 자그마치 두 번이나 가버린 뒤라 반응이 늦었다. 그는 칼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잠깐 숨을 고르고, 내게도 쉴 시간을 주었다. 자세를 고쳐 아래에 깔려 있던 나를 위로 올려 앉힌다. 다만 페니스를 빼 주지는 않았으므로 자세는 고정이었다. 양 다리를 벌린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상태. 나의 꼿꼿하게 발기한 유두라던가 진한 분홍색의 균열은 활짝 정면으로 드러낸 채였지만, 그 아래, 애널 주름이 활짝 벌어져 단단하고 굵은 페니스를 물고 있는 장면은 다행히 각도 때문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으웃……!"
이미 구석구석 알몸을 서로 보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파트너와의 섹스 장면을 고스란히 들키는 것에는 역시 거부감이 있다. 나는 반사적으로 엉덩이 쪽을 조이면서, 칼의 얼굴을 그냥 외면해 버렸다. 한 편 과시하듯 나를 앞으로 내세워 자세를 고쳐 앉은 에이반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참여하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면 구경만? 뭐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나는 그저."
칼은 여러 가지 변명을 생각해 온 모양이지만, 에이반은 이미 그가 해야 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듯 옆에 놓여 있던 가방에서 바로 상자를 띄워 올려 꺼냈다. 상자 안에는 보통 훈련용으로 쓰던 딜도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유이나는 양쪽에 딜도와 남성기를 하나씩 번갈아 넣는 훈련은 했지만, 아마도 두 남자와 동시에 하는 건 처음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이나?"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반은 일부러 각도를 틀어 연결된 부위를 보여 주면서 그 위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젖은 입구를 손가락으로 조금 벌려서 보여 주었다. 나는 약간 놀라 고개를 저으며 몸을 움찔댔다.
"그러니까 공께서 이 쪽에 삽입을 원하시면 먼저 이 중 하나를 써서 유이나가 충분히 적응하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셋 중에서 어느 쪽을?"
"그건 유이나에게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리고 확실히 참여할 거면 먼저 옷부터 벗고 오라고, 에이반은 거기까지만 말한 뒤 다시 나와의 행위에 집중했다. 나와 에이반은 완전한 알몸인데 칼 혼자만 재킷에 조끼까지 전부 차려입고 있었다. 칼은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내 다리 사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머뭇거리며 다리를 움찔대자 에이반이 앞부분을 벌려 보이던 것을 그만두고 아래서 힘껏 대물을 짓쳐올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뒤에 들어 있는 그의 물건을 아찔하게 조이고 말았다.
"흐아아앙!!"
아까보다 비교적 과격해진 행위에 나는 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흐느꼈다. 낮고 굵직한 남편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부인……, 께서는, 하나만 받아들이기도 힘겨워 보이는군."
신음밖에 낼 수 없는 나를 대신해서 에이반이 속삭인다.
"하지만 저와는 충분히 연습을 했었답니다. 제 이 물건과 도구를 함께 써서 노는 걸 아주 좋아하는 편입니다, 유이나는."
"그랬던 건가……."
칼이 낮게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숨소리가 훨씬 가빠진 그는 사타구니 앞이 불거져 툭 튀어나온 바지의 모양을 가다듬으며 앞섶을 열어젖혔다. 딜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굴곡에 수많은 돌기들이 발기한 페니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당장 불편한 하의부터 벗은 그는 곧 상의도 마저 벗어 탁자에 걸친다.
그리고 나서 상자 안에서 칼이 집어든 것은 세 개 중에서 가장 굴곡이 심하고 두께는 얇은 딜도였다.
꽤나 흉악해 보이는 그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하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이반이 살짝 오므린 내 무릎을 양 옆으로 활짝 벌려 칼이 넣기 쉽도록 만들었다.
딜도의 끝부분이 입구를 꾹 누르자 나는 얕고 가쁘게 신음했다. 칼은 내가 괴로워 보였는지 머뭇거렸다. 하지만 에이반이 그가 쥔 딜도의 아랫부분을 갑자기 가로채어 일순 깊숙히 쑤셔박았다.
"유이나는 그런 식으로 애를 태우는 동작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말입니다……."
"아으응!!!"
입가가 벌어지며 침이 흘렀다. 오늘 앞쪽으로는 첫 삽입이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이며 느껴 버렸다.
"이 쪽입니다. 여기를 계속 만져서 적응시킨 뒤에는 넣어도 될 겁니다."
딜도가 너무 깊이까지 들어와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에이반에게서 딜도의 손잡이 부분을 건네받은 칼이 능숙하게 그 부분을 노리고 연이어 찔러넣는다. 거기, 더 안쪽, 칼도 이미 알고 있는 장소였다.
"부인, 좋은가? 으응?"
처음 머뭇거리던 칼의 움직임이 좀 더 농밀해지며 내 몸에 바싹 밀착했다. 양쪽으로 두 남자가 조금씩 몸을 짓누르는 바람에 심한 압박은 아닌데도 숨을 쉬기가 약간 힘겹다. 에이반은 하반신을 격렬하게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양손으로 내 가슴을 말아 쥐고 유두를 쓰다듬었다. 칼은 마치 삽입하듯 페니스를 내 고간 쪽에 올려 놓고 문지르듯 허리를 움직이면서 내 귓바퀴를 입술로 깨문다. 귀가 한 입거리다.
"음, 부인은 다른 남자와 할 때도 꽤 잘 느끼시는군. 평소에도 늘 이런가?"
"으응, 아, 아니, 보통 이 정도까지는, 앗, 아앗……. 느끼지 않는데엣……."
칼과 할 때 가장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주는 피하고 싶은 것이 칼과의 잠자리이기도 했다. 너무 느껴서 후유증이 길고, 체력도 많이 소모되어 실신할 것 같았으니까.
"후후, 오늘은 좀 특별하지요? 첫 쓰리섬이니까요?"
에이반이 칼을 보고 따라했다. 내 반대쪽 귀를 문 채로 질척이는 목소리를 낸다. 양쪽 귓구멍에서 두 남자의 묵직하고 꺼슬대는 저음이 동시에 꽂히며 뇌 속을 진동시켰다.
"좋아?"
"기분 좋지요?"
"어떻지?"
"유이나, 기분 좋으십니까?"
나는 눈을 감고 신음하며 훌쩍였다.
질 내부가 절정을 예고하며 조금씩 잘게 떨려왔다. 그것을 딜도의 손잡이를 통해 칼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면 진짜 딜도로 갈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칼이 다시 손에 힘을 주고 기다란 딜도를 완전히 뽑아냈다. 굴곡 있는 딜도는 잘 빠지지도 않았다. 그는 딜도에 흠뻑 묻은 진득한 애액을 훑어 자신의 돌기 투성이 거근에 치덕치덕 발랐다.
몇 분정도 천천히 시간을 들어 삽입을 준비시켜 준 덕분에 푹 젖어 열린 입구는 칼의 두꺼운 귀두를 비교적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넣기까지 꽤나 힘들었는지 칼은 직접 손가락을 써서 음순을 양 옆으로 활짝 벌려 가며 괴롭혔다. 가장 굵은 앞부분이 들어오면 그 뒤부터는 쉬웠다. 그저 힘껏 길을 따라 밀어넣기만 하면 된다.
앞쪽 통로에 굵은 물건이 들어오자 뒤에서도 밀려나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는지 에이반이 작게 불평했다. 칼은 아랑곳않고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자비없이 그의 것을 박아넣었다.
'아응, 수, 숨이…….'
제대로 호흡조차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에이반이 뒤에서 조금 페니스를 빼내 주자 그나마 목 끝까지 내장이 밀려올라오는 느낌은 가셨다. 칼의 대물은 단독으로도 받아들이기 힘겨운 것이었다. 끝까지 들어온 칼의 것이 이번에는 천천히 빠져나왔다. 안이 여유로워진 것 같자 기회를 타서 에이반이 다시 자신의 것을 뒤로 다시 삼키게 했다.
"……!!"
둘은 약속한 듯 번갈아가며 착착 자신의 것을 움직여 나를 메웠다. 칼이 뽑아내면 그대로 에이반이 다시 엉덩이 사이에 페니스를 박아넣었고, 에이반이 뽑으면 다시 앞으로 칼의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안쪽의 각각 다른 지점을 찌르는데, 그 때마다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평소보다 배 이상 힘들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배 이상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조금만 몸을 일으켜도 칼의 뜨겁고 단단한 근육이 내 몸을 내리누른다. 뒤에서는 에이반이 나를 껴안으며 내 체중을 온전히 받치고 있다.
'두 명에게 안기는 거……, 너무 기분이 좋아…….'
둘에게 애무를 받는다고 과연 2배의 쾌감이 느껴질까 반신반의했었는데 이건 어떤 의미로 2배 이상이었다. 몸도 두 배쯤 힘들었지만 그 이상의 쾌감에 중독될 것 같다.
"유이나, 좋습니까?"
"부인……."
"하아, 유이나……."
은밀한 곳에 위치한 두 개의 구멍이 무리하게 활짝 벌어진 것을 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은 양쪽 귀로 번갈아 가며 울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진탕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이나……, 이제, 갑니다……."
"부인, 너무 조여서, 더 참을 수가."
에이반이 먼저 뿌리까지 자신의 것을 박은 채로 애널에 사정했고, 그 위로 칼이 내 배가 불룩해질 정도로 자신의 것을 겹쳐 채워넣고서 질 끝을 누르며 정액을 힘차게 내뿜었다. 양쪽 구멍으로 정액을 받으며 나는 정말 실신할 정도로 느껴버렸다. 하반신 전체가 경련하며 두 남자의 정액을 동시에 빨아내고 있었다. 한참 오르가즘으로 움찔대던 몸이 곧 축 늘어졌다. 평소라면 이대로 한참 있다 빼냈겠지만 정말로 내가 숨을 거의 쉬지 못하자 둘은 빠르고 조심스럽게 양쪽 구멍에 박힌 페니스를 하나씩 뽑아냈다.
보통 때는 바로 다물렸을 구멍 입구가 이번에는 많이 무리했는지 힘이 완전히 빠져 감각조차 없었다. 질구와 항문에서 하얗고 끈적한 정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나는 행위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무섭게 침대에 머리를 늘어뜨리고 그 상태 그대로 기절에 가까운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두 개나 되는 남성기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체력 소모와 몸의 부담이 큰 일이었다. 에이반이 미리 딜도로 훈련을 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보다 더 후유증이 컸을 것 같다. 결국 다음 날 나는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 했고, 수업은 칼이 미리 취소시켰다고 한다. 간만에 늦잠을 잤지만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오후까지 푹 쉬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일어나 목욕 준비를 부탁했다.
어제는 진짜 다음 날 걷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는데 마력의 영향인지 하룻밤 정도 쉬었더니 꽤 멀쩡해졌다. 특히 엘리시온의 여성은 매번 남자의 에스트라 섞인 정액을 받으며 자연히 잦은 성교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그런 쪽에 한해서만큼은 신체의 피로가 빨리 복구되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지금껏 무리라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남자를 동시에 상대해 본 적은 별로 없어서, 조금 낯선 경험이었다.
씻고 났더니 칼과 에이반이 함께 내 방까지 찾아온 상태였다. 내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하인들에게서 들은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에이반이 안부를 물었다.
"두 남자를 동시에 받아들인 적이 처음이라 조금 힘들어하셨던 것 같은데, 몸은 괜찮으신지요?"
"응, 이젠 괜찮아요."
"기분은 어떠셨습니까?"
"그, 응……."
나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사실대로 말했다.
"정말, 좋았어요……."
어제는 에이반도 칼도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고 나도 마찬가지라 지금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었다. 낮에 보는 두 남자는 어제의 난잡한 행위가 아예 없었던 일인 마냥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대담한 답변 이후로 셋 사이에는 어제의 것과 약간 흡사한 열기가 조금씩 감돌기 시작했다. 칼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짐짓 근엄하게 중얼거렸다.
"부인께서 좋았다니 다행이로군."
그 날 첫 식사는 애매한 시간이라 간단히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칼과 에이반도 함께 동석하게 되어 거의 오찬 비슷하게 테이블이 차려졌다. 식사 도중에 문득 에이반이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괜찮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뭔데요?"
"일전에 접견을 청하는 남자들이 너무 많아 고민이라고 말씀하셨었지요. 전부 무시할 수도 없고 하나하나 만날 수도 없다면 아예 여러 명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전에도 개인교사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들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에이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자리에 저나 일리아나스 공을 동석시키는 겁니다. 성교섭을 치르게 되더라도 익숙한 남자가 한 명쯤 있는 편이 낫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선은 1대 1이나 숫자가 맞는 여럿 대 여럿이 기본이었지만 한 명이 여러 남자와 동시에 만남을 가지는 일도 전례가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은 서로가 흔쾌히 그런 관계를 원할 경우에 한했다. 하지만 거리낌이 들었던 전과 달리 에이반이나 칼이 함께 있어 준다고 하니 훨씬 거부감이 덜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나와 만나겠다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만은 없으니까, 우선 멀리서 왔다는 남자들부터 한 자리에 초대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 번에 한 명씩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조건이 사라지자 명단 추리기는 금세 끝났다. 가장 멀리서 방문하여 서둘러 떠나야 하는 남자들과 한 차례, 그 다음에는 칼리온의 고위 관료들과 한 차례, 마지막으로 어느 쪽에도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남자들과 또 한 차례. 그래도 사람이 남으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일정을 짰더니 일주일에 하루씩 시간을 내도 충분했다. 칼리온에 머무르기로 한 기간 안에 일리아나스 카이제르 공의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주는 칼리온 출신이 아닌 남자들에게 초대장을 모두 돌렸다. 일대 다수의 맞선을 선호하지 않는 남자들도 분명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내용을 밝혔는데, 그래서인지 남자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나는 칼과 같이 참석했으며, 칼은 어디까지나 맞선 때는 지켜보기만 하고 그 뒤에 골라낸 남자들과 성교섭을 하게 될 경우에만 직접 나설 것이라고 미리 밝혔다.
인원 수가 여러 명이라 결혼식 때와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비공식적인 만남이라서 다들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이번에 남자들은 보호자나 시종도 데려오지 않았다. 맞선에서는 그게 일반적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질문을 무시했던 저번과 달리 나 역시 이번에는 사적인 얘기에도 웃으며 응답해 주었다. 물론 맞선 자리에 어울리지 않거나 서로의 관계와 상관이 없는 질문의 경우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보니 정말 내가 목적인 남자들과 내 남편이 목적인 남자들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다들 그저 그렇네.'
예의상 각각의 남자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까지 했지만, 그 뒤에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초대장을 돌린 시점이 결혼식 날로부터 조금 지난 후여서 사실 멀리서 온 손님들 중 바쁜 이들은 이미 다 돌아간 뒤였던 것이다. 분명 결혼식 때는 꽤 잘생긴 남자들도 몇 명 보였던 것 같은데, 단지 자존심 때문에 참여하지 않은 건지 이미 바빠서 돌아간 건지 모르겠다.
물론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남자도, 말솜씨가 무척 훌륭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남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칼은 분명히 부인을 지켜만 보기 위해 왔다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아니라 칼에게 대화를 청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첫 맞선은 전부 탈락이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밝히자 칼은 그럴 만 했다는 반응이었다.
두 번째로는 칼리온의 유력 자제들을 초대했는데, 사실 칼에게 명단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초대되었는지는 당일까지 모르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에이반이 동석했는데 그는 얌전히 앉아 있는 대신 직접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며 너무 달라붙는 남자는 쳐내고 상대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적었던 남자는 불러내어 몇 마디를 더 건네고는 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에이반은 조금 거리가 있는 장소로 나를 따로 불러 내서 물어 보았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습니까? 이번 선 자리에 나온 남자들은 모두 일리아나스 공과 우호 관계이기 때문에 마음에만 든다면 누구를 고르셔도 상관 없을 겁니다."
"으음, 글쎄……."
머뭇거리다가 반짝이는 애쉬 블론드를 가진 뽀얀 피부의 미청년을 가리켰다.
"칼리온 원로인 알노트 공의 차남이로군요. 장남 쪽은 별로입니까? 제가 보기엔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닮은 것 같은데."
"그, 그러면 아예 둘 다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형제인 두 사람과 동시에 해도 좋을까 하는 윤리적인 의문이 들어서 둘 중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는 분위기의 동생 쪽을 고른 것이었다. 엷은 푸른 기가 도는 블론드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하지만 둘이 일단 동시에 맞선에 나온 이상은 큰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에이반은 두 명의 이름을 명단에 올리고 다시 재차 물어보았다.
"다음은?"
"저기 저 남자. 붉은 겉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요."
"드미어스 경이군요. 저래 보여도 나이가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청년기니까 이런 자리에 참석했겠지만 말입니다."
이번에는 영 못마땅한 투로 에이반이 덧붙인다. 성인기에 접어들기 직전까지 나이를 먹었는데 한량처럼 이런 자리에나 나다니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예 뜯어 말리지는 않았다. 하루 정도야 괜찮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요."
그 다음으로는 밝은 블론드를 가진 키 큰 남자를 선택했다. 칼과도 조금 이미지가 닮은 듯한 그 남자는 무기질적인 분위기의 미남으로 처음엔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내게는 무척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현재는 집행기사의 종자로 일하고 있으며 유력 원로의 친아들이자 후계자라고 한다. 성숙한 외모에 비해 실제 나이는 꽤 어린 편이라고 들었다.
그 외에도 에이반이 추천하는 남자들 몇 명을 선택하자, 지시를 들은 하인들이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내가 고른 남자들에게 별도의 권유를 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승낙하고 곧 하인을 따라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몸을 다시 한 번 가볍게 헹궈내듯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벗기기 매우 쉬운 반투명한 가운과 하얀 색의 속옷이었다.
준비된 넓은 방의 큰 쿠션 침대 위에서 에이반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내 몸을 만져 주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평소와 흡사한 분위기였으나 앞으로 여러 명의 남자와 같이 섹스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긴장되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먼저 준비를 끝마친 남자들이 방으로 들어왔을 무렵에는 이미 에이반이 내 몸을 전부 준비시켜 놓은 뒤였다. 나는 누워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다리를 벌린 자세로 에이반의 허리 아래 깔려 있다가 서둘러 일어나며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그들은 각자 속옷 차림이거나 전부 벗은 상태거나 아니면 미리 마련된 얇은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에이반은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보란 듯 내 어깨에 걸쳐진 반투명한 가운을 손으로 만져 벗기며 뒤에서 나를 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가슴의 아랫부분과 허벅지 사이 골짜기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신음을 참았다. 그가 천천히 나의 은밀한 부분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손님분들께서 벌써 준비를 끝마치고 오셨군요."
"으, 읏, 그, 그러게, 하응……!"
각각 어색해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흥분한 것 같은 반라의 남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많아야 서너 명쯤 고를 생각이었는데 에이반의 말에 대답해 주다 보니 자그마치 여덟이나 뽑고 말았다. 나는 단정치 못한 표정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점차 아래로 내렸다. 대부분 아래쪽도 확연히 불룩한 상태였다.
"그럼 무엇부터 해 달라고 할까요? 가슴부터 빨아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거기부터 다들 보여 달라고 할까요?"
에이반이 살짝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변을 둘러싼 남자들이 제각기 가운의 앞쪽을 벌리거나 속옷을 벗어 꼿꼿하게 부풀어오른 성기를 꺼내 보였다. 에이반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잡아 보라며 속삭이듯 권유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눈 앞에 있는 제일 단단해 보이는 성기를 가리켰다.
그것의 주인은 미스틸드 경이라는 남자였는데 무척 잘생기고 잘 빠진 몸매에 옷차림도 본인과 잘 어울려서 선택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반라인 지금은 부푼 아래쪽 외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가 나직하게 대답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제가 첫 번째로 선택받아 무척 영광입니다, 유이나 부인."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유이나 부인, 그러니까 마담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직은 좀 어색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성기를 뿌리부터 조심스럽게 만져 주었다. 아직 다 만지지도 못 했는데 에이반이 다시 한 차례 재촉했다.
"이제 왼쪽 손으로 쥘 다른 하나를 더 골라 보십시오. 얼른, 다들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쥔다고? 나는 얼떨떨하게 근처에 있는 남자를 적당히 아무나 선택해서 손짓했다. 선택받은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왼쪽으로 와서 자신의 물건을 내밀었다. 양 손에 꽉 차는 두 개의 남성기를 최대한 손바닥을 활짝 펼쳐 감아 쥐고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양 손을 동시에 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한 명의 페니스를 두 손으로 만질 때보다 두 명의 페니스를 한 손에 하나씩 쥐는 상황이 비교할 바 없이 훨씬 흥분되었다. 에이반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가슴을 빨아 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골라서 부탁해 보시겠어요?"
"가, 가슴, 을……."
"예, 누가 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까?"
나는 사정없이 떨리는 시선으로 남자들을 훑어 보았다. 머뭇거리다가 에이반을 가리켰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이번에는 다른 쪽 가슴을 내어 줄 상대를 골라 달라고 권유한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냥 빨간 입술을 가진 금발의 미남을 선택했다.
양쪽 젖가슴이 동시에 두 남자에게 쭉쭉 빨려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얕은 신음이 들려왔다.
"흐앗, 아아아앙!!"
에이반은 적당히 옆 사람과 비슷한 템포로 맞추어 혀를 놀렸는데, 워낙 옆 사람이 빠는 힘이 강해서 엄청나게 느껴 버렸다. 나는 신음을 더 이상 참지 않고 뱉어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옆에 자리잡고 열렬히 가슴을 물고 빨아대던 에이반이 말했다.
"이제 슬슬 넣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누구로 하시겠어요?"
"하앙, 아, 아무나, 아무나 좋으니까앗!"
내 말에 한 남자가 움츠려 가리고 있던 내 종아리를 붙잡고 벌렸다. 곧 누구의 것인지 모를 페니스가 질구를 가르고 쑥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아흐으으응!!"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삽입한 남자가 힘껏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신음만 하자 에이반이 입술을 잠시 떼고 말했다.
"첫 섹스인데 그만한 성의는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누구와 하는 중인지 얼굴은 마주쳐야지요?"
"아, 흐아읏!"
"어떻습니까? 느낌은? 모양이나 크기는 마음에 듭니까? 테크닉은?"
에이반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 알아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
"조, 좋아, 흐끅, 기분 좋앗! 아, 아아, 히아아악!"
"좋으십니까, 부인?"
에이반이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울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헐떡였다. 흐릿하게나마 내 무릎을 붙들고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마구 박아 넣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스스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미스틸드 경이었다.
"으응, 좋아요……. 미스틸드 경, 엄청 단단해, 흐으!!"
그 순간 왼손에 쥐고 있던 남자의 성기가 움찔거리며 흰 정액을 뿜어냈다. 나는 손에 뜨거운 것이 닿자 잠시 흠칫했다. 그는 내 손가락을 쥐고 사정한 성기를 몇 차례 쓰다듬게 한 뒤 천천히 손을 놓았다. 잠시 쉴 수 있겠거니 했는데 곧 그 자리에 다른 남자가 들어와 자신의 물건을 쥐여 주었다.
내가 해 주는 수음의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거의 남자 쪽이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가슴을 한참 빨던 에이반이 잠깐 다른 사람에게 위치를 양보하며 자리를 비웠다. 남자들은 경쟁적으로 그 쪽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을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질 안쪽을 뜨겁게 쑤셔대던 페니스가 이윽고 절정하며 흰 액체와 함께 에스트라를 배출한다. 낯선 에스트라가 배 안을 가득 채웠다.
"후우……."
만족한 남자의 한숨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채 가지 못했다. 기분이 좋은 것은 확실했지만 워낙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도 가슴 쪽도 쉴 수가 없었다. 첫 남자의 것이 빠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두 번째 남자가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단숨에 쑤셔박았다.
"아아, 아……!"
나는 우는 소리를 내며 아래를 꽉 조였다. 그는 정액으로 미끈미끈해진 질 주름을 마구 헤집으며 처음부터 격렬하게 허리를 치대 올렸다. 모양이나 크기는 분명 다른 남자의 성기였지만 아까의 연속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웃, 마담, 부디 이 쪽도, 봐 주십시오."
두 번째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내게 애원했다. 눈 앞이 까마득했지만 목소리로 알 것 같았다.
"라, 란스……."
"예, 란슬랜트입니다. 마담, 마담의 안쪽은 정말 굉장합니다……. 이렇게나 탄력있고 촘촘하고, 크윽……. 도저히 참을 수가……."
여러 명이 하나의 몸에 정염을 쏟아내는 통에 나는 두 명째에서 완전히 녹아내려 허리를 마구 들썩이며 크게 오르가즘을 느꼈다. 아찔한 비음 섞인 높은 신음이 흐느끼듯 터져나왔다. 란슬랜트 경이 사정한 뒤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또 다음 남자가 하반신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처음 둘보다 조금 더 사이즈가 굵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흐읏하아앙!!"
힘겨움 반, 쾌감 반의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앞뒤로 들썩인다. 그에 호응하듯 남자 역시 격렬하게 안쪽의 극점들을 긁어 주었다. 두꺼운 페니스에 비해 세 번째 남자는 꽤나 금방 사정했다. 하지만 아쉬울 것도 없었다. 지체 없이 네 번째의 물건이 안을 꽉 채워 주었으니까.
그 때 도저히 참지 못하고 옆으로 흔들리던 내 발등에 자신의 것을 문지르던 다른 남자가 정액을 다리에 흠뻑 묻히며 사정한다. 종아리와 무릎 등 정액이 묻은 부위가 무척 뜨거웠다.
안에 정액이 들어차는가 싶으면 곧 다른 남자의 것이 들어와 제 물건으로 바득바득 내부를 긁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러 명의 뜨거운 정액이 섞여 이미 하반신은 하얀 액으로만 질척거렸다. 어느새 다른 남자들에게 양보하여 빠져 있던 에이반이 네 번째 남자가 사정을 끝냈을 때 잠깐 행위를 자제시킨 뒤 시종에게 중간 정리를 지시했다.
곁에서 대기하던 시종들 중 두 명이 체온 정도로 데운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몸에 묻은 정액을 조금씩 닦아내 주었다. 그 때 손님 중 한 명이 자신도 돕겠다면서 손에 잔뜩 묻힌 자신의 정액을 혀로 핥아냈다. 그러자 다른 손님 역시 내 몸에 입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여러 개의 혀가 전신을 애무하자 미칠 것 같았다. 특히 남자들은 내 가슴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너무 빨려서 유두가 빳빳하게 부은 것 같았다. 예민해진 부분을 또 빨아대니 금세 느껴 버려 견디기가 힘들다. 한 명은 정액을 대강 닦아낸 내 다리 사이에 아예 얼굴을 들이밀고 그 부분을 빨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의 몸에 가려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아래가 갑자기 뜨거워져서 움찔했는데 곧 달콤한 쾌감이 하반신을 점령했다.
에이반이 내 몸을 틀게 해서 옆으로 뉘이며 느릿하게 속삭인다.
"이제 앞쪽은 잠깐 쉬고, 뒤쪽을 사용해 볼까요."
미끄럽게 젖은 애널로 다른 남자의 기다란 물건이 쑥 들어온다. 앞쪽이 여전히 빨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만두기는커녕 악착같이 고개를 박은 채 내 하반신에 매달렸다. 반면 애널에 삽입한 다른 한 명은 누가 앞부분을 빨고 있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고 내 허벅지를 붙든 채 마구 뒷구멍에 성기를 들이박았다.
애널에 사정한 남자가 자기 것을 재빨리 뽑아냈고, 기다리고 있던 다음 남자가 삽입했다. 나는 예상과 달리 꽤 커다란 것이 들어오자 움찔하고 말았다. 다들 청년기의 남성인지라 크기는 고만고만한 편이었는데, 유독 길고 두꺼운 물건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당황하고 만다.
무자비하게 뒤의 남자가 그것을 움직여대자 나는 전신을 덜덜 떨면서 흐느꼈다.
"흐아아앙, 커, 너, 너무 커어……, 아아, 거기까지……, 아아아아앗!!"
물론 크다고는 해도 아직 변이하기 전이라서인지 남편 것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깊은 곳을 찔리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뒤에서 거친 남자의 신음이 들려왔다. 듣자 하니 애널 섹스는 내가 처음이라는 것 같았다. 그래선지 의외로 쉽게 사정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를 쑤셔대는 것이었다.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오랜 섹스 끝에 애널로 제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허벅지 안쪽을 경련하며 한참이나 절정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쉬어도 남자들은 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또 한 명의 남자가 방금 사정한 쪽을 밀어내고 다리 사이에 자리잡았다. 나는 간신히 그가 앞쪽에 삽입하도록 유도했다. 뒤로는 이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내 의도를 꽤나 오해했다. 다른 한 명이 앞에 삽입한 상태에서 또 하나의 남자가 뒤로 와서 비어 있는 애널에 자신의 페니스를 곧장 찔러넣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청년기 남자들이라 칼만큼 물건이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두 개를 동시에 넣더라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은 아니었다.
다른 쪽의 애무가 줄어든 대신 하반신을 도저히 쉬게 할 수가 없었다. 한 명이 사정하고 빠지면 또 한 명이 들어왔다. 허벅지를 타고 대량의 정액이 끊임없이 줄줄 흘렀다.
"후욱, 유이나 부인, 제, 제 물건도 봐 주십시오……. 어, 어떠십니까……."
나는 누가 말하는 건지도 제대로 모르고 고개를 그저 끄덕였다.
"좋아아, 엄청 뜨거웟, 아아……!"
손님은 분명 여덟 명을 초대했는데, 사정을 받은 횟수는 여덟 번을 한참 초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다들 지치지도 않는지 나 하나를 붙들고 각자의 방식대로 제 욕구를 채웠다.
행위는 내가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도저히 못 하겠다며 에이반을 부르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는 천천히 마무리를 도와 주며 내 몸을 일으켰다. 만족한 남자들도 있었지만 영 아쉬워하는 남자도 많았다. 기억하는 바 최소 각자 두 번 이상씩은 사정했을 텐데, 아무래도 복잡한 상황이라 그런지 모두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에이반이 손님들을 돌려보내는 동안 나는 시종의 손에 맡겨졌는데, 소년종과 달리 청년기 남자인 시종들은 내가 몸을 아예 가누지 못하더라도 인형 다루듯 나를 깨끗하게 구석구석 씻겨 주는 것이었다. 다 큰 남자의 손에 알몸을 맡긴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편리한 점도 있는 것 같았다. 레오와 벨이 이 자리에 불려 왔다면 아마 내 상반신조차 제대로 들어올리지도 못 했을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여자들이 소년종을 선호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몸을 씻기는 도중에 최소 두 명 이상이 발기해 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교체되고는 했던 것이다. 나는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덟 명의 에스트라 마력을 받아내고 소화시키느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거의 쓴 적 없지만 나는 마력을 골라 내어 깨끗한 부분만 받고 남는 것들은 흘려버리기로 했다. 스스로를 조금 추스르고 나자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뱃속은 충만한 기운이 가득했고 전신은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시종에게 손짓해서 커튼을 치도록 하고, 천천히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일대 다수라는 이벤트의 성격상 내가 모든 남자들을 만족시킬 의무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남자들은 이런 행사의 결과가 썩 나쁘지 않았는지 이후 꽤 많은 이들이 한 번 더 나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총합 네 번의 맞선 자리를 열었고 그 때마다 칼이나 에이반이 둘 중 하나는 꼭 함께 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만남 이후에도 꾸준히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남자들만 두 번째로 초대해서 비슷한 자리를 만들었다. 이미 한 번씩 안면이 있는 남자들 뿐이었으므로 마지막은 보호자 없이 나 혼자서만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조금 힘들고 꺼려졌던 처음 이후로는 어느 정도 능숙해져 스스로 여러 명의 남자들을 리드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내가 왕족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내게 함부로 굴지 않았다. 일대 다수라고 해도 그들을 내 마음에 들도록 이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간혹 너무 과하게 흥분하여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필요 이상 거칠게 행동하던 남자들이 있긴 했지만 칼이나 에이반이 제지하기 전에 다른 남자들이 그런 이들을 알아서 배제했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 약 5주가량을 저택에서 머물며 수업을 듣고, 아슬아슬한 날짜에 레마슬레이그로 귀환했다. 칼은 칼대로 결혼 휴가가 끝났고, 에이반은 에이반대로 원정 휴가가 딱 맞게 종료되었기 때문에 둘 다 곧바로 바쁜 일상으로 복귀했다.
나는 젊은 집사가 차마 태연하게 내가 알몸에 가까운 상태로 자고 있는 침실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제발 아침식사를 하라고 소년종을 시켜 깨울 때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일단 식사한 뒤 잠깐 산책하고 또 자러 올라갔다. 이런 생활만 일주일, 어느 정도 결혼식 이후 바쁜 칼리온에서의 생활로 인한 피로가 풀린 듯 하자 간만에 디베르타에 방문해 볼 생각이 들었다. 마침 초대장도 왔고.
드물게 일찍 일어나서 씻고 몸단장을 했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벌어진 가운 틈으로 방울져 흘러내린다. 오늘 디베르타에 방문한다고 했더니 젊은 집사는 은쟁반에 검은 실크로 된 제복을 받쳐 들고 내게 올렸다.
"어머, 이건 새 제복이네."
"주인님께서 선물하셨습니다. 최근 왕도 숙녀분들의 제복 유행은 이와 같은 선명한 색상이라는군요."
새까만 색의 실크 옷감으로 만들어진 제복의 버클 장식 위에 자잘한 루비 참이 달려 있었다. 보석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 뒤와 골반 양 옆에, 총 세 개였다. 착용해도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조그만 포인트가 분위기를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디베르타의 제복은 엄밀히 말해 정해진 규정만 지키면 그 외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조건은 단순하다. 신분에 따라 정해진 단색. 유두와 국부를 노출하지 않는 면적일 것. 그러면서 목어깨와 허리, 골반, 그리고 가슴골을 필요 이상 가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 신체 고유의 선을 반드시 드러내는 차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복의 조건에는 사실 디베르타 내의 안전 문제가 크게 관여되어 있다. 디베르타의 여자들에게 몸의 전체를 가리도록 허용할 경우, 여자들 사이에 체격이 비슷한 남자가 위장하고 섞여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는 몇 번인가 남자가 여자 흉내를 내며 디베르타 안으로 들어와서 숙식하다가 들킨 기록이 있다. 범죄가 목적인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어쨌든 이곳 엘리시온에서 남성이 여성으로 위장하는 것은 대개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였으므로 그러한 행위는 이유 불문하고 중범죄로 취급받는다.
기본적인 조건만 지킨다면 끈에 구슬 장식을 단다던가 이중 끈을 매달고 예쁘게 모양낸 장식 매듭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였다. 신분이 높다면 보석 참을 달 수도 있고, 옷감의 색깔도 다른 계급의 색상과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특정 범위 내에서 원하는 대로 물들여 입을 수 있다.
신분과 형편이 허락하는 경우 제복 위에 화려한 장신구나 속이 비치는 오버드레스를 걸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홀가분하게 다니는 쪽이 편했으므로 결혼 반지 외의 것은 굳이 걸치지 않았다. 예전에는 결혼 반지도 착용하지 않았지만 이제 공개적으로 남편과 애인들과의 사이가 알려졌으니 더 이상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맨손으로 다닐 이유가 없었다.
소년종에게는 새 그림 도구와 캔버스를 챙기도록 했다. 오전에는 미술 수업 일정이 있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다들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몇 명은 내 새 제복을 보고 부러워했다.
"세상에, 어디 의상점에서 주문했어요? 이렇게 선명한 색상이라니!"
"오늘 아침 약혼자한테서 선물받은 거라 그건 물어보지 못했네요."
"유이나 양의 약혼자는 분명 센스가 좋고 멋을 잘 부리는 신사가 틀림없어요. 이렇게 유행에 꼭 맞춘 선물을 준비하다니. 더군다나 아, 이 루비 장식 좀 봐요. 붉은 색 제복에 달린 것만 봤는데, 검은 색에 매치하는 편이 더 세련되네요."
제복 하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제복에도 디테일하게 유행과 디자인이라는 것이 있었다. 큰 변화가 아니라 무심하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워낙 면적이 적은 옷이라선지 같은 수업을 듣는 여자들 모두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들은 내 손가락의 반지를 보고 결혼하러 간다더니 두 번씩이나 하고 왔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하나는 약혼 반지임을 털어놓았다.
간만에 참여한 미술 수업이라 오늘은 큼직한 캔버스를 챙겨 온 것이 무색하도록 스케치 연습만 했다. 다음 번 수업에 쓰면 되니까 캔버스는 내 이름을 달아 맡겨 놓고, 소년종들과 함께 녹색 풀밭을 잠깐 걷고 있었다. 오후에는 친목회 약속이 있었는데 그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검은 색 건물로 가서 마법 연습이나 할까 했는데, 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디베르타 중앙 건물을 기준으로 못 보던 얼굴이 꽤나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들 서로 모여 다니고는 있지만, 묘하게 쭈뼛거리면서 드러난 배나 가슴 쪽을 팔로 가리고 있다. 나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신인들이구나.'
1년이 지났으니 이제 나는 신인이 아니었다. 그래, 1년. 여기 처음 온 뒤로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녀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나도 처음에는 저랬던 것 같다. 갑자기 노출이 심한 수영복 같은 의상을 입어야 한다고 강요받아 무척 난처했었지. 신체 노출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아마 그녀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그녀들 중 몇 명은 벌써부터 미미하게 몸에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후원받고 있는 입장일 것이다. 예전의 나처럼. 나는 잠깐 벤치에 앉아 감상에 젖어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신인들도 계산해 보면 여기 온 지 한 달은 지난 시점이었다. 서툴게 엘리시엘로 더듬거리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
마지막 분기가 끝나는 날이자 가장 큰 만월의 날. 일 년간 납세된 마력을 꾸준히 축척한 에아의 소환탑에서는 새로운 여자들이 부름에 응한다. 그녀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안전한 마법 철창에 구속되어 최종 목적지까지 인도된다.
모든 엘리시온 남자들이 레바단 연합 소속인 것은 아니기에 여자를 약탈하기 위한 시도는 항상 있어 왔다. 그렇기에 대대로 여자들이 안전한 곳까지 도착하는 길, 골든 로드는 항상 엄중한 결계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여자들은 그 짧은 이틀의 시간 동안 좁은 철창에서 하루 중 대부분을 강제로 수면하며 결코 바깥으로는 풀려나지 못한다. 그것이 비인간적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꽤나 불안하고 힘들었었지. 심지어 그 때는 내가 강제로 잠들게 된 줄도 몰랐어.'
꽤 많은 인력을 소모하는 이동 과정이 있은 후에 모든 여자들은 하나씩 인적 등록을 마치고, 동시에 그 거취가 정해지게 되는데 이 때 후원 상대가 된 여성들의 정보가 어느 정도 따로 구분당한다. 그녀들 중 일부는 반드시 장래에 이름을 날리는 귀부인이 되고 사회 유력자들의 후계를 생산하게 해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후원 여부에 대해서는 가급적 침묵해야 한다고 들었어. 하지만 이렇게 보니 뻔히 알겠는걸. 누가 상위 계급의 후원을 받는 여자인지, 누가 더 큰 마력을 몸에 두르고 있는지.'
물론 마력이 적은 여자들이나 같은 신인들끼리는 조금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까. 마력을 보는 눈이 생기고 먼 거리에서도 마력의 흐름을 읽는 법을 짧게나마 학습했더니 완전히 눈이 새로 뜨인 기분이다.
에이반과 아스벨이 나를 두고 경쟁하다가 결국 에이반이 승리했지. 그와 첫 관계를 갖고, 첫 마력을 받았다. 마력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마법을 서툴게나마 배워 처음 아케인 포스를 써 봤을 때, 너무나 신기해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약간의 공부를 하고 취미로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는 안온한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될 쯤에 현재의 남편인 칼을 소개받고, 반 년 후인 지금 와서는 결혼까지 올렸다.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었지. 아무런 전조도 없는 납치 현상에 앞날이 깜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곳에 끌려들어온 것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니, 오히려 암울했던 인생의 전환점이라고도 여길 만한 사건이었다.
그 날의 친목회는 키셸과 세리아 중 세리아 쪽이 제안한 자리였다. 장소는 대욕탕 아래층의 자그마한 공간을 빌렸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디베르타에는 공공장소임에도 여럿이서 또는 혼자 팁을 모아 지불하고 일정 시간동안 독점할 수 있는 상업적 성향을 띤 공간이 의외로 많은 편이었다.
"영웅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의 결혼에 관한 소식이 여기까지 들려왔어!"
내가 의자에 앉기도 전 세리아가 흥분해서 외쳤고 키셸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야 그렇겠지."
"듣자 하니 유력인사들을 잔뜩 초청해서 식을 올렸다면서? 어땠어? 나도 언젠가 약혼자와 결혼식을 할 텐데, 미리 들어나 보자."
세리아의 약혼자이자 후원자도 왕족이었다. 하지만 칼의 경우가 워낙 독특해서 내가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차분히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결혼 준비와 식 당일, 그 이후에 대해 조금씩 얘기를 시작했다. 세리아가 책상을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정말! 왕족들은 결혼을 자그마치 네 번이나 한다고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그런 유명한 사람도 겨우 두 번만에 끝냈다는 거지……."
"네 번에 걸쳐 혼인하는 풍습은 이미 레바단에선 사라진 지 오래야. 요새는 다들 한 번으로 끝낸다더라. 그래도 결혼식을 두 번에 나누어 열 정도면 확실히 손님이 그만큼 많긴 했겠네."
키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세리아는 그럼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봤냐며 재차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워낙 정신이 없어서 뭘 봤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칼리온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두 사람에게 항구와 배들, 그리고 독특한 형태의 디베르타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헤어지기 전에 세리아가 말했다.
"아, 그렇지. 유이나, 다음 친목회는 네가 열어 볼래?"
"어, 내가?"
"응. 마음에 드는 곳으로 장소를 빌리고, 마실 거리 몇 종류만 준비하면 돼. 키셸은 워낙에 완벽주의자라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챙겨 놓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이제 유이나도 마담이니까 자기가 친목회를 주최하기도 해 봐야지."
그러고 보니 셋 중에서 이미 결혼해서 마담으로 불리는 건 나 뿐이었다. 사실 키셸의 완벽했던 저번 친목회를 생각해 보면 조금 기가 죽기도 했지만, 의외로 세리아의 친목회는 키셸만큼 철저하게 준비된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선지 약간 자신이 생긴 것 같았다.
다음 달 안에 친목회 편지를 보내기로 약속하고서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미 저녁식사 준비가 딱 맞게 되어 있었다. 식사를 끝마친 뒤에 좁고 기다란 잔에 담긴 젤리 디저트와 차로 입가심을 하는데, 집사가 쟁반에 올린 종이들과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왔다.
"먼저 카스칼 소공께서 보내신 선물과 편지입니다."
그가 보낸 것은 화려한 구두와 선명한 노란 색의 실크 투피스 드레스였다.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하의는 딱 붙어 엉덩이 선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상의는 의외로 노출이 적었다. 가끔은 이런 유행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스벨의 편지에는 약혼 반지를 조만간 맞추러 가자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 때 입고 가면 될 것 같다. 나는 소년종에게 옷과 구두를 따로 정리해서 걸어 놓으라고 말했다.
"그나저나 편지가 왜 이렇게 많지?"
아마도 내가 칼과 결혼한 사실이 소문으로 퍼진 탓인 듯 했다. 식을 공개적으로 올린 시점에서 이미 예상한 상황이었지만 막상 여기 와서도 편지를 잔뜩 받으니 조금 당황했다. 더 놀라운 것은 집사의 다음 말이었다.
"마님 앞으로 오신 편지는 이것의 네 배쯤 많았습니다만, 전부 읽기 어려우실 것 같아 마님께서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는 내용의 경우 재량으로 걸러냈습니다. 혹시 걸러낸 편지도 원하신다면……."
"아니, 괜찮아요."
그는 집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굳이 일일히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것도 에이반이나 나의 의중을 자주 확인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집사가 알아서 거른 편지라면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집사가 건넨 편지를 하나씩 펴서 읽어 보았다. 처음엔 조금 기대했지만 곧 지루한 미사여구와 별 영양가 없는 내용에 하품이 나왔다. 거의 칼리온 저택에서 읽었던 편지들과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쪽들은 좀 더 직접적인 만남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직 신인이고 당장 감당해야 하는 몇 명의 남자만 상대하기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형태의 만남도, 슬슬 왕족과 고위 계급 남성의 부인이자 약혼녀로서 참여해야 할 시기가 왔다. 천천히 초대장의 내용을 훑고, 몇 장의 초대장을 골라 따로 놓아 두기로 했다.
그 후로 나는 두세 번 가량 여자들의 친목회에도 참석하고, 칼리온에서 경험한 것처럼 남자 세 명가량을 한 자리에 초대해서 성교섭을 갖기도 했다. 한 명은 리안느 소위로서 갓 청년기에 접어든 신입인데 그 해의 신입 중에서 대단한 미남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또 한 명은 안티오페타 소령인데 바람둥이 기질은 좀 있지만 여자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다고. 그리고 전에도 소개받아 만난 적 있던 에르나트 중위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저번에 한 차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나서 그를 만나 주지 않았었는데 이 기회를 틈타 어떻게든 신청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성심성의껏 임하겠다고 맹세했다.
물론 이번에는 그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상관 없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다른 남자들이 둘이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번 성교섭 결과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대단히 만족한 덕분에 한참이나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에르나트 중위는 뿌듯해하며 내 가슴에 마음껏 뺨 비비며 속삭였다.
"이번에는 기분이 좋으셨습니까?"
"으응. 정말……, 좋았어요."
그는 이번엔 섣불리 독점으로 만나자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음 번에도 같은 자리에 꼭 불러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그 얘기를 받아들였다. 다른 남자들이 있어서인지 저번과 같이 너무 흥분해서 혼자 사정해 버리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그의 물건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고.
리안느 소위는 눈부신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쭈뼛거리며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래서 외모와 다르게 여자를 잘 만나지 못했는데, 안티오페타 소령이 아끼는 후배라 이번 기회에 거의 끌고 오다시피 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도 물어보았다.
"리안느 소위는 어땠어요? 좀 괜찮았나요?"
"……네."
"그거 다행이네요. 저도 꽤 좋았답니다."
여자와 거의 못 만난다고 들었는데 그의 에스트라는 차분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체질 탓인 듯 하다. 성격 때문에 여자를 못 만난다기보다 아마 체질적으로 별 필요성을 못 느껴서가 아닐까. 안티오페타 소령의 행동은 단순히 기우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도 미인은 미인이었으므로 관계를 갖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나는 에르나트 중위에게 한 것처럼 그에게도 다음 번 기회가 생기면 와 달라고 권유했다.
안티오페타 소령은 확실히 능숙했고 여자를 많이 만나 봐서 그런지 매너도 좋았다. 가운에 시선을 주자마자 그가 그것을 집어 건넸다. 나는 옷을 걸치고, 남자들에게 간단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너무 인원수가 많으면 끝나고 나서 기진맥진하게 된다. 동시에 여러 남자를 만날 때는 서너 명 정도, 많아야 다섯 명을 넘지 않는 편이 좋겠다. 하인들이 손님을 배웅하는 동안 나는 몸을 씻고 간식을 먹으며 나른한 시간을 보냈다.
'조금……, 체력이 늘어난 것 같은데.'
예전이었다면 세 명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끝나기도 전에 뻗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전반적인 체력이 크게 늘어난 것이 아님에도 최근에는 섹스 뒤에 기절하듯 잠드는 일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도 마력의 영향일까.
어쨌든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에이반도 칼도 내가 행위를 끝내자마자 바로 잠들어 버리는 것을 늘 아쉬워했기 때문이었다.
*
아스벨과의 약혼 파티 당일이었다.
파티는 많은 남자들과 몇몇 여자들로 이루어졌는데, 젊은 남자들은 거의가 아스벨의 친구였다. 파티 초반부터 잘 차려입고 등장한 재상 카스칼이 내가 아르트리어 대령의 약혼녀임을 유독 강조하며 나와 자기 아들의 공식적인 약혼을 발표했으며 아스벨은 기다렸다는 듯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링 자체는 얇은 편이었으나 백금 링 중심부에 단단히 박힌 다이아몬드의 알은 매우 큼지막했다.
에이반의 것이 중지, 종부인 칼의 것이 엄지에 끼워진 상태에서 아스벨과의 약혼 반지는 약지에 추가되었다. 원래는 검지손가락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그러기에는 알이 두꺼워서 취미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빼 놓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적당히 그가 위치를 타협한 것이다.
파티는 꽤 유쾌하고 즐거웠다. 특히 아스벨의 남자 친구들은 다들 성격이 좋고 붙임성이 있었다. 파티 말미에는 재상 카스칼이 약혼 선물 발표를 했다. 아들인 아스벨이 아니라 바로 내게, 수도의 저택 한 채를 선물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다들 환호하며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은 선물에는 뒷 이야기가 존재했다.
듣자 하니 아스벨은 예전부터 꾸준히 집에서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모양이었다. 특히 자신의 집이 없다는 이유로 한 때 나를 양도받지 못했던 그 사건 이후로는 고집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아직 아들의 독립을 원치 않았던 재상은 아들 본인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운 저택을 선물하면서, 아들이 완전히 손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랬다. 새로 만들어진다는 그 저택은 무척이나 재상의 저택과 가까웠다. 거의 이웃의 이웃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아들에게 직접 선물할 경우 속셈이 뻔히 보인다고 내팽개쳐질 것이 뻔하므로 내게 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아직 그 저택은 현존하지 않았다. 재상이 내게 선물한 저택은 지금 한창 뼈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아마 전부 지어질 때까지 2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앞으로 최소 2년간 아스벨은 집에서 출퇴근을 해야겠네.'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집 한 채를 통째로 선물받았으니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곳곳에 보기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화려한 장식들과 분수처럼 꾸며진 샴페인 바가 있는 파티장에서 아스벨의 친구들은 차례로 나를 축하하러 내게 다가왔다. 그 중에는 지금 사귀는 여자를 함께 데려 온 남자들도 꽤 있었다. 몇몇은 단지 공짜 파티에 참석하러 온 것 같지만 몇몇은 대놓고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들은 몇 가지 재미난 얘기를 해 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최근 별로 좋지 않은 쪽으로 유명해진 쥬브니에 부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평소 짝사랑하던 아르트리어 대령이 다른 여자를 후원 대상으로 들였다는 말에 그녀가 남편을 앞세워 저택으로 찾아가 다짜고짜 난동을 부린 사건은 당시 아르트리어 대령 본인과 세이모어 중령 사이에서만 마찰을 일으키고 끝이 났기 때문에 사실상 묻힌 얘기나 다름없었다. 고작해야 비슷한 부서의 남자들 사이에서나 떠돌던 얘기였다. 그 일에 관한 소문이 재조명된 것은 의외로 나와 아스벨의 약혼 파티 얘기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 아스벨의 친구 중 대부분이 군인이었으므로 그 얘기를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라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그 사건은 해당 남자들이 사귀는 여자들에게로 퍼지고, 자연스레 여자들 사이에서도 무척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남자가 그녀의 짝사랑에 응하기는커녕 일절 관심도 두지 않고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배경도 비웃음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한테서 남자랑 관련된 폭언을 들어 너무 당황한데다가 무척 화까지 나서 그녀가 정말 미웠었어.'
막상 지금 와서는 웃음거리가 되어 집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그녀를 보니 약간 안됐다고 여길 법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당시 힘도 권력도 없던 신인 여성인 나로서는 언어 폭력을 당한 억울함을 풀 곳도 없었는데다가 에이반조차 엘리시온 남녀의 입장차 때문에 그녀를 어찌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쥬브니에 부인 건은 그렇다 쳐도, 나는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기차게 꺼내 놓는 가십거리들에 적당히 응해 주다가 문득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재밌긴 한데 계속 낯선 사람들만 만났더니 피곤하네. 키셸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세리아는 애인 중 하나를 데리고 참석해서 중반부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키셸은 복잡한 자리를 싫어한다고 애초부터 참석에 약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역시 오지 않은 모양이다. 과거 유명한 친목회에 참석했을 때 만났던 여자들은 의외로 이번 파티에는 거의 초대받지 못했는데, 초대장을 돌리는 경로가 전적으로 아스벨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아스벨은 내게 초대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는지 물어보고, 그 몇 장 외의 남은 초대장 전부를 자기 친구들에게 돌렸다. 젊은 아스벨의 친구들이라고 해 봤자 혈통은 좋아도 너무 어려 한 자리 차지하지는 못한 신입들 뿐이고 그들의 여자친구도 신인 중 신인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나한테야 편안한 자리이긴 한데…….'
다들 너무 어려서 기운이 넘치는데다가 대화 내용이 극히 가벼웠다. 조금 피곤해서 잠깐 반응 속도가 느려졌을 뿐인데 친구와 대화하며 나를 힐끔대던 아스벨이 곧장 나에게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이나, 피곤해?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군."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놀기 좋은 시간……, 아얏!"
옆에 있던 눈치 없는 친구가 촐싹대며 말하다가 다른 친구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곧 밤이 너무 늦었다는 동의가 쏟아졌다. 아스벨은 놀고 싶은 녀석은 더 놀다 가라고 말한 뒤, 당당하게 나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왔다.
재상 카스칼의 저택에서 열린 그 아들을 위한 약혼 파티는 최근 별 대단한 일이 없던 수도 내에서 가장 호화로운 행사였다고, 이후 거의 2주간은 그 일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파티 덕에 수도의 여자 지인들도 몇 명 생겼다. 나는 2주에 한 번가량은 초대받은 친목회 중 한 곳에 참여했고 한 달에 한 번은 번갈아 가며 주최하는 키셸과 세리아의 친목회에 꼭 나갔다.
최근에는 내가 주최해서 친목회를 열기도 했는데, 약혼 파티 때 이것저것 많이 봐 둔 것이 도움이 됐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나는 3계급 스칼라 시험을 위해 조금씩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 많이는 아니고 틈날 때마다 조금씩 책을 훑어 보는 게 전부였다. 에이반의 말에 따르면 이대로라면 3계급 시험을 통과하는 것보다 2계급 자격요건을 충족시키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하는데, 시험을 치지 않더라도 사회 공부를 미리 해 두는 것은 정식 엘리시온의 일원으로서 나쁠 것 없지 않나 싶다.
'내년쯤에는 그림 배우는 걸 잠시 쉬고 다시 공부해 집중해 볼까 싶은데. 충분히 쉬었으니까 말야.'
그리고 디베르타의 그림 반에서 그리고 있는 풍경화도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조만간 남편을 따라 칼리온에 한 번쯤 더 다녀오며 칼리온 저택의 내 방에 걸어 놓을 생각이었다. 칼리온 여행이라. 다시 한 번 기대된다. 이번에는 정신이 없어 전에 보지 못했던 칼리온 건물을 구경시켜 달라고 할 생각이다.
한 가지 고민이 있는데, 아스벨의 친구들 일이었다. 약혼 파티에서 나를 만난 이후로 아스벨의 친구 중 몇몇이 그를 통해 나를 꼭 소개받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스벨이 편지로 보낸 내용을 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의 친구라, 조금 껄끄럽기도 한데……. 으음, 어떡할까.'
엘리시온에서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작 아스벨도 별로 내켜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세 명이나 네 명 정도, 한 번에 같이 초대하면 껄끄러움이 덜할지도 모른다. 몇 가지 조건을 덧붙여 승낙한다는 뜻을 적다가, 나는 문득 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살풋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