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

***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때가 다 되어 있었다. 소년 둘은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마부가 사용인들의 별채로 데려갔다. 그 남자……, 에이반 말인데, 새벽에 출근했다고 하니 지금쯤 퇴근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집사는 당연하게 나 한 명 몫의 저녁식사만을 챙겨 주었다.

집사와 수많은 사용인이 있는 저택을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이 집은 굉장히 잘 사는 곳인 듯 하다. 혼자 먹는 저녁식사인데 꽤 두툼한 티본스테이크가 나왔다.

사람 얼굴만큼 큰 고기가 각종 양념에 마리네이드되어 알맞게 구워진 모습을 보는 순간, 비록 이런 이상한 개념의 세계로 끌려왔을지언정 처음으로 힘을 내서 적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기를 거의 남기지 않고 썰어 먹었다. 날개 달린 말이 있는 세계니까 이건 날개 달린 소쯤 되려나. 아무렴 맛있으니 상관 없다.

낮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어 피곤했지만 배가 맛있는 음식으로 꽉 차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을 한 가지 더 집사에게 부탁했다. 어제부터 몸을 한 번도 씻지 못했다. 물에 젖은 수건으로 닦은 것이 전부라서, 한 번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완벽할 것 같다.

"저 혹시 자기 전에 목욕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주인님께서 퇴근하시고 유이나 님과 함께 욕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주인님과 밤에 또 한 번 입욕하시게 될 텐데 그래도 미리 씻으시겠습니까?"

"오늘 밤이라고요?"

나는 약간 당황했다.

"저, 그, 어제도 했었는데……."

내가 듣기로 가장 성욕이 활발한 청년기 남성이라고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에스트라를 해소하면 충분하다고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내심 앞으로 일주일간은 괜찮겠구나 혼자서 안심했었는데, 설마 하루만에 그런 요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같이 입욕이라니. 나보고 목욕 시중이라도 들게 할 작정인가? 그런 건 싫었다.

그가 도착한다면 차라리 섹스는 가능할지언정 입욕은 싫다고 말해 볼 생각이었다.

에이반이 귀가했다고 한다. 마중을 나온 사용인 뒤에 숨어서 그를 몰래 훔쳐 보았다. 그는 코트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고 가장 먼저 멀찍이 숨어 있던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예정보다 퇴근이 늦어져서……, 집사, 앞으로 퇴근이 아홉 시가 넘으면 먼저 그녀가 침실에 들 수 있도록 하세요."

집사는 코트를 받아 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주인님, 출근 전에 지시하셨던 욕실 준비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아아, 혹시 그것 때문에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나는 쭈뼛거리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약간 차가운 눈매가 역시 어제 몸을 섞었던 친근한 경험이 있는 상대라고 해도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에이반이 손을 뻗어 내 손을 마주 잡자 놀라서 움찔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뭇머뭇 말했다.

"저기……."

"으음?"

"저, 어제처럼 섹스는 괜찮지만 그, 같이 목욕하는 건 좀……."

겨우 용기를 내서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반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같이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목욕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 뿐이라면 괜찮습니다. 욕실을 준비시킨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으니까요. 자, 갑시다."

나는 끌려가기 싫어서 발 끝에 힘을 주고 멈칫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아닌데. 손을 덥석 붙잡혀 버려 별 수 없이 따라 걸어갔다.

저택의 욕실은 후원 방향으로 전망이 뚫려 있었다. 입욕 중에 후원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색유리 차양을 통해 밤하늘도 일부나마 보였다. 바닥은 색색의 타일, 벽은 검은 대리석이었다. 넓은 조개 모양 도자기 욕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욕조 근처 원형 테이블에는 긴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그 아래에는 각종 병이 든 바구니, 그 위에는 넓은 붓과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유리병 안에는 연한 노랑빛 크림이 들어 있었다. 다른 것은 입욕도구처럼 보였지만 저 붓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본 어떤 욕실보다 예쁘게 생긴 욕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오늘은 목욕보다는 당신의 훈련 준비 겸 몸단장을 위해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앞으로 저 이외에도 몇 명의 남자를 받아들이셔야 하니, 당신이 최대한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도록 제가 천천히 '훈련'시켜 드리겠습니다."

"저, 그치만, 학교에서 배웠는데, 후, 후원자가 요구하는 것도 싫으면 분명히 거절해도 된다고……."

"당연합니다. 도중에 힘드시면 언제든지 멈추게 하셔도 됩니다. 실전이 아니라 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중간에 얼마든지 멈춰도 좋다는 에이반의 말에 설득당해 버렸다. 그는 말씨가 썩 부드럽진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가 갔다. 타인을 현혹하기 위한 달콤한 말을 하는 성격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킷과 부츠를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거기에 서 계십시오. 여성의 옷을 벗기는 방법은 저도 얼른 익숙해져야 하니까, 제가 벗기겠습니다."

나는 불안하게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에이반은 내 뒤에 서서 가장 먼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모았다. 목 뒤에서 단단히 몇 차례 묶고, 그 뒤에도 계속 머리를 만지기에 무얼 하나 싶었는데 세 갈래로 머리카락을 땋고 있었다. 땋은 머리를 집게와 끈으로 꽉 고정시켰다.

'머리카락이 그렇게 방해가 되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직접 이렇게 묶어 줄 줄은 몰랐다. 왠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늘은 제모약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체모의 제거를 하고,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시킬 것입니다. 그 다음 천천히 성감대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지요."

"넥?"

"너무 움직이면 눈썹이나 머리카락에 묻을 수 있으니 가만히 계십시오. 중화제를 쓰면 다시 자라날 테니 그렇다고 긴장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목 뒤와 허리, 그리고 허벅지에 있는 속옷의 링을 만지작거리더니 에이반은 옷의 끈을 점점 빠르게 풀어내렸다. 끈은 엮여 있는 원리는 몰라도 버클의 구조상 힘줘서 당기면 어차피 풀리게 되어 있다. 천이 떨어지고, 가슴이 드러나자 눈을 감으며 움찔했다. 아래 속옷까지 벗겨지니 얼굴이 나도 모르게 새빨개졌다. 그는 욕실 바닥에 무릎을 내리고 내가 신은 샌들까지 직접 풀어 벗겼다.

"아래부터 시작합니다."

에이반이 직접 크림이 든 병의 뚜껑을 열고 붓에 크림을 적셨다. 먼저 발등부터 그가 천천히 붓을 이용해 약을 펴발랐다. 약을 미리 데워 놓은 건지 체온에 적당히 맞게 따뜻한 온도였다. 바르면서 조금씩 식어갔지만, 그럼에도 차가워서 깜짝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특별히 털이 많은 곳만이 아니라 전신에 빠짐없이 약을 바르자 약간 민망해졌다. 가까이 들여다보며 덜 칠해진 곳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바람에 몸의 구석구석이 여과 없이 그의 시선에 관찰당하고 있다. 붓이 점점 위로 올라올수록 몸이 긴장되었다. 다행히 에이반은 일단 다리 사이 부분을 넘어갔다.

"이 곳은 마지막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지금 자세로는 힘들겠지요."

"으흣."

말하면서 그의 숨이 다리 사이에 닿아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붓은 보통 화장할 때 쓰는 종류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젖은 붓 끝이 크림을 계속해서 덧바르며 올라왔다.

"가슴과 겨드랑이에 칠할 때는 양 손을 올리십시오. 자, 이렇게."

에이반은 붓을 놓고, 내가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맞잡게 했다. 특별히 부끄러운 자세는 아니지만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이런 자세를 취하니 상상 이상으로 민망했다. 미지근한 붓이 허리선을 따라 점점 겨드랑이 위까지 올라왔다. 체온과 차이가 없는지라 거의 느끼지 못했던 붓의 움직임이 점점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아……. 흐흣!"

"소리를 참을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성감대를 확인할 때 실컷 지르게 될 테니까, 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아, 하지만, 하지만."

겨드랑이에 붓이 닿자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그 이상으로 유두가 긴장하며 바짝바짝 섰다.

"여성의 가슴과 겨드랑이는 감각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로 느끼는 것도 당연합니다. 자, 반대쪽도 마저 한 뒤에 가슴을 칠해 드리겠습니다."

괜히 애태우며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에이반의 표정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숨을 몰아쉬며 나는 다급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반의 바지 앞부분이 묵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팔을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팔을 내려버리고, 에이반의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헐떡였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붓을 들고 가슴 주변을 천천히 칠해갔다.

마지막 배려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바를 필요가 없어서인지 유두 부분은 붓 끝이 닿지 않았다. 에이반은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나를 돌려 세워 등에 전체적으로 약을 발라 주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거의 녹초가 다 되었다. 그는 손잡이가 긴 양동이로 욕조의 물을 퍼올려 어깨부터 천천히 끼얹어 주었다. 약과 함께 체모가 전부 씻겨내려갔다.

특별히 피부에 자극이 있는 것도 아닌데 효과가 대단했다. 털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거뭇거뭇한 얇은 몸의 털이 물에 흘러내려가는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다. 그가 테이블 위를 치우며 말했다.

"이 위에 앉아서 다리를 벌리도록 하세요."

"으, 꼭, 해야 하나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리하지 않으면 성행위 중에 당기거나 걸려서 아플 수 있어요."

에이반은 성적 흥분의 증거를 다리 사이 부분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침착한 양 말하고 있지만 분명히 발정한 상태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탁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에이반은 내 몸을 안아 올려 완전히 탁자에 앉힌 뒤 다리를 양 옆으로 벌려 내가 붙잡고 있도록 했다.

붓에 얼마 남지 않은 약을 충분히 묻힌 다음, 둔덕 앞부분의 음모부터 천천히 적셔 나갔다. 몸에 아까 끼얹은 물기가 마르면서 점차 피부에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솜털 하나 없이 싹 밀린 탓에 피부가 바람에 닿는 것만으로도 오싹오싹하게 느껴버리는 것이다.

에이반은 붓 끝을 세워서, 손가락을 직접 이용해 주름 안을 벌려 남은 부분이 없도록 하나하나 약을 칠했다. 그의 손끝에 투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약은 불투명한 크림빛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이라기에는 점도가 높았다. 나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다행히 에이반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듯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털이 있는 것도 야하고 좋지만 역시 없는 편이 앞으로 편리하겠지요. 그렇다면, 당신과 본래 상태 그대로 몸을 섞은 것은 제가 유일하겠군요……."

에이반은 붉게 상기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 끝을 줄이며 말했다. 어제 본 기억에 따르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에이반은 그 때부터 이미 체모를 정리한 상태였다.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그치만……, 당신은 그렇지 않은 상태였잖아요?"

"에이반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렇습니다. 저는 털을 처리한 상태였었지요. 위생상 본래 상태보다는 그 편이 나았을 겁니다. 당신과 달리 저는 남자고, 당신이 예상하는 것보다 남자의 맨몸은 훨씬 깔끔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의 그런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그는 머리숱도 적은 편이 아닌데다, 눈썹도 철저히 다듬어진 상태지만 숱이 많아 보였다. 그는 붓을 들고 그 좁은 부위에 몇 번이나 덧칠을 했다.

"일단 전신에 칠하긴 했지만 여자의 몸은 정말 필요한 부분에밖에 털이 나 있지 않군요……."

"그, 그렇……."

그렇지는 않다. 전신의 솜털이 없어진 탓에 온 몸이 예민해져 있었다. 에이반은 다시 한 번 양동이로 다리 사이에 물을 끼얹었다. 이제 필요가 없어진 털이 쓸려내려가며 아래가 맨질맨질하게 드러났다. 그는 손가락을 써서 직접 대음순을 들춰 열고 덜 처리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남아 있는 털이 한 가닥도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에이반은 지쳐 엉망인 자세로 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던 나를 덥석 안아 올려 욕조 안으로 내려놓았다. 욕조 물은 체온보다 조금 따뜻한 정도였다.

욕조의 물에 취해 있는 사이 에이반이 유리병과 붓을 치워 버리고 탁자에 옷을 벗어 걸쳤다. 그리고 알몸이 된 상태에서 욕조 맞은 편으로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가 움직이는 바람에 위아래로 흔들리는 딱딱한 물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이반까지 들어오자 욕조의 물은 아슬아슬하게 넘치기 직전이 되었다. 그는 물이 바닥의 카펫에 튀어도 상관없다는 듯 몸을 거칠게 움직여 맞은 편의 나를 끌어안았다. 맨몸 사이에 한 치의 틈도 없어졌다. 에이반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내가 거절의 말을 하지 않자 천천히 내 입술을 찾았다.

"으응, 아."

전에 비해 그의 입맞춤은 상당히 기교가 좋았다. 섹스 도중 열에 못 이겨 격렬하게 입안을 헤집고 혀를 빨아대던 그 때와 달리 차분한 애무였다. 나는 부끄러워 거절의 말을 꺼내려다 첫 느낌이 나쁘지 않자 순순히 입술을 내밀고 그에게 맡겼다. 에이반이 부드러워진 목덜미 뒤쪽과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늘 저녁식사는 뭐였지요?"

"스, 스테이크……, 요."

"입술에서 단 맛이 나네요. 그럼 이것은 여자의 맛일까요."

에이반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이 키스 도중에도 열렬하게 등허리와 엉덩이를 주물러댔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나도 에이반의 혀가 입 속으로 들어오자 살짝 물고서 쪽쪽 빨았다. 그의 혀와 입술은 무척이나 뜨거워서 단순히 내가 지금껏 상상해 오던 키스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혀를 아무리 놀려도 그가 말한 것처럼 단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숨이 막혀 오고 머리가 핑 돌았다. 숨은 가빠 오는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아 지친 내가 에이반의 어깨를 두드리자 비로소 그는 나를 안은 팔을 풀어 주었다.

수건에 몸이 감싸인 채 에이반에게 안겨 윗층으로 올라갔다. 등받이가 한 쪽만 있는 널찍한 소파에 나를 앉혔다. 욕조에서 나오니 피곤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에이반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내 발 끝을 소파 위로 올리고 수건을 전부 걷어냈다.

털이 싹 밀린 그 곳에 바람이 스치자 허전하고 어색했다. 허벅지를 꼭 모아 붙였다. 에이반은 아래에 신경을 쓰느라 늘어져 있던 내 손을 먼저 덥석 붙잡았다. 그를 쳐다보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가락 사이사이부터 손목 쪽으로 탐색하듯 손끝을 움직여갔다. 매끄러운 맨살에 무언가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나는 모른 체 고개를 저었다.

"간지러워요……."

"여기는?"

손목 안쪽을 만지던 뭉툭한 남자의 손끝이 팔 안을 지나쳐 겨드랑이 방향을 꾹꾹 눌러왔다.

"으응, 아무렇지도……, 아, 흣, 거긴 아프, 앗, 아앗!"

에이반의 손가락이 겨드랑이 안쪽 아주 깊은 곳을 꾹꾹 파고들자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까처럼 팔을 머리 위로 올리세요."

나는 멍하니 팔을 올리고 겨드랑이를 내보였다. 에이반은 양손으로 겨드랑이 안쪽을 꾹 눌러 자극하며 입으로 가슴 주변을 핥기 시작했다. 가슴만 애무받을 때보다 훨씬 좋지 않냐고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잘 모르겠다.

"하아, 하아, 하……."

단단해진 유두를 그가 봐주는 일 없이 점점 더 강하게 빨아당겼다. 들고 있던 팔을 내려버리고, 에이반의 머리를 붙잡으며 가슴을 내밀었다. 간간히 입술로 물어 줄 때의 느낌이 좋았다. 그는 겨드랑이에서 손을 뗐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미끄럽게 젖은 유두를 꼭 쥐고 살살 비틀었다.

나는 에이반의 목을 끌어안은 채 몸을 경직시켰다. 붙잡힌 유두 끝에서 시작된 전기 같은 쾌감이 전신을 여러 차례 경련시켰다. 에이반은 파르르 떨리던 몸이 축 늘어지자 입술을 떼고 발갛게 달아오른 유두와 유륜을 확인했다.

"키스로 절정에 이르는 것은 아직 부족하고……. 대신 가슴으로 느끼는 건 금방이군요. 다음은 목덜미와 등입니다."

에이반은 내 몸 중 어디가 성감대인지, 어디는 싫어하고 어디는 좋아하는지 하나하나 손끝으로 만져 가며 알아냈다. 자극도 여러 종류였다. 손끝에 힘을 가해 거칠게 누르는 자극, 손바닥의 굳은살을 이용해 집중해서 매만지는 자극, 아니면 입으로 빠는 자극이나 혀로 아주 부드럽게 쓸어 주는 자극. 아직 상반신밖에 시험해 보지 않았는데 벌써 몸이 참지 못하고 애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아, 아아악!! 꺄아아악!"

에이반이 고개를 아래로 하고 클리토리스를 핥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전신을 떨며 두 번째 절정에 휩싸였다. 몸 구석구석을 만져지다 보니 아래가 미끄럽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흘리다니, 아깝지 않습니까."

에이반이 엉덩이 사이로 흐른 애액을 한번에 아래에서 위로 핥으며 중얼거렸다.

"외음부의 온도도 높고……, 빨갛게 부어서 미끈미끈하고, 어떻게 봐도 참기 힘들어 보이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 좋습니다."

손가락으로 여성기 주변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에이반이 숨을 헐떡이며 내 위로 올라왔다.

"저는 지금 훈련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흥분해서 당신의 여기에 바로 박고 싶습니다. 어제 당신에게 그렇게나 쏟아낸 다음인데도. 당신은? 아직 참을 만 합니까? 아니면 훈련을 잠시 멈추고 여기를 우선 달래 드릴까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유이나."

"그, 그렇다면 저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당신 기분을 말하십시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에이반의 뜨거운 귀두가 내 다리 사이를 간질대며 스쳤다. 나는 발개진 얼굴을 그의 뺨에 대고 에이반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머뭇거리던 말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으응, 나도요. 나도 에이반이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해 주었으면……."

"알겠습니다."

에이반의 두꺼운 기둥이 내벽을 훑으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너무 큰 물건이라 처음에는 약간 뻐근했고,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지금까지 애타게 찾던 것의 실체를 확인한 기분이었다. 애매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이 느낌은 분명한 쾌감이었다. 나도 모르게 에이반의 허리를 다리로 꽉 끌어안고 그의 팔에 손톱자국을 냈다. 에이반은 그의 몸에 마구잡이로 매달리는 내 체중에도 개의치 않고 안정적으로 먼저 내 엉덩이를 받쳐든 뒤, 허리에 힘을 주어 가며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히힉! 하흣, 아흣, 아으, 하읏!"

그가 단단한 질내를 가르고 들어와 뜨거운 체온과 묵직한 압박감을 전해줄 때마다 몸이 사정없이 떨리며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도저히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반은 나를 안은 채 조금씩 자세를 바꾸며, 천천히 나를 달랬다.

"자아, 그렇게 힘을 주면 나중에 지쳐서 오래 즐기지 못한답니다."

"하흥, 몰라, 몰라아!"

"윽, 그렇……, 너무 조여대지 마십, 아윽, 젠장!"

"몰라아, 아흐흑!!"

에이반이 서둘러 허리를 세우고 페니스의 각도를 조절해 안쪽을 본격적으로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하, 먼저 한 번 가게 해 드려야겠군요. 하아, 다음부터는, 이렇게 참지 마시고 바로바로 말씀하세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질이 쾌락에 의하여 간헐적으로 조여들자 에이반이 뜻 모를 욕설을 몇 차례 내뱉었다.

"정말, 그렇게 아래를 물고 씹어대면, 으……."

"내가, 내가 하는 게 아닌 걸, 어쩔 수 없는 걸, 아, 앗, 앗, 앗!"

에이반이 위에서 내 몸을 내리누르며, 팔로 등을 꽉 죄고 있는데도 순간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쾌감이 극점에 달한 것이다. 나는 그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표정을 흐트러뜨리며 절정에 몸을 맡겼다. 쾌감에 목까지 가득하여 실신할 것 같았다.

파드득 떨던 몸이 진정되자 에이반은 사정없이 조이던 아래에서 아직 단단한 페니스를 빼냈다. 구멍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얼얼해서 남은 쾌락의 잔여물 외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숨을 골랐다. 에이반이 한 차례 몸을 닦고, 다시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내 엉덩이를 부드럽게 닦아내 주었다. 배에 힘이 들어가자 안에 머금고 있던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쏟아져나왔다.

"몸이 식으셨군요. 내일도 등원하셔야 할 테고. ……."

에이반은 말하던 도중에 내가 듣지 않고 있다고 여긴 건지 손목에 감고 있던 펜던트 로커스를 풀어내 버렸다. 그래서 그 뒤로는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날이 밝았다. 아마 밝은 것은 한참 전이겠지만, 나는 온 몸이 뻐근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첫 성경험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또 격렬하게 섹스한 후유증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첫날은 그렇다 쳐도 둘째 날은 흥분해서 팔다리에 힘을 주며 악착같이 남자의 몸에 매달렸다. 근육이 너무 당겨서 죽을 맛이다.

어제 에이반이 데려와 눕혀 주었던 내 방-원래는 객실- 침실은 차광 자동 커튼이 큰 창을 가리고 있어, 낮이 되어도 저녁처럼 어두컴컴하다. 늦잠을 자기에는 딱 좋은 구조였다.

"유이나 님, 디베르타에 등원하실 시간입니다. 주인님께서는 새벽에 출근하셨습니다."

그 사람,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새벽에 출근하고 한밤중에나 퇴근하는 걸까. 이런 훌륭한 저택과 사용인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바깥에서 일밖에 하지 않는다면 인생에 낙은 있으려나 모르겠다. 뭐, 남 걱정이다. 나는 끙끙대며 일어나서 어제와 같은 검은색 비키니 제복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 밤에 또 알몸인 채 잠들었다. 게다가 평상복은 이런 노출 심한 수영복이라니. 이런 데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눈을 비비며 집사를 따라 내려가 식당에 혼자 앉았다.

"오늘은 플라마의 날로, 디베르타에서도 오전 수업만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어제 오후 성교육 시간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격일 수업이라고. 게다가 오늘은 사회 수업도 없었다. 사회 수업 역시 이틀에 한 번이기 때문이다. 플라마의 요일은 오전 내내 이곳 엘리시온의 언어를 배우는 날이었다.

나는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디베르타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수업 장소에 들어선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수업은 마법 도구의 도움 따위는 일절 없었다. 그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법 도구는 입으로 하는 의사소통에는 편리하지만, 글과 언어를 동시에 번역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언어의 특성을 무시한 채 생각을 그대로 번역하는 형식인 듯 하여 언어 교육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수천 수만 개의 각국 여성들 전부에게 언어를 공평하게 가르치려면, 학교 측에선 선택권이 별로 없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낯선 언어를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배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옹알이밖에 못 하는 갓난아이가 글자를 배우듯이. 천천히 하나하나 단어부터 익혀 가는 것이다.

나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감을 느끼며 디베르타에서 나왔다. 이제 쉬고 싶은데 이 다음으로 도저히 쉴 수가 없는 일정이 있었다. 의복 구입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인 옷차림을 할 수 있는 건가.'

집사가 신경 써서 오고 가는 길에 시장을 구경하도록 일정을 잡아 주었을 터인데 너무 피곤하다 보니 보는 둥 마는 둥이었다. 제정신이었다면 구경하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집사는 구경 일정을 캔슬하고 바로 옷 상점으로 마차를 돌렸다. 그리고 옷 상점에서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컬쳐 쇼크를 맞이했다.

여성의 몸통 모양을 한 토르소 마네킹에 입혀진 옷들은 하나같이 노출이 심했고 너무 부도덕적이었다. 속이 비치는 쉬폰 천을 아껴 사용했으며 끈이나 얇은 금줄을 무척 애용했다.

"디베르타나 궁정 내부, 공공기관과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주요 부분을 반드시 가리는 복장이어야 하지만, 사적으로는 이같은 복장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집사가 가리킨 곳은 아래위로 트임이 있는 의상들이었다. 입고 몸만 숙이면 바로 성행위가 가능할 것 같은 복장이다. 옷가게 주인이 최근 유행은 상체를 금사슬로만 감은 것이라며 자랑스레 말했다. 집사가 덧붙였다.

"물론 주인님의 취향은 적당한 노출이 있는 쪽이지만요."

말이 적당한 노출이지 그렇게 집사가 가리킨 옷들도 내가 지금 입은 비키니와 노출 수위가 큰 차이는 없었다. 가슴이나 목 부분에 약간의 천을 덧댄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이게 평상복이라고요? 그치만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여성분들은 제대로 된 복장을 하고 다니던데요?"

그와 같은 평상복을 걸치고 싶어서 한 말인데, 집사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녀들은 선천적으로 가질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적어서, 이미 남성의 에스트라를 받아도 노화를 멈출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유이나 님께서 그녀들과 같은 복장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추위를 많이 타신다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집사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옷은 그나마 정상 축에 가장 가까운 복장들이었다. 일단 배를 가렸고, 소매가 있었고, 옷 통이 몸을 감싸 주는 형태였다. 다만 하나는 치마가 길지만 옆이 길게 트인데다 윗가슴이 꽤 파여 있었고 다른 것들은 길이가 짧아 팬티가 보일 것 같았다. 팬티를 일부러 보라고 저렇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결국 마지막 카테고리에서 그나마 나은 것으로 몇 벌 골랐다. 최종적으로 구입할 옷을 골라내자 어린 소년 몇몇이 줄자를 들고 들어와 사이즈를 측정해 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꼬마들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크게 꺼려지지는 않았지만, 민망하긴 했다.

주문한 옷은 사이즈에 맞게 제작하여 일주일 뒤 저택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옷가게까지 구경하고 났더니 정신적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점심도 굶고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건강을 위해서는 식사를 거르면 안 된다는 집사의 잔소리도 뒤로하고 한숨 푹 잤더니 저녁때쯤에는 기분이 나아졌다. 그 뒤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내내 빈둥거렸다.

이 곳은 마법이 존재하는 대신 전기공학의 발전이 없어서 집집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 같은 흥밋거리도 없었다. 인터넷은 당연히 없다. 기껏해야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독서 정도. 밖으로 나가면 기예단과 악사들이 거리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지금 와서는 보러 가기는 늦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에이반은 오늘도 늦나 보다. 나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오전 수업은 사회교육이었다. 각 계급별 구분에 대해 심화적인 부분을 배우고 나서 오후에는 다시 성교육 수업에 참석했다. 줄리아가 모인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내 드린 과제대로 남성과의 기본적인 성교섭을 완수했나요? 하지 못한 학생들은 손을 들어 보세요."

몇 명인가 되는 여자들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나는 들지 않았다. 에이반과 두 번이나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교에 관한 거부감이 크다면 무리해서 당장 시도할 필요는 없어요. 대신 완수하지 못한 학생들은 오늘 수업이 끝나고 남도록 하세요. 최대한 거부감을 빨리 없애기 위해 특별 수업을 진행해야 하니까요.

혹시 이 중에서 성교 도중 남성이 사정할 때에, 뱃속에 이상한 감각을 느낀 사람이 있나요?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 받아들인 남자들의 에스트라 마력이에요. 여자가 일단 체내로 받아들인 에스트라를 자신의 인트라로 바꾸어 흡수하기까지는 보통 이틀에서 사흘 정도가 걸린답니다. 그리고 몸 안에 일정량의 인트라 마력이 쌓이면 마력을 느끼고, 다루고,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해져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성관계를 끝낸 것 치고는 배 안이 유독 오랫동안 뜨겁다고 느꼈는데 그게 에스트라인 건가?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가능한 한 많은 남자와 성교하여 일정량 이상의 인트라를 모으셔야 합니다. 다량의 인트라 마력은 여러분의 몸을 엘리시온의 여성에 걸맞게 변화시킬 것이고,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면 몇 년 이내에 알을 배고 낳을 수 있는 몸이 될 거에요.

여러분들이 그 전에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남자를 어떻게 구하고 다루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어요.

이 엘리시온에서 남성은 신분과 마력, 직업, 그리고 나이에 따라 각각의 역할이 갈립니다. 이 부분은 사회 수업 때 배웠으리라 믿겠어요. 그리고 그 외에, 디베르타에서는 남자들을 세 종류로 구분한답니다. 내부인, 그리고 방문객, 마지막으로 외부인이에요.

첫 번째가 내부인. 일꾼 소년들과 직업 가드들이에요. 두 번째가 방문객. 이 중 하나는 클럽 회원이라고 하여, 이곳 디베르타에 꾸준히 일정액의 후원금을 내는 대신 그 기간 동안 자유로운 입장이 허가된 남성이에요. 나이는 반드시 청년기여야 하고 병력이 없이 몸이 건강해야 하며 이곳 지역 소속으로 신분이 분명해야 하고 또한 범죄기록이 없어야 하며 폭력적인 행위를 한 적도 없어야 한답니다. 여성과의 성관계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지요. 또 하나는 디베르타에 만나는 여자가 있는 남자랍니다. 초대한 여성과 함께 다녀야 하며 그 외의 상대와는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방문객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외부인. 외부인 역시 여성을 만나기 위해 디베르타에 방문하기도 하지만, 엔트런스 건물 이상으로 진입할 수가 없지요. 주로 엔트런스 건물의 어딘가에서 여성과 만남을 가지곤 한답니다.

처음에는 아마도 무작위의 클럽 회원들과 자주 성교섭을 갖게 되겠지만, 엘리시온의 언어를 배우고 마력을 다루는 법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특정한 남자를 골라 그 남자를 독점할 수가 있어요. 연인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한 명의 남자를 독점할 경우에는 그 남자가 생산하는 모든 에스트라를 독점할 수가 있기 때문에 남자 쪽에서도 꾸준한 에스트라의 해소가 가능하여 좋고, 여자 역시 에스트라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얻을 수 있으니 어느 쪽도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지요. 대신 돈이 많거나 젊고 매력적인 남성을 독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에요. 굳이 독점을 약속치 않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필요할 때 여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줄리아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어떤 의미로 상당히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했다. 나는 입술을 헤벌리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독점 상대는 지금부터 만들어도 무방하지만, 마력을 다룰 수 없다면 상대가 사실은 다른 여자를 동시에 만나면서 자신을 속이거나 이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알아두도록 하세요. 클럽 회원들은 그 나름대로 연애에 있어 베테랑이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지 않은 수의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경우도 많답니다. 당신들이 원래 있던 곳의 연애관념을 고집한다면 꽤 고생할 거에요. 디베르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는 치정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외도나 상대의 배신에 초연해질 수 없다면 스스로 조심하세요. 가장 편한 것은 오직 독점 상대만을 만나고, 꾸준히 마킹하여 외도를 확인하는 거겠지만, 그건 너무 집착적일지도 모르겠네요. 한 명에게만 너무 매달리는 것은 엘리시온의 여성들에겐 손해랍니다. 이곳 엘리시온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은 한두 명만 만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디베르타의 규정상 일회성의 상대나 독점 상대에게 일정액의 생활비나 그에 해당하는 물건을 요구할 수 있어요. 성교섭 후에 요구해도 되고, 그 전에 요구해도 된답니다. 물론 하룻밤의 상대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고려해 두세요. 일반적으로는 여섯 명에서 여덟 명 정도 되는 상대를 만들고, 그 상대에게서 약간씩 용돈과 생활비를 받아 생활하고는 한답니다. 제 5계급 남성들은 형편에 따라 꾸준한 생활비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 점은 이해해 주세요. 결혼하여 정착하기 전의 여성들은 그런 식이 아니면 살 수 없어요. 디베르타에 소속된 여성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는 대신 직업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방에서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해서 그것을 가져다 파는 행위조차 허가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답니다. 뭐, 디베르타 내에서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이나 거래 행위까지 단속하기는 힘들겠지만 그 같은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은 알아 두세요. 발각시 상당액의 벌금을 내야 할 거에요."

엘리시온의 입장에서, 여자들이 숫자가 적은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가능한 한 분발하여 최대한 많은 알을 낳기를 바랄 터였다. 그러니까 강제로 디베르타에 소속시켜 직업 활동이나 생산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많은 남자를 만나며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듣자 하니 디베르타에서는 기본적인 주거공간과 식사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꽤 많은 여자들이 저마다의 숄 장식이나 액세서리를 몸에 두르고 있었고, 기본으로 주어지는 식사 대신에 다른 음식을 먹거나 식당에서 제공하지 않는 음료를 마시곤 했다. 확실히 이곳 식사는 내가 아르트리어 저택에서 먹는 것보다 질이 꽤 떨어졌다. 특히 몸에 뿌리는 향수인지 화장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향을 발산하며 다니는 여자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더 괜찮은 남자를 더 많이 만나기 원하는 여자들은 더욱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향수를 뿌리거나 눈에 띄는 장신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당히 원시적인 구조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있던 현대지구도 별 다를 바 없었네.'

어제 옷가게에서 본 터무니없는 복장들이 잘 팔린다고 하는 이유도 알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줄리아는 목소리를 낮춰 우리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절대적인 금기가 있답니다. 디베르타에서, 아니, 이곳 엘리시온 자체에서, 직접적인 성교섭을 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교섭을 알선하여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답니다. 이 같은 행위가 금기가 아닌 곳에서 온 여자들은 특히 주의하세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국제법으로 처벌받게 되는 거에요. 구입한 사람도, 판매한 당사자도, 무엇보다 중개를 한 쪽이. 남성의 경우에는 신분이 하락하여 노예가 되며 여성의 경우에도 쉽게는 넘어가지 않아요. 반드시 명심해 두세요."

"저, 줄리아 선생님. 그건 어째서인가요?"

학생 한 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분들도 많겠지요. 엘리시온에서 매춘의 알선은 남녀간의 성교섭이라는 자연스러운 행위를 부자연스러운 이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가장 추악한 범죄라고 해요. 인간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며, 생명을 도구화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존속에도 위협이 될 수가 있는 거에요. 성교섭의 중개는 반드시 공익을 위하여, 공적인 기관에 한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답니다. 개인이 저지를 경우 어지간한 반역죄에 가까운 처벌을 받아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말이지만 일단 제 3자에 의한 소개는 무조건 금기라는 사실은 알겠다. 아주 큰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줄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목소리를 밝게 하여 덧붙였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라면 얼마든지 조건을 붙여도 좋아요. 성교섭이라는 것은 교섭의 단어가 붙는 만큼, 쌍방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전에 원하는 조건을 거는 것은 자유지요. 남편을 맞이하기 전까지 여성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을 잘 이용하셔야 해요. 제가 몇 가지 예시를 알려드리겠어요……."

오늘은 성교섭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줄리아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그녀는 사실상 그같은 행위가 아니면 이 곳에서 여성은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기에, 남성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구에서는 스킨십을 빌미로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면 창녀라고 비난을 받았었다. 다른 행성 출신의 몇몇도 비슷한 상황이었나 보다.

"사실 그런 건 엘리시온에서도 못 가진 자들이나 패배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대가로 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것들이니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시키는 거지요. 성교섭의 문제가 아니라도 자랑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들은 본래 도태되기 마련. 하물며 물건을 골라도 예쁘거나 이득이 되는 것을 고르잖아요. 그같은 자연스러운 선택현상을 비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에요. 아마 여러분들이 여러 번의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이제부터는 남녀의 입장이 역전되겠지요. 어느 쪽이든 엘리시온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에요. 남녀를 불문하고 미인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꾸미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상대에게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도 왠지 찜찜한 것이, 이런 독특한 풍습에 익숙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라무스의 날, 그러니까 네 번째 요일은 디베르타가 쉬는 날이었다. 일주일은 총 여덟 개의 요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에서 휴일은 이틀. 보통 첫 번째인 녹티라의 요일부터 사흘간 등원하고 하루 쉬고, 또 사흘간 등원하고 하루 쉬는 식이다.

하지만 에이반의 직장에서 휴일은 교대 형식이었다. 즉, 그는 라무스의 요일에 쉬지 않았다. 어제도 내가 잠든 뒤에나 들어온 모양인데 오늘도 상당히 일찍 출근한 듯 하다. 나는 등원하지 않는 날이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나서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식탁에 앉아서도 하품을 하는 내게 집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늘의 일정을 말해 주었다.

"오늘은 휴일이니 특별한 일정이 없습니다. 바깥 구경을 위해 외출하시거나 집에서 휴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물어 봐도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가고 싶은 장소가 생각날 리 없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럼 에이반이 근무하는 곳에 한 번 가 봐도 되나요?"

"주인님께서는 레마슬레이그의 궁정에서 근무하십니다. 궁정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신분이나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라무스의 날에는 주인님께서도 다른 때보다 일찍 퇴근하는 편이십니다. 오늘은 아마 주무시기 전에 주인님을 만나 뵈실 수 있으실 겁니다."

"궁정이라……."

그러고 보니 에이반의 직위가 대령이라고 했었지. 엘리시온은 꽤 많은 지역이 왕정 사회였다. 그 곳에서도 특히 레마슬레이그는 큰 국가라고 했다. 정확하게는 레바단의 수도가 레마슬레이그였다.

엘리시온은 몇 개의 큰 대륙과 섬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성이다. 물론 내가 사회 수업 때 배웠던 세계 지도는 상당히 불확실한 모습이었다. 일단 크게는 두 개의 큰 대륙과 세 개의 큰 섬, 혹은 군도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는 듯 하다. 여기서 가장 큰 국가의 이름이 레바단이며, 레바단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다른 모든 소왕국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레바단은 국가들을 대표할 뿐이지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수업 때 배웠지만 실권을 감안하면 상위 국가와 하위 국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전 대륙의 국가들을 통합하는 것은 레바단 연합 한 곳만이 아니었다. 연합과는 별도로 칼리온과 에아라는 이름의 기관이 있어 그들 역시 나름대로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권한을 지닌 채 공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집행의 칼리온은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국제법을 제정하며 집행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칼리온에서 정한 기초법은 여러 왕국법보다 우위에 있어 그들 법의 시초가 되었다. 또 기술의 에아는 전 국가와 백성들의 기술과 마력을 통합하여 관리하고 보조하는 역할로서, 공용의 지식탑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국가 단위에서는 하기 힘든 결계 밖 조사단이나 원정대를 꾸리기도 하고, 매년 마력을 모아 여자를 불러들이는 마법을 시행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에아 담당이었다.

전반적인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고 적어도 세 군데의 기관이 나눠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따지면 궁정이라고는 해도 내가 아는 역사 속의 왕궁 같은 숨막히는 분위기는 아닐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공기관 같은 느낌이려나. 그 중에도 레바단은 제 2계급과 제 3계급의 역할이 크기에 왕족 계급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엘리시온에서는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이 존재하는 대신 리드라는 이름의 왕족 계급이 있었다. 다른 소왕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권리가 남아있지만 권력 구조가 이미 합리적으로 개편된 레바단에서는 왕족의 실권이 전혀 없다. 혹여나 궁정에 입장한다고 해도 특정한 누군가의 심기를 거슬러 처형당하지 않기 위해 필요 이상 긴장하고 전전긍긍할 일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한번쯤 구경하러 가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급제는 계급제. 이곳 엘리시온은 제 5계급인 일반 민중과 제 4계급인 부호들 사이에서조차 법적으로 계급명이 구분되어 있는 곳이다. 비록 유지를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지만, 그럼에도 계급이 갖는 특권은 대단했다.

디베르타에서도 제복의 색이 다른 상위 계급 여성에게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교육을 상당히 초반에 받았었다. 물론 나는 디베르타의 숙소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앉아 있는 그녀들을 간혹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실제 생활하는 여자들은 공공 대욕탕이나 숙소에서 부딪히는 일이 꽤 있나 보다. 그녀들이 수업을 들으면서도 상위 계급 여성들에 대하여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표하던 것을 생각하면, 내게 에이반이라는 후원자가 있어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만약 그런 여자들을 만난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사극에서 보던 것처럼 하면 되나? 아니면 대통령이나 사장님을 대하듯이? 이해가 잘 안 간단 말이지.'

어떤 의미로는 이 저택의 주인인 에이반도 제 2계급 도미넌트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익숙한 상대라서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반이 벌써 돌아온 걸까? 집사 역시 그렇게 생각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

하지만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에이반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두 명의 남녀가 나란히 서서 집사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르트리어 대령은 안에 계신가?"

집사는 비단 예복을 걸친 턱수염 남자의 말에 약간 당황하더니 허리를 깊숙히 숙이며 말했다.

"오늘은 주인님께서 쉬는 날이 아니라 아직 퇴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인님께 용건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을 남기시거나 아니면 궁정의 군사부로 방문을……."

"기다리겠네. 응접실은 비어 있는가?"

"허나 주인님께서는 평소에 해가 진 뒤에야 퇴근을 하시는 터라 공께서 몸소 기다리시기에는 시간이……."

"상관없네. 아, 그보다 이 쪽은 내 부인인 쥬브라고 하네. 오늘 대령을 만나고 난 뒤 밤 공연을 보러 갈 예정이라 동행했지."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같이 데려온 여자를 집사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상의는 튜브탑에 실크 자락만 걸쳤고 하의는 길게 트인 복장을 한 여자였다. 그 남자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르트리어 대령이 최근 후원 상대를 들였다지? 쥬브가 오늘 대화 상대가 없어 무료했던 차이니 기왕 온 김에 그녀에게 부인의 접대를 부탁하고 싶은데. 마침 오늘이 디베르타의 휴일이라 그녀도 집안에 있겠군 그래."

집사는 전에 없이 난처한 태도를 취했다. 설마 지금 나에게 손님 접대를 시키려는 건가? 난 아직 이곳 언어도 몰라서 마법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고위 계층의 손님 접대 같은 것에도 자신이 없는데……. 집사는 무언가를 부탁하듯 나를 다급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의미를 오인하고 머뭇머뭇 앞으로 나섰다.

"저어……."

"어머, 네가 아르트리어 대령의 피후원자? 이름은 뭐니?"

나는 너무도 서슴없이 여인이 질문해 오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나보다 많아야 서너 살 정도 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어려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서 그런지 상대가 꽤 나이차가 나지 않는 이상 초면에 반말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유이나라고 해요."

"마침 잘 됐군. 아르트리어 대령이 네게 여자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을 알려 줬겠지?"

"저기, 그런 건 배우지 않았는데요."

내가 난처하다는 듯 말하자 그녀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그래. 어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적어도 네 후원자의 얼굴에 누를 끼치지 않게 노력이라도 해 보면 될 것을. 최소한 접대 비슷한 것을 하는 척이라도 해 볼 생각은 없었고?"

"……네?"

순간 상당히 무례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녀는 내 숨김없는 표정을 보고서 그 점을 또 탓했다.

"표정 봐, 감히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상대 앞에서 생각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다니. 네 출신이나 교육 수준도 알 만 하네. 아르트리어 대령은 도대체 왜 너 같은 계집을 후원하겠다고 나선 건지……. 얼굴도 평균 이하, 몸매도 평균 이하. 게다가 지성과 예의범절도 평균 이하."

끝이 없는 폭언에 나는 아연해졌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뭘 하러 여기에 온 거지? 생에 단 한 번도 얼굴이나 몸매가 평균 이하라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더더군다나 지성이라고? 도대체 무얼 보고?

물론 나는 몸매가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성숙했던 탓인지, 중고등학교 시절 그녀와 비슷한 악의 어린 말들을 간혹 들어 본 적이 있다. 질투나 열등감에 기인한 터무니없는 소문이나 뒷말들. 계급이라는 일방적인 방패막 뒤에 서서, 이 여자는 당장 내 눈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런 언어 공격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부인……."

"사용인은 가만히 있어 주겠어? 아직 말 안 끝났으니까."

그녀가 말하다 혼자 열이 올라 발개진 얼굴로 집사에게 쏘아붙였다. 그 때 두 손님이 들어오다 말고 아직 채 닫히지 못하고 있던 문이 뒤에서 벌컥 잡아당겨졌다.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에이반이 문 뒤에 서서 둘을 보고 약간 의문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세이노어 공, ……그리고 쥬브니엘 부인?"

"아, 아르트리어 대령! 상당히 일찍 퇴근하셨군,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콧수염 남자가 이마를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에이반은 문을 좀 더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제 1군 소속 군인이 이 시간에 퇴근했을 리 없다는 걸 아시면서 어찌 이 날 방문하셨습니까. 물론 오늘은 특별히 일찍 끝내긴 했습니다만……. 유이나?"

에이반이 나를 발견하고는 전에 비해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지더니 아까까지 팔에 끼고 있던 나무 상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상자를 들어 내게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정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어 인상을 울컥 찡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위층으로 뛰어갔다. 세이노어 공이라는 턱수염 남자가 서둘러 자기 부인을 챙겼다.

"어……, 그……, 일단은 죄송하게 됐네. 난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곧장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왜, 내가 왜,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그 여자는 뭐야? 부인의 만행을 구경만 하고 있던 남자는 또 뭐고? 도대체 그 인간들 뭐 하러 여기 온 거야?

물론 나는 에이반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다문 그 여자로 인해 어렴풋이나마 사건의 전말을 짐작했다. 그 여자,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에이반에게 선택받아서. 에이반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 본때를 보여 주려고 같잖은 핑계를 대고 그가 없을 시간을 노려 저택으로 쳐들어온 거겠지.

내가 방금 같은 폭언을 들은 이유는 전적으로 에이반에게 있었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여자가 그렇게 나왔겠는가. 에이반의 과거나 둘의 관계에 대해서, 도저히 의심하는 상태로는 그와 깊은 관계로 있을 수 없다.

"유이나!"

에이반이 다급히 나를 뒤쫓았다. 그는 집사에게서 대강이나마 사건의 전말을 듣고 온 듯 하다. 문을 몇 번 노크하더니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바깥에서 문고리를 돌렸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유이나."

"……."

나는 일그러진 얼굴을 이불로 감추고 살짝 얼굴만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에이반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여자가 당신께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안 했어요. 당신과의 관계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나는 잔뜩 퉁명스럽게 들리도록 날을 세워 쏘아붙였으나 그 말은 흐물흐물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에이반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 양철 로봇 같았던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짓다니, 새삼스럽지만 의외였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저와 그녀의 관계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저와 그 여자 사이에서는 조금의 성적인, 그리고 마력적인 교류도 없었습니다. 이리로 나와 보십시오, 유이나."

"싫어요."

나는 이불을 꽈악 옥죄고 그와의 사이에 한 겹의 장벽을 만들었다. 에이반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세이모어 경의 저택으로 갑시다. 그 여자 앞에서 말해 드리겠습니다. 저와 쥬브니엘 부인와는 어떤 사적인 관계도 없었으며, 내게 있어 단지 예전 상사의 부인일 뿐이라고. 그리고 당신께 함부로 대한 일에 사과를 받아내겠습니다. 유이나, 저는 애초에 여성과의 성관계 자체가……, 당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나이에 이제 와서 군에서 성교육 과정을 재수료할 리 없지 않습니까? 요 며칠간 늦게 퇴근한 것도……, 그렇지, 관련 서류를 확인시켜 드릴까요? ……하, 젠장."

에이반은 길게 땋은 머리를 거칠게 넘기며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불필요하게 쩔쩔매는 그의 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내가 이불을 내리고 얼굴을 드러내자 에이반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아……. 그래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녀와 일절 관계가 없었다고 해도, 당신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온전히 제 책임이 맞습니다. 좀 더 화내셔도 됩니다. 제가 다 받아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알았……, 아아."

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이 이상 추태를 보이는 대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앉았다. 에이반은, 어쩌면 그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혼이 나는 강아지처럼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목을 조금 가다듬고 그를 향해 물었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나요? 그 여잔 저보다 계급이 높지 않아요?"

2계급 남성을 남편으로 둔 여자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지 상위 계급 남자를 1년 한도로 후원자로 두고 있을 뿐인 5계급 여자……. 그 차이에 대해서는 수업 시간에 배워서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사과를 직접 받기 힘들다는 것도. 현실적인 문제에 에이반은 침음을 삼켰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아직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만……. 적어도 제가 그녀의 공범이자 남편 중 하나인 세이모어 공에게는 철저한 사과를 받아낼 능력은 됩니다. 주인 없는 집에 행패를 부리러 찾아와 놓고는 아주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더군요. 그 여자에겐 복수하기 힘들지 몰라도, 그에게는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입니다."

"정말요?"

"물론입니다. 세이모어 공은 종부입니다. 그녀의 나머지 남편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혹시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종부는 그 여자의 남편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자에게 붙는 호칭이지요. 세이모너 공, 지금은 은퇴하여 공의 호칭을 붙이고 있지만 본래는 세이모어 중령이었습니다."

"에이반이 더 높은 거에요?"

"어느 쪽이 높다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만, 지금은 그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한 상황이니 결코 고자세로 나오긴 힘들 겁니다."

나는 에이반이 당장이라도 떠날 기세를 보이자, 그의 소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어차피 잘못한 쪽은 그 여자였다. 이런 상류 사회는 인맥 또한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불만족스러운 사과 하나 받아내자고 에이반이 괜히 불필요하게 인맥 하나를 잃을 필요는 없었다.

"화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이상 화를 내고 있을 수가 없군요."

에이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덥석 안아들었다.

"내려갑시다. 제가 뭘 사 왔는지 좀 보십시오."

"뭘 사 왔는데요?"

"당신의 기분을 좀 더 좋게 하기 위해 사 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걸로 당신을 확실히 달래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혹시 야한 물건이 아닌가 살짝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에이반이 사 온 나무 상자의 안에는 아주 귀여운 것이 들어 있었다. 흰 설탕 가루가 소복하게 묻혀진 눈송이 같은 동그라미가 상자 속 칸칸이 투명한 종이에 싸여 있었다. 집사가 하나를 들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디저트용 작은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양쪽에 놓여 있었다. 내가 보고만 있자 에이반이 나이프를 들어 흰색의 공을 몇 조각으로 잘랐는데, 겉의 설탕 코팅이 깨짐과 동시에 안에서 새하얀 크림이 벌컥 흘러나왔다.

"아, 이거……."

"열두 개 전부 당신 겁니다."

좀 더 작은 크기였지만 여자들이 디베르타에서 모여 이것 하나를 나눠 먹는 모습을 간혹 보았다. 설탕 과자로 불리던 간식이었다. 쪼개진 모습밖에 못 봐서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나는 에이반이 건네 준 포크로 설탕 조각과 크림을 떠서 한 입에 삼켰다. 아주 부드럽고 달콤했다.

생김새는 단순히 쿠키 볼 안에 크림을 채운 듯 했으나 맛의 질은 차원이 다르다. 생전 이와 비슷한 간식을 맛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겉의 설탕 코팅 안쪽에 붙어 있는 타르트 껍질같은 얇은 과자는 식감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안쪽의 크림은 무엇으로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굉장히 리치하면서도 입에서 그냥 녹아 느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순식간에 세 개의 설탕 과자를 먹어 버렸다. 더 먹고 싶었지만 한번에 없애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일단 자제하기로 했다. 에이반은 내가 더 먹지 않자 한 번 다시 권하더니, 나머지는 차게 해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집사에게 말했다. 집사는 다음 간식 시간 때 그렇게 내어 오겠다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에이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여자가 당신께 어떤 무례한 행동을 했는지."

"……."

나는 고개를 젓고 에이반의 옆구리에 살포시 기댔다. 아직은 굳이 입으로 그 때의 일을 꺼내 기분을 다시 망치고 싶지 않다. 대신 에이반의 허리를 가볍게 껴안았는데, 팔 밑에 무언가가 걸리적거렸다.

내가 에이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그는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당신이 포크를 무는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게다가 요 며칠간 일만 한 참이라……."

"저기, 에이반. 오늘은 그 '훈련'이라는 것 안 해요?"

넌지시 그에게 권했으나 에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휴일이니 당신도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몇 번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용기를 내어 사실대로 고백했다.

"하고 싶어요."

"훈련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성교섭을?"

에이반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에이반은 내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지 표현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내가 망설이며 작게 두 번째로 말한 부분이라고 중얼거리자 에이반이 흔쾌히 나를 덥석 안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윗층으로 올라가지요……."

오늘 사회 교육 시간에는 신분 상승의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당장 높은 신분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 여자, 도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에이반조차 손댈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여성은 제 5계급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 세계에 갓 떨어진 당시에는 전부 공평하게 마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디베르타에서 교육을 받는 1년간은 이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다만 다른 5계급 남성들과 달리, 노동과 납세의 의무를 갖지 않으며 여성법에 의해 특별히 더 보호되고, 사실상 5계급과 4계급의 중간 정도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인 5계급 남성보다는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셈이지요.

그럼 이제부터 신분 상승의 방법과 종류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상징적인 신분의 상승입니다.

제 3계급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같은 제 3계급 남성을 총 여덟 명 남편으로 맞이하여, 그들과의 실질적인 부부 생활 여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덟 명의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또한 제 2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제 2계급 남성 다섯 명과 같은 증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1계급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정식 결혼이라는 것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서 여성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지만, 남성의 경우 성인기의 나이에 접어들어야만 하며, 또한 부인을 맞기 위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결혼법과 이혼법이 여성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남성은 알을 기르되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의무 없이 만남을 유지하며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갖는 사이가 많답니다.

대신 상류 계급으로 올라가면, 오히려 결혼률이 좀 더 높아지는데요. 몇몇 상류 계급의 남성들 간에 결혼 동맹이 성행하는 탓입니다.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진 남성끼리 부인을 공유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남성과 같은 자격을 갖지 않으면서 여성이 신분을 높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결혼을 통해 얻은 신분은 명예 신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상 직접 신분을 얻은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 그 여자와 에이반도 신분만으로는 동급.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데다 납세 의무까지 있는 에이반과 남편만 여럿일 뿐 별로 잘난 부분도 없어 보이는 그런 여자가 동급이라니, 어찌 보면 불공평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결혼 없이 실질적인 능력으로 신분을 올릴 수 있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4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계급세의 납부만으로 충분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동일합니다. 일반적으로 4계급 남편을 맞이할 경우 남편이 부인의 계급세까지 함께 지불하는 형태가 됩니다. 이것은 가장 쉽게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실질적으로 여성은 제 5계급이든 제 4계급이든 권리의 차이가 그다지 없답니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결혼 없이 제 3계급인 스칼라가 되기 위해서는 남성과 똑같이 에아에서 매년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디베르타의 기초 교육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완수한 뒤 중급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중급 학교를 졸업한 다음 다시 학비가 꽤 비싼 상급 학교 3년을 더 완수해야만 합니다. 그 뒤로도 시험 공부를 몇 년씩 해야만 합격할 수가 있지요. 남성들 중에서는 군에 입대하여 근무하는 것으로 비교적 간단한 시험을 통해 제 3계급을 딸 수 있는 경로가 있으나 현재로서 여군은 창설되어 있지 않기에, 여성은 오로지 문서상으로 시험을 치르는 수밖에 없답니다. 합격 후 남녀의 차이가 있다면 남성의 경우 반드시 공무로 배정되게 되어 있으나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일까요.

제 2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마력이 필요합니다. 2계급 여성은 남성과 달리 마력 납세의 의무를 가지지는 않으나 남성 못지 않은 양의 마력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답니다. 그것이 강한 남성의 알을 낳아 줄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이 2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에아의 마력 측정 말고도 레바단의 허가가 필요한데, 신청서를 내기 위해서는 다섯 명의 제 2계급 남성의 서명이 필요하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제 1계급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제 1계급은 제왕의 피를 타고나는 것이 조건으로, 그것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대신에 제 1계급과 2계급은 실질적 권한이 동일하기에, 어차피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기분이 묘해졌다. 여성이 자신의 힘으로 계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직업활동도 제한된 여자 혼자서 어떻게 계급세를 낼 정도의 돈을 벌겠는가. 노력해서 에아의 시험에 통과하더라도, 일을 시켜 주지 않으니 돈을 벌 수도 없고. 결국 3계급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2계급은 더더욱 심했다. 마력의 증가와 계급 상승에 도움을 줄 그 인맥이라는 것도 결국은 성적인 파트너였다.

'그냥 결혼하는 거나 다를 게 없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만 않을 뿐 해당 계급 남성 여럿과 사실혼 관계가 되라는 거잖아…….'

이쯤 되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여성을 굳이 다른 세계에서 불러온 이유가 자손을 낳기 위해서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식의 취급은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계급제 사회에서 인권이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후 수업 중 줄리아 선생님은 남성의 몸에 대한 공부를 시켜 주었다. 남자 하나를 교육용 교재로 데리고 와서 말이다. 수업은 6번 방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곳에는 사람의 몸을 구속시킬 수 있는 도구가 있었다. 사이즈를 보면 여성보다는 남성의 몸을 결박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듯 하다.

"자, 이 실습대상은 전과 6범으로 노예가 된 본래 3계급 남성이었답니다. 여러분 자신의 몸 구조와 성감대에 대해서는 이미 저번 시간에 어느 정도 배웠으니 오늘은 상대자가 되는 남성의 신체에 대해 가르쳐 드리도록 하죠."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채 성인 남성 한 명이 사지를 벌리고 목판에 가죽 벨트로 묶여 있다. 손발목을 묶고 있는 것은 가죽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금속 구속구에 가죽을 덧씌운 것이다. 머리 전체를 천으로 된 봉투로 뒤집어씌운 상태였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을 보면 입에 추가로 재갈이 물려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알몸이었다. 쫙 벌린 사지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까이 앉게 하고 하나씩 몸 각 부분의 명칭과 역할에 대해 알려주었다. 발기 상태였던 남자의 페니스가 가라앉자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회초리 끝으로 몇 번 치더니, 그래도 소용이 없어 잠시 수업을 중단했다.

"정말, 기왕 이렇게 된 거 여러분들께 먼저 남성의 발기가 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어요. 첫 번째는 약이나 마법의 도움을 받는 것이에요. 대신 너무 자주 사용하면 내성이 생겨 곤란해질 수 있으니 여러분들의 남편이나 연인을 상대로는 정말 급할 때가 아니면 추천하지 않아요."

그녀는 옆에 있던 장식용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끝이 뭉툭한, 길고 두꺼운 대바늘 같은 것이었는데 손잡이 쪽 끝에는 붉은 루비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장갑을 꼈다.

"매혹 마법의 변형이 걸린 비큐스랍니다. 성적 흥분을 더하거나 줄이는 용도로써, 보통은 남성의 상태가 만족스러운 성교섭을 하기에 부적절할 때 도움을 받는 물건이지만 지금은 이 쓸모없는 성기를 발기시키기 위하여 써 보도록 하죠."

줄리아는 축 늘어진 성기를 장갑 낀 손으로 들어올려 끝의 구멍에 갑자기 바늘의 뾰족한 부분을 찔러넣었다. 남자가 물고 있는 재갈 사이로 괴로운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성기는 전에 없이 순식간에 피가 몰려 거대해졌다.

"원래 어느 정도 발기한 상태가 아니면 넣기 힘든데 이 교재는 전에도 몇 번 사용해 봐서 그런지 간단히 들어가네요. 자,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지만, 다른 방법도 차례대로 알려드리겠어요."

어떤 학생들은 차마 못 보겠는지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 날 수업은 '교재'가 여덟 번 사정하고 나서 끝났다. 사정의 원리나 남성의 반응을 보여준다는 목적으로였다. 이같은 무리한 수업 때는 노예를 공무용으로 빌려 와서 사용하지만, 그다지 무리하지 않은 수업의 경우에는 디베르타의 손님이 참여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수업 도중 남자가 상당히 괴로워하자 몇몇 학생들은 더 못 보겠다며 호소했다. 줄리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노예의 전과에 대해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 그 누구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텐데요? 어차피 노예는, 다들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가 있어 노예가 된 것이에요. 특히 이처럼 성적인 용도로 소모되는 노예는 더더욱이요."

정말일까? 확실히 전에 듣기로도 노예 중에서 낙인이 있는 노예는 성범죄나 중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라고 했다. 지금은 얼굴과 등이 가려져 있어 낙인의 유무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이 맞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수업을 끝냈다. 못 볼 꼴을 본 것 같다.

에이반은 직급이 높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의 근무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워낙 업무량이 많은 편이라 디에스의 요일 하루를 일찍 마치기 위해 다른 요일 내내 업무를 미리 분담해 놓아야 했다.

디에스의 날은 엘리시온의 전체 주말이자 휴일인 모르스의 날이 되기 하루 전이었다. 안 그래도 이 날은 가급적 일찍 퇴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시장 거리의 사람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접으려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이 날은 에이반이 정해 놓은 내 훈련 날이기도 했다.

자그마치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한 에이반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나와 같이 식당에 앉아 식사를 했다.

"학교 수업은 어떻습니까? 힘들지는 않고?"

"가끔 이해할 수가 없어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괜찮아요."

"뭔가 필요한 것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보다, 정확하게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 걸맞다. 아직 그 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에이반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매달 용돈을 조금씩 드리겠습니다. 공부를 일찍 마친 날이나 쉬는 날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셔도 됩니다."

나는 왠지 뜨끔했다. 요 일주일간 거의 나는 디베르타에서 수업을 듣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에이반이 살짝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원래부터 즐기던 취미생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저……, 그림을 그리는 거요. 그, 그다지 잘 그리는 건……."

집에서는 취미활동에 대해 썩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말하면서도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생산적 활동이 아니면 거의 욕을 들어먹는 반응에 그쳤기 때문에, 내가 즐기는 것이라던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남들에게 잘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그가 물어보니 대답할 수밖에 없고, 약간 난처했던 것이다.

에이반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취미군요. 엘리시온에서도 시간이 남는 여성들이 취미로 자주 예술을 즐기고는 합니다. 다음 주쯤 집사와 함께 외출하셔서 그림도구라도 구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에,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요. 취미 한둘 정도는 원하는 대로 즐기셔도 됩니다. 집사에게 듣기로는 수업이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많이 심심해하셨다더군요."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집사가 하나하나 내 행동을 그에게 보고한 것 같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엄청나게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았던 것도 다 들켰겠지? 어쩐지 민망하다. 에이반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상당히 신경쓰여 그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먼저 찔리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 모르는 체 냅킨으로 입을 닦고 다음 메뉴를 기다렸다.

평상시 저녁 식사는 입가심 겸 작은 접시에 담긴 크림 푸딩이나 과일 절임을 곁들였으나 오늘은 식후에 아무 것도 없었다. 에이반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나를 덥석 안아 올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식탁을 바라보자 에이반이 의아해했다.

"양이 좀 부족했습니까?"

"아니, 그게……. 다른 때에는 디저트가 있었는데……, 하고."

"당신에게는 집사가 디저트를 챙겨 주었나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없어도 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마 저와 함께 식사하게 되어 후식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간단하게나마 만들어서 윗층으로 천천히 가져오게 하지요. 샴페인도 같이."

에이반은 후식을 생략하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후식이 따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나를 안고 나오면서 입구에 서 있던 하인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내가 같이 있더라도 유이나 몫의 디저트는 내어 오도록 전달하세요."

"……."

나는 하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가려버렸다.

에이반이 침실 앞의 응접실에 나를 내려놓자, 나는 에이반의 팔을 잡고 작게 말했다.

"오늘도 소파에서요?"

"음? 소파는 좁아서 불편합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보통은, 이런 장소보다 침실에서 하지 않아요?"

거의 네 번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늦은 감이 있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장소 선택이 단지 에이반의 취향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에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결혼한 남자들의 저택에는 일반적으로는 성교섭을 위한 방이 따로 있지요……. 그러고 보니 저와 만나던 상대는 여성이 아니라서 특별히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에이반은 그의 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객실을 하나 더 준비하긴 늦었으니 오늘은 제 침대에서 합시다."

나는 쭈뼛거리며 에이반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침실은 처음 들어와 본다. 방 한 켠에 큰 기둥을 사이에 두고 작은 서재 공간이 있었고, 침실 쪽은 간략하게 침대와 커튼만 있다. 에이반은 침대에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침대는 그의 신장에 맞추어 상당히 크고 넓었지만 매트리스는 내 방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으아, 이런 거면 차라리 소파가 더 편안하겠네.'

그렇지만 소파보다 안정감은 있었다. 나는 조금씩 착용에 익숙해지는 수영복 같은 상하의를 벗었다. 에이반은 적어도 집에서는 장신구를 하도록 권했으나 현대에는 이미 유행이 지난, 반짝이는 황금 팔찌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굳이 집에 있을 때 챙겨 두르는 행동은 영 내키지 않았다.

마침내 에이반이 얇고 긴 유리 막대 같은 것을 몇 개 들고 들어왔다. 그는 상의를 완전히 벗고 있었지만, 흰 바지는 그대로 입고 있는 상태다.

"착한 숙녀로군요. 벌써 그렇게 알몸이 되어 계시다니……."

"……."

"나쁘지 않네요. 저도 저대로 준비할 것이 많으니 훈련 날에는 미리 그렇게 벗고 기다리는 것으로 합시다."

나는 약간 불안한 시선으로 그가 들고 온 투명한 유리 막대를 쳐다보았다. 전반적으로 매끄러운 봉 모양으로, 하나는 새끼 손가락 두께보다 조금 얇은 굵기였고 하나는 그 두 배 정도 되는 굵기, 나머지 하나는 직경이 3-4cm정도로 그 용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반은 가장 두꺼운 것을 옆에 내려놓았다.

"여기 세 번째 것은 최소한 오늘은 쓰지 않을 겁니다. 아마 두 번째 것도……. 천천히 진행하지요."

마지막으로 에이반이 내려놓은 것은 납작한 갈색의 기름병이었다. 뚜껑을 열자 아주 은은하고 달콤한 향내가 났다. 특별한 용도의 향유인 듯 했다. 투명한 액체를 널찍한 손바닥에 따르고, 에이반은 천천히 자신의 손과 팔에 향유를 칠했다. 나는 긴장하여 다리를 모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이리 와서 무릎에 기대세요."

에이반의 허벅지에 등을 대고 옆으로 눕자, 그가 미끈한 손으로 가슴을 덥석 쥐었다. 나는 낮은 신음을 삼켰다. 가슴 전체를 마사지하듯 주무르던 그가 서서히 가슴을 중심으로 다른 곳도 향유를 펴발라 주었다.

"유이나는 다른 여자들보다 가슴과 엉덩이가 크지요? 이렇게 크면 평소에 불편하지 않습니까?"

"아……, 가끔 몸을 움직일 때 어딘가 걸릴 때가……."

"그 밖에 무거워서 어깨나 등이 피로하다거나 하는 점은?"

"그, 그렇게 무겁지 않아요……."

에이반은 아마 항상 달고 있어서 못 느끼는 것일 거라고 말하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향유가 피부 사이에 밀착되니 확실히 살끼리 닿는 느낌이 전과 달랐다. 맨살끼리 닿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격렬한 접촉에는 역시 윤활액의 도움을 받으면 좋은 것 같다.

"아아앙."

에이반이 가슴을 주무르다가 유두를 꼬집어 비벼 주었다. 나는 아찔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반을 올려다보았다. 에이반은 흥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향유가 있으면 평상시보다 조금 힘이 들어가도 피부가 따갑지 않죠?"

"흐응……, 네에. 하읍."

"하지만 너무 미끄러워서 자극이 쉽지 않네요. 일단 눈부터 감으십시오. 훈련이니까요.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세요."

나는 그가 주물러 주는 대로 온전히 젖가슴을 내맡기고 신음했다. 에이반은 계속해서 가슴과 가슴 주변을 큰 손으로 주무르고 반죽해 댔지만 유두를 계속 놓치는 바람에 가슴만으로 오르가즘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몰아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래가 이미 축축했다.

"아흐읏, 에이반, ……여기 아래도요……."

이대로면 내가 가게 될 때까지 계속 가슴만 공략할 셈인 듯 해 나는 다리를 벌리며 그를 보챘다. 그는 이번에는 엉덩이를 주물러 주겠다고 말하며 다시 향유병을 집어들었다.

"쿠션을 깔아 드릴 테니 엎드리세요. 자아, 눈은 계속 감으시고."

그는 반쯤 눈을 뜬 나를 엎드리게 하고, 엉덩이를 더 높이 들도록 아래에 쿠션을 몇 겹이나 깔았다. 아래만 높게 치켜들고, 약간 부끄러운 자세였다. 향유로 미끄러운 그의 손바닥이 양쪽 엉덩이를 감싸쥐었다. 전체적으로 향유를 펴바르더니,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어 강하게 엉덩이를 마사지했다. 힘있는 그의 애무에 순간 가버릴 뻔 했다.

"아흑, 흐아앙……."

입술 아래에 쿠션을 대고 꾹 누르며 신음을 참았다. 에이반이 엉덩이를 좀 더 높이 들라고 재촉했다.

"싫어……, 이 자세 너무 힘들어요……."

"더 높이는 무리입니까?"

에이반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엔 자신이 아예 침대 아래로 내려가서 높이를 맞추었다. 뭘 할 셈인가 했는데,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다리 사이를 입으로 빨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래를 빠는 것은 좋은데 하필이면 엎드린 자세 때문에 그의 코가 자꾸 항문 주변을 문질러왔다. 도저히 민망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저기, 오늘은 씻을 시간이 없어서 그, 그……."

"흐음, 괜찮습니다. 사실 예상했던 냄새가 나도 상관은 없었지만,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다르게 엉덩이에서도 단내가 나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한 번 그 부분을 혀로 할짝였다.

"……!!"

나는 엎드린 채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에이반이 허벅지를 쥐고 벌리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쿠션 커버가 침과 눈물로 젖은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신음했다.

애액이 나오는 구멍을 혀로 사정없이 핥던 에이반이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예고했다.

"앞쪽에 손가락 넣습니다."

"하흣, 잠깐……!"

"걱정 마세요. 제 성기보다는 이것이 얇습니다. 일단 입구 안쪽 성감대를 확인해 보려고요."

에이반의 손끝이 소음순 사이를 맴돌다가 천천히 질구 안으로 들어왔다. 중지손가락이었다. 나는 엎드린 채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은 혀보다 단단하고 훨씬 더 깊이까지 들어왔다. 에이반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길고 두꺼웠다. 몸 안에 들어오니 더욱 더 그렇게 느껴졌다. 몸이 쭉 늘어지고 그의 손가락에 질근육이 오물대며 붙자 에이반이 부드러운 말씨로 경고했다.

"이 부근을 생각보다 많이 압박하게 될 수 있으니 소변을 보고 싶으시면 굳이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꺄, 그건 싫어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침실에서 함께 자면 되니까요, 그럴 생각으로 여기로 데리고 온 겁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에이반이 질내를 꾹꾹 누르며 매만져 주자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목 아래 깔린 쿠션을 쥐어뜯었다.

안쪽만 자극하는 것이라면 상관 없지만 그는 엄지로 앞쪽의 음핵까지 함께 만지고 있었다. 무릎을 움찔대며 그의 손가락을 꽉 조였다. 에이반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건 여기를 만져 줘서 조이는 거겠지요? 안쪽에 특히 기분 좋은 곳이 있으면 제게 말해 주십시오."

둘을 같이 자극하면 어디가 만져져서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에이반은 충분히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유독 특정한 부위를 반복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간질간질하다가 갑자기 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꾹꾹 눌러 주자 몸이 멍하니 떠오르는 것 같았다. 몇 차례 반복하니 아래쪽에 쾌감 외의 감각이 없어졌다.

"흣응, 으흐응. 응응."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도 모르게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갈 것 같은데 갈 수가 없어서 눈을 뜨고 애타게 에이반을 쳐다보았다. 그가 제대로 자극해 주겠다며 하의를 내리고 페니스를 꺼내들었다.

"위치를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걸로 긁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엉덩이를 늘어뜨린 채 기다렸다. 에이반은 서서히 각도를 맞춰 귀두를 찔러넣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하앙!!"

받아들일 때마다 그의 물건은 크다고 느껴지지만, 동반되는 쾌감의 강도는 오늘이 최고였다. 에이반이 내 위에 그림자를 만들며 쿠션 밑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내 손등을 눌러 감싸쥐었다. 그의 페니스가 묵직하게 안쪽을 치고 들어왔다. 다만 길을 따라 가능한 한 곧게 찔러넣었던 전과 다르게 오늘은 좀 무리하게 주름 사이를 벌리고 아까 전 손가락으로 만지던 그 곳의 약간 위를 노렸다.

에이반의 거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가 그 곳을 노려 찌를 때마다 앗, 앗, 하고 짤막한 단말마만을 뱉어냈다. 안쪽이 에이반의 물건을 신속하게 조여드는 것 같은데 그는 허리를 몇 번 퉁기더니 다시 본격적으로 단단하고 힘센 물건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천천히 그가 손을 놓고 내 몸을 위에서 끌어안는 형태로 자세를 바꾸었다. 나는 등에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 무아지경으로 숨을 헐떡였다. 에이반의 것이 특정 부분을 강하게 문지르자 안이 반사적으로 조여들었다. 첫 절정이었다. 그는 페니스 끝에서 정액을 내뿜으면서도 계속해서 그 부분을 세게 찔러왔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형태의 쾌감이 중첩되어 전신을 경련시켰다. 기절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극치감. 나는 여전히 몸을 엄습하는 쾌감에 바들바들 떨며 에이반의 물건이 뽑혀 나가는 것을 구멍의 감촉만으로 느꼈다. 한참동안이나 자잘한 절정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

불규칙적이던 숨이 겨우 약간 빠른 정도로 돌아오고 전신에 쾌감 외의 다른 감각도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겨우 돌아가는 머리로 에이반이 여전히 벌려진 내 다리 사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쿠션 위에 늘어진 사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본 행위는 한 번 뿐이었지만, 몸 상태만 보면 열 번은 연이어 가버린 것 같다.

"어땠습니까, 좋았나요?"

에이반이 뒤에서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

"요 전에 했을 때는 더 안쪽의 자극으로 절정을 느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손가락이 닿지 않으니 다시 한 번 이걸 세워서 시도해 보겠습니다."

"!!!"

나는 화들짝 놀라 겨우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뒤집었다. 에이반의 페니스는 이미 발기한 상태였다. 그 다음 쿠션의 일부와 침대가 상당히 축축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르는 사이 오줌까지 싼 것 같았다.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참겠다고 다짐했는데. 나는 당황하며 그에게 물었다.

"설마 제가 싼 거에요……?"

"으음?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극이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꺄아아!"

부끄러워서 도저히 이 침대에 있을 수가 없다. 에이반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려던 나를 안아서 다시 눕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가를 닦으며 꼿꼿하게 선 페니스를 내 허벅지에 부볐다.

침대에서 오줌까지 싼 여자를 보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아직 시험해 볼 안쪽 성감대가 몇 군데 더 남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엉덩이 쪽도 슬슬 훈련을 시작해야겠지요.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고 쉬면 됩니다."

"싫어, 하흥, 모, 못하겠어요!"

"못 하시겠다니, 어떤 부분을?"

차마 말을 못 하고 푹 젖은 이불을 힐끔거리자 에이반이 허벅지를 들어올리고 내 아래로 내려가 방금 소변을 본 구멍에 혀를 댔다. 요도와 아까 자극하다 말았던 음핵을 같이 한꺼번에 빨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마시겠다는 것 같았다. 안쪽과 달리 아직 클리토리스로는 자극만 받고 가지는 못했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그의 입술에 그 곳을 빨리며 느껴 버렸다. 에이반은 빨갛게 되어 파르르 떨고 있는 클리토리스를 가볍게 한 번 핥고 입술을 뗐다.

"이제 깨끗해졌으니 괜찮습니다."

에이반은 몇 번을 해도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괜히 군인인 게 아니었다. 성감대를 시험한답시고 계속해서 그 단단한 물건을 박아대는데 내가 중간부터 몸을 가누지 못하자 아예 나를 안아들고 내 몸무게까지 팔로 버티며 움직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곳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그냥 계속 그에게 안겨 박히기만 한 것 같은데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많이 가 버려서 이제 슬슬 타인과 맞닿은 부분의 촉감까지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에이반은 예민해져 있는 내 엉덩이를 한 차례 쓰다듬더니, 나를 침대의 말끔한 부분에 엎드리게 했다.

"앞쪽의 훈련은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나는 긴장하여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에이반은 먼저 약부터 바르겠다며, 밖으로 나가 작은 병에 담긴 투명한 크림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나는 지쳐서 무슨 말을 하는 대신 그냥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뒤쪽은 약을 쓰더라도 상처가 나기 쉬워서 어느 정도 당신의 몸에 마력이 생긴 뒤에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할 겁니다. 회복력이나 저항력 같은 신체 강도의 문제에 의한 겁니다. 그건 약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에이반은 약뚜껑을 열고 투명한 점액을 엉덩이 구멍 주위에 손끝으로 펴바르기 시작했다. 처음 몸에 칠했던 향유와는 다른, 아주 끈적한 무언가였다.

"그 전에, 이 쪽의 쾌감에는 미리부터 익숙해져야겠지요……."

"그, 그 약은?"

아주 가느다란 막대를 넣는 건데도 상당히 치덕치덕 많은 양을 바르고 있었다. 게다가 윤활 목적이 아니라, 아예 흡수시키려는 것처럼 문지르는 중이었다.

"이 쪽 구멍도 성행위에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요한 약이랍니다. 꾸준히 발라서 익숙해지더라도 최소 5년 정도는 한 달에 한 번씩 잊지 말고 계속해서 발라 줘야 합니다."

"네에? 그런 거……."

"오히려……, 약을 쓰지 않고 하면 이쪽 구멍이 아프거나 모양이 변할 수 있어 위험하기 때문에, 처음 일이 년간은 꼬박꼬박 할 때마다 챙겨 쓰는 편이 좋습니다. 여긴 원래부터 지속적으로 크게 벌어지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근육이 아닙니다."

"하읏!"

에이반이 겉을 충분히 발라 흡수시킨 다음 이번에는 가장 가느다란 유리 막대의 끝을 약병에 담아 흠뻑 묻도록 했다.

"제 것의 길이가 20센티 정도 되니까 그 정도까지 넣을 겁니다."

나는 막대의 두께가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어째서 불필요하게 그 막대가 그렇게 길었는지도. 얇고 딱딱한 유리막대가 항문 입구 주위를 천천히 눌러 가며 적응시켰다. 어느 정도 촉감이 적응되자 에이반이 슬슬 넣겠다며 예고했다.

"여성은 성기와 이 곳, 쾌감을 느끼는 부분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앞쪽으로 충분히 훈련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이 쪽 구멍도 쉽게 느낀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저는 다른 쪽이 기대가 되는군요. 당신, 앞쪽으로는 아직 제 것을 끝까지 넣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

몇 번의 정사로 축 늘어져 있던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평소 내보내기만 했던 구멍인데, 아무리 얇은 물건일지언정 역행하여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좁은 입구 구간을 지나니 어느 정도는 나아졌다. 안쪽 자극은 견딜 만 했다.

"자, 여기가 끝입니다."

에이반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실제로 제 것을 넣게 된다면 앞부분과 달리 여기까지 들어올 겁니다."

에이반이 유리 막대를 휘저어 장벽 상당히 깊은 곳을 두드렸다.

"제 기둥 뿌리 맛을 앞쪽보다 이 구멍이 먼저 보게 되겠군요."

"하으응……."

큰 것을 제대로 넣으려면 꽤 오래 훈련해야 하는 질과 달리 항문 내부는 삽입시 입구 외에는 특별히 방해되는 부분이 없었다. 에이반은 아직 훈련 과정이 한참 남았는데도 기대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살짝 뺨과 이마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참았다.

어느 정도 약이 흡수되자 그는 오늘은 이쯤 하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유리 막대를 천천히 빼냈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아무 것도 막대에 묻어 나오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에이반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방금 뽑아낸 유리 막대 끝을 입에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뭐가 많이 묻어 있어도 괜찮으니까, 괜히 섣부르게 관장 같은 걸 시도하지는 마세요. 배탈이라도 났다간 큰일이지 않습니까."

"배탈 나도 괜찮은데……."

"안 됩니다. 필요한 날에는 제가 따로 지시해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에이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날 나는 제대로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했다.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이었다. 에이반도 휴일이라고 꽤 느지막히 일어난 건지 처음으로 나와 그는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다.

"……."

에이반은 내 곁에 누워 잠에 취해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는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불 위로 내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에이반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마찬가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주춤주춤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더니 어제 혹사당했던 다리 사이가 찌릿했다.

침대 맡의 거울을 보니 도저히 사람 꼴이 아니다. 눈 밑과 이마는 평소보다 붉었고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가장 먼저 씻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사를 불렀다. 하지만 종을 잡아당기는 소리에 내 방으로 찾아온 것은 집사가 아니라 금발머리와 붉은 머리의 소년 둘이었다.

"레오라고 합니다."

"베, 베르타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금발 소년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오늘부터 저희 둘이 주인마님의 소년종이 되어 가까이서 시중을 들어 드리게 되었습니다. 시키실 일이 무엇인가요?"

나는 멍하니 둘을 쳐다보았다. 노예 시장에서 사 왔던 소년들이었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은 머리도 깔끔하게 빗고 하인 제복을 가지런히 입고 있어 인상이 달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입는 제복과 너무 디자인이 비슷한 탓에, 둘의 미성숙함이 유독 강조되었다.

두 명 다 일을 시키기엔 너무 어린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둘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 점은 아무리 짧게나마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어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음, 일단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한 명은 가운을 좀 가져오고."

"알겠습니다. 가자, 베르타."

금발 소년이 형처럼 붉은 머리의 어린 소년을 데리고 나갔다. 어려 보여도 어차피 간단한 심부름을 시키는 정도니 괜찮겠지. 곧 붉은 머리의 소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내게 은쟁반을 가져다 주었다. 쟁반 위에 실크 가운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이, 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네가 도와준다고? 안 될 것 같은데."

집사가 겉옷을 입히는 것을 도와 준 것처럼 어깨에 걸치는 형식의 옷을 입혀 주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키가 비슷해야 했다. 아니면 나보다 크거나. 그 때 문이 열리며 에이반이 들어왔다. 에이반은 휴일이라 그런지 제복보다는 편해 보이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목욕부터 하실 겁니까? 함께 점심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그렇지만……."

도저히 그의 앞에 보일 꼴이 아닌데 에이반은 아무렇지 않게 가운을 집어들고 내 팔에 끼워 넣어 주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러 내려갑시다."

"……알았어요."

에이반이 내 몸에 흰색 가운을 걸치고는 끈을 뒤로 돌려 묶어 주었다. 부드럽고 얇은 가운 천 밖으로 몸의 선이 도드라졌다. 그가 목욕물은 천천히 준비해도 좋다고 베르타를 향해 던지듯 말하자, 베르타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그리고 선망의 눈길이 한참동안 에이반의 뒤를 따라다녔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근처의 성인 남성이 그저 멋있어 보일 때인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없는 베르타의 사정이 약간 안타깝기도 했다.

에이반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쯤 물었다.

"어제로 수습 기간이 끝난 모양이군요. 앞으로 어딘가에 갈 때 가급적 데리고 다니도록 하십시오."

"둘을 만난 적 있나요?"

둘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라서 물었는데, 곧 바보 같은 질문임을 깨달았다. 잊고 있었는데 두 명을 데리고 온 지 거의 일주일 가까이 된다. 그간 내 눈에만 안 보였을 뿐, 저택의 일은 그대로 하고 있었을 텐데.

"데려온 첫날에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좀 늦은 시간이었지요."

"그, 그렇군요……."

"그보다 어제 조금 무리한 모양입니다. 아침에 약간 힘들어 보이시던데."

나는 굳이 어제의 일을 언급하는 그의 말에 입을 꼭 다물고 뺨을 붉혔다.

"훈련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해야겠군요. 당신도 중간에 힘이 들면, 조금 강경하게라도 좋으니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곧 식탁 위로 점심식사가 차려졌다.

에이반은 평소보다 여유롭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지금은 무엇을 배우는지, 어떤 공부가 가장 재미있는지, 혹시 같은 언어권 출신의 여자가 디베르타에 있었는지. 아직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보니 서로 여자들끼리 사적으로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수업 외에는 말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반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더욱 다른 여자들과 만날 일이 없어질 거라는 말을 했다.

"결혼?"

"아직은 먼 훗날의 일입니다만 당신은 바로 저와 결혼을 하게 될 겁니다. 아마 제가 당신의 종부가 될 테고, 남편들은 자유롭게 맞이하셔도 되지만 정치적 입장이 저와 반대인 사람은 조금 곤란하니……. 그래도 어느 정도 당신의 의지를 존중하겠습니다."

꼭 내가 결혼을 할 거라고 장담하듯 말하기에 약간 의아해서 되물었는데, 거기에 돌아온 대답에 나는 놀랐다. 청혼 치고는 굉장히 담백한 분위기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그, 그럼 날 데려온 이유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후원 제도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활용하는 치들도 있지만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당신을 데려 온 이상 끝까지 책임집니다. 하지만 제 나이가 아직 어려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혹시 그 전에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긴다면 먼저 남편으로 들여도 괜찮으니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혹시 그건 청혼?"

"청혼? 거절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사실 여성이 청혼을 거절하는 일은 이곳 엘리시온에서 거의 없었다. 관계의 우위가 여성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상대거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닌 이상은 여자에게 있어 남성으로부터의 청혼은 고마운 일이며 마다할 리 없는 행운이었다. 내 말뜻을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에이반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두 손이 오롯이 그의 손바닥에 감싸였다. 가슴이 설레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건 제가 남편으로서 내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까? 제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지요? 아스벨루스와의 사이에서 저를 고른 것은 당신입니다."

"아니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제가 당신께 남편으로서 잘해 줄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곧 변심을 할 것 같거나?"

모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날카롭게 내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에이반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여자 애인 상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는 여자 애인을 만든 적이 없다고 하니 아마 남자를 상대로 들은 얘기였을 것이다. 약간 자책하듯 에이반이 말했다.

"제가 그렇게 상냥한 성격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에 양 손이 붙잡힌 채로 에이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투명감 있는 보랏빛 홍채에 내 뺨이 달아올랐지만 무시했다. 에이반의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에이반 쪽이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에이반의 흰 뺨이 꽤나 붉어진 상태였다. 내 손을 감싸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사실은 저 말예요, 집에서, 그러니까 원래 살던 세계의 가족들에게서 그렇게 예쁨받지는 못했어요."

이 곳에 와서 아무에게도 티내지 않던, 심지어 대학에 진학한 다음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름대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집이었는데 여자아이라고 학비도 지원받지 못해서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대학을 다녔어요. 그 곳에서는 여자가 흔했고, 가치도 없었거든요. 적어도 제 부모님은 그랬어요."

"그런……."

결국 딸만 내리 넷을 낳았다. 마지막에는 포기한 모양이지만, 나나 언니들에게는 다행이었다. 남자 아이가 늦게나마 태어났고, 그 애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게 된다면 안 그래도 여자라고 이 말 저 말을 듣고 살던 상황에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제가 태어난 집이 유독 심한 곳이었다는 걸,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서 알았어요. 하지만 그 전까지 계속, 나는 여자니까 쓸모가 없다는 말을 듣고 살아서……. 에이반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필요로 해 주고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서 정말 좋았어요. 게다가 결혼 얘기까지 꺼낼 정도로 저를 중요하게 생각해 주셨다는 걸 알게 되어 기뻤어요."

사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고 지금도 몇 가지는 조금 어색했지만 이곳 엘리시온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처음으로 사람으로,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의무를 다하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이반은 항상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무뚝뚝한 남자보다 훨씬 여성에게 상냥하고 헌신적인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비록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께 금전적이거나 사회적인 권리를 지원해 주는 것 뿐이지만, 제가 반드시 조만간 좋은 남자를 당신께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에이반보다 멋있는 남자가 있을까요?"

반쯤 장난으로 한 소리였지만 에이반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칭찬을 들은 반응으로는 뭔가 애매했다.

그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꽈악 안았다. 에이반의 어중간하게 잠긴 목소리가 귀로 녹아들었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안아 주지 않고는 참지 못하겠습니다."

"아, 정말……."

"제가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특별히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달콤한 말도 잘 하지 못하고 여성을 기쁘게 하는 법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지도 못하지만, 당신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나중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에이반이 그렇게 예고했다. 달콤한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건 반어법인가? 이런 낯부끄러운 칭찬이나 감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구 쏟아냈으면서. 나는 에이반이 내 몸을 안은 채 도무지 놓고 싶어하지 않자 그의 가슴에 턱을 괴고 가만히 기다렸다.

"어, 어?"

에이반의 팔에 더욱 더 힘이 들어가며 그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나를 덥석 안아들었다. 절대로 놓지 않은 채 그가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윗층으로 갑시다."

그의 행동이 너무나도 정력적이라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에이반은 어제의 훈련으로 내가 좋아하는 곳을 그럭저럭 파악했다는 고백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디베르타에서는 후원자의 유무에 따른 차별이 없도록 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여생도를 대상으로 하는 후원 여부를 비밀로 부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동일 신분 사이에서의 위화감이었다. 나 역시 같은 수업을 듣는 여자들 중 누가 별도의 후원자가 있고 누가 디베르타에서 숙식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후원 제도는, 본래 갓 엘리시온에 도착한 여성에게 최대한 질 높은 에스트라를 꾸준히 부여하여 상위 계급 남성들만을 위한 강인하고 똑똑한 여성을 빠르게 양성해 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애초부터 상위 계급 남성의 사택을 숙소로 하여, 다른 상위 계급 남성들을 방문객으로 맞게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여성의 마력은 그 여성 자체가 지니는 마력적인 자질도 영향을 받지만 무엇보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에스트라의 질과 양이 가장 크게 고려되기 때문이다.

후원 자격이 있는 것은 제 1계급과 2계급의 청년기 남성. 혹은 3계급 중에서도 마력량이 일정 수치를 넘어선 군사계열 근무자였다. 즉 후원자는 다른 일반적인 남성들과는 질이 다른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후원하려면 달리 후원하는 여성이나 만나고 있는 여성이 일절 없어야만 하며 책임감 또한 요구되었다.

후원 도중에 여성을 상대로 강간이나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 자격을 잃게 되며 최소한의 책임기간인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후원을 포기할 경우에도 그 후 일정 기간 동안 다른 여자를 후원할 자격이 없어진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법인 것 같지만, 지금 와서는 그 용도가 변질되어 신분이 높은 남성이 단지 일정 기간 여성에게 질 좋은 숙식을 제공하고 편하게 성욕 해소를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즉 책임 기간인 1년 뒤에는 다시 디베르타로 되돌아오는 여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후원제가 폐지된다는 얘기가 한 10년 전부터 돌았지만, 제도의 순기능도 있어 쉽게 폐지할 수도 없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에이반은 나를 결혼까지 생각하며 데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검문이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퇴근하고 들어온 에이반이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루벤트 중령이 후원 제도를 악용하여 상습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성을 상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성 착취를 해 왔다고 합니다. 칼리온에서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꽤 걸리겠지만, 내부규정상으로도 벌금과 직위 하락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그 때,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싫다는 여자들을 붙잡고 억지로 강요하는 것 같은 남자들이 꽤 많았어요. 정말 그 사람 한 명만이 문제인가요?"

"갓 도착한 여성은 불안에 싸인 상태인데다 말이 통하지 않아 상대의 간단한 행동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에이반은 의아해하며 대꾸했다. 나는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입을 다물고 그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그래서 후원 중인 귀족들의 사택을 대상으로 감찰이 파견되어 피후원자인 여성에게 몇 가지 일들을 물어 보거나 생활 상태를 체크한다고 합니다. 내일부터요."

"그렇구나."

"제가 없을 때 찾아올 겁니다. 제 저택에서 감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어리석은 자가 당신께 무례하게 굴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반드시 상대의 이름과 직위명을 물어보십시오. 나중에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응, 알았어요."

"씻고 당신의 방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가슴을 감싸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반은 굳이 야한 짓을 하지 않아도 매일 밤 내가 자는 모습을 보다가 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같이 잠들고는 했다. 분명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평상복보다 노출이 적은 얇은 잠옷을 입었다. 잠옷만큼은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평범한 것으로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고 하늘하늘한 잠옷을, 에이반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펜던트를 옆에 내려놓고 아주 단순한 철자와 문장들이 적힌 책자를 읽고 있었는데, 에이반이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내 옆에 앉거나 눕는 대신 입구 주위에서 머뭇거렸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천천히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게 내밀었다.

정방형의 작은 상자였다. 검은 바탕에 황금 테두리가 그려진 상자로 주먹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았다. 무슨 일일까 생각해서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반이 눈을 내리깔며 상자를 내 손 위에 쥐여 주고 내 옆에 바로 붙어 앉았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한번 착용해 보십시오."

상자가 너무 화려해서 안에 무언가 따로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수줍어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공단 쿠션 사이에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은색 반지가 두 개 들어있었다. 하나는 컸고 하나는 조금 작았다. 작은 쪽의 안쪽 부분에 아마도 그의 이름 철자일 글씨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쪽 손에 무엇을 끼워야 할 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더니 에이반이 작은 쪽의 반지를 꺼내 내 중지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자신도 큰 쪽의 반지를 똑같은 위치에 착용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사이즈가 애매하다고 느꼈던 반지의 크기가 손가락에 꼭 맞게 줄어들었다. 특이한 금속이거나 마법을 쓴 것 같았다. 반지에 박힌 다색의 보석이 무척 신기해서 손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쳐다보았다.

"이 태양석이 당신이고, 옆의 작은 위성이 저."

"여기 파란 보석이 에이반이라고요?"

짙은 파란색은 자세히 불에 비추어 보니 엷은 보랏빛도 띠고 있었다. 에이반의 눈 색과 비슷했다. 그는 낮게 웃으며 더욱 더 내게 가까이 붙었다. 에이반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고, 그의 숨결이 쇄골 가까이 닿았다.

"결혼 반지입니다. 5계급 여성은 일정 금액 이상의 장신구 착용은 금지지만 결혼 예물일 때만큼은 예외가 됩니다. 제가 알아 봤더니 그렇다고 합니다. 디베르타 안에서는 역시 정식 결혼 전까지는 착용하지 못하겠지만 바깥에서는 이걸 끼고 다니셔도 됩니다."

"으흠……."

말하면서 점점 더 그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나는 설레어 짧고 빠르게 호흡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묶지 않은 매끄럽고 긴 밤빛 머리칼이 스르르 그의 널찍한 어깨를 거쳐 아래로 흘렀다. 그가 직접 끼워 준 반지를 착용한 손으로 에이반의 팔목을 더듬다가, 서서히 가슴까지 옮겨 갔다. 그에게도 가슴에 닿은 내 손바닥 사이로 반지의 조금 단단한 감촉이 느껴질 것이다.

"저어, 에이반."

그가 도저히 비킬 것 같지 않은 기세로 나를 주시했다.

"반지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그것도 좋지만 약간 틀린 답입니다."

듣고 싶은 정답이 따로 있는 걸까? 그 말을 해 주기 전까지는 비키지도 않고, 이 이상 가는 행동도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에이반의 허벅지를 보채듯이 발목으로 사각사각 비볐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입술도 살짝 벌렸다.

정답이 뭘까? 결혼 반지라고 했으니 그와 관련된 대답이 듣고 싶은 걸 텐데. 사실 그다지 오래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허락했다.

"에이반, 청혼 받아서 기뻐요. 당신과 결혼해 줄게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오늘 밤도 야한 섹스 해 줄게요. 그러고 싶어서 지금 티 내는 거죠?"

"그건……, 완전히 정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 정답까지."

켜 두었던 조명이 깜박이며 꺼졌다. 에이반의 크고 뜨거운 몸이 내 위를 덮쳤다. 나는 그의 가운 안으로 손바닥을 대고 에이반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치만 한 번만이에요? 내일 늦잠 자기 싫으니까……, 앗, 에이반……, 핫, 아앗."

…….

결혼 반지는 백금과 다색의 다이아몬드가 붙어 있어 대단히 고가의 물품이었다. 일단 착용하면 분실 방지의 마법이 걸려 있어 잃어버리지 않겠지만 디베르타에서는 이걸 착용하고 다닐 수 없었다.

약혼 반지라고 하면 결혼 반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 평민에 속하는 5계급 여성도 비싼 것을 하고 다닐 수 있었다. 한 남자당 한 번밖에 못 쓰는 편법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의 일도 디베르타에서는 엄격하게 관리된다. 덕분에 디베르타에서 돌아오자마자 소년종에게서 반지 케이스를 받아 이걸 착용하는 일이 습관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반지를 받아 중지손가락에 끼웠다. 에이반이 중지손가락에 끼워 주었기 때문에 이 반지의 자리는 중지였다. 여성은 남편 숫자만큼의 결혼 반지를 착용할 수 있는데, 남편과 같은 반지를, 같은 자리에 끼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히 약지손가락이 신성하다거나 하는 의미는 이곳 엘리시온에는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중지나 엄지가 가장 크거나 긴 손가락으로 여기에 남들에게 가장 잘 보이도록 종부의 반지를 착용한다.

"유이나님, 지난 번에 주문했던 새 물감과 화구들이 방에 옮겨져 있답니다."

소년종인 베르타가 졸래졸래 마중을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별로 그림 기분이 아닌데. 귀찮으니 나중에 확인해야겠다고 미뤘다. 집사도 물론이고 에이반도 내 취미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가끔 연습하던 그림을 보고 칭찬할 뿐이었다. 미완성인 그림, 완성한 그림, 망친 그림, 잘 된 그림, 구분하지 않고 비슷한 칭찬을 해서 별로 그의 말이 믿기지는 않았다. 완전히 입 발린 말일 뿐이었다.

예술에 별 흥미가 없는 그에게 진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일을 얼마 전에 알았다. 나는 연습용 종이와 펜을 가져 오라고 베르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어차피 오늘도 늦게 퇴근할 에이반을 위해 거의 쪽지나 다름없는 짧은 편지를 쓸 생각이다. 글자 공부도 할 겸 그가 좋아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편지 윗부분에 항상 쓰던 단어를 썼다. 에이반, 사랑해요. 늘 쓰는 단어인데 늘 똑같이 좋아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쓰지? 가장 사랑하는…….

여기까지 쓰던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년종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짧게 말했다.

"응, 들어와."

짤막한 단어는 펜던트 없이도 가능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딱딱한 표정의 집사였다. 나는 펜던트를 집어올렸다. 집사가 서둘러 보고했다.

"감찰관이 찾아왔습니다."

"감찰관?"

"어쩔 수 없이 잠시 아래층으로……. 어차피 금방 끝날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온다고 했었지. 에이반에게 들은 적 있다. 나는 디베르타의 제복 위에 집에서 늘 입는 대로 얇은 원피스 한 겹을 걸친 채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반쯤 계단을 내려왔을 때 현관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손님은 짧게 삐친 은회색 머리카락에 정식 제복 차림을 한 남자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계단 위에 선 나를 직시했다.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내가 이곳에 온 첫날, 에이반과 나를 두고 싸웠던 청년이었다.

대단히 미남이었으나 말씨가 거칠고 에이반에게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군인. 비슷한 계급일 것이다. 집사가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감찰관님. 응접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고 떨렸다. 눈매가 선명한 탓인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집사가 들으란 듯 헛기침을 했다.

"사람을 초면에 그렇게 노려보는 것은 무례한 행위입니다, 소위. 아르트리어 가에서는 국가의 감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터이니, 감찰관께서도 일을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소위라고 부른 걸 보면 집사도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교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택의 응접실로 안내된 뒤 내가 주인의 자리에, 아스벨이 손님의 자리에 앉았다. 집사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뒤에 감시하듯 버티고 섰다. 은발 남자는 집사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대상 외의 인간은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나? 거기 꼬마도!"

"핫……!"

시중을 들러 따라 들어왔던 베르타가 움찔하며 은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집사는 의연하게 서서 고개를 까닥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집사도 소년종도 다 나가고 문이 닫히자 나는 다시 그 은발 감찰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의 죄를 파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저택 주인의 부정을 감찰하기 위해 온 것일 텐데 왠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에이반은 잘못한 부분이 없으니 괜찮을 거야…….'

더불어 이 남자도 지금은 감찰원의 임무를 띠고 온 것이니 내게 함부로 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시선으로 압박을 주는 것일까. 아까부터 그 뜨거운 눈길을 받고 있자니 가만히 앉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이윽고 입을 뗐다.

"이름이 뭐지?"

"유이나……, 에요. 지금 에이반 아르트리어의 저택에서 후원을 받고 있고……."

간단한 소개를 하고자 했으나 남자가 손을 들어 내 얘기를 끊었다.

"그 새끼 이름은 안 말해도 돼. 그리고?"

그리고 뭐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몰라서 되물었더니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직시하며 말했다.

"나이, 출신, 취미나 습관, 아니면 좋아하는 것."

"에엑……."

그렇게 자세히 말해야 하는 건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말해야 한다니 대충이나마 자기 소개를 했다.

"이곳 나이로 아직은 19살……. 취미는 그림 그리기에요. 에이반이 저택에 취미방을 만들어 주어서 지금은 가끔 거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 이라고 하면 무얼 말씀하시는지."

"내가."

남자가 이를 악물고 탁자를 내리쳤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이곳 감찰 담당이 되려고 얼마나 기를 썼는지, 알아?"

"네? 모, 몰라요."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그 새끼 얘기나 듣고 있어야 해? 네 얘기를 하란 말야!"

터무니없는 그의 주장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목소리가 커서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만 그보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컸다. 에이반의 조사를 하러 왔으면서 에이반의 얘기가 듣기 싫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당신은 이곳 저택의 감찰을 위해 온 것이 아니었나요?"

"그래, 맞아. 그리고 에이반 새끼의 손아귀에서 널 구출해 내려고 왔지. 애초에, 왜 내가 아닌 그 놈을 선택한 거지?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도대체 어디가? 무엇이 불만이었어?"

기세가 험악해서 나는 깜짝 놀라 그냥 그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손마디로 탁자를 지그시 짓누르며 나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가 내게 아직 미련이 있다는 것은 알 것 같다. 받아줄 수 없었기에 머뭇거리며 거절의 말을 했다.

"죄송해요. 난폭한 남자는 싫어요."

"……뭐?"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가 되물었다. 남자는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난폭해서 싫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나는……! 그러니까, 적어도 에이반 새끼보다는……!"

해명하려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팔을 감싸쥔 채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에이반은 제 앞에서 한 번도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목소리만 작게 하면 돼?"

"네? 뭐라고요?"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그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음량을 높였다.

"목소리만, 작게 하면 되냐고."

훨씬 나았다. 조금 얌전해진 은발의 남자는 전에 비해 덜 위압적이었고 미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그에게 넌지시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저는 에이반과 사귀고 있기 때문에 당신과는 그럴 수 없어요. 미안해요."

"아, 그래? 그 새끼가 나랑은 만나지 말라고 했어?"

구체적으로 그런 뜻을 전한 적은 없다. 굳이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에이반과 이 남자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 날의 일로 충분히 눈치채고 있다. 나는 거짓말로 대답했다.

"네. 그랬어요."

"유감이네."

문득 상대가 내 말을 받아들여 준 건가 싶어서 약간 안도했다. 은발의 남자는 화려한 외모가 돋보이도록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순간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가 말했다.

"후원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교섭을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 행위. 그런 끔찍한 일이 이 저택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에이반 아르트리어 대령도 비로소 그 과분한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겠군."

"……네, 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뜻밖에도 라이벌의 약점을 잡은 일에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 남자의 모든 것은 시궁창에 처박히겠지만, 너 하나만큼은 내가 건져내 줄 테니까."

"잠깐만요!"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에이반은 그런 말 안 했어요!"

"괜찮다고. 보복이 두려워서 증언을 번복할 필요는 없어. 그 자식이 감히 보복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내가 제대로 짓밟아 줄 수 있거든."

그는 이제 얘기는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깐……!"

다급해져서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남자는 순순히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의도한 듯한 행동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곧장 달콤한 제안을 해 왔다.

"그런가, 그 새끼가 없어지면 너는 지금 당장 머무를 곳이 없어 곤란해지겠지. 난 그 놈과 달리 자비가 없지는 않아.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이번 일을 완전히 묻어 줄 수도 있어."

미심쩍게 그를 쳐다보았다.

"알고 있나? 내 목적은 너야. 에이반 따위가 아니라."

그 남자는 다시 저벅저벅 걸어 와서 소파에 앉더니 내 몸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끌려가기 싫어 약간 반항했다. 남자는 저항하는 나를 옆에 앉히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사랑, 나의 천사. 그 때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네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알고 있나?"

"모, 몰라요……."

그는 살며시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마치 한숨과도 같이 속삭였다. 갑작스러운 고백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와 나는 그 때, 내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어쩌다 아주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 때의 일은 완전히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진 채였다. 다시 남자가 그 날의 얘기를 꺼내 상기시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이반의 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대단히 미남이었다. 에이반도 무척 잘생기긴 했지만 이 은발의 남자는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에이반의 검보랏빛 긴 머리카락 대신 짧게 자른 남자다운 은회색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그의 이마와 귀 윗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은회색 눈썹과 잘 어울리는 엷은 청색의 눈동자가 이국적이었다. 에이반의 것도 보랏빛이 돌아 신기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껏 이런 옅은 눈동자 색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머리색과 피부색간 색채의 대비 때문인지 에이반의 창백한 피부와 달리 그 남자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건강하고 혈색이 돌아 보였으며 그것이 이목구비의 세심한 선과 어우러지자 불그스름한 살갗 위에 강렬한 색기까지 엿보인다. 에이반의 정적이자 내게 소리지르고 협박까지 한 나쁜 사람인데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뜨겁고도 올곧아서, 그런 남자의 예상치도 못했던 고백을 받고, 나도 모르게 설레는 가슴에 도리어 죄책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 때 한 순간 눈이 마주쳤었지. 기억나나?"

"……."

그 남자는 귀가 달린 특이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물론 기억에 남았다. 나는 분명한 대답 대신 기억 여부를 얼버무렸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는지 내게 빠질 듯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이반 아르트리어와 달리 난 아직 여자를 모르는 몸이야."

"그, 그래서요?"

나는 어색하게 떨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너와 처음을 함께 보내고 싶어. 네게 내 첫 마력을 바치고 싶어."

난처할 뿐이라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말했다.

"그러고 나면 너와 나는 서로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겠지. 네가 부탁한다면,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약속할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내 안에서는 난폭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지켜 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한 번만이에요."

어차피 누가 됐든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에이반은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나를 다른 남자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있진 않지만 디베르타에서는 벌써 서너 명의 상대를 둔 여자들도 많았다.

여러모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승낙했더니 남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약간 찡그린 잘생긴 얼굴이 수줍은 듯 발갛게 변하자 전에 비해 무섭지가 않았다. 남자는 내 손을 붙잡았다. 붙잡힌 손등과 맞닿은 살갗 너머로 자잘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스벨이라고 불러."

"아스벨."

"응."

내 옆에 붙어 앉은 그의 하반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여기서 당장 일을 치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 편이 나았다. 혹시나 그가 거칠게 나올 경우 그냥 비명을 지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줄 것이다.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을 쳐내며 경고했다.

"도중이라도 난폭하게 하면 소리 지를 거에요."

"알았어."

아스벨은 살풋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는 먼저 옷부터 벗으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허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스벨은 내 몸을 와락 끌어안고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그를 밀어내려고 어깨에 힘을 힘껏 주었다. 아스벨은 내가 밀어 누르는 것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꿈쩍도 않았다. 키스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는 서툴게 입술을 부딪혀와 혀부터 밀어넣었다.

너무 강한 힘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덜컥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입술을 겹치는 것 외에 별달리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체취가 가까이서 너무 뜨겁게 느껴져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열에 달아 있어도 그의 살결에서 풋풋한 향내가 났다. 키스의 맛에 혼자 심취해 있던 아스벨이 본격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키스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보다 능숙하다. 아스벨이 연한 잿빛 속눈썹을 깜박이며 마지막으로 입 안에 고인 침을 빨아내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 혀를 거둔 뒤에도 입술을 맞대고 뗄 생각을 않았다. 아스벨이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뗀 뒤 처음으로 말했다.

"어때, 괜찮았지?"

내가 약간 차갑게 그를 응시하자 아스벨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 많이 서툴렀나? 그게, 실전은 처음이라."

"……특별히 서툴러서 싫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까처럼 묻지도 않고 아무거나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방금처럼 세게 잡으시면 무서워요."

"그게 그렇게 셌나? 아팠어?"

그는 당황한 채 내 안색을 살폈다.

"알아들었으면 됐어요."

토라진 얼굴로 마지못해 용서하는 듯 말했지만, 나는 상대가 온전히 내 안색만을 살피며 쩔쩔매는 모습에 묘한 안심을 느꼈다. 이 세계의 법칙 중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남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 상대 여자에게 '선택'을 받고 싶어한다. 마음에 들고 싶어 안달한다. 성비가 심하게 맞지 않는 상황에서 당연한 현상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 원래 내 세계에선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겠지."

에이반도 미남이었지만 비교적 남자다운 외모였다면 아스벨은 딱 여자들 취향, 그러니까 한창 때의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날렵한 인상이었다.

일단 비율상으로 따져 봐도 잘생긴 남자는 이곳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성비가 그에 곱해져 아무리 못생긴 남자들이 많아도 여자들은 연인 중 두세 명 이상은 꼭 잘생긴 남자를 둘 수 있었다. 나는 원피스의 앞을 풀어헤이고 가슴을 가리고 있던 속옷을 위로 끌어올렸다. 가슴이 바깥으로 드러나자 싸한 공기가 닿아 유두 끝이 민감하게 섰다.

만지거나 핥아도 된다고 꺼내 놓았는데 아스벨은 한참동안이나 손도 대지 않고 가슴을 감상하기만 했다. 기억에 하나하나 새겨놓겠다는 듯 집요한 그 시선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가, 형태가 별로라던가, 유두 색이나 유륜의 크기가 생각과 달랐다던가,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에게 존재치 않는 기관에 대한 찬양과 숭배의 감정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나는 일부러 가슴을 들어 남자의 입에 직접 물려주기까지 했다. 입술에 닿는 것을 허락받자 그는 격렬하게 유두를 삼키고 쪽쪽 빨아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야한 신음을 흘리며 남자의 머리에 기댔다. 이렇게 뜨겁고 열렬하게 빨아 주다니, 기대 이상이었다.

"하으응."

그의 입술에 꽉 물린 유두를 빼냈다. 가슴의 모양이 이상해질 정도까지 집요하게 흡입하고 있어 빼냈는데도 빨려 먹히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안 그래도 흥분해서 커진 유두가 심하게 빨아먹혀 반질반질하고 새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평상시보다 더 부은 느낌이다. 아스벨의 입술이 반대쪽 가슴으로 달라붙었다. 신음이 바깥까지 모두 새어나갈 텐데 개의치 않고 비명을 질렀다. 허리를 뒤로 휘며 가슴 애무로 인한 가벼운 오르가즘에 도달했다.

에이반과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닌데……, 아래가 남자의 다음 행위를 안달하며 미끈하게 젖어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래까지 모두 벗고 있었다면 바로 삽입했을 테지만 아스벨의 아래쪽은 벗기기 복잡한 벨트와 단추들로 층층이 감싸여 있었다.

소파에 옆으로 몸을 걸치고 아스벨의 어깨에 다리를 턱하니 올렸다. 팬티의 끈을 풀고 다리 사이를 벌려 보이며 그에게 부탁했다.

"여기 빨아주세요."

아스벨이 다리 사이에 그 잘생긴 얼굴을 묻고 쭙쭙 소리가 들리도록 빨아댔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아스벨이 핥아 주는 감촉을 즐기며 허벅지를 그의 뺨에 문질렀다. 그는 허벅지가 양 귀에 닿을 때마다 더욱 더 격렬하게 코와 입술을 다리 사이 균열로 밀어붙여 비볐다. 아스벨의 목을 꽉 조르며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절정이 멎은 뒤에도 계속해서 흐르는 애액을 핥아올렸다. 반사적으로 목을 조른 것을 알고 금방 다리의 힘을 풀었다. 아스벨은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흑, 아스벨……, 이제, 이제 넣어도 돼요."

"나도, 네가 너무 예뻐서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네."

아스벨은 항상 입는 옷이라서 그런지 예상보다 재빠르고 능숙하게 여러 개의 벨트가 교차되어 묶인 자신의 하의를 벗어내렸다. 그가 하의를 내리자 큰 몽둥이같은 페니스가 거의 지면과 평행하게 솟아올라 앞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스벨의 물건은 에이반과는 모양이 달랐다. 직선에 가깝게 반듯한 에이반의 페니스보다 좀 더 굴곡이 눈에 띄었다. 이런 형태는 전반적으로 느낌이 괜찮은 직선형과 달리 특정한 체위에서는 더 느끼고 어떤 체위에서는 덜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체위를 그다지 다양하게 시도해 본 것은 아니라 잘 모르겠다.

마치 만들어진 것 같은 형식적인 말을 하면서도 그의 숨은 더 이상 흐트러질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적이었고 눈은 열렬한 감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예의 같은 것은 모르는 남자라고 여겼는데 기꺼이 겉치레의 말을 하면서 다소곳하게 무릎 꿇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아스벨은 단단하게 솟은 동정 페니스의 밑둥을 잡고 내 아래로 비벼 입구를 찾았다.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정확한 입구로 그의 물건이 맞닿았을 때 아스벨의 허리를 다리로 꼬아 끌어당겼다. 두껍고 열기 어린 쾌감 덩어리가 아래로 들어오자 조금씩 이성이 날아갔다.

아스벨은 신음을 감추지 않고 헐떡이며 내 위로 올라타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색기 어린 신음과 내 비명이 바깥으로 마구 새어나갔다. 무언가를 핥는 것도 아닌데 아스벨의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너무 느껴버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스벨이 허리를 깊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나도 소리를 높였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폐활량이 한계까지 밀어붙여졌다.

아스벨은 사정을 참는 것 같았다. 거친 욕설과 함께 소파의 쿠션 자락을 찢어져라 붙잡았다. 나는 그의 아래에서 눈을 감은 채 느끼고 있다가 아스벨의 일그러진 표정을 올려다보고 약간 놀랐다. 그의 허리를 안고 부탁했다.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저, 굳이 그렇게 안 참아도."

"아니……, 네가 느끼는 얼굴을 보고 싶어."

아스벨이 간신히 그렇게 말하고 나를 가슴에 와락 안았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아스벨의 팔을 들어 내 허리를 안게 했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그에게 부탁했다.

"그럼, 그럼 여기 안쪽을 안아 올려……, 아흐응!!"

가장 느끼는 부분이 정면으로 그의 페니스 끝에 긁혔다. 나는 한순간 정신이 날아가며 가볍게 절정의 문턱에 스치고 말았다. 아스벨의 물건은 모양 덕에 유독 민감한 그곳에 더 잘 닿는다. 집중해서 문지르는 수준이었다.

나는 흐끅대는 소리를 내다가 그가 아예 허리를 안아 올리고 그 곳을 노려 빠르게 박아대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명을 지르며 아스벨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그는 숨을 참다가 마지막 신음과 함께 첫 정액을 사정했다. 안이 절정으로 경련하는 내내 나는 아스벨의 몸을 안고 놓지 못했다. 떨림이 멎은 것은 배가 사정없이 부푼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물 젖은 시선을 내려 아직 홀쭉한 배를 바라보았다. 기분상 엄청나게 큰 것이 뱃속에 가득한 느낌이 들었는데, 정작 변화는 없어 보였다. 나는 너무 큰 마력 때문에 속이 거북했다. 아스벨은 완전히 진이 빠진 얼굴로 내 머리 위에 팔을 끼워넣었다.

반강제로 그의 팔베게를 베고 계속해서 배를 문질렀다. 이걸 전부 소화시키기 위해 한 숨 자고 싶은데 그의 눈치가 보였다. 아스벨은 옆으로 누워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 내가 많이 별로였나?"

"네에?"

"그게, 내가 처음이고 하니 그렇게까지 만족을 시켜주지 못한 게 아닌가 하고……. 끝나자마자 아무 말도 없었잖아."

첫 경험 직후인지 그는 조금 불안정해 보였다. 하긴 이 곳에서는 여자의 첫경험이 그다지 의미 없는 반면 남자에게는 첫 상대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나름대로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금 힘들 뿐이에요. 게다가 마력을 너무 많이 받아서……, 쉬고 싶네요."

"그래? 혹시 침실로 바래다 줘도 될까?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아스벨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으나 나는 지치고 늘어져서 만사가 귀찮기 짝이 없었다. 방금의 열기 따위는 간 곳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재차 확인을 구했다.

"그 약속은 분명히 지켜 주시는 거죠?"

그가 일을 마무리짓고 떠난 직후 집사가 덮을 것을 가져오며 넌지시 내게 말했다.

"에이반님을 위해 다수의 남성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만, 유이나님, 카스칼 소령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역시 엘리시온의 인간답게 집사는 단지 저택을 방문한 감찰관과 응접실에서 성교를 한 것 자체를 흠잡지는 않았다.

"유이나님의 사생활에 관여할 의도는 아닙니다만, 상대가 카스칼 소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 일은 에이반님께 보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이반이 화 낼까요?"

나는 무기력하게 소파에 늘어져서 그에게 물었다. 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분을 위해서였다고 대답한다면 화를 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에이반이 돌아오기 직전까지 잤다.

에이반은 내가 소년종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돌아왔다. 피곤함이 가셨더니 이번에는 짜증과 함께 우울함이 밀려왔다. 두 명의 소년종들에게 완전히 몸을 내맡기고 서서 물기를 닦도록 했다. 에이반이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집사에게 아직 보고를 받기도 전에 들어왔는지, 오늘따라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의 손에는 납작한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전에도 사 왔던 설탕 과자였다.

레오는 에이반이 들어온 것을 보고 서둘러 내게 가운을 건네 주었다. 나는 기운 없이 가운을 힐끔 바라보고 천천히 들어올려 몸에 걸쳤다. 베르타는 손발에 발라 줄 향유를 가지고 왔고, 레오는 머리카락을 말릴 수건 몇 장을 들어올렸다. 에이반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곁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됐어. 둘 다 가 봐도 돼."

"유이나?"

에이반이 머리카락의 물기 정도는 닦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나는 둘을 단호하게 방에서 내보냈다. 나는 에이반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문을 닫고, 그에게 물었다.

"아스벨이라는 남자와 무슨 사이에요?"

"아스벨루스 디 카스칼?"

에이반이 의문스럽게 중얼거리더니 순간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맞을 것이다. 집사가 그를 카스칼 소령이라고 불렀다.

"오늘 감찰관으로 그 남자가 왔어요."

"감찰관이라면 피후원자에 대한 조사 감찰관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장교 이상급 인물이 왕도 내의 잡무에 배치될 만큼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그 남자가 감찰관으로 자원한 것이라면, 분명 무슨 목적이……. 설마?"

에이반은 당혹스러워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에이반에게 그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내가 말실수를 한 것도, 그걸로 아스벨이 꼬투리를 잡아 나를 협박한 것도.

"그래서 자기와 한 번이라도 동침해 주면 비밀로 해 주겠다고……."

"그 놈……, 아니, 그 남자가 그랬습니까?"

그는 인상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에이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다. 내가 입술을 짓씹으며 눈길을 피하자 에이반도 자기 표정을 자각했는지 넓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정도 일은, 설사 실제로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성적 결정권에 대한 간섭으로 간주되지도 않는 수준이고, 협박의 사유가 될 만한 사실도 아닙니다. 그 자는……, 당신이 법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서 터무니없는 것을 조건으로 당신을 협박한 겁니다……!"

"정말인가요? 처벌 대상이 아니에요? 그럼 에이반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거죠?"

나는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에이반이 나를 거칠게 덥석 끌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설사 그 남자가 내 안위를 빌미로 그런 협박을 한다고 해도!"

에이반의 몸이 내게서 다시 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그가 내게 부탁했다.

"당신이 하고 싶지 않다면 분명히 거절하십시오. 앞으로는 꼭. 아시겠습니까?"

"……."

"그 정도 일도 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올라와 있겠습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의 몸만 지키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에이반이 화를 내지 않을 거라는 집사의 추측은 틀렸다. 에이반은 화를 참고 있었다. 그 상태로 어떻게든 표정을 가다듬으려는 노력을 하며 내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에이반이 약간의 자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내가 상위 계급의 여성을 상대로 폭언을 들은 이후부터 쭉 그랬다. 에이반은 나를 한 차례 꼭 끌어안아 주고 나서 젖은 머리카락을 직접 말려 주었다. 마법으로 금방 물기를 말려 준 것이다. 약간의 습기는 남아 있었지만 수건 몇 개를 연이어 쓰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축축한 가운을 갈아입고 나서 우유와 설탕 과자로 기분을 마저 달랬다.

에이반은 내가 다시 기분이 평이해진 것 같자 옆에 붙어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가 다른 짓은 하지 않았습니까? 거칠게 대하거나 다치게 하지는?"

"으으응."

에이반이 팔로 내 허리를 감싸자 나는 더욱 더 에이반의 팔 아래로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것 말고 별 일은 없었어요. 한 번 하고 나서 금방 돌아가 주었어요. 그보다 조금 피곤해서……, 하암."

"……다친 곳이 없는지, 제가 확인해 봐도 됩니까? 당신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도 모르는 새 상처가 났을 수도 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위에 엎드렸다. 에이반은 가운을 벗기고 살갗 위를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흉터가 남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특별히 아픈 곳은……, 유이나? 유이나?"

에이반이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기분이 풀려 그만 잠들어 버렸다.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다니 이상하다. 분명히 낮에 몇 시간 이상 잔 것 같은데. 에이반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 주었다. 한도 끝도 없이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미열이 있는 채로 일어났다. 휴일이라서 다행이었다. 에이반은 분명히 아스벨루스가 어제 한 짓 때문일 거라며 이를 갈았다. 그는 협박에 권력 남용죄까지 얹어 아스벨을 고발하려고 했지만 명확한 범죄의도가 불분명한데다 그의 신분 때문에 법적인 처벌은 힘들 거라고 했다. 대신 그는 아스벨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다짐했다.

너무 자서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다른 병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억지로 죽을 먹고 나니 속은 좀 가라앉았다. 그러던 나는 문득 뱃속에서 낯선 무언가가 아까부터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출근을 위해 제복을 차려입은 에이반이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내 뒤로 다가와 포옹을 해 주었다. 평소라면 조금 놀랐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에이반이 나를 안은 팔을 풀려고 하자 오히려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그가 귀엽다는 듯 살짝 웃으며 다시 나를 꽉 한 번 안아주었다.

"제가 떨어지는 게 싫습니까? 하지만 현재 유일한 종부로서 당신을 먹여 살리려면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으음, 조금만 더요."

"5분만입니다."

가까이 맞닿은 피부로 확인할 수 있는 에이반 고유의 마력은 마치 단단한 강철을 녹인 물과 같았다. 빈틈이 없이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그 사이에 군데군데 흰 얼룩 같은 것이 내 마력이었다. 그의 것과 내 것이 섞여 있는 것이다.

성관계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며칠 전인데도 선명하게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디베르타에서 계속 배우면서도 애매모호하게 여기던 것인데 실제로 보니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뱃속에는 꽉 뭉쳐진 진공구 같은 것이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어제 만났던 아스벨의 마력일 것이다. 아주 이질적인 그것은 내 몸에 녹아들지 않고 불편하게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아마 아직 정화되지 않은 에스트라 마력이겠지.'

여성의 몸이 어떠한 원리로 남성의 마력을 전환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만한 분량은 결코 쉽게 소화하기 힘들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받아내 본 적 없는 다른 종류의 마력이라 더욱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며칠 내로 흡수되지 않은 마력은 모두 날아가 버린다고 하지만 이걸 날려 보내기는 아깝다. 나는 에이반의 품에서 뺨을 비비며 말했다.

"나 마력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어깨를 감싼 그의 몸이 약간 흠칫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그 자식, 아니, 그 남자에게 마력을 받은 뒤에?"

감추고 있던 것 같지만 그것은 질투였다. 에이반은 한순간 타인에 대한 질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가 다시 표정을 금세 가다듬었다.

"뭐……, 정말로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겠지요. 오늘 푹 쉬고, 내일 디베르타에 가서 한 번 테스트를 해 보십시오."

애써 시큰둥하게 반응했으나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불안하게 그를 배웅했다.

"성인기 남성의 정을 받은 여성은 일정 확률로 알을 배게 되는데, 임신 기간은 대략 45일 안팎이며 중복잉태도 가능합니다. 최대 4개까지 중복해서 알을 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알은 평균 45일가량에 걸쳐 만들어지며 마력이 높을수록 알을 만드는 데는 더 오래 걸린답니다. 알이 만들어지는 중에는 모체의 심리, 건강 상태가 상당히 중요하지요. 알껍질의 두께가 그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알껍질이 얇을 경우 낳은 뒤에도 알이 쉽게 깨지거나 병들 수 있기 때문에 임신한 여성을 향한 폭력이나 부양 미흡 등이 엄중 처벌을 받는 겁니다."

오늘은 임신과 알을 낳는 과정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다.

임신은 중요한 일이었다. 엘리시온은 사형수도 그냥 죽이지 않고 노예로 부릴 정도로 인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디베르타 내에서 여자들이 서로 싸우더라도, 절대 서로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수시로 받는다. 이 같은 몸싸움을 사전에 말리는 것도 가드의 역할 중 하나였다.

낳은 직후의 알은 대략 직경이 4-5cm정도에 달한다. 그 크기가 많이 작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칼리온에서는 아예 가임 상태의 모든 여성을 보호대상으로 지정했다.

알을 낳는 데는 모체에 거의 부담이 가지 않는다. 낳을 시기의 알은 상당히 작은데다 표면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래도 낳은 직후의 감염 등에는 크게 주의해야 하며, 낳게 되면 즉시 부드러운 천에 감싸서 반드시 하루 이내에 남편에게 알을 맡기거나 보육원에 보내야만 한다. 남성은 소년기 시절에 알을 돌보는 법에 대해 필수적인 교육을 받기 때문에 알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알은 모체 밖으로 나온 뒤에도 주위의 마력을 흡수해 가며 계속해서 천천히 성장하는데, 남성이 알을 보살피는 기간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5년 이상. 더 튼튼하고 마력이 강한 아이일수록 알에서 보내는 기간이 길다고 한다. 엘리시온의 인간은 알에서 태어난 순간을 생일로 친다.

보통 남편 하나를 상대로 서너 개 정도 되는 알을 낳아주는 것을 권장하는 편. 다만 같은 남성의 씨를 연이어 받을 경우 가임 확률이 점차 떨어지게 되어 있다. 많은 남편을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육아에 관해서는 세금 감면의 혜택이 있다고 한다. 또한 성인기 남성이 복용할 수 있는 피임약의 경우, 해당 남성이 알 혹은 영아기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 기간 동안에만 처방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알이나 아기를 둘 한번에 돌보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겠지. 우리 여자들과는 그다지 상관 없는 얘기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줄리아를 찾아가 마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는 살짝 놀랐다.

"벌써? 당신은 얼마 전에 엘리시온에 온 참이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약간 못마땅한 것 같았다.

"유이나 양. 처음부터 너무 성교섭을 무리해서 시도한 것은 아닌가요?"

"그, 그렇지는 않아요……."

"뭐 특별히 당신의 감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좋아요. 약간 이르지만 당신에게는 먼저 간단한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도록 하죠."

마력을 일찍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만큼 적극적으로 남자를 상대했다는 의미가 되었기에 나는 약간 민망해졌다. 그녀는 그 점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디베르타에서 개인의 후원 여부가 알려지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마력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보통 귀족들을 상대하는 여성의 마력이 빠르게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분간의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마력 감지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마법을 직접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전히 꽤 시간이 걸릴 거에요. 그 전까지 테크닉을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을 두세 가지 알려드리지요."

첫 번째로는 비큐스, 즉 마력을 통해 작동하는 도구에 적절한 마력 신호를 주어 동작과 정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마력 사용법이었다. 내가 가진 통역 펜던트는 로커스라서 착용을 조건으로 상시 작동한다. 이 연습을 하려면 어떤 종류든간에 비큐스 도구가 필요했다.

두 번째로는 물건이나 사람을 띄우는 텔레키네시스, 즉 부유 마법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깃털이나 실 조각처럼 가벼운 물건으로 연습해 봐야 한다. 무거울수록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들기 때문에 사람을 띄울 수 있는 것은 2계급 정도가 아니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아케인 포스. 마력 진동의 기초로서 가연성이 강한 심지나 잿더미에 가벼운 에너지 마찰을 일으켜 불꽃을 만드는 연습법이었다. 줄리아의 설명은 짧았고 짧은 설명조차 나는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가르쳐 준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에게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몇 번 실습해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저택에 돌아온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소년종도 집사도 아니었다. 선물 상자와 꽃다발이었다. 공교롭게도 딱 내가 저택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둘을 양 손에 하나씩 든 전령이 찾아왔다. 집사는 무표정하게 어디에서 보내 온 건지 묻고는 하인을 향해 옮겨 놓으라고 지시했다.

나에게 온 선물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왔더니 상자와 꽃이 침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잠시 경계하듯 선물 상자를 쳐다보다가 레오에게 시켜 그것을 뜯어보도록 했다.

엷은 아이보리색의 포장 리본을 풀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안에는 베일과 프릴 꽃으로 만들어진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고위 계급 여성들이 밖에서 간혹 달고 다니는 장식 중 하나였다. 꽃다발은 큰 진분홍빛 장미와 그보다 작은 희고 노란 꽃들로 풍성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머리장식과 함께 들어 있던 편지를 열어 보았다. 아스벨루스 디 카스칼. 풀 네임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편지지의 상단에는 짧고 단정한 글씨체로 아스벨 보냄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내용은 짤막했다. 어제의 협박에 대해서 사죄한다. 사죄의 뜻으로 모자를, 그리고 애끓는 애정의 표현으로 꽃다발을 보낸다. 나는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레오에게 화병에 장식해 달라고 말했다. 편지를 다시 접어 서랍 안에 넣고 레오가 천천히 꽃다발을 풀어 화병에 조심스럽게 꽂는 것을 바라보았다.

베르타가 풀려 흩어진 리본과 뚜껑 열린 상자를 보며 내게 물었다.

"이 선물은 어떡할까요?"

예쁜 머리장식이지만 디베르타에 쓰고 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저런 화려한 머리장식에 어울릴 만한 옷이 없었다.

"그냥……, 드레스 룸에 적당히 보관해 놔."

"네."

베르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 남자는 나를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반강제적으로 내게 감정을 밀어붙이고 하룻밤을 보냈다. 속아서 전전긍긍한 것은 억울하지만, 꽃다발까지 받고 나니 화를 낼 수가 없다.

'나 너무 쉬운 인간인가?'

복잡한 시선을 레오가 화병에 꽂아 둔 풍성한 꽃들에 고정시켰다. 잘생긴 남자에게서 그깟 고백 좀 받았다고 해서 이렇게 금세 누그러지다니. 모자도 꽃도 예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자는 제정신으로 쓰고 다니기엔 너무 화려했고 꽃 선물은 원래부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은 나쁘지가 않았다. 그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면 약간 설렜다. 그런 복잡함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귀가한 에이반은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해 전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았다. 엘리시온에서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서 주기적으로 선물을 받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다. 나는 조금 불안해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아스벨을 오늘 만나셨어요?"

"한 판 했습니다만, 죽이진 않았습니다."

"네? 싸웠다고요?"

전혀 뜻밖의 대답에 나는 에이반의 긴 소매 아래로 살짝 보이던 흰 색이 셔츠가 아닌 붕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에이반의 팔에 손을 가져갔다.

"다, 다쳤어요?"

"보시겠습니까?"

그는 살짝 쓴웃음을 짓더니 재킷과 조끼를 한번에 훌렁 벗어버렸다. 셔츠 소매의 커프스를 풀고 소맷자락을 길게 걷어올렸다. 팔에 칭칭 감긴 붕대가 보였다. 나는 불안에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겁에 질려 물었다.

"마, 많이, 다쳤어요?"

"제가? 아니면 그 놈이?"

"아니, 에이반이요!"

단호하게 외치자 그는 아, 하고 한숨에 가까운 탄식을 하더니 다친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물론 그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 없는 상처이지만 하루 종일 격렬한 활동을 해야 해서 붕대를 쓸데없이 많이 감아 놓은 것 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붕대를 풀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그럴 용기까지는 없었다. 내가 불안해하니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인지, 정말 작은 상처인지, 고개를 가로젓고 에이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에이반은 어깨부터 손목까지 붕대를 감고도 그렇게 아파 보이지 않았다.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팔을 사용했다. 단지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행동은 기피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항상 같은 변명을 했다. 상처가 벌어지면 붕대를 또 감아야 해서 난감하다고. 덕분에 죄책감은 조금 덜었지만 여전히 아스벨에 대해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아스벨은 선물과 꽃다발을 보내 주었다. 양쪽에서 죄어드는 감정의 물살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디베르타의 선생들은 무척 쉽게 말하지만 두 남자를 동시에 사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이반은 일주일째 되는 날에 붕대를 풀었다. 푼 것은 집에서였다. 집사가 붕대를 푸는 것을 도왔고,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에이반을 지켜보았다.

"유이나, 붕대를 풀고 나서 씻고 나가서 보여드릴 테니 거기에 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난처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에이반은 붕대를 감고도 섹스며 훈련이며 거의 모든 일들을 무난하게 해 냈지만 나를 힘있게 양 팔로 안아 주지는 않았다. 내 몸을 들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왼팔만을 사용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집사는 붕대의 끝을 가위로 자르고 천천히 풀어올라갔다. 몇 군데 팔에 붉게 변한 자국이 보였다. 다른 것은 거의 나은 것 같았지만 유독 크게 눈에 띄는 것이 마치 총알에 맞은 듯한 팔 아래의 둥근 관통상과 어깨 앞뒤로 난 자상이었다. 둘 다 분홍색으로 아문 자국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집사가 젖은 수건으로 팔을 닦아 주자 에이반이 팔뚝을 들어 올려 몇 번 힘을 주었다. 나는 에이반이 내게로 팔을 벌리자 안심하고 그의 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이전처럼 나를 안아 주었다. 안긴 채 가까이서 보니 흉터는 더욱 더 크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들어 그 부분을 매만지자 에이반이 웃으며 반응했다.

"남은 흔적도 곧 사라질 겁니다. 이것보다 훨씬 큰 상처도 수시로 전신에 입었습니다. 특히 원정 때는요."

"……."

"그래도 신경이 쓰이십니까?"

내가 에이반이 오른팔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던 것처럼, 에이반도 내가 계속해서 그의 벗은 몸을 볼 때마다 어깨까지 감싼 붕대 때문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흉터 자국은 괜찮으냐는 식으로 질문했다.

내다가 대답하지 못하자 에이반은 약간 짖궂게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불을 끄고 할까요?"

"……."

"괜찮다고 말했잖습니까. 이 정도 상처는 흔한 것이라고. 게다가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흔적도 없이 나을 겁니다. 군인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당신을 지키고, 또 국가를 지켜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안 싸워도 되는 일이었잖아요."

나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그렇게 덧붙였다가 전에 에이반이 정색하고 화를 낼 뻔한 일이 있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굉장히 무서워서 그만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자 도리어 그가 자기 스스로를 자책했기 때문에 그 날은 쌍방의 기분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우리가 처음 싸운 날이기도 했다.

에이반은 분명히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말이 없거나 얼굴을 찡그리면 너무 무서웠다. 아마……, 나만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와 저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사소한 일로 이렇게 몸싸움을 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이나. 당신이 그렇게 걱정하길 바란 것이 아닙니다."

청년기의 남성들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에이반도 19세부터 7년간 여러 차례 결계 밖으로 원정을 다녀왔고 큰 상처를 입거나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성인기가 되어 은퇴하기까지는 자그마치 짧게는 30년에서 길게는 70년 정도가 걸린다. 엘리시온 인간들의 수명 구조가 비록 지구인과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이란 어디에서건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 동안 불안해서 어떡하지…….'

에이반은 나를 안은 채 미소지으며 달게 속삭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충분히 목숨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입니다. 설사 당신을 위해 싸우다 죽거나 불구가 된다 해도 저는 상관 없습니다. 남자의 사랑을 부정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나를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드는 그 말에 나는 눈을 꼭 감고 에이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것만 아니라면 당신 말이 무조건 옳습니다, 유이나. 그러니 이제 그만 화를 풀어 주세요. 전처럼 다정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고, 제 손길에 열렬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에이반은 내가 꾸준히 불안해하는 모습이 자신에 대한 분노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기분이 풀렸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해 봐야, 지금의 달콤한 순간이 아까울 뿐이었다.

모르스의 날은 나와 에이반, 둘 다 하루 종일 쉴 수 있는 귀중한 휴일이었다. 나는 에이반과 하루 종일 침대에서 보냈다. 그 모르스의 날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에이반은 내게 넌지시 사실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안에 당신께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른함에 빠져 자꾸 눈을 깜박이다가 그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자 살짝 긴장했다. 에이반이 덧붙였다.

"해가 되는 얘기는 아니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뭔데요?"

에이반의 왼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 그의 넓은 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을 모아 에이반의 팔뚝 위에 올렸다. 그는 나를 보고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리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직감적으로 지금 그의 기분이 꽤 좋은 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이반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이제는 당신께 슬슬 동일 계급의 다른 남성들을 소개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일 한 명을 골라 보낼 터이니 싫으시면 거절하시고 마음에 드시면 저택의 객실 하나를 준비해 둘 것이라 그 곳을 쓰시면 됩니다"

"……."

나는 지금껏 에이반이 질투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나의 만남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몇 번이나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그가 말했었고, 그 때는 정말로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시온에선 문화적으로 여성의 공유가 당연한 것이었고, 이 곳에서 나고 자란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스벨과의 사건을 통해 나는 에이반도 충분히 사람다운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을 한다면 남성은 보통 한 명의 여성에게 묶이며 독점이라는 이름 아래 외도가 금지된다. 이것은 다른 사정도 있겠지만 여자들 사이에서의 질투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여자가 질투를 느낄 수 있다면 남자 역시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 여의치 않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물론, 내가 에이반의 감정을 멋대로 헤아린다며 오는 남자를 족족 거절했다간 곤란해지는 쪽은 에이반이었다. 후원자는 의무적으로 피후원자에게 많은 남성을 만날 수 있게 도움을 줘야만 했다.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국가에서 판단한다면 에이반 쪽이 본의 아니게 불이득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약간 못마땅했지만 그의 말에 납득했다.

"알았어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 더요?"

나는 눈을 깜박이며 에이반의 팔 위에서 누운 위치를 고쳤다.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 이 있습니다. 제 1계급 출신으로 칼리온에서 상당히 높은 직위에 올라 있는 남자입니다만."

"응? 그래서요?"

"나이가 차서 신붓감을 찾는다고 하는데, 당신이 저와 아스벨루스의 상대이며 벌써부터 마력을 다룰 줄 안다고 하니 흥미가 생긴 모양입니다. 곧 레마슬레이그에 도착하면 당신과 만나 보고 싶다고 합니다."

"……신붓감을 찾는다고요?"

나는 전혀 뜻밖의 얘기에 살짝 긴장했다.

"만나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건에 대해서는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만나 보는 단계부터 제가 나서서 거절하기에는 아무래도."

그보다 나는 나를 에이반과 아스벨의 상대라고 표현한 그의 표현이 더 신경쓰였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당히 좋은 조건이긴 하지만……, 사실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벌써부터 성인기 남성을 상대하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고 봅니다."

"경험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오늘 하루 종일 에이반과 침대에서 지냈고, 충분히 성적인 일에 능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에이반은 내 테크닉에 대해서 평가하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나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거기까지 배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성은 보통 청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며 생식기가 좀 더 비대하게 변형된답니다. 지금 것도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면서, 더 큰 것은 무립니다."

"으으응, 아닌데. 별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내가 부정해도 에이반은 그저 웃기만 했다.

녹티라의 요일은 항상 나른하다. 수업이 끝나고 혹시나 벌써 그 사람이 도착했을까 걱정되어 바로 돌아왔는데,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미리 목욕을 하고 디베르타에서 받은 과제를 수행했다. 간단한 글자로 이루어진 책을 한 권 읽어 오는 것이었다. 디베르타 내에도 도서관이 있었지만 에이반이 특별히 내 공부를 위해 글자 책을 주문해 주었다.

그 내용은 아이가 읽는 것처럼 유치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책 같은 고급 자료를 이용해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오로지 상위 계급의 유아들 뿐이었다. 대부분의 교육용 책은 엘리시온에 갓 떨어진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하나 해석해 읽는 재미가 있어 요즘의 취미 생활은 이것이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온다더니 착오가 생겨서 취소되거나 미뤄지기라도 한 건가? 정확히 그렇게 생각할 무렵, 집사가 방문객이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마중하러 나갔더니 사람이 둘이다. 한 명은 소년이었는데 심부름꾼처럼 보였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했으며 멜빵 바지를 입고 양 손에 선물과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은 에이반의 것과 비슷한 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잿빛 금발머리를 한 꽤 잘생긴 청년이었다. 군인 제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머리카락은 기름을 발라 정확히 가르마를 탔으며 옷에는 먼지 한 톨 붙어 있지 않았다. 짙은 갈색 가죽 군화는 새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각이 잡힌 재킷뿐만이 아니라 과중한 긴장으로 남자의 어깨는 빳빳하게 치켜올라가 있었다.

소년은 아마 아스벨의 심부름꾼일 것이다. 항상 같은 봉투에 든 편지지를 들고 와 주었다. 나는 손님이 기다리는 앞에서 다른 남자의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그렇기에 그 남자는 더욱 더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리로 들어오세요."

"수도 배치군 소속, 아르트리어 대령님의 소개로 온 세리스 에르나트입니다!"

그는 뒤늦게 경례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꽃다발과 선물 상자는 소년종들에게 들려 보내 방으로 가져가게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잘 오셨습니다, 에르나트 중위."

"아, 네."

남자는 뻣뻣하게 굳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온 신경이 내게로 쏠린 것처럼 행동했다. 그 행동으로 보아 남자는 전에도 몇 번 이 집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오는 집에 처음 보는 사람이면 보통은 그 쪽도 한두 번씩은 힐끔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집안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집사는 에이반과 관계된 사람들을 직위명까지 전부 알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생판 모르는 사람을 내게 보내진 않았을 테니 그는 원래부터 에이반과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집사가 말했다.

"2층 첫 번째 객실을 비워 놓았습니다. 그 전에 응접실에서 대화를 좀 나누시겠습니까?"

"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집사는 바로 2층으로 샴페인이라도 올려보내 드리겠다고 말했다. 내가 윗층 계단을 오르자 그 남자도 나를 따라왔다. 에이반이 마음 편하게 골라도 된다고 말하기에 거절하기가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상황이 난처했다. 나를 보러 몸단장을 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로 문전에서 돌려보내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천만다행히도 상대가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쭈뼛거리며 낯을 가리는 태도가 오히려 내가 리드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해 주었다.

객실의 침대에는 깔끔한 흰색 시트가 깔려 있었고 고급스러운 초록색 커튼이 창 밖의 햇살을 완전히 차단한 상태였다. 일부러 약간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낸 것 같다. 문을 닫고 남자의 곁에 가까이 섰다.

"세리스 에르나트, 세리스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래요, 세리스. 나는 유이나에요. 그런데 혹시 내가 상사의 여자라서 긴장한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단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셔서……."

하지만 고위 계급 남성의 피후원자들이란 하나같이 아름답고 특출난 구석이 있는 여자 뿐이었다. 수백 명의 여자들 중에서 선택받는 것은 열 명 남짓이다. 그 때 뽑힌 여자들은 대부분이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거나 얼굴 생김새가 정말 아름답고 몸매가 특출난 이들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디베르타에서 오며 가며 잠깐씩 보는 고위 계급 제복 차림의 여자들이 무조건 그렇게 눈에 띄는 미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각 세계에서 온갖 여자들이 뽑혀 오는 것이기 때문에 미의 기준도, 저들끼리 예쁘다고 느끼는 치장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고위 계급으로 올라섰다는 뜻은 이 곳에서 오래 지냈다는 의미일 테니, 그 같은 기준도 어느 정도 엘리시온식에 맞추어 평준화가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개성있다고 생각되는 외모의 여자들이 많았다.

모든 피후원자가 전부 상위 계급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평균치를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들이 원하는 아내상과 단지 즐기기 위해 만나는 여성상은 확실히 다르다는 의미였다.

문득 나는 그 남자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 관계는 명백한 수직성을 띠고 있다. 내 마음에 들어 나와 동침하는 것이 목적인 남자와 그것을 취향에 따라 고르는 여자.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일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다.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잘 꾸미고 온 것이며 신분의 차이를 무시한 예의바른 행동이며. 여기에 립서비스 정도는 대단한 일도 아니다.

들뜨려고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사가 샴페인 병과 잔 두 개를 가져다 주었다. 예의상 샴페인 한 잔을 그에게 권했다. 세리스는 눈치를 보며 목을 가볍게 축였다.

나도 달콤한 샴페인을 몇 모금 마시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목욕은요?"

여러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만큼 디베르타에서의 성교육에선 관계 전후의 청결도 무척이나 중시되었다. 나는 그 쪽에서 숙식하지 않아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만, 디베르타에서 가장 큰 건물이 대리석 목욕탕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명만 상대했기에 관계 후 몸을 꼼꼼히 씻는 것이나 상대방의 청결 같은 부분에는 그렇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 말에 허겁지겁 대답했다.

"저는 오기 직전에 씻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여기서 한 번 더 몸을 헹구고 오겠습니다."

"됐어요. 먼저 옷을 벗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도 비키니 위에 덧입은 원피스를 벗으려고 했다. 그 때 예상치 못하게 세리스가 말을 꺼냈다.

"저."

"응?"

"제가 직접 벗겨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문득 그가 얼마나 정중하게 상대의 옷을 벗길 수 있는지 미리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벨과의 첫 관계때처럼 허겁지겁 벗겨지는 건 싫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세리스는 심호흡을 하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피스 앞에는 일곱 개의 리본 매듭이 있었다. 목 아래쯤 한 개, 가슴께에 두 개, 그리고 명치와 배꼽에 한 개씩, 둔부 앞에 나머지 두 개. 리본을 푸는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의 숨도 거칠어져 갔다.

세리스는 귀한 인형을 다루듯 조심해서 옷을 벗겼다. 난폭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약간 의아했다. 사실 이런 귀한 대접은 아직 익숙치가 않다. 성장기 때 겪은 학대에 가까운 취급의 반동 탓인지 나는 이런 신사적인 대우에 무척이나 약했다. 예전의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홀대받았다면, 지금의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존중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냥 상대가 낯선 남자라서 싫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척, 기분이 좋았다.

"빨리 벗어요, 으응?"

오직 예감만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같다. 나는 그가 내 속옷을 벗기면서 점차 하반신을 부풀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알겠다고만 말하고 자신이 방금 벗긴 내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무 뜨거운 시선이라 무시할 수가 없어 가볍게 제안해 보았다.

"가슴 만지고 싶어요?"

아직 그러고 싶냐고 묻기만 했는데 세리스는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성을 잃고 가슴에 달라붙었다. 양 손으로 아낌없이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나는 이마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가슴에 파묻힌 그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손의 감촉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으응……."

약한 신음이 나오자 그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둥근 가슴을 전체적으로 손바닥에 품고 한참을 쓰다듬다가 아무리 해도 약한 반응밖에 나오지 않자 유두를 서서히 손에 쥐고 굴렸다. 가슴 끝이 딱딱해지며 뜨거운 숨이 빠져나왔다. 눈을 감고 남자의 눈 앞에 가슴을 들이밀었다.

"후우, 더 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는 감격에 떨며 단단해진 유두를 집중적으로 애무했다. 한 쪽을 물고 빨면 다른 쪽을 손으로 쓸어쥐고, 다른 쪽으로 입을 옮기면 남은 한 쪽도 결코 놀게 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빨아대는 자극에 나는 허리를 긴장시켰다. 남자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쾌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다. 생각보다 그의 테크닉이 능숙해서 나는 곧 비명을 지르며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이 잘게 경련하며 떨렸다. 그는 내가 어깨에 힘을 주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더니 잠시 영문을 몰라 행동을 멈추었다.

"아하아, 하아, 하아……."

가슴 절정으로 기운이 빠져 버려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가 곧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세리스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침대에 누운 내 가슴을 다시 쥐었다.

"가슴으로 느껴버린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그가 타는 듯한 눈으로 내 가슴을 바라보았다.

"……이건 아르트리어 대령님께서?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나신 겁니까?"

"그런 게 중요한가요?"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내게 호소했다.

"혹시, 혹시 제가 마음에 드신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저를 독점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독점이라……, 글쎄요."

남자 쪽에서 먼저 독점 얘기를 꺼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미뤘다. 독점은 한 남자가 여자에게 다른 상대와 바람을 피우지 않기를 약속하는 일이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에스트라를 해소할 다른 상대가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상대 여자와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러니까 독점할 경우 기간 동안은 꾸준히 그 남자와 만나 줘야 한다는 뜻이다. 무책임하게 독점하니 마니 가벼운 말을 꺼낼 일이 아니었다.

이성간 사귐과도 비슷한 단어인 만큼, 아직 남자 친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진지하게 그 상대를 고르고 싶었다. 일단은 거절 대신에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계속 기다리게 할 거에요? 응?"

"흐으, 아, 알겠습니다."

그는 흥분에 차서 숨을 들이키더니 서둘러 하의를 벗었다. 에이반이나 아스벨의 것처럼 하반신에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장식용 벨트가 많은 구조였다. 상의는 내버려 두고 하의만 벗자 매끈한 페니스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끝 부분이 이미 정액 범벅이었다. 아까 애무하며 극도로 흥분한 탓인 것 같았다. 그는 부끄러워하며 손수건으로 페니스를 한 번 닦아냈다. 발기한 귀두 부분은 복숭아색이었다.

에이반은 피부가 희지만 성기 부분은 뿌리 부근만 피부색과 같은 상아색에 표면은 단단해 보이는 엷은 갈색이 돌았고 단 하루 봤을 뿐이었지만 아스벨의 것은 그의 피부색대로 약간 그을린 붉은 살색이었다. 이런 색은 처음 본다. 풋풋하고 고운 색인 만큼 맛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나는 다른 전희사항을 생략하고 가슴 애무로 축축해진 아래를 벌렸다.

"바로 넣어 주세요."

"알겠……, 습니다."

세리스가 긴장과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채로 조심스럽게 내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것은 역시 에이반보다는 작았으나 아스벨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스벨의 물건으로도 충분히 꽉 차게 느꼈기 때문에 무척 기대되었다.

두꺼운 페니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나름대로 내 기분을 살피며 삽입 각도를 조절하는 등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오직 페니스의 촉감에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꽉 쥐었다. 젖은 눈으로 세리스의 파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좋아요……, 읏, 좋아……."

생각보다 훌륭한 느낌이었다. 닿는 감각도 부드럽고 두께도 탄력도 좋았으며 아프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도 있었다.

"하으응, 빨리, 움직여 주세요!"

허벅지로 세리스의 허리를 꽉 조이며 재촉했다. 그래도 여전히 신사 흉내를 내며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기에, 나는 눈을 다시 뜨고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 ……죄송……, 흣크윽!"

"아아?"

입을 떼자마자 그는 나를 안은 채 격렬하게 어깨를 떨며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 영문을 몰라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에이반은 본인이 원치 않던 타이밍에 사정하더라도 손이나 혀를 사용해서 내 몸을 달궈 놓고 곧 다시 딱딱해진 페니스로 달려들었다. 그걸 바라고 가만히 기다렸는데, 그는 완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내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게……, 너무 이상형이신 분과 하게 되어서, 게다가 아래쪽도 상상 이상으로 절륜하셔서, 그, 그만……."

"……."

나도 모르게 뺨을 부풀리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완전히 힘이 빠진 건 아니지만 넣기 어려울 정도로 흐느적거리는 물건은 이미 두 번이나 사정해서 그런지 지금 당장은 설 것 같지 않았다. 에이반은 두세 번까지도 괜찮았었는데. 결국 불만스러운 말을 몇 마디 해 준 뒤 미남의 우는 얼굴을 잠깐 감상하다가 그가 먼저 부탁해서 혀를 이용한 애무를 받기로 했다.

세리스는 정액이 흘러내리는 것도 상관 않고 내 다리 사이를 격렬하게 핥아 주었다. 생각보다 그의 혀 놀리는 솜씨는 굉장했다. 그의 어깨에 다리를 감고 전신을 경련시키며 두 번이나 느껴 버렸다. 예쁘고 섹시하다는 칭찬을 잔뜩 듣고, 세 번이나 절정을 느낀 결과 어느 정도 만족하긴 했는데 그런데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나는 세리스의 하반신을 힐끗 보고서 도저히 또 발기할 것 같지 않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세리스는 옷을 다시 차려입고는 왔을 때보다 훨씬 흐트러진 차림을 하고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여러 번 인사하고 돌아갔다.

아스벨과의 동침 이후에 느꼈던 것 같은 포만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 때는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속이 꽉 찬 것 같은 만족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에이반과 매주 할 때도 그 느낌이 하루 정도는 가는 편이었다.

'마력, 마력이 부족해…….'

세리스가 돌아가고 난 뒤에도 에이반은 오지 않았다. 항상 밤이 되어야 귀가하니까 오늘도 어쩔 수 없겠지만 오늘따라 더욱 더 그가 보고 싶었다. 나는 다시 읽던 책을 펼쳤으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방 한 켠에 놓인 상자에 눈길이 갔다.

세리스와 비슷한 타이밍에 온 아스벨의 선물이었다.

'대체 이 사람 무슨 생각이지? 특별히 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으면서 매번 선물만 보내고…….'

나와 또 섹스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편지에도 단지 자기가 보냈다는 어필만 잔뜩 써 놓으면서 선물만큼은 꾸준히 보내 왔다. 선물을 통해 나랑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싶은 거면 그런 티를 내야 할 것 아닌가. 단지 그 날의 보답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적당히 한두 번 보내고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벌써 내가 받은 선물만 다섯 개였다.

에이반이 굳이 거절하지 말라고 해서 일단은 받고 있지만 슬슬 약간 부담스럽다. 나는 소년종이 가져다 놓은 선물을 직접 뜯어보았다. 진주가 달린 짧은 목걸이였다. 비싼 물건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모조 진주가 아니라면 그만큼의 가치가 될 것이다. 오늘도 역시 같은 편지. 편지 어디에도 만나자거나 또 한 번 섹스를 하고 싶다는 언급은 없었다.

"이상하네."

크게 다칠 정도로 아스벨과 싸웠으면서 선물은 받아 두라고 말하는 에이반도, 에이반의 집에 살고 있는 내게 자꾸 의미없이 선물을 보내는 아스벨도 이상했다. 둘 다.

에이반이 돌아온 것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잠들고도 남을 시간, 나는 초조하게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에이반이 왔다는 말에 바로 일어나서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오늘따라 일이 많았는지 에이반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내가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낮잠을 너무 오래 즐긴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낮잠 안 잤어요."

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오늘 왔던 남자, 에이반이 직접 골라서 보내 준 거에요?"

"그렇습니다. 제가 아끼던 후배였습니만……. 혹시 그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흥……."

약간 뜨끔했다. 불평불만을 쏟아낼 생각이었는데, 아끼는 후배라니 직접 그의 앞에서 험담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반이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혹시 그가 강압적으로 굴었다던지."

사실, 말하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한 에이반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찾아가서 멱살을 잡을 것 같은 분위기라 서둘러 에이반의 손을 붙잡고 그를 말렸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너무……, ……너무 빨리 끝났단 말예요! 나는 더 하고 싶었는데!"

에이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웃는 건지 당황한 건지 모를 이상한 표정으로 겨우 한 마디를 짜냈다.

"그건 의외로군요. 몸도 건강하고 여성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다길래 소개시켜 드린 건데."

"으음, 너무 긴장해서 그랬나 봐요."

그래도 예의바른 남자였기 때문에 못마땅하지만 그렇게나마 면을 세워 주었다. 에이반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볍게 웃더니 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아직 부족하겠군요?"

당연한 것을 묻는다.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반이 나를 안고 윗층으로 향했다. 그는 침대에 나를 내려놓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에이반의 뜨거운 입맞춤에 바로 호응했다. 방금 귀가한 참이라서 그런지 그의 체취와 섞인 묘한 향이 느껴졌다. 항상 쓰는 거의 무향에 가까운 은은한 스킨 화장품의 냄새였다. 씻고 난 뒤에는 체취가 어느 정도 묻혔는데 지금은 그래서 더욱 흥분되었다.

잠옷 가운의 끈이 풀리고 양쪽 젖가슴 위에 까슬까슬한 손바닥이 닿았다. 나는 에이반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가슴은 오늘 많이 만져졌다.

"거기 말고요……."

에이반의 손길이 가슴에서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는 엉덩이를 주무르고 하나는 내가 기꺼이 벌려 준 다리 사이로 향했다. 엄지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검지와 중지로는 외음부 주위를 매만졌다. 나는 에이반의 어깨에 다리를 올리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거기도 말고. 빨리 '그거' 넣어 주세요……."

"이렇게 준비도 없이 금방은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클리토리스로는 오늘 두 번이나 갔는데, 에이반은 여유롭게 굴며 달달 보채는 나를 엎드리게 한 뒤 다리 사이에 자리잡고 무릎을 꿇었다. 적당히 그 곳이 젖어들자 균열의 입구를 혀로 핥았다. 혀 사이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다. 손가락을 마치 에이반의 페니스인 것처럼 오물거리며 물어 조였다. 그의 손가락은 여자 손과 달리 꽤 두껍다. 손가락 하나라도 충분히 안쪽까지 닿아 만족스러웠다.

낮의 그에게도 손가락을 넣게 해 봤지만 혀와 달리 손을 쓰는 애무가 유독 서툴러서 그런가, 이만한 충족감은 주지 못했다. 게다가 에이반의 손도 다른 남자에 비해 유독 큰 것 같다.

에이반은 손가락 끝 부분을 사용해 내가 더는 졸라 대지 않도록 최대한 안쪽으로 구부려 훑어 주었다. 나는 그의 목을 허벅지로 단단히 죄며 무아지경에 휩싸였다. 유사 삽입 행위였다. 갈 것처럼 가지 못하는 안달감에 에이반의 허리에 매달려 온 몸을 비벼댔다.

"싫어, 일부러 애 태우는 건 너무해요."

나는 눈가가 발갛게 변해서 숨을 할딱이며 에이반에게 호소했다. 그는 난처해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이만큼 젖었습니다. 자, 손가락 하나 더 넣어 드리겠습니다."

"싫어요! '그거' 주세요!"

나는 울먹이며 에이반의 어깨를 잡고 올라탔다. 어쩔 수 없이 에이반은 손을 놓고 내가 원하는 대로 자리에 누웠다. 아직 그는 셔츠와 속옷을 입고 있는 상태. 틈틈이 벗긴 했지만 전부 벗지는 못했다.

나는 그의 속옷을 끌어내리고 나온 물건에 하반신을 바로 비비며 넣을 준비를 했다. 에이반이 눈살을 찌푸리며 숨을 헐떡였다.

"……아!"

좁은 속을 벌리고 귀두가 삽입되었다. 이미 몸에 익은 쾌감이 내부를 관통했다. 나는 앞부분 절반을 물어 삼키고 엉덩이를 바르르 떨었다. 에이반이 아래에서 뜨겁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대단히, 아주, 적극적이십니다……."

에이반은 맞는 표현을 찾지 못했는지 몇 번이나 말을 멈추다가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누워 있던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는 살짝 뒤로 미끄러져 주저앉고는 에이반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격렬하게 움직여 드리지요."

그가 양 손을 깍지끼고 맞잡고는 내 엉덩이를 받쳤다. 침대 위에서 무릎이 떨어지고 몸이 공중에 뜨자 놀라서 에이반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이반은 내 엉덩이를 받쳐든 채 침대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섰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

내 몸을 들어올린 상태에서 짧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꼼짝없이 모든 체중으로 그의 물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유일하게 그의 어깨에 매달려 조금의 체중을 분산시킬 수가 있다. 처음에는 물론 잔뜩 긴장해서 에이반의 목에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곧 점차 팔에 힘을 풀었다.

"아으아앙, 좋아, 좀 더, 좀 더 격렬하게!"

"좋아? 그렇게나?"

에이반의 숨이 거칠어지고 드물게 말이 짧아졌다. 나는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꽉 조였다 풀며 재촉했다.

"더 깊이요, 깊이 내려 주세요!"

"더 깊이?"

"아흑, 아아악!!"

에이반의 물건이 보통 때보다 좀 더 깊은 곳을 쑤시고 들어오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에 손톱 자국을 냈다. 허리가 뒤로 꺾이는 바람에 에이반이 서둘러 팔을 뻗어 내 등을 받쳤다. 나는 터질 듯한 그의 성기를 아래로 맛있게 삼키며 절정감에 흐트러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내보였다.

"느껴집니까? 전보다 훨씬 깊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아, 좋아……."

쾌락에 취해 흐느끼듯 신음을 흘렸다. 에이반은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그래도 뿌리까진 아직입니다. 좀 더 적응시킬 필요가."

봐주지 않고 여전히 가고 있는 안쪽을 다시 힘껏 찔러왔다. 나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고음을 지르며 손톱을 더 깊이 박아넣었다. 목구멍까지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배 안 전체가 그의 것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아마도 음탕하게 느껴질 눈으로 에이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 앞이 흐려졌다.

뭉근하게 속을 열듯 위아래로 흔들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피스톤질을 했다. 나는 에이반의 어깨를 잡을 생각도 않고 그의 물건에 꽂힌 채 경련했다. 다 좋지만 좀 더 큰 폭으로 움직여 주었으면 좋겠다. 과한 욕심이었다. 정말 그랬다간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내 몸을 받치고 허리를 튕겨올렸다.

"아힉! 아흑, 아하, 아아, 아……!"

긴장이 고조되고 아래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절정에 이르러 배가 가득 차오르는 충족감이 느껴졌다. 나는 옆으로 누워 얇은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을 씻고 나온 에이반이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내 옆에 앉았다.

"씻는 것도 싫고, 방으로 가는 것도 싫고. 응석쟁이가 여기 있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반을 엿보듯 쳐다보았다. 지쳐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저는 적어도 깔끔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습니다만."

내가 듣기 싫어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에이반이 이불째 나를 안아 올렸다. 몇 센티 정도 꾸물거렸으나 이미 에이반은 옆 방의 깨끗한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 있었다. 움직이기가 너무 귀찮았다. 그는 베게 위에 나를 바로 뉘여 내 옆에 자리잡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로 인해 에이반이 있는 쪽으로 기울었다.

에이반이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우고 몸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정수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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