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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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여자들도 디베르타에 쭉 머무르는 일이 많은데, 듣기로 디베르타는 이곳 엘리시온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들의 친가 같은 역할을 대신하는 곳이었다. 여자라는 자격만 성립되면 식비도 숙박비도 따로 들지 않았고, 출입 역시 자유로웠다. 제대로 된 거처가 바깥에 있더라도 여전히 모든 여자는 해당 지역 디베르타 소속이다.

정작 그런 곳을 나는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물론 수업이 진행되는 서쪽 건물에는 매일 들락거렸지만 숙소가 있는 동쪽 구역은 거의 처음이다. 청년기 이상의 남자는 입장이 엄격히 제한되지만 소년종은 자유롭게 데리고 다닐 수 있어서 레오와 벨, 둘 다 짐가방을 하나씩 들고서 나를 따라왔다. 오늘은 디베르타의 휴일이라 수업은 하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아침부터 돌아다니는 사람 숫자도 극히 적었다.

동쪽 숙소 구간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흰 연기가 상시 올라오고 있는 대욕탕 건물이었다. 저택에서 시중받는 것에 익숙해진 내가 굳이 여기서 목욕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갈 일이 없어서, 아직까지는 발도 들인 적이 없다. 하지만 저 호화로운 건물에 언젠가 한 번쯤은 씻으러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욕탕은 숙소보다도 더 완벽한 금남의 구간으로 오직 여자들만이 이 곳을 관리한다. 소년종조차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욕탕에 출입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들어가 볼 작정으로 대욕탕 건물을 한 번 훑어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레오와 벨은 둘 다 짐이 꽤 무거워 보였다. 일단 빨리 방을 받아야겠다.

숙소 구간 입구의 관리소에서는 넉넉하고 주름진 원피스를 입은 중년의 여자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짐가방을 들고 들어오자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읽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덮었다.

"무슨 일이죠?"

관리소에는 로커스 장치가 작용하고 있었기에 어떤 언어든 통했지만 나는 이제 꽤 능숙해진 엘리시엘로 대답했다.

"이곳 숙소에서 잠시 머무르고 싶어요. 몇 달 정도요."

"원래 어디서 머무르고 있었죠? 다른 지역? 아니면 레마슬레이그?"

여자는 책상 서랍에서 새로운 서류를 하나 꺼냈다. 나는 에이반이 챙겨 주었던 봉투를 꺼냈다.

"레마슬레이그의 2계급 군인에게서 후원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분이 이번에 원정을 떠나게 되어서, 여기, 서류요."

원정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디베르타에 일시적으로 내 신변을 맡긴다는 증서 같은 것이다. 굳이 그걸 제시하지 않더라도 내가 디베르타에 머무르는 데는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나와 버리면 에이반이 후원을 도중에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챙겨 넣었다.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항목을 작성했다. 사실상 내 개인 정보는 이미 문서화되어 디베르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름, 나이, 남편 정보 같은 것. 레마슬레이그에 살고 있는 모든 여자들의 정보가 그런 식이었다. 내가 작성한 것은 추가적인 몇 가지 뿐이었다. 그 다음 그녀는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거주 구간도 다 같은 거주 구간이 아니다. 계급에 따라서 그 구역의 넓이부터가 달랐다 일단 나는 제 5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녀는 내 계급에 맞는 구역 건물로 나를 데려가 보여주었다.

석재로 건축된 하얀 저택이었다. 아주 길쭉한 기역자 형태의 단층 저택 안은 마치 작은 맨션처럼 개인 공간이 일정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외관만 큰 저택같을 뿐 일단은 아파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탁 트인 복도가 정원과의 사이에 있고 한 쪽으로 문이 줄지어 달려 있는데, 문 옆에는 방 번호와 개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가 쓰여진 종이나 목패가 붙어 있다.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맞닿은 쪽에서 간혹 소음이 들리곤 하는데, 해가 진 이후부터는 심한 소음을 낼 경우 몇 차례 경고 이후 끝방으로 쫓겨나게 된답니다. 복도 방향은 가드들이 항상 순찰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복도 방향에는 문과 창문이 꽤 많았지만 반대쪽 건물 면은 사람의 출입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겨우 주먹이 드나들 정도의 통풍구 외에는 어떤 출입구도 없었다. 건물이 좁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복도를 마주보고 있어 한 번의 순찰로 두 건물을 동시에 감시할 수 있는 이중적인 구조다. 심지어 정원 반대 쪽은 아예 통로가 막혀 있었다. 혹시나 수상한 사람이 숨어들어도 사로잡기 쉬운, 매우 폐쇄적인 형태다. 그녀가 방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동안에도 두 명의 가드가 복도를 지나갔다.

개인 공간의 천장은 꽤 높은 편이었다. 아치문을 사이에 두고 접객실과 침실이 나뉘어져 있다. 그녀는 '접객실'이라고 말했다. 아르트리어 저택에서처럼 내밀한 침실과 바깥 통로 사이에 하나의 방이 더 추가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저택 방처럼 넓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차나 한 잔 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침실과 커튼으로 구분된 공간이다.

그 옆에는 크지 않은 방 두 개가 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딸려 있었다. 저택에서 살다 보니 좁게 느껴졌지만 지구 기준으로는 어지간한 아파트 가정집 하나 정도 면적은 되어 보인다.

"이 작은 방 두 개는 어떻게 사용하든 자유에요. 디베르타의 대욕탕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 욕조를 두고 개인 욕실로 쓰는 경우도 있고, 드레스룸이나 창고로 쓰는 경우도, 좁지만 침대는 들어가므로 약간 분위기가 다른 또 하나의 침실로 꾸미는 경우도 있고. 비큐스 오븐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주방으로 쓰는 사람도 있네요."

"흐으응……."

나는 소년종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적어도 두 개의 빈 방 중 하나 이상은 레오와 벨의 몫이었다. 벨이 혼자 잘 수 있는 나이일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계속 따라갔다.

"문패에 이름이 붙지 않은 곳은 빈 방이니 원하는 위치가 있다면 골라 보세요. 방 구조는 다 거기서 거기에요."

하지만 방마다 특색은 달랐다. 전임자가 잘 꾸며 놓고 떠난 방도 있었고, 방 위치에 따라 출입구와 가까워서 통행이 편리하다던가 출입구에서 멀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좋다던가, 정원이 잘 보이는 등 제각기 달랐다. 물론 특출나게 좋은 위치는 이미 전부 누군가에 의하여 선점된 후였다.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해 보였다.

"적당히 아무데나요."

"그럼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부터 배정할게요. 보통 단체로 들어올 땐 그런 식으로 분배하거든요. 자, 이름이?"

그녀는 내 이름이 쓰인 문패를 새로 주문해야 한다고 말하며 주문용 종이에 내 이름을 정확하게 써 넣었다. 문패는 1-2주 쯤 지나면 아예 새 것으로 만들어서 보내 준다고 했다. 다른 방을 보면 각각의 호수가 쓰인 패 아래에 각자 자기 이름이 깔끔하게 양각되어 찍힌 금속 문패가 깔끔히 걸려 있었다.

'저택에 비하면 좁긴 해도 뭔가 나만의 집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색다른데. 게다가 여기 집은 집세도 낼 필요 없고.'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늘 룸메이트와 방을 함께 썼기 때문에, 뒤늦게 생긴 나만의 거처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여자는 문단속을 할 수 있는 새 자물쇠와 열쇠를 주었다. 자물쇠는 두 개, 우편물을 넣는 우편통을 여는 자물쇠와 현관문용 큰 자물쇠였다. 외출할 때는 바깥에서, 집에 있을 때는 안쪽에서 걸어 잠그면 된다. 가드가 항상 순찰 중이기에 자물쇠가 굳이 필요할까 싶기도 한데, 그래도 일단 받아서 소년종에게 건넸다. 그리고 여자는 마지막으로 긴 가죽 끈이 달린 금속 군번줄 같은 물건을 보여 주었다.

"초대패 쓰는 법 알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녀는 군번줄 하나를 내게 건네 살펴보도록 했다. 샘플인 듯한 군번줄에는 음각으로 숫자와 글자가 찍혀 있었다. 테두리는 짙은 감청색, 뒷면에는 도장 문양 같은 것이 붉은 색으로 채워넣어져 있었다.

"여기, 초대패, 초대장이나 허가증이라고도 하는데, 금속공에게 따로 주문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문패와 마찬가지로 완성까지 며칠 정도 걸려요. 당신이 디베르타 내부로 초대한 남자에게는 반드시 이 허가증을 건네 줘야 해요. 헤어지기 전에 가급적 꼭 회수하고요. 허가증은 각인형 비큐스라 각인 당사자만 쓸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기능 중 하나가 위치 확인이에요. 허가증을 반드시 목에 걸어 줘야만 디베르타 안 어디에 있든 당신이 초대한 남자를 찾아낼 수 있는 거에요. 갯수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몇몇 애인들에게 건네주고 회수하지 않았다가는 다른 남자를 초대하지 못하는 수도 있으니 충분히 염두에 두세요."

듣자 하니 나는 두 개까지 허가증을 쓸 수 있는 것 같았다. 하나라도 분실할 경우 잃어버린 갯수를 보충하기 힘드니, 하나하나를 잘 보관해 달라고 주의를 받았다. 헤어진 여자의 허가증을 돌려주지 않고 임의대로 써서 멋대로 디베르타에 출입한 남자의 케이스가 있었다. 물론 여자 쪽에서 미리 신고를 해 두면 입구에서 가로막히기 때문에, 생각한 만큼 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범죄자를 디베르타에 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허가증 기능 덕분에 어지간하면 잃어버릴래야 잃어버릴 수도 없겠지만.'

그 외에도 주의를 몇 가지 들었다. 외부 방문객은, 심지어 누군가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디베르타에 초대받은 시각을 기준하여 한 번에 10시간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남편이 아니면 허용되는 시간이 6시간으로 더 짧아진다. 타이밍 조절을 잘 하면 자고 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한정된 시간 동안 최소한의 용건만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 남자는 일주일, 즉 8일 기준 5회 이상 디베르타에 방문할 수 없으며 그 외의 시간은 바깥에서 만나야만 한다. 누군가의 남편이나 애인이라도 디베르타에서 제재나 경고를 받은 횟수가 일정치를 넘으면 출입 제한이나 출입 금지가 되어 항상 가드가 따라붙던지 아니면 아예 들어올 수가 없다.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남자들에게 미리 확실히 주의를 주고 있지만, 여자들도 알아 놓는 편이 좋다고 한다.

여자들의 경우 외출이나 외박은 자유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사유 없이 디베르타에서 배정받은 방을 너무 오래 비워둘 경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방이 빠지게 된다.

"남편이나 애인들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자들을 위해 방을 남겨 놓자면 끝이 없으니까요. 방이 너무 오래 비어 있고 관리가 되지 않는 것 같으면 임의로 짐이나 방 위치를 옮길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여자는 몇 가지 편의시설들을 소개해 주고 나서 돌아갔다.

성인 남성도 아닌 어린 소년 둘에게만 짐 정리를 다 시키기에는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졌으므로 나도 옷가지 몇 벌 정도는 내 손으로 차곡차곡 개어 넣고 있었다. 슬슬 점심시간이었다. 레오가 저택에서 따로 챙겨 온 클럽 샌드위치를 꺼냈다.

"아, 내 몫은 따로 담아 줄래? 친구랑 같이 식사하려고."

"저희는 다른 소년종들과 사용인 식당으로 가면 돼요. 이건 전부 유이나 님을 위해서 가져온 거에요."

레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혼자 먹기에는 어떻게 봐도 양이 많았다. 냉장고도 없으니 상할 게 뻔한데, 내가 첫 날부터 사람들을 초대해서 다과회라도 열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게 친목 도모에 정신력을 쏟기에는 오늘 내가 너무 피곤했다.

"괜찮아. 두 명 정도 먹을 분량만 따로 담아 줘. 나머지는 너희 간식으로 해."

그렇게 말했는데도 레오는 바구니에 클럽 샌드위치와 컵 케이크, 맑은 사과 소다가 담긴 병을 넉넉하게 담아 주었다. 꽤 묵직하다. 둘이서 먹으면 분명 남길 것 같은데. 뭐, 남으면 그냥 가지고 와도 되니까. 나는 마음 편히 바구니를 들고 일어났다.

지연이의 방 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들러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그녀가 살고 있는 건물이 나온다. 건물 모양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정원의 분위기만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1108……. 여기인가.'

휴일 점심이라 그런지 다들 나른해 보인다. 마주본 기역자 형태의 건물 사이사이로 마련된 정원에서 쉬거나 피크닉을 즐기는 무리도 많았다.

'제 5계급의 거처라고 해서 초라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거의 모든 방에서 창문으로 정원이 보이고, 채광도 나쁘지 않고.'

식사가 끝나면 대욕탕에나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모퉁이를 돈 순간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1108호실 문 앞에서 지연과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 안으로 맞아들이려는 모습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는 말은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 배웅하는 중이거나, 또는 둘이 지금까지 그녀의 방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디베르타에서 굳이 집 앞까지 바래다 주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 한껏 수줍어하는 표정의 지연을 보니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남자가 꺼려진다느니 하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던 그녀였기에 나는 어쩐지 이 장면에서 아는 체를 하기가 무척 민망했다. 먼저 눈치채 준 것은 그녀였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스스럼없이 내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 것이다.

"어머, 언니! 웬일이에요, 이런 휴일에?"

"아, 하하……. 그게 당분간 여기서 살기로 해서……."

한순간 사귀던 애인과 헤어진 게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후원 여부는 불문에 부쳐 달라고 디베르타에서 부탁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도 내 후원 여부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애인의 집에서 거주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애인이 이번 원정에 차출되었거든."

"세상에! 그럼 언니의 애인이라는 사람은 군인이었어요? 원정에 가는 사람은 군인이나 군 관계자 뿐이라고 하던데?"

그녀는 아까 전보다 더욱 더 놀랐다. 그녀가 군인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에 놀랐지만, 실제로 군사부에는 제 2계급, 혹은 3계급 중에서도 마력이 높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력 테스트 기준치 미달인 경우에는 수도 외곽 경비나 디베르타의 가드로 뽑히게 되는데 그런 이들은 원정에 떠날 만한 자격이 되지 않았다. 마물을 상대하기에 실력이 역부족이니 결계 안에서 근무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를 배웅하고 나서 나를 자기 방 안으로 초대했다. 방은 생각보다 휑했다. 어차피 공간은 같으니까 넓어 보이는 점은 좋지만 가구들이 정말 최소한의 것밖에 없다는 느낌이었다.

"방금 그 사람은 새로 사귄 거야?"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실은 저 바로 어제 저녁에 소개회 자리에 끌려 나갔었거든요. 거기서 어쩌다 보니……, 조금 친해져서."

그녀는 뒷말을 뭉갰다. 어제 만난 사람이라는 뜻이군. 하지만 그런 것 치고 둘은 꽤 친근해 보였다. 성격이 잘 통했나 보다.

"흐음. 소개회라는 건 어떤 곳이야?"

전에도 그녀가 가끔 주말마다 소개회에 가서 반강제로 남자를 소개받는다는 얘기를 한 적 있다. 그 때는 그냥 대강 듣고 넘겼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별 거 아니에요. 사교회보다 훨씬 규모가 작아서, 사교회는 큰 파티라면 소개회는 말 그대로 몇 명씩 모인 맞선 자리 같아요. 마력량 미달이거나 최근 3개월간 특별한 사유 없이 아무 남자도 만나지 못하는 여자들이 있으면 소개회 초대장이 일정 주기로 날아오거든요. 무시하고 나가지 않으면 결국 방까지 찾아와서 권유를 하기 때문에 그게 귀찮다면 싫어도 나가야 해요. 보통 엔트런스의 방에서 열리고……. 그래서 가끔 자리가 비면 외부인 남자가 즉석으로 끼는 경우도 있어요. 디베르타의 식사보다는 맛있는 음식이 나오긴 하는데 항상 취하는 음료가 곁들여져서 거기서는 뭘 잘 마시지 않아요. 술이나……, 아로마 티 같은 거요."

말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녀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하긴, 외부인 남자들은 여섯 시간 이상 이곳에 머무르지 못한다고 들었다. 지금이 늦은 오전이니까, 그 남자와 엔트런스에서 거의 새벽까지 있다가 함께 이곳 방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시간 제한을 생각하면 그랬다.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런데 뭐 들고 온 거에요?"

"응? 아아, 같이 점심 먹으려고. 점심 식사 아직이지?"

"네, 저 아침도 못 먹었어요. 뭔지 봐도 돼요? 아, 진짜 맛있겠다!"

그녀는 피크닉 바구니 안을 열어보고는 활짝 웃었다. 평상시에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들뜬 것 같았다.

내가 디베르타에서 살아 보는 것이 거의 처음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식사 후에 바로 대욕탕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나섰다. 대욕탕으로 가는 동안 몇 명인가의 남자들이 우리 주변을 지나쳤다. 지연이 한국어로 속삭이다가 어차피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었다.

"친목회에서 들은 건데, 클럽 회원들도 신분이 각각 다르잖아요. 특히 1계급과 5계급 같은 경우 하늘과 땅 차이기도 하고.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대요."

"어떻게? 회원증을 보여달라고 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원증은 카드 모양이 아니라 액세서리에 인식 구슬이 달린 비큐스일 뿐이라서 그걸로는 못 알아본대요. 그게, 옷차림 같은 걸로는 구분이 힘들다는 거에요. 저는 무조건 비싸 보이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신분이 높겠거니 했는데 실은 아니래요."

"흐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욕탕은 상당히 호화로웠다. 천장에도 대리석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모자이크 타일 벽이 단순화된 나신의 남녀라던가 꽃, 과일 등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구분하는데?"

"왜, 막, 서로, 그, 그렇고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옷이 더럽혀지거나 손상될 수도 있잖아요. 액세서리 같은 것도 잃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돈이 많은 남자들이 디베르타에 올 때는 평상복을 입고 온대요. 하지만 화려하고 값비싼 비단 셔츠를 입고 있으면서도 옷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남자는, 여자를 꼬시려고 분수에 맞지 않는 복장을 무리하게 구입해서 입고 온 거래요. 어쩐지 그럴듯 하지 않아요?"

야한 얘기를 얼버무리면서도 그녀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도 그렇겠네."

나는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 외모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최소한 신분이나 돈이라도 많아 보이려고 별 허세를 다 부린대요. 여자들 친목회에 가면 그런 것들이 항상 주요 얘깃거리에요."

"그렇게 허세를 부려도 오래 사귀면 다 들통나지 않을까?"

"글쎄요, 당장 하룻밤 만날 상대를 찾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니까요."

예전에 남자에게 속은 적 있어서인지 지연이는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고 해도 그 때의 좋지 않은 기억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대욕탕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가드들을 지나치자 중문 두 개가 나왔고, 그 뒤로는 완전한 금남의 구역이 펼쳐졌다. 어딘가에서 뜨거운 물이 내뿜는 수증기로 주위가 미미하게 습하고 흐렸다. 황금색 칠이 된 테두리가 있는 아치문 너머로 적당한 파티션이 군데군데 휴식 공간들을 나누었다. 붉은 천을 꼬아 만든 줄로 가로막힌 구간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옷을 입거나 가운을 걸친 여자들이 대다수였다. 허리에 밤색 앞치마를 두른 나이든 여자 몇몇은 대걸레 밀대를 들고 바닥의 물기를 닦으며 다녔다.

"흰색 끈으로 막힌 곳은 지금 청소나 보수 중인 곳이고요, 색이 있는 끈은 그 계급 이상만 출입이 가능한 자리에요. 저런 넓은 소파가 있는 자리 말이에요. 그래도 시설은 어느 정도 엇비슷해요."

큰 항아리가 올라간 바퀴 달린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음료를 파는 사람도 있었고 향수나 화장수 같은 것을 늘어놓고 팔기도 했다. 의외로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파는 여자들은 우리와 비슷한 젊은 나이였다. 여자는 직업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이런 사소한 노점 행위는 허용되는 건가?

칸칸이 나뉘어진 선반은 조그만 바구니가 하나씩 들어 있다. 바구니에 옷을 벗어 넣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탕 입구에서는 얇은 타월과 세안수가 담긴 바가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이다. 나는 바가지 안의 액체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건 뭐야? 물비누?"

"네, 몸을 씻을 때 쓰는 세정제를 물에 녹인 거에요. 먼저 그걸 수건에 적셔서 온 몸을 닦고 탕에 들어가요. 자기 비누와 자기 수건을 따로 가져오는 여자들도 많지만 이건 공짜로 나눠 주는 거에요. 사실 이 비누는 향도 없고 거품이 전혀 안 나서 씻었는지 아닌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남자에게서 따로 선물이나 금전적 지원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디베르타에서 제공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기본 중 기본일 뿐이고. 비누 하나 제대로 못 사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도 없고.'

내가 쓰던 비누를 나누어 주는 것쯤은 가능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 주기는 힘들다.

대욕탕 건물은 전체적으로 큰 원형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원형 건물의 가장 중심부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돔 형태의 지붕과 벽 사이에는 증기가 빠지는 틈새가 있었는데 그 사이로 하늘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까마득히 높은 돔 지붕 안쪽으로 벽화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서클 형태를 이루는 바닥 타일을 따라가 보면 그 중심에 3단짜리 계단이 있고 계단 위로 큰 분수가 보이는데 중앙 분수의 물은 부글부글 끓는 것이 딱 봐도 상당히 뜨거운 것 같다. 분수 주변이 증기가 가장 많았다. 분수에서 나오는 물은 네 갈래로 나뉘어 물길을 타고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분수 밑에 깔린 돌이 물을 데우는 로커스 크리스탈이래요. 목욕물을 끓일 때 쓰는데, 아예 팔팔 끓어버리지 않도록 저렇게 분수로 수온을 조절하는 거에요. 저 물은 굉장히 뜨거워서 보통 이렇게 수로를 따라 흘러나온 온수를 써요. 이쯤 자리가 적당한 온도 같아요."

분수에서 네 갈래로 나뉜 물줄기는 거기서 또 몇 갈래씩 나뭇가지처럼 부드럽게 나뉘어서, 끝자락쯤에는 여자들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우리는 수로 옆 낮은 계단에 기대어 앉아 흐르는 물을 퍼올려 몸을 닦았다. 그녀 말대로 이 물비누는 거품이 없어서 제대로 닦이는지 아닌지도 알기도 힘들고, 생각보다 많은 양을 쓰게 되었다. 바가지 가득하던 희석된 물비누를 금방 다 쓰고 빈 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떠서 몸에 끼얹었다. 욕조 바닥은 조약돌 크기의 작은 타일로 되어 있었고 타일의 높낮이가 하나하나 달라서 젖은 발로 걸어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 요철을 이루고 있다. 무작정 화려하기만 할 뿐 아니라 생각보다 디자인이 잘 된 공간인 듯 했다.

원형 공간 가장자리에는 잎이 넓은 열대 식물이 심긴 조경용 화분과 윗쪽 구멍에서 찬 물을 졸졸 흘리는 석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지연이가 그 석상에서 나오는 찬 물은 몸에 끼얹어도 되고 손으로 떠서 마셔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깨끗하고 차가운 식수였다.

"정말, 하루 종일 있어도 좋은 곳이네. 왜 결혼한 여자들도 디베르타에서 사는지 알 것 같아."

"맞아요. 욕실만큼은 정말 호화롭다니까요. 아, 저기랑 저기는 몸을 담글 수 있는 탕이 있는 데에요. 그냥 온수 욕조도 있고 말린 꽃잎 같은 걸로 물 색을 우려낸 곳도 있어요."

세 시간이나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목욕을 하고 왔는데도 우리가 몸을 담가 본 곳은 대욕탕의 구역 중 일부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 사용하지 않고 폐쇄된 곳이 더 많았다. 워낙 넓은 욕탕이었기에 수가 적은 여자들로는 전부 관리할 수가 없다. 폐쇄되어 있는 곳은 아직 관리 중인 구역이었다. 여자들이 출입하지 않는 시간에 남자들을 보내 틈틈히 보수나 청소를 한다고 들었다.

2층에는 또 다른 시설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부터는 상위 계급 전용이 많았으므로 굳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결계 안쪽의 레마슬레이그는 사실상 계절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달력이 넘어감에 따라 특정한 지역이 열리거나 잠기고는 한다고 지연이 알려주었다.

나온 김에 식당에서 저녁식사까지 하고 돌아왔다. 레오와 벨이 방 정리를 전부 끝마친 뒤였다. 나는 새 매트리스 위에 앉다가 매트리스가 생각 이상으로 푹신푹신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매트리스 위에는 따로 구입한 사치품인 촉감 좋은 시트와 부드러운 침구가 깔려 있다.

새 가운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노곤해진 몸이 푹신한 쿠션에 감싸이자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나쁘지 않은 첫날이었다.

기억할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며칠이 지난 뒤였다. 어제는 라무스의 요일로 아스벨이 쉬는 날이었다. 디베르타에 그를 초대하는 대신 내가 아스벨의 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외박을 하고 아침에 돌아왔다. 그가 출근하며 나를 디베르타 앞까지 데려다 주고 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왜 자기가 내 거취를 책임질 수 없는지,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피후원자의 양도 조건이 유독 까다로울 뿐 원래 그는 여성을 후원하기에 별 무리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새삼 나를 먼저 채어간 에이반에 대해 이를 갈았다.

그래도 몇 달간은 나를 독차지한다는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그를 보내고, 나는 하품을 하며 바로 오전 수업에 들어갔다.

'……졸려.'

칼과의 결혼 얘기에다가 병가를 냈던 일, 에이반의 원정 사건 등으로 워낙 바빠서 아스벨에게는 최근 그다지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그래선지 어제의 그는 무척이나 정열적이었지. 다 좋지만 다음 날이 등원일이니까 조금만 일찍 재워 줬으면 좋았을 것을. 게다가 그 역시 출근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몇 번 결석하고 병가를 내긴 했으나 수업을 밥 먹듯 빠질 생각은 없고, 앞으로 더욱 더 성실히 출석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디베르타의 필수 출석일은 꽤 여유가 있었다. 여자들은 피곤하면 주말 다음 하루나 이틀쯤 충분히 수업을 빠져도 상관 없었다. 실제로 어떤 행사가 열렸던 주말 다음 날 오전 수업은 유독 출석률이 낮다. 주말에 실컷 놀고 나면 다음 날은 나른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날에도 빠짐없이 수업을 듣는 타입이었다.

'한국 고등학교나 대학교랑 다르게 그다지 성적이 인생에 크게 반영되지도 않는데 말야. 물론 스칼라 시험을 통과하려는 여자들은 또 다르겠지만…….'

나도 그 시험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험공부를 결정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아직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수준의 사회수업을 듣는 입장이니까 말이다. 몇 년 지나고 어느 정도 엘리시온 사회에 적응하면 스칼라 시험 준비를 시작해도 무방하다.

'그냥, 빠진 수업 내용을 모른 채로 다음 진도를 나간다는 게 왠지 찝찝해.'

그 정도의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 지연이 오전 수업을 빼먹은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점심 시간에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일단 한 차례 주변을 둘러 본 뒤에 그녀가 없자, 나는 혼자 쟁반을 받아 대충 허기만 채우고 식당 근처의 소파가 놓인 칸막이 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오후 수업까지 전부 꽉 채워 성실하게 아우룸의 날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야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방문을 노크하려던 지연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오후 수업 듣고 오는 길이에요?"

"응,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수업에서 안 보이던데……."

내가 되묻자 그녀는 약간 버벅거리다가 변명처럼 대답했다.

"어, 어제 약속이 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오늘은 피곤해서 좀 쉬었어요."

"저번 주의 그 남자랑?"

무심코 물은 건데 정곡을 찔렸는지 지연이는 한껏 부끄러워했다. 겨우 남자를 만나는 일로 그렇게 부끄러워하다니, 마치 몇 달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남들보다 이곳 적응이 한참 늦은 상태지 않은가.

"그, 그그, 그런 것보다, 이나 언니. 친목회에는 혹시 참석한 적 있으세요?"

"친목회? 아니, 처음이야."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 이것도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건데……. 텔루스의 날에, 그러니까 내일요, 이른 저녁부터 친목회가 하나 열리거든요."

"거기가 네가 참석하는 친목회야?"

"그게……. 사실 초반에는 오라는 얘기를 듣고 두어 번 정도 참석했었는데 제가 하도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엘리시엘 어도 잘 못하니까 그 뒤로는 참석 안 해도 아무 말 없더라고요. 그런데 어제, 엄청 오래간만에 친목회 여자들이 또 저한테 찾아와서 제 친구랑 꼭 그 날 참석해 달래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 오라고?"

"네. 아마 목적은 저보다는 언니 같아요. 왜 언니한테 직접 말 안하고 저한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 얘기한 적 있어서 제가 더 말을 걸기 편했나?"

음……. 아마 어제 내가 하루 종일 방을 비워서 그런 거겠지. 아침부터 아스벨의 저택으로 떠났으니까. 그 날은 소년종들도 하루 휴가를 줬으니 문을 두드려 봤자 아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연이를 내 방으로 초대하면서 여유롭게 물었다.

"친목회는 보통 어떤 곳이야?"

친목회는 여자끼리, 사교회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위주로 모이는 곳이라는 차이는 안다.

"전에도 말했지만 같은 파벌의 여자들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곳이에요. 그 중에서 제가 초대받은 곳은 사실상 끌려가다시피 가서 인사해야 했던 곳이기도 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은 없지만……, 공짜에다 맛있는 음식이 많다고 하니까 일단 참가는 해 봤고……. 뭐 그것도 작년 일이에요. 솔직히 저 같은 걸 굳이 수고해서 초대하고 싶어하는 파벌이나 친목회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친목회에서는 무조건 남자가 많은 여자가 중심이에요. 반대로 남자가 한두 명 뿐인 인기 없는 여자는 가치가 없고요. 전부 같은 여자인데도, 다들 예쁘고 인기 있는 사람들과만 친해지고 싶어해요. 똑같은 계급이라도 힘이나 발언권의 차이가 있잖아요. 저랑 그 때 같이 엘리시온으로 온 여자애 중에 꼭 외국의 유명 아이돌 가수처럼 굉장히 예쁘게 생겼던 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각자 파벌마다 서로 데려가겠다고 거의 강압적으로 권유하고 그랬어요. 아하하, 그렇게 따지면 저는 외모가 평범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럴까?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예쁘다고 해서 무조건 계급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상위 계급에서는 외모나 취향보다 가문을 위한 정략적 결합이 더욱 우선시되고, 많은 마력을 품어 강한 자손을 남길 수 있는 여자만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때문이다. 칼이 원하는 이상형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조건만 맞다면 외모는 그저 그래도 상관 없다고 했었지. 그렇게나 잘생겼는데도 여자의 외모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계급을 비롯한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역시 매력있는 외모를 가진 편이 더 많은 애인을 만들 수 있는 거겠지?'

그래서일까, 처음 접해 보는 디베르타 내의 작은 사회가 무척 흥미롭게 와닿았다. 지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발 늦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거절할 걸 그랬나요? 언니는 지금 만나는 남자가 최소 3계급은 되는 것 같은데 5계급 파벌에 들어가는 건 좀 그럴 것 같고……. 아, 그래도 파벌의 여자들 중 몇 명은 자기 계급보다 높은 남편이 한두 명은 있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내가 3계급인 것도 아니니까 그런 건 괜찮아. 안 그래도 너한테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한 번쯤 가 보고 싶었거든, 친목회라는 곳."

듣자 하니 재미난 정보도 꽤나 오가는 것 같고 말이다. 나는 당일 5시에 만나서 입장하기로 약속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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