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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르타에서 슬슬 여자들에게 초급 회화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것을 바로 말로 꺼내는 일은 남의 말을 해석해서 알아듣거나 쓰여진 글자를 읽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번역 마법이 걸린 로커스가 없으면 에이반이 하는 말들의 반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가 나름대로 쉬운 단어를 써서 말해 주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언어반이 서로 갈리는데, 본인 성취도에 따라 초급으로 배정될 수도 있고 중급으로 배정될 수도 있다. 디베르타 내에서 각각 말이 통하지 않아 데면데면하게 앉아서 수업을 들을 때, 우연히 같은 언어권 출신으로 서로 특별히 친하게 지내던 여자들은 낯선 생활 와중 의지할 지인이 있어 무척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상 시험 결과를 봤더니 그녀들의 언어 수준이 가장 떨어졌다. 오직 한 가지 언어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의외로 스파르타식 말 공부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공개되지 않은 내 성적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중급반에 배정되었다. 오늘이 첫 수업이다.
이번 교재는 엘리시온의 각종 결혼식에 대한 소개글이었다. 엘리시온의 결혼식은 신랑과의 결합 그 자체보다는 신부의 소개식이라는 부분에 더 치중한 행사였다. 낯선 세계에 처음 온 신부를 신랑의 주변 인물들에게 차근차근 소개시키는 것이다. 이 때 신부의 다음 남편이 정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활동 반경이 이 세계의 원주민인 남성들에 비해 어느 정도 제한되는 여자들은 결혼식을 사회적 데뷔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이란 디베르타 내에서만 생활하던 여자들이 처음으로 바깥에 또 하나의 거처가 생기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결혼을 했어도 디베르타에서 쭉 생활하는 여자들도 많았지만. 생활비라던가 거주지의 질 문제, 안전 문제 등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몇 가지 결혼의 형태를 소개한 담당 교사는 도서관에서 문헌을 조사해 보고 자신이 원하는 결혼식의 형태를 글로 써 내라는 과제를 남겨주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바라는 결혼식이니 허황된 예시를 들어도 무방합니다. 여러분들의 작문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제니까요.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해 보세요.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갔다. 나는 수업 자료들을 정리해 넣고 슬슬 귀가하려고 했다. 그 때였다.
"저기요오."
끝을 길게 늘인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말이 한국어라는 사실에 한 발짝 늦게 반응했다. 놀라서 뒤를 돌아 보자 버석버석한 흑갈색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익숙한 외모와 낯익은 머리색이었다. 표정은 자신이 없어 보였고 옷은 디베르타의 교복 위에 어깨가 드러나는 허름한 갈색의 원피스를 덧입고 있다.
"어? 설마!"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반응했다. 최근 로커스를 쓰는 일을 가급적 줄이려고 하는데 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은 역시 모국어였다. 그녀는 내게서 같은 언어로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국에서 오신 거죠?"
이곳 엘리시온에서 처음으로 만난 같은 차원계 출신의, 심지어 같은 지역 출신의 동지였다.
나는 레오가 마차를 끌고 와서 바깥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잊고 그녀와 식당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지연. 17살에 와서 지금은 18살이라고 한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1년이나 먼저 온 셈이다. 처음 온 지 1년 반이나 지났으면 디베르타의 기초 수업은 다 떼었을 텐데 여전히 중급 회화반에 다니고 있는 것은 그녀가 이곳에 거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히 적응하기 힘든 이유가 있었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물었다. 지연이는 내 말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자기 사정을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원래 세계의 가족이나 인연에 대해 딱히 미련이랄 게 없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화목한 가정의 외동딸이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인데 거기다가 엘리시온의 풍습도 적응하기 어렵고 낯설었다고 한다.
"여기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사 다녀야 했던 것도 싫었어요. 그리고 매번 억지로 남자를 만나야 했던 것도……."
"그런 게 있었어?"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 서, 성교육 시간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억지로 매주 주말마다 남자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해 줘요. 저는 남자랑 대화하기 싫어서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몰래 나오는데, 그것도 눈치가 보이고 힘들어요……."
성교육 과제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체로 남자를 꾸준히 만나 일정 이상의 마력을 모아 오는 것이 관건이다. 그녀는 남자를 그렇게 자주 만나길 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해? 나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누구한테?"
"언니도 이제 중급반에 들어왔으니 아마 방으로 사람이 찾아올 거에요. 레마슬레이그의 디베르타에는 파벌이 많은데 그 파벌에 속하는 여자들에게 한 번씩 인사식을 해야 하고 어느 한 곳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압박을 줘요."
나는 이 곳에 내 방이 따로 없었다. 후원을 받으며 아르트리어 저택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베르타 내의 생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수업만 듣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쌩하니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수업 외의 시간 전부를 이곳 담벼락 안에서 보내고 있었다. 외출은 자유라고 듣긴 했으나 내 생각만큼 완전한 자유는 아닌 것 같다. 파벌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득 내게는 디베르타의 방이 없다는 얘기를 꺼내려다가, 후원에 대해서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경고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특히 저는 남자와 대화를 거의 못 해서……. 예전에는 남자친구도 있었고 이렇게까지 남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여기서는 저랑 만났던 남자가 다른 모르는 여자랑도 아무렇지 않게 만나고 다니는 걸 못 참겠어요. 그냥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편이 나아요. 계속 적응하지 않고 있으면 여자들에게 옷도 입게 해 주고 다른 직업을 준대요. 욕조 청소 일이나 심부름 같은 거……. 저는 차라리 그런 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확실히, 남자보다는 나이든 여자나 부적응 상태의 여자에게 우선 할당되는 일이 있었다. 디베르타의 욕실은 완전한 금남의 지역이었다. 그 곳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히 여자일 것이다. 또 같은 여성의 병간호를 하는 것도 여자. 집사는 그런 그녀들을 무시하듯 말했지만 생각보다 이 세계에서는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들의 역할이 컸다.
"그게 싫으면 독점 요구를 하면 되지 않아?"
내가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지연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대사랑 비슷하네요. 남자들은 독점 얘기를 꺼낸 여자랑은 은근슬쩍 만남을 피하려고 하니까, 결국은 헤어지게 되어 버려요……."
"정말로 그래?"
그녀는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최소 한 번 이상은 그런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과 내가 만난 남자들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제 5계급에 속하는 남자들은 오히려 제 2계급 남자들보다 선택권이 많은 것 같았다. 독점당하기를 싫어하고, 이 여자를 만나기 어렵다면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된다. 디베르타에만 가면 여자가 있으니까. 반면 높은 계급 남성들은 최소한 같은 계급이 약속된 여자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선택권이 별로 없는 걸지도.
애매모호한 추측이었지만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그럼 5계급 남자들은 생각보다 자유분방한 타입이 많은 건가? 모든 5계급 남성이 디베르타를 밥 먹듯 드나들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같은 판정에 있어서는 아직 보류가 필요했다.
그녀가 남자를 아예 만나지 않게 된 것은 1년 전부터였다. 실제 독점은 아니었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로 친밀하게 사귀던 남자가 한 명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다른 여자들도 상습적으로 만나고 다니던 사기꾼이었다고. 주로 성격이 얌전해 보이는 여자들만 골라서 만났는데 얼굴과 재력이 안 되니 그런 식으로 독점을 핑계로 두고 여자들을 꼬드겨 성욕을 채웠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에 표정이 굳었다.
"저 말고 다른 여자들이 몇 명 관리소에 항의해서 그 남자는 디베르타에 아예 출입 금지가 됐대요……. 하지만 저는 그 일 이후로 도저히 이곳 남자들을 못 믿겠어요……."
처음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수업도 나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고. 그녀에게 몇 달의 공백기가 생긴 이유였다.
사정이 안타까웠으나 그녀는 의연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런 얘기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는 남 얘기를 잘 들어 주는 친구가 없거든요. 사실 저는 친구랄 것도 없었지만."
물론 친구가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나와 그녀는 수업 때마다 붙어 다니게 되었다. 같은 차원계 출신의 친구가 생겼다고 에이반에게 말했는데, 에이반은 애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만나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썩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제 2계급이 약속된 여자였고 그녀는 제 5계급 출신. 에이반이 내 친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런 식의 계급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에이반이 새로운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식탁에 앉아 턱을 짚고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전의 그 에르나트 중위가 계속 당신과 또 한 번 만나고 싶다며 끈덕지게 저를 찾아오더군요. 하지만 오늘 소개시켜 드릴 남자는 그가 아닙니다."
"누군데요?"
"사무엘 중령. 디트리히 사무엘 중령입니다. 저와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사관생도 시절부터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편이라, 당신의 얘기를 했더니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는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에르나트 중위의 물건으론 만족 못 한 모양이라 저와 비슷한 사이즈로 골랐습니다. 그는 대단한 정력가로 유명합니다. 에르나트 중위와 달리 여성들이 선호하는 외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도 있다고 하는군요."
디트리히 사무엘 중령은 수도 방위군 소속이었다. 에이반이 일하는 곳과 구체적으로 얼마나 다른 부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군인이라는 사실은 같았다. 약속이 잡힌 것은 다음 주라고 한다.
'사무엘 중령……. 어떤 사람일까?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에르나트 중위 쪽이 훨씬 더 잘생긴 것 같은데.'
그래도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니 잘생기지는 못해도 그렇게 혐오스러운 외모는 아닐 것 같다. 애초에 에이반이 그런 남자를 내게 소개시켜 줄 리도 없고. 나는 약간의 불안과 큰 기대감 속에서 에이반이 보내 줄 다음 남자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나는 가끔씩 저택의 주방장에게 부탁해 간식을 챙겨 디베르타에 등원하고는 했다. 간식은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지금 따로 만나는 남자가 없는 지연은 간식 정도의 사치품도 손에 넣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녀와 만난 적 있던 남자들도 형편이 넉넉하거나 후하게 용돈을 주지는 않았다. 처음 내가 가져온 과일 크림을 먹어 본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이 음식은 한국에서 흔히 먹던 어떤 디저트와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하위 계급의 사람들이 흔히 먹는 거친 음식보다는 훨씬 현대인의 입에 맞았다.
우리는 볕이 잘 드는 디베르타 광장의 한 켠에 자리를 펴고 일반적인 수준보다 조금 사치스러운 피크닉을 즐기곤 했는데,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간혹 띄었다. 돈을 모아 설탕 과자를 사서 나눠 먹거나 제각기 음식을 한 종류씩 들고 와서 식사하는 모습은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져오는 고가의 음식들이 일반적인 5계급 여자가 흔히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날, 에이반이 일이 많아 귀가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심부름꾼을 통해 내게 전달시켰다. 하필 매주 한 번의 훈련을 약속한 디에스의 날이었다. 심부름꾼과 같이 온 또 한 명의 소년은 내게 항상 같은 편지가 첨부된 선물을 건네주었다. 마음 속이 복잡했다. 편지를 뜯어 읽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일이면 휴일인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으면 야근을 한다는 거지? 에이반은 평상시 항상 주중에 일을 몰아서 하고, 디에스의 날이면 일찍 퇴근해서 나와 시간을 보냈다. 한숨이 푹 나왔다.
의미 없이 책을 뒤적거려 보고, 옷장에 걸린 얇고 짧은 옷들을 몸에 걸쳐 보기도 하고, 캔버스 앞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공상에 잠기기도 하고, 산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이대로 혼자 있으면 에이반의 귀가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위라도 시작할 것 같다. 어떻게든 움직여야지. 나는 오늘도 똑같이 아스벨이 보낸 꽃 선물을 노려보다가 방 옆에 놓여진 벨을 잡아당겼다. 마침 근처에 있던 레오가 서둘러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지금 외출할 거야."
슬슬 저녁식사를 할 즈음이었다. 레오는 평상시보다 늦은 외출임에도 의문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유이나님."
마차가 곧 마련되었다. 마차라고 통틀어 부르고는 있지만 말 대신 아우카 한 마리가 안장을 매고 마차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우카는 아주 커다란 타조를 닮은 흔한 이동용 가축이다. 처음에 내가 봤던 날개 달린 말인 그리폰 같은 경우는 꽤 연비가 비효율적이었는데 고위 계급의 주인이 탑승한 마차에만 그리폰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이 저택에도 한 마리가 있다. 지금은 에이반이 출근할 때 타고 간 마차에 딸려 있어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마부와 소년종 레오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동행할 소년종은 한 명으로 정했다.
외출복으로 적당히 갈아입고 나서 마차에 탄 뒤 레오에게 말했다.
"카스칼 저택."
"카스칼이면 매번 선물을 보내 주시는 그 분이요?"
오늘도 꽃다발을 보내 왔으니 레오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꽃을 꽂은 것은 그였다.
"응. 거기로 가 줘."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에이반은 대령이고 총괄자인데다 그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비정상적으로 늦지만 제 1군에서 근무하는 군인은 보통 요일을 무관하고 저녁 시간쯤 되면 퇴근한다고 들었다. 아스벨을 만나서 그에게 이런 고가의 선물을 꾸준히 보내는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와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상대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 선물을 그만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떡할까?
왕도가 좁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우카의 효율이 좋아서 그런지 마차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는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가 벌써 도착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카스칼 저택입니다."
마부가 열어 주는 마차 문 밖으로 고개를 빼냈다. 레오가 쿠션이 달린 발 받침을 서둘러 받쳐 주었다. 그걸 밟고 내려오자 카스칼 저택의 입구가 한 눈에 보였다.
"……."
에이반과 아스벨은 같은 군인 장교, 같은 제 2계급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카스칼 저택이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담벼락 너머 보이는 넓은 초원이 모두 카스칼 저택의 앞마당인 것 같았다. 아르트리어 저택이 타운하우스라면 이 곳은 성이었다. 연록의 잔디밭 정원 너머로 하얀 색 4층 구조의 모던한 저택이 보였다. 화려함은 덜하지만 집의 크기는 훨씬 컸다. 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에이반은 대령이고 아스벨은 그보다 두 단계 직위가 낮은 소령이라고 들었는데?
방문 소식을 들은 저택의 하인이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약간 나이가 든 하인이 미심쩍어하며 우리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나나 소년종이나 저택의 마부나 그렇게 모자란 행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마차에 계급장 같은 건 달려 있지 않아서 하위 계급의 마차라고 착각할 여지는 있었다. 굳이 아르트리어 가의 사람이라고 밝힐 이유는 없어서, 나는 다른 둘보다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아스벨루스 카스칼 소령을 만나러 왔는데. 그의……, 지인이에요."
"아스벨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하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를 불러 오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하인은 예상과 달리 입구 앞에 버티고 서서 꼬치꼬치 내 정체를 캐물었다.
"혹시 어느 가문 출신이십니까? 약속은 미리 잡으셨습니까? 아스벨 도련님과의 관계는?"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 건가?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하인이 단호하게 이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명백히 수상한 인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괜찮아요. 제가 왔다고 하면 아스벨도……."
"신분도 밝히지 않은 인물을 카스칼 저택 내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아니,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아스벨과 밖에서 잠깐 얘기만 하면 충분해요."
"돌아가 주십시오."
상대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니 불쾌감이 들었다. 내가 아스벨 본인과 만나겠다는데, 만나고 말고는 본인이 결정한 일일진데 하인이 무슨 권리로 그걸 막는단 말인가. 하인은 마치 외판원 박대하듯 나를 대했다. 레오는 당황했고 마부가 불쾌해하며 대들려는 것을 내가 막았다. 아스벨과의 비공식적인 관계를 굳이 그가 없는 곳에서 내 입으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전박대를 당한 채 돌아가는 것보다 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마차로 올라탈 참이었다. 저택에서 좀 더 젊어 보이는 하인 한 명이 뛰어나왔다.
"잠깐만요, 주인님께서, 주인님께서 손님 분을 안으로 모시랍니다."
"안으로 모시라고……?"
나이든 하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안면몰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
주인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그 점마저도 못마땅했지만 아스벨과의 용건도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하인들을 따라 그가 기다리는 저택 안으로 향했다.
카스칼 저택은 외관이 심플한 것 같으면서도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어 웅장한 맛이 있었다. 새하얗고 심플한 건물 벽이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간혹 원통형의 큰 기둥이 군데군데 보였다. 복도는 짙은 색의 타일, 소형 공예품들이 일정한 주기로 복도를 장식하고 있었다. 하인은 손님이라며 집사복과 비슷한 복장을 한 남자에게 나를 인계했다. 집사는 표정 없이 인사하며 나를 응접실로 데리고 갔다.
건물이 넓은 만큼 응접실도 굉장히 넓었다. 아르트리어 저택도 저택이라는 이름이 붙는 만큼 일반 가정집에 비할 바 없이 넓었지만 이 곳은 더했다. 꽃병인지 거대한 화분인지 구분하기 힘든 도자기 병 속에 열대의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꽂혀 있었다. 그 화분 두 개 사이에 검정색 소파와 화려한 원목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다.
휘황찬란한 소파에 한 남자가 이미 앉아 있었다. 푸른 빛 코트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은발의 남자였다. 아스벨과 꼭 닮았지만 그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아스벨이 10년 정도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형제인가? 하지만 왜 이곳에?'
나를 안으로 초대한 건 아스벨이 아니었나? 서둘러 상황 판단을 했지만 여전히 얼떨떨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집사가 나를 들여보낸 것을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턱짓으로 맞은 편 소파를 가리켰다.
"우선은 앉게."
"저, 아스벨은 어디에 있나요?"
나는 남자의 말대로 소파에 앉는 대신 아스벨의 행방부터 찾았다. 남자가 이마를 짚더니 진심 어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우리 아스가 동정이라지만!"
나는 남자가 버럭 외치는 말에 선 채로 깜짝 놀랐다. 그는 깊은 숨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노리는 여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큰일이 아닐 수 없네. 약속도 제대로 잡지 않고 찾아와서는 아스를 만나겠다니, 자네는 내 아들이 그리 쉬워 보이는가?"
"네?"
동정이라니, 나랑 한 지가 언젠데……. 그나저나 아스벨의 아버지? 아스벨과 너무 꼭 닮아서 아버지인 줄 몰랐다. 그럼 아스벨은 아버지와 함께 저택에서 사는 건가? 하인이 말한 '주인님'도 아스벨이 아닌 아스벨의 아버지를 뜻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바깥의 하인은 아스벨을 '도련님'이라고 불렀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갓 성인이 된 청년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은. 나는 에이반이 혼자 저택에서 살고 있으니까 당연히 아스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갑자기 잔뜩 피곤해졌다. 좀 더 신중하게 알아보고 올 걸 그랬다.
아스벨의 부친은 내 반응에도 아랑곳않고 혼자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말해 보게. 도대체 어디서 보고 우리 아들에게 반해 저택에까지 찾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아스는, 우리 아스는 자네 같은 여자한테는 과분한……!"
"……아버지?"
나와 아스벨의 부친은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머리모양을 한 아스벨이 문 앞에 서서 무척이나 당황한 듯 나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와 달리 짧은 소매의 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다. 벨트도, 목에 걸린 타월도 비싸 보이는 물건들이었지만 본 적 없을 만큼 편안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아스벨의 얼굴에, 점차로 발간 기가 올라왔다. 정수리부터 쇄골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어 대단히 놀란 모양이었다.
"왜, 왜 유이나가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난 당신을 찾아 온 거에요, 아스벨."
"나를?"
아스벨의 표정이 아주 느릿하게 바뀌었다. 감출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로?"
"네. 그냥 짧게 묻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돌아갈 걸 그랬나봐요. 약속도 잡지 않고 온 저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것 같으니까."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 뒤 몸을 홱 돌렸다. 두 걸음도 걷지 못하고 아스벨이 나를 말로 붙잡았다.
"아니, 아니야, 와 줘서 정말로 기뻐. 우리 사이에 약속 따위가 뭐가 필요해? ……혹시 아버지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내가 혹시라도 기분이 상했을까, 돌아간다고 말하기라도 할까, 아스벨은 안색을 바꾸며 전전긍긍했다. 상황을 파악한 아스벨의 부친이 자진해서 실토했다.
"아니, 그게 난 아스에게 찝쩍대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해서."
"유이나가 그럴 리 없잖아요! 대체 나의 유이나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아스벨은 벌컥 화를 내며 으름장을 놓았고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부자간의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어쩌면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간에 내가 바라는 그대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스벨은 어떻게 생각해도 내게 완전히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 당사자인 내가 봐도 그럴진대, 누가 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차마 내게 손대지 못하고 쩔쩔맸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 달라는 그 때의 말을 목숨 걸고 철저히 지키는 듯 했다. 나는 부자간의 대화 중인 그의 손목을 완전히 충동적으로 붙잡았다. 아스벨은 일순 하얗게 질렸다가 새빨갛게 타오르더니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미안해. 그러니까, 날 만나러 왔다고 했지? 내 방으로 갈까? 아니, 방은 아직 이른가?"
"어디라도 상관 없어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아스벨은 내 손을 마주 잡고 화사하게 웃었다. 확실히 아버지에 비해 풋풋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아스벨의 잘 빠진 턱선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그를 따라 걸었다. 턱을 치켜든 모습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거의 1초에 두 번씩 수시로 나를 쳐다보며 나와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붉혔다.
결국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1층 곁의 작은 다이닝 룸이었다. 다이닝 룸 한쪽 벽에 걸린 거울을 문득 본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았다면 얘기는 벌써 끝이 났을 시간이 지났다. 아까와는 전혀 달라진 사용인들의 대접을 느끼며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날씨가 온난한 곳이라 그런지 차가 아니라 차가운 음료를 대접받았다.
"……."
꽤 오래 걸린다. 원래 입고 있던 옷차림도 실내복 치고는 나름대로 잘 차려입은 것 같았는데 대체 얼마나 꾸미고 올 생각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용건이라 기다리는 시간이 오히려 민망했다. 이윽고 아스벨이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름이 완벽하게 잡힌 새하얀 트라우저 팬츠와 멋드러진 화려한 재킷 차림이다. 짧은 은회색 머리카락은 단정히 빗어 넘긴 채였다. 향수까지 가볍게 뿌린 듯 달콤한 냄새가 났다. 파티나 결혼식이라도 참가하는 것 같은 차림이었다. 이 곳에도 결혼식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는 체를 하며 그에게 중얼거렸다.
"어디 외출할 생각이에요? 하긴 금방 돌아갈 거니 나랑은 상관 없지만."
"아니, 그, 딱히 외출 계획은 없고, 좀 더 오래 있다 가도, 뭐, ……흠."
아스벨이 헛기침을 하며 내 맞은 편에 공손하게 무릎을 일자로 모으고 앉았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지난 3주간 당신에게서 선물 스무 개를 넘게 받았어요."
선물 중 절반 정도는 크고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꽃다발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사소한 장신구 같은 물건들이었다. 귀걸이나 머리핀 같은.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공장에서 모조 보석 따위를 찍어내지 않는 이곳 엘리시온에서는 전부 고가품임이 틀림없다. 최대한 감정이 없어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받기엔 이제 슬슬 선물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요."
내 말이 적잖이 뜻밖이었는지 아스벨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당황하며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인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별로 저한테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무엇보다 부담스럽네요. 사과의 의미라면 이제 충분하니 그만 둬 줬으면 해요."
아스벨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작게 말했다.
"특별히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그러니까 그게 부담스럽다는 거에요."
최대한 용기를 짜내서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당신이랑 나랑."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문득 바보 같은 짓을 하러 왔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굳이 올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갈래요."
"잠깐만 기다려. 선물 정도는 그냥 받아 주면 안 되는 거야?"
아스벨의 목소리가 한없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 문득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려 나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았다. 아스벨은 소파에서 일어나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게 고백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게 적은 연서와 선물 정도밖에 없는데, 그것조차 받아주기 힘든 건가? 어차피 그런다고 해서 에이반을 차고 내게 와 주지 않을 거잖아. 내 여자가 되어 주지 않을 거잖아. 물질적으로라도 너랑 연결되어 있고 싶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뿐이야."
"그걸로 충분해요?"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조금 집착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스벨의 발언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다시 아스벨의 앞으로 걸어가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안 충분한데."
먼저 한 발짝 내딛었다. 덥석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높이가 닿지 않아 그의 가슴에 푹 안기기로 했다. 아스벨은 내가 안겨들자 당황해서 신음 같은 숨소리를 내더니 격렬하게 나를 마주 안아왔다. 단단한 것이 엉덩이를 받쳐 드는가 싶더니 아스벨이 나를 자신의 어깨 즈음까지 확 끌어올려서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격정적이었으나 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아스벨은 아까 열심히 차려 입었던 상의를 한 겹씩 벗어 던졌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감았다.
…
만약 식사를 한다면 두 끼 정도 먹을 시간이 지났다. 그것도 아주 느긋하게. 바깥 공기가 차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오른 몸이 어느 정도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나른하게 익은 발 끝을 소파 바깥으로 뻗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너무 격렬했던 것 같다. 내 아래에 알몸인 채 누워 있던 아스벨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오늘 자고 가."
낮고 탁해진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소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스벨이 애원했다.
"어차피 에이반은 야근이니까, 그냥 여기서 자고 가 줘. 내일 데려다 줄게."
"에이반이 야근이라는 걸 알아요?"
물론 같은 군인이니까 알 수도 있겠지만 둘이 야근 여부를 화기애애하게 대화로 나눌 만큼 사이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아스벨이 조심스럽게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다시 소파에 옆으로 누웠다.
"응, 조만간 집행관이 오니까, 바쁘겠지……. 그보다 이제 연인 사이이니 그런 거리감 있는 말투는 그만 하면 안 될까."
그가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달콤하게 웅얼거렸다. 칼리온에서 오는 손님이라, 그러고 보면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스벨도 알 정도로 그가 바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아스벨의 팔을 베개처럼 베고 생각에 잠겼다. 피곤한 몸이 금방 수마를 이끌고 들어왔기 때문에 상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스벨과 함께 그의 저택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바삭바삭하고 짭짤하게 튀겨진 해시브라운의 맛이 끝내줬다. 소스와 시즈닝이 올라간 부드러운 반숙 달걀 요리도, 크랜베리 섞인 오렌지 마멀레이드 잼과 달짝지근한 버터 크림을 곁들인 부드러운 브리오슈 빵도. 아스벨과 침대에서 실컷 운동한 탓에 평소보다 입맛이 도는 걸까? 사실 카스칼 저택의 요리는 아르트리어 저택에서 먹는 식사보다 좀 더 간이 강하고 자극적이었다. 객관적으로도 더 맛있었다는 얘기다.
아스벨은 빙그레 웃으며 식탁 맞은편에서 내가 음식을 남김없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입에 아침식사를 순서대로 집어넣다가 아스벨의 눈길을 의식하고 약간 부끄러워졌다.
"뭐, 뭘 그렇게 쳐다봐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는요?"
"아버지 일은 신경쓰지 말아 줘. 워낙 간섭이 심하신 분이라, 내가 너와 교제를 시작했다는 걸 알면 너한테까지 귀찮게 굴 거야. 내 선에서 적당히 자를게."
"혹시 우리 사이를 반대한다던가?"
"그러진 않을 걸."
부정하듯 말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스벨은 진저리를 쳤다.
"그보다 어제부터 말했지만 그냥 편하게 불러도 돼. 그리고 가능하면, 좀 더 친근한 호칭으로 불러도……, 괜찮을까."
"친근한 호칭?"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스벨을 쳐다보았다. 아스벨은 살짝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우, 우리 이제부터 사귀기 시작한 거잖아……."
그건 그렇네. 나는 그가 수줍게 우리 관계를 확인시켜 주자 왠지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내가 먼저 한 발짝 내딛어 안겼던 어제 일이 마치 일어난 적 없는 환상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스벨 특유의 성격이나 외모 탓에, 나는 지금껏 에이반보다 그를 훨씬 더 거리감 있게 느끼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처럼 익숙치 못한 타입의 남자를 상대로 절대 그런 과감한 짓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가 내게 맹목적인 호감을 보였던 탓에 좀 더 그를 친근하게 대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좀 더 당당하게 굴어도 그는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긋 웃으며 아스벨에게 요구했다.
"사귄다는 건 이제부터 내게 독점당해 준다는 뜻인 거지?"
"다, 당연한 말을! 처음부터 다른 여자 같은 건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어!"
"좋아. 그럼 다음 주부터 매주 만나서 데이트하자."
주말인 모르스의 요일은 불가능하다. 평소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나 퇴근하는 에이반을 위한 유일한 날이었다. 그 전날 저녁도 안 된다. 에이반과 같은 수도 방위군인 아스벨로서는 다른 날에 휴일을 내기가 힘든 것 같았지만 그는 흔쾌히 평일 중에 시간을 내 보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아스벨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 한참 지난 뒤에야, 갑자기 밀려드는 부끄러운 기분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어쩔 줄 몰라했다.
에이반은 내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퇴근했다. 거의 낮이 다 된 시각이었다. 아스벨과의 일을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처했었다. 그가 화를 내면 어떡하지, 아스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뻔히 알면서 쉽게 그를 받아들인 내가 나쁘다고 말하면? 지구의 기준으로 수도 없이 고민을 반복했으나 허무하게도 그는 이미 나와 아스벨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아스벨이 굳이 주말에 출근까지 해서 야근을 마무리하고 귀가하려는 에이반에게 깐죽대고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나는 그저 궁금해했다.
"주말은 안 됩니다."
겨우 그가 한 말이라고는, 주말에 아스벨과 만나지 말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나는 밤을 새고 일하다 와서 그런지 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식탁 의자에 앉은 에이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에이반……. 내가 그와 만나기로 결정해서 혹시 화났나요?"
"제 눈치를 보실 필요 없습니다."
에이반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이 그렇게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니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저는, 최고라고는 하기 힘들겠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적어도 훌륭한 남편은 되고 싶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기서의 훌륭한 남편이란 부인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남편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에이반은 끝까지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알려주었다. 적어도 그 선만은 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 놈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만나는 날도 가급적 겹치지 않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그건 당연해요! 아스벨에게도 주말과 그 전날은 안 된다고 미리 말하고 왔는걸요?"
그런데 보통 같은 여자를 둔 남편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걸까? 그런 일이 가능한지도 지금으로서는 의문이었다. 엘리시온은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었지만, 보통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은 남편 쪽이었기 때문에 남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만의 집이 있었다. 부인에게도 디베르타라는 그녀만의 넓은 공간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남편들끼리는 서로 불쾌하게 맞부딪히는 일 없이 한 부인을 두고 부부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 같았다. 굳이 남편들끼리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건, 내게도 딱히 없었다.
에이반은 비로소 내게 웃어 주었다.
"잘 하셨습니다. 자, 그럼 잠깐 씻고 와서 어제 했어야 할 '훈련'을 오늘 마저 진행할까요? 날이 조금 이르지만 괜찮지요?"
"네, 지금요? 하지만 에이반은 야근까지 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하루 밤을 새는 정도는 딱히 체력에 상관 없습니다. 바쁠 때는 며칠 철야도 드문 일이 아니고요. 물론 지금은 아스벨루스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어제부터 쭉 기대하고 있었던 일을 끝내지 못한다면 제 정신으로 쉴 수가 없을 것 같군요."
그래도 혹시 도중에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에이반의 체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가 하고 싶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주말에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침대에서 뒹굴었다.
에이반은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요즘에는 그의 침실 앞의 소파가 있는 방 뿐만 아니라 객실 하나를 정해서 거기에서 훈련과 성 교섭을 진행하곤 했었는데, 갑자기 에이반은 관계 후 취침용으로만 쓰던 그의 침실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침실 바로 옆 방. 아르트리어 저택은 약식 구조여서 가주의 방이 다른 방들과 유독 다른 구조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 방도 에이반의 침실과 별 차이 없는 구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
나는 문을 연 순간 보이는 벽지부터 낯선 느낌이 들자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반의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방의 분위기가 꽤 독특하다. 다른 방들과 달리 공간이 분리되는 대신 몇 개의 기둥만 있을 뿐 사방이 트여 있다. 게다가 방의 한가운데에는 위에서 봤을 때 둥그스름한 모양의 큰 침대가 놓여 있다. 오토만 쿠션도 침대와 같은 높이와 그 절반 되는 높이, 두 개나 마련되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체리목 스탠드 테이블처럼 보이는 탁자가 하나. 그 위에는 나체의 남녀가 안고 있는 모양의 황동 조명 받침이 놓여 있었다.
벽지 색은 붉은 색, 카펫은 짙은 회색, 그리고 바닥에 깔린 푹신한 융단은 아이보리색이다. 침대 위 천정의 정중앙에는 캐노피 커튼이 샹들리에처럼 사슬에 달려 고정되어 있었다.
상당히 노골적인 분위기의 방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 벽에 붉은 커튼이 쳐진 것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열어봤더니 꽤 큰 전면 거울이었다. 거울은 침대를 비추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다시 황금색 로프를 풀어 커튼을 닫아버렸다.
"전에 기혼 남성의 저택에는 성 교섭만을 위한 방이 따로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하나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주문해 보았습니다만……. 침대가 특수 제작품이었기 때문에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어음……."
"일단은 건축가의 추천대로 꾸며 보았는데, 혹시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차차 바꿔 나가도 되니까요. 야한 장식을 더 추가할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내저었다. 그런 것 없어도 방 분위기 자체가 이미 선정적이었다. 침대는 어떻게 보아도 취침용도가 아니었다. 색이 다른 시트가 두 겹 깔려 있고 덮는 이불은 따로 없다. 긴 등쿠션과 둥근 등쿠션만 여러 개 헤드 위치에 놓여 있고, 어느 방향에서도 몸을 걸칠 수 있는 형태였다.
잠시 뒤, 에이반이 샤워를 끝마치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옷을 채 벗지도 못하고 침대에 어설픈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 침대, 꽤 높은 편이다.
"오늘은 뭘 하기로 했지요?"
에이반의 말에 나는 머뭇거렸다. 뭘 하기로 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입으로 꺼내지 않고 우물거렸다.
"우응……."
모르는 것 같진 않지만 딴청을 피우자 에이반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부끄럼은 나아지지를 않는군요. 뭐 됐습니다. 하고 싶을 때 '넣어 주세요' 하고 솔직하게 부탁할 수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오늘은 앞과 뒷쪽을 둘 다 동시에 쓰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어제 있었어야 할 일이다. 에이반은 은근히 웃으며 내 곁에 앉았다.
"오늘은 제가 옷을 벗겨 드리는 날인가요?"
내가 아직까지도 옷을 벗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그는 내가 옷을 벗고 기다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손으로 직접 이 옷 같지도 않은 얄팍한 옷가지들을 내 몸에서 떼어 내는 일도 은근히 좋아했다. 나는 그가 곧바로 내 옷부터 벗겨 줄 줄 알았는데, 에이반은 체리목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훈련용 크림과 막대기들, 작은 도기 항아리, 그리고 불투명한 검은 병 하나가 들어있었다. 아로마 오일이었다. 그가 아로마 오일 병을 열고 향이 퍼지게 둔 다음 도구들을 하나하나 준비했다. 평소 늘 보던 것들이지만 못 보던 물건도 하나 있다.
몸에 바르는 향유와 긴 유리 막대는 오늘 쓰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크림을 무엇으로 바르는가 싶었는데 에이반은 유리 막대 대신 반투명한 성기 모형을 꺼내 올렸다.
어떤 굴곡도 없는 유리 막대 대신 그가 꺼내 둔 성기 모형은 귀두의 형태가 대충이나마 표현되어 있었으며 에이반이 들어올리는 모양을 볼 때 약간 말랑말랑한 재질 같았다. 그리고 가장 두꺼운 유리막대보다 조금 더 굵었다. 가장 아래쪽에는 금색의 손잡이 겸 받침이 붙어 있고, 받침에는 불필요하게 고급스러운 둥근 보석알이 장식되어 있다.
나는 약간 호기심을 보이며 성기 모형을 살짝 만져보았다. 표면은 매끌매끌했다. 손 끝에 힘을 가해 보았더니 튕겨오르는 것이 꽤 탄성도 있었다. 고무보다 약간 더 단단해 보였다.
"이건 뭘로 만든 거에요?"
내가 성기의 모양보다 재료에 더 흥미를 보이자 에이반은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무 수액입니다. 정제하고 가공해서 만들어진 건데 굴곡 있는 조형물이어도 딱딱하지 않아서 이걸 써도 상처는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안전에 대한 문제는 그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어서 나는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에이반이 은근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촉감이 이렇지만 막상 삽입하면 남성의 음경과 꽤나 흡사한 자극을 준다고 합니다. 물기가 닿으면 좀 더 표면이 부드러워지거든요."
"……."
"기대됩니까?"
에이반의 말에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그는 자기가 먼저 옷을 벗고 나서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나를 무릎에 앉힌 뒤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리기 시작했다. 완전한 알몸이 된 내 등을 바라보며 에이반은 내 뒤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항상 보면 에이반은 평소의 일정이 꽤 빡빡한 모양인데, 심지어 요즘은 더욱 더 바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약속의 날마다 마치 오래도록 굶주린 것마냥 강렬한 흥분을 내보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엘리시온에서는 대부분의 남자가 다 그렇고, 또한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에스트라의 영향이라던데 지구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대단한 정력가였다.
옷을 직접 벗기는 것만으로도 흥분한 에이반이 내 엉덩이 사이로 페니스를 반쯤 발기시키고 있었다. 금방 흥분하면 안 되는 날에는 항상 바지만큼은 삽입 직전까지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성감대의 위치나 자극 방법도 대부분 터득했고, 일반적인 체위를 할 때도 어떻게 자세를 잡아야 걸리는 부분 없이 최고로 기분이 좋은지도 경험했다. 사실상 그가 처음 제안한 '훈련'은 거의 마무리된 셈이다.
에이반에게서 배우는 실전만이 아니라 디베르타에서도 이론적으로 많은 성교육을 받았다.
침대 헤드에 놓여 있던 둥글고 큰 쿠션에 등을 대고 누운 뒤 다리를 벌렸다. 키스와 가슴 애무까지 하면 에이반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었고 전반적인 훈련 시간이 길어져 나 역시 피곤했기 때문에 오늘은 생략. 그는 내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혀를 가져갔다.
음핵과 음순, 질구를 집중적으로 핥다가 안쪽부터 젖어들기 시작하자 테이블로 손을 뻗어 연노랑색 크림의 병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애널의 주름에 펴발랐다.
"아응……."
앞을 빨리면서 뒤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신음소리를 냈다. 앞이 젖어들면 뒤쪽도 비슷하게 준비되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크림은 애널의 점막에 금세 흡수되었다. 처음에 잘 흡수되지 않고 겉돌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에이반은 주름 사이사이에 크림을 전부 흡수시키고 나서도 한참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음핵 절정으로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자 그는 혀를 거두었지만 애널 입구를 가볍게 맴도는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되는 자극에 조금 불편하여 허리를 뒤로 뺐다. 에이반이 다시 나를 바로 눕히며 말했다.
"가만히 누워 계십시오."
"흐응, 왜 그래요."
그는 손을 멈추지 않고서, 반대쪽 손을 이용하여 오늘 처음 써 보는 그 투명한 딜도를 쥐었다. 딜도 끝을 질 입구에 맞추고 천천히 위아래로 삽입을 예고했다. 엉덩이의 자극을 무시하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벌렸다. 에이반이 눈 아래가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속삭였다.
"착하네요, 그렇게 바로 다리를 벌리실 줄 알고."
질구가 이미 기대를 잔뜩 하며 가짜 페니스의 끝을 쪽쪽 빨았다. 그는 바로 삽입하는 대신 또 천천히 딜도 끝에 애액을 먹였다. 확실히 끝부터 점점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물건에 비하면 꽤 작은 두께와 길이였기 때문에 손가락처럼 금방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반은 아주 천천히 딜도 끝을 잡고 내 안에 느긋한 템포로 박아넣었다.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제 남자의 물건처럼 좋은 것도 아니라서, 나는 투정을 부렸다.
"싫어, 싫어요……!"
"이 물건은 싫습니까?"
"으응, 느낌이 조금 이상해요."
말 그대로 정말 이상했다. 이상하다기보다는 확연히 불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가짜 페니스에는 몸을 달구는 열감도, 묵직한 무게감도, 내 안에 딱 맞아떨어지는 미묘한 굴곡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투정을 부리던 것도 잠시, 나는 에이반이 점점 딜도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치 그의 페니스에 박힌 것처럼 점차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마치 더욱 더 깊은 삽입을 바라듯 허리를 틀어올려 들썩인다. 에이반은 점점 내 반응이 좋아지자 마치 자기가 박아대는 것처럼 딜도를 훨씬 격렬하게 움직여 주었다. 하지만 행위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 에이반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멈추었다.
확실히, 손가락보다는 딜도가 나았다. 딜도보다는 그의 진짜 물건이 더 좋았고. 나는 멍하니 허리를 들어올렸다. 한 번도 이런 애매한 타이밍에서 멈춰 본 일이 없었다.
에이반이 딜도를 천천히 빼내자 벌어진 아래에서 살점이 오물오물 그것을 물어 조이며 반투명한 막대를 뱉어내는 모습이 내게도 보였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방금 손가락보다 두꺼운 이물을 받아낸 내 아랫구멍을 쳐다보았다. 귀두 부분이 좁은 질입구를 벌리며 마지막으로 빠져나오자 나는 아쉬움으로 한숨지었다.
그것도 잠깐, 에이반은 딜도를 다시 세우더니 이번에는 애액 투성이가 된 딜도에 손가락으로 크림을 조금씩 떠서 발랐다. 나는 예정된 행위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엉덩이에 넣을 생각인가 보다.
내가 마지막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직경 3cm정도 되는 지름의 유리 막대였는데, 딜도는 가장 좁은 부분이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유리 막대를 그렇게 버겁게 받아들인 것도 아니니까 막대보다 조금 큰 수준의 딜도도 삽입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형태 탓에 약간 무섭긴 했다.
하지만 에이반은 이미 충분히 내 엉덩이가 그의 물건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되었다고 말했다. 보통 남자 애인과 관계할 때는 이 정도도 되기 전 수준에서 마구잡이로 삽입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충분히 문제가 없었고.
적어도 내게 한해서는, 에이반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굴었다. 방금 딜도를 빼내 안달하는 앞쪽 구멍을 혀로 가볍게 핥으며 엉덩이 구멍에 딜도의 끝을 문질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예고했다.
"넣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나하나 경고하지 않아도……, 아흑으……!"
나는 한순간 교성에 가까운 높은 신음을 내었다. 꽤 두꺼운 물건이 애널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데까지는 경험이 있었지만, 갑자기 직경이 확 줄어들며 귀두가 애널에 걸리자 지금까지 유리 막대로 크림만 발랐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감각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
에이반은 내가 쾌감에 심하게 등을 젖히며 몸을 떠는 동안에도 애널 주름이 벌어지는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딜도를 슬그머니 밀어넣어갔다. 나는 기묘한 쾌감에 다리를 본능적으로 꽉 오무렸다. 하지만 앞과 달리 엉덩이 쪽은 그런 식으로 다리를 모은다고 해서 방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흐느끼며 쿠션을 잡아 뜯으면서 에이반에게 호소했다.
"하흣, 이, 이상해요오, 에이반……!"
"그간 꾸준히 약을 발랐으니 아마 앞쪽만큼 기분이 좋을 겁니다."
에이반이 내게 자기 팔뚝을 붙잡도록 내어 준 뒤 엉덩이에 박힌 딜도를 주르르 뽑아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등을 꺾었다. 탄력 있는 딜도의 귀두 부분이 애널 내부의 주름을 역으로 훑어내고 좁은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다시 딜도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어떻습니까?"
"아흑!"
천천히 넣었다가, 반쯤 뽑아냈다가, 다시 뿌리까지 넣었다가, 도로 뽑아냈다가. 에이반은 부드럽게 딜도를 움직이다가 갑자기 그것을 완전히 뽑아냈다. 애널 입구에 귀두가 걸리자 나는 온 몸을 경련시켰다.
그는 강제로 뽑아낸 딜도를 바로 내 앞에 내밀어 보여주었다.
"보이십니까? 유이나, 당신의 엉덩이에서 나온 겁니다."
나는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방비하게 그것을 눈에 담고 말았다. 혹시나 지저분한 것이 묻어 있으면 어쩌나 긴장했는데 의외로 딜도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대신 투명한 액으로 완전히 흥건했다. 넣기 전에 윤활 역할을 하기 위해 묻혔던 애액이나 훈련용의 크림도 투명한 액체에 씻겨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뒤쪽의 애액이랍니다. 앞쪽과는 조금 질감도 맛도 다르네요. 자, 크림을 조금 더 바릅시다. 두 번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맨질맨질한 투명한 액체를 그가 손 끝으로 훑어 할짝였다. 그리고 딜도 위에 다시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이었다. 나는 긴장으로 엉덩이에 힘을 주었지만 애널 입구는 완전히 풀려 버려 부드럽게 딜도의 삽입을 받아들였다. 에이반은 이미 내 엉덩이가 완전히 성교용으로 쓸 수 있게 변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어떻습니까? 아픈 곳은? 조금 덜 풀린 것 같은 부분은?"
좁은 입구만 제외하면 앞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움직였다. 딜도의 크기가 그의 성기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해도 앞에 넣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사정없이 안쪽을 구석구석 찌르는 딜도 때문에 순간마다 머리가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내가 엉덩이로 딜도를 단단히 조이자 에이반은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없는 것 같군요. 이런, 아직 가 버리시면 곤란합니다."
"……."
……갈 것 같았는데. 적어도 5분 이내에 색다른 절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 불만 어린 반응으로 그의 팔을 꾹꾹 잡아당기자 에이반이 나를 달랬다.
"자, 자. 금방 기분 좋게 해 드릴 테니 지금은 참도록 하세요."
몸이 예민해서 그가 만져주는 걸 못 견디고 금세 가 버렸을 때도 에이반은 그걸 못 하게 말린 적은 없었다. 내가 너무 느껴서 지쳐 버리면 잠깐 쉬게 하고 다시 애무를 시작하곤 했다. 그는 뒤쪽에 박힌 딜도에서 손을 뗐지만 딜도를 뽑아내진 않았다. 그 상태로 자신의 빳빳하게 발기한 물건을 쥐고 내 위로 올라왔다.
전과 달리 입구에서 조금 헤맸다. 뒤쪽에 무언가가 박혀 있는 탓에 앞쪽 입구도 상당히 좁아졌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라 그도 삽입이 버거운지 낮은 신음을 냈다. 몽롱하게 들뜬 상태로 그의 것을 받아냈다.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에이반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페니스가 깊숙한 곳을 쿡쿡 찌르자 애널 안까지 박힌 딜도의 존재감도 커졌다. 몸 안의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라 하나만 삽입하는 것보다 두 개쪽이 빡빡한 것이 당연하다. 물론 앞에서 주는 자극이 훨씬 컸으므로 나는 딜도의 존재는 거의 잊어가며 에이반의 페니스에 마구 느껴버렸다.
실제로 그런 건지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그의 것이 커서, 안 그래도 조이는 안쪽에 들어와 박히는 바람에 삽입될 때마다 숨이 막혀 실신할 것 같았다.
"아흑, 흐끅, 흐큭……."
평상시보다 극단적인 숨소리를 내며 에이반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내 상태를 살피면서 일정한 템포로 허리를 흔들었다.
"이건 너무 조여……, 후우, 힘들군요. 괜찮습니까?"
"안……, 괜찮……, 흐흑!"
에이반은 나를 자신의 위로 안아 올렸다. 여성상위는 내가 선호하는 체위였지만 잠시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에이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 올라타서 허리 움직이는 것,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셨으니까."
그는 삽입한 채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안았다. 다른 손으로 엉덩이에 꽂혀 있던 딜도를 잡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의 자극이 멈추고 다시 뒤쪽 구멍에 탄력 있는 딜도가 마구 들어와 박혔다.
내가 허리를 움직이기는커녕 더 깊히 박히지 않도록 허벅지에 힘을 주고 파르르 떨자 에이반이 잠시 숨을 돌리며 넌지시 물어왔다.
"아직 힘듭니까?"
"응."
"못 견딜 정도로?"
"……응."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반은 격렬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다시 남성상위로 자세를 바꾼 뒤 천천히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그가 딜도에서 손을 뗐는데도 딜도의 움직임이 마치 그가 붙잡은 마냥 안쪽을 쑤셔댔다. 그 사실을 나는 꽤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자동 기구인 것 같았다. 조건 없이 위아래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고 아마도 그가 움직임을 기억시킨 대로 작동하는 듯 하다. 방금처럼 안을 사방으로 헤집어 대고 있었다.
나는 혀가 보일 정도로 입술이 벌어진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엉덩이를 조이며 양방향에서 쏟아지는 쾌락에 허덕였다.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도 에이반은 내 뺨을 돌려 자기 쪽을 향하게 했다. 성급한 움직임이 그의 절정 역시 머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잔뜩 쏟아질 뜨거운 정액을 기대하며 더욱 더 높이 허리를 올렸다.
"아웃, 좋아아!!"
비명 같은 신음을 내며 있는 힘껏 엉덩이를 들썩였다. 에이반의 성기와 애널에 박힌 딜도가 동시에 안을 꽉 찔러왔다. 견디기 힘든 절정감으로 한순간 뇌리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한참 지난 뒤에야 에이반의 팔을 베고 눈을 떴다. 에이반이 질릴 만큼 만족한 얼굴로 내 곁에 누워 의미 없는 축언을 건넸다.
"훌륭하십니다. 이제는 제가 가르치고 싶은 부분은 전부 가르친 것 같습니다."
나는 에이반이 이마에 키스를 남기는 것을 느끼며 도로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런지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