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9)

***

그리고 텔루스의 날, 오후 4시 45분경, 나는 지연에게서 들은 건물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엔트런스 뒤쪽으로 몇 채 지어져 있는, 마치 별장 같이 생긴 독채 건물들 중 하나였다. 이것저것 행사에 쓰인다는 설명만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데 이렇게 사적인 친목회 행사에도 이용되는구나 싶어서 신기한 기분이었다.

건물 입구에는 백묵으로 쓴 듯한 게시판이 있었는데 아마도 친목회 소식인 듯 했다.

[켄틴 님이 주최하는 여성 친목회. 입장 조건은 4계급 이하, 5계급 이상. 이번 달 셋째 주 텔루스의 날 오후 5시 경 개최.]

'주말에는 남자랑 약속을 잡아야 하니까 여자끼리는 그냥 평일 저녁에 모이는 건가.'

평일에 노동하는 것은 남성이었고 여성들은 항상 여유가 있었으니까. 조금 이른 시각이지만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방에서 나왔더니 아직 시작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지연이 오기 전에 먼저 안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서 얘기할 수 있는 좁은 원형 테이블이 군데군데 비치되어 있었고 그다지 앉기에 편해 보이진 않지만 스툴과 소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주로 음료, 그리고 간단히 집어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가 마련되어 있으며 옆의 뷔페 테이블에는 저녁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입맛이 당기는 메뉴들이 꽤 넉넉하게 차려졌다. 아직 친목회 시작 전이라 그런지 음료들과 음식 쟁반 위에는 뚜껑이 덮혀 있었다.

먼저 도착한 여자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홀의 절반 정도는 찬 것 같다. 그들은 친목회에 대한 기대로 웅성거리면서 저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켄틴 님께서 오늘은 참석하실까?"

"글쎄, 모르겠어. 하지만 미란 님과 캐리 님께서는 두 분 다 참석하실 거야."

'미란?'

한국인 같은 이름이라 살짝 흥미가 생겼다. 그보다 주최자라는 사람이 정작 본인은 참석을 하지 않는다니. 그것 역시 뜻밖의 정보다. 세 명 정도의 여자들이 모인 테이블에선 누군가의 험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익숙한 이름에 한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그녀들이 얘기하는 험담의 대상자는 '유리나'. 내 이름과 비슷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버렸다. 하지만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로 금세 흥미가 사라졌다.

"유리나 그 계집애, 이번엔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았어? 어딜 건드릴 남자가 없어서 켄틴님의 남편한테까지 꼬리를 쳐?"

"나 처음에 걔랑 몇 번 말을 섞어 봤는데 말야, 얘기하는 걸 들어 보면 조금 이상해. 도벽 기질도 있는 것 같고."

그 중 한 명이 살짝 소리를 낮춰 말했다.

"언젠가 그 못된 버릇 때문에 아주 호되게 당할 거야! 내가 장담해!"

"걔 때문에 울던 신입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니? 기껏 여기 와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들이 죄다 우르르 그 계집애 얼굴에 넘어갔으니……, 불쌍해 죽겠어."

"켄틴님의 그 셋째 남편 말야, 솔직히 말해서 젊은 애들이 보기에 그렇게 잘생기거나 매력적이진 않잖아? 켄틴 님의 남편 치고 그렇게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남의 남자이기까지. 솔직히 말해서 전혀 수고를 들여 가며 꼬실 이유가 없는 상대잖아. 그 계집앤 저렴하게 생겨서는 인기도 쓸데없이 많아서 자기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젊고 괜찮은 미혼 남잘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 애. 일부러 켄틴님을 도발하려고 남편 중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쪽을 노린 것 같아. 별 일 없었으니 망정이지 원……."

켄틴 님이라면 이 행사를 주최한 사람 아닌가? 상당히 영향력이 큰 것 같던데 그런 사람의 남편을 고의로 유혹하려고 시도했다라……. 꽤나 큰 일이 벌어질 뻔 했던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유혹은 실패한 것 같다.

"아, 언니! 일찍 도착하셨네요!"

그 때 지연이 나를 발견하고 작게 외쳤다. 그녀도 10분이상 먼저 도착해서 안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5시 정각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테이블 위의 유리 뚜껑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다. 디베르타에서 제공되는 식사보다 조금 더 호화로운 음식들이 차근차근 오픈되었다. 맛있는 음식도 파티의 재미 중 하나. 그녀는 들떠서 나를 잡아끌고 테이블 앞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누군가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왔네, 한지영? 그리고 새로 왔다는, 그, 유이나……, 랬나?"

차콜 그레이 색상의 디베르타 제복을 입고 똑같은 어깨끈 부분에 색이 들어간 끈 장식을 단 두 명의 여자였다. 하나는 붉은 시나몬 색 머리를 작은 연녹색 스톤이 달린 핀으로 장식했는데, 가슴 위 길이쯤 자연스레 흐트러지도록 곡선을 가미하여 말았다. 하나는 검푸른 색 머리였는데 앞머리가 짧았고 뒷머리는 바짝 묶어서 쪽진 것처럼 빚어 부정형의 쌀알만한 진주가 달린 끈으로 몇 번 감았다.

'한지영?'

일부러인지 아니면 발음이 익숙치 않아서인지 지연이의 이름을 조금 틀린 것 같다. 뭐 각자 다른 언어권 출신이니까, 복잡한 이름도 능숙하게 발음하여 불러 주는 여자들이 있고 아주 쉬운 이름도 제대로 발음을 못 하는 여자들이 있다. 모국의 언어구조가 서로 비슷한지 아닌지의 차이로, 어느 정도의 실수는 넘어가 줄 만 하다.

붉은 머리 여자가 나와서 나를 향해 반갑다는 듯 말했다.

"미리안이라고 해. 이 쪽은 캐리. 우리가 한지영에게 널 초대해 달라고 부탁했어."

아까 얼핏 들었던 미란과 캐리라는 여자가 이 둘이었나 보다. 미란이라고 잘못 들었는데 본래 이름은 미리안인 것이다. 실제로 딱 봐도 한국인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제각기 다른 나라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저마다 자기 식대로 달리 발음하니, 단순한 이름을 가진 경우가 아니면 헷갈리기 일쑤였다.

"저기, 그 애는 한지영이 아니라 한지연……."

"그래, 한지영. 한지영 맞지?"

별 의미를 담지 않고 대충 되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발음 정정하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캐리라는 여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나섰다.

"유이나, 이번 분기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후원받았다가 얼마 전에 디베르타로 돌아온 케이스지?"

"어, 그게……."

"다 알거든. 디베르타에서는 후원유무에 대해 남들에게 언급하지 말라고 하지만, 거주 등록은 되어 있으면서 실제로 방을 쓰지는 않고, 다른 지역 디베르타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라면 뻔하지. 이 좁은 바닥에서 누가 후원을 받는지, 몇 년차 된 여자들은 다 알아. 모르는 건 여기 온 지 일이 년 남짓 되는 젊은 애들 뿐야."

지연이도 처음 듣는 말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랬었구나……."

"그렇다고 딱히 널 차별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여기 여자들은 다 똑같은 계급이니까 말야. 그냥 확인차 물어 본 거니 신경쓰지 마."

캐리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끝맺었다. 미리안이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지연에게 말했다.

"한지영? 저 쪽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여자들이 있거든. 너랑 비슷한 신입이니까 가서 인사라도 나눠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천천히 말야. 그리고 유이나,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만 따라와 줄래?"

그녀는 부드러워 보이는 말씨로 종용했다. 별 수 없이 지연은 그녀가 가리킨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지연과 그녀들이 무사히 첫 인사를 나눈 시점에서 미리안은 그 쪽과 반대 방향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무리로 나를 데려갔다.

이 쪽 테이블에 모여 선 여자들은 하나같이 성숙하게 꾸민 타입의 여자들이었다.

"유이나 넌 아까 걔보다 나이도 좀 있어 보여서, 여기 애들과 말이 통할 것 같아서 말야."

"아, 네."

어차피 하위 계급의 친구들은 누구를 사귀어도 에이반이 못마땅해 할 테지만, 지금은 친목회에 초대받은 입장이고 하니 나는 흔쾌히 소개를 받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유이나라고 합니다. 한지연의 소개로 왔어요."

짙은 색 머리카락에 유독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나른한 눈매의 여자가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어머, 안녕. 난 이사와라고 해."

그녀 맞은 편에 서 있던, 이 중에서는 가장 키가 작지만 가장 긴 연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동안의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지연?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혹시 그 애도 신입이야?"

"아, 저 쪽의 검은 색 단발을 한 여자애에요."

"흐응.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하긴 켄틴 님의 친목회는 누구나 가입 가능한 곳이니까."

그녀는 살짝 타인을 깔아보듯 얘기하고선, 지연이에 대한 일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나를 똑바로 보고 질문했다. 아까보다 훨씬 톤이 높아진 목소리였다.

"그보다 네 소개를 좀 더 해 봐. 만나는 남자는 몇 명 정도 있어?"

"세 명, 인데요……."

"셋? 너 신입이었지? 1년 미만인데 셋이면 그렇게 적진 않지만……, 그래도 너 정도면 훨씬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걸? 앞으로 친목회 같은 데 적극적으로 다니다 보면 아마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는 거뜬히 가능할 거야!"

키가 작은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가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난처한 미소만 보였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남자를 소개받기 위해서 친목회를 돌아다닐 생각도, 애인을 당장 열에서 스물씩이나 거느릴 생각도 없다. 그녀는 이 자리의 여자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대신 소개했다.

"티아는 우리 중에서 제일 만나는 남자가 많아. 지금 열두 명이야."

아까부터 별 말 없이 서 있던 금갈색 머리의 여자 이름이 티아인가 보다. 그녀는 자기에 대한 소개가 나오자 냉큼 대답했다. 전반적으로 늘씬하고 길쭉하게 생겨 시원스러운 분위기의 여자다. 꽤 값나가 보이는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흥, 지금은 열한 명이야. 하지만 곧 열두 명으로 다시 복구될 것 같긴 해."

"쟨 싫증을 잘 내서 그런지 금방금방 만나는 남자가 바뀐다니까. 헤이지는 딱 일곱 명. 당분간은 늘릴 생각 없다나 봐. 맘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말야."

헤이지라고 불린 여자는 인상이 옅은 편이었는데 정말 영양기 없어 보이는 밝은 금발머리를 등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머리가 굉장히 곱슬거려서 마치 양털 덩어리처럼 보였다. 신기했지만 쉽게 빗질하기는 힘들 것 같다. 대신 혈색이 꽤 좋고 몸매도 이 중에서 가장 육감적이었다.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녀가 대답했다.

"난 플라마의 날만 빼고 한 명씩 만나고 있어."

"기왕 하는 거 여덟 명으로 꽉 채우면 좋잖아? 그리고 이사와, 여기 이사와도 일곱 명으로 헤이지와 같지."

처음 자기 이름을 이사와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맞아, 일곱 명."

"아, 그거 알아? 이사와 남편이 셋인데, 그 중 한 명이 3계급 남자인 거?"

"3계급이요?"

나는 만성적으로 대꾸했지만 그녀는 내가 흥미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신이 나서 말했다.

"운이 좋으면 이사와한테 3계급 남자를 소개받을 수도 있어. 헤이지도 한 번 소개받은 적 있고. ……잘 되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게 굉장히 특별한 일인 것처럼 얘기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편 중 한 명만 3계급인가요?"

"정말, 딱 한 명은 좀 애매하지? 그치만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는 거라면 이사와가 애초에 여기 모임에 없었겠지. 아마 저 위에서 잘 차려입고 거만하게 잘난 체 하는 3계급 아줌마들 친목파티에 가 있지 않을까?"

"……저기."

이사와가 그녀의 말에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자진해서 설명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내 남편은 친구도 없고 직급도 거의 말단이라 그런 식으로 다른 남편들까지 줄줄이 소개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을 뿐이야. 난 딱히 상관 없어. 소개받을 기회가 많았더라도 아마 잘 되지는 않았을 걸. 3계급 남자들은 여자 볼 때 되게 이것저것 까다롭게 따져대거든. 그런 남자랑 잘 돼 봤자 피곤해……. 결혼해 봤자 얻을 거라곤 명예밖에 없잖아. 금전적 실속은 4계급 남자 쪽이 훨씬 나아. 기분에 따라 이것저것 비싼 물건도 잘 사 주고."

"어머, 얘 하는 말 좀 봐. 우리한테는 잘난 체로밖에 안 들리거든요. 그치!"

키 작은 여자 쪽이 키득거리며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그런가요? 저는 3계급 남자는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어! 없어? 한 명도 소개 못 받았어?"

"소개요?"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녀가 놀라서 외치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피후원자였지 않아? 아닌가? 하지만 이 시기에 갑자기 친목회에 들어오다니, 영락없이 후원받다가 들어온 앤줄 알았어."

"네……, 맞아요. 저 후원 받았어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까 부정하려고 해도 힘들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역시 그렇지? 내 예상이 맞았어! 으으, 너무 궁금하지만 후원자가 누군지에 대해선 안 물을게. 그건 진짜 말하면 곤란하거든. 흐음, 그런데 3계급 남자를 한 명도 소개 못 받았단 말야? 소개 받았는데 실패한 게 아니라?"

"네, 스칼라 계급 남자는 한 번도 소개를 못 받았던 것 같아요. 아, 그렇지만 받았는데 제가 모르는 걸지도."

내가 처음 소개받았던 남자, 세리스 에르나트가 3계급이었던가 2계급이었던가? 단순히 에이반의 후배라고만 들었을 뿐 계급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질을 못 들었다. 같은 수도 방위군 소속이니까 2계급일까? 직급이 낮으니 3계급 정도 되려나? 디트리히는 확실히 2계급일 테고…….

그녀는 그 말에 깔깔 웃었다.

"뭐야! 너도 참 재밌는 애구나! 그런 건 초면부터 낯 가리지 말고 확실히 물어봐야지! 계급이 뭐고 어디서 일하는지 같은 것!"

"으음."

"마지막으로 나는 에이브릴, 만나는 남자는 아홉 명이야. 빨리 남들한테 열 명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싶으니까 기회 되면 '부탁'할게."

"너도 참. 신입한테 먼저 소개를 해 주지는 못할 망정."

아까부터 신나게 떠들어대던 연갈색 머리의 가장 키가 작은 여자가 에이브릴. 이걸로 모두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이 모임의 공통점에 대해 입에 올렸다.

"이 테이블 여자들은 적어도 한 명씩은 4계급 이상 남편이 있거든, 그게 공통점이야."

"와, 그럼 여러분들 모두 5계급이 아니라 4계급인 거네요."

나는 감탄했다. 겉보기로는 차이가 나지 않아서 몰랐다. 입은 옷 색도 똑같이 잿빛이고.

"여자들은 어차피 똑같아. 5계급이나 4계급이나. 차이가 있다면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돈이 꽤 드는 구역에서 놀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 미리안이 너를 우리한테 소개시켜 줬다는 건, 너한테도 돈 많은 애인이 있다는 뜻인 거지? 아니면 우리가 소개시켜 줘야 하는 입장인 거야?"

"잘 모르겠어요. 다들 어떤 식으로 노는지 몰라서. 하지만 만나는 사람한테서 매달 용돈은 받고 있어요. 이번에 결혼하게 되면 더 많이 받을 것 같고요."

"아직 1년차도 안 됐는데 벌써 결혼 상대가 있어? 대단하네! 얼마씩 받아?"

"에이브릴, 그런 걸 너무 꼬치꼬치 묻는 것도 실례야."

이사와가 그녀의 질문을 막아 주었다.

"미리안이 소개시켜 줬을 정도면 적당히 넉넉하게 받고 있겠지. 그보다 말 편하게 해. 그녀에게서 소개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턴 친하게 지내야지. 이사와라고 불러."

"알겠, 어……. 이사와."

몇 달 먼저 태어났어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쓰는 곳에서 왔더니 나보다 적어도 한두 살 이상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들에게 당장 말을 놓기가 어색했지만 그들끼리도 최대 서너 살씩은 차이가 나 보이는데 편히 얘기하고 있었다. 거절했다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은 네 명 말고도 다른 여자들과 잠깐씩 얘기를 나누도록 나를 데리고 다니며 소개해 주었다.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서 이름도 얼굴도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오늘은 소개만으로 친목회가 끝나 버렸다. 심도 깊은 얘기 같은 건 나누지도 못했다.

이사와는 일찌감치 돌아갔고 말을 많이 했던 에이브릴도 슬슬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아홉 시네. 나 슬슬 들어가 볼게. 남자가 있는 사교회라면 새벽까지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여긴 여자 뿐이고. 아, 유이나 너는 더 있고 싶으면 있어도 돼. 열 시까지 하거든."

"으응, 아냐. 나도 피곤해서 슬슬 들어가 보려고."

그렇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지연이는 이미 돌아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슬슬 사람들이 빠져서 처음의 절반 정도로 줄어 있다. 티아와 헤이지는 파할 때까지 머무를 생각인가 보다. 나는 에이브릴 곁에서 슬쩍 묻어가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것저것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긴 했지만 역시 네 시간 넘게 서 있다 보니 피곤했다. 앉아 있는 사람도 많았는데 먼저 찾아가서 얘기를 나누려면 서서 돌아다녀야 하니까. 친목회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열리는데 입소문을 듣거나 아니면 건물에 공지된 날짜를 확인하고 참석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음 번에는 사람 소개 같은 것보다 유용한 얘기들을 좀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연이에게 들었는데, 친목회 날은 내가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미처 말을 못 걸었다고 했다. 그녀의 표현으로는 '무서워' 보이는 언니들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고.

"그래? 하긴, 조금 그런 기질이 없지는 않네."

다들 나름대로 개성이 강하고 눈에 띄는 분위기였으니까, 쉽게 말 걸기가 꺼려질 수도 있겠다. 지구, 한국에서였다면 멀리서부터 피했을 이미지의 여자들이었다. 우월한 환경과 금전상태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타인을 압도하는 자신감 때문이다. 자칫 밉보이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 여기서 오래 살다 보면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지연이 너는 어땠는데? 미리안이라는 사람이 또래 친구들을 소개시켜 줬잖아. 재밌었어?"

"어……, 언어의 장벽 때문인지 대화가 그렇게 잘 통하진 않았지만 불편하진 않았어요. 안 그래도 저는 말수가 없는 편이고."

"말이 서툴렀다는 뜻이야?"

"네, 그 애들 전부 초급반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것저것 알려줘야 했어요."

그럼 나중에는 꽤 친해질지도 모르겠네. 내가 남자들과의 약속 등으로 자리에 없을 때마다 그녀는 혼자 쓸쓸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평일날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를 반겼다. 그런 점에서 보면 놀 상대가 나 외에도 많아져서 다행인 셈이다. 뭐 요즘에는 그녀도 사귀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주말마다 바빠 보이긴 했다.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 전에 봤던 애인과는 주말에만 만나? 직업이 뭐길래?"

"지스테는 극단 소속이에요. 악기 연주도 엄청 잘 해서 극의 중간마다 만돌라를 연주하는데, 워낙 인기가 많아 꽤 자주 팬레터를 받아요. 나중에는 자기가 극단을 창설해서 세계 각국을 돌며 공연하는 게 꿈이래요."

그 남자 이름이 지스테인 것 같다. 직업은 배우 겸 음악가인가 보네. 그 직종에 대해서는 꽤나 조예가 얕아서 시시한 질문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음……, 애인이 연주해 주는 곡을 들어 본 적 있겠네? 좋겠다! 멋있었어?"

"아뇨, 저도 들어 보는 싶지만 곤돌라같은 중형 악기는 디베르타에 쉽게 반입되는 게 아니래요. 하지만 목소리는 멋있어서 저한테 노래를 불러 준 적은 있어요. 엄청 좋았어요. 지금 유행하는 극중에 나오는 노래라던데."

목소리라, 그 남자가 어떤 목소리였더라? 사실 첫날 잠깐 보긴 했지만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건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무난한 사람이었다는 분위기 정도? 워낙 짧은 시간에 얼핏 스치듯 봐서 그런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 나는 그냥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오전 수업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지연이에게 안 쓰는 화장수나 향수 같은 걸 보여주고 마음에 든다면 몇 개 정도 선물할 생각으로 그녀를 방으로 초대했다. 아스벨이 한창 여성용 화장품을 세트로 선물한 적 있는데 같은 물건이 향이나 색깔만 다른 것으로 여러 개였기 때문에 어떤 것은 손도 대 보지 못했다. 전과 다르게 잘 보이고 싶은 애인이 생겨서인지 그녀도 가벼운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내 방이 있는 건물 앞에서 묘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글쎄, 단순한 주소 오류라니까! 내 이름이고, 나한테 전달되는 게 맞대도?"

"하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우편물이란 말이에요.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틀림없는 본인인지 확인을……."

"본인이 본인 맞다잖아? 뭘 더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데!"

윤기나는 붉은 긴 머리가 눈에 띄는 여자와 우편물 전달을 담당하는 모자 쓴 소년종 한 명이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붉은 색과 황금색 직인이 찍힌 꽤나 화려한 편지봉투였다. 저런 디자인의 편지 봉투,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왕궁 인장이 찍힌 봉투 아냐? 혹시 궁정 사교회 초대장일까?"

"어머머, 정말이야? 5계급 숙소 지역에도 저런 대단한 초대장이 오는구나. 그나저나 뭐 때문에 이렇게 소란이래?"

여자들이 점차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자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한껏 짜증을 냈다.

"이것 봐! 사람들이 다 보잖아, 어떡할 거야!"

"아으……, 저, 그게……. 관리소에서 다시 한 번 맞는지 확인하고 보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급하다니깐!!"

여자가 언성을 높이자 저 멀리서 소년종의 친구인 듯한 소년이 달려왔다.

"야-, 세오, 잠깐 나 좀 도와 줘."

"무슨 일이길래 그래?"

"여기 편지에 쓰인 주소로 갔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문패도 비어 있고. 그래서 다시 확인하고 오려는데 저 분이 갑자기 자기 이름으로 온 편지라면서……."

"어디 봐봐."

소년이 친구에게 편지 뒷면을 보여주었다. 그 소년이 유심히 봉투 겉면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703호 유리나? 아니, 유이나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데……?"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던 나와 지연이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연이가 더 흥분해서 외쳤다.

"언니 편지 아니에요?"

"703호라면 내 방 맞을 텐데."

"빨리 그 편지는 언니 거라고 말해 봐요, 뺏기겠어요!"

아니, 아마도 뺏기진 않겠지만……. 저 여자도, 자기 것이 아닌 편지를 굳이 가져가진 않을 테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모여 서서 쳐다보고 있는 화제의 한가운데로 쭈뼛대며 걸어갔다. 소년종 두 명이 당황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 여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내게 경고를 날렸지만, 나는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저기, 703호의 유이나라면 난데……."

"정말이죠? 이번엔 진짜인 거죠?"

소년이 재빨리 확인을 받아냈다.

"나는 얼마 전에 이사를 와서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아직 못 받았어. 이 건물 703호 맞지?"

"맞는 것 같긴 한데……. 으음,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정확한 확인을 위해 관리소까지 동행해 주세요."

"알았어."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유리나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여자는 분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소년종 둘이 미심쩍은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는데도, 당당하게 나를 손가락질했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 이름을 똑바로 적든가!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시간 낭비니?"

"……?"

지금 이게 내 잘못인 건가? 나는 그녀가 화를 벌컥 내며 모르는 언어로 욕을 퍼붓다가 홱 돌아나가는 모습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답도 못 했는데 지연이 대신 소리쳤다.

"대체 뭐에요? 자기가 먼저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붙여 놓고! 이름이 헷갈리게 쓰여진 게 언니 탓도 아닌데, 흥!"

동감이었다. 이름이 비슷해서 오해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보통 틀린 주소로 배달된 편지를 저렇게까지 기를 써 가며 자기 물건이라고 우기지는 않을 텐데. 이름이 같은데도 주소가 다르면 보통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 참, 그럼 그렇지. 또 유리나 쟤야?"

그 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심하다는 중얼거림이 터져나왔다. 한 여자가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전에도 남의 우편함에 걸쳐져 있던 편지를 멋대로 꺼내 가서 문제 일으켰던 애지? 우편함에 자물쇠를 괜히 걸어 놓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이번엔 큰 일 아니라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게 말야, 그건 꽤 구하기 힘든 사교회 초대장이라서……."

사람들의 소근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소년종을 따라 관리실로 향했다. 지연이 내 뒤를 따라왔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칼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결혼 서류가 승인되었으며, 어제 다시 레마슬레이그에 도착했다. 관련 내용을 나에게도 한 차례 확인시켜 주고 싶다. 이제 결혼 반지도 슬슬 주문해야 하니, 세공사도 함께 초대하겠다. 괜찮은 날짜와 시간을 알려 주면 그 날 사람을 보내겠다.

벌써? 거의 한 달은 걸린다더니 엄청 일이 빨리 해결된 모양이네.

"별 대단한 내용도 없는 편지인데 괜히 소동만 겪었네……."

"누가 보낸 건데요?"

지연이가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했다.

"남편이 보낸 편지야. 결혼 서류가 통과되었다는 내용이랑, 다음에 언제 시간이 되는지 같은 거."

"으음, 별 일도 아니네요. 봉투 때문에 엄청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남편은 일 관계로 레마슬레이그에 방문할 때마다 왕궁에서 머무르니까, 왕궁 직인이 사적인 편지에도 찍혀 있는 거겠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 그녀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왕궁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참동안이나 불필요한 일에 기력을 소모했을 뿐 아니라, 기껏 방으로 귀가했더니 벽을 타고 울리는 신음소리 같은 게 아까부터 계속 귀를 거슬리게 했다. 벽이 두꺼운 편이라 크고 선명하게 들리는 건 아니지만, 이건 명백히 옆 방 여자가 남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성행위를 벌이는 신음이었다.

'하필이면 이 때…….'

둘 다 신경이 쓰여서 어쩔 줄 몰라, 얘기는 흐지부지 끝났다. 향을 제대로 맡게 해 주지도 못하고 병 몇 개를 그녀에게 떠안겼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701호실일 옆 방과 맞닿은 벽을 노려보았다. 마냥 살 만하다고 생각했던 이 건물의 단점을 하나 깨달은 것 같다.

연합국은 8일을 한 주로 지정하고 있는데, 일주일의 첫 날부터 3일 일하고, 또 하루 쉬고, 다시 3일 일하고, 하루 쉬는 식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이틀이나 쉴 수 있는 노동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한 주에 두 개의 휴일은 단지 레바단 연합의 공무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각각 일주일의 4일째와 8일째인 라무스의 날과 모르스의 날. 이 중 라무스의 날이 교대용 휴일이다. 전체의 약 3할에서 4할 정도 되는 공무원들이 이 날에 쉬고 대신 모르스의 날에 출근한다. 아스벨도 그 중 하나였다.

'아스벨도 원래는 모르스의 날에 쉬다가, 나 때문에 일부러 휴일을 바꿨지. 하지만 이번 주는 특별 출근을 해야 해서 계속 못 만난다고……. 원래 이 날에 내가 뭘 했더라?'

아스벨과 만나기 전까지 라무스의 날은 온전히 내가 쉬는 요일이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해가 중천에 뜨면 하인에게 이젤을 나르게 해서 정원의 가장 경치 좋은 곳을 골라 그림을 그리고…….'

넓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아르트리어 저택의 정원에서 가장 경치가 좋고 시원한 그늘은 오직 내 차지였다.

하지만 디베르타로 온 뒤부터는 그런 취미생활에 제동이 걸렸다. 첫 번째로 햇살 좋은 날 경치가 괜찮은 곳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며, 디베르타의 특성상 그와 같은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야외에서 낯뜨거운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도 여자를 만나기 위해 어슬렁대는 한가한 남자들이 계속해서 곁에서 치근덕대기 때문이었다. 이젤이 무겁기 때문에 한 번 펴면 자리를 쉽게 피할 수도 없다.

그런 이유로, 기껏 가져온 그림도구들은 창고에 처박혀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오늘을 독서의 날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도서관에서 한참 하염없이 거닐다가 겨우 읽을 마음이 든 책을 한 권 대여했다. 도서관 내부에도 의자나 소파가 많았지만 기왕 날이 좋으니 정원에서 독서를 해 볼까 싶다.

도서관 뒤편의 정원은 다른 곳과 달리 탁 트인 잔디밭이었다. 가운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꽤 넓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몸을 어중간하게 가려 줄 구조물들이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 곳에서 음란한 짓을 하는 커플은 없었다.

나 말고도 주말의 독서를 즐기러 나온 여자들이 잔디밭 위에 숄을 깔고 그 옆에 점심으로 먹을 빵 따위를 내려놓은 뒤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적당히 서늘한 그늘 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머지않아 옆자리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찾아왔는데 책을 읽고 있는 내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약간 시끄럽게 떠들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긴 도서관 내부가 아니니까, 시끄럽게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따윈 적용되지 않는다.

그녀들은 안에 잼이 채워져 있는 둥근 쿠키를 나누어 먹으며, 거품이 올라온 갈색의 음료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자주 마시는 사과 소다였다. 사과 소다는 사과 주스, 사탕수수 즙, 약간 톡 쏘는 탄산이 들어간 서민들도 마실 수 있는 비교적 대중적인 간식이라고 들었다. 한 차례 고형물을 걸러낸 맑은 사과 소다는 무척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었고, 걸러내지 않은 탁한 사과 소다는 약간 텁텁하지만 맛이 훨씬 달고 진했다. 의외로 포만감도 있었고. 지금 내가 보는 것은 거르지 않은 소다였다. 저 거품이 의외로 맛있다.

그 때 갑자기 소란스럽던 정원 한 켠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한 여자가 여러 명의 예쁘장한 소년들을 이끌고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나와 그녀들이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소년 두 명이 잽싸게 뛰어가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제 2계급에 속하신 에오사 님께서 바로 이 그늘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싶어하십니다."

"뭐야? 그래서 지금 우리한테 비키란 거야?"

한 명이 반발했으나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다급하게 말렸다. 소년은 내게 와서도 뻔뻔하게 자리를 비켜 내라고 요구했다. 제 2계급이라고? 또야? 도대체가 계급 높은 여자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안하무인인지 모르겠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별 수 없이 자리를 깔아 놓은 실크 손수건과 책을 들고 그늘에서 나왔다.

소년들이 그늘 아래의 사람들을 전부 쫓아낸 다음 주변을 정리하고 나자 깔끔하고 조용해진 나무 밑 그늘로 여자는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다지 위엄있거나 나이들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소녀였다. 예쁘장한 얼굴이나 순수해 보이는 금발과 무척 잘 어울리는 파스텔 그린의 쉬폰 오버드레스를 붉은 계통 비단 제복 위로 걸친 그녀는 소년들이 푹신한 쿠션과 실크 차양막을 마련해 주자 그 위에 앉아 평온하게 낮잠을 청했다.

어차피 집중이 안 돼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황당하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쫓겨난 여자들은 아무도 그 부당함에 토를 달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도 다들 입조심을 하며 뒷말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유일하게 반발하려고 했던 그녀는 아직 여기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임이 분명하다. 그늘 밑을 나눠 쓰던 여러 여자들이 뒤늦게 온 한 명의 권위에 압도적으로 쓸려나가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처음으로 계급의 격차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내게 약속되어 있는 계급의 힘인데도 곁에서 관망하고 있자니 이렇게나 당혹스러운데, 앞으로도 쭉 5계급일 다른 여자들은 어떨까?

빌린 책을 들고 착잡한 심정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는데, 우편함 확인을 담당하는 레오가 나를 불렀다.

"유이나 님, 오늘 소포가 두 개나 도착했어요."

"소포?"

"네, 방금 전에."

그가 쟁반 위에 상자 하나와 꾸러미 하나를 얹어 내 앞으로 가져왔다. 나는 갈색 종이 꾸러미부터 열어 보았다. 아무 주소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꾸러미에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금속 패가 세 개 나왔다. 이 중 하나는 내 이름이 예쁘게 새겨진 문패였다. 레오는 자기가 달아 놓겠다고 말하며 문패를 받아챙겼다.

나머지 두 개는 문패와 모양이 현격히 달랐는데, 꽤 두께도 있었고 색도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레마슬레이그의 유이나라는 내 이름이 각인처럼 쓰여 있었다. 이걸 만든다고 며칠 전쯤에 내 마력 샘플을 가져간 적 있는데, 안에서 틀림없는 내 마력이 묘한 감각으로 증폭되어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읽어내는 거구나…….'

이거라면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큐스가 지나치게 멀어지면 어떨까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초대패의 윗부분에는 줄을 달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었는데, 나는 적당히 침실의 화장대 위를 뒤지다가 보라색 리본 하나씩을 꺼내서 묶어 놓았다. 이걸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이 항상 남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리본보다는 세련된 금줄 같은 것이 더 어울렸겠지만 미처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 다음, 천천히 큰 상자 소포를 풀어 보았다.

뻔하게도 이 풍성하고 빨간 새틴 리본은 아스벨의 선물이라는 의미. 내용물도 대강 짐작이 되었다. 겉포장을 열자 상자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먼저 편지를 읽어 보았다.

[사랑하는 이나에게. 저번 주 내내 너와 만날 오늘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만날 수 없게 되어서 너무 아쉬워. 그 대신으로 내 사랑만큼 달콤한 선물을 한번 더 보낼게. 이번에는 병에 든 사탕이야. 저번 주에 보냈던 초콜릿과 이 사탕 중 어느 쪽이 더 입에 달았는지 말해 줄래? 다음에 선물할 때 참고할게. 너의 아스가.]

이번 주 라무스의 날에 일이 생겨서 못 온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사탕? 와, 진짜네!"

나는 짧은 편지를 접어 넣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꽤 크다 생각했던 상자의 대부분은 푹신한 목화솜을 뭉쳐 만든 완충재였고 그 가운데에 크리스탈 병 가득히 사탕이 들어 있었다.

끈으로 라벨이 묶여 있는 투명한 병은 마치 보석처럼 표면이 커팅되어 있어 내용물의 색깔을 화려하게 반사시켰다. 흰색이나 옅게 색이 든 작은 알사탕들이 약 백알 정도 들어 있을까? 사탕보다 초콜릿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요즘은 간식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것으로나마 당을 보충하지 않으면 디베르타의 식사는 너무 단조롭단 말이지. 하지만……, 저번 주의 초콜릿이라고? 나는 레오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저번 주에 아스에게 초콜릿을 받은 적이 있던가?"

"초콜릿이 뭔가요?"

레오는 되려 눈을 빛내며 내게 질문했다. 하긴, 레오는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쉽게 길거리 문방구에서 초콜릿을 팔고 있는 세상도 아니잖아. 그 이상으로 나도 꽤 놀랐다.

"그러고 보면 저번 주에 아스가 무슨 선물을 보냈었지?"

"카스칼 소령님 이름으로는 2주 전의 실크 속옷이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그건 짐 속에 챙기지 않고 아르트리어 저택에 두고 왔고요."

그랬다. 이사 직전이라 기억났다. 끈에 진주 알이 장식된 흰 실크 속옷을 보냈는데, 예쁘긴 하지만 진주 장식이 배겨서 잘 때 입기에는 좀 그렇고, 디베르타에서는 정해진 제복만 입기 때문에 다른 속옷은 입을 일이 없어서 짐을 챙길 때 놔 두고 왔다. 그것 외에도 챙길 것들이 많았고 말이다.

원래 매주 한 번씩 선물을 보내는 사람인데 저번 주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레오는 벨에게도 물어보고 와서, 벨 역시 소포를 받은 적이 없다는 부분을 확인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스벨이 보내지 않고 깜박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도중에 분실된 소포였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초콜릿이면 아직 상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혹시나 해서 정말 선물을 보낸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짤막한 답장을 썼다. 답장에 내 초대패도 하나 동봉했다.

[정 바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라무스의 요일이 아니라도 좋으니 잠깐이라도 들러 줄 수 있을까? 동쪽 구역의 703호실. 퇴근 후 짧게라도 괜찮아. 다음 주까지는 너무 멀잖아…….]

내 쪽에서 보채는 듯한 편지는 처음 써 본다. 이걸 받은 아스벨이 어떻게 반응해 줄지 궁금했다. 라무스의 날에 만나기로 했다고 무조건 그 날만 그를 위해 써야 하는 것은 아닌데, 아스벨은 그런 부분에서 너무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저번에 받은 칼의 편지에 대한 답장도 함께 꺼냈다. 격식을 갖춰 쓰느라 고민하다가, 써 놓기만 하고 부치는 걸 깜박했다.

디베르타에서 편지를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덜 중요한 편지거나 가까운 곳의 심부름이라면 디베르타 소속의 소년종에게 팁 약간과 편지를 주고 전달을 부탁하면 되고, 중요한 편지라면 담당하는 우편 관리소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아스벨에게의 편지는 그렇다 쳐도, 칼에게 보내는 편지는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간단히는 보낼 수가 없다. 바깥의 우편 관리소에 가야만 한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리소는 대체로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 쉬는 날을 없애기 위해 한 주에 두 번 휴일을 만들고 교대로 휴일을 쓰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휴일이라는 핑계로 미룰 수도 없다.

'쉬는 날인데 외출하기 귀찮아…….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편지를 소년종에게 덜렁 맡기고 나몰라라 할 수도 없고.'

미적거리다가 결국은 일어났다. 한때는 장학금을 사수한다고 주말도 없이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마치 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것마냥 나태하게 늘어졌다.

"레오, 벨. 내 핸드백이랑 숄을 좀 가져올래."

편지를 봉한 다음 조그만 백에 넣고, 레오가 들고 온 숄을 걸쳤다. 외출은 자유였지만 간단한 외출계 작성은 필수였다. 엔트런스 근처에는 외출계 작성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초조한 얼굴의 지연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숄을 걸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언니? 외출하시는 거에요?"

"잠깐 편지 보낼 게 좀 있어서……."

"가드는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드?"

"같이 데려갈 가드가 있어야 시내로 나갈 수 있잖아요. 지금 신청해도 열흘은 지나야 가능할 텐데."

하지만 저번 주에 외출할 때는 그런 언급이 없었다. 외박계만 제출하고 끝이었다. 지연은 뒤늦게 생각났는지 앗, 하고 외쳤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마력을 쓸 수 있네요!"

마력을 아예 쓸 수 없는 여자들은 바깥에서 위험한 일을 당해도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드가 외출시 동행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제발 자기도 같이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나저나 외출할 때도 가드를 동행해야 한다니, 마침 시간이 있는 가드가 없으면 밖에 나가고 싶어도 계속 갇혀 있어야 하지 않나. 마력이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한 것 같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상관은 없는데……."

"정말요? 고마워요, 언니!"

대체 어디에 갈 생각이었을까? 그녀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나는 가드에게서 주의사항 몇 가지를 들었다. 둘이서 외출계를 함께 작성하고 바깥에서도 반드시 붙어다닐 것, 위험해지면 도움을 청할 것, 돌아올 때도 함께 돌아와서 무사귀환을 확인받을 것. 계속 붙어다니는 것이 조건이었다.

귀찮기는 했지만 그녀가 저렇게까지 절실하게 말하는 걸로 보아, 꽤나 중요한 일인 듯 했다.

디베르타 바깥으로 나와서야 지연이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작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극단 아반투르가 오늘 광장에서 깜짝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쩌면 지스테가 공연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저와 동행해 줄 가드가 없다 보니……."

"아반투르? 남자친구가 일한다는 극단이 거기야?"

"네!"

"그럼 편지 부치고 나서 공연하는 곳에 들러 보자. 우편 관리소 영업이 끝나기 전에 부쳐야 하거든."

그녀는 잔뜩 들떠서 남자친구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며 조잘거렸다. 내가 우편 관리소에서 편지를 부탁하는 내내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나는 관리소 직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오늘 광장에서 공연이 열린다는 얘기 혹시 아세요?"

"아? 아아! 물론 알지요!"

"혹시 몇 시에 공연하는지 들은 적 있나요?"

"2시라던가 3시라던가……. 아마 지금 서둘러 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왕궁으로 보내는 우편물이라면 보내는 사람의 신분도 확실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서류를 좀 작성해 주셔야겠습니다."

남편한테 편지 한 통 보내기 되게 힘드네. 이제는 결혼 서류가 통과되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남편이었다. 편지 내용도 간단했다. 이번 주말에 만나자는 것 뿐이었다.

내가 발송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지연이는 옆에 앉아 초조한 티를 다 내고 있었다. 차라리 극을 먼저 보러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그랬다간 오늘 안에 편지를 보내지 못할 것이다. 서둘러 서류를 작성하고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 우편 수수료를 지불한 뒤 광장으로 뛰다시피 향했다.

이미 레마슬레이그 수도 광장은 공짜 공연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극단 아반투르의 홍보를 위해 광장 한 켠에서 극의 일부를 공개적으로 상영하는 것 같았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인장 찍힌 광고지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은 오늘 오전 11시부터 두 시간,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지금이 3시 15분을 넘어가고 있었으니 약 45분 분량이 남은 셈이다.

무대 앞은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조금 멀리에 화단을 위한 돌담이 낮게 깔려 있다. 거기에 앉아 극을 끝까지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어떤 내용의 극인지는 처음부터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일종의 영웅담이 아닐까 싶다.

"지스테라고 했던가? 네 애인, 언제쯤 나온대? 아, 새로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악기를 들고 있는데, 저 사람인가?"

"언니도 참, 전에 봤잖아요. 저 사람하고 전혀 안 닮았어요."

극의 내용을 설명해 준 것은 지연이였다. 자기 남자친구가 나오지 않는 무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언제 연극이 끝나는지에만 집중한 채 내게 극의 줄거리를 대충 알려 주었다.

연극 제목은 영리한 농부 기사 이야기. 주인공은 가진 것 없는 페전트, 즉 5계급의 소작농이었지만, 한 소왕국의 아름다운 공주의 마음에 꼭 들어 그녀의 남편 중 하나가 된다.

"공주?"

"예전 왕국은 통치자가 따로 있었고, 그 통치자와 결혼한 여자가 공주라고 불렸대요."

"왕비나 여왕이 아니라?"

"아마 구왕정시대 배경일 텐데 그 때의 여자는 왕과 결혼해도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서 그렇대요. 왕과 동등한 위치보다 한 단계 낮게 본 거죠."

그런가. 어쨌든 지금의 레바단 연합에는 왕이 없었고 공주라는 호칭도 낯설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주는 이곳 여자들답지 않게 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힐끔힐끔 맨살이 틈새로 엿보이는 것이, 화려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몸을 많이 가리는 옷이다. 그리고 그 맨살로는 선명한 근육의 굴곡이 엿보였다.

"저 공주……, 남자 같은데?"

"당연하죠. 여자들은 취미로 연극을 할 뿐, 극단에서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자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여장을 시켜서 여자 역을 맡긴다는 얘기군. 얼굴만 봐서는 공주 역에 크게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미남인 배우였다. 다른 것보다 미남 배우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고 예쁜 척을 하며 여자 연기를 하는 모습이 제일 재미있었다.

다시 극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소왕국의 국왕을 포함하여 공주의 다른 남편들, 즉 대신들은 그 같은 하층민과 부인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무척 못마땅해 했기 때문에 그를 핍박한다. 아주 경멸하면서도 직접 손을 쓰지는 못하는 걸 보면 그 때도 남편을 들이고 말고는 전적으로 여자의 의사에만 달려 있었나 보다. 이 때 공주가 왕국 밖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그만 상위 마물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공주의 남편들은 차례차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다들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주인공. 소작농으로 마법 따위는 쓰는 법도 모르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거나 갖가지 기지를 발휘하여 마물들을 피하거나 물리치고 결국 공주를 구해내는 부분이 클라이막스였다.

공주를 훌륭히 구출한 주인공을 주변 남편들이 하나같이 인정하고, 그들의 축하 사이에서 공주와 단 둘이 포옹하며 막이 내렸다. 마물이 그렇게 적당한 함정과 꾀만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어째서 2계급 남성들이 그런 과중한 훈련을 새벽부터 밤까지 하며 군단을 꾸리고 매년 위험한 원정 토벌을 다니겠는가. 이제 겨우 엘리시온의 사회에 대해 터득해 가는 내가 보기에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 같지 않았으나 이야기는 어차피 이야기니까. 그럭저럭 극의 연출이나 음악 수준에 호평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도 뮤지컬은 TV로만 접한 게 전부였고…….'

엄청나게 감탄이 나올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유치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서 못 볼 정도도 아니었다. 나는 극이 완전히 끝나고 등장인물들이 사람들에게 인사와 홍보를 시작하자, 지연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어땠어, 남자친구는 나왔어?"

"아뇨……. 어쩌면 처음 부분에만 잠시 나왔는데 너무 늦어서 놓친 걸까요……."

"그래? 오늘 연극이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도 남자친구 본인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 입에서 들었다며? 이번 연극에는 본인이 안 나오니까 굳이 너한테 알려주지 않은 것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너무 아쉬워해서, 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임시 무대 앞으로 다가갔다. 극단 사람들은 분주하게 임시 무대를 철거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육질의 남자가 무대 장치를 감싼 천을 어깨에 이고 움직이며 외쳤다.

"어이쿠, 아가씨! 위험해요!"

"잠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워낙 다들 바빠 보여서 머뭇대며 말하자 극단 남자들은 생각보다 친절하게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묘하게 남자들의 시선이 숄 사이로 힐끗 보이는 내 가슴과 허벅지에 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혹시 여기 지스테라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요. 오늘 연극에는 출연을 안 한 건가요?"

"지스테?"

뜻밖의 이름인지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예 모르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어째서 그 이름이 나온 건지 이해를 못 해서 당황한 듯 싶었다.

"지스테는 우리 극단에서 나간지 2주가 넘었는데, 본인에게서 소식 못 들었습니까?"

그 말에 청천벽력을 맞은 것마냥 반응한 것은 저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연이었다. 그녀는 냅다 달려오더니 방금 그렇게 말한 단원에게 따지듯 물었다.

"극단에서 나갔다고요? 정말인가요?"

"아, 예. 나간지 보름 정도 됐죠. 뭣 때문에 그만뒀더라? 넌 기억해?"

남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만둔 당일 날에 단장이랑 조금 언성을 높였던 것 같은데, 내용은 못 들었어. 아, 그 녀석이 지금 일하는 곳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북쪽 상가의 세리마한이라는 주인이 운영하는 잡화상이에요."

감사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타박 타박, 기운 없어 보이는 발소리를 내며 지연이 내 몇 걸음 뒤를 따라왔다.

그가 일하는 곳은 알았지만,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연이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어떡할래?"

"저, 그 사람이랑 얘기해 봐야겠어요. 심지어 2주 전이면 저랑 만나기도 전인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아으, 아무래도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녀는 기어코 내게 부탁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고 있을게."

"고마워요……."

북쪽 대로를 쭉 따라가다 보니 하늘색 천막 아래에 물건 상자가 주르르 늘어서 있는 큰 잡화점이 보였다. 간판에 쓰인 글씨는 '세리마 한의 잡화점'. 그 남자들이 말했던 곳이 여기인 것 같았다.

대충 휘 둘러보았는데 물건만 많고 딱히 잡화점 점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없다. 계산대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계산원에게 말을 걸기가 난처했다. 일단 그 계산원은 지연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잡화점을 훑으며 빠르게 탐색하던 지연이가 반대쪽에 분명 직원들이 오가는 통로가 있을 거라고 말하며 어딘가로 뛰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뒤쫓았다.

"자, 빨리빨리 옮겨! 거기! 두 개씩 해서 언제 다 옮기려고 그래, 세 개씩 날라!"

사람들이 오가는 잡화점 입구 쪽과 반대로, 뒷문 근처에서 푸른 비단옷을 걸친 뚱뚱한 남자가 연신 이마에서 땀을 닦으며 아우카 짐마차에 물건을 나르는 일꾼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방향에서는 거지꼴에 가까운 작업복을 입고 땀투성이가 된 한 남자가 낑낑대며 옥수수 가루가 든 포대를 세 개씩 들어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저 남자가 지스테? 전에 봤던 것보다 왜소해 보였다. 옷을 저렇게 입고 있어서 그런가. 실제로 몇몇은 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으로 보아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노예인 것 같다.

지연은 자기 남자친구가 노예와 다름없는 입장에서, 마치 노예처럼 욕을 들어 먹으며 노동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잡화점에서 일한다고 해서 점원이나 계산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어딜 어떻게 봐도 급료만 받을 뿐 노예였다.

그나마 그는 다른 노예들과 달리 족쇄를 차지는 않았다.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멀쩡히 극단에 다니고 있었다고 하고.

잡화점 주인인 듯한 푸른 옷의 남자는 더워서 못 견디겠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일꾼들을 감시하다가 잠깐 쉬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더불어 일꾼들도 그의 욕을 하며 쉬엄쉬엄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연이는 바로 그 남자 앞으로 튀어나갔다. 짐을 옮기고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집중되었다.

"지스테!"

그녀의 외침에 지스테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갑자기 붉어지고 이번에는 먹빛이 되었다.

지스테는 까맣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부탁했다. 죄책감이 어린 말투였다.

"이것만 다 옮기고……, 뒷문으로 갈게."

"……."

"……여기서까지 잘릴 수는 없잖아."

그의 말을 보아, 극단 탈퇴는 그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뒤 잡화점 뒷문에서 둘은 얘기를 나누었다. 들을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간간히 지연이가 언성을 높이는 탓에 대충은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아반투르 극단의 공개 연극이 있다고 해서 보러 갔는데 너는 없고, 극단 사람 말로는 이미 2주 전에 그만뒀다고 하고……! 2주 전이면 나와 만나기도 전이었잖아!"

남자는 치부를 들킨 점이 참을 수 없는지 완전히 무너진 표정으로 변명했다.

"……이미 다 듣고 왔구나……."

"뭐? 그럼 당연히 다 알고 왔지! 뭘 더 숨길 생각이었어?!"

그는 이미 다 들켰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사정을 털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먼저 극단에서 쫓겨난 이유부터. 그의 말로는 연기도 음악도 더 잘 하는 신입이 들어와서, 라고는 하지만 그만두기 전에 단장과 언성을 높였다는 걸 보면 다른 사정도 있는 듯 보였다. 결국 지연의 추궁으로 더욱 더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자백했다. 원래 그는 완전한 배우라기보다는 배우 견습에 가까웠는데, 연기도 만돌라 연주도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었다는 것 같다. 무엇보다 외모 면에서 많이 부족했으므로 단장은 그를 무대에 세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보조나 짐꾼으로 더 자주 써먹었다. 지스테 정도면 못생긴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마력에 의해 노화가 늦은 편인 엘리시온에선 꽤나 잘생긴 남자들의 비율이 높았으니까. 무대에 서는 것은 아주 가끔씩 뿐. 미래성이 없어 보이는 직장 일에 지스테는 불안감을 느꼈나 보다. 이 때 그의 역할을 대신할 더 뛰어난 만돌라 연주자가 들어왔고 그 남자는 지스테보다 더 잘생기기까지 했다. 연기력도 비슷했던 모양이라, 그 후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거의 빼앗긴 그는 불안하여 단장과 상담을 요청했다. 단장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얘기를 나누는 도중 감정이 꽤나 격해졌고 말다툼을 했다가 그대로 단장에게 밉보여 해고를 당한 모양이었다.

배우가 되고자 상경했는데 겨우 들어갔던 극단에서 추천장 하나 받지 못하고 쫓겨나와서,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렵고, 쥐꼬리만한 봉급으로는 수도 생활을 간신히 영위하기에만 빠듯하여 저축한 돈도 없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싫어 급하게 구한 곳이 커다란 잡화점의 짐꾼 일이었다.

평일에는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되어 뻗어 버려서 겨우 디베르타에서 꾸준히 만나기 시작한 지연과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주말 하루 뿐이었다고 한다. 직업이 극단 배우라면 당연히 평일보다 주말이 더 바쁠 것 같은데 어쩐지 주말에만 지연과 약속을 잡기에 특이하게 여겼지만 사실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악기인 만돌라 역시, 디베르타에 쉽게 반입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사실이지만 하루 전 맡겨 놓고 확인절차를 밟으면 반입이 가능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엔트런스까지만 가져 와서 연주를 들려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당포에 맡긴 싸구려 만돌라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겠지.

"극단에서 일하는 내내 그렇게 여러 번 디베르타에 신청서를 넣고, 겨우 추첨되어 여자를 만났는데, 이제는 일도 잘리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지스테는 정말로 작고 초라해 보였다.

지연이는 더 말하는 대신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와 함께 디베르타로 귀가했다.

그 일 이후로 지연은 사흘째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수업에는 마지못해 나왔지만 가끔 말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고, 수업 외 시간에는 거의 혼자서만 있고 싶어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직업이나 공로 등을 부풀려 말하는 정도는 디베르타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첫 번째-지구에서 만난 남자가 있었지만 그를 제외하면 처음인- 남자가 바람둥이에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이 보통보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충격 뿐일까. 한창 뜨겁게 만나고 있던 상대인 지스테에게도 꽤나 배신감을 느끼는 듯 하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어 더 안타깝다. 그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먼저 방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식당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당은 항상 시끄러웠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그런 것 같았다. 특히 식당의 중앙, 커튼이 쳐진 상석 주변이 유독 소란스럽다.

'오늘은 주말이라 다들 놀러 나가고 사람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귀부인들 사이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아스벨은 상당히 불만 어린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붉은 머리에 마찬가지로 붉은 복장을 한 젊은 귀부인이 고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그 카스칼 가문의 도련님이 벌써 이런 곳에 혼자 드나들 나이가 되었다니!"

"마담. 이 시간에는 이 쪽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면서, 와 보니 그렇지도 않잖아."

"주말이라 다들 놀러 나가서 그래.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이 시간쯤 아마 식당 아니면 대욕탕의 어딘가에 있을 거에요. 그런데 정말 말 안 해 줄 건가? 도련님과 오늘 만나기로 한 그 부러운 아가씨의 이름이 뭔지?"

아스벨은 별 수 없이 그녀의 얘기를 들어 주고는 있었지만, 그 말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사생활이야."

"어머나, 알이었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니! 남자들은 참 성장이 빠르다니깐. 아무리 봐도 탐이 난단 말이야."

아스벨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귀부인은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이 차이가 몇인데,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손자 뻘 남자아이는 좀 그렇지. 내 말 뜻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여자애가 있다는 거야. 어때? 관심 좀 있나?"

"전혀."

아스벨은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귀부인은 '그녀'도 결코 흔히 있는 타입이 아니라며 아스벨을 계속해서 회유하려고 들었다. 탁월한 마법 재능은 기본이요, 눈부신 미인에, 몸매도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부분 없는 완벽한 예비 신부. 아스벨은 귀부인의 설명에 살짝 흥미를 보였다.

"어떤 여잔데?"

"어머, 흥미가 좀 생겨? 라페스타 장관의 며느리 내정자인데, 펠리시아라고……."

"뭐야, 얼굴도 몸매도 성격도 완벽하다길래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동일인물인 줄 알았는데. 몰라, 그런 여자."

"흐음?"

붉은 머리의 귀부인이 머리색과 같은 붉은 눈썹을 들썩였다. 그 때였다. 아스벨이 갑자기 훨씬 톤 높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이제서야 나를 발견한 듯 하다.

"이나!"

"……."

나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서 새로 온 젊은 부자 미남을 구경하던 몇몇 여자들까지 동시에 놀랐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며 옆을 살짝 가리켰다. 이렇게 주목을 받는 시점에서 굳이 앞으로 나가 그를 아는 체 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의 주목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에이반도 항상 벌써부터 고위 계급 사람들 눈에 들어 좋을 일 없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귀부인을 뿌리치고 내가 가리킨 곳으로 나왔다.

아스벨은 쭉 내 눈치를 보며 나를 졸졸 따라왔다. 703호 앞까지 와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올 거면 연락이라도 미리 해 주지. 놀랐잖아."

"그게, 갑자기 와서 놀래켜 주고 싶었는데, 막상 오니까 주거 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아스벨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변명했다. 그의 예상보다 디베르타의 면적은 훨씬 넓고 복잡했던 모양이다. 그는 주거 지역의 위치를 물어 봤을 뿐인데 마담이 식당까지 자기를 끌고 왔다고 중얼거렸다. 위치를 알려 줄 줄 알았는데 막상 끌려와 보니 이상한 곳이었고. 적잖이 곤란했던 것 같다.

"보고 싶었어, 이나!"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아까 전에 모르는 귀부인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할 때는 그가 굉장히 낯설어 보였는데 지금은 영락없이 평소의 그였다. 눈부시도록 맹목적이고 살가운 얼굴. 나는 열쇠로 문을 열다 말고 그에게 꼭 끌어안겨 파묻혔다. 주말인데 그는 제복 차림이었다. 아스벨을 달래서 문 안까지 데려온 다음 문을 걸어잠갔다.

그는 내가 안내한 응접실에 정자로 앉아 눈치를 살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한껏 긴장한 모습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아스벨의 본가 쪽이 훨씬 웅장하고 호화로웠다. 내가 바구니에 담긴 병을 들고 탁자에 내려놓자 그가 머뭇머뭇 말했다.

"이 건물에서 혼자 살아?"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내 공간은 정확히 이 방 하나 뿐이거든. 이 커다란 건물을 다 나 혼자 쓴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

아스벨 정도 넓은 집에서 사는 도련님이면 혹시나 착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굳이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귀엽네, 이나는."

"저택에서 데려온 소년종 둘과 같이 지내고 있어. 지금은 세탁이랑 심부름 때문에 없고."

"흐음."

아스벨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봐도 우리 집 쪽이 훨씬 지내기가 나아 보이는데. 아, 그렇다고 그, 여기가 나쁘다는 건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그가 나를 양도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만이 가득하다. 나는 아스벨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복 차림인 걸 보면 오늘도 출근한 건가? 그런데 어떻게 이 시간에 온 거야?"

"조퇴했어. 땡땡이는 아니고, 휴일 반납하고 일한 정당한 대가지. 우, 우리 이나는 뭐 하고 있었을까? 날 기다리고 있었나?"

그렇게 부르면서 좋아 죽겠다는 듯 웃는다. 그는 아까 전에, 마담에게 잘못 걸리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일부러 마담 앞에서는 나를 모르는 체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눈치 빠르게 굴면 칭찬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아스벨을 침실로 초대하여 나란히 앉아서 속삭였다.

"아스는 그 마담이라는 사람이랑 잘 알아?"

어디서 쉽게 구할 수도 없을 법한 호화로운 물건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 귀부인이었다. 강렬한 머리색을 떠나, 그 복장만으로도 상당한 계급차를 실감했기 때문에 디베르타 여자들은 모두 그녀 앞에서 고양이 앞 쥐마냥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행동했다. 그런 사람과 동네 아주머니랑 대화하듯 자연스레 말을 섞다니. 신기했다.

"뭐 그다지 잘 아는 건 아닌데, 사교회에서 그 마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아버지한테 어머니를 소개시켜 준 사람도 마담이었고. 사실 워낙 말이 많은 아줌마라서 사교회에 한 번 다녀 오면 잊을 수가 없는 인물이야. 나는 어릴 때 몇 번 본 게 전부지만……, 그 쪽은 잘도 날 알아 봤구나 싶더라고."

그건 아마도 아스벨과 그의 아버지가 마치 형제처럼 쏙 빼닮아서일 것이다. 아스벨에게 말한다면 부정하겠지만, 그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스벨을 못 알아 볼 리 없다. 나는 그냥 웃으며 아스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스벨은 얌전히 허리를 숙이며 양 뺨을 벌겋게 물들였다.

외부인 남자들이 정해진 시간을 넘어 디베르타에 있을 수 없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시간이 초과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어딘가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듯한 요란한 마력의 흐름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초대패가 혼자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벨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흐트러진 차림으로 허겁지겁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문 밖에서 육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드는 알몸 위에 바로 두툼한 면 가운을 걸친 나와 단추도 제대로 못 잠근 셔츠를 입은 아스벨을 번갈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형씨,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크흠."

아스벨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척 하며 가드의 시선에서 나를 가렸다. 볼 꼴이며 못 볼 꼴 다 보며 지금껏 근무해 왔을 가드는 굳이 나를 쳐다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아스벨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초대패는 이리 주세요. 퇴장 처리를 하고 돌려 드릴 테니. 그리고 시간은 좀 잘 지켜 주십쇼. 상습적으로 어길 경우 디베르타 출입에 제재가 들어갈 수 있다고요. 이번엔 모르고 잠들어 버린 것 같으니 봐 주겠지만……."

나는 눈을 비비며 한들한들 아스벨을 배웅했다. 아스벨은 민망한 표정으로 어깨에 대충 제복을 걸쳤다. 그 때 훈계하듯 중얼거리던 가드의 허리가 느닷없이 펴졌다.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해졌다.

작별 키스를 위해 허리를 숙이던 아스벨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나, 그러고 보니 전에 초콜릿 보낸 거, 못 받고 잃어버렸다고 했었지? 내일 내가 똑같은 걸 새로 사서 보내 줄게."

"뭐? 그냥 새로 사 준다고……? 전의 그건 정말 못 찾는 거야?"

어차피 다 같은 초콜릿이고, 당시에만 내 손에 들어오기 전에 사라진 사실에 대하여 화가 났을 뿐 지금은 딱히 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때 아스벨이 함께 써서 넣어 줬을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다. 늘 그렇듯 짧은 편지겠지만, 그 편지만 아니면 내용물은 아쉬울 것 없다. 그렇다고 편지 내용을 뒤늦게 묻기에도 민망하고. 단지 가벼운 투정이었을 뿐인데 아스벨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전송관리부 근무하는 녀석이 있거든. 그 녀석한테 말해서 한 번 찾도록 해 볼게. 이나는 기다리기만 해. 아, 혹시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새 초콜릿은 또 따로 보내 줄게."

아스벨이 내게 작별 키스를 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이거 실례했군. 다음부터는 시간 엄수하겠네."

"네, 넷! 바, 바, 바깥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드는 완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 둘이 천천히 문을 닫고 사라지자, 나는 하품을 하며 침실로 다시 돌아갔다.

*

혼자 하는 점심식사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에 사각형의 라탄 피크닉 바구니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여기서 먹고 있었던 거야? 엄청 찾았다고!"

나는 맑은 스프를 떠 먹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엷은 갈색 머리에 풍성한 술 장식이 곳곳에 달린 귀여운 디자인의 숄을 걸친 여자. 에이브릴이었다. 켄틴이라는 사람의 친목회에서 만났던 지인 중 하나다.

활동 장소가 겹치지 않아서인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친목회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나를 일부러 수소문해 찾아 온 모양이었다.

"북동쪽 구역에서 같이 점심식사 하자, 응?"

"어, 하지만……."

이미 받아서 먹고 있었는데. 에이브릴은 마침 식당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근처의 소년종을 불러 말했다.

"얘, 자리 정리 좀 해 줘. 여기 팁. 자, 얼른 따라 와!"

소년은 신이 나서 작은 은화를 받아 챙겼다.

북동쪽 구역이란 마치 정원 입구처럼 생긴 장미 덤불 아치를 지나가야 나오는 장소였다.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덤불 아치 양쪽에는 항상 가드가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라면 누구나 통과 가능한 모양이었다. 내가 신기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에이브릴이 피식 웃었다.

"뭐야, 여기 처음 와 보는 거니?"

"응."

"북동쪽 구역은 외부 거리랑 바로 연결된 곳인데, 그래서 가드가 혹시 이상한 사람이 디베르타로 숨어 들어가지 않나 하고 감시하는 거야. 신입들은 가끔 너처럼 착각하더라고. 아, 저기 있다!"

이 곳은 무척 아름다운 장미 화원이었다. 군데군데 작은 노점처럼 차려진 건물과 차양막 아래 벤치, 또는 피크닉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비교적 고급스러운 마실 것, 또는 간단한 디저트를 팔고 있었다. 가끔 풀밭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여자들이 사과 소다와 디저트를 먹는 걸 봤는데, 바깥이 아니라 여기서 파는 것들이었다.

빨간 색과 흰 색이 예쁘게 조합된 스트라이프의 파라솔 아래서 낯익은 얼굴이 몇명 보였다. 이사와, 헤이지, 나머지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그 이유를 직설적인 한 여자의 말에 의해 알 수 있었다.

"얘가 그 수도 방위군 출신 남자랑 만난다는 소문의……."

"맞아, 정말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지 뭐니. 검은 긴 머리에 피부는 희고 디베르타에 온 지 얼마 안 된데다 애칭이 '이나'라면 내가 알기로 한 사람밖에 없는 걸."

나는 에이브릴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자세히 알려져 있다고? 이사와가 침착한 태도로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본인이 맞긴 한 거야? 정작 그 본인은 얘길 듣고 엄청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얘기가 나도 모르는 새 이 많은 타인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돌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소문이 이렇게 빠르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녀들은 명확한 답을 내 입에서 듣고 싶어했다.

"세상에! 수도 방위군이면 날고 긴다 하는 남자들도 못 들어가는 엄청난 곳이잖아!"

"심지어 그 사람이 전송관리부에도 자기 인맥이 있다고 자랑했다며?"

"나이도 엄청 젊어 보였다는데 진짜야?"

"어머, 얘. 당연하지! 방위군이면 대부분이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야. 그런 집안 도련님들이 나이를 먹자마자 방위군에 들어갔다가, 청년기가 지나면 장교나 장관이 되는 거라고!"

나는 지금껏 이 소문이 예의 그 '마담'이라는 별칭의, 붉은 머리 귀부인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말에서 나는 전혀 뜻밖의 정보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스벨이 전송관리부 얘기를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타인은 한 명 뿐이었다. 시간 초과로 내 방에 찾아와 통보했던 가드 청년.

'그렇게 안 보여서는 입 엄청 가볍네…….'

아스벨이 입은 수도 방위군 제복을 보고 기겁하더니만 주변에다 엄청 떠들며 다닌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것도 안 보는 체 하더니 볼 건 다 봤구만. 아스벨은 내 후원자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기를 쓰며 숨길 일은 딱히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독 잘생겼으니까, 그런 미남과 사귄다고 하면 응당 따라올 남들의 주목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순순히 시인했다.

"으응, 2계급인 군인 애인이 있는 거, 사실이야."

"세상에! 정말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오렌지색 머리를 쫑쫑 땋아내린 여자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처음 여기 온 날 후원자를 선택하는 자리에서…….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후원자인 건 아니야. 그 때는 그냥 짧게 스쳐 지나가기만 했어."

"그 다음엔?"

"그 사람이 이상한 핑계를 대고 내가 사는 곳에 찾아와서 나와 사귀고 싶다고……. 그러고 나서도 계속 선물과 편지를 보내길래, 사귀기로 했어."

상세히 털어놓았다간 내 후원자인 에이반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와 곤란해질 것 같아서 이 정도까지만 설명했다. 가장 열렬하게 물었던 그녀는 내 얘기가 끝나자 살짝 실망했다.

"뭐야. 그런 간질간질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구. 결국 본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남자의 대쉬를 받았다는 것 뿐이잖아. 도움 안 되게."

"하긴, 너는 일단 과감하게 접근한 다음 입이랑 몸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지. 네 얼굴로 따라하긴 힘들겠다, 얘."

그녀의 맞은 편에 있던 푸른색 머리 여자가 비꼬듯이 대꾸하자 그녀는 표독스럽게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뭐? 말 다 했어?"

확실히, 객관적으로 보면 오렌지색 머리의 여자 쪽이 이 중에서 가장 외모가……, 뭐랄까, 엘리시온 남성들의 보편적 선호도와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 출신인 여자들은 미모의 기준과 적용법이 제각기 전부 달랐는데, 그래도 오래 이 곳 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대체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스타일은 있기 마련이다. 얼굴의 균형이나 대칭, 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목구비의 어우러짐에 의한 분위기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만한, 혹은 나긋나긋하고 날씬한 몸매를 통한 어필일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외부의 기준이다. 결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존재치 않는 이곳 디베르타에서, 푸른 머리의 여자는 꽤나 단호하게 그녀의 외모를 평가했다. 그래 놓고 전혀 아니라는 양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그건 좀 너무했다.

"아아니, 난 그냥 네 테크닉을 칭찬한 건데? 칭찬도 못 하니?"

그녀들의 태반은, 고위 계급 남자를 '쟁취하는' 법에 대해 내게서 듣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쟁취했다기보다는 내가 오히려 쟁취를 당했다는 입장이다 보니……. 몇 명인가가 만남의 과정에 대한 흥미를 어느 정도 물린 뒤에도 나머지는 여전히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혹시, 그 전송관리부의 '친구' 분 말인데, 지금 만나는 여자 있대? 나는 그 쪽도 괜찮은데……."

"에, 엑? 글쎄. 그냥 그런 친구가 있다고만 들은 게 전부라서."

전송관리부라는 게 유명한 데인가? 이곳 사회에 대해 아직 밝지 못하다 보니 사실 그 부 이름도 아스벨에게서 처음 들은 참이었다. 전송이라고 했으니 아마 편지 같은 거 관리하는 곳이겠지?

"아니면 같은 방위군 출신의 지인이라던가! 살짝 나이 든 타입도 괜찮으니까!"

"아유, 꿈도 크시지. 나이 든 남자 만나기가 더 어려워. 높으신 분들은 나이가 차자마자 보통 소개를 받아서 결혼하잖아. 오히려 팔팔하게 갓 청년이 된 쪽이 더 가능성 있을 걸. 유이나처럼 말야, 그치?"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다른 한 명이 혀를 차고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녀들의 목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속된 말로 '새끼를 친다'고 하지. 나를 통해 내 애인의 친구를 소개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녀들은 간혹 서로를 헐뜯으며 견제하면서도 내게는 열심히 아부를 떨었다. 동성들 사이에서 이 정도 인기를 얻은 건 또 처음이라 상당히 당황스럽다. 결국 소개할 만한 지인이 있는지 아스벨에게 한 번 물어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다음에 여기 같이 가자거나 저기를 소개해 주겠다거나, 약속이 너무 많아서 헤어지는 것도 진땀을 뺐다.

간신히 자리가 파하고 나도 슬슬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기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비난에 문득 멈칫했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말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뒤이어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답답해서 못 참아 주겠네. 뭘 하러 그런 헛소리들을 하나하나 들어 주고 앉아 있니? 애초에 불가능한 조건이야. 저 여자들은 죄다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걸 네가 시간 내서 상대해 줄 가치는 없어."

푸른 색의 디베르타 제복을 입고 있는 연한 하늘색 머리 여자였다. 청색이 강하게 도는 탁한 은회색 머리카락은 적당히 구불거리며 목 아래로 몇 가닥 내려와 있고 나머지는 백합 모양의 백금 헤어핀으로 틀어올린 스타일이었다. 비키니 형식 디베르타 제복의 끈에는 섬세한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버클은 순금. 목에는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소재의 부드러운 스톨을 감고 있었다. 같은 소재의 허리장식은 한 차례 하의 위를 휘감고 양 옆으로 펼쳐지는 긴 자락이 짤막한 투명 볼레로의 소매로 이어지며 군데군데 다이아몬드 핀으로 고정되어 있다.

옷, 그러니까 오버드레스로 간주되는 의복류나 장신구는 디베르타의 제복 색의 인식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면 얼마든지 추가로 걸쳐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런데 3계급 여성 중에서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달고 다니는 건 처음 본다. 그녀들은 보통 앉아 있기 편하고 단정하면서 고급스러운, 가성비가 좋은 장신구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5계급 여성에 비해 복장 규제가 적어서 마음만 먹으면 화려하게 꾸밀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녀는 홍채 색이 아주 옅은 편이라 자세히 보면 동공만 있는 것 같아 묘하게 선뜻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장이 더해진 눈매는 멀리서 봐도 무서웠다. 나는 더듬거리며 반박했다.

"누, 누구신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흥, 하필이면 품위도 모르고 대낮부터 시끄럽게 가십이나 떠들어대는 너희들 바로 옆 자리에서 불행한 점심식사를 하게 된 한 명의 피해자지. 듣고 있자니 답답해서 말야. 너 혹시 저 여자들이 바라는 '요행'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거절을 못 하는 거야?"

"?"

"재상의 아들씩이나 낚아 올릴 정도면 너도 보통 여잔 아닌 것 같은데 하도 바보 같이 구는 게 답답해서 그런다. 설마 방금 그 여자들한테 말한 대로 쫄래쫄래 그 남자한테 가서는 '내 친구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 없나' 졸라댈 셈은 아니겠지?"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잘난 체 하는 말투에 다짜고짜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의 말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절반 정도는 그녀들이 그렇게까지 원하니까 아스벨에게 가서 한 번쯤 부탁해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꼭 지금 그녀는 '그런 짓'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나.

"그게 왜 안 되는데요?"

뜻밖의 질문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모르겠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에요. 알고 있다면 대답해 주세요."

"흐응, 뭐, 아직 신예인 것 같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는 네 입장은 이해해 주지. 한 번만 말할 테니 똑똑히 들어. 듣자 하니 재상의 아들은 아마 너한테 푹 빠진 것 같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도 어쨌든 들어 주려고 하겠지. 그 도련님 성격에 친구들을 협박해서라도 만날 자리에 나가게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너한테 죽고 못 사는 도련님 평판을 밑바닥까지 떨구는 짓이야. 만나는 남자가 그렇게 되면 너도 손해일 테고."

"어, 어째선가요?"

그녀는 내가 아주 큰 일을 저지를 뻔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의 말이라면 더더욱이나. 하지만 그녀의 경고에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대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이 허세나 겁주기용이 아닌 사실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나를 터무니없는 말로 협박할 셈이었다면, 결코 그녀 같은 표정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보통 몇 년차쯤 되는 여자애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너 고위 계급 남자들이 왜 여잘 함부로 안 만나는지 알아? 그렇게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방위군 소속 청년들을 디베르타에서 코빼기도 보기 힘든 이유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

숫자가, 적기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보안상의 문제로 신분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 클럽 회원은 신분을 잘 밝히지 않았다. 겉보기로도 알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예의 그 매년 이루어진다는 원정 때문인가? 수도에 없으니 만날 기회도 없는 것이겠지.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깔깔 웃었다.

"보통은 상대도 안 하거나 화를 내면서 그냥 가 버리는데 생각보다 진지한 학생이네. 그렇게까지 이유를 듣고 싶어?"

"정말로 그게 중대한 사건이고, 제 애인의 평판에도 치명적이라면 왜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내가 철렁한 것은 내 생각 없는 행동이 아스벨, 혹은 에이반에게 치명적인 흠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서였다. 둘 다 나름 자기 앞가림을 하는 성인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책임감 있는 성인 남성이 직장에서 여자 하나를 두고 몸싸움을 하던가? 거기다가 붕대를 몇 주간 감고 다닐 정도로 크게 다치던가? 생각보다 청년기 남성은 철 없는 존재이고, 내가 둘을 지켜 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직 1년차로는 무리인 일이겠지만 최소한 나까지 안하무인으로 굴어 둘의 약점만큼은 안 되고 싶었다.

별 대단치 않은 것이라고 여겼던 행동이 그렇게까지 아스벨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지.

아스벨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아스벨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겠다고만 하지, 내가 잘못한 이유를 하나하나 알려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듣고 싶어하니 내 아량으로 자세히 설명해 줄 수도 있겠지만, 목이 타니 우선 수업료로 음료 한 잔 받지. 비싼 걸로."

"아, 저, 미안한데 지갑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다음에 사."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얘기를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신분이 높은 남자들일수록 자식 단속을 철저히 하는 편인데, 여자의 수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고위 계급 남성을 아무나 만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높으신 분들은 자식을 낳으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교육을 시작한다. 어느 정도 마력을 쓸 수 있어지면 아들을 일제히 사관 학교에 보내 남들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추가로 받게 한다. 오직 남자들뿐인 사관학교에서는 기본적인 성교육과 육아교육이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정략적으로 완벽하게 안정된 동부(同婦) 가정의 필요성, 신분차가 있는 하층 계급민의 여성과 진지하게 만나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된다. 얼핏 아름다운 외견을 가졌지만 마력은 적은 여성을 상대로 한 약간의 경멸을 뇌리 속에 꾸준히 새기도록, 자신도 모르게 배워 가는 것이다.

확실히 여성의 외적 매력만 따지고 보면 상류층보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서민층 쪽이 유리했다. 원래 여자가 적은 상황에서 그나마 많은 숫자의 미인들이 분포되어 있으니까. 그들은 또한 상류 계급 여성과는 다른 '아주 노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갈고 닦았다. 상류 계급 남성도 5계급임이 확실한 여성을 만날 수는 있었다. 실제로 색다른 매력에 그렇게나 푹 빠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서서히 발생하는 법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도 그렇게 오래도록 낮은 계급에 머무르는 여성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작은 마력의 그릇을 타고나는 케이스가 많았다. 아무리 꾸준한 관계를 가지며 에스트라를 퍼부어 줘도, 여러 명의 도미넌트 남성에게서 꾸준히 에스트라를 부여받는 '제대로 된 육성 신부'에 비할 바 아니다. 그 정도로 과한 에스트라를 아무리 받아 봐야 마력이 늘어나는 속도도 지지부진. 그런 여자들의 결말은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아예 마력량의 심각한 차이 때문에 상대 남성의 알을 배지조차 못하거나, 겨우 마력이 올라 알을 배었어도 다른 도미넌트 여성이 낳은 알에 비해 많이 부족하여 결과적으로는 부친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허약한 아이를 태어나게 하거나. 아이가 마력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면 가문의 계급도 2계급에서 4계급으로 폭락한다. 유서 깊은 대권력가를 여럿 배출한 가문에서 돈만 쌓아 뒀을 뿐인 졸부로. 심지어 다른 4계급 가문처럼 사업으로 벌어서 쌓은 돈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재산을 탕진할 지 모른다. 그저 쓰는 법만 알 뿐 버는 법은 모르는데 마력을 납세하지 못하니 들어올 봉급이 없다.

모두가 그런 불행한 결말로 치닫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인 인식은 그랬다.

철저한 세뇌를 당한 도미넌트 청년들은 아무도 인증되지 않은 여성과 진지하게 만나고 싶지 않아했다. 제 앞길을 생각하면 응당 그래야 했다. 선배나 선임의 소개를 받아 귀부인, 혹은 신부들에게 에스트라를 바치며 눈도장을 찍는 일만 반복해도 굳이 성욕 해소가 어렵지 않고. 물론 본인의 취향이나 성벽은 잠시 접어 둘 필요가 있었다. 가끔 디베르타에서 클럽 회원으로서 취향 맞는 여자를 만나긴 해도 자신의 본명이나 가문 명은 절대 밝히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진짜 에스트라'를 주입해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 줘 봐야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 할, 그런 여자들에게 에스트라를 잔뜩 소모하기에는 아까우니까.

간혹 진심으로 그런 여자들을 대하는 청년도 있지만, 그런 이를 그 어떤 고귀한 여성들이 반기겠는가. 여자들은 남자 하나쯤 전혀 아쉽지 않으니까 멋대로 까다롭게 군다.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적어도 미래를 위해선 하층 여성을 만난다는 소문만큼은 사교계에 돌지 않아야 한다. 진짜 하층 여성들을 만나는 남자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클럽 회원의 신분을 여성 쪽에서 캐내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 후원자의 상세한 정체를 피후원자가 디베르타에서 남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규칙, 그리고 여성의 간택회에서 남자들이 쓰는 가면, 전부 이런 소문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생각해 봐. 3계급 여자도 급이 낮다며 상종을 안 하는 도미넌트들이 네가 방금 어울리던 졸부의 부인, 마력량만으로는 5계급과 다를 바 없는 하층민을 왜 만나겠니? 정말 주변에 그런 여자들을 소개시켜 주고도 재상 아들의 평판이 멀쩡할 것 같아?"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일만이 아니라 지금껏 에이반이 내 친구에 대해 못마땅하게 굴었던 것도. 그가 반복해서 말하던 '나와 그녀들은 다르다'는 표현도. 에이반이 내게 얼마나 무르게 굴며 많은 부분을 자유롭게 풀어 놔 주었는지도.

세 연합의 모든 여성은 처음 엘리시온에 온 순간 한 곳으로 모여 그 몸이 품게 될 가능성을 수백 명 이상 되는 고위 계급 남성들의 눈 아래서 하나하나 확인받는다. 그 곳에서 일차적으로 선택받는 여자들은 전체의 1할을 넘지 못한다. 물론 단기간의 성욕만 채울 목적으로 외모만 보고 여자를 뽑는 유자격자 남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고위 계급의 태로 화할 여성은 훨씬 적었다. 그녀들은 보통 꽤 오랜 기간동안 외부로 나서지 않는다. 즉, 법적 5계급의 탈을 쓰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생활한다는 것. 단지 생활을 위해 많은 서민 남성들을 만나려고 아둥바둥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그녀들의 공통된 특징일 것이다. 같은 줄을 탄 남성들끼리, 입소문에 소문을 거듭하여 서민들과는 다른 형식의 만남이 주선되고 많은 부분 남들과 격리된 상태에서 청년기 남자를 공급받아 마력을 쌓아 올리게 된다. 사실, 비밀이 유지된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굳이 동부(同婦)를 두며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아무도 그런 육성 과정에 미리부터 흥미를 갖지 않았다. 대부분 처음 이 세계에 온 상위 계급 여성들은 몇 년간은 사회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몇몇 남편들의 이득을 위해서만 조용히, 그리고 호화롭게 생활한다.

데뷔식이라고 할까. 보통 그녀들이 정식으로 공개되는 것은 그들 중 나이가 찬 누군가와 결혼식을 올릴 때였다. 여기서 보통 그녀들의 얼굴과 이름이 처음 공개된다. 첫 결혼식만으로 눈길을 끄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이어지는 여러 번의 결혼식으로 동부 관계가 알려지고 자연스럽게 2계급 칭호를 받으며 그녀 역시 상류 계급의 일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 이 정도가 흔히 알려진 도미넌트 여성의 정석적인 인생 코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상위 계급 여성은 적게는 6명에서 7명, 많게는 20명 이상의 남편을 두고, 혼인 외적으로도 50명 이상 되는 상대의 알을 낳는다. 모두 그녀와 비슷하거나 높은 계급 남성의 알이다.

알을 낳는다는 의무를 다하고 나면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그 과정에서 얻은 권리와 권력들 뿐이었다. 그것을 이용해서 여자들은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선택받지 못한 여성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안전하고 아주 편안한 벨벳 로드.

육성된 신부란 그런 것이다.

나는 레바단에서, 디베르타에서 묘하게 숨기고 있던 적나라한 부분마저도 그녀의 설명으로 확실히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럴듯한 변명을 믿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그녀는 내게 기꺼이 충고했다.

"네가 만나는 남자가 누군지는 정확히 밝히지 마. 애인한테 혼자인 친구가 없어서 당분간 소개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해. 그리고 소개만을 목적으로 끈질기게 매달리는 여자는 끊어 버리고, 얌전히 있던 여자 한 명만 따로 불러서 당분간 시녀 삼아 지내면 되겠다."

얌전히 있던 쪽이라면 이사와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그녀를 시녀 삼아 지내라니……. 꽤 파격적인 발언이다.

"흠흠, 여기까지 설명할 셈은 아니었는데 분위기를 타 버렸네."

"어쨌든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그녀는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말을 지금껏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 그렇게 고마우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지?"

"은혜, 라고요……?"

"듣자 하니 재상의 아드님은 상당히 또래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던데, 내가 그 평판을 지키는 데 공을 세운 것과 다름없지 않겠어?"

아스벨의 평판이 그렇게 좋았던가? 사실상 그의 첫인상은 무뢰배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간혹 그가 얘기를 듣자니 묘하게 친구가 많은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아스벨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녀는 손을 털며 일어나서 말했다.

"뭐 당장 받아내지 않더라도 재상의 며느리에게 빚 하나쯤 지게 해 둬서 나쁠 것 없지."

"그런데 그 '재상'이라는 사람, 정말 제가 아는 사람 맞아요? 혹시 사람을 잘못 아신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계속 칭하는 '재상의 아드님'이란 아스벨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 아들 바보 아저씨가 재상이라는 건데, 아무리 집안이 잘 산다고 해도 재상씩이나 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허, 하고 가볍게 웃었다.

"맞을 텐데. 레마슬레이그의 총재 데이젤루스 디 카스칼. 미래의 시아버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직위명 정도는 알아 두지? 유명한 사람이거든?"

"……."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는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콧대를 세웠다.

"그렇다고 이 얘길 퍼뜨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 아직 퍼지기엔 좀 이른 소문이지. 나만 아는 얘기니까, 써먹을 수 있을 때 잔뜩 써먹어야지."

어디에 써 먹을 작정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휙 떠나 버렸다. 나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다음 날도 지연이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는지 걱정되었는데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오늘도 별 일이 없다면 만나기로 했으므로 북동쪽 지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도시락만이 아니라 지갑도 챙겼다. 전에 얻어먹었으니 뭐라도 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워낙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많이 팔아서 넉넉하게 사 오고 싶기도 했다.

"소개 얘기 말인데, 그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지금은 다들 만나는 여자가 있어서 곤란하대."

아예 딱 잘라 끊는 대신 어제의 그 여자가 알려준 대로 여지를 남기고 거절하자 그녀들 중 몇몇은 못마땅한 티를 냈지만 나머지는 사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충분히 소개받을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겠지만, 내 말에 대놓고 거짓이라고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만나는 여자가 있다면, 나중에는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의미니까.

"그보다 어제 얻어먹기만 해서 오늘은 내가 디저트 같은 걸 좀 챙겨 와 봤는데……."

나는 바구니의 뚜껑을 열어 보여주었다. 버터 크림과 마지팬으로 뒤덮힌 작은 미니 케이크들이 바구니의 반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들은 안색을 바꾸어 감탄했다.

"어머, 정말 예쁘다!"

"먹어도 되지?"

오늘은 어제 부재중이었던 티아와 헤이지도 에이브릴의 권유로 함께 자리했다. 부담스럽게 모르는 얼굴도 세 명인가 늘었다. 같은 여자들끼리의 친목도 좋지만 중요한 건 남자와의 약속이라 그녀들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렇게 많이 모이는 날은 유명한 사람이 여는 친목회, 아니면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경우 뿐이라고.

'특별한 목적이라…….'

아무리 부탁해도 그녀들이 원하는 걸 들어 주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아 약간 미안해졌다. 다들 하나씩 설탕 케이크를 집어드는데 갑자기 티아가 미심쩍다는 분위기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한 것 아냐?"

"응?"

"아니, 뭐.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써서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서. 후원자한테도 버림받은 지 얼마 안 됐잖니."

티아는 턱을 치켜든 채 내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허세라니? 버림을 받다니? 마치 방금 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내 얘기가 아닌 것만 같았다. 오늘 처음 온 여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후원자한테 버림받았다고?"

"그렇다고 해도 무슨 그런 기분 나쁜 표현을 쓰니."

"어차피 유이나는 지금 2계급 남자랑 만나고 있는 중이잖아. 딱히 상관 없지 않나."

그녀들은 제각기 다른 얘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 발언의 사실 여부 자체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아, 그랬구나. 켄틴의 친목회에서, 그녀들은 갑자기 디베르타로 들어온 내가 당연히 후원자에게서 버림받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굳이 초면에 불편한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는 다들 그렇게 여겼을 테지. 왜냐하면 아직 6개월차, 역으로 계산해도 후원을 받은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상태인데 뜬금없이 후원자의 저택에서 잘 살다가 시기도 맞지 않게 디베르타로 들어왔으니까. 그녀들이 넌지시 궁금해하면서도 후원에 대한 얘기를 전혀 캐묻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해한 것 같은데, 디베르타에서 생활하는 건 일시적인 거고, 사정이 좀 있었을 뿐이야."

"맞아. 요즘 원정이니 뭐니 시끄러운데 운 나쁘게 유이나의 후원자도 원정 관련된 일에 차출된 것 아냐?"

어제 처음 만났던 여자 중 하나가 일단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 주었다. 그 옆의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후원자 얘기랑 유이나가 만난다는 방위군 출신 애인이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 혹시 몰라, 곧 그 애인이 유이나를 후원해 주겠다며 다시 데려갈지."

"좀 알고 말하지 그래? 공식 후원은 처음 왔을 때 말고는 기회가 없거든?"

"비공식 후원이란 것도 있잖아!"

티아라는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 와서 적대적으로 변한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내가 모임에서 크게 눈에 띄게 굴어서 거슬렸겠지. 아니면 그 비슷한 이유거나. 그녀는 두 명이나 자기 말에 반박하자 바로 꼬리를 뺐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누가 뭐래? 난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

아무도 그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으나, 다른 여자들은 내가 나서서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자 그냥 거기서 넘어가기로 했나 보다. 생각보다 여러 가지 이해 관계가 많이 얽혀 있는 모임이 이 곳인 듯 하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가볍게 말했다. 사실 그거야말로 남이 오해하든 말든 별 상관 없는 문제였다. 후원 포기 케이스가 드문 것은 결코 아니다. 기분은 좀 나빴지만 사실이 아니니까. 게다가 진짜로 후원이 끝난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디베르타로 돌려보내질 뿐이지 않은가.

"뭐 어때. 난 신경 안 쓰니까."

"유이나는 참 너그럽구나? 후후. 아, 그보다 혹시 그 소식 들었어?"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여자가 티아를 살짝 흘겨 보며 말했다. 여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가십거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 방 두 칸 옆이 유리나라는 애 방이잖니. 아, 유이나 너도 알아? 유리나라고, 석 달쯤 전인가 여기서 엄청난 사고를 쳤던 앤데."

"무슨 사고?"

내가 흥미를 보이자 그녀는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그 해에 처음 온 애들, 그냥저냥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부터 슬슬 정해진 남자를 만나잖아. 한두 명씩 첫 상대가 생기거나 할 때인데, 유리나 그 계집애가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같은 첫 해 신입 여러 명의 남자친구를 연달아 빼앗아 버린 거야. 그 중 한 명은 꽤 나이 많은 부인이 뒤를 봐 주고 있었던 애라 선배들한테 일러바치고 난리가 났었지. 보다 못해서 켄틴 님이 그 애에게 디베르타의 법칙에 대해 가르쳐 줘야겠다고, 훈계를 할 겸 그 애를 따로 불러서 몇 번 만났대. 그게 켄틴 님 앞에서는 엄청 여우같이 얌전한 체 하더니만, 한 달쯤 뒤에 켄틴 님의 남편 중 하나랑 또 구설수에 오른 거지."

"그 비슷한 얘기를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아."

"음, 유명할걸? 다행히 켄틴 님 남편과는 사실상 아무 일 없던 걸로 판명났는데 켄틴 님은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애를 완전히 내치셨어. 내치는 정도로 끝난 게 얼마나 운이 좋아. 그 분도 신입에겐 너무 너그러우셔서 문제라니까. 이럴 때만큼은 엄하게 굴어도 좋을 텐데. 그런데, 그쯤 되면 걔도 자중하며 살 때가 되지 않았니?"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확실히 요샌 소식을 못 들었네."

"왜, 무슨 일이 또 있었어? 말해 봐."

"오늘 아침에 가드는 아닌 것 같은 남자들이 그 애 방문을 막 두드리는 거야. 옆에는 가드도 몇 명 있었고."

"남자들?"

"사복을 입었지만 내가 보기엔 치안대 비슷한 것 같았어."

치안대는 주로 3계급이나 5계급의 훈련된 남성으로 이루어진 군 부서였다. 2계급은 대부분 마물 상대로 빠지기 때문에 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치안대는 마력이나 체력이 어느 정도 있지만 2계급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다.

그녀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치안대?"

"걔 이번엔 무슨 범죄에라도 손을 댄 거야?"

"너네들 그 얘기 알지? 전에 중요한 사교회 초대장을 그 애가 빼돌린 사건 말야. 그 때는 주소가 헷갈리게 쓰여 있었다느니, 우편 전달하는 꼬마가 설명을 똑바로 안 했다느니, 요리조리 잘도 말로 빠져나가서 경고만 받고 끝났는데, 이번에는 된통 걸려버린 것 있지. 글쎄 그 계집애, 엄청 높은 사람의 우편물에 손을 댔대!"

"세상에, 정말?"

보호관찰처분을 받을까, 꽤 큰 벌금을 내게 될까, 심지어는 수도에서 쫓겨나 변두리로 가게 될까, 거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얘기들을 떠들어댔다. 유리나라는 여자는 꽤 미움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남의 남자를 상습적으로 빼앗았다는 것만 해도 만인의 경계대상으로 낙인이 찍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 사건 이래로 와야 할 우편물이 조금만 늦어도 누가 훔쳐간 게 아닌가 너무 불안해진단 말야."

"어떤 의미론 참 무서운 애야."

한창 유리나에 대해 도마 위의 생선처럼 씹어대고 나서도 갖가지 종류의 수다로 해가 질 때까지 떠들어댔다. 나는 이번 모르스의 날에 서쪽 거리로 쇼핑을 하러 가자는 그녀들의 제안에 난처하게 대답했다.

"미안. 그 날은 남편을 만나기로 했거든."

"남편? 아, 맞다! 유이나는 남편이 한 명 있댔지!"

에이브릴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벌써?"

"뭐야? 얼마나 높은 사람?"

"아니 그냥……, 그렇게 높은 건 아닌데."

나는 여자들의 감탄과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2계급인 아스벨 얘기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칼에 대한 얘기는 절대로 밝히면 안 될 것 같다. 아스벨에 대해서는 자랑했지만 남편 얘기는 얼버무리자 그녀들 역시 별 대단한 상대가 아니라고 여긴 듯 금방 관심을 돌렸다.

텅 빈 바구니를 들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다른 여자들은 제각기 갈 길을 간 뒤에도 이사와는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앉아서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시에리가 원래는 티아와 꽤 친한 사이였거든."

"……?"

갑작스런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친하다기보다는……, 꼭 티아의 부하처럼 구는 편이었어. 티아는 그런 태도를 꽤 만족스러워했고."

시에리라는 여자는 가장 내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곤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티아가 내게 시비를 걸었을 때도 나를 열렬히 감싸 주었다.

"오늘 티아가 갑작스럽게 공격적으로 군 일,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몰래 알려주는 거야.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네 자유지만. 하나 더 말해 줄까. 티아는 네가 2계급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자기랑 상관도 없으면서 제일 강하게 부정했어. 그 앤 지금 모임에서 자기 위치를 잃는 걸 경계하는 거야. 지금까진 거의 그 애가 리더격이었으니까."

"……."

"딱히 너랑 티아 둘 중 누구와도 특별한 친분이 없지만 이대로는 네가 너무 불리할 것 같아서. 아, 그리고 다음 주 쇼핑 말인데, 네가 오늘 일로 돈을 꽤 썼을 거라고 생각해서 심술로 제안했을 걸. 사실이든 아니든 남편 핑계를 댄 건 잘 한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짤막하게 인사한 뒤 자기 겉옷을 챙겨서 일어났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으응, 알려줘서 고마워."

"조심해. 걔는 자존심도 센 데다 꽤나 욕심쟁이니까 말야."

추종자를 빼앗아 간 사실에 꽤나 이를 갈고 있겠지. 나는 잘못된 모임에 발을 들인 게 아닌지 살짝 고민하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 레오가 세 개의 상자를 건네 주었다. 크기가 같은 상자는 두 개. 그 중 하나가 실크 리본으로 예쁘게 묶여 있고 나머지 하나가 포장지가 찢긴 채 뚜껑만 간신히 닫혀 있었다. 그리고 잘 포장된 다른 사이즈의 큰 소포가 또 한 개.

"이게 뭐야?"

나는 알면서 무심코 레오에게 질문했다. 레오는 리본이 달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쪽 두 가지는 오늘 처음 배달온 소포, 이 쪽은 전에 분실되었다 되찾은 소포래요. 이 둘은 늘 오는 시간에 왔고 나머지 하나는 그 뒤에 치안부에서 직접 찾아와 전달해 주셨어요. 유이나 님께서 안 계신다고 말했더니, 다음 번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 싶으니 다시 찾아오겠대요."

아까 낮에 그녀들의 얘기를 듣고 드디어 소포를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뜯어본 흔적이 역력했다. 새 소포는 아마 아스벨이 새로 보내 준다고 했었던 초콜릿이겠지. 하나는 이번 주 선물일 테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내용물은 비어 있다. 레오에게 시켜 다른 초콜릿 상자를 열게 했다. 열두 개들이 초콜릿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각각 모양이 다 달랐다. 레오가 중얼거렸다.

"이런, 한 번 분실되었다더니 남은 게 하나도 없네요."

납작한 초콜릿 상자 뚜껑에는 익숙한 편지봉투가 붙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읽어 보았다. 달콤한 초콜릿을 보고 네 생각이 나 선물을 보낸다는, 늘 그렇듯 한 줄 정도로 끝나는 편지였다.

"……."

소포를 가로챈 사실에 대한 처벌은 한다고 하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

약속한 날에 엔트런스로 나와 있으면 시종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오늘도 왕궁에 들어가는 거니 꾸며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침부터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고민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칙칙한 잿빛의 디베르타 제복에 어울리는 고가의 오버드레스가 한 벌도 없었기 때문이다. 뭘 입어도 어색했다. 옷을 따로 챙겨 나가서 밖에서 갈아입어야 하나? 귀찮은데.

머리를 깔끔히 하고 장신구나 손발목에 다는 수준에서 외출하기로 정했다.

혹시나 외박을 할 지도 모르니까 외박계를 한 장 쓰고, 엔트런스로 나와서 항상 아르트리어 가의 집사가 기다리던 곳에 가 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이런……, 어디서 만나는지를 정확하게 얘기하지 않았네.'

"저기 아가씨!"

나는 상당히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내 바로 뒤까지 모르는 새 남자가 따라붙어 있었다. 불쾌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발라 넘기고 어깨를 부풀린 상의를 입은 연령불명의 남자였다.

"이래 봬도 내가 레바단 은행에서 금융관리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말야, 너 꽤 마음에 드는걸. 어때, 나랑 속궁합 한 번 맞춰 보는 건?"

"싫어요."

나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뜻을 한껏 담아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는 내 거절에도 불구하고 일단 주머니에서 은화를 먼저 꺼내 내밀었다. 1은화? 누굴 돼지 저금통으로 알아?

"자꾸 말 걸면 가드를 부르겠어요."

나는 그가 내미는 은화를 거들떠보는 대신 진지한 목소리로 최후통첩을 했다. 보통 외부인 남자들은 가드를 가장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가드의 훈계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은 것마냥 굴었다.

"하, 이거 왜 이래. 알았어. 선금으로 열 개면 되나? 이 정도 돈은 아깝지 않다고."

"그만 하라고 했잖아요. 바빠요!"

"나를 만족시킨다면 열 배를 주지."

"대체 뭐야, 이 인간!"

나는 바락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였다. 남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가 고통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딜 보는 거지? 자기 손목? 남자의 손목이 이상할 정도로 뒤틀린 상태로 허공에 붙박혀 있었다.

또각 또각거리며 엔트런스 건물의 석재 타일을 밟는 고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런 손으로 만지작대면 엉덩이가 더러워지잖아. 얼마나 높으신 분들이 핥아 주는 엉덩인데."

"……."

저번 주에 만났던 푸른 옷의 여자였다. 내게 몇 가지 충고를 해 주었던. 나는 뜻밖의 얼굴에 놀라서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금실로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하렘 팬츠에 굽이 높은 구두, 손목에는 금팔찌가 대여섯 개쯤 되어 보인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고, 방금까지 내게 추행을 시도했던 남자의 앞에 가서 선다.

"당신은 눈치를 좀 길러야 할 것 같아, 신입 은행원 씨."

"……!"

그는 입은 셔츠 색깔만큼이나 얼굴색이 희게 변해서는 턱을 덜덜 떨었다. 손대지 말아야 할 사람을 손댈 뻔 했다는 공포 때문인지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들러붙어 버렸다.

"다행이네. 하나뿐인 고추가 복구불능으로 저며져서 애완 마물들 사료로 쓰이지 않게 돼서."

"으……, 흐……!"

"객기도 부릴 상대 골라 가며 부렸어야지. 안 그래?"

나는 멍하니 그녀가 남자를 내쫓는 장면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제대로 설 수도 없는지 죽을 힘을 다해 기어서 자리를 피했다. 엄청난 장면이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아주 웃겨 죽겠다는 듯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큭큭댔다.

"저기."

"너도 말야, 아직 제대로 된 호신 마법을 못 쓰는 몸이면 알아서 조심하라고. 저런 녀석들한테 잘못 걸리면 시간 낭비에 기분까지 잡치고. 나중에 아무리 응징을 해 줘도 한참 손해 보는 기분이라니깐."

"……뭐, 아무튼 떼어 내 줘서 고마워요."

"그럼 레스토랑 비스페르나."

"네?"

"바닷가재 코스 요리. 저번의 빚까지 합해서."

"어, 음, 아, 알았어요."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약간 소란을 일으킨 탓인지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서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그 때였다. 다른 구경꾼들을 나직한 목소리로 돌려보내며, 꽤 존재감이 있는 한 청년이 이 쪽으로 다가왔다. 상아색의 코트를 걸친 젊은 남자. 같은 디자인의 코트를 본 적 있다.

"유이나 님이십니까."

"어머."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남자의 코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척이나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살짝 굽혔다. 꼭 아르트리어 가의 집사가 주인에게 하는 인사 같았다.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수도의 디베르타는 너무 넓어서 특징을 듣고서도 찾아내는 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 가시지요."

"칼이 보낸 사람인 거죠?"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대로입니다. 제 소개가 우선이겠군요. 그 분의 조수이자 칼리온의 집행 서기관, 그리시니라고 합니다. 왕궁으로 당신을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나를 도와 준 여자에게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그가 안내하는 마차를 탔다. 마차에는 떡하니 왕실 인장이 박혀 있었다. 사실 이것이 왕실 인장이라는 사실도 그가 보내 준 편지를 보고서 알게 된 것이다. 래달란과 달리 그리시니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웃는 표정만 보이는 타입인 듯 하다. 간간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내게 말을 걸어 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시답잖은 질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칼이……, 혹시 나에 대해서 뭐라고 특징을 말해 주었는지 물어 봐도 되나요?"

"이목구비나 피부색, 머리색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가장 낮은 검은 빛 복장을 하고 있을 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외, 외모가 어떻다고는요?"

"흐음."

그리시니는 뭔지 알겠다는 듯 묘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웃는 듯한 낯에 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일리아나스 님께서 유이나 님의 매력적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으신 것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이렇다 할 특별한 표현을 제게 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본래 그런 얘기를 입에 올리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

조금 아쉬워하기 직전에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일리아나스 님께서는 객관적인 안목은 충분히 있으신 분입니다. 장담컨데 유이나 님께서 아름답다는 사실 정도는 그 분도 인지하고 계실 겁니다."

이 남자……. 엄청나게 아부를 잘 떤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별 근거도 없는 얘기를 얼핏 듣기에만 좋게 잔뜩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칼리온 남자들은 이렇게 극과 극의 성격밖에 없나?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디베르타와 왕궁은 무척 가까웠다. 걸어서 가도 20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공의 별궁에는 전과 다른 꽃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었는데 몇 송이 시들시들한 것을 교체한 것 같았다. 튤립들의 비율이 전과 좀 달라진 느낌이었다.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는 사람인데 왕족에게 배정된 곳이라고 엄청 철저히 관리해 주나 봐.'

장기 여행이 아닌 이상 거의 칼리오네스에서 살다시피 한다는데 과연 여길 집이라고 여겨 줄지도 의문이다. 그리시니는 별궁 내부로 나를 정중히 안내했다. 그런데 칼 혼자 살고 있을 줄 알았던 별궁의 1층 소파에 웬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결혼 반지를 제작해 줄 공예가도 함께 초대했다고 했나? 하지만 공예가 같은 차림은 아니었다. 그리시니가 혀를 찼다.

"이런, 이런. 기다리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카스카데트 공."

짙은 녹람빛 머리를 길게 길러 같은 간격마다 황금사가 꼬인 장신구로 묶고 있다. 얼핏 여자들의 헤어스타일이 연상되었는데 그 본인은 어떻게 봐도 남자였다.

"단지 형제의 처소에 방문했을 뿐인데 그리 박하게 굴 것 없지 않나."

"형제라는 표현에는 일리아나스 님께서 반복해서 부정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리시니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하자 그는 능청스레 번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시니와 달리 결코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까다롭기는. 그러면 혈우라고 하지."

"……."

"그나저나 정말 래달란은 오지 않은 겐가?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 주려고 했건만."

"네, 이번 레마슬레이그 행에는 래달란이 아닌 제가 조수로 동행했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뭐 개인적인 일이라도 있다던가? 그 녀석이 어지간한 일로는 내 형제, 아니, 혈우와의 동행을 거절할 리 없을 텐데……. 솔직히 말해 나를 제외한 다른 귀찮은 방문객들을 내쫓기에는 그 녀석이 제격이지 않나."

마치 자신은 절대 그 '귀찮은 방문객'의 범주에 들 리 없다는 투였다. 그리시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자넨 아는 것 없나? 내게만 말해 보게."

"후후……."

그 남자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리시니 역시 난처하다는 듯 대꾸한다.

"이런, 칼리온 집행관의 사생활을 캐시렵니까."

"……그냥 물어본 것 뿐이야."

분명 아까부터 쭉 그리니시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남자의 시선은 그리시니의 얼굴이 아니라 내게 계속 고정된 채였다. 나는 말 한 마디 없는 노골적인 관찰에 무척 불쾌해졌다. 호의적이라거나, 아니면 적대적, 적어도 이성을 접하는 시선으로서 음욕이 담겨 있거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신경한 응시. 물건을 살피는 듯한 눈길은 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배려심이라고는 일절 들어있지 않아 다른 의미로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아! 실례했군요. 가장 먼저 모셨어야 했는데. 자, 이리로 오시지요."

"……."

그는 카스카데트 공이라는 남자의 시야에서 슬쩍 나를 가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그것을 오해한 듯 그리시니가 불쌍한 체를 하며 사죄했다.

"유이나 님을 누구보다 우선하여 모셨어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저 분께서도 제가 쉬이 대하기엔 어려운 상대여서 말입니다. 계속 말을 거시는데, 조금이라도 흘려 들었다가는 경을 치시거든요."

"……."

용서를 받기 전까지 허리를 숙일 기세라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됐어요. 저 사람 일은 칼에게 말해 볼게요."

"너그러우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모만큼이나 고아한 마음씨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군요."

그런 아부를 듣고 있는 대신 나는 성큼성큼 먼저 앞으로 나갔다. 별궁이라고 해도 꽤나 넓은 곳이었다. 칼이 있는 장소는 계단을 한 층 올라간 곳, 형식 좋게 꾸며진 널찍한 방이다. 그리시니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갔다.

깎아올린 대리석 기둥에 황금으로 장식이 붙어 있고, 커튼은 천정까지 달려 있었다. 아치형의 벽 장식을 가운데 두고 각각 벽지와 유리타일이 화려하게 붙어 있었다. 귀빈을 모시는 응접실의 느낌이 났다.

"부인, 꽤 늦었군."

부인이라는 호칭이 지극히 어색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응, 저, 편지에 만날 장소를 정확히 알려주는 걸 깜박해서 좀 헤맸어."

"그래. 일단은 앉아서 좀 읽어 보도록."

소파 맞은 편에 머뭇머뭇 앉았다. 아르트리어 저택의 소파도 이렇게 크고 호화롭지는 않았다. 남에게 긴장을 유발하는 외견과 달리 소파는 푹신하고 편안했다. 비싼 만큼 편안함이 비례한다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서 그가 건네 주는 순서대로 서류를 읽어 보았다.

"결혼 승인 서류의 사본이다. 원본은 칼리온에 기록되어 있고. 이 쪽은 재산의 분배나 품위유지비에 관한 것……. 다 확인했나?"

어차피 사인할 때 한 번씩 읽어 본 내용으로, 승인 도장이 찍혀 있다는 사실만 달라진 것이다. 칼이 가리킨 것은 두꺼운 가죽 양장의 카탈로그였다. 표지 안에는 두꺼운 종이가 실로 꿰어 있었는데 섬세한 펜으로 각종 형태의 보석과 장신구가 그려져 있었다.

카탈로그는 오직 이 결혼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디자인 전부가 나와 칼만을 위해 쓰일 고유물이라는 것이다. 꽤 고심한 듯한 흔적이 스케치에서부터 느껴졌다. 한 쌍의 결혼 반지 하나 때문에 공예가 몇 명을 며칠 내내 부려먹었을 왕족이라는 존재의 지위가 새삼 대단했다. 그런데도 정작 칼은 반지 자체에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인다.

"손가락 위치는 딱히 어느 쪽이든 상관 없고 그대가 고른 것과 같은 디자인으로 내 것도 맞추면 좋겠군."

"어어, 나랑 칼이랑 똑같은 디자인?"

그럼 여자도 남자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양으로 하는 게 나을까? 에이반에게서 받은 약혼 반지는 전적으로 그가 고른 것이었으므로 이런 중요한 반지를 직접 고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 결혼과 무관한 액세서리로서의 반지는 잘 없는 것 같다. 여자는 결혼을 여러 번 하니까 남편의 몫만 하나씩 받아도 손가락을 꽉 채우고 남는다.

'어떡하지…….'

1계급 왕족과의 결혼 반지, 심지어는 그의 것까지 골라 줘야 한다고 하니 부담감이 두 배였다. 나는 고심을 거듭하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것 중에서 화려한 것 몇 종류를 골랐다. 나머지는 칼에게 맡겼다.

"이거랑 이거, 이거랑 이거. 이것 중에서 칼이 골라 주면 안 될까."

"내가?"

"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잘 못 고르겠어서."

그를 빤히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이 카탈로그를 집어들었다. 나는 소파에 등을 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결혼 반지 카탈로그를 살펴 보고 있는 미인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한숨과 함께 카탈로그를 내려놓았다.

"이런……. 나는 여자들 취향은 잘 몰라. 그래도 내가 보기엔 이게 가장 좋아 보이는군."

"아! 정말? 그럼 이걸로 하자."

"보석은 봐 둔 것이 있나?"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공예가를 데리고 오게 했다. 아마 최소 한 시간 이상을 별개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세 명의 공예가는 긴장한 표정으로 크고 무거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보석과 원석들이 상당히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몇몇개는 원석 형태였지만 원석 상태로도 제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 딱 봐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

그 중 한 명이 자신있게 가방 안에서 흰 천에 싸인 원석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것은 얼마 전 에스폰즈에서 발굴된 원석의 블루 다이아몬드입니다. 아직 세공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한 명이 경쟁하듯 이번엔 푸른 빛을 띠는 보석을 꺼내서 기다렸다.

"이 최상급 루비는 저희 공방 회심의 역작……!"

다들 이 보석이 좋다, 저 보석이 좋다 열심히 어필하고 있는데 사실 보석에 대해 나는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에이반을 따라다니면서 약간의 안목이나 가격차에 대한 지식 등이 생겼을 뿐이었다. 내가 저 사람들처럼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좀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여러 가지 원석이나 보석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항상 선망하던 보석이 있다. 내 손에 들어오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했던 적 없었지만.

"나 이번 결혼 반지는 핑크 다이아몬드로 하고 싶어. 예쁠 것 같아, 핑크 다이아몬드."

"그러도록 해."

내 말에 카이제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붉은 빛을 띠는 보석들을 골라서 내 눈 앞에 들이댔다.

결혼식은 칼리온 본부가 있는 칼리오네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일단은 남편인 일리아나스 공이 칼리온 소속의 사람이었고, 또 에이반 역시 레마슬레이그에서의 호화로운 결혼식은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적 있기 때문이다. 내 신분이 아직 5계급에 불과하여 벌써부터 높은 사람들의 눈에 들었다간 악의적으로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계급 높은 남성들이 내게 친절했던 것은 내가 에이반의 부인 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반과 사이가 나쁜 사람이 굳이 그의 저택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어서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모든 고위 계급 인사들이 에이반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마땅한 계급이 없는 나를 에이반이나 칼의 약점으로 간주하고 틈이 생긴다면 얼마든 공격해 올 것이다. 자신들의 부인을 이용해서 정적이 육성 중인 어린 신부를 건드려 모욕을 주거나 경고를 통해 기를 잔뜩 꺾어 놓는 것은 의외로 드물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렇게 타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날짜도 함께 잡혔다. 조금 늦지만, 내가 디베르타의 기초 교육반을 졸업한 직후가 될 것이다. 졸업 후에 여유를 두고 싶긴 한데 이미 졸업날까지만 해도 상당히 늦은 타이밍이라, 식을 더 미루기가 어려울 것 같다.

반지는 우선하여 맞추긴 했는데 결혼 예복은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았으므로 대략적인 옷감이나 색만 정해 두기로 했다.

"옷감은 내가 미리 구해 보도록 하지."

칼은 그렇게 말했다. 결혼식 예복을 반지에 맞춰 분홍빛으로 하자고 넌지시 제안했더니, 칼이 대답한 말이다. 뭐든 내 뜻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결혼 예복의 색도, 반지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가끔 그가 너무 식에 무관심해 보여서 약간 아쉽기도 했다. 현대 지구에서는 분홍이 여자아이의 색이라서인지 남자들 중에서 분홍이라면 질색하는 경우를 자주 봐 왔다. 그런데 칼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을 정도의 흥미조차 결혼식에 없는 걸지도…….

'정략 결혼이니 별 수 없지만.'

나는 후우, 한 숨을 내쉬며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카이제르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는군. 그렇게 피곤하면 이제 돌아가겠나?"

"아니. 나 오늘 칼이랑 섹스할래. 한 달에 한 번 맞지? 오늘 가능한 거지?"

내가 넌지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아 울컥해서 주장했다. 급작스런 요구에도 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납득했다.

"별도의 용무는 없으니 허가하겠다."

"뭐야, 꼭 업무라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 이상하잖아."

"……그렇군."

짤막한 수긍에 이 이상 말해 봤자 소용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끈질기게 요구했다.

"섹스는 이따 밤에 할 거니까 준비해 줘."

"알았다."

나직한 대답에는 열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분명 그와의 첫 동침은 상당히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치 내 기억이 잘못된 것만 같은 현실이었다. 이 얘기로 더 이상 투정을 부리기는 그래서, 정말 기분 나빴던 일을 꺼냈다.

"나랑 만나기 직전에 카스카데트 공이라는 남자랑 약속 있었더라."

그는 어쩌면 부인을 타인보다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을지도, 아니, 않았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속으로 단정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칼의 눈썹이 움찔했다.

"카스카데트 공? 그대가 들어올 때까지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고? 그것은 오해다. 오히려 그대와의 선약이 있는데 아무 언질 없이 찾아와서 내쫓은 참이었다."

"여길 오는 내내 그가 날 엄청 기분나쁘게 쳐다봤어."

"후우."

어떻게든 해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인데, 칼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주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태생부터가 그런 인간이야. 그는 누구에게든 무례한 태도를 취하지. 이번에 쫓겨날 것을 알면서 찾아온 것도, 어쩌면 그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군. 그리시니가 그대 이름을 카스카데트의 앞에서 말한 적 있나?"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 같아……."

"다행이군. 적어도 그 색의 제복을 입고 다니는 도중에는 내 부인임을 알리지 않는 편이 그대 안전에 도움이 될 거야."

"알고 있어. 에이반에게 들었는 걸."

"잔소리처럼 들렸으면 미안하군. 그리시니에게 다음 번에는 불청객을 상대로 좀 더 강경하게 대처하도록 권고하겠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내 말투가 화난 것마냥 변하자 그가 사과했다. 내가 남편이라고 부르며 매달리는 것도 그에게는 귀찮은 일일 것이다. 그래도 부인 대우를 해 주려고 노력은 하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혹 그가 내게 내비치는, 어쩌면 단순한 의례에 불과한 행동으로도 나는 과한 기대를 하게 된다. 에이반의 부재로 받지 못하는 애정을 아스벨이 아니라 자꾸 그에게 갈구하게 된다.

어른스러운 남자에게 마냥 응석부리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 아주 많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반과의 나날로 인해,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욱 더 욕심부리게 된다.

칼의 궁전에는 그다지 즐길 만한 거리가 없었지만 산책을 좀 하다가 이따 밤을 대비해서 잠깐 잤다. 칼의 방과 별개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던 곳이 부인의 방, 그러니까 내 침실이었다.

밤의 동침은 저번의 그 때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침실과 별도의 전용실. 반투명한 보라색 커튼이 은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목욕을 하고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 한참 걸렸다. 능숙한 시중인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별궁을 배정받아 놓고 일 년 중 대부분을 비워 놓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시중인이 고용되어 있을 리 없다. 옷을 벗고 씻는 것은 나 혼자 했다. 젊은 남자 하인은 필요 이상 조심스러웠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확실히 말리기까지 엄청나게 오래 걸리고 말았다.

방으로 들어간 시점에서 칼은 한 켠의 둥글고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묘한 차향이 퍼져나왔다.

"이 차는 뭐야?"

"……부부의 일에 도움을 주는 차인데, 그대도 마시겠는가."

흥분제 같은 역할인가 보다. 약의 힘을 빌릴 정도로 성기능이 모자란가. 칼은 목욕을 하고 나서 벗기기 쉽게 걸친 면 가운 하나를 입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머금고 잠깐 있다가 목으로 넘겼다.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나는 그가 권한 독한 향이 나는 차를 마시는 대신 칼에게 권유했다.

"이런 약 같은 것 말고 실제 준비 행위는 싫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무엇보다 내가 서투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대에게 맡기고 싶군."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그렇군."

의자에 앉아 있는 칼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매끈한 코 아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칼의 시선이 내 얼굴에 인접한 곳까지 따라왔다.

"키스는 할 줄 알지?"

"음."

키스를 유도하는 몸짓에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칼이었다. 간단히 입술이 닿아 오자, 그가 아주 목석은 아닌 듯 해 감격하여 칼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았다. 칼을 상대로는 첫 키스였다. 입술의 촉감이나 크기, 처음 접촉한 이후 움직이는 방식 같은 게 에이반과도 아스벨과도 많이 달랐다. 적극적인 대신 소극적이었고 행동 또한 과감하다기보다 조심스러운 쪽에 가깝다. 그러면서 접촉을 통해 얻는 이득이라면 챙길 것 다 챙겨 가며 점점 입술을 크게 벌리는 부분이 신기했다. 서투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능숙하기도 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신이 쏙 빠지는 입맞춤이었다.

숨막히는 첫 키스가 오래 지속되자 현기증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팔에 힘이 들어가며 칼의 어깨에 체중을 더 실었다. 내가 안겨드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자신의 목과 어깨에 휘감긴 내 손목을 붙잡고 아래로 풀어내렸다.

"으응……."

강제로 손가락 하나하나가 펼쳐지며 그의 손바닥과 맞닿는다. 손깍지를 낀 채 칼은 더욱 더 나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그의 가슴에 내 유방이 꽉 짓눌렸다.

호흡이 부족하여 숨이 점차로 가빠진다. 칼의 혀 아래를 살살 달래 주며 겨우 첫 입술을 뗐다. 얼굴을 여전히 맞단 채로 숨을 하아하아 내뱉었다. 칼의 젖은 입술이 내 입가에서 여전히 머무르고 있었다.

발 뒷꿈치에 힘을 주고, 잠시 여유를 가졌다. 완전히 풀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투정했다.

"엄청 잘 하잖아. 이런데도, 하기 싫다고?"

"……."

집요하게 혀를 빨아대자 살짝 가 버릴 뻔 했다. 아직도 혀뿌리가 얼얼하다. 나는 여전히 깍지 낀 상태인 칼의 손을 잡아올려 가슴에 꾹 눌렀다.

"다음은 여기. 나 가슴도 성감대인데, 잘만 만져 주면 여기만으로 갈 수도 있어."

"아……."

"속옷 입고 있으니까 벗겨 줘."

속옷은 디베르타의 제복과 벗기는 법이 같았다. 끈을 양쪽에서 연결하는 작은 금속 버클이 있고, 여길 강하게 당기면 끈 길이가 늘어나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위나 아래로 벗기면 된다. 설마 벗기는 법을 모를까 싶었는데 칼은 거칠게 재봉선 부분을 손으로 더듬거릴 뿐이었다.

"앗, 좀 더 자세히 봐봐, 벗기는 데가 어딘지."

일부러 칼의 허벅지에 무릎을 짚고 돋움하여 칼의 얼굴을 완전히 가슴으로 당겨 파묻히게 했다. 허둥대진 않았으나 꽤 놀란 듯 하다. 이 촉감이 싫진 않은지, 금방 나를 밀쳐낼 줄 알았는데 계속 얼굴을 가슴에 파묻은 채였다. 거친 숨결이 가슴골로 반복해서 느껴진다. 한동안 얌전히 구는 듯 했지만 점차 그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못 찾겠어? 여기 버클 쪽을 당기면 돼. 끈에 붙은 거."

"……완전히 함정이었군."

굳이 그럴 목적으로 가슴골을 유도한 건 아닌데 칼은 처참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다. 그렇게 헤맨 것 치고는 벗기는 법이 너무 간단했다. 사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따로 후크를 풀지 않아도, 그냥 당기기만 해도 충분히 벗길 수 있다니. 너무 노골적인 복장이 아닌가.

위아래를 고정하는 끈이 느슨해지자 가슴이 무게를 못 이기고 속옷 천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양쪽 버클이 다 풀린 속옷을 스스로 마저 벗어 의자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까 그가 속옷 벗기는 곳을 찾겠다며 슬쩍슬쩍 만져대서 그런지 유두 양쪽이 발갛게 솟아 있었다.

"보여? 나 유두 엄청 민감해서……, 만지면 금방 가 버리는데."

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유두를 만지려고 했다. 나는 스스로 가슴을 안아 가렸다.

"지금은 안 돼. 너무 잘 느껴서 금방 진이 빠져 버리니까."

"……."

"이제 아래 속옷도 벗겨 줘."

하의를 벗기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방법이 거의 같았으므로 칼은 별 문제 없이 내 팬티를 내려주었다. 속옷 거셋 부분에 애액이 실처럼 묻어 늘어졌다. 나는 속옷이 벗겨지자마자 그의 앞 탁자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아 다리를 벌렸다. 머리가 멍했다.

투명한 액으로 미끈미끈한 다리 사이가 환하게 드러났다.

"흐응, 핫!"

말하지도 않았는데 칼이 즉시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중심을 핥았다. 분명 전희는 즐기지 않는다고 한 10분쯤 전에 말했던 사람 맞나. 전희 과정 중 가장 잘 느끼는 가슴 애무를 생략한 것 치고 상당히 젖어 있어 그가 만지거나 입을 대는 데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젖은 것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으읏, 좋앙, 처, 처음인데 잘 하네……. 아, 아앗! 거기……!"

너무 능숙하게 빨아대는 바람에 허벅지가 흠칫흠칫 떨렸다. 발 끝을 오므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허리가 완전히 풀릴 것 같다. 아래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애액과 침이 섞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꽤나 흥분했는지 칼이 탁자 밑에 아예 무릎을 꿇고 앉아 가운 사이로 자기 페니스를 꺼내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자, 잠깐만! 뭘 하는 거야!"

"흐음?"

칼은 입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그의 턱을 밀어냈다.

"누가 자위해도 좋다고 했어?"

"……내 몸을 내가 만지는 것에도 허락이 필요한가?"

그가 흥분해서 거칠어진 저음으로 나직하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제멋대로군."

칼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뗐다.

"좋다. 에스트라를 어떻게 할지는 부인의 몫이니 납득은 안 되지만 일단 따르도록 하겠어."

내 다리 사이 그 곳에서 입술을 1센티도 떼지 않고 중얼거리던 칼이 다시 혀를 이용해 균열을 아래에서 위로 농밀하게 핥아올렸다. 손은 뒷짐을 지고 맞잡은 채였다. 낮의 그 냉랭하던 무표정이 환상인 것마냥 가슴 위부터 이마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기꺼이 내 생식기에 입술을 대고 있다. 어느 쪽을 진실로 믿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앙, 그, 그만, 잠깐, 그만……!"

분명 그만이라고 했는데 좀처럼 그의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남편의 상반신을 밀어낸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탁자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더 하면 갈 것 같아서, 하아, 안 돼. 하, 이, 이제 침대로 가자."

너무 핥아대서 그런지 다리 사이가 벌써 부은 것 같다. 두 번 비틀거렸을 때 칼이 못 봐주겠는지 내 몸을 와락 안아올렸다. 뜨겁고 거대한 남체에 옭아매이듯 안겨서 침대에 바로 뉘여졌다. 단단한 몸은 얼마든 매달려도 좋을 만큼 안전하고 강하게만 느껴진다. 침대에 누워 심장이 두근거리는 만치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내쉬며, 칼이 부벼 오는 페니스를 받아들였다.

"아, 아직 넣어도 된다고는……."

"더는, 더는 못 참겠소."

침대 위에서 좀 더 놀다가 본 행위로 진입할 예정이었는데. 이미 늦었다. 승낙하기가 무섭게 칼이 하체를 밀어붙여왔다. 양 다리를 활짝 벌리고 칼이 넣어 주는 페니스를 오물오물 집어삼켰다. 흥분한 질 안에 비록 두 번째지만 아플 정도로 버거운 귀두가 간신히 들어섰다. 주름이 역행하며 더욱 더 안쪽을 조여든다.

"아으으읏!"

칼은 허리를 짧게 쳐대며 내 몸 위로 상체를 박고서 중얼거렸다.

"부인, 내가, 알아서 움직여도 되겠소?"

"아하앙! 아, 아으으윽!"

돌기까지 솟아오른 귀두가 질 안 극점을 까득까득 긁어대자 긴 절정이 이어졌다. 역시 이렇게 흥분할 때까지 빨게 하는 게 아니었어. 너무 달아오른 몸에 이 정도의 자극이라니.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리가 크다는 걸 알면서도 절정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칼이 점점 더 깊숙이 물건을 박아넣으며 신음했다.

"부인……. 평소에 이런, 이런 일을 다른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자극이……."

"무, 무슨, 아,아읏! 거, 거기……. 살살……. 아하아으흣!!"

기본적인 성행위조차 낯설어 하더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잔인할 정도로 느끼는 부분만 긁어내는 것이다. 기분 좋아, 완전히 칼의 물건에 중독될 지경이다. 나는 연달은 절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칼의 가슴에 헛손질을 했다.

뒤늦게 가슴 애무에 대한 말이 생각났는지, 흐트러진 표정으로 내게 박아대던 그가 고개를 숙여 양쪽 유두를 서슴없이 빨아들였다. 에이반에게 훈련받은 것이지만 가슴에 자극이 주어지면 습관적으로 가슴 쪽을 더욱 내밀게 된다. 나는 양쪽에서 오는 자극으로 동시에 절정에 이르면서 가볍게 기절할 뻔 하는 경험을 했다.

"으흐응."

"좀 더……, 부인……."

꽤나 박아댄 것 같은데 그의 물건은 아직도 사정하려면 먼 것 같다. 조루인 남자도 질색이었지만 이런 것도……. 행복한 지옥이었다.

자세 때문에 더욱 심하게 느끼는 바람에, 중간부터는 차라리 후배위를 권했는데 그러고도 칼은 한참을 찔러댔다. 뒤에서 엉덩이를 자꾸 쓰다듬는 바람에 끝나고 나니 엉덩이까지 부을 지경이었다. 기절할 정도로 여러 차례 가 버린 뒤에야 자신의 것을 뽑아냈다. 분명히 기억하는데, 열 번째쯤이었던가. 가 버리면서 소변까지 내보내 버린 것이다. 에이반에게서 의도적으로 심한 자극을 받을 때 말고는 한 번도 이런 실수 한 적 없었는데…….

제정신이 아닌 채 반쯤 울면서 그 위에서 다시 섹스당했다. 칼은 자기 허벅지를 적시는 액체를 결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섹스 시간은 훨씬 길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이번에는 끝날 때쯤 의식이 있어서 칼이 사정 직후 숨을 고르며 내게 팔베게를 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은 굳이 해 줄 필요 없었는데. 내가 그 때 한 말에 신경이라도 쓰는 건가.

"부인, 많이 더러워졌는데 씻고 들어가겠어?"

칼이 내게 팔을 내어 주고 나를 안은 채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설 수도 없는데 씻으라고? 씻겨 주기라도 하게? 내 거부를 이해 못한 칼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아래 쪽만 조금 닦는 편이. 마력은 받아낼 만 한가? 괜찮나?"

"……."

정사 뒤의 나른한 목소리는 만족감이 가득 더해져 너무 달디 달아 듣기에 좋았다. 몸이 조금 식자, 칼은 먼저 씻으러 가려는지 베개를 끌어당겨 내 목에 팔 대신 받쳐 주었다.

그대로 내려갈 줄 알았던 칼이 자세를 바꾸더니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까 그가 실컷 빨아 침투성이로 만들었던 가슴을 베어물었다. 유두를 노리며 빨아대는 대신 혀를 이용해 깨끗이 핥아냈다. 가슴도 팔도 손가락도. 그의 몸이 닿았던 부분 하나하나를 혀로 닦아냈다.

내가 당황한 것은 아래쪽이었다. 씻기 싫다는 말을 오해라도 한 건지, 애액과 정액 범벅의 하반신을 혀로 깨끗이 핥아 청소했다. 발가락 사이까지 하나하나 빨아 준 다음에 다시 자리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 주고서는 그냥 떠나 버렸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남자였다.

*

수업을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녹티라의 날부터 자체휴강을 갖고 싶어졌다.

'남자를 모르스의 날에 만날 게 아니라 그 전날인 디에스의 날에 만났어야…….'

열심히 밤일한 뒤에는 여자라도 푹 쉬고 싶다고. 아니면 밤이 아니라 환하게 밝은 아침에 그 짓을 해야 하는 건가. 새벽에 잠을 깨서 찝찝한 몸을 씻고 난 뒤에 다시 잠들었는데, 도무지 일어나기가 싫은 것이다.

결국 내 건강도 걱정이 되니 그냥 쉬라는 칼의 무책임한 말에 또다시 결석을 하기로 마음먹고 말았다.

그렇다고 칼과 또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침부터 일이 있다며 나를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떴다가 오후쯤 되어 돌아왔고, 나는 그 때까지 커튼을 친 조용한 내 방에서 잠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왕족인 칼에게 배정된 궁전이었고 그 곳의 부인용 침실인 이 방 역시 '내 방'이 맞지만 아르트리어 저택의 내 방과는 꽤나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 애초에 꾸며진 것도 마치 고급 호텔 방처럼 누가 와서 자게 되든 취향에 거슬리지 않을 수 있도록 무난하게 통일된 디자인이고 장소도 내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왕궁 내부였기 때문이다.

이 방의 가구들이 쾌적하고 안락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두기로 했다. 내 방이라고 생각하면 어색하고 부담스럽지만 공짜 호텔이라 여기고 보니 꽤나 괜찮은 방이었다.

'아, 기분 좋다♡'

매일 하인이 깨끗이 갈아 주는 침구, 회색 빛 도는 고급스러운 캐노피 장식, 천정에는 화려한 전통 무늬가 은은하게 그려져 있고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시종을 부르는 종까지 붙어 있다. 줄을 당기고 원하는 음료를 말하면 즉시 차려서 테이블에 준비해 주고. 이미 한 번 따끈한 꿀차를 준비해 받았었다.

'여기에 잘생긴데다 자상하고 부드럽기까지 한 남편은 사치겠지. 그래…….'

잘생긴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괜히 관계만 나빠지기 전에 투정 부린 건 사과해야겠다.

"들어가도 괜찮겠나."

그 때 카이제르가 문 밖에서 노크를 하며 말했다. 나는 서둘러 승낙했다. 그는 외출복에서 코트만 벗은 차림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려다 불이 다 꺼져 있자 멈칫했다.

"쉬고 있던 중인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니 다음에 다시 오지."

"으응, 아냐. 일어나려던 중이었어."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얇은 가운이 이불에 쓸려 허벅지를 훤히 드러냈다. 다시 가운을 끌어당겨 옷차림을 정리했다.

방에 불이 밝혀지고, 나는 슬리퍼 차림으로 탁자에 와서 앉았다. 다 식은 꿀차가 아직 반쯤 남은 채 잔에 들어있었다. 찻잔을 옆으로 슥 밀어 치웠다.

"……어제는."

"저기 그, 카이제르. 어제는 미안했어. 내가 너무 투정부렸지……. 아무래도 에이반이 없어서 최근 외로움을 탔었나 봐."

내 사과에 그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신기하게도 넋을 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뒤늦게 대답했다.

"아니, 그 정도 투정은 신경쓰지 않아."

"앞으로는 좀 더 어른스럽게 굴도록 노력해 볼게."

"어른스럽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내게 비하면 한참 어리지 않은가."

최소한 아주 다정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는 무척이나 너그러운 남편이었다. 그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부인이 무슨 소문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문만큼 내가 까다로운 인간은 아니야. 내 앞에서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다. 마치 부인은 낮과 밤이 다른 사람 같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칼리온의 집행기사 일을 하다 보면, 거의 항상 타인을 판결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타인이 저지른 죄의 경중을 판단하고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결과물을 늘 도출해야 하지.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마냥 부인에게 엄격할 생각은 없네. 부인은 업무 상대가 아니고……, 가족이지 않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인이라는 호칭은 꼬박꼬박 쓰네. 내가 아니라 제 3자에게 보고하는 것 같은 말투야."

"부인을 부인이라 부르는 것이 이상한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 하긴 상대가 나이 든 남자니 별 수 있나. 나는 도전적으로 그에게 요구했다.

"'이나'라고 불러 볼래?"

"……."

"지금 말고 밤에, 다정한 목소리로 '이나'라고 불리고 싶어. 다음에는 그렇게 불러 줄 거지?"

카이제르는 표정을 찌푸리진 않았지만 곤란한 기색이었다.

"다정한 목소리는……."

"알았어, 꼭 다정하게 안 불러도 되니까!"

어제는 분명 다정하게 불러 준 것 같은데 착각일까? 내 부탁에 카이제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을 불렀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들어오자 그에게 부탁했다.

"여기 올 때 입었던 옷이랑, 이따 점심식사 하고 바로 돌아갈 거니 마차도 준비 좀."

"하루 더 묵지 않는 건가?"

"하루 더?"

보통 며칠은 묵고 가는 게 예의인가? 하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부부인데 하루만 딱 묵고 가 버리는 쪽이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다음 날의 스케줄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이제르도 일이 있을 거고, 나도 내일 수업 준비를 해야 되니까."

"수업……, 때문이라고? 혹시 조만간 시험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시험이라니?"

"스칼라 시험을 말하는 것이다."

"뭐어? 아직 기초 사회 교육도 다 못 뗐는데 스칼라 시험을 어떻게 쳐. 내가 디베르타의 수업을 꼬박꼬박 듣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에이반도 그러더니, 카이제르도 내가 평범한 학생들처럼 수업에 성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칼라 시험 정도씩이나 치를 게 아니면 자유롭게 놀며 빠져도 된다는 의미겠지. 물론 예전이었다면 옳다꾸나 게으름을 부려댔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이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놀며 학교를 빠져도 무방하는 말을 듣는다면 자의로 수업에 참석하는 날이 얼마 없었겠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이 곳에 오기 직전인 스무 살의 나는 어느 정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공부 따위는 할 필요 없는 계급제 세계에 떨어졌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상이 뜻대로 흘러갈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어린애가 아니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가서 돈을 벌라는 강요를 받은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을지도.'

국립대학에 합격하고 장학금까지 받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고졸 상태로 공장이나 급료가 낮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결말은 피했으니까. 몇 배로 갚겠다고 애원해서 대학 학비를 겨우 빌리는 건 첫째 언니가 이미 써 먹은 방식인데 언니는 졸업을 하고서도 생각보다 돈을 잘 벌어 오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아무리 부탁해도 부모님은 꿈쩍하지 않았다. 둘째 언니는 집에서 나와 혼자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아마 졸업해도 그걸 갚느라 한참이 걸리겠지. 남들은 다 시켜 준다는 재수 같은 것, 우리 집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여기도 장학금 제도 같은 게 있을까? 아마 여자를 상대로 한 장학금 같은 건 없겠지. 사실 여기서 여자는 수업을 거의 공짜로 들을 수 있기도 하고. 나는 앞으로 결혼 서류 한 장 때문에 매달 내 계좌에 사치하며 먹고 살기 충분한 돈을 품위유지비로 입금해 줄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의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적어도 당장 주어진 일에 한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카이제르는 몇 번 정도 더 묵고 가라고 권했으나 나는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거나, 아직 그의 용건이 남아 있다면 수업 정도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봤더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마차를 타고 디베르타로 귀가하고서야 뒤늦게 생각이 들었다.

'설마 하루 더 나와 자고 싶어서?'

그 남자가 설마 오늘까지 섹스하고 싶어서 내게 하루 더 묵어 가 달라고 부탁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언제는 여자와 성 교섭을 치루지 않아도 멀쩡하다더니……. 뭐, 사람이 가끔은 동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려다 방문 앞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연이였다. 항상 시간이 남아돌아서인지 그녀는 용건이 있으면 이곳 고유 방식대로 편지를 보내 만날 시간을 잡는 대신에 그냥 하염없이 내 방 앞에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그녀의 안색이 꽤 나아진 것 같자 나는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지연이니? 어떻게 된 일이야? 기분은 좀 괜찮아졌고?"

"언니……, 저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이 때쯤, 내게 달가운 소식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을 감지했다. 그렇지만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지연이를 초대했다.

"……."

약간 어렵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녀가 지스테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연인간의 마음이란 외부인의 잣대로 판단하기 힘든 것이니까.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지스테가 절실하게 용서를 빌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허황된 꿈을 접고, 최근의 노동으로 간신히 번 여비를 이용하여 엔차라는 시골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성실한 소작농으로 인생을 재시작할 것이라고. 벌이는 적겠지만, 형제들과 힘을 합치면 그럭저럭 배를 곯지 않고 먹고 살 정도는 되겠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지스테와 동행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관리소에, 엔차 관할 지역의 디베르타로 옮기고 싶다고 어제 말했어요. 호위하는 가드의 일정이 맞으면 그 때라도 즉시 출발해야 할 거에요. 수도에서 지방, 편도로 내려가는 건 자유지만 올라오는 건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대요. 아마 못 올라오게 될 수도 있어요……."

"여비……, 좀 보태 줘도 괜찮을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리라. 그녀는 낯선 곳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와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충동적인 결정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책임져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정말 고마워요, 언니."

그녀는 약간 민망하다는 듯, 하지만 기쁘게 웃으며 고마워했다. 돈이 한 푼도 없어서야, 멀리로 여행을 가는 데 곤란하기 그지없었겠지.

떠난 지연이의 방에 모르는 이름의 팻말이 걸리게 된 것은 약 보름 정도 지난 날이었다.

*

요즘은 거의 항상 북서쪽의 정원에서 4계급 친구들과 만나곤 하는데, 각자 자기 몫만큼 음식을 가져 와서 나누어 먹는 게 일상이었다. 저번 주말이었던가, 그녀들의 권유로 서쪽 거리에 쇼핑을 한 번 나갔다 온 적도 있다. 항상 주문해서 맞춘 옷만 입었는데 서쪽 거리의 가게에는 의외로 전시된 장신구들이 많아서 구경만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여가 시간의 전부를 그녀들과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잘 먹었어. 여긴 너무 비싸서 자주 못 오거든. 재료가 들어올 때 됐는데 마침 갖고 싶었던 책도 있어서 고민했었는데."

전에 두 번 만났던, 푸른 머리카락의 3계급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키셸이라고 소개했다. 대체 빚은 언제 갚을 거냐고 핀잔을 하더니만 기어코 날 잡아 식사를 얻어 먹었다. 그녀가 주문한 바닷가재 풀 코스 요리 2인분은 에이반에게서 받는 내 한 달 용돈을 한번에 반 이상 소진하게 만들었다. 맛은 있지만 바닷가재는 결계 바깥의 어업지역에서 보존 운송되는 식재였기 때문에 아무 때나 먹을 수도 없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싼 메뉴였다.

"……."

적은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하루만에 절반이나 써 버리다니……. 어차피 지금의 나는 당장 돈 쓸 곳도 없고 이번 달부터는 칼이 주는 돈도 있어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어쨌든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녀의 위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엘파자르 행정차관의 예비 며느리였다. 정말 치명적인 사유가 아닌 이상 상류 계급에서 정해진 약혼은 취소되는 경우가 없음을 감안하면 그냥 며느리라고 봐도 상관 없다고,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엘파자르 가의 장남이자 내 첫 약혼자인 트리우스만 해도 혼인 가능하게 되기까지 최소 십 년은 남았단 말야. 그 때까지 바깥 활동을 굳이 안 하기도 싫고 무시받고 살기도 싫어서 시험 쳐서 스칼라에 합격했어."

그녀가 다른 3계급 여성들보다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다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거처는 엘파자르 차관의 저택이었고 일과로 일주일 중 며칠은 매일 아침 디베르타에 들러 책을 읽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더라. 저택에 자기만의 개인 서재도 있다는 여자가 매주 들를 정도로 디베르타에는 책이 많았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한 가지 제안했다.

"배부르고 기분도 좋으니 선심 써서 말해 주는 건데, 그 여자들이랑 노는 게 지루하면 내가 이 쪽 모임에 초대해 줄 수도 있어."

"……모임?"

"뭐, 모임이라기엔 아직 겨우 두 명 뿐이지만."

지금의 모임도 혼자 쓸쓸하게 밥을 먹을 때 빼고는 사실상 크게 도움이 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참여해 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떠난 고향의 지인이 잘 적응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쯤 수도 남부를 지나고 있을 원정대로부터 우편물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우편물은 원정대원의 가족들에게 가기 전 일차적으로 왕궁에서 간략하게 검열이 되는데, 카이제르가 내 이름으로 온 우편물을 따로 빼 놓았으니 받으러 오라고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당연히 에이반이 보낸 것이었다. 며칠만 더 기다리면 디베르타로 무사히 배달이 올 테지만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편지를 읽고 싶었기에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그나저나 사람을 보내 이런 소식까지 알릴 정도면, 차라리 사람을 보낼 때 편지도 같이 보내 주면 되지 않나?'

굳이 왜 두 번 수고가 들어야 하는지 의아함도 들긴 했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는 수업 생각도 않고 냉큼 그가 보낸 마차에 올라탔다.

당연히 편지만 건네받을 셈으로 방문한지라 디베르타 제복에 숄만 걸친 모습으로 카이제르의 별궁 정문을 가로질렀다. 전과 같이 2층 응접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들어가도 된다는 그리시니의 말만 듣고 응접실 문을 열어젖인 내게 보인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이제르와 그런 그를 마주본 자리의 낯선 뒤통수였다. 머리숱이 약간 적은 듯한 은회색 머리를 가르마 타서 단정히 넘긴 중년의 남성이다. 나는 꽤 중요한 얘기를 하던 것 같은 분위기에 당황하여 그만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 손님이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

"아니야, 부인. 마침 시간 맞춰 잘 왔네."

문을 닫고 조심스레 나가려던 나를 그가 말로서 옭아맸다. 마침 잘 왔다고? 나는 그 말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머뭇머뭇 그의 곁으로 가서 섰다. 카이제르가 표정 없이 자리를 권했다.

"편지를 가지러 왔지? 잠깐만 여기 앉아 기다려 주겠나. 아아, 이 쪽 손님은 국무부 장관인 라페스타 공이다. 라페스타 공, 아내인 유이나입니다."

"……."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년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나야 갑자기 낯선 사람을 소개받아서 그렇다지만 그 남자는 왜 저렇게 낭패한 표정인지 모르겠다. 그가 먼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럽지만 이렇게 배안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리아나스 공의 부인이 되실 내정자라고."

"아, 네. 반가워요……."

정중한 남자의 어법은 그가 장관직에 올라 있을 만큼 높은 지위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놓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라페스타 장관의 이름을 어마어마하게 높아 보이는 귀부인의 입에서 여러 번 들은 적 있다. 카이제르의 옆 자리에 앉아 긴장하여 굳어진 내 어깨를 따뜻한 손바닥이 쓰다듬었다.

"내정자가 아니라 이미 서류상으로도 배우자입니다. 부인의 희망에 따라 결혼식만을 늦게 준비하게 되어 아직 남들에게 알려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서류상 부인, 이란 말씀이십니까?"

카이제르는 뭘 그런 걸 다시 묻느냐는 듯 고개만 까닥이며 내 어깨를 감쌌다. 중후한 톤의 목소리와 정중한 말투임에도 평상시의 성의 없고 단순명료한 어조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듣는 사람으로서는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류를 제출한 지도 꽤 됐고, 이미 실질적으로 부부 생활을 영위한 지도 어느 정도 되었습니다. 좋은 제안을 하러 와 주신 듯 하오나 유감이로군요."

"……."

아직 한 달밖에 안 되지 않았나. 그 정도면 충분히 신혼일진대 카이제르의 뉘앙스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입을 여는 대신 그냥 가만히 그의 옆구리에 기대 앉아 있기만 했다. 물끄러미 장관이라는 남자의 슬슬 벗겨져 가는 앞머리를 쳐다보자 그는 뜨끔한 얼굴로 옆에 놓아 둔 모자를 썼다.

"이, 이거 실례했군요. 그렇다면 부인께서도 오셨으니 저는 슬슬 가 볼까 합니다."

"그리시니, 배웅을 부탁하지."

카이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시니가 응접실로 들어가서 라페스타 장관을 모시고 나갔다. 나는 장관이 나간 뒤 그가 앉았던 맞은 편 소파를 훌쩍 차지하며, 카이제르에게 물었다.

"장관이라는 사람, 혹시 자기 며느리를 소개시켜 주러 온 거야?"

"잘 아시는군, 부인. 라페스타 장관은 꽤 권력욕이 있는 인물이지. 그래도 이번엔 부인이 와 준 덕분에 금세 물러난 것 같군."

"아, 얼마 전에 내 애인도 저 사람 며느리를 소개받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 받았었거든……."

그 며느리 되는 여자가 펠리시아라는 이름이었던가. 당사자의 기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광고하며 이곳저곳으로 소개시키고 다니는 듯 했다. 카이제르가 혀를 찼다.

"그런……. 그것은 꽤나 마음이 상했겠군."

"으응."

나는 무심결에 대답하고 나서 카이제르가 어쩌면 위로의 의도로 방금의 한 마디를 던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눈치챘다. 정말 그런가? 워낙 지나가듯 무심하게 내뱉은 터라 긴가민가하다. 아무 의미 없는 문장으로 여기고 그냥 넘어갔는데 내 반응이 시원찮자 그 뒤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 애인이라면 아스벨루스 카스칼 경을 말하는 것이겠지."

"맞아, 아스벨."

그는 사람들과 어지간히 친하지 않아도 보통 풀 네임이 아닌 '아스벨'로 통용되는 듯 하다. 나름대로 유명인사라서 그런가.

"그와 꽤나 유대가 깊은 모양이로군."

"정략 관계가 아니라 좋아서 만나는 거니까……."

"좋아서, 인가."

"응, 아스벨이랑은 완전 독점 관계야."

무심결에 자랑하듯 말했다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 앞에서 애인 자랑을 하는 건 역시 내게 있어 아직까지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서둘러 편지 얘기를 꺼냈다. 내가 편지를 받고 전부 읽을 때까지 딱히 우리 사이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일은 없었다.

에이반은 종이 앞뒤로 세 장씩이나 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자신은 무사하니 너무 걱정 말라고, 얼마 전에 얻은 전리품을 보내니 그걸로 새 구두나 장신구를 해 입으라고 적어 놓았다. 전리품은 집사 편으로 보내기 때문에 동봉되지는 않았지만 반짝이는 은빛이 도는 흰색 계통의 마물 가죽이라는 듯 싶다. 은색 도는 가죽이라, 신기할 것 같긴 하다. 마물 토벌에 공로를 세운 경우 해당하는 마물의 전리품을 본인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에이반은 마물의 목을 단숨에 꿰뚫어 죽였다고 자랑했다. 고개를 갸웃했다. 마물의 가죽에 흠집을 내지 않고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아직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물 전리품이란, 왠지 괴물 껍데기와 비슷한 어감이라 꺼려지기도 했었는데, 의외로 빛깔이 아름답고 소재가 견고하여 거의 2계급 이상의 남녀만 걸칠 수 있는 고급 장식 재료라고 한다. 원정 시기가 지나면 귀부인들은 제각기 남편들이 구해 온 마물의 가죽과 털로 만든 복장을 뽐내며 다닌다고. 물론 결계 안쪽 기후에서 평상복으로 늘 입기에는 무겁고 통기성도 좋은 편이 아니라 그저 남편의 무용을 자랑하는 의례에 불과하긴 했다.

아직 나는 이걸 해 입는다고 딱히 알아 줄 사람도 보여 줄 사람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그냥 넘겨버리는 일 없이 전리품을 선물해 왔다. 나중에 저택으로 보러 가면 되겠지? 편지를 두 번 연달아 읽고 고이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카이제르는 내가 편지를 읽는 내내 팔짱을 낀 채 나를 지켜보더니, 종이를 접어 넣고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행동까지도 그저 관조하고 있었다.

"……부인."

"앗, 아, 응?"

나는 에이반의 편지로 인한 여운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카이제르가 편지봉투를 힐끔대며 넌지시 물었다.

"오늘 묵고 갈 건가?"

"묵고 가다니, 난 그냥 편지만……. 아니, 응, 뭐. 칼만 괜찮다면 묵고 가려고 해."

뒤늦게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틀린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카이제르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를 해 두겠다고 말했다. 내 침실을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밤의 그 일을 준비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해가 져 보면 알 일이다.

왕궁의 식사는 내가 지금껏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맛있는 수준까지는 되었다. 역시 최근 먹어 본 그 바닷가재 요리가 기억에 오래 남긴 했다. 나는 잘 차려진 정찬 테이블 위에서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푸딩 잔을 집어들었다.

화려한 문양의 흰색 도자기 잔, 그 안에 우유 푸딩이 푸들거리며 담겨 있었고 푸딩의 정점에는 흰 설탕이 입혀진 생딸기 하나가 올라가 있다. 아직 스테이크를 다 썰어 먹기도 전이지만 도저히 푸딩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디저트 스푼으로 한 입 떠 먹었다.

얇은 은제 스푼을 대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보드라운 푸딩의 식감이 입에서 녹아내린다. 전에도 이것과 같은 디저트가 나왔었는데 다시 먹어도 맛있었다. 마지막 한 입은 딸기랑 같이 먹어버렸다. 새콤한 딸기 즙과 동량의 달콤함이 섞여 우유 푸딩에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도중에 못 참고 먹어버렸기 때문에, 정작 메인디쉬를 전부 비우고 나서 내 몫으로 남은 것은 장식용으로 썰어놓은 과일 뿐이었다.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카이제르가 천천히 자기 몫으로 나온 디저트를 집어 내 앞으로 내려놓았다. 내 몫의 빈 푸딩 접시 바로 옆이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의 눈치를 보며 도자기 잔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내가 푸딩을 두 접시째 다 먹을 때까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민망했다.

저녁에는 욕조에서 너무 오래 미적거린 덕분에 나왔을 때 몸이 후끈후끈했다. 오늘따라 시중인이 뜨거운 물을 과하게 추가한 탓이었다. 시원한 곳으로 나오니 한결 낫다. 시중인 한 명이 부채를 부쳐 주며, 다른 한 명은 머리를 말렸다. 나는 답답함에 목욕 가운을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안락의자에서 나른함을 즐겼다.

아직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했는데 못 보던 시종이 들어와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리아나스 공께서 지금 들어와도 괜찮은지 물으십니다."

작은 소리로 승낙하자 옆에 붙어 있던 하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머지 않아 카이제르의 나직한 소리가 약간 떨어진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완전히 섹스 준비를 끝마친 상태 같았다. 그는 잠깐 내가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못 참고 한 마디 던졌다.

"부인, 오늘따라 준비가 많이 늦는군."

나는 눈을 한 쪽만 반쯤 뜬 채로 대답했다.

"카이제르? 미안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마를 때까지 꽤 걸릴 텐데."

"아니. 괜찮네, 천천히 하게."

화장대의 거울 가장자리를 통해 그가 뒤쪽의 소파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말은 천천히 하라고 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묘한 압박을 주는 듯 해서 내 머리를 손질하는 시종의 손이 약 두 배는 빨라졌다.

"……."

겨우 물기를 없애놓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결이 상하지 않게 부드러운 리본으로 묶었다. 느슨하게 묶었기 때문에 자기 직전에 다른 매듭으로 또 한 번 고쳐 묶어야 한다.

부부 방에 단 둘이 남자 그는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다. 전과 다른 부분이라면 가슴부터 하반신까지가 매끈하고 반질반질하게 밀려 있는 점이었다. 원래도 털 색이 옅어서 눈에 별로 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털이 결코 적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에이반이 전에 자신은 털을 깎지 않으면 보기에 너무 지저분하다고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 갈 정도라면 설명이 될까.

"……."

"그 때는 내가 준비가 많이 미흡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는데, 미처 모르고 부인에게만 맡겨 버렸군."

한 명의 여성이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만큼 성교육에서는 위생이 특히 강조되었다. 생식기의 체모가 무성할 경우에 가급적 정리를 권장하는 것도 그 일부였다. 아직 나는 상대하는 남자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 본래의 상태 그대로도 상관 없었는데. 거기에 또 시키지도 않은 일이 하나 더. 앞이 느슨한 가운 틈으로 그의 손이 들어와 내 양가슴을 꺼냈다. 완전히 열중한 표정으로 가슴을 번갈아 입으로 애무했다.

'오늘은 좀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아래부터 핥아도 되는데…….'

게다가 옷 입은 채로라니……, 감질나……. 가슴은 가슴대로 내맡기고 나 스스로 카이제르의 무릎 위로 올라가서 가운 사이로 우뚝 선 그의 물건에 내 하반신을 비볐다. 가슴을 쭉쭉 빨리면서 클리토리스와 민감한 질구 주변을 남성기의 돌기에 의도적으로 문지르며 쾌감을 추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돌기 모양, 중독될 것 같아. 문질러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에이반도 아스벨도 나중에 나이가 들고 안정기에 접어서면 이렇게 성기가 극단적으로 변형되는 걸까. 아니면 카이제르가 유별난 건가? 다리 사이에 대고 비비기만 해도 좋은데 넣기까지 하면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가슴을 빨고 있느라 나보다 아래 눈높이에 존재하는 카이제르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얇은 은색에 가까운 금발머리는 손으로 그러쥐면 손가락 사이에 머무르지 않고 스르르 빠져나가는 정도의 길이였다. 손가락에 들어올 듯 말 듯 사락거리는 머리칼의 감촉이 좋았다. 힘주어 꽉 잡으면 머리카락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세게 쥐면 기분 나빠하겠지.

내 손끝이 자꾸 머리카락에 머무르자 그가 갑자기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잡고 싶은가?"

"어?"

"흥분이 격해지면 상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기도 한다고. 하지만 내 머리에는 잡을 만한 데가 많이 없군."

"아니……, 그런 습관은 없는 것 같아. 아마도."

절정의 극치에 달하면 무슨 짓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 완전히 없다고는 하기 힘들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상대의 가슴팍에 다음 날 아침 모르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자주 있었고.

"그 밖에, 부인만의 성벽이 있다면 말해 주지 않겠어. 종류에 따라서 맞춰 주도록 노력은 해 보겠다."

가슴에서 빠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허리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칼의 어깨에 기댔다.

"벼, 별로 성벽, 이라고 할 만한 건……. 특이한 점이라면 나, 나, 읏, 좀 소리를 못 참는 편이고……."

"그리고?"

칼의 입에서 떨어진 유두가 다시 잡혀 물릴 때마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 예민한 편……, 남자한테 아, 안기는 것도, 흐윽, 조, 좋아하고."

"……또."

"또, 또 내가 위에서 깔고 움직이는 거, 좋아하지만……. 으흣……!!"

성적 취향이라고 해도 그 정도 뿐이다. 상대를 묶는 걸 좋아한다던가, 욕을 하는 걸 좋아한다던가, 그런 과격한 것은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온 몸이 저릿저릿했다. 칼이 자세를 고쳐 나를 안았다.

침대에 나를 제대로 눕히고 가운의 끈을 풀었다. 칼의 두꺼운 손끝이 내 음핵과 질구를 스쳤다. 입술로는 여전히 가슴을 훑는다.

"하아, 하아……."

"다른 곳 중에서는 없나?"

눈을 감고, 칼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방금 완전히 가게 한 유두를 물고 있던 입술을 떼고 혀로 반질반질해진 유륜을 핥았다.

"목 뒤쪽……, 그리고 귀……."

타인의 혀가 귀 안쪽을 쑤시고 들어왔다. 귀라는 게 귓바퀴 쪽을 말하는 것 뿐 이렇게 안쪽은 아닌데, 하지만 안쪽도 나쁘지 않다. 얕은 신음소리를 내자 칼의 손이 베개 밑으로 들어와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잠, 아흣!"

"입술은?"

"……."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에 뭉클하니 부드러운 촉감이 들이닥쳐 숨길을 틀어막는다. 한참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몇 번이나 키스하며 생각하는데, 횟수가 많지 않아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제 성격보다 부드러운 키스를 하는 편인 듯 했다. 능숙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자극적인 움직임도 크지 않고 마치 풋사랑처럼 달큰한 느낌이었다.

"목덜미, 귀, 입술, 그 다음은?"

"그, 그리고 겨드랑이……."

약속한 것처럼 다음 성감대를 말하면 그는 그 곳으로 혀부터 가져간다. 겨드랑이를 베어 물고 그 주변을 혀로 살살 핥았다. 어디의 애무든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향료의 냄새가 꽤 좋군. 그리고 다음은 엉덩이?"

대체로는 답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부드럽고 적극적인 애무에 취해서 멍하게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애무당하면 막상 삽입할 때 몸이 엄청나게 놀랄 텐데. 그런 거대하고 흉물스런 것……. 생각한 것만으로 바짝 긴장되었다.

"다음은?"

"다음엔 엉덩이 구멍……, 아, 아니."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에이반과 비슷한 식으로 물어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단어가 튀어나갔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말해서는 곤란한 단어를 말해 버렸다는 걸 안 순간 이미 그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거, 거기……, 굳이 안 해도 돼요. 쓰, 쓸 때만 쓰는 곳이라……."

에이반에게만 주로 당하던 곳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하는 것 같은 말투가 나와 버렸다. 구멍 주위를 핥던 혀가 잠깐 떨어졌다.

"뭘 발랐나?"

잠깐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더듬더듬 대답했다.

"으응? 에, 에이반이 늘 발라 주는 거……. 무슨 약인지 잘 모르는데 연한 노란색이고……."

"마력 감응제를 쓴 건가. 단 액체가 넘치는군."

혀가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잘 빨 수 있도록 다리를 벌렸다. 완전히 습관적인 자세였다.

내가 애널 애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그가 한층 더 격렬하게 빨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엉덩이를 핥고 싶어한다고 여겨 내가 자포자기하듯 입을 다문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칼의 혀는 이미 삼분의 일 가까이 내 엉덩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남자의 혀는 두꺼워서 그 정도만 해도 구멍이 꽤 많이 벌어진 느낌이다. 주로 입술로 애무를 하던 칼이 입을 떼고 내 다리 사이에 자리잡았다. 육중하고 두꺼운 남성기가 준비된 채 다리 사이에서 잠시 대기했다.

"아흐으응!!"

세 번째쯤 되면 유별난 삽입감 정도는 기억할 때도 됐다. 하지만 박힐 때마다 저번 회차때 느낀 것 이상으로 속이 긁히며 전신이 쾌감으로 부들부들 울린다. 칼이 제 물건을 반쯤 밀어넣은 채 더욱 움직이기 편하도록 자세를 잡았다.

"부인, 위로 올라오겠는가."

"모, 못 하겠어……. 하응."

아래서 바르작대기만 하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칼이 자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끼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듯 하다.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 가 버릴 것 같다.

"후우, 부인. 꽤나 금세 느끼시는군. 아니면 내가 불감인 편인가? 듣기로는 쌍방이 동시에 끝내는 편이 좋다는데."

귀 안을 울려대는 낮은 진동에 바로 절정에 치달은 몸 속은 그의 물건을 꽉 조여댔다. 나는 흐느끼며 그에게 앙탈을 부렸다.

"부, 불감이야? 내 꺼 기분 안 좋아?"

"아니……. 충분히 좋다."

카이제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며 살짝 머뭇거리는 대답이 이어졌다. 어째서일까. 그의 물건이 너무 두꺼워서 제대로 조이지 못하나? 아니면 너무 과하게 느껴 버려서 오히려 그가 못 느끼는 건가?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다른 남자들은 어, 엄청 기분 좋다는데……. 하응, 괴, 굉장한 명기라고……."

"아아, 그런 것 같아."

"하읏, 하지만……!"

칼이 뭉근하게 안쪽을 문질러대며 나를 껴안고 밀착했다. 기절할 것 같은 쾌감에 등줄기가 파드득 경련한다.

"부인이 쉽게 느끼는 점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나는 뿌듯하게 끌어안기며 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래에서 박혀오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그는 열기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한, 남자의 얼굴이다.

"아, 핫, 너, 넘 강해……. 앗, 좋아, 안돼, 아, 안돼엣……!"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숨을 몰아쉬며 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피스톤 속도가 일정하게 빨라졌다.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파고드는 자극을 이길 수가 없다. 나는 마지막엔 거의 울다시피 비명을 지르며 소변을 쏟아내는 것과 동시에 가버리고 말았다.

몇 번이나 절정과 비슷한 시점 실금하게 만들어 버린 난폭한 물건은 한참을 내 안에서 여운을 즐기다가 내가 우는 소리를 내자 천천히 빠져나왔다.

"흐으……, 그니까 거기는, 자극하면 안 된다고……."

매번 사타구니며 아랫배며 허벅지까지 제 부인의 소변으로 엉망이 되고서도 그는 자제라는 것을 몰랐다. 나 역시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탓하며 전적으로 상황을 그 탓으로 돌리자, 칼이 묘한 얼굴을 했다. 실수는 내가 해 놓고 괜히 그를 탓한다고 느껴서일까. 약간 미안해져서 곧 사과하려는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부인, 내가 정말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살풋 미소지었다. 순간 정수리 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그는 과묵할 뿐 절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고, 유흥에 흥미가 없을 뿐 근본적으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내 앞에 가지런히 꿇어앉은 그는 발등에서부터 천천히, 내 몸에 묻은 체액을 핥기 시작했다. 별 의미 없이 던진 듯 한 한 마디였는데, 나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다.

편안했지만 낯선 잠자리라 묘하게 일찍 눈이 떠졌다. 커튼 앞까지 가서 두꺼운 천을 직접 젖혀 바깥을 바라보았다. 새벽 어스름이 밝아 오고 있었다.

커튼을 다시 치자 어두컴컴하게 변한 방에는 귀퉁이 자그마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둘은 커튼 틈새에서 나오는 빛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방문 아래서 새어나오고 있다. 칼의 침실과 연결된 문이었다. 충동적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회보랏빛 등받이 일인 소파에 칼이 앉아서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장식적인 브라스 테이블 위에는 얇은 책자 한 권과 티 플레이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차에서는 밤에 흥분제로 마시는 그것의 몽롱한 향이 아니라 약간 달콤하고 청량한 향이 풍겼다. 사람들이 자주 마시는 종류의 잎차였다.

"아직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인데. 다시 자러 가는 게 어떤가."

"……."

칼은 발소리만으로 내가 들어온 것을 안 듯 하다. 약간 싸늘하게 식은 어조임에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마침 낮과 밤이 겹치는 때라 그런가. 그는 잠이 깬 듯 하지만 내 시간은 아직 밤이다.

얇은 슬리퍼를 신은 발로 카페트 위를 사박사박 밟았다. 칼의 잔소리에도 아랑곳않고 그의 무릎 위를 마치 내 것인 양 차지했다. 의자와 내 몸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굴자 황당하다는 듯,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부인, 부인?"

"졸려."

눈을 감고 속삭이자 칼이 하는 수 없이 몸에 힘을 풀고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꾸했다.

"그건 내가 어찌해 줄 수 없는 형태의 부탁이로군. 다시 침대로 자러 가는 건 어떠한지, 부인?"

나는 그냥 눈을 감고 그의 가슴을 베고,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칼의 목소리가 몇 번 내 상태를 확인하듯 울려왔다. 이윽고 작은 한숨과 함께 칼이 조심스럽게 내 몸을 안아올렸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늦은 오후였다.

나는 멀뚱히 눈을 뜨고서도 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상황을 이해 못 해서 시계의 고장인가 싶어 다른 방의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칼이 내 방문을 소리없이 닫으며 들어왔다.

"부인. 무리는 좋지 않네."

그는 한숨과 함께 내게 충고했다.

"혹시나 싶어 묻는데 마력 배출은 제때 하고 있는 것 맞나?"

"……."

내 반응만으로 그는 어느 정도 대답을 유추한 듯 하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오전 내내 미열이었어. 꽤 피로가 쌓인 것 같다더군. 최근 과로할 만한 일이 있었나?"

과로? 과로씩이나 했다고 할 정돈 아니지만 대외활동이 최근 잦았다. 인간관계 탓에 약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멍하니 앉아서 숨만 쉬고 있자 카이제르가 내 안색을 살폈다.

"지금은 아르트리어 경이 부재중이라 가까이서 돌봐 줄 사람이 없는 듯 하군. 이대로 주말 동안 내 궁에서 쉬다 가는 것을 권하고 싶어. 최대한 부인의 몸이 편하도록 배려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몸 상태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피로 신호가 고장나기라도 한 모양이다. 침대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며 잠시 기다리자 바로 침상 위로 식사가 올라왔다. 소화하기 편하도록 잘게 다져 끓인 재료들의 수프였다.

맑은 수프를 조금 먹고, 다시 잤다. 칼은 남은 주말동안 굳이 이 이상의 잠자리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낮 동안이라도 어느 정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녹티라의 날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완전히 멀쩡해진 몸으로 그가 마련해 준 그리폰 마차를 타고 디베르타로 등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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