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온의 신부
금속 철창 안에는 서른 명 남짓 되는 젊은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
개중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민속 복장을 한 사람도, 염색한 것 마냥 특이한 머리색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두꺼운 겨울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 팔과 다리를 드러낸 여름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각자 어디에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우리 중 누구도 서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틀 전, 자정이었다.
나는 트레이닝 복 상의를 대충 걸치고 대학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기말고사 공부를 하면서 먹을 컵라면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편의점 앞 골목은 평상시와 달리 가로등이 꺼져 있었다. 많이 어두웠으나 익숙한 길인데다 경찰서도 코앞이라 아무런 의심 없이 골목을 지났다. 그 때, 희미한 어둠이 어렴풋이 눈앞을 가렸다. 나는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그대로 어둠 속으로 감싸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다른 수십 명의 또래 여자들과 함께 감옥 안에서 깨어났다. 그래,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는 구조의 숲길을 눈 깜짝할 새 빠져나온 감옥 수레는 어느덧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번화가로 향했다.
사방이 철창으로 단단히 막힌 감옥은 바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면이 두꺼운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한쪽 철창 구멍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어떤 곳도 이곳과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누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복식도 현대의 것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물론 디자인이 내가 아는 역사 속 전통복식과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는 허름하고 낡은 천을 몸에 감고 나무로 만들어진 물통에 물을 떠 나르거나, 멜빵이 붙은 바지를 입고 망치와 목재를 옮기고 있었다. 어떤 이는 치렁치렁한 비단을 두르고 앞장서서 걷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헐벗은 차림으로 그 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발에는 금속 족쇄가 묶여 있었다.
감옥 수레는 길의 한복판을 달렸다.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길가에 여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남자 두엇과 동행하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여자가 없다기보다는 바깥에 잘 돌아다니지 않는 것 뿐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익숙치 않은 풍경이다.
나는 치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몇몇 외국을 떠올렸다. 그런 장소 치고는 바깥 풍경이 무척이나 평온하고 활기 있어 보였다. 감옥 수레 앞에서 들리는 발굽 소리가 잦아들었다. 말이나 소가 끄는 건가? 타박대는 소리가 멈추고 동물이 투레질을 하는 듯 고삐가 흔들리는 것처럼 수레에도 진동이 전해졌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회벽으로 지어진 높은 담벼락이 보이고 담장에 딸린 거대한 아치문이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엄중하게 닫히는 것도 보였다. 요란하던 인기척이 높은 담 너머로 사그라들었다. 그러기를 세 번이었다. 세 번째 담장을 지나자 수레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금속 감옥 째로 주위가 덜컹거렸다. 두꺼운 천에 감싸인 상태의 감옥이 크레인 같은 것으로 인하여 들려 올라가고 있었다. 밖이 보이진 않았으나 들어올려지는 모양을 보았을 때 결코 사람의 힘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들은 바닥이 흔들거리자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숨구멍을 열어 주던 두꺼운 천이 흔들리며 사방을 가렸다.
감옥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동되었으나, 여전히 감옥 안에 갇힌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감옥 위에 덮힌 천이 어딘가로 떨어졌다. 나는 흔들리는 감옥 안에서 몸을 약간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실내였다. 우리는 붉은 촛불의 빛이 일렁이는 넓은 회랑 안에서 감옥째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는 천이 걷혀진 감옥의 윗편을 바라보았다. 크레인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옥을 들어 옮기는 데 필요한 와이어도 갈고리도 없었다. 물론 감옥 아래를 무엇인가가 받치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주위를 살펴보며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들이 갇힌 감옥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각종 여자들이 갇혀 있는 거대한 감옥이 여섯 개. 내가 갇힌 곳까지 합하면 모두 일곱 개였다. 각각의 감옥은 바닥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면 쓴 사내들이 저벅저벅 지나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값어치를 매기는 듯한 시선. 익숙치 않은 눈들이었다.
그 때 길고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중년의 여자 세 명과 그를 따르는 제복 차림의 젊은 남자 여섯 명이 감옥 한 켠에 자리잡았다. 일곱 개 중 첫 번째 감옥이 아래로 스르르 내려온 뒤 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양쪽에서 감옥 이음매의 자물쇠를 열었다. 나머지 네 명의 남자가 각각의 면을 잡고 사방의 창살을 분리했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여자들은 자유롭게 풀려났으나 가면 쓴 남자들의 무자비한 시선에는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그들은 저들끼리 떠들어 대며 여자들을 품평하더니, 몇몇은 그냥 돌아섰고 몇몇은 누군가의 손에 잡혀 끌려 나왔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호소했다. 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 명의 중년 여자는 잡혀온 인물들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한 명씩 골라냈다. 분류된 여자들은 중년 여자가 꺼낸 나무 도장에 의해 손등에 표식이 찍혔다.
어두운 회색 잉크가 묻은 도장이었다.
제복 차림의 남자들은 두 번째 감옥의 뚜껑도 전부 분해하여 옮겨 놓은 뒤 내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고 철창의 뚜껑도 전과 같은 순서로 열렸다.
사방에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같은 소리들이 왁자지껄 쏟아졌다. 가면을 쓴 남자들이 이 쪽으로 다가오자, 갇혀 있던 여자들은 기겁했다. 회랑은 무척 넓었지만 문도 창문도 막혀 있어 도망칠 장소는 보이지가 않았다.
남자들의 손길을 피해 주위를 둘러 보던 나는 천장 근처에 마련된 반원형의 발코니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래의 홀에 있는 남자들과 달리 발코니 위의 붉은 소파에 앉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한층 더 고풍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때 한 남자와 가면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아까까지 지루한 표정을 짓던 그 남자는 회색의 새틴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색도 똑같은 회색 계통이었으며 눈은 금빛 도는 청색이었다. 정장과 어울리지 않게 익살스러운 장식용 가면에는 끝이 뭉툭한 삼각형 귀가 붙어 있었다. 고양이거나 사자 귀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우리 여자들을 잡아 온 이들은 해외 인신매매단과 관계있는 조직폭력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는 아마 외국의 외진 곳 어딘가겠지. 인신매매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비록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얄팍한 입술을 비쭉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에 들고 있던 길쭉한 글라스 안에 담긴 포도색 액체를 내 앞에서 가볍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입술과 얼굴의 윤곽만 봐도 배우나 모델 등 유명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상당한 미남자였지만 저런 무료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이런 장소에 참석하고 있는 걸 보면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옆에 있는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 키가 크고 인상이 험악하거나, 아주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거나,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들이다.
그 때 발코니의 남자들 중 근엄한 수염을 단 한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어떤 여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일어난 장면은 기어코 이 상황이 상식 속의 사건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다른 여자들 사이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던 한 여자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녀는 팔다리를 허둥거렸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을 바로 날아가던 여자가 그 남자의 발치에서 가볍게 툭 떨어지며, 불가사의한 힘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다른 남자들은 전혀 그 쪽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당황한 여자들은 서로의 옷자락을 잡고 발코니의 남자들을 경계하듯 쳐다보았다.
'철창이 움직이는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치나 자기력을 이용했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안녕하십니까."
"어?"
무심코 대답했다가 나는 남자가 분명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입을 가린 채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게 말을 건 남자는 이 인신매매 구역의 참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가면을 따로 쓰고 있지 않았고, 가면을 써도 비교적 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마치 하인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주인님께서 당신을 지목하셨답니다. 한 번 저희 주인님을 만나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거절은 한 번이라도 주인님을 뵙고 나신 다음에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할 여유도 없이 겁에 질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계속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파트너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분이십니다. 후회 없으실 겁니다."
그 남자가 갑자기 내게 붉은 리본으로 묶인 펜던트 장식품 같은 것을 건넸다. 내 앞가슴을 향해 들이밀길래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손을 가져갔는데,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그 남자의 팔에 매달려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몸이 떠오르고 어느덧 나도 입구 없는 발코니 위에 서 있었다.
2층에 오자마자 보인 것은 둥글게 놓인 붉은 소파였다. 등받이가 낮은 소파에서는 남자들이 제각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전과 달리 이상하게 그들의 말이 모두 이해되었다.
"이번에도 이거다 싶은 여자는 없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파트너가 없는 귀족은 무조건 첫 선발에 참여해야 하니까."
"이럴 시간에 디베르타에서 경험 많고 말이 통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편이 나아. 뭘 보고 이런 여자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거지?"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괜한 유흥으로 에스트라를 낭비하는 것보다 확실한 종부가 될 수 있도록……."
"멍청하긴, 여자한테 의존할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출세할 생각을 해."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못 들은 척 했다. 어째서 갑자기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까의 비행 다음으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데려온 중년의 남자는 내 몸을 앞장세우며 사람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지나갔다.
"꺄악, 싫어! 풀어 주세요!"
"어리석긴. 하층계급들의 씨받이로 늙어 죽는 것보다는 여기서 나에게 선택받는 편이 나을 텐데?"
어떤 이들은 이런 장소에 와 있는 것 치고는 여자에 관심이 아예 없어 보였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눈을 벌겋게 붉히며 여자에게 강압적으로 굴기도 했다. 나는 다리를 주춤거리며 그나마 내게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중년 남자를 의존적으로 힐끔거렸다.
개중에는 한 명에게 둘 이상의 남자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 한 명이 무언가를 보고 아래로 허겁지겁 내려갔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구경하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직접 보고 고르겠다며 아래층으로 다 같이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회랑을 향해 오픈된 발코니같이 공개된 장소가 있는 반면, 꼼꼼하게 짙은 천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도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그 중 하나의 커튼을 젖혔다. 그 때였다. 내 손목을 누군가가 덥석 붙잡았다.
나는 커튼 사이를 얼핏 보았다. 널찍한 소파에 홀로 앉아 있던 것은 키가 크고 무뚝뚝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탓인지 가면은 쓰지 않았다. 머리는 검보라색에 눈도 약간 보랏빛 도는 것 같다. 건장해 보이는 체격에 비해 피부색은 깔끔하게 희었다. 그리고 상당히 젊어 보였다. 반면 내 손을 붙잡은 것은 은회색 머리를 한 남자였다. 어, 아까 아래층에서 눈이 마주쳤던 남자다.
"잠깐, '그 여자'는 내가 먼저 봐 놓고 있었어. 이 쪽으로 넘겨."
"……."
이미 커튼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짙은 머리칼의 남자는 말이 없었지만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제 삼자가 끼어들며 회색 머리 남자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뭐야, 아스벨. 너 이번에는 고를 생각이야? 그럼 나도, 나도 저 여자! 내가 너 다음으로 예약했다? 알지?"
"시끄러워, 일단 넌 꺼져."
회색 머리 남자는 파리 쫓듯 그 남자를 쳐내고 나와 보라색 머리 남자 사이에 버티고 섰다. 지금 보니 한 쪽은 체격이 듬직했고 한 쪽은 말랐으나 둘 다 키가 큰 편이고 대단한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보라색 머리 쪽은 특히 우락부락한 체격으로 앉아 있는데도 좀 더 위압감이 느껴진다.
"내 말 안 들려? 내놓으라고 했잖아."
회색 머리 남자가 너무 고압적으로 나온 탓에 그 남자의 계급이 상대적으로 이 남자에 비해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보라색 머리 남자는 나와 그 회색 머리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표정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그의 감정이 드러난 순간 정말 험악하게 분위기가 반전되어 내심 깜짝 놀랐다.
"감히 아스벨루스 따위가……."
"!"
"이 내가 먼저 불러 온 여자를 중간에서 가로채시겠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모 소위?"
야모라고 불린 남자는 지나가려다 말고 움찔 멈추어섰다. 그는 곰이나 코끼리처럼 큰 덩치를 한 남자였는데 이름이 불리자 절도 있는 동작으로 돌아서서는 당혹스러운 티를 곰 같은 얼굴로도 충분히 드러내며 코를 푸릉거렸다. 눈은 가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작은 편인 듯 하다. 위협적인 그 남자의 말에 아스벨이라는 회색 머리 남자도 이를 악물고 그를 협박했다.
"이봐, 야모, 대답 똑바로 해라, 야모."
"으……, 그게……, 저, 저는……."
가운데의 남자는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물들어서는 양 쪽에서 오는 압박감에 자결할 태세였다. 주변이 어느새 시끄러워졌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던 행동까지 멈춘 녀석도 있었다.
"아르트리어 대령과 아스벨루스가 한 여자로 다투는 거야?"
"취향이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
"취향보다는 자존심 문제겠지요. 여자는 핑계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 공간이잖습니까."
어느 쪽이 이기든 둘 차례가 지나면 내 얼굴을 기억해 두고 나랑 꼭 해 볼 거라며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도 많았다. 도대체 왜지? 나는 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장소는 일반적인 인신매매 현장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자존심 싸움 중이다. 고작 여자 한 명을 차지하기 위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 그게, 무엇보다 이 상황에선 여성분 본인의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 대답을 한 야모라는 덩치는 한 숨 벗어났다는 생각에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보라색 머리 남자가 말했다.
"고작 내 놓은 의견이 그런 겁니까?"
"하, 좋아. 그녀에게 물어 보던지! 난 상관 없어!"
회색 머리 남자는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당연히 내가 자신의 손에 넘어오리라 생각한 것 같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당당하게 가면을 벗었다. 맨 눈가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상상하던 것보다 더 훤칠한 얼굴이었다.
"그녀와 먼저 눈을 마주친 건 나야. 심지어 날 보고 눈웃음까지 쳤다고. 그녀가 원하는 상대는 어떻게 생각해도 나, 이 아스벨루스 외에는 없어!"
"그런 것 알 게 뭡니까. 이 여자를 먼저 택한 것은 나였습니다. 그녀를 먼저 데려온 것도 이 나의 집사. 증명해 줄 눈이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이 먼저 골라둔 이에게 눈독들이지 말고 당신은 적당히 저 중의 하나나 골라 보시는 게?"
보라색 머리 남자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회색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턱짓으로 발코니 아래쪽을 가리켰다. 회색 머리 남자는 정색했다.
그 때 옷차림이 흐트러진 여자 한 명을 챙겨 가려고 하던 비쩍 마른 남자가 나를 가리켜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 싸우고 소위의 말대로 차라리 본인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게 어떤가? 신성한 장소에서 소란 좀 그만 피우고 말일세."
그의 발언은 어느 정도 무게가 있었던 듯, 그 말에 양 옆에 서 있던 두 남자는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이, 들었지? 에이반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말해도 돼. 저런 색골 호모 따위와 날 비교하는 건 기분 나쁘지만, 뭐 어떻게 봐도 내가 훨씬 마음에 들지 않아?"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저것은 동정입니다. 하도 안 써서 썩어 문드러진 풋고추. 노총각 히스테리. 결코 여자 한 명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너 죽고 싶어?"
"이런,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둘 다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덜덜 떨리는 팔을 양쪽으로 꽉 싸매며 생각했다. 둘 다 거절했다간 자존심 때문이라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상황상 선택이 아닌 거부는 허락되지 않을 것 같고. 둘 다 생각보다는 훨씬 잘생겼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흔쾌히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나를 먼저 골랐다는 사실은 내가 알고 있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야 둘째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존댓말을 사용해 주었다. 회색 쪽의 입이 험한 것도 점수 하락 요인이다. 말씨가 험하니까 당연히 행동도 험할 것 같다.
나는 눈을 딱 감고 보라색 머리 쪽을 가리켰다. 그는 내 떨리는 손짓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보란 듯이 옆의 회색 머리를 향해 업신여기듯 턱짓을 했다. 반대로 회색 머리 쪽은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한 결과라 이 이상 소감을 말해 봤자 입이 아플 뿐이군요."
"……."
"그녀도 아스벨루스 정도 되는 하등 생물의 동정 생식기 따위는 상대하기 싫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럼 함께 갑시다. 더 이상 동정과 한 자리에 있기 싫으므로."
"말 다 했냐, 이 호모자식이!"
"어디에도 넣어 본 적 없는 동정 조루땅콩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둘은 서로의 욕에 열을 올렸다. 한 명은 낮은 목소리로 살살 긁어 가며 상대를 비꼬았고 한 명은 무작정 큰 소리를 냈다. 소란이 일자 몇몇 남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까지 난처해졌다.
"뭐라고?! 너 방금 뭐랬어!! 나도 아직 내가 조루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그걸 네가 무슨 수로 알아!!!"
지레 찔린 건지 회색 머리 남자가 손가락질을 하며 버럭 소리쳤다.
"그냥, 얼굴만 봐도 조루처럼 생겼잖아?"
보라색 머리 쪽은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대답했다. 그 때 제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올라와서 회색 머리 남자를 제지했다. 본격적으로 긁은 것은 보라색 쪽이었지만 소란을 피운 것은 명명백백 회색 남자 쪽이었기 때문이다.
보라색 머리 남자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낮은 난간을 넘었다. 나는 발 끝에 아무 것도 닿지 않자 허둥거리며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간택 행위'가 끝나자, 중년 여자들은 잡혀온 여자들을 한 곳으로 분류하고 선택받은 여자들에게 각각 다른 색의 도장을 찍어 주었다. 붉은 색이거나 푸른 색의 도장이었다. 한 편 나는 이 펜던트가 일시적인 통역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처음 데려온 나이든 남자가 설명해 준 것이다.
'당신들은 하나의 차원 세계에서부터, 이곳 엘리시온에 불려 온 여자들이다.'
펜던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나팔 모양 장식물을 입에 댄 중년 여자가 큰 목소리로 설명했다.
'또한 이 장소에 모인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을 한 명 선택하여, 일정 기간동안 숙식을 제공하며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설명을 들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듣자 하니 선택의 기회는 상위 계급 남성부터 순서대로 주어지며 끝까지 선택받지 못한 여자들은 디베르타라는 건물에서 일제히 숙식하게 되는데, 해당 건물에서 여자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시켜 주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여자들이 그 곳을 거쳐야만 한다고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취급을 감안하여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짐작했다.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선택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턱을 치켜들고 중년 여자의 얘기를 경청했다.
"……디베르타의 교습소에 보름 중 8일 이상 출석시켜야 하며, 교육 기간 동안 우선하여 동침할 권리가 있으나 성적 결정 권한까지 위임받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한, 책임 기간 1년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에는 동일 계급의 남성에게 반드시 소개 양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스러운 말투에 어려운 단어를 써서 그런지 온전히 번역되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 번역 도구는 집중해서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면 머리가 아파왔다. 남자는 적당한 선에서 설명을 끝내고 내 어깨를 다시 인도하듯 잡아당겼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가죽질의 박쥐 날개 같은 것이 옆구리에 달려 있는 갈색 말이 모는 마차에 타고 커다란 저택에 도달했다. 저택에는 여러 명의 남자 사용인들이 보였다. 나는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실은 아니고 거실이나 응접실, 그 중간쯤 되어 보이는 장소였다. 보라색 머리칼의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겉옷을 벗어 뒤로 건넸다. 사용인 한 명이 바로 겉옷을 받아 챙겼다.
"펜던트 로커스를 내게 주십시오."
남자는 코트를 벗었음에도 안에 꽉 붙는 재킷 하나를 더 입고 있었다. 팔에 딱 맞는 긴 소매 재킷을 입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리본이 달린 펜던트를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쥐고 여분의 끈을 자기 손목에 한 차례 감더니 내게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레마슬레이그의 도미넌트 아르트리어 대령. 당신은 그냥 저를 에이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럼 당신의 이름은?"
나는 어깨를 떨며 머뭇거렸다. 그가 재차 질문했다.
"당신의 이름은?"
"유……, 이나.
"유이나? 맞습니까?"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는 능숙하게 내 어깨를 쥐고 나를 소파에 비스듬히 눕혔다. 손이 어깨에서 내려오며 옷의 지퍼를 아래로 당겼다. 나는 당황했으나 그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의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를 선택한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유이나."
남자는 내 위에 올라타며, 내 이름을 한 자씩 끊어 말하고, 보란 듯 자신의 재킷 단추를 풀었다. 버튼이 많이 붙어 있던 검은 색 재킷이 침대 밑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긴장한 채 아직 전부 풀리지 않은 지퍼를 꼿꼿이 누워 붙들고 있었더니 슬쩍 나를 일으켜 앉히고 소파에 기대게 한 채 팔을 머리 위로 두르며 느긋하게 물었다.
"남자 경험은 적당히 있습니까? 아니면 별로 없는 편?"
남자는 옆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조금 몸을 들어 입술을 내 것과 겹쳐왔다. 갑자기 키스부터 해 올 줄은 몰랐다. 숨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입술을 다시 차분히 떼더니 혀로 내 입가를 몇 번 핥았다. 내가 더더욱 입을 꾹 다물자 몇 번인가 열라는 듯 진입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입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귀였다. 낯설고 끈적끈적하고 물컹물컹해서 기분 나빴다.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 없습니다. 상대의 성경험이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권도 다른 세계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만, 이곳 엘리시온에서 경험 여부 같은 것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으니까."
그가 귀 가까이에서 거칠게 속삭이자 나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짧게 저었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혀를 내밀었다. 귀 끝이 감전된 듯 떨려왔다.
"거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귀 가까이 뜨거운 숨과 함께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는 등줄기를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소파 위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귀로 타인에게서 성적 자극을 받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가 저려왔다. 이 부분이 성감대라는 말을 들었지만, 실감한 건 처음이다.
신음을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넓은 방에 우리 둘만 빼고 전부 물러간 뒤였다. 방해할 사람도,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자는 내 귓바퀴를 입술로 쪽쪽 빨며 한 손으로 상의의 지퍼 아랫 부분을 만졌다. 그는 지퍼를 내리기만 했지 풀어내는 법은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완전히 앞이 풀려 버렸다. 상의를 양쪽으로 벗긴 뒤 가슴을 덮은 셔츠 천을 걷어올렸다. 허리 부분이 고무줄로 된 바지는 이미 조금씩 벗겨져 엉덩이가 반 이상 드러난 상태였다. 타인의 거친 손이 속옷 위로 가슴을 꼬옥 누르자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나왔다. 그는 잠시 내 귀에서 입술을 떼고, 그대로 셔츠를 끌어올려 벗겼다.
볼록한 젖가슴의 반이 브래지어에 감싸인 채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속옷이 흐트러지며 잠깐 보였던 유두가 곧 다시 남자의 까슬한 손바닥에 눌리며 가려졌다. 그는 브라컵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가슴을 만졌다. 어깨 끈에 신축성이 있어 자꾸 그의 손 움직임을 방해했다.
본격적으로 내 몸 위로 올라탄 그는 아래에 무게를 싣는 대신 무릎으로 버티면서 양 손으로 천을 젖히고 내 가슴을 잡았다. 내가 내 몸을 만질 때보다 남의 체온이 닿을 때 그 느낌이 훨씬 예민하고 낯설었다.
내 가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방해되는 브라컵을 무시한 채 가슴을 모아 쥐고 유두를 중심으로 하여 색이 짙은 유륜 주변을 한 입에 삼켰다. 뜨겁고 끈끈한 살갗에 닿은 유두 끝이 가볍게 빨렸다.
"으흐응!!"
나는 신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한 쪽으로 틀었다. 남자의 손이 가슴을 붙들고 침이 묻어 반질거리는 유두를 꼿꼿이 세워 올린 채 다시 혀 끝에 힘을 주고 굴리듯이 핥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부터 시작된 쾌감이 거미줄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가 뭐라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피부가 예민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남에게 빨리기까지 하니 견딜 수 없었다. 무언가가 터질 것 같으면서도 그러지 못해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뜨고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긴장과 기대가 섞인 눈빛을 하고서 내 속옷을 바지 째로 끌어내렸다.
허벅지를 들어올려 속옷을 마저 당겨 내리자 다리 사이 균열이 살짝 보였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인 체모 주위로 매끄러운 둔덕이 희끗하게 보였다. 팬티를 완전히 다리에서 분리하여 소파 뒤로 떨어뜨려 버리고, 앉아 있는 내 다리를 넓게 벌리게 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 탓인지 민감한 부분이 갑작스레 남의 눈에 보여져도 내가 예상한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래를 씻은 건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은 상태인데 그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젖어 있는 균열 사이에 바로 입을 대고 핥기 시작했다. 손가락보다 부드러운 혀가 적당히 애타는 자극을 주며 외음부를 긴장시켰다. 특별히 한 곳을 집중해서 자극하진 않았으나 부분부분을 오랫동안 천천히 애무했다. 침 삼키는 소리와 애액이 미끈미끈하게 튀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크게 들렸다. 아슬아슬한 불안감은 금세 쾌감에 삼켜졌다. 나는 상대의 혀가 클리토리스에 닿을 때마다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더욱 더 치켜올렸다.
"아흑, 거긴 너무, 아아……."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끝을 얼버무리고 곧 그 사실조차 잊어버렸는데, 남자는 놓치지 않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빨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빨아당겼지만 흥분해 있던 그곳은 모든 자극을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절정감에 숨을 헐떡대다 무심코 그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그는 낮은 신음을 내며 가만히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쳐다보다가 소파에 누워 땀투성이로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벌써 느껴버린 겁니까?"
"아……, 흐흑, 봐 주세요……."
"화내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자, 아직입니다."
나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눈가에서 훔쳐내며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허벅지를 아까보다 더 높이 올려 어깨에 걸치더니, 고개를 더 숙여 아까 핥던 곳보다 훨씬 아래쪽을 빨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 입술이 닿자 놀라서 다리를 흠칫 떨었다. 달콤한 쾌감에 젖은 몸뚱이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남자는 엉덩이 주위를 혀 끝으로 꾹꾹 눌러 가며 자극시키다 항문의 주름을 하나하나 혀로 닦아내며 침을 발랐다.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은근슬쩍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표정을 보니 여긴 아직 안 배운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오늘은 조금 이르고, 다음 번부터 천천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흐으……."
"다른 남자에게 서툴게 배운다면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저를 상대로는 그럴 걱정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은 결코 지금 당장 핥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았다. 남자는 한참동안 내 엉덩이를 핥았다. 나는 아래에서 민감한 점막을 통해 느껴지는 혀의 촉감에 허리를 들썩이다가 그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하지만 거긴 더러운데!"
"글쎄, 제게는 익숙합니다. 더럽다고 표현된 장소가 당신 입술에 닿는 것도 아니니, 그냥……, 느끼면 됩니다. 다른 건 신경쓰지 마세요. 저는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 좋습니다."
처음엔 분명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곧 그 감각은 쾌감이 되어 나도 모르게 앞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는 애액이 엉덩이골 사이로 뚝뚝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감정이 북받쳤다. 처음엔 그래도 나를 험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이상한 방면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이윽고 남자가 하의를 끌어내려 성기를 바깥으로 꺼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 한쪽 팔로 이마를 가리고 있다가 그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이미 자신의 성기 밑둥을 붙잡고 내 다리 사이에 들어온 뒤였다. 사람의 살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뜨겁고 단단한 촉감의 무언가가 젖어 미끌거리는 애액 위로 문질러졌다. 그는 충분히 문질러 적신 물건을 쥔 채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자, 이 다음 단계는 당신의 몫입니다."
남자는 내 손을 자신의 허리에 얹게 한 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뺨만 불그스름하니 색기가 올라 있다. 남자도 적잖이 흥분한 듯 하다. 재촉하듯 성기를 쥐고 내 살에 맞댄 채 몇 번 튕겼다.
"여기를 당기거나……, 아니면 다리로 끌어당겨 원하는 만큼 삽입하세요. 당신이."
"……!!"
나는 어쩔 줄 몰라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점잖게 기다리던 남자가 서서히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다려도 삽입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한 남자가 대기하던 것을 그만두고 성기를 내 허벅지 위에 대고 손으로 눌러 가며 앞뒤로 문질렀다. 나는 살이 애액과 함께 철퍽철퍽 부딪혀 사타구니에 닿자 얼굴이 빨개졌다.
남자의 성기, 그 뜨거운 표면이 허벅지에 마찰당했다. 발기해 있던 남자의 페니스는 곧 잘게 떨리며 점도 있는 정액을 끝에서 몇 차례에 걸쳐 뿜어냈다. 내 허벅지는 물론 가죽 소파에도 정액이 묻었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내 등 뒤에 있던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이런, 수음이 목적은 아니었는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남자는 긴장한 내 표정을 바라보았다. 한결 흥분이 가시고 그나마 침착하게 돌아온 눈빛으로 그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한 팔로 몸을 가린 채, 젖은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회유하듯 물었다.
"성교섭의 마무리는 결국 다음 번으로 미룰 생각이십니까?"
"……."
"언젠가는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첫 마력을 나누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섣불리 행동하느라 당신 몸이 조금 식은 것 같기도 하니 다시 빨아드려야겠군요."
그가 몽롱하게 웃으며 내 다리 사이로 다시 혀를 들이밀었다. 그의 혀는 이번에 클리토리스를 직접적으로 애무하는 대신, 주위를 애태우듯 맴돌다가 질구 주변을 툭툭 건드렸다. 아까 그의 성기 앞이 가볍게 밀어붙여진 장소였다. 아까와 같은 곳이 자극되자 몸이 순식간에 전의 흥분감을 기억해 냈다.
남자는 음액이 흐르는 부분을 혀로 계속 자극하여 끈끈한 액체가 더욱 더 많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가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만지면 만질수록 넣기 쉽게 금세 젖는 부분이 좋군요. 제 물건을……, 에스트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분. 이 곳은 저도 처음이라 많이 기대가 되는군요."
남자의 생식기는 다음 차례의 준비를 위해 벌써 빳빳하게 굳어가고 있다. 나는 훌쩍이며 내 아래를 핥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 있다. 나는 다리를 힘껏 비틀었다. 내 행동을 절정 예고로 오해한 그가 집요하게 허벅지를 누르고 더욱 더 달게 아래를 빨아댔다.
"아, 안돼……. 안 돼요, 제발! 그만 핥고 차라리 넣어 주세요……!"
다리 사이가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다. 좀 더 다른 종류의 쾌감을 몸이 바라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지도 모르겠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일어나서 아까처럼 내 다리 사이에 성기를 들이댔다.
"……자아."
"하흣!!"
나는 뜨거운 부분이 질구 앞에 닿자 짧은 신음을 내며 허리를 튕겼다. 남자는 숨을 낮게 몰아쉬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내가 삽입을 지시하도록 유도하였다. 욕심껏 다리를 벌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몸을 잡아당겼다.
안이 한계까지 벌려지며 두껍고 단단한 살덩이가 점차 깊숙히 들어왔다. 나는 달아오른 구멍에 스치는 생각 이상의 뻐근함과 의외로운 쾌감에 스스로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들어 그의 엉덩이를 꽉 붙잡았다. 남자는 엉덩이를 뒤로 빼려다 멈칫했다.
"귀여운 짓을 하는군요, 그렇게 좋습니까?"
"읏, 아흣, 아아아!"
철퍽, 철퍽하며 남자는 느닷없이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질주름이 역으로 쓸려나가며 전에 없던 감각이 몰아닥쳤다. 격렬한 진동으로 힘을 주고 있던 다리가 풀렸다. 신음성 탓에 숨을 들이마시기 힘들어졌다.
"이렇게 잘 느낄 줄이야, 처음에는 단지 부끄러웠던 것 뿐인가요?"
"아앗, 앗, 앗, 앗, 핫!"
"게다가 이렇게 단단히 죄어 빨아들이다니……. 여성의 몸이란……."
나는 땀투성이의 손을 나도 모르게 뻗었다. 남자의 어깨를 아프도록 꽉 잡았다. 그는 점차로 여유가 없어지며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 대신 한숨 섞인 낮은 신음소리를 참지 않았다. 전신이 흔들리도록 그의 큰 성기가 배 안에 들이찼다가 빠르게 후퇴했다. 낯선 쾌감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무언가가 오는 것 같았다.
간간히 내뱉던, 신음보다 숨소리에 가까웠던 헐떡임이 점차 비명에 가까운 음성으로 바뀌어 갔다.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 치고는 심하게 높았다. 남자는 무심결에 내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거부하던 아까와 달리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극도로 예민해진 입 안 점막이 그의 혀에 찌걱대며 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혀를 빨았다. 그는 능숙하게 키스하며 내 침을 삼키곤 더욱 더 살을 밀착시켰다.
"벌써……, 갈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네. 아까도 그렇고 너무 빠릅니다, 당신."
"나, 아, 앗, 앗, 싫, 아아아아!"
나는 그의 경고를 들었지만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안을 찔러오던 달콤한 살덩이를 단단히 조이자 뱃속이 아주 가득찬 느낌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쾌감이 몸에서 쏟아져 나와 비명이 되었다. 잘게 경련하며 내부가 조이는 것까지 참아내던 그는 심하게 숨을 헐떡이며 낮은 신음과 함께 내 안에 사정했다. 나는 안에 남자의 페니스와 함께 정액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보다 잔여하는 쾌감이 더 크게 몸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청나게, 크게 소리를 지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
잠깐 숨을 가다듬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에 남아있던 이물감이 쾌감으로 바뀌는 것 정도는 금방이었다. 나는 지친 신음과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눈 밑이 발그레해진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선심 쓰듯 말했다.
"지쳤으면 조금 쉬다가 계속할까요."
숨을 쌕쌕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리 올라오세요."
그는 제멋대로 체위를 정하더니 나를 덥석 안아올려 이번에는 자신의 위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아까 한 번 절정을 느끼고 몸이 지쳐 늘어진 덕분에 도저히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는 내 몸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아까보다 더 몸이 밀착했다. 완전히 그에게 연인처럼 안긴 자세였다.
낯선 남자의 탄탄하고 널찍하고 두껍기까지 한 어깨에 안기자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근육 사이로 도드라진 쇄골 뼈와 그 뒤로 이어져 선명하게 솟아오른 승모근이 울룩불룩 움직이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 부분에 어색하게 기댔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것도 잠시, 단단한 팔이 내 몸을 갑작스레 안아 조이자 다시 약간 불편해졌다.
충분히 쉰 것 같자 그는 내 엉덩이를 쥐고 위에서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사람 하나 체중을 버텨야 하니 굉장히 힘들 텐데도 속도가 무척 안정적이었다. 나는 불안한 자세에 놀라서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이 체위가 확실히 낫군요……."
그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왠지 전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데, 그런 것 치고는 꽤 빨리 사정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너무 빨리 사정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아까 상대 남자를 조루라고 놀렸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무리해서 다시 한 번 섹스를 진행하려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는 본격적으로 내 엉덩이를 상하전후로 움직였다. 꾸밈 없는 남자의 거친 신음이 바로 앞에서 쏟아졌다. 나는 그의 팔에 약간 아플 정도로 안겨 다시 한 번 아까처럼 느꼈다. 지친 아래에도 자극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쾌감이 쌓여갔다.
"흐윽, 응, 거기, 아앗, 거, 아응!"
착각인지 아까보다 부푼 페니스는 전보다 강한 압박감을 주며 아래를 찔러들어왔다. 끝부분이 전과 달리 적게 움직이며 안쪽을 빠르고 짧게 집중해서 자극했다. 힘이 빠져 있던 다리에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를 맞대고 그가 원하는 대로 달싹달싹 움직였다.
기분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 곳이 내가 있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곳을 맞대는 상대가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이라는 것도 잊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잊었다. 나는 방금 절정에 다다랐다는 사실도 잊고 또 한 번 비명을 지르며 가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그의 목을 껴안고 위에서 흔들린 기억밖에 없었다. 소파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남자는 내 몸을 공중에 띄워 안고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찔러왔다. 지친 몸이 그의 팔에 강하게 끌어안겼다. 나는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절정의 순간에 더 이상 몸에 쌓이는 부담을 감내하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
"첫 성교섭에는 무사히 성공하셨습니까?"
"아아, 그래. 오히려 너무 심취해 버려서 자제하지 못하고 끝까지 쏟아부어 버렸습니다. 집사, 타월을."
나는 낯선 두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렴풋이 잠이 깼다. 남자의 손이 허벅지를 벌려 열고 다리 사이에 축축한 무언가를 가져다 댔다.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내 허벅지와 엉덩이에 묻은 것들을 젖은 타월로 닦아내는 것 같다. 미지근한 온도라 처음에는 닿는 줄도 몰랐다. 예민한 곳을 스치자 약한 신음이 나왔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많은 양인데도 금세 수월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종부를 청하실 생각이십니까."
"처음 데려오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그럴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후원으로 끝내기엔 아깝군요. 앞으로 저의 에스트라를 받아내 주실 귀한 몸이시니 신경 써서 대우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팔로 알몸을 가렸다. 불안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는 이미 몸을 섞은 적 있는 보라색 머리의 남자 한 명만이 아니라, 나를 처음 데려왔던 나이든 남자도 있었다. 게다가 이 쪽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소파 너머로 사용인 남자가 둘 이상…….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지며 급히 가릴 것을 찾았다.
그 모습을 불안함의 몸짓으로 오인한 듯 남자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 토닥여 주었다.
"정신이 들었습니까? 당신의 방을 준비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니 우선은 객실에서 지냅시다."
"후으……."
내 옷은 이미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는 새 브래지어까지 벗겼는지, 나는 완전한 알몸이었다. 남자는 알몸인 나를 받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 곳에서 일하는 다른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비상식적인 곳이니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성생활에 무감각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느끼자마자 헉, 하고 숨을 삼키고는 급히 가슴을 싸맸다. 첫경험으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시선까지 받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남자는 나를 안아 든 채 다시 한 번 고쳐 보듬었다.
"힘듭니까? 낯선 곳에서 온 직후 엘리시온의 마력을 그렇게 갑작스레 받아들여서 그럴 겁니다.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겁니다. 더 푹 쉬실 수 있게 평안의 주문을 걸어드리지요."
남자가 복도를 지나쳐 문 앞에 서서 천천히 고갯짓을 하자 사용인 한 명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침대의 이불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나를 뉘였다.
"그럼 저도 이대로 조금 쉬어야겠군요……."
남자의 팔이 내가 베고 있는 베게 위로 향했다. 팔베게를 해 주는 것처럼 팔을 두르고 침대 가장자리에서 옆으로 누웠다. 불편한 상황이 틀림없을 텐데도, 마치 마법처럼 마음이 고요해지며 눈이 자연스레 감겼다. 까마득한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혼자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감싸고 주위를 살폈다. 아치형의 큰 창문, 그리고 햇살은 창가에 달린 삼중 커튼 바깥으로 아주 조금씩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무 버튼이 달린 끈 두 줄이 침대맡에 걸려 있다. 하나가 아무래도 커튼과 연결된 것 같아 잡아당겨 보았더니 커튼이 당기는 만큼 가로로 벌어졌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방이 확 밝아졌다. 너무 밝아 잠깐동안 눈이 부셔서 반대쪽 끈을 당겼는데 이번에는 커튼이 움직이는 대신 어딘가에서 작게 종이 울렸다. 이건 커튼과 무관한 끈인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커튼을 치는 끈과 닫는 끈은 같았다. 커튼이 가로로 한계까지 걷히고 나서도 끈을 놓지 않으면 다시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닫혀 원하는 만큼 조절할 수도 있었다. 의외로 편리하다고 생각해서 작게 감탄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이나 님,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께서는 이미 새벽에 출근하셨습니다."
"……."
약간 당황했다. 다른 쪽 끈은 사람을 부르는 용도였나 보다. 지금 보니 명백하게 한 쪽만 커튼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쪽은 벽 뒤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올렸다. 그는 은빛의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 속옷과 끈 달린 샌들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이 의복이 이제부터 유이나님께서 착용하셔야 하는 디베르타의 제복이 됩니다. 등원하지 않으시는 날에는 자유로운 복장을 입으셔도 무방하나……."
"잠깐만요, 이, 이건 수영복이잖아요!"
"……오늘은 등원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 복장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집사는 내가 옷을 쳐다보자마자 질색하는데도 표정 변화 한 점 없이 말을 끝마쳤다. 나는 옷을 뒤적거리다가 생각보다 면적이 작은 것 같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비키니 수영복도 입어본 적 없는데……. 이 옷은 일반적인 비키니보다 더 노출이 심해 보였다.
"그럼 착용을 도와드릴 사람이 필요하십니까?"
"……."
나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집사는 입고 나서 방을 나오면 아침식사가 마련된 식당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나가자 옷을 다시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입으라고 두고 간 옷은 상하로 나뉜 속옷이었다. 색은 차콜 계통이고 소재는 실크인 듯 하다. 삼각형의 천이 붙은 비키니 상의와 밑위가 낮은 하의로 이루어져 있었고 끈은 단순한 원형의 버클로 양쪽에서 당겨 조이게 되어 있다. 아래는 그렇다쳐도 위는 천의 면적이 너무 작았다. 가슴을 그다지 안정적으로 가려주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가슴을 팔로 감싼 채 문을 열었더니 집사가 식당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나 현기증이 났다. 생각해 보면 어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중년의 집사는 의자에 나를 앉히고 식기의 용도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포크 모양이 유독 길쭉해서 조금 특이한 것 외에는 나머지는 대체로 음식을 뜬다는 목적에 맞게 만들어져 있어 내가 쓰던 것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곧 아침식사가 차려졌다. 사용인이 내 앞의 접시 위에 아삭하게 튀긴 무언가가 올라간 스프를 놓아 주었다. 아주 부드러운 빵이 든 바구니도, 작은 보울에 담긴 과일 조각도. 처음에는 주변을 경계하며 스프를 홀짝홀짝 조금씩 떠 마시다가 마지막엔 남김없이 긁어 먹었다.
"한 접시 더 드시겠습니까?"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넉넉한 양으로 올라온 빵을 남김없이 먹었더니 배가 너무 불렀다.
"자, 그럼 오늘의 스케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에는 레마슬레이그의 디베르타에 등원, 첫 날이니만큼 그 곳에서 간단한 설명만 듣고 나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노예시장에 들러 유이나 님의 시중을 들 소년종을 두 명 정도 구입합니다. 노예 시장에서 나온 뒤에도 피로하지 않으시다면 마지막으로 레마슬레이그의 시장에 방문하고, 그렇지 않다면 방문을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노예, 시장? 잘못 들은 건가? 문맥을 보아 어떻게 해석해도 나를 노예 시장에 가져다 팔겠다는 의미가 아님은 확실했지만 그런 낯선 단어는 영 찜찜하게 느껴졌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해 주십시오."
"저기……, 어제는 분명 말이 안 통했던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여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죠?"
내 말에 집사는 상의 소매에서 어제 봤던 붉은 리본의 펜던트를 꺼냈다. 납작한 금판 앞에는 마노 같은 둥근 보석이 박혀 있고 뒤에는 글씨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 이 펜던트 로커스 덕분입니다. 로커스라는 것은 마법이 새겨진 도구 중에서도 상시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펜던트 로커스에는 일종의 통역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에 펜던트를 쥐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일정 반경 안에서는 저절로 통역이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아."
"물론 빠른 시일 내 도구의 도움 없이 언어를 통용할 수 있게 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당분간은 주인님께서 로커스에 마력을 주기적으로 충전해 주시겠지만, 마도구는 단순히 사용의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소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말을 끝마치고 바로 펜던트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용인 한 명이 노크를 하며 무언가를 말했다. 처음 듣는 언어였다. 멀리까지는 통역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집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거의 속옷 차림이었지만 장본인인 나 말고는 특별히 내 옷차림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저택 입구에는 딱 두 명이 탈 자리가 있는 마차가 있었다. 안에는 푹신한 벨벳 소파가 있었고 밖은 황동빛과 흰 페인트로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여 있다. 어제 이 저택으로 올 때 탔던 것보다는 작지만 그 못지 않게 화려했다. 지구로 따지면 유명 회사의 외제차 정도 수준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동물은 어제와 달랐다. 날개 달린 말 대신에 새 한 마리가 묶여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는 타조와 가장 닮았다. 목이 S자로 부드럽게 굽어 있었고 부리는 두껍고 짧다. 털과 깃털 색은 엷은 노랑이었다. 다리는 새 다리라기에 꽤 굵었고 발은 새보다는 낙타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새를 볼 겨를도 없이 당장 몸부터 가리기 위해 마차 위로 올라탔다. 집사는 마차 앞의 마부석에 올라탔다. 커다란 새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마차를 끌었다.
이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차는 엄청나게 큰 건물에 멈춰 섰다. 마차의 창문은 너무 작아서, 집사가 문을 열어 주자 비로소 사방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건물 주위에 둘러쳐진 담벼락은 낮고 넓었는데 그에 비하면 건물의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정확히 각이 진 기둥들은 흠 없는 대리석으로 깎여 있었고 바닥은 넓은 돌 타일이 깔려 무척 깨끗하고 매끈매끈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 짤막한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매고 대걸레를 이용해 수시로 바닥을 닦으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너무 어려서 처음에는 성별 구분이 안 갔었는데 몇 명인가 보고 나니 확실히 전부 남자아이가 맞았다.
'여기가 디베르타라는 곳인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에는 얼핏 봐도 신분이 달라 보이는 수많은 남자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붉은 커튼이 쳐진 곳은 값비싸 보이는 복장을 한 남자들이 앉아 있다. 반대로 석재로 만들어진 긴 테이블에는 밭일을 하다 온 건지 먼지투성이의 멜빵 바지를 입은 수염 난 남자들이 저들끼리 모여 산가지를 굴리며 놀고 있는 중이었다.
접수처로 보이는 곳에서 집사가 무언가 말을 건네자, 건너편에서 중년의 여자 한 명이 나왔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집사가 손목에서 서둘러 펜던트를 풀어 내게 건넸으나, 여자가 제지했다.
"허가받지 않은 마도구는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요."
집사가 무언가 말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상당히 우악스럽게 그 여자의 손에 잡아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꽤 복잡해서 얼핏 봐도 표지판을 확실히 읽지 않으면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쭉 직선으로만 데리고 들어갔다. 다른 길로는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입구에 남자밖에 없었다면, 안쪽은 성비율이 그나마 비슷한 편이었다. 인원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젊은 여자들은 나와 똑같은 회색의 비키니 제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간혹 색이 다른 부분도 있었다. 어떻게 봐도 속옷이었지만, 이 옷이 이곳의 '지정 복장'이라고 한다. 나이 든 여자들은 아주 가끔씩만 보였는데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감싸는 복장을 하고 돌아다녔다.
복도 끝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길을 알려주겠다는 듯 표지판을 가리키며 왼쪽 방향을 몇 차례 손가락질했다.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딱 봐도 누군가가 생활하고 있는 숙소 건물 같았다. 왼쪽 건물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가는 길마다 군데군데 젊은 남자들이 서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며 힐끔거리거나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건물에서 가장 큰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는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한 여자들이 열 명 넘게 모여 앉아 있었다.
"초급 사회교육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보리색의 숄을 두른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말이 통하고 있었다. 그녀가 착용한 액세서리 여러 개 중 하나가 아마 그 펜던트 로커스와 같은 원리의 마법 도구일 것이다. 그녀는 비키니 같은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으며 백금빛의 단발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있었다.
"약 4개월간 여러분의 사회교육을 담당할 제 3계급의 엘로나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곳, 초급 3반의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그녀는 팔에 끼고 온 공책을 뒤적거리더니 출석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나를 '맡았다'는 남자인 에이반에게 이미 어제 이름을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어렴풋이 연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도록 배정된 여자들은 약 마흔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출석한 여자들은 스무 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 출석과 비출석을 체크한 다음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이 세계, 엘리시온에 대해 궁금한 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엘리시온이라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이 세계를 의미합니다. 엘리시온의 인간들은 별의 축복을 받아 강한 마력을 타고난 대신 오직 남성밖에 없으며 남성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시는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복제의 형태를 띤 단성 생식은 불안정하고 치명적이지요. 엘리시온은 그들에게 마법으로 다른 세계의 여성을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그만큼 큰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존속을 위하여 남자들은 마력에 따라 계급을 차등 분류하고, 마력이 큰 이들이 오로지 마력을 소모하는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엘리시온은 계급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권자들은 하층 계급민을 위해 매년 일정한 비율의 여성을 다른 세계에서 불러올 수 있도록 마력을 납세하게 됩니다.
일년간 모인 마력은 별의 마법진 위에 모여 인접한 각 행성에서 엘리시온의 아이를 낳기에 가장 적당한 여성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여러분들이 이 장소에 계신 겁니다. 물론 나도,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모든 여성들도 소녀 시절에 당신들과 같은 과정을 거쳤답니다. 전부 바깥 세계에서 유입되어 온 것이죠."
처음 듣게 된 구체적인 진실에 학생들은 동요했으나,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그렇게 불러 왔다고 해도 여성의 숫자는 엘리시온의 남성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사회는 중요한 재산인 여성을 공유하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지요.
여러분들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곳 '디베르타'에서 일 년간 기초 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물론 공부에 불성실하게 임할 경우 그 기간은 더 길어질 수가 있답니다. 기초 교육을 완수하고 언어와 사회 지식에 대해 습득한 여성은 사회로 나가 엘리시온 남성들을 남편이나 연인으로 맞이하고, 그들의 '알'을 낳게 됩니다. 수가 적은 여성에게는 동일 계급의 남성에 비해 갖가지 특권이 주어지지만,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알을 낳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일처다부? 게다가 알을 낳는다고? 사람이 새도 아닌데 어떻게 알을 낳는단 말인가. 의문을 가진 여자는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당장 알을 낳는 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그 부분은 오후에 따로 성교육을 통해 듣게 된다고, 얼버무린 설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수업은 기본적인 것만 들었는데도 벌써 두 시간이 훅 지나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하는 말은 통역이 되어 들리는데 각각 다른 세계에서 온 우리들의 말은 서로 전혀 통역이 되지 않았다. 어제 내가 펜던트 로커스를 직접 쥐었을 때는 다른 여자들의 언어도 통역되어 들렸던 것 같은데, 마법의 종류에 따라 다른 건지, 아니면 마법을 쓰는 주체에 따라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두 번 연속으로 종이 울리기 전에 붉은 석벽의 건물로 가서 성교육 수업을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방에서 나갔다. 그 전에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듣기로는 흰 벽돌 건물이 식당이고, 그 옆의 붉은 돌로 지어진 건물이 성교육 수업 장소라고 했다.
덧붙여 지금 우리가 수업을 들은 곳은 푸른 벽돌 건물, 실제로 푸른 염료를 풀어 구운 벽돌로 벽을 꽉 채운 것은 아니고 포인트를 주듯 군데군데 보이는 정도였다. 이 건물 중앙에는 디베르타의 여자들이라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장서관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어차피 글을 읽지 못해 소용 없겠지만 말이다. 사회 교육을 받지 않는 날에는 격일로 언어 교육을 받게 되며 그것도 마찬가지로 4개월 단위였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에게서 듣지 못했지만, 실제로 식당 주변을 돌아 보니 유독 눈에 띄게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도 하나 보였다. 지금은 그 용도를 아직 모르겠다. 사실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런 사소한 일을 궁금해하기에는 당장 내 앞에 닥친 일들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식당은 여자들로 바글거렸다. 흰색 목재로 된 공간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유독 한산한 구역이다. 그 곳에는 대다수의 여자들이 입은 회색 속옷 대신 붉거나 푸른 색이 들어간 속옷 차림을 한 여자들이 여유롭게 점심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줄을 서 있다가도 몇 번이나 새치기를 당했다. 그렇게 긴 줄도 아닌데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탓에 곳곳에서 말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쟁반에 갈색의 빵 하나와 수프 한 그릇을 받고, 겨우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어지간한 학생 식당보다 더 소란스럽고 무규칙적이었다.
하긴 세계 각국에서 무작위로 여자들을 뽑아 왔으니 어련하겠는가. 각자 살던 문화도 다르고 생활양상도 달랐을 터. 심지어 모든 여자들이 가정교육을 받거나 식사 예절을 배웠으리라는 확신은 없다. 이곳 디베르타라는 곳은 비교적 여자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는 장소였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서 딱딱한 갈색 빵을 씹어 삼켰다.
아침 식사때 먹었던 것보다는 맛이 없었지만 수프와 같이 먹으니 충분히 삼킬 만 했다. 수프는 아침 것과 달리 깍뚝 썰려 들어간 재료가 전부 보이는 맑은 국 같은 것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곳에서 식사하고 나왔더니 머리가 윙윙 울렸다. 다음 수업을 듣기 전에 조금 쉬어야겠다.
성교육을 받는 붉은 석벽의 건물로 가는 길에, 나는 여러 번 충격을 받았다.
가는 도중만 해도 음란한 형태의 석상 여러 개가 보란 듯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 자체도 자세히 보니 묘한 붉은 빛을 띠어 멀리서 그냥 볼 때와 달리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심지어 건물 내부 복도를 장식한 서랍장과 스툴 위에는 모조 성기 같은 것이 장식처럼 놓여 있기도 했다. 여성기의 모조는 거의 없고 하나같이 남성의 형태였는데 색도 재질도 모양도 굉장히 다양했다. 아무리 내가 성인이라도 이런 걸 보면 민망했다.
낯뜨거운 그림이 걸려 있는 회랑도 있었고 용도 불명의 방도 많았다. 성교육만 가르치는 건물 치고는 크고 넓어 보였다. 방 안에도 야한 포즈를 한 남녀가 새겨진 태피스트리 장식이 사방에 걸려 있어, 나는 불편한 표정으로 그 부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리를 가르치는 쪽은 다행히 여자였는데, 소담하고 우아한 인상의 사회 교육 선생과 달리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 있었다.
"안녕, 이곳의 필수 성교육 담당인 줄리아라고 해요."
앉고 싶은 곳에 앉으세요, 하며 그녀는 방석이 마구잡이로 깔린 바닥을 가리켰다. 방석 위에 앉는 여자도 있고 그냥 앉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맨바닥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맨살이 많이 드러난 배를 감쌌다. 그녀는 여자들이 어떻게 앉든 개의치 않고, 단지 모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자 얘기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이 엘리시온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할 거에요. 다른 문화권에서 온 여자들을 배려해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수업은 천천히, 그리고 선택적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은 이 장소에서 성교의 기술과 쾌감을 얻는 법, 그리고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들을 위한 것이니 오전 수업은 빠지더라도 여기에는 순순히 꼬박꼬박 출석하는 편이 좋을 거에요."
여자들의 표정이 경악하거나 좋지 않아졌다. 아예 단어를 못 알아듣는 몇몇도 있었지만 분위기를 보아 대충은 짐작한 것 같다. 나도 못 알아듣는 단어가 몇 개 있었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디베르타에 머무를 수 있는 남자들은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일꾼 소년들. 그 꼬질꼬질한 꼬맹이들은 여기서 청소와 세탁, 여자들의 심부름 등의 잡일을 하며 지냅니다. 또 하나는 공익을 위해 근무하는 가드들입니다. 가드는 청년기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출시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거나 디베르타 안에서 간혹 성질을 못 이기고 강압적으로 구는 남성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한답니다."
그녀는 설명을 계속했다.
"나머지는 모두 디베르타의 방문자인데, 이 곳에는 신분이 아주 확실한 남자들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답니다.
방문자 중에서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이미 만나는 여자가 있는 몸, 또 하나는 불특정 상대를 찾거나 지속적으로 만날 여자를 찾기 위해 이 곳을 방문한 경우에요. 처음에는 둘의 구분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분들도 곧 쉽게 분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 전까지는 먼저 말을 거는 남자들만을 상대하는 것을 권해 드려요.
또, 간혹 디베르타에서 '파티'가 열릴 때가 있어요."
그녀는 파티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설명해 주겠다며 말을 돌렸다. 문맥을 보아하니 난교 파티 비슷한 것 같았다.
"파티 때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방문자들이 먼저 성교를 요청하고, 당신들은 그것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요. 디베르타 내에서는 어떤 남자도 여자에게 위협이나 강압을 가할 수 없답니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반드시 가드에게 전달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들은 아직 젊고 성행위 경험도 많지 않을 테니, 가급적, 이 수업을 완수하고 나서부터 남자의 요청에 본격적으로 응하는 것을 권해드려요."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 마력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엘리시온 남자들의 마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인트라. 힘의 근원이자 안정적인 코어 마력입니다. 밀도가 높으며 가라앉는 성질이 있고 그에 따라 많은 양을 지니고 있어도 몸에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에스트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에스트라 마력입니다. 가볍고 쉽게 날뛰며 제어되지 않고 꾸준한 성욕을 유발하며 또한 급격한 감정변화를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는 마력이 이 에스트라입니다. 자위로 부작용의 일시적인 해소가 가능합니다만 해소의 질이 상당히 낮습니다. 뭐, 혼자 해결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으니 여자 코빼기도 못 보는 제 6계급 남자들도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남자는 신체의 특성상 인트라와 에스트라를 반드시 동시에 몸에 지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비율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둘 다 있어야만 하며 인위적으로 하나를 영구히 없애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체질 문제라고 보면 편합니다.
이 때 여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에스트라를 받아들여 자기 자신의 인트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답니다. 바로 남자와의 성행위로써, 말입니다. 또한 여자는 몸에 오직 인트라, 한 종류의 마력만을 가지기 때문에 남자와 같은 부작용도 없습니다.
에스트라의 제어에 문제를 겪는 청년기 남자들은 본인의 마력량과 무관하게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여자와의 성행위가 권장됩니다. 상대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면 마력의 불안정함이 줄어들어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혹은 그 이하의 횟수로도 상관이 없어집니다. 대신 성욕이 왕성한 청년기 남성들이 여자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엘리시온에서는 결혼 제도의 혜택이 오로지 안정기 남성들에게만 주어진답니다. 유일하게 예외인 것이 후원 제도인데요, 아마 이 중에도 상위 계급 남성의 후원을 받고 있는 여자가 있을 거에요. 하지만 사실상 후원이라는 것은 강한 알을 낳을 상위 계급 여성을 처음부터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에요. 그것이 변질되어 '후원 기간 동안은 안정적으로 에스트라를 해소할 수가 있다'며 이 특권을 남용하는 남자들이 간혹 있지요. 사실 피후원자는 후원 상대와 굳이 몸을 섞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여느 남자들에 비해 입장이 유리할 뿐이지요. 그 점은 알아두세요."
굳이 몸을 섞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다음 얘기를 들어 보니, 어차피 누가 됐든 성행위는 이곳 엘리시온 여자들에게 있어 필수이자 의무였다. 차라리 상대가 그 남자라는 사실은 내게 있어 행운이었다.
'능숙하고 경험도 많아 보였고……, 그래서인지 처음인데 전혀 아프지도 않았어.'
"청년기 남성들을 여러 번 상대하다 보면 여러분들 역시 엘리시온의 알을 품을 수 있는 몸이 된답니다. 그 이후부터는 안정기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알'을 낳을 수가 있어요. 알을 품는 기간은 마력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여러 남자의 것을 중복해서 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기간은 상관이 없지요. 특정 상대의 알을 품게 되면 그 사실을 남자에게 알리고 알을 낳아 전달해 주는 것까지가 여성의 의무랍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몸에 지녀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마력을 읽는 법을 배워야만 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알을 품게 되어도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 낳기 전까지는 구분할 수가 없으니까요."
줄리아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과제를 내 주었다.
"혹시 아직 이 곳에 온 뒤 첫 성행위를 하지 못한 여자들이 있나요?"
"……."
나는 이미 어제 경험을 끝냈지만,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몇몇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과제입니다. 누구든 상관 없습니다. 남자의 에스트라를 한 번 이상 받아 오세요. 남자를 상대하기 겁이 나는 학생들은 6번 방의 구속구를 이용해도 괜찮습니다. 구속구에 남자를 묶고 자위하듯 사용하세요. 기한은 모레, 두 번째 수업 시작 전까지입니다."
충격적인 과제를 하나 던져 놓고 그녀는 수업을 종료했다.
입구로 나갔더니 집사는 오전에 헤어진 장소에서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수업은 무사히 들으셨습니까."
"아, 응……, 네……."
"점심식사는 안에서 제공한다고 들었는데 식사를 하고 오신 겁니까?"
"네."
"다음 스케줄은 노예시장입니다. 그럼 오르십시오."
나는 집사가 내려주는 계단 위로 올라가 다시 마차에 탑승했다. 그 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 옷차림을 감상하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의 시선과는 조금 달랐다.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한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입고 있는 것은 나와 똑같았지만 붉은 머리로 보아 출신은 전혀 달라 보였고, 피부는 적당히 그을려 까무잡잡했다. 남자들 틈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차가 예쁘게 생겨서 구경하는 건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붉은 벨벳 소파에 올라 앉았다. 집사가 문을 닫아 주었다.
자세히 배운 것은 오늘이지만, 엘리시온의 인간들은 국가와 지역을 막론하고 총 여섯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최상위계급이 리드와 도미넌트. 각각 제 1계급, 제 2계급으로 불리우며 마력과 혈통이라는 조건이 거의 반드시 필요했다. 내 후원자도 도미넌트 계급의 남자라고 들은 것 같다. 사실상 국경을 보호하거나 여자를 데려오는 데 쓰이는 대다수의 마력이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회의 존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급이기도 하다. 이 리드와 도미넌트를 의미하는 색상이 붉은 색. 리드 계급이나 도미넌트 계급 남성을 최소 다섯 명 남편으로 맞이한 여자들이 당당하게 붉은 색의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이 스칼라. 제 3계급이었다. 순수한 마력보다는 마법 응용력과 지식을 겨루는 몇 차례의 시험에 합격한 경우 스칼라 계급이 될 수 있었다. 공직에 근무할 수 있으며 국가적, 국제적 행정 처리를 대다수 도맡고 있는 직급이기도 하다. 그 힘이 제 4계급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상 명예계급으로 4계급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스칼라 계급 이상 되는 남자를 여덟 명 이상 남편으로 맞이했을 경우 여성은 푸른 옷을 걸치는 것이 허락된다.
미들러는 제 4계급으로 실질적인 서민에 속하는 이들이 남들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낼 때 이같은 특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돈이 많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5계급인 페전트. 엘리시온 인구 중 9할 가까이를 차지하는 상당수의 서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는 노예들이 위의 계급제에서 설명되지 않은 마지막 계급. 제 6계급의 노예들이다. 그들은 계급 외의 존재로 간주되며 인격 대신 국가 혹은 개인의 소유물로서만 인정된다고 한다. 사실상 여성은 공유물이기 때문에 범죄를 지어도 노예계급으로 추락하는 일은 없지만 남성은 달랐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큰 빚을 져서 갚을 길 없는 제 5계급 남성들이 주로 노예가 되었고, 반대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인 경우도 있었다. 첫 번째는 드물지만 종속 노예가 알을 가졌을 경우. 노예인 여성은 없기 때문에 모친은 상위 계급일 것이 분명하지만 엘리시온의 신분은 무조건 부계를 따르기에 노예의 씨를 받아 나온 알은 노예의 알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포기된' 알의 경우.
남녀의 성비가 크게 차이나기 때문에, 엘리시온의 여자에게는 알을 낳을 의무만이 있었다. 여러 남자의 알을 낳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저 알을 품고 낳기만도 바쁜 것이다. 낳은 뒤 기르는 것은 온전히 각각의 남자의 몫. 만약 알을 건네 줄 남자가 도망쳤거나 사고를 당해 죽었을 경우 알을 보육원에 당당히 맡겨도 처벌받지 않는다. 반면 엘리시온의 남자들은 자신의 알을 포기할 권리가 일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 알을 배게 하면,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고 알을 길러야만 했다. 자신이 직접 기르든 돈을 주고 고용한 시터에게 맡기든.
육아는 보통 힘들고 고된 일이기에 여기서 알을 포기하는 남자들이 간혹 생겼다. 다른 할 일이 있거나, 생계를 유지할 돈이 없거나, 아니면 사정이 있어 알을 낳은 것을 숨겨야 하거나. 물론 육아 포기 행위는 큰 처벌의 대상이지만 사실상 버려진 알만으로 그 부친을 찾기는 힘들다. 이렇게 버려진 알들은 신분이 따로 없기 때문에 국가로 귀속되어 공공 노예가 된다. 그들이 다른 노예와 다른 점은, 성인이 되고 나면 자신의 의지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죄로 인해 노예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디베르타에서 노동을 하던 소년들이 공공 노예라는 점에 내심 놀랐다. 그들은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대다수의 소년 노예들이 그랬다. 소년 노예들은 아직 신체가 미발달한 상태이며, 그 특성상 주로 여성들의 시중을 드는 데에 쓰인다고 한다. 아예 성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중을 드는 입장이면서도 수시로 성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청년기 노예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성인기 남자들은 더더욱 곤란하다. 상위 계급의 남편들 중에서 자신의 아내가 굳이 사용인의 알을 낳아 주길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노예 시장은 디베르타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대다수는 노예를 거래하는 일반 시민이었다. 노예라는 것은 저렴한 물건도 아니고 구입시 세금도 부담해야 하므로 구매자는 대체로 돈이 많아 보이는 미들러들이다. 길바닥에서 사람들이 유독 모여 있는 곳이 있으면, 노예를 경매에 붙이는 자리였다. 집사는 마차를 안쪽에 멈춰 세우고 노예시장 중앙에 있는 큰 석조 건물에 나를 내리게 했다.
경매에 붙여진 노예는 나무 단상 위로 올라가 적당한 가격에 팔릴 때까지 대기했다. 집사가 말했다.
"그 쪽은 중고 노예나 범죄 노예를 거래하는 장소입니다. 보십시오, 몸의 낙인과 양 팔의 구속구는 저 자가 중범죄를 저질러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랍니다. 특히 악질은 주홍색의 낙인입니다. 알이나 유아,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군요."
"자아, 이 쪽입니다."
집사는 나를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비교적 멀끔해 보이는 인상의 노예들이 있었다. 몇몇은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노예라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뻔 했다.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이들은 목에 빚의 액수로 추정되는 팻말을 걸고 있었고, 해당 금액은 물론이고 노예세까지 추가로 지불해야만 그 노예를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대신 노예가 해당하는 빚을 모두 갚기 전가지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으니 오래 쓸 노예가 필요한 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집사는 말했다.
"소년종은 어차피 나이가 차면 다른 아이로 새로 들여야 하니, 한 명은 나이가 어린 아이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아이로 데려오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에? 제가 고르는 건가요?"
"후보를 몇 명 골라 드릴 테니 그 안에서 선택하십시오."
집사는 노예 공급자로 보이는 남자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발목에 얇은 사슬이 묶인 어린아이들과,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소년들을 데리고 나왔다. 가장 어린 아이는 초등학생 미만으로 보였고 나이가 많은 아이는 열 살을 조금 넘겼다. 집사가 펜던트 로커스를 내게 건네 주었다. 나는 아이들의 상태를 어색하게 훑어보았다.
노예를 직접 고른다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듣자 하니 어차피 여성은 노예 계급이 되지 못하는 것이 이곳 엘리시온의 법이라고 한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 쳐도, 버려졌다는 이유만으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니. 약간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내 코가 석자이긴 하지만.'
낯선 곳으로 끌려나와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은 나도 별 다를 바 없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설명했다.
"태생부터 마력이 높은 아이들은 전부 군사 쪽으로 차출되었고, 여기 남은 아이들은 마력이 하위권에 속하는 편입니다. 순종적이고 반항심도 거의 없지요. 가장 나이가 많은 꼬마도 청년기가 되기까지 적어도 5년은 남았어요. 어떤 녀석을 고르셔도 좋습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선택권을 집사에게 맡겼다. 집사는 금발 머리의 소년과 붉은 머리의 더 어린 소년을 지목했다.
"저 둘이 가장 괜찮아 보입니다만 어떻습니까?"
"이야, 좋은 선택이십니다! 금발 쪽은 성실하고 일도 잘 해서 보육원에서도 평이 좋은 녀석이었지요. 게다가 저래 보여도 어립니다.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적발 쪽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흠흠. 그래도 조금만 가르치면 충분히 한 사람 몫 일을 잘해 낼 겁니다."
둘다 피부가 뽀얗고 깨끗해서 딱 봐도 건강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집사의 눈에 들 만도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는 둘을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내가 숫자를 읽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종이에 쓰여진 가격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더 어린 쪽이 한 자릿수가 많았다. 나이가 어리면 더 비싸게 팔리는 구조인 듯 하다.
소년 두 명을 구입하고 나오니 벌써 하늘 한 켠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집사는 나머지 일정을 내일로 미루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소년 둘이 짐칸에 올라타자,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나이가 다 되면 저 아이들은 풀어 주는 건가요?"
"예, 보통은 자유롭게 풀어 주거나 고용한 집안에서 정식으로 급료를 주고 재계약을 하게 됩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일을 잘 할 경우에 한해서겠지만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