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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반이 디트리히 사무엘 중령의 집무실로 쳐들어가 그를 쓰레기라고 매도하며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이야기에 대해서는 정작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아스벨이 내게 아주 재미있다는 얼굴로 전해 주었다. 그는 혀를 찼다.
"쯧, 거하게 싸움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아깝, 앗,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어? 아스벨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거야?"
아직 어색하지만 나는 아스벨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 말을 놓았다.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아스벨은 발개진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니, 그 때 나는 항상 그렇듯 연무장에서 성실하게 훈련 중이었지. 가끔 후배나 동기들 실력도 좀 봐 주면서. 그보다는 군부 내에서 소문이 아주 파다해. 재수 없는 에이반 녀석이 자기 여자에게 무례하게 군 친구의 턱을 날렸다고. 이제는 취향이 여자 쪽으로 아예 돌아섰다고 말야."
"거기서 취향 얘기가 왜 나와……. 혹시 그 둘이 사귀었어?"
"글쎄, 모를 일이지."
하지만 둘은 딱히 동성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진 적은 없어 보였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렇게까지 꾸준히 에이반의 성 지향성이 언급되고 보니, 그의 애인이었던 남자는 도대체 어떤 타입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에이반의 얘기는 딱 필요한 부분만. 내가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나자, 이제 더 이상 그에 관한 얘기는 하기 싫은지 아스벨은 화제를 돌렸다.
"다음 주부터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하루 종일 너와 보낼 수 있는 거네. 혹시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을까? 가능하면 에이반과 안 가 봤던 곳이면 좋겠어."
"에이반이랑 그렇게 자주 외출한 적 없어."
나 자신도 용건이 없는 한 외출을 별로 즐기지 않았고 생각해 보면 에이반도 실내에서 즐길 거리를 자주 들고 왔을 뿐 외출을 그렇게 자주 제안한 적은 없다. 아스벨은 이해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미술관? 아냐, 왠지 그 놈이랑 가 봤을 것 같아……. 승마장, 그래. 승마장은 어때?"
"승마장, 이라면……."
그리폰을 타는 건가? 아니면 아우카? 아우카는 짐 끄는 용도로 쓰이지만 직접 그 위에 안장이나 양탄자를 걸치고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타 보고 싶어.'
속마음과 달리 승마라고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몸이라, 아스벨을 빤히 바라보며 넌지시 부탁했다.
"하지만 승마 자체가 처음인데 그래도 괜찮을까?"
그는 초조하게 내 눈치를 살피다가 냉큼 대답했다.
"아, 물론이지! 기꺼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맡아 가르쳐 줄게. 내가 친구들 중에서는 가장 승마가 능숙하고 빠른데, 어떤 날은 그냥 천천히 달리는 정도로 봐 주고 있었는데도 뒤를 돌아보면 죄다 저만치……."
기고만장하여 자랑처럼 이어가려다 문득 그 사실이 민망했던지, 아스벨이 말 끝을 얼버무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잘난 체 한다고 스스로 느꼈던 건가. 그렇게 잘만 떠들다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웃음이 터져버렸다.
저녁 시간 잠깐 동안을 함께 보낸 뒤 아스벨을 돌려보냈다. 슬슬 에이반이 퇴근할 때였다. 사실 아스벨은 다음 주부터 휴일을 가질 수 있다고 편지로 말했었기 때문에 설마 이번 주부터 무리해서 내게 방문해 올 줄은 몰랐다. 장소도 장소였고 억지로 시간을 낸 터라 포옹과 입맞춤 정도밖에 나누지 못했으나 의외로 아스벨은 당장 하고 싶어 죽겠다는 티를 내면서도 떼를 쓰는 대신 절제하며 다음 주를 기약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여유롭고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데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기분 탓인가…….'
디트리히 사무엘 중령과 약간 격렬한 관계를 가진 지 바로 하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배려한 것 같기도 했다. 아스벨을 보내고 오래 지나지 않아 에이반이 퇴근했다. 오늘은 특별히 직접 에이반을 현관까지 맞으러 나갔다.
에이반은 집사에게 상자를 떠안기고 곧장 걸어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집사가 장갑 낀 손으로 받아낸 상자가 가끔 그가 사 오던 설탕과자 상자라는 걸 눈치챘지만, 그보다는 에이반이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내게 체중을 싣고 엉겨 붙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에이반? 많이 피곤해요?"
"……잠시, 이러고 안고 있고 싶습니다."
하염없이 내 체온을 바라는 듯한 몸짓이라 나는 드물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렴풋이 오늘 직장에서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추측했다. 가끔씩은 그런 날이 있을 수 있다. 체중을 받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리고 에이반을 있는 힘껏 마주안아 주었다.
그에 호응하여 에이반이 나를 당겨 안은 힘도 점점 더 강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안기고 한참이 지나자 비로소 그는 진정된 양 나를 천천히 떼어 놓고 나와 눈을 마주보았다.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에이반은 흐트러진 표정이지만 즉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조금 기분이 착잡한 날인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애끓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혹시, 오늘은 정해진 날짜가 아니지만 괜찮으시다면……."
"오늘? 좋아요."
꽤나 다급해 보이는지라 나는 몸이 나른해서 그냥 쉬고 싶은 심정을 미루고 그의 부탁에 응했다.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그는 옷부터 벗어던졌다. 이미 에이반의 꾸준한 손길 덕분에 한껏 성애에 농익은 몸은 그의 집요한 자극에 쉽게 달아올랐다. 에이반은 몇 번이나 내 안에 파정하고는 기진맥진하여 완전히 만족한 얼굴로 나를 안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더 큰 만족감을 위해 어느 정도 사정을 절제하던 평상시와 달리 그는 오늘 한 번도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때랑 시간은 비슷했으나 정액을 받아낸 횟수는 오늘이 몇 배 많았다. 정액을 받아내며 느낀 횟수가 많아서 나도 좋긴 한데, 아래가 완전히 흰 액체로 흥건해졌다.
그 탓에 바로 일어나서 씻고 싶었지만 에이반이 놓아 주질 않는다. 교섭 후의 축축하고 끈적한 침대에 바로 눕는 모습을 결코 보인 적 없던 그가 오늘만큼은 이 침대 상태에 어떠한 유감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 어땠어요?"
달큰한 목소리로 에이반이 나를 안고 속삭였다. 이제사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너무 흥건해서 아래에 감각이 없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응, 좋긴 좋았지만……, 축축해서 빨리 씻고 싶어요……."
"그러시군요. 아, 특별히 오늘은 제가 씻겨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체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건지, 나는 당황해서 아, 하고 한 마디 말만 남긴 채 그에게 안겨 들어올려졌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관계 후에 직접 몸을 씻겨 준다니,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수줍음을 탔다. 하지만 싫다고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고, 자포자기한 채 그에게 안겼다.
그는 물이 준비된 욕조에 나를 안고 들어갔다. 둘이 들어가는 바람에 물이 즉시 넘쳐흘렀다. 그다지 개의치 않고 내 몸을 헹궈낸 뒤 목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거품낸 타월로 몸소 닦아 주었다. 깨끗이 씻는 건 관계 직전의 일이고, 관계 후에는 그냥 땀과 체액만 물로 헹궈 내는 정도로 충분한데 이상하게 에이반은 집요했다.
"그,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하지 않아도……."
"제가 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당신을 많이 더럽히기도 했으니까."
그가 더럽혔다는 곳은 국소부위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는 전신을 빠짐없이 거품으로 문질러댔다. 가벼운 실랑이를 하며 기어코 전신을 씻겨지고 수건에 감싸여 밖으로 나왔더니 위고 아래고 보이지 않을 만치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결국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
*
눈을 뜬 순간,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임을 직감했다.
'수업 들으러 가야 하는데…….'
어제 너무 늦게 잤다. 피곤한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주말 내내 에이반과 뒹군 피로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저께는 사무엘 중령과 격렬한 관계를 나누었고, 심지어 어젠 휴일이라고 과하게 돌아다녔다. 오전 내내 외출을 다녀 왔고 오후에는 아스벨을, 밤에는 평소와 다른 에이반까지 상대했었다.
최근 들어 무리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이 정도 스케줄에도 몸이 뻐근하다. 차광 커튼이 쳐진 방 안에서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은 유리로 만들어진 화려한 금장 벽시계 뿐. 확실히 빼도 박도 못하는 지각이다.
'이렇게 늦잠을 잤으면 디베르타에는 못 가겠지……. 2교시 수업부터라도 들을까? 집사는 왜 안 깨웠지?'
그 때 노크도 소리도 없이 방문이 최소한도로 열리며 누군가가 침실로 들어왔다. 사용인일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가 누워 있는 이불을 들추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눈을 뜨고 확인했더니 에이반이다. 편한 복장을 한 에이반이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다 내가 깬 것을 보고 멈칫했다.
"아, 이런. 제가 다시 들어오는 바람에 깨신 겁니까?"
반쯤 뜬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가장 먼저 물었다.
"……출근은요?"
"제가 나서 처리할 일은 이제 없어서, 오늘은 좀 늦게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잘린 거 아니겠지? 묘하게 불안해졌다. 어제의 반응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나 때문에 사무엘 중령과 싸운 일로 문제가 커졌다거나. 정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자 에이반이 어이가 없는지 그만 웃어버렸다.
"그런 상상을 하셨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어제는 에이반이 좀 상태가 이상해서……."
"말씀드렸던 대로 그 날따라 기분이 조금 착잡했던 것 뿐입니다. 오늘은 오후에 잠깐 출근해서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다시 퇴근할 겁니다."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나를 끌어안고 다시 누워 버리는 에이반 덕분에 도로 이불 속에서 팔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여유로운 아침이란 건 좋군요. 제가 나이를 먹고 안정기에 들어서고 은퇴를 하고 나면, 당신과 이런 나날을 보내는 날이 많겠지요?"
"이미 휴일마다 그러고 있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에이반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휴일이란 이런 여유로운 느낌보다는 성적인 해소에 좀 치중되어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에이반이 주중 내내 쌓인 에스트라를 해결하는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끈적대며 야한 짓을 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가서 아침의 여유라는 건 쉽게 없어지고 만다.
에이반은 뭐랄까, 평일에도 나랑 즐길 수 있으면서 정해진 날까지 기어코 참다 참다 배출하는 경향이 강했다. 더군다나 휴일 전야의 훈련날은 그의 에스트라 해소보다는 내 감각을 일깨우는 것에 치중하여, 에이반의 흥분은 약간 무시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말 하루동안은 완전 야한 스케줄로만 가득이다. 계획을 세워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
아무래도 오늘은 수업을 포기해야겠다. 제대로 에스트라를 풀어내고 평온한 상태가 된 에이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에스트라가 성격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스벨을 통해서도 에이반을 통해서도 완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의 고압적이고 날선 분위기가 거의 사라진 채였다. 아주 기분이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오전에는 이렇게 저택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겠고……. 오후에는 미술관이라도 갈까요?"
"응, 좋아요."
미술관이라니, 아스벨의 추측이 완전 적중했다.
애초 잡았던 일정대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완벽한 하루였다. 어제 아직 상자도 열지 않은 설탕 과자 아홉 개 세트를 받았는데도 에이반은 굳이 오는 길에 과자 가게를 한 번 더 들러 설탕 과자 다섯 개 세트를 또 사 주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긴 한데 너무 빨리 질릴까 봐 지금은 그게 걱정이었다.
분위기가 끝내주는 곳에서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사가 어제 사 온 설탕 과자부터 꺼내 플레이트에 예쁘게 차려 주었다. 마실 것으로는 차게 우린 붉은 색 음료가 나왔다.
찬 음료가 무척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에이반도 좀 먹어 봐요. 정말 너무 맛있어요."
그렇게 설탕 과자 1/4조각을 먹이는 데 성공한 나는 살그머니 과자를 씹고 있는 에이반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그는 밀랍을 씹듯이 무표정하게 과자를 삼키고는 내가 편히 앉도록 다리를 벌렸다.
"……최근."
에이반의 다음 반응을 어떻게 끌어내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바빴습니다."
나는 살풋 귀를 기울였다.
"레바단 연합의 모든 도시 군대는 칼리온의 주기적인 감찰을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하는데, 감찰 기간이 주기적인 편이기는 하지만 항상 같지 않은데다 보통 갑작스럽고 이번에는 원정 대비 기간까지 겹치는 바람에, 지난 해의 서류를 모두 정리하고 군부를 재정비하는 데 꽤 수고가 들었답니다. 더불어 국빈으로 대우받는 칼리온의 집행관들을 과중한 업무와 동시에 접대, 안내까지 해야 했었지요."
감찰이 어쩌니 하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것저것 바쁠 만한 일이 상당히 많았구나. 그걸 모르고 심심하다고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하고, 심지어 아스벨과 바람까지 피웠으니 왠지 죄책감이 느껴졌다.
"출정 인원 추첨은 아직이지만 원정 대비 훈련은 미리부터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까지 끝내면 짧게나마 휴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요?"
"그 전에,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칼리온 출신의 리드 지인을 소개시켜 드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떠오른 것 같았다. 신부 후보 중에 내가 들어있다고 했던가.
"바로 그, 칼리온의 집행기사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공께서 이번 모르스의 날에 당신을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이며 자세를 고쳐 앉자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꽤 떨어진 곳의 책상 서랍이 예고 없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편지가 팔랑이며 날아왔다. 붉은 색과 금색의 인장이 찍힌 두툼한 편지였다. 그런데 이름 엄청 길다. 편지의 서명에는 풀 네임이 적혀 있어 그 긴 이름을 줄줄이 읽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철자로 적어 놓으니 더 길게 느껴졌다.
'왕족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에이반은 밀봉이 되지 않은 편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제 1계급 왕족은 상대가 일반 시민이라도 본인 의지에 따라 궁정으로 자유롭게 초대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 초대장이면 당신도 왕궁 방문이 가능합니다. 주말이 되면, 저와 함께 갑시다."
갑자기 왕궁 출입이라니, 분명 호기심은 있었지만 갑작스럽다. 엘리시온의 왕궁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살짝 긴장이 되었다. 에이반이 함께 가 주겠다고 하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나저나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라……. 에이반이 소개시켜 준 남자들이 많지는 않다만 1계급이라면 그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남자가 아닌가. 이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말을 끝맺은 에이반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무릎에 앉은 내 몸을 쓰다듬었다. 나는 겉에 차게 물방울이 맺힌 컵을 들고 음료를 홀짝였다.
칼리온의 집행기사이자 제 1계급 리드, 왕족에 속하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는 미켄바르프 왕가 출신이라고 한다. 제왕의 자손은 총 아홉 왕가의 성으로 분할되며 미켄바르프는 그 중 하나였다. 현재에 와서는 그다지 의미 있지 않은 이름이다. 왕가의 족보는 꽤나 중구난방으로 직계와 방계의 구분조차 그다지 의미가 없는데, 피가 옅어진 지금에 와서는 제왕의 피가 직계손임에도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먼 친척의 자식인데도 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발현한 순간 얼마나 혈연 관계가 멀든 같은 왕가의 성을 받게 된다고 한다. 본래 일리아나스라고 하는 일종의 호 비슷하게 사용되는 미들네임과 미켄바르프라는 왕가의 성씨 사이, 하나의 성씨가 더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나 가문명 말이다. 하지만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는 일반적인 리드 계급과 달리 부친의 신분이 불분명했다. 제왕의 피가 발현한 것으로 보아 부친이 높은 신분의 귀족임은 확실한데 그는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네 개 이상의 이름을 들어 자신을 소개하는 다른 리드 계급 사람들과 다르게 오직 세 개의 이름밖에 없다고 한다. 에이반에게서 들은 설명은 딱 거기까지였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복잡한 과거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 그렇게 길면 뭐라고 부르면 좋아요?"
"리드 계급은 거의 같은 성을 가지고 있어서 성으로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일리아나스님이라고 미들 네임을 부르면 됩니다. 그러라고 있는 이름입니다. 좀 더 예의를 차리고 싶을 때 부를 가문명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으니까요."
물론 일반적으로 부친이 없는 하층 계급민-정확하게는 계급 외-의 아이와 달리, 제왕의 피를 타고났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그는 보육원이 아니라 다른 여러 귀족들의 손에 직접 맡아 길러졌다. 그럼에도 역시 평범한 가정 환경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에이반은 추리했다. 나는 에이반의 그 말에 상대의 성격이 꽤 독특할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 많이 특이한 사람인가요?"
"글쎄요. 특이하다기보단, 그래, 약간 냉소적인 경향이 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리겠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감정의 기복이 적은 편인데, 비록 칼리온의 집행기사들이 공무 중 사적인 감정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의 성정은 뭐랄까 근본적으로 타고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게 말하면 공명정대하고, 나쁘게 말하면……."
나쁘게 말하면? 나는 에이반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
연합국 어딘가에 존재하는 칼리온 지부에서 얼마 전 레마슬레이그로 도착했다는 그는 왕족 신분답게 궁전의 한 켠에 거주지를 받았다. 지금 온 것은 반쯤 개인적인 용무였지만 어차피 칼리온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자들도 공무 기간 중에는 궁전 내에 거주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가 일개 5계급 출신일 뿐인 내게 만남을 위한 초대장을 보냈다. 궁전으로 방문해도 좋다는 초대장. 하위 계급의 특정 인물에게 비공식적인 사유만으로 궁전의 출입을 예외적으로 허가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리드 계급에게만 근본적인 권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그 곳에 별 이유 없이 발을 들일 자격을 얻었다.
어차피 나중에 에이반과 혼인해서 계급이 올라가면 당당히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지만 특례로 미리 방문하게 된다고 하니 약간 가슴이 두근대며 설렜다.
"어차피 저와 함께 잠깐 얼굴만 보고 차나 한 잔 마시고 올 테니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신분이 미비한 사람이 특별한 사유가 있어 입궁하게 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었다. 신분에 맞는 복장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입궁할 때만큼은 궁정의 예법에 맞춰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현재 내 계급에 맞추자면 디베르타의 제복밖에 적당한 옷이 없었다.
에이반은 내가 주말인데도 디베르타의 제복을 꺼내 입은 부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궁정의 미흡한 규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오늘 하루만큼 상위 계급의 부인들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싶다면 충분히 꾸밀 수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는 처음에 몇 번 집 안에서 보석으로 치장해도 된다고 말한 것 외에 그다지 내 옷차림에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 때는 그저 화려하고 알이 굵은데다 디자인까지 현대인인 내 기준으로 약간 올드한 편인 고가 보석들을 굳이 집 안에서까지 휘감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었지만 말이다. 에이반은 내가 그냥 몸에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다는 것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뭐 실제로 귀찮기도 했으니까 그 오해를 부정하진 않았다.
그렇게, 화려한 군복 차림의 남자와 잿빛의 단순하고 면적 적은 상하의만 걸친 여자라는,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와 그는 동행했다.
구역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모든 여자들은 처음 한 번은 궁전 안에 들어와 볼 기회를 얻는다. 후원 대상, 즉 미래의 상위 계급의 모체가 될 여성 후보들과 일반 여성, 그리고 부적합자를 여기서 일차적으로 분류한다. 그렇게 분류된 모든 여자는 즉시 출궁하게 된다. 설사 리드 계급 남성에게 선택받더라도 외부 저택에서 머무르는 것이 규정이었다.
1년이 되지 않은 일이라서 나도 생생하게 그 때의 일을 기억한다. 높은 성벽을 두 번 지나자 확실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우리가 탄 마차는 그 때와 달리 정문을 통해 진입했고, 위치도 주변 풍경도 조금씩 달랐다.
전체적으로 보면 레마슬레이그의 궁전이란 서양식보다 동양식에 좀 더 가까운 듯 했다. 아예 다른 세계니까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구조라던가 면적이 서양의 성과 첨탑 대신 마치 인도나 아라비아의 유명한 궁전들을 떠올리게 했다.
'화려하다…….'
조경수가 잔뜩 심어진 길목을 지나자 잘 닦인 궁정 내 통로가 있었다. 층고가 낮은 편으로 지중해풍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건물들은 장식이 가득한 기둥과 처마로 그냥 봐도 매우 호화로웠다. 군데군데 거울이 붙어 있었으며 예술품이라고 할 만한 석상들도 길가에 잔뜩 있었다. 에이반은 그리폰 마차를 궁전 내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세우게 했다.
건물들은 따로따로인 것 같으면서도 전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일리아나스 공께서는 공무를 겸하여 방문하셨기 때문에 서쪽 객실에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건물 기준하여 동쪽은 기본적으로 거주하는 리드 계급 남성들이 사용하고 있고 서쪽은 레마슬레이그의 초대객이나 방문객들의 거처라고 한다. 원칙대로 미켄바르프 공인 그는 신청만 한다면 동쪽 건물 하나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나 집행기사로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사정상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는 듯 하다.
객실들은 전통 문양이 새겨진 기둥이 가득한 통로 사이에 하나씩 있었다. 크기에 여유가 있어 같이 따라온 시종들까지 열 명 이상씩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들이었다. 딸린 인원이 많을 경우 몇 채씩 연달아 사용하기도 한다고 에이반이 말했다.
소박하고 청렴한 것으로 유명한 칼리온의 집행 기사 일리아나스 공은 가장 앞에 위치한 한 채의 건물만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소박하고 청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객실 한 채만 해도 무척 화려하고 넓은데.'
상위 계급 기준으로 소박하다는 거겠지. 왕족이고, 고아에, 특이한 성격, 소박하고 청렴하다는 평가. 이 정도의 단편적인 단서만으로도 내가 만날 상대의 인상이 조금쯤 잡히는 듯 했다.
연한 노란색을 띤 코트를 걸친 한 적금발 남자가 객실로 찾아든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했다. 나는 처음에 그 남자가 일리아나스 공이라고 생각했다. 엷은 상아색 코트는 자락이 섬세하게 늘어져 있고 얼핏 금사가 엮인 것처럼 보이는 개나리색의 테두리 자수가 놓여져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인상도 깔끔하고 시원스러운 것이 소탈한 왕족으로 보기에도 썩 이상하지 않았고.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일리아나스 공의 조수라고 소개했다.
"저는 칼리온의 집행 서기관인 래달란이라고 합니다. 일리아나스 공의 보조로서 이번 수행에 동참했지요. 경에 대한 얘기는 만나기 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레마슬레이그의 도미넌트, 아르트리어 대령입니다. 이 쪽이 제가 소개시켜 드릴 제 약혼녀인 유이나입니다."
"경의 약혼녀, 말씀이시군요?"
남자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약간 미심쩍게 나를 쳐다보았지만 에이반이 한 마디 재촉하자 서둘러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남자가 지나가듯 슬쩍 흘린 말로 내 복장에 관한 불만을 감지했다.
"아르트리어 대령의 위세가 연합국 내에서는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약혼녀 되시는 분은 소박한 차림을 하고 계시는군요."
"단지 원칙대로의 복장일 뿐입니다. 입궁시의 복식으로서는 어떤 문제도 없을 터입니다만."
에이반이 나 대신 대답했다.
"……."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래달란은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대꾸 없이 에이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 딱 걸치고 온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나? 하지만 에이반도 별 말 없었고, 무엇보다 신분에 맞는 장신구라는 것이 내게는 없었다. 하나같이 고위 계급이 아니면 공식적으로 착장할 수 없는 것들로 옷장에 가득했다. 집에서 입기 위해 맞춘 옷들, 분별 없이 보낸 아스벨의 선물들이었다.
"……후원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마지막으로 에이반은 래달란을 제치고 내 어깨를 안은 채 후원으로 가는 통로를 지나갔다.
후원의 화단에는 프리지아와 흰 튤립이 가득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꽃잎 끝이 물들듯 색이 있는 튤립도 보였다. 몇몇 튤립이 고가의 조경화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화원의 가치는 어쩌면 상상 이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궁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가치를 지녔으리라. 헴프로 두껍게 짜인 미백색의 파티오 차양막 아래 원탁과 등받이 있는 둥근 의자들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세 의자 중 하나에 일리아나스 공이 앉아 있다가 우리의 방문을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등받이 뒤로 보이는 것은 금발머리였다. 그것도 아주 옅은 은색에 가까운 금발이었다. 다만 머리칼은 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아주 짧게 쳤는데, 나는 짧은 머리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다지 잘 꾸민 모양새라 하기 힘들었다. 에이반은 군인인데도 매우 길고 윤기나는 장발을 가지고 있었고 아스벨도 나와 사귀게 된 이후로 내가 원한다면 머리를 기르겠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스벨의 머리 모양은 짧지만 멋스러웠다.
"오래간만입니다, 일리아나스 공."
에이반이 내 뒤에서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러 인사를 건넸다. 그가 뒤돌아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정면으로 나와 에이반을 차례로 스쳤다. 나는 숨을 죽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미인이었다. 백색 바탕, 가슴팍에 칼리온의 상징색인 진자주색과 검정색 배색이 들어간 제복이 깔끔하면서도 근사하게 어울리는 몸매는, 어디 한 군데 부족함 없이 듬직해 보이면서도 날씬한 허리와 넓은 어깨를 비롯한 신체의 선이 눈부시게 돋보였다. 복장은 기본적으로 밝은 색의 면적이 컸고 머리카락도 백금빛에 가까웠으며 눈썹 색도 마찬가지로 옅었는데, 얼굴이 부분부분 불그스름하게 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인상이 굉장히 희었다. 엘리시온에도 천사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이 남자가 그 천사의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말도 안 돼. 왕족이라기에 뚱뚱하고 못생겼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나이도 많대서 전혀 기대 안 했는데!'
이 완벽한 백색의 남자에게 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너무 눈에 띄는 미남으로서 초면에 범접하기 조금 어려운 분위기와 그런 분위기를 더욱 더 강조하는 냉담한 표정 정도일 것이다. 에이반도 물론 초면에 보았을 때 당황할 정도로 미남이었지만 이 남자는 그와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꽤 달랐기 때문에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아스벨에 비하면 훨씬 성숙한 이미지……. 그렇다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또 아니고.'
엘리시온 남자들이란 참 신기하다. 그는 아스벨이나, 심지어 에이반과 비교해서도 완숙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갓 스무 살 초입에 들어선 내 눈에는 에이반만 해도 충분히 연상의 듬직함이 있다고 느꼈는데,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와 함께 있으니 확실히 에이반 쪽이 눈에 띄게 풋풋하고 젊어 보였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고유의 분위기나 태도 같은 점에서 둘은 적잖은 차이가 존재했다.
곧이어 남자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오래간만인건가?"
찬 바람 쌩쌩 날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따스해 보이는 색감과 달리 남자는 그다지 다정하지도 선해 보이지도 않았다. 에이반은 익숙한 일인지 태연하게 응답했다.
"사석에서 만나는 것은 오래간만이지요. 7년이면 아직 젊은 제게는 꽤 긴 시간이랍니다."
"……일단 앉지."
그의 허락에 에이반은 나를 먼저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는 기본적으로 벽안에 탁한 회색빛이 섞인 듯 했다. 에이반도 아스벨도 눈동자 색이 한색 계통에 가깝지만 마주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의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서는 온기는커녕 싸늘한 냉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사실, 엘리시온의 신분 제도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는 근거 없지만 어렴풋이 존재하는 왕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연히, 신분제가 없는 현대인이었던 내게 왕족의 고귀한 피에 대한 경외 따위가 있을 리 없고, 오직 두려운 것은 제도의 불합리함과 그에 따라 겪을 부당한 체험들 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왕족 앞에서 실수로 기침을 했다고 목이 떨어져 나간다던가. 왜, 궁중에서는 자주 있을 법한 일이지 않은가.
'내가 사극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건가.'
한 집단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왕족의 존재가 적어도 레마슬레이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이 곳의 제도에 익숙해진 뒤였다. 뭐, 남자들끼리는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도 길거리에서 가장 처음으로 본 것이 족쇄에 묶인 6계급 노예들을 당당하게 끌고 다니던 부자였으니까. 하지만 여자들은 아니었다. 제 2계급이었던 그 여자도 공식적으로는 가장 아래 계급인 내게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 못지 않게 폭언을 쏟아내며 괴롭히긴 했지만, 여성은 엄밀히 말해 국유물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도 그리 간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쥐락펴락하기는 쉽지 않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걸 아는데 긴장하게 되네.'
나는 쭈뼛대며 일리아나스 공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식탁에 미리 마련된 다과의 존재를 나중에 에이반이 언급하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다. 솔직히 말해, 첫 인상에 이 맞선의 결과를 직감했다. 저런 냉랭해 보이는 남자와 내가 잘 될 것 같지가 않다. 아무리 고위 계급의 혼인이 반쯤 정략적인 근거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남자의 미모만큼은 보기 드물었으니 구경이라도 마음껏 하고 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에이반은 평상시보다 친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나에 대해 소개했다.
"이번 분기 디베르타에 등록되었습니다. 이름은 유이나라고 하며, 엘리시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능숙합니다. 마법은 기초적인 부분을 연습 중이고요."
"이번 분기면 아직 1년이 되지 않았겠군. 약속한 상대나 만나는 상대는 어느 정도 있지?"
"유이나? 당신이 대답해 보시겠습니까?"
에이반이 부드러운 어조로 참여를 종용했다. 일리아나스 공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아, 음, 일단 에이반과……, 아스벨루스 카스칼이요. 지금은 그 둘과 꾸준히 만나고 있어요."
"그 둘이 전부인가?"
일리아나스 공이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이번에는 에이반이 대신 대답했다.
"몇 차례 괜찮은 집안의 지인들을 소개시켜 준 적이 있습니다만 그녀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고 이 쪽도 썩 마음에 차지 않아서 말입니다. 뭐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괜찮다면 일리아나스 공께서 나중에 외국의 좋은 남자들을 소개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기회가 된다면."
일리아나스 공은 짧게 말을 끝맺었다. 잠시 서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에이반을 바라보고 있는 일리아나스 공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내 앞에 놓여진 음료를 조금씩 머금어 맛보았다. 떫은 맛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에이반이 옆에 놓인 시럽을 권해 주었다.
"아르트리어 경."
"엄밀히 말해 저는 군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호칭은 적절치 않지만, 예."
일리아나스 공은 느긋하게 앉아 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언제쯤 그녀와 첫 교섭을 가지면 되겠는가?"
"……."
에이반은 한 순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대화를 듣고도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에이반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건 직접 합의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 드릴 테니 천천히 얘기 나누십시오. 유이나, 얘기가 끝나면 방위군부에서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네? 가버리는 거에요?"
얼떨결이라 미처 붙잡지도 못했다. 에이반이 떠나 버리고 나와 그는 단 둘이 후원에 남게 되었다. 어쩐지 방금 전 에이반을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힐끔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나스 공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방금의 태도로 명백해졌다. 에이반은 나를 그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초대장을 받아 온 날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던 것도 그 이유였을지도.
이 남자 하나만 해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대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상대일 뿐 아니라 에이반까지 그런 식으로 불쾌해하며 쫓겨나가자, 나는 상당히 껄끄러워졌다. 나도 모르게 출입구를 힐끔대는 것이 느껴졌는지 일리아나스 공이 말했다.
"그대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네?"
"아르트리어 경도 없으니 사실대로 말해 주면 좋겠군. 내가 그대의 남편이 되면 어떨지를."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나는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내가 대답을 미루자 그가 말했다.
"그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레마슬레이그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직접 만나 본 신부 후보의 취향이나 외모가 크게 나빠 보이지만 않는다면 그 밖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남편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했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대의 의사였지. 지금 묻겠다. 어떤가, 나는 남편으로서 괜찮은 상대일 것 같나?"
취향이나……, 외모가 나쁘지 않다면……? 뉘앙스를 들어 보니 굉장한 미녀이기를 바란 것 같지는 않고, 추녀만 아니면 그만이란 투였다. 나도 모르게 의아함을 대놓고 내보였다.
"어째서요? 일리아나스 공께서는 대단히 높으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부인을 들이는 조건이 겨우 외모 뿐이라니요? 저 외의 다른 후보들과는 어땠는데요?"
"후보는 그대 뿐이야. 적어도 내가 레마슬레이그에서 만나기로 정해 둔 후보는 그대 하나였어. 가까운 곳에 둘 이상 알려진 적당한 후보도 없었고, 아내 후보가 굳이 여럿 씩이나 필요하지도 않지."
신부 후보라기에 나 외에도 적당한 여자들을 몇 명쯤 물색해 뒀을 줄 알았는데 겨우 나 하나를 보려고 왕도 밖에서 여기까지 왔다니? 여자가 그렇게 없나? 물론 명목상으로는 감찰이었지만 감찰 일은 다른 집행관에게 맡겨도 충분했다고 들었다. 그는 나를 만날 목적으로 감찰 일을 떠안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에이반에게서 그렇게 들었다.
"서로 접촉하여 아이를 갖고 몸을 맞추기에 거리낌이 드는 외모만 아니면, 그대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이지. 내 의도가 많이 미심쩍은가?"
꺼려지는 외모만 아니면 그만이라니, 아내가 될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도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이런 미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를 문서상의 부인으로 삼을 생각은 아니야. 딱히 아내로서의 의무를 바라지는 않네만,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어느 정도 수행할 각오를 하고 있네. 예를 들면 아까 아르트리어 경이 말한 것처럼 내 이름을 대고 고위 계층의 남자들을 소개시켜 준다던가."
그 얘기에 혹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혼, 내게는 그다지 리스크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 여자는 남편을 다수 둘 수 있으며 한 명에게 속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가 내 생각만큼 멋지지 않은 상대였다고 해도 그냥 문서 한 켠에 내버려 두고 다른 남자들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책임을 질 의무는 아내가 아닌 남편 쪽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무엇을 보고 나를 아내로 삼으려는 걸까? 상위 계급의 결혼은 쉽게 무를 수도 없다. 정말 인생의 절반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맡겨도 좋다는 건가?
나는 분명 조금 상기되어 있을 얼굴로 일리아나스 공의 미모를 힐끔대며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에 그다지 개의치 않아하며 대답만을 기다렸다.
"아내로서의 의무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보니, 사방에서 내 혼인을 종용하더군. 날이 갈수록 과해져서 직무 수행에 불편을 느낄 정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제안대로 권력 구조의 일환이 될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해도 제왕의 혈통을 잇는 한 하층 계급의 아무 여성이나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미래 레바단 고위 남성의 신부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으나 아직은 정치적 상대와 많은 커넥션이 없는 그대 같은 여자가 적당해."
"……."
나는 내 조건이 일리아나스 공 정도 되는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내 조건이 썩 흡족하여 내가 신부가 되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어중간한 조건을 이용해서 이런 굉장한 미남의 아내가 되다니, 어쩐지 죄책감이 드는 것 같은…….'
나는 혼자 속으로 만족해하며 그렇게라도 표정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그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나는 체질상 에스트라의 해소를 굳이 남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마력 운용에 문제가 없다. 실질적 결혼생활의 증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몇 번은 동침해야겠으나, 그 뒤에는 그대가 번거롭지 않게 다른 곳에서 머무르겠다. 굳이 나를 매주 만나 줄 필요는 없어. 개인적으로, 아이는 생겨도 그만이고 생기지 않아도 그만이야. 나와 결혼하겠는가? 당장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며칠 더 기다려 줄 수 있네."
냉큼 대답하고 싶지만 에이반이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 걸렸다. 그 역시 이 결혼에 대해 '흡족한 상대'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그럼 일단 돌아가서 에이반과 상담하고 결정해도 될까요."
일리아나스 공은 과하게 후원자에게 의존하는 듯한 내 발언에도 개의치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번 달의 마지막 날까지 레마슬레이그에 머무를 테니, 그 전에 결정해 주면 좋겠군."
"알았어요."
"조수에게 말해 그대를 바래다 주도록 하겠네."
일리아나스 공의 뜻대로, 래달란이라는 남자는 흔쾌히 나를 에이반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상관의 앞이었기 때문에 보인 의도된 친절함이었다. 그는 건물에서 나온 뒤로 내게 단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
래달란은 나를 딱 길목의 중간까지만 바래다 주고 돌아갔다. 손으로 저 멀찍한 어딘가를 가리키며 그 쪽으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좀 더 정중하게 확실한 장소까지 안내해 주면 좋았겠지만 집사나 하인도 아닌 그에게 그렇게까지 바라는 건 오히려 무례일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작별의 한 마디를 건넸다.
하지만, 막상 그가 가리킨 건물로 들어가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훨씬 정확하게 나를 데려다 주고 갔어야만 했다. 군부 건물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였다. 표지판 같은 것도 따로 없고…….
'휴일이라 사람들이 적은 거겠지?'
복도를 지나는 내내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인기척도 거의 없다. 무작정 복도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 때 멀리서 남자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 구호 소리? 훈련 중인 건가?'
복도 끝은 널찍한 연무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복도 귀퉁이에 반쯤 숨어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상의를 벗어 던진 땀투성이의 젊은 남자들이 제각기 흠뻑 젖은 근육을 드러내며 구호에 맞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의는 제복이 아닌 어두운 빛깔의 훈련복이다.
"처음부터 다시! 반스! 동작에 힘이 없다! 히스클리프는 남들과 검의 높이를 맞춰!"
군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비슷한 차림을 한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였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해도 눈에 띄게 중년이나 노년의 기색이 보이는 아니고, 갓 스물 안팎의 청년기 남자들과 달리 성숙한 정도였다.
그 때 군인 몇몇이 나를 발견했는지 의아한 기색으로 검을 멈추었다. 나는 시선이 집중되자 몸을 움츠리며 복도 출입구 뒤로 숨었다. 나 때문에 훈련이 방해되는 것 같아 찔렸다.
군인들에게 지시를 하던 훈련복 차림의 남자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꽤 무서운 표정에 숨을 들이켰다.
"여긴 어떻게 들어와 있는 겁니까?"
"아, 저, 그게……. 에이반, 아니, 그, 아르트리어 대령을 만나러……."
"아르트리어 대령이 오늘 출근했습니까? 5계급 여성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궁정에 출입할 수 없는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고, 찾는 대령과는 무슨 사이입니까?"
아무래도 여긴 에이반이 있겠다고 말한 장소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에이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훈련을 하던 군인들이 우르르 내 쪽으로 몰려와 나를 구경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군기가 들어서 혼이 날까 봐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는데, 굉장히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다.
"저, 저는 에이반의 약혼녀에요. 오늘은 왕족의 초대를 받아서 함께 입궁했는데, 잠깐동안 헤어져서요……. 에이반은 자기가 방위군부에 있을 거라고 했어요."
"밀러 소위."
남자의 부름에 유일하게 이 중에서 제복 차림을 하고 무언가를 기록하던 짙은 갈색 머리 군인이 앞으로 나섰다.
"예."
"이 분을 아르트리어 대령의 집무실로 모셔다 드리게. 그리고 신분 확인 작업도 추가로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중위님.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깍듯이 남자에게 경례를 하고 나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밀러 소위라는 남자는 처음에는 말 없이 나를 안내하다가, 문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방위군부는 오른쪽 건물이고, 방금 오셨던 곳은 치안부 쪽입니다."
둘 다 긴 건물이었는데 끝이 맞붙어 있었다. 나는 살짝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훈련을 방해해서……."
"아닙니다. 다만 일반인은 군부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반드시 대령님과 동행하시는 편이 좋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령님의 약혼녀 되시는 분이라 그냥 장소를 안내해 드리겠지만 보통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나 혼자 들어오면 안 되었던 거야? 나는 혼자 가라고 대충 설명하고 만 집행관의 조수인 래달란에 대해 생각하며 약간 떨떠름해졌다.
"미, 미안해요."
"간혹 장교들의 부인께서 허가를 통해 방문하시기도 하니,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밀러 소위는 간단히 주의를 주었다가 내가 당황하며 사과하자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힐끔 쳐다보니 내 반응에 나 못지 않게 긴장한 듯 하다. 내가 상관의 약혼녀라서 그런가. 군인의 계급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가 전에 소개받았던 세리스 에르나트도 계급은 중위. 이 남자가 경례했던 그 나이 들어 보이는 군인과 동급이었다.
'세리스 에르나트는 갓 청년이 된 마냥 젊어 보였는데……. 군 계급이란 잘 이해가 안 돼.'
이 남자만 해도 에이반과 거의 동갑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에이반의 집무실이라는 짙은 목재 방문을 노크하면서 마치 기계처럼 뻣뻣하게 긴장했다.
들어오라는 허락과 함께 밀러 소위가 각 잡힌 태도로 문을 열자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에이반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여 우는 소리와 함께 에이반에게로 뛰어갔다.
"에이반!"
"아,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일찍 얘기가 끝나셨군요."
"길을 잃어서 큰일나는 줄 알았어요."
"길을 잃어?"
그는 안타깝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런, 차라리 제가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그럼 소위가 여기까지 당신을 안내하고 온 겁니까?"
밀러 소위는 뻣뻣한 자세로 경례했다. 에이반이 약혼녀를 무사히 데려와 준 사실에 대하여 간단한 치하를 하는 동안 나는 안심한 채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소위가 감격한 얼굴로 돌아가고 나자 에이반이 말없이 문을 닫았다. 그는 착잡해 보이기도,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분께서 궁전 안의 하인이라도 불러 당신을 바래다 주도록 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일차적인 잘못은 제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만."
"일리아나스 공께서는 래달란이라는 조수에게 저를 바래다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길을 잃은 건 제가 래달란의 말을 잘못 이해해서였어요. 옆 건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를 돌려 비난하는 듯한 중얼거림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일리아나스 공 대신 변명했다. 에이반은 잠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래달란? 그 자가……."
"응?"
"'바래다 주라'는 확실한 명령까지 받고도, 중간에 당신을 놓고 돌아간 겁니까? 그런 무례한!"
"놓고 돌아갔다기 보다는……, 저기 저 건물이라고 직접 가리켜 알려 주고 가긴 했지만, 음, 네. 조금 그런 느낌이었어요. 끝까지 바래다 주기 싫어서 그냥 돌아가 버린 것 같기도 해요. 저기 에이반, 래달란이라는 사람이랑 사이 많이 나빠요?"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다. 래달란은 내게 약간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 보였는데, 나는 지금껏 내가 못나서 그 남자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리아나스 공의 말을 들어 보자면 내가 그의 신부 후보로 선택받은 것은 완벽히 내가 그의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일리아나스 공은 내가 신부로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가 매력과는 관계 없는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마음 아프지만.
또한 래달란은 나 외에도 에이반에게 미세한 적대감을 보인 적 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에이반까지 같이 싫어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에이반이 싫어서 그가 데려온 나까지 내켜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에이반은 아스벨이나 사무엘 중령 때와는 달리 무작정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이마를 짚고, 한참 고개를 숙였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가 저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는 합니다. 제 태도가 그에게는 불쾌했을 겁니다."
"어떻게 대했는데요?"
"정확하게는 그에게가 아니라 일리아나스 공께. 상위 계급의 남성에게, 특히 일리아나스 공 정도 되는 고고하신 분께 자기 부인이나 약혼녀를 소개시켜 줄 기회를 갖는 일은 대단한 영광일진대, 감히 제가 대놓고 싫은 티를 냈으니까요."
"싫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평상시와 다른 반응의 에이반이 걱정되어 그의 무릎을 짚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싫을 수도 있지, 뭐에요, 그 사람!"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네. 고작 여자 소개에 꺼려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 나는 에이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왔는데, 정말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돌아가는 길에 바로 거절하고 가요. 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이반이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 에, 에이반?"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꼼짝 없이 그에게 끌어안겨 에이반의 하소연을 들었다.
"지금은 그 때 당신이 선택해 준 것이 저라서, 당신을 가장 먼저 발견했던 것이 저라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뭐에요. 갑자기 낯간지럽게."
그 때라면 엄청 옛날 일 아닌가? 이 곳에 온 뒤로 워낙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덕인지 반 년밖에 안 돈 일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에이반이 그런 과거 일을 꺼낸 이유를 모르겠다.
"너무 커져 버린 제 욕심 때문에 겁이 난 겁니다. 일리아나스 공은, 그 분은 어릴 적부터 제 동경의 상대였습니다. 멋지고, 거대하고, 공명정대하며, 강하고, 냉정하고. 아마 그 시기에 소년기를 겪던 모든 엘리시온 남자들이 변방에서 활약하던 그 분을 동경하며 자랐을 겁니다. 그런 근사한 남자에게 당신을 보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그 분과 나를 비교하고, 결국은 내게 실망한 채 멀어질까 봐……."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 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잖습니까."
생각보다 날카로운 에이반의 지적에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에게도 다 티가 났을 정도면 아마 일리아나스 공 본인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잘생겨서 놀랐는 걸 어떡해. 워낙 그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처음에는 정말 천사가 강림한 줄만 알았었다.
입구에서 처음 만난 래달란이라는 사람이 예의 그 왕족 본인인 줄 착각했을 때도 저 정도 외모면 꽤 괜찮다고 생각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객관적으로 래달란의 외모는 평범한 정도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이 엘리시온의 어떤 여자에게라도, 그 분과의 혼인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일 겁니다. 당신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고 이 혼인으로 더 훌륭한 남자를 소개받게 되면 여성으로서 금세 높은 위치에 설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당신의 의사가 중요하겠지만, 저는 당신이 이 혼인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동경하던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 사이의 딜레마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낸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 남자의 태도나 래달란이라는 조수의 반응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서도 결혼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 날은 에이반이 잠깐 자기 집무실을 구경시켜 준 것 뿐, 어디에도 들리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출근 전에 에이반이 따로 서신을 보냈다. 내가 결혼에 동의한다는 얘기가 쓰여 있는 간략한 서신이었다. 에이반은 퇴근할 때 즉답을 들고 귀가했다.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와 유이나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결혼 신청서였다.
'내 이름과 이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히게 될 줄이야…….'
제지 원료로 금가루가 들어간 듯한 두껍고 눈부신 종이에 쓰여진 글씨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세련된 그 남자의 서명 옆에 나는 서툰 글씨로 내 이름자를 썼다. 나름대로 예쁜 글씨라고 칭찬도 들은 적 있었는데 이 서명 옆에 그려 넣으니 도저히 봐 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나는 내 혼인과 관계된 사항을 깔끔하게 정리된 문자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려운 단어는 그가 옆에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내 서명이 필요한 복잡한 결혼 서류 중, 내가 얻게 될 이득에 관해서만 해도 거의 한 페이지 가까이 적혀 있었다.
먼저 그와 결혼한 달부터 매달 품위 유지비를 일정액 받게 되는데, 그 금액이 꽤 컸다. 에이반에게서 매달 받는 용돈도 다 쓰지 못하고 그가 만들어 준 계좌에 쌓이기만 하는데 일리아나스 공이 자기 부인에게 건네는 돈은 무슨 월급 수준이었다. 또한 제 1계급 남성의 부인은 계급제에 따른 복장 규제에 관한 사면권이 있었다.
'이건……, 옷이 초라하니 좀 제대로 입고 다니란 뜻인가.'
일리아나스 공에게 내 복장에 관한 악의는 없는 듯 했으나 또 모르지. 하지만 나는 굳이 사면권을 쓸 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디베르타에서는 말이다. 앞으로 반 년동안은 특별히 모나지 않게 수업을 들으면서 지내고 싶었다. 기초 수업을 끝내고 나면 남편이 원하는 대로 입어 주어도 좋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권리나 상속에 관한 문제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고, 남편이 먼저 사망할 경우 남편 재산의 절반은 사회에 환원되며 나머지 절반은 내 몫, 만약 아이가 있을 경우에도 절반은 아이의 몫, 절반은 여전히 내 몫이었다.
남편인 일리아나스 공의 에스트라를 원할 경우, 즉 그와의 동침을 내가 원할 경우 그에게 특별히 할당된 업무가 없다면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그를 부를 수가 있었다. 일리아나스 공에게는 그에 응할 책임이 있었고.
'한 달에 한 번?'
안정기 남자는 청년기 남자들에 비하면 훨씬 적은 횟수의 해소로도 충분하다고 했지……. 한 달에 한 번이 그리 적은 횟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매주 만나는 에이반이나 아스벨과 비교하자니 결혼하자마자 권태기가 되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미묘한걸.
특이한 점은, 동침에 관한 사항이 그가 아닌 내 의사를 위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주기적으로 아내와의 동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남편 쪽이었다. 아내도 에스트라를 얻기 위해서는 성 교섭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굳이 남편이 아닌 남자와도 가능했으므로.
그 전에 일리아나스 공은 자기가 여자와의 성 교섭 없이도 멀쩡한 체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런 식의 항목이 적힌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와 흡사한 체질이 있다고는 배웠다. 똑같이 에스트라가 폭주하더라도 비교적 멀쩡한 반응을 보이는 남성이 있고, 아주 예민해지는 남성이 있는 차이였다.
'하지만 완전히 멀쩡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혹시 나 말고 다른 만날 여자가 많아서 그러나?'
그런 것 치고 보통 결혼에 기본적으로 포함되는 '독점'에 대한 항목은 꽤나 정상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예전에 에이반은 일리아나스 공이 성욕에 초연한 경향을 가졌다고 했다. 정말, 그의 체질이 사실이라고 해도 얼마 정도까지 성 교섭 행위 없이 멀쩡히 지낼 수 있는지, 몇 가지 사안 정도 물어보고 싶은데 직접 이런 걸 물으러 갈 정도로 친하지가 않아서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결혼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여기 적힌 항목들이 유별나다 해도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잘 분간하지 못하겠다.
"유이나는 아직 기초 교육 기간에 속해 있어서 레마슬레이그 밖으로 나갈 수 없지요. 일리아나스 공께서 이 서명을 대리로 하여 칼리온 본부의 허가 인장을 직접 받아 오실 겁니다. 왕족의 결혼은 보통 까다롭지만, 그 분의 손에서 직접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공께서는 다음 달 즉시 출발할 예정이니 그 전 아무 때나 한 번 시간을 내어 만났으면 하십니다."
예스러운 말투로 쓰인 편지지를 에이반이 대신 읽어 주었다. 다음 달 출발이면 아직 2주가량 남았다.
"아무 때나요?"
"예. 첫 성 교섭 없이는 결혼이 성립되었다고 보기 힘드니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안정기 남성의 상대는 처음이시니 최대한 무리 없을 날을 골라서 정하시면 좋습니다."
꽤 클까? 아니면 보통? 설마하니 그 체구에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는 아니겠지. 도저히 그 얼굴 밑의 물건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얼굴과 같다면 분명 늠름하고 잘생긴 모양일 텐데, 남성기가 늠름하고 잘생기려면 도대체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 거지? 아니면 말끔하게 복숭아빛으로 색이 입혀진 인조 페니스처럼 깨끗하고 새하얀 모습일까? 그의 얼굴이나 팔은 조금 그을린 기색이 있었지만 옷 안쪽을 얼핏 봤더니 꽤 흰 편인 것 같았다. 상상하면 할수록 낯만 더욱 더 뜨거워질 뿐 추측은 전혀 되지 않았다.
에이반이 편지 봉투에 내가 서명한 서류를 넣고 밀봉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자니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쉽게 결혼을 결정해도 되는 걸까. 나도 모르게 밀봉된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무심코 내뱉었다.
"꼭 이렇게 급하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의외로 그는 크게 의아하게 여기지 않고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 말대로 이번에는 결혼 과정을 꽤나 서둘러서 처리한 편이지요. 하지만 그 분은 능력으로도 직책으로도, 정치적으로 주변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인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되려 더욱 선망받고 계시는 것이지만요. 만약 여기서 결혼식 준비나 잡다한 의례 같은 것으로 서류 제출이 오랫동안 미뤄진다면 결혼 과정에 다른 인물이 개입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께 미리 청탁을 넣는다던가, 반강제로 그 분보다 먼저 당신을 부인이나 며느리로 맞이하려 할 수도 있겠지요. 이 결혼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육성하던 다른 여자를 들이밀려고 할 지도 모릅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그 분으로서는 곤란한 상황을 막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고, 본의 아니게 유이나에게도 피해가 갈 겁니다. 그 분께서 염려하시는 상황이 그겁니다."
"에이반은 되게 그 사람한테 깍듯하시네요."
하나하나 극존칭에, '그 분'이라고 꼬박꼬박 말해 주고 있다. 예상치 못한 지적에 에이반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곧 살짝 뺨이 붉어지며 그는 작게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대상이니까요."
정말 그 남자에게 나를 빼앗기기 싫어 쓸데없이 번민하던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일리아나스 공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뒤부터는 오히려 이 상황을 나보다 즐기고 있는 사람이 에이반이었다. 반면 나는 그 남자가 아직은 껄끄럽고 어렵기만 하다.
그런 이유로 혼인 여부를 대중에게 선언하는 결혼식 행사는 일단 서류에 제대로 도장이 찍힌 다음으로 미뤄졌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의 결혼만으로도 모자라 갑자기 낯선 결혼식 준비에까지 뛰어들어야 한다면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아스벨과의 약속 날이었다.
승마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레마슬레이그 변두리에 있는 엄청나게 넓은 초원이었다. 아침 일찍 나왔는데 승마장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초원 너머로는 간혹 언덕 같은 것이 보였으며 따로 만들어진 장애물 코스나 인공 숲도 구석에 작게 조경되어 있었다. 아스벨은 먼저 나를 앞에 앉히고 말을 탄 채 승마장 전경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는 자기가 즐겨 타는 말이라며 오늘 데려온 회색 말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가 훌륭한 기수라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승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나를 하나하나 이론부터 알려 주었다. 다만 훌륭한 선생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하는 행동마다 입에 발린 칭찬을 거듭하였지만, 정말로 잘 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칭찬을 듣는데도 내가 보기에 내 승마는 아스벨에 비하면 죄다 어린아이의 헛된 몸동작 같이 느껴졌다.
어쨌든 아스벨은 귀찮아하기는커녕 즐거워 죽겠다는 듯 굴었고 나도 해가 질 무렵쯤 되자 어느 정도 그의 도움 없이 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몸은 힘들지만 뿌듯함이 느껴졌다.
아스벨은 내가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처음에 보인 것은 경계였다.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의 이름을 들은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아스는 일리아나스 공에 대해 잘 알아?"
에이반의 반응과 그의 반응은 꽤나 상이했기 때문에, 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일리아나스 미켄바르프? 예전에 레마슬레이그에서 활약했다는 얘긴 들었는데, 정작 당시에 나는 겨우 일곱 살 정도라서……."
그런데도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 정도면 그 사람,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스벨은 진지하게 물었다.
"결혼식은 언제지?"
"모르겠어. 아마 서류부터 제출하고 나서 정하게 될 것 같아."
"정해지자마자 알려줘. 나도 준비해야 하니까."
무슨 준비를 한다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의 강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꽤 미남이라는 소문이던데 젊은 내가 미모로 질 수는 없지."
준비라는 게 설마 외모 관리를 말하는 걸까? 그보다 아스벨은 그 결혼식에 당연히 자기도 참석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아스벨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괜찮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지구 기준으로, 애인이 참관하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식에 대해 떠올리던 나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
약속한 날짜에 별궁으로 찾아갔더니 래달란이 퉁명스레 2층 방을 안내해 주었다.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대라 첫 만남을 가졌던 후원 쪽은 어둑어둑했다. 오늘은 전과 달리 귀부인의 복장을 하고 나왔다. 순금 장식이 달린 실크 속옷과 속옷이 언뜻 비치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쉬폰으로 된 주름진 긴 원피스였다. 허리에 달린 것도 보석이 박힌 황금 사슬이었고 머리에 쓴 모자는 전에 아스벨이 선물한 것 중 하나였다. 샌들은 섬세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끈에 사슬로 귀금속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팔뚝에도 고가의 팔찌를 몇 개 착용했다. 머리는 느슨하게 땋아 뒤로 묶었는데, 묶는 끈은 화려하게 수가 놓인 비단 리본이다.
그런데도 이미 래달란에게는 밉보인 이후라서인지 그는 아무런 태도의 차이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2층 문을 열었다. 중요한 건 일리아나스 공의 반응이니까.
침실로 추정되는 방은 넓었고 가운데에 흰 시트로 뒤덮힌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기둥에는 황금 물감으로 무늬가 칠해져 있고 침대 헤드도 마찬가지로 조각된 부분마다 하나하나 칠이 되어 있다. 캐노피 장식은 반투명한 엷은 보랏빛. 일단은 불이 환하게 밝혀진 채인데 스위치가 천정에 고정되어 버튼이 붙은 끈의 끄트머리가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침대 앞부분에는 방 전체에 묘한 향을 퍼뜨리는 백자 주전자와 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일리아나스 공은 침대 한 쪽에 누워 있었다. 넓은 쿠션과 침대 헤드에 등을 받치고, 물끄러미 그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금발 머리는 감고 나서 빗어넘기기만 한 듯 촉촉하게 습기가 남은 상태로 부드럽게 이마로 늘어졌고 목 아래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하반신에 아슬아슬하게 흰 시트만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완벽한 준비를 끝마친 것으로 보인다. 피부색은 밝았지만 상당히 단련된 몸이다. 모양 잡힌 근육들이 어깨부터 손까지 단단하게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다. 시트 위로는 꽉 짜인 복근이 올라붙어 있었으며 널찍한 대흉근 아래로 작은 유두가 분홍빛으로 슬쩍 보였다. 근육과 피부가 이루는 곡선과 직선의 조합이 무심한 듯 아름다운 그의 얼굴과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 다른 남자들의 과할 만큼 단련된 몸과 달리 그는 신체마저도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대에게는 아마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만."
일리아나스 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자와 마력을 나눈 일이 없다. 그대와의 행위가 완전히 처음이지."
"……네?"
"수고스럽겠지만 그대가 좀 고생해 주게."
수고스럽겠지만? 고생? 일반적으로 성 관계 전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내가 온전히 리드해야 하는 건가. 나는 머뭇거리다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의 상태를 물었다.
"그, 혹시 지금 전부 벗고 계신 건가요?"
"……."
대답 대신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얇은 시트 아래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저것은……. 일리아나스 공은 턱짓으로 차 한 잔을 마시고 와도 좋다고 했으나 나는 마시지 않았다.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가 벗고 있다고 하니, 나도 이 장신구와 옷을 말끔히 벗고 침대로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모자를 벗고 허리띠의 사슬을 풀었다. 쉬폰 원피스는 어깨의 핀을 제거하기만 해도 바로 발 끝까지 주르르 떨어진다. 팔찌와 몇 가지 장신구는 침대 테이블 바로 옆에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트레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옷을 벗는 동안 일리아나스 공은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일부러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정면을 직시한 자세를 유지했다. 어색할 정도인 것을 보면, 나름대로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마저 벗고 침대 한 쪽에 걸터앉았다.
"저어, 일리아나스 공."
나직하게 말을 걸자 그가 비로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 후에 대답 대신 그가 뱉어낸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그대는 부인이 될 상대이니, 지금부터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도록 하지."
"이름이요?"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차피 나의 부인이 될 테니 남편인 내게도 친근하게 낮추어 평대를 하게. 그대와는 성적인 행위를 지속해야 하니 다른 여자와 같이 취급할 수 없지."
도저히 뜻 모를 말이었다.
"다른 여자들이라니요? 제가 첫 여자라면서?"
"물론 그대가 내 처음을 가져갈 여자는 맞지만, 그렇다고 내게 지금껏 도전해 온 여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야."
일리아나스 공의 변명에 문득 전에 에이반이 한 말이 떠올랐다. 금욕적이라거나 성적인 면에 초연하다거나. 그런 평판이 생기기 위해서는 수많은 여자를 거절해야만 했고, 그 전에 '수많은 여자'가 그에게 접근했어야만 한다. 하긴 이 미모를 여자들이 그냥 둘 리 없지. 나는 확인차 질문했다.
"일리아나스 공은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하시죠?"
그런 수많은 어필을 뒤로 하고 아직까지 한 명도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뜻밖에 그는 쉽게 수긍했다.
"그렇긴 하다만, 부인이 될 상대에게까지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겠지."
여자는 싫지만, 필요에 따라 결혼은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내 호칭부터 진작에 다른 여자들과 차이를 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왕족인 일리아나스 공의 이름을 직접 부르고 평대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긋나긋하게 존대로 말을 걸고, 일리아나스 공이라고 높여 부르고. 하긴 그랬겠지.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면 엘리시온 최상위 계급이자 칼리온의 권력가인 그에게 공대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알았어. 칼, 이라고 부를게. 바, 반말은 아직 좀 어색하네……."
"긴장할 필요는 없다. 부부라면 하는 일이야."
그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과감하게 친근한 호칭을 써 봤지만 그에게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친밀한 도전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가슴 설레며 긴장한 모양이다.
시답잖은 얘기들을 생각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 간신히 한 가지를 골라내었다. 그의 옆에 누우며 시트를 끌어당겨 덮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에이반이 그, 칼……, 을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차갑게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외면하며 대꾸한다.
"소년기 시절에는 쉽게 주변의 젊은 남성을 동경하곤 하지. 그 뿐이다."
어중간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에이반은 소년기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일리아나스 공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칼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에이반만이 아니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닌 것 같고, 심지어 조수인 래달란마저 칼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것 같던데.
"에이반이 나를 칼에게 보여주기 싫어해서, 아니면 나한테 못난 옷을 입히고 데려와서 혹시 기분이 많이 상했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그런 하찮은 일로 기분이 상할 리 없지 않나. 또한 그 역시 아르트리어 경으로서는 타당한 고민을 한 것이다. 거기에 대한 한 어떠한 유감도 없어."
하찮은 고민으로 치부하며 사실을 부정했으나, 나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거기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한 치의 불만도 없었던 거야? 하지만 래달란이라는 사람은 나랑 에이반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고!"
"벌써부터 청탁인가. 래달란이 그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서늘한 벽안과 내 눈이 한동안 마주친 채였다. 청탁이라고?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 역시 벌써부터 이런 화제를 꺼내서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입에 올리긴 했으나 그에게는 무례한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후우. 부인의 청탁이니 터무니없는 일만 아니면 어느 정도 고려해 보지."
그의 다음 말이 아니었더라면 조금쯤 응어리진 감정이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나는 칼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에이반의 사정을 좀 살펴 달라고 격렬하게 몸으로 항의할 생각이었다.
과감하게 침대 시트를 젖혔다. 하지만 다짐은 그의 하반신에 우뚝 선 물건을 보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짐작하던 것은 칼의 페니스가 아닌 손 모양이었다. 발기해서 부담스러운 형태의 페니스를 일부러 손으로 덮어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정기에 접어든 남성의 페니스는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크고 거칠고 흉측했다.
두께와 길이는 둘째치고, 말미잘 촉수 같은 돌기가 기둥 전체에 돋아 있었는데 중간중간 핏줄이 도드라져 더욱 징그러웠다. 튀어나온 돌기의 끝은 기본적으로 마찰로 인한 색소침착으로 검붉은 색이었다. 핏줄이 비쳐 푸르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기둥에 비해 큰 귀두에는 얕은 크레이터 같은 흔적이 점점이 퍼져 있고 귀두 밑 주름에 돋아난 돌기는 상당히 갯수가 많고 자잘했다. 주름진 정도도 내가 보던 성기의 포피에 비하면 훨씬 심했다.
'이, 이게 뭐야…….'
에이반이나 아스벨이나 색이 눈에 띌 만큼 검지 않은 편이고 깔끔하게 잘 빠진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물건을 본 순간 꽤 충격을 받았다. 칼의 잘생긴 얼굴을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탓에 더욱 더 그랬다. 안정기에 접어선 남성의 페니스에 돋아난 돌기의 이름은 자극 돌기라고 하며 여성의 흥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디베르타의 성교육 시간에 배운 얘기였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핏줄 같은 것이 조금 돋아나 있는 정도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이건……, 정말로 돌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정말 이걸로 자극이 되긴 할까? 도리어 아플 것 같은데…….
결국 호기심이 승리하고, 나는 쭈볏대며 칼의 양 허벅지 사이 우뚝 선 물건에 손을 가져갔다. 돌기는 의외로 보기보다 단단하지가 않았다. 피부의 일부가 튀어나온 정도에 불과한지 마치 아주 부드러운 고무처럼 말랑말랑했다.
칼은 내가 그의 다리 사이를 만질 때부터 아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행위 자체에 무심한 듯 보이기도 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뭐야, 불감증이야?'
디베르타에서 배운 대로 기둥을 한 손으로 쥐고 위아래로 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색보다 좀 더 짙은 금빛의 체모가 퍼져 있는 뿌리 주변을 쓰다듬었다. 처음엔 두렵다고 생각했던 돌기도 손바닥 아래에서 톡톡 문질러지는 게 의외로 재미있었다. 워낙 부드럽고 따뜻해서 그런지 생각만큼 거부감은 없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는데,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말았을 뿐 얼굴 근육에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전적으로 칼의 위로 올라타 방금까지 쓰다듬던 페니스에 내 그곳을 맞추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촉감이 닿자 놀랐는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멈칫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완전히 체념한 듯한 그의 물건을 바로 삼키기보다는 약간 비껴서 허리를 내렸다.
양 허벅지 사이에 단단히 그의 페니스를 가두고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외음부를 핥듯이 자극하는 돌기들 탓에 이렇게만 했는데도 꽤나 기분이 좋았다.
'생긴 건 좀 그렇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네.'
나도 모르는 새 애액이 흘러나와 그의 돌기 투성이 기둥을 끈적하게 적셨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돌기들 탓에 애액이 쓸려 찌걱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느슨하게 부풀어 있기만 할 뿐 얌전하던 칼의 물건이 점차 뿌리부터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보다 더 커지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길이나 둘레가 커지는 대신, 먼저 비대해지는 건 생식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돌기들이었다.
크레이터처럼 생긴 귀두 끝과 줄기 뒷면의 자국들이 점차 부풀면서 더 단단한 알갱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칼의 배를 짚고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흔들며 줄기 뒤쪽 돌기에 클리토리스를 격렬하게 문질렀다. 이 돌기……,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 기분 좋았다. 절정의 순간 나도 모르게 칼의 몸 위에 체중을 완전히 싣고 그의 허벅지를 꽉 짓눌렀다.
숨을 헐떡이며 그의 가슴을 짚었다. 비로소 칼이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끝이냐니……, 으읏, 어, 얼른 다시 누워."
내가 엉덩이를 들어올리자 투명한 실 몇 가닥이 그와 나의 성기 사이를 이으며 떨어졌다. 나는 입구에 뭉근하게 칼의 귀두를 맞추고 엉덩이를 서서히 내렸다. 그의 어깨를 꽉 쥐고, 경고했다.
"흐응, 자아 이제, 몇십 년간 고이 지켜 낸 당신 동정을 새 아내한테 바칠 시간이야……, 흐아흣!"
귀두가 좁은 입구를 벌리고 진입할 때, 솟아 오른 딱딱한 돌기의 마찰로 조금 아팠다. 워낙 그의 성기가 큰 탓도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엉덩이를 더욱 더 내렸다. 난폭한 형태의 귀두로 살짝 긁힌 입구를 기둥의 돌기들이 부드럽게 핥아 주며 들어왔다. 두 종류의 감촉이 연속되는 바람에 넣은 것 만으로도 그만 가 버릴 뻔 했다.
허벅지에 힘을 꽉 준 채, 숨을 할딱이며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금의 내 말에 놀라기라도 한 건지, 칼은 넋이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대하던 욕망에 미친 표정까지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반응을 끌어냈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게 노력하며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조금씩 움직여 본다. 그 카이제르 일리아나스 공을 내 하체 밑에 깔고 앉아 있다는 상황 때문인가 평소 이상 흥분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도도하고 냉랭하게 굴더니……, 지금만큼은 에이반이나 아스와 별 차이 없는 남자 같네.'
칼의 페니스가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 확실히, 느리지만 그는 남자로서 내게 반응하고 있다. 침대 매트리스만이 아니라 칼의 몸까지 깔고 앉은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가며 엉덩이를 앞뒤로 서서히 흔들었다.
"으흣, 흐, 흐앗, 으음……."
안쪽 깊숙한 곳을 돌기 투성이 페니스가 찔러 올 때마다 이성이 날아갈 것 같다. 처음엔 싫어했던 기둥의 부드러운 돌기들이 지금은 너무 기분 좋았다. 돌기들 역시 나름의 부피가 있어 질 안을 빈틈 없이 꽉 채워 주었다. 게다가 주름마다 돌기 하나하나가 격렬하게 비벼지며 맞아 들어간다.
"앗, 좋아! 핫, 하, 기분 좋아……!"
이번에 눈을 감은 것은 나였다.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도 잊고, 그의 어깨를 꽉 잡은 채 하반신을 힘껏 들썩였다. 원래 굵기나 길이가 압도적으로 컸고 거기에 촘촘하게 붙은 자극 돌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흐응, 칼……."
앞에 뻗어진 그의 손이 얼핏 보였다. 나는 칼의 손목을 잡아 내 골반을 받쳐 쥐도록 했다. 겉도는 듯 하던 손의 움직임이 금방 방법을 깨닫고 단단히 내 엉덩이 양쪽을 우겨 쥐었다. 칼이 내 엉덩이를 힘껏 자기 쪽으로 당기자,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느껴 버렸다. 안이 꽉꽉 조이면서 돌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소와 같이 절정의 맛에 빠지려다 돌기의 촉감이 선명해지자 나는 깜짝 놀랐다. 다행히 절정과 동시에 칼이 움직임을 멈추어서 질 안 경련은 오래 가지 않아 멎었다.
너무 생경한 절정감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든데, 그의 물건이 안쪽에서부터 재촉하듯 꾹꾹 찔러들어온다. 나는 흐트러진 얼굴로 그의 눈을 직시했다. 칼의 손목을 붙잡고 속삭였다.
"자세, 이거랑 반대로."
"……."
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그와 나의 위치를 뒤집었다. 이번에는 그가 위였다. 자세가 뒤집히는 도중에도 악착같이 내 엉덩이의 손은 떼지 않는다. 나는 어느 정도 그가 남성상위의 체위를 터득한 것 같자 다리를 벌리고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움직이는 방향만 알려 주었을 뿐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숙한 남체는 격렬하게 내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이미 다 큰 남자를 동정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거침없이 안으로 박혀 오는 흉악한 페니스에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노리고 있던 칼의 흐트러진 표정 따위는 눈에 담을 새도 없었다.
"으흣, 아, 안돼, 나, 나, 또 갈 것 같아! 앗, 응, 읏……!!"
"……안 된다고?"
"핫, 몰라, 좋아, 좋아, 아, 또, 또오……! 아응, 아아아아앗!!!!"
이미 여러 차례 돌기 맛을 본 질이 수도 없이 떨며 연속으로 절정했다. 다행인 것은 여유가 없는 건 칼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세 번 연이어 가버렸을 때, 칼 역시 엉덩이를 아래로 푹 박아넣은 채 짧게 근육을 경련시켰다.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칼의 목을 꽉 껴안았다.
배 안쪽으로 정액과 동시에 가장 순수한 마력이 회오리치며 침입해 들어올 때, 이미 나는 기절 직전까지 몰려 있어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는 중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어제 성행위를 했던 침대가 아니라 옆 방의 깨끗한 새 침대였다. 자는 새 누가 옮겨 놓은 건가? 짧은 시간 한 차례에 불과한 관계를 나누었을 뿐인데 사지에 다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토할 것 같아…….'
알몸인 채 비틀비틀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는데 세 개의 문이 다 화장실이 아니었다. 하필 마지막 방이 그 남자의 침실이었다. 문 하나를 두고 맞닿은 구조인가 보다.
그는 갓 씻고 나와서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몸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내 눈에 초점이 없는 것을 알고 의아하게 상태를 물었다.
"……괜찮은가? 어제 래달란에 대한 그대의 말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으음?"
"우웁!"
입을 막은 채 주저앉았다.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누가 기절한 나를 침대로 나를 옮기고 가운을 입혀 준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뒤로 열이 심하게 나서 한참을 앓았다. 처음 보는 얼굴의 의사가 찾아와서 여러 번 내 맥을 진찰했다. 세 번 정도 의사가 교체된 뒤에야 진단이 내려졌다. 일차적 원인은 처음으로 받아낸 칼의 마력 때문이었다.
"보통은 세계에 맞추어 천천히 몸이 변화하는데, 제왕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강한 마력 때문에 드물게 급격한 변이를 겪는 것 같습니다. 보통 과한 마력은 전부 받아들이는 대신 어느 정도 한도를 넘으면 더 이상 품지 않고 흘려 버립니다만, 이 분께서는 기이하게도 그와 같은 신체 반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끙끙 앓으면서 의사의 말에 대한 칼의 반응을 흘려 들었다.
"마력을 받아들이는 걸 멈추지 못한다고?"
"그렇습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여성의 몸이라기에는 말도 안 되는 양의 마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받아들인 일리아나스 공의 마력은 다른 남성들의 것에 비해 순도가 높기 때문에 많은 양을 거르지 않고 몸에 받게 된다면 오염된 마력들과는 다른 의미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 과연 이 분의 몸이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가……."
뜨거운 이마를 만져 주는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고 손을 뻗었다. 시원한 느낌을 주는 손등이 기분 좋아 몇 번이고 매만졌다. 손가락 끝이 흠칫하더니 내가 만질 수 있게 천천히 움직였다.
심하게 앓아 본 일이라고 해 봤자 감기나 독감 정도다. 아마도 몸이 그냥 불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열이 계속해서 오르기만 했다. 그 뒤로 몇 사람인가 나를 찾아온 것 같았는데 알아보기는커녕 뇌가 드문드문 작동하여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나 아팠는데, 열은 어느 시점 갑자기 순식간에 내리고 말았다.
누군가가 소리 없이 침실로 들어와서 내 젖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대어 보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이 움찔했다. 촉감이나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게 에이반의 손과도 아스벨의 손과도 달랐다. 나는 살짝 비뚜름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마치 크게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칼이 내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 내 귀가 조금만 더 밝았다간 심장이 몇십 센티는 하강하며 철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칼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일어나기엔 힘에 부쳐, 이불에 등을 댄 채로 가장 먼저 물었다.
"나 얼마나 잤어요?"
"이틀……, 정도 지났다. 잠깐, 잠깐만 일어나지 말고 기다려. 의사를 데려 오겠다."
"……."
나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의 말대로 누워서 의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꾸준한 검사 결과 의사는 이렇게 진단을 내렸다.
"신체 반응을 통해 받아들이는 마력의 양을 몸이 알아서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로 어느 정도 이상의 마력은 다시 배출해 내셔야 합니다. 성 교섭 한참 뒤에는 이미 흡수되기 시작해서 소용이 없으니 교섭 중이나 직후에 바로 하셔야 될 겁니다. 또 에스트라의 흡수가 어느 정도 수준부터 몸에 무리를 발생시키는지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팠던 것 치고 해결법은 아주 단순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것은 마력을 역량 이상 받아내는 것이지, 받은 마력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날 하루 의사로부터 흘러들어온 마력을 배출하는 법을 귀찮을 정도로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방법만 알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몇몇 여자들은, 탁하고 질이 나쁜 에스트라 같은 경우 기분이 나빠지고 면역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굳이 흡수하는 대신에 이런 식으로 따로 모아 배출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여자만 가능한 마법 중 하나로서, 꽤 고급 컨트롤이라 나 같은 초보는 배우지 못했을 뿐이었다.
의사는 궁의, 즉 왕족들의 건강을 봐 주는 신분이 확실한 자였는데 일리아나스 공의 부인을 진찰하게 되어 무척 영광임을 밝혔다. 내 신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게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닌 듯 하다. 의사를 돌려보내고,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고 와서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팠던 직후라서 몸이 마냥 나른하다.
미음 같은 스프로 속을 채우는 동안 칼은 내 침대 옆에 장승처럼 앉아 있었다. 그것이 신경쓰여 스프를 빨리 마시려고 하다가 너무 뜨거워서 숟가락을 놓칠 뻔 했다.
"핫, 뜨거!"
"괜찮은가?"
칼은 천천히 일어서서 내가 놓친 숟가락을 주워 쟁반에 올리고 스프를 쟁반 째로 빼앗았다.
"좀 더 식혀서 다시 가져 오라고 하지."
"천천히 먹으면 괜찮은데."
자신 때문에 이틀이나 앓았다는 점에 대해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뭐, 대하기 힘들던 남자가 먼저 약간이나마 숙이고 들어와 주니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스프는 묽었고 간이 별로 되지는 않았지만 재료가 이것저것 들어가서 그런지 기대했던 것보다 맛이 고소하고 감칠맛이 난다. 나는 칼의 눈치를 살피면서 최대한 얌전하게 스프를 식혀 먹다가 넌지시 물었다.
"저기요, 칼……, 그러고 보니 에이반은?"
"두 번 정도 다녀갔다. 기억나지 않는 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반이 왔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열이 많이 나서 기절해 있을 때 온 건가?
"밤새 꽤 오래 있었는데, 그대가 아르트리어 경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닐 때 한 얘기였나 보다. 그는 열이 내리자 에이반에게 내 건강에 대한 소식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럼 에이반은 내가 무사히 나은 걸 알겠구나. 다행이다.
스프를 전부 먹고 나서도 칼은 내가 침대에서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아르트리어 경이 일이 끝나면 그대를 데려가기로 했어. 그 전까지 쉬고 있게."
"하지만 답답한데……."
"말 상대를 해 주지."
나는 흔쾌히 그가 그렇게 말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런 요청도 들어 줄 수 있을까?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대고, 나는 칼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팔베게를 해 주도록 부탁했다.
"지금은 곤란하군."
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어차피 들어 주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아파서 그의 마음이 약해진 지금이 아니면 투정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나는 한 번 더 칭얼댔다.
"아픈 부인에게 팔베게도 안 해 주는 거야? 너무하네……."
"아니. 기억나지 않는 건가? 첫 교섭 이후에 잠들 때까지 내가 그, 해 주었다만……."
그걸 어떻게 기억하라는 건가. 이미 그 때쯤 정신을 반쯤 놓고 기절한 상태였을 텐데. 잠들 때까지 해 주었다고 해도 아주 짧은 시간일 것이다. 나는 조금도 못 믿겠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낮이라 싫다는 거겠지? 나중에 밤일 때 부탁해 보면 확실해지는 일이다.
덕분에 그의 팔보다 훨씬 편하고 안락한 쿠션을 베고 나는 옆으로 누웠다. 몸이 지쳐 있고 오래 앓느라 정신적으로 불안한 탓에 자꾸 접촉을 조르게 된다.
"그럼, 저, 손이라도 잡아 줄래?"
"……."
속을 읽기 힘든 시선으로, 칼은 이불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손까지는 무난하게 허용 가능한 부분이었을까.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내 손바닥을 붙잡아 주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기분 좋다. 은은한 맥박 소리도 마찬가지. 여전히 비현실적인 그의 외모를 올려다보며 나는 그가 무슨 말이든 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래달란은."
편안한 분위기에 서서히 감기려던 눈이 떠졌다. 이 상황에서 엉뚱하게 래달란 얘기? 나는 살짝 애매한 기색으로 눈을 치켜떴다. 칼은 내 손을 쥔 손바닥에 가볍게 힘을 주며 계속 말했다.
"고집이 세고 잘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인지 간혹 지위가 높은 상대에게 미움을 사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 어떤 점에서 그대의 마음에 차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문서상으로 사과를 하게 하고 먼저 칼리오네스로 돌려보냈어."
"어?"
"사과문은 아르트리어 경을 통해 전해 주겠다."
그렇다고 사과문까지 쓰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생각보다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것 같아서 살짝 놀랐다.
"항상 그와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행관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 가끔 조수로 동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 점은 이해했으면 좋겠군."
"으응……."
마치 숙제를 해결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나는 그의 성의 있는 모습이 꽤나 뜻밖이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칼."
"……."
칼은 약간 불편해 보였다. 어떤 부분이 못마땅한 건지는 모르겠다. 내 부탁-그는 '청탁'이라고 표현했으니까-을 들어줬다는 게 싫은 건가. 사실 진짜로 들어 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기분 풀라는 의미로 그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겨 뺨에 댔다. 손등의 촉감……, 역시 기분 좋다.
말상대를 해 주겠다고 그가 말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리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결혼하기로 정한 이후로 그 전보다는 부드러워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차갑고 퉁명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푹신한 침구 속에서 금방 잠들어 버렸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
이미 눈을 떴을 때는 에이반의 외투에 감싸여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분명 궁의가 다 나았다고 판단을 내렸는데도 그 뒤로 나는 에이반의 고집에 일주일을 내리 쉬고 말았다. 무사히 나았으니 차마 일리아나스 공에게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지만 복잡한 심정에 속이 끓는 모양이다. 디베르타에는 병가를 제출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나 수업을 들으러 다시 등원했더니 지연이가 보자마자 내 안부부터 물어보았다. 너무 걱정하는 것 같길래 아팠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보다는 결혼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겨, 결혼이요?"
"얼마 전에 소개받은 사람인데, 결혼할 때가 됐는데 마침 내 조건이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됐어. 아직 정식 서류는 제출하지 않았지만 곧 하게 될 거야."
그녀는 내 간략한 설명에 약간 충격받은 것 같았지만 내 표정이 괜찮아 보이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했다.
"아, 이, 일단 축하드려요, 언니…….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 번갯불에 콩 튀기듯……. 으음, 그럼 중매 결혼인 거네요?"
"뭐 그런 셈?"
"혹시 억지로 하게 된 건 아니고요?"
그녀가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억지로 결정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까지 별로인 사람도 아니야. 그리고 원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 한 달에 한 번 만나면 많이 만나는 수준일 걸. 생활은 아마 지금과 똑같이 하게 될 것 같고."
"하지만 결혼을 할 수 있을 정도면 되게 나이 많은 사람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몇 살인지 물어 본 적 없었다. 결혼 서류 가장 앞면에 생년월일이 쓰여 있었는데 어차피 읽을 내용도 없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고 서명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생년월일도 쓰여 있었나? 생년월일에 대해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여기 날짜는 지구의 기준과 많이 달랐다. 아마 생년월일이 아니라 내가 처음 여기로 온 날이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 뒤 집에 돌아와 에이반에게 묻고 나서야 칼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탄생일을 맞아 지금 109세였다.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강한 마력을 지닌 인간은 더 오래 산다고 했었나. 그는 제왕의 피를 타고났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수명이 길다. 자그마치 몇백 년은 산다니까 백 살도 왕족 중에선 젊은 축에 속한다. 그렇다 해도 제 나이보다 80년은 젊어 보이는 외모라니. 본래 엘리시온의 사람들이 마력이 눈에 띄게 쇠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젊음과 건강을 유지한다지만, 그렇게 숫자와 실제 외모가 차이가 나는 모습을 실제로 보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에이반이 얼마 전 앞 자릿수가 바뀌어 30살이 되었고 아스벨이 23살이니까.
'칼이 아니라 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확실히, 그렇게 부르면 화내겠지. 그 얼굴로 화내는 모습도 보고 싶긴 하지만……. 나는 입으로 그 얘기를 꺼내는 대신 생각으로만 그쳤다.
어느 날, 평소 같은 시각에 저택으로 돌아갔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도대체 이 시간에 에이반이 퇴근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나는 거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에이반을 보고 반갑기보다는 심장이 철렁했다.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었다.
"오셨습니까, 유이나."
그는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 며칠 중에 가장. 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어깨 너머로 방금까지 에이반이 들여다보고 있던 책을 힐끗 보았다.
'동물 사전……?'
사전 내지는 도감처럼 생긴 두꺼운 양장본 도서에는 글씨만큼이나 그림이 많았고, 삽화들은 하나같이 섬세한 터치로 각종 짐승을 그려내고 있었다. 어떤 삽화에는 간단하지만 색까지 따로 입혀져 있다. 마침 그가 펼쳐 들고 있던 페이지에는 파란 잉크가 칠해진 새가 한 마리 있었다. 크고 노란 앵무 같은 부리를 가진 새였다.
에이반이 책을 펼치고 새를 보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새 그림 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 말고는 하나같이 아직 내가 읽기엔 너무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중간중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위험이라거나 공격력, 둥지 같은 짧은 단어들 뿐이었다.
"알라바스트로의 깃털에서는 가장 값비싼 푸른 염료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작고 모양 좋은 깃털로는 무척 화려한 깃펜을 만들 수 있고, 깃의 색이 쉽게 바래지도 잘 망가지지도 않는다는군요. 깃펜은, 뭐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요. 하지만 깃털을 모아 장식으로 쓰면 아주 예쁠 겁니다. 갖고 싶습니까?"
"갖고 싶다기보다……, 되게 신기하네요."
하지만 새가 너무 무섭게 생겼다. 심지어 옆에는 사람과의 크기 비교가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었는데 양 날개를 뻗은 크기가 사람의 신장보다 큰 것 같았다. 맹금류 계통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니까 아마 사람을 공격하진 않겠지만. 그는 책갈피를 꽂아 둔 페이지를 넘겼다.
"돌라로자라는 짐승인데, 모피의 무늬가 마치 장미꽃이 피어 흐드러진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최근은 그다지 모피 유행이 아니지만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잘 입을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저기, 이런 걸 왜 보여 주시는 거에요? 이것들 다 시장에서는 본 적 없는 건데. 혹시 어디 멀리 가는 것 아니죠? 해외 파견이라던가."
조금 불안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다음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쳤다.
"이건 보석처럼 생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실은……."
그가 쥔 책을 밀어서 덮었다. 녹색 가죽으로 이루어진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세련된 검정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결계 외부의 마물에 대한 도감이었다.
에이반이 책을 밀어내고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가, 이번 원정에 차출되었습니다."
"차출……, 이요?"
"몇 달 정도 저택을 비우게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에이반이 정말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묘하게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안 좋은 일은 연이어 발생한다고 했던가. 청천벽력같은 통지였다.
사건의 발단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국가의 부름에서부터였다.
평상시 수도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근무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년 한 차례씩 결계 주변을 살피고 마물을 처치하여 통행로의 안전을 유지하는 장거리 원정이 필요하다. 치안부와 다른 것은 상대하는 것이 사람인지 마물인지의 차이. 이 '원정'을 위하여 2,3계급 청년기 군인들이 일방적인 과정을 통해 차출되게 되는데, 몇몇 군인들이 힘들고 위험한 원정을 피하기 위해 편법을 사용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일단 뽑히면 어지간한 이유로는 명단에서 이름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원정대의 리더요? 결계 바깥으로?"
에이반은 7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정을 다녀 온 경험이 있다고 했다. 청년기가 된 직후, 그리고 군대에 들어간 직후였다. 원정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워 그 이후로 빠른 승급이 있었다는 걸 보면 원정은 에이반이 젊은 나이에 벌써 대령이 될 수 있었던 발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심지어 지금은 원정대 리더로 차출된 것이다. 축하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축하의 말을 던지기에는 그 안위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원정이라는 거 많이 고생스러운 일이에요?"
"이번에는 리더 중 하나로 가게 되는 거니 저번만큼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저는 유이나가 걱정됩니다. 한 번 원정에 나가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년가량을 수도에서 떠나 있게 됩니다."
"1년씩이나요?!"
나는 깜짝 놀라 에이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이었다면 흔쾌히 다녀 왔을 테지만 지금의 제게는 책임질 여자가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별로 가고 싶지 않군요."
정직한 투정을 부리며 에이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에이반의 무릎에 올라타려다 그가 눈을 감고 다리를 꼬자 멈칫했다. 에이반은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미미하게 파고드는 불안감에 그에게 칭얼댔다.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되잖아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결국 선택지는 없다는 얘기였다. 에이반은 그 뒤 하루 종일 나를 어떻게 맡길까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일도 마찬가지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후원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원정대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다던가 하는 혜택은 없다. 모든 청년기의 상위 계급 남성에게 있어 추첨은 평등했다. 한 번도 원정 경험이 없는, 조건 맞는 신입이 일차적으로 정해지고, 그 다음으로 2년 이내 원정 경험이 없는 유경험자가 일정 비율 만큼, 마지막으로 리더가 추첨된다. 대신 출정이 결정되면 후원 중인 여자를 일시적으로 같은 계급의 다른 귀족에게 맡길 수가 있다. 맡기는 과정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은데, 대리인의 자격이라는 것이 후원자의 자격 이상으로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책임감 없이 아무에게나 휙휙 맡겨버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래서야 어디 맘 놓고 원정을 가겠는가.
아스벨은 25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자격 미달, 칼도 레마슬레이그에 접근성 좋은 저택을 보유하지 않으므로 자격 미달이다. 저택이라는 게, 물건마냥 사고 싶다고 당장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수도 한가운데에서는 더더욱이나. 무엇보다 리드 계급인 칼 정도 되면 거주도 아무 데서나 할 수 없다. 궁전이 아닌 저택에서 살고자 해도 어지간히 유서 깊은 저택을 누군가에게 양도받는 것이 아닌 한, 차라리 좋은 땅을 구해서 처음부터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에이반은 대령이었고 그만큼 인맥도 넓었으니 다른 남자들 중에서 나를 맡길 상대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대리인이라는 것은 이름 그대로 에이반의 권리를 대행하는 사람이었다. 쉽게 나를 믿고 맡기기가 불안한 듯 했다. 에이반의 저택에서 그가 없는 동안 혼자 머무르는 것도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그렇게 되면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후원 관련 규정상으로도 장기 부재 중 피후원자를 그냥 방치하듯 두고 다닐 수 없도록 되어 있고 말이다. 결국, 칼과 에이반과 동시에 짧은 작별 인사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디베르타에 당분간 방을 얻기로 했다. 에이반은 원정이 끝나기까지 몇 달이 걸릴 지 모르고, 칼은 대략 한 달이면 돌아온다고 하는데 돌아오더라도 그가 내 거취를 책임져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