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95화 (395/401)

애벌레. 번데기. 그리고. (1)

―그래! 마하야!!

“선생님, 어디세요?”

―나 아직 호텔이지! 야 근데 아까부터 이놈들이 찾아와서 뭐라고 하는데?

“왜 안 가셨어요. 선수촌으로 먼저 가 계세요.”

―너는 이놈아!?

“저는 괜찮아요. 여기 있을게요.”

―그런 게 어딨어!!

써니 씨가 힘을 써 마침내 황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전부 설명을 드렸다. 이런저런 것부터 그녀가 들려 준 모든 것을.

―씹어 죽일 놈의 자식들이! 신성한 스포츠에 어디 그딴 개짓거리를 하고 지랄들이야! 내 이놈들을 당장!!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언론도 대한체육회도 믿을 수 없다.

대사관이 꼬여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보다 아래에 있는 집단을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모든 게 의심 가는 상황에선 정면 돌파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다.

생각보다 거대한 벽이 있음에 황 선생님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니. 올림픽이 뭐라고… 물론 중요는 하겠지만….

“모르겠어요. 근데 이 사람들한텐 큰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놈아…. 여자를 만나도 조심 좀 할 것이지….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그럼 너 아직도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냐?

“네.”

―이래도 되는 건가….

“선생님, 지금 딱 한 명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되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안 그러면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팀이 남아 있다. 괜한 분풀이가 불똥이 되지 않게 막고 싶었다.

“일단 선생님부터도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하이고… 난 왜 하필 그날 일찍 잠이 들어가지고….

“그런 말씀하지 마시고요. 사람이 졸리면 자야죠….”

―이게 무슨 일이라냐…. 어? 열심히 하던 놈이 왜 이런 일을 당하고 있어….

“걱정 마세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니.

“중국이 무슨 짓을 하든 제가 이겨요.”

―하하하…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는데.

무슨 자신감이냐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구마하잖아요.”

―흐하하! 이 자식이.

“이 정도 위기쯤은 있어야 형평성이 맞죠.”

―아이고. 이놈이 어른을 웃기려고….

한 시간 뒤. 감독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황 선생님께 들었다면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널 보고 싶어도 못 만나게 한다면서?

“네. 여기 경호원들이 문을 지키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되는 건지….

“…….”

―그때 그 대사관 직원이 대사관이 아니라고?

“모르겠어요. 아무튼, 뭔가 복잡한 거 같아요.”

―젠장. 유명한 놈 데리고 있어도 별일 없구나 했는데, 마지막에 일이 터지다니.

“죄송합니다….”

―근데 마하야.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든 이리로 오지. 왜 거기 있으려고 하는 거야?

“그냥. 주변이 이래서야… 제가 없는 게 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문식이 때문에 그러냐?

“형도 결승이잖아요.”

―어린놈이 마음 씀씀이하고는….

어차피 남은 훈련이라 봐야 컨디션 체크 차원이니 몸만 불편하지 않다면 감독님도 혼자 있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하셨다.

―중요한 건 멘탈인데….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오히려 저도 이런 일을 당해서 그런가,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섰어요.”

―그래도 결정적일 때 선수를 혼자 두는데….

“죄송합니다, 감독님. 하지만 제가 벌인 일.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 올림픽 끝나고 처분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그런 건 됐고.

“네?”

―됐다고 이놈아. 책임은 뭔 책임이야.

“어… 그래도….”

―열심히 했잖아.

“네??”

―너 말이야. 너. 복싱 시작하고 여기까지. 짧은 시간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생각해 보면 니가 실수한 게 이번 딱 한 번이니까.

“…….”

―단지 그 한번이 재수 없게 지금 걸렸을 뿐인데. 따져보면 그것도 저쪽이 작정을 하고 달려든 거, 니 잘못만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감독님….”

―황 코치한테 그랬다면서? 놈들이 뭔 짓을 하든 어차피 니가 이긴다고.

“하하… 네. 맞습니다.”

―이런 상황에 자신감 하고는 대단한 자식.

“그래도. 사람 만나는 데 조심성 없던 거 제 실수가 맞으니까요.”

―됐어. 내려놔. 내가 선수 한두 명 키워 보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번 올림픽 끝나고 니가 계속 대표팀 생활을 할 것도 아니잖아.

“어. 그건.”

―마하야. 누구를 때린 것도 아니고. 경찰서에서 보호자 얼굴 좀 보자고 연락 온 것도 아니다. 니 나이 때 사내자식들이 여자에 미치는 건 흔한 일이야.

가슴이 욱신거리다 못 해 심장이 조여오는 거 같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태연하겠냐고.

그냥 국가대표 감독이니까. 모든 일에 책임을 느끼고 떠안는 거지.

결승 앞둔 한심한 새끼. 부담 느끼지 말라고 해 주시는 말씀들이 혼나는 것보다 더 나를 몸 둘 바 모르게 만든다….

―믿기는 어렵지만,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면 기대는 수밖에 없겠지.

“네. 감독님….”

―근데 신기하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지…? 니가 유명해서 그런가?

“저도 저지만. 이 사람들한테 메달이 가지는 의미가 큰 거 같아요.”

―거참. 이럴 때 깨닫는 게 이상하지만. 새삼 메달의 무게를 실감하는구먼.

뭐가 됐든 지금 가장 큰 위기에 처한 건 나고. 이 난관을 스스로 헤쳐 나가겠다 선택한 것도 나라고 하신다.

믿고 맡긴다. 결승 날 보자.

감독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다짐을 물으셨다.

―마하야. 정말로 그 여자는 믿을 수 있는 거냐?

고개를 돌려 써니 씨를 보았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불편하지 않게 관심을 피해주고 있다.

“네. 믿을 수 있어요.”

―오케이. 그럼 이틀 뒤에 봐.

“네.”

약소하게나마 주변 정리를 마치자, 세상과 단절 된 나와 그녀만의 시간이 남았다.

“식사하셔야죠.”

“밥이라. 그러게.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배고프네.”

“나가서 드실래요?”

“저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그럼요. 저랑 같이 움직이면 어디든 가실 수 있어요.”

“…혼자는 안 된다는 거네요.”

“마하 씨.”

그녀가 말하는 ‘저들’이란 사람들은 내가 그녀에게 빠져 있기를 바라고 있단다.

보다 더 안전한 상황을 위해서라고 설득하지만, 딱히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그럼 운동하러 가실래요?”

“어디서 운동을 해요?”

“호텔엔 수영장도 있고, 피트니스 센터도 있으니까. 마하 씨 운동하고 싶으면“

“괜찮아요. 저 원래 집돌이 성향이 있어서. 밖에 돌아다니는 거 별로 그렇게 안 좋아해요.”

나도 나지만, 방금도 이 사람이 말했듯이. 내 곁에 있는 그녀의 역할이라는 게 계속 마음이 쓰인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기분 전환 삼아 나가요.”

“…….”

“호텔이라곤 해도, 레스토랑 이것저것 있으니까.”

“네. 그래요.”

어찌됐든 신경써 주는 이 사람을 생각해 위축될 거 없이 태연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녀가 메뉴를 추천해 준다.

호텔 내부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굉장히 유명한 곳이에요. 주방장도 권위있는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었고.”

“…….”

“마하 씨. 왜 그러세요?”

“그냥 지금도 누가 우리를 감시하는 건가 싶어서.”

“신경 쓰이면 다시 돌아갈까요?”

“아무렇지 않나요?”

“뭐가요?”

“…이런 거. 그냥 이런 상황 같은 거.”

“마하 씨….”

“그냥 싫어요.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다 용서하고 이해하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역시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 감시한다는 건 그녀의 행동도 감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나를 떠나서.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안좋게만 보이는 게 싫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전 오히려 마하 씨가 더 대단한 거 같은데요.”

“제가 왜요?”

“지켜보는 눈이 있는 걸 알면서도 움츠러들거나 하질 않잖아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눅 들 거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리고. 어렸을 때 충분히 주눅 들고 살아서. 이런 거 뭐.”

“정말요? 마하 씨가요?”

“하하! 아마 세상에서 제일 소심한 애 뽑으면 그게 저였을 걸요?”

“흠. 듣고 싶다.”

“내 얘기를 하기 전에. 써니 씨 이야기를 들려줘요.”

“저요?”

“네.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혹시 무슨 약점 같은 걸 잡힌건 아닌지.”

도움이 필요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이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알고 싶다.

머리도 좋고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 왜 스스로를 이렇게 몰아붙였는지.

써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떠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저에 대해 알고 싶으세요?”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 하다고요?”

“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라고….”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짧은 한숨을 쉬며 숫자를 세듯 입을 열었다.

“12년. 아니 13년이라고 해야 할 거 같네요.”

“뭐가요?”

“제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시간이요….”

“20대 중반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나이를 따지면 거의 고향 한번도 못 돌아갔단 말 아닌가요?”

“네. 맞아요.”

평범한 데이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신장에서도 외진 곳. 정말 깊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곤륜산 아래. 척박한 땅 어딘가 깊고도 작은 마을. 영특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두뇌를 인정받아 세상 밖으로 나갈 기회를 얻었다.

우리의 초등학교를 여기선 소학교라고 부르는데, 마을에서 소학교를 마친 아이는 중학교를 신장의 주도. 우루무치에서 다니기로 결정되어 홀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태어나서 도시라는 것도 처음 봤고. 한족도 처음 만났어요.”

“네.”

“그리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학교라는 세상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저에게 닥쳤죠.”

“왕따 뭐 이런 거요?”

“네.”

덤덤하게 말하지만, 나 또한 무시당하고 놀림당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그 일이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파괴적인 인생을 스스로 택했다는 건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어른들은요?”

“어른들은 일 때문에 마을에 있어야 했고.”

“아니. 내가 말하는 어른은 학교 선생님이나.”

“신장은 위구르 족의 땅이었어요.”

“어… 어? 어. 네.”

“원래대로면 선생님들이 제 편을 들어줬겠죠. 하지만 제가 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던 때는 지도부에서 지역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한족들을 이주시키고 있었어요. 그들은 산업과 금융. 경제와 문화.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고. 전 그저 외진 곳에서 홀로 건너 온 아이였죠.”

“아이고….”

“그렇게 전 우리의 땅에서 말 그대로 소수민족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요? 써니 씨는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으니까 애들이 좋아했을 거 같은데.”

“홀로 와 지켜 줄 사람이 없는 아이. 전 그때도 다른 학생들과는 생김새가 달라 주목받기 쉬웠고. 성적도 우수해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어요.”

“얼굴 예쁘고 공부 잘하면 좋아해야지. 그런 친구를 왜 미워해요?”

“생활 습관이 너무 달랐거든요.”

“…….”

“전 도시 문화나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화장실 이용하는 것 하나조차 다른 애들에겐 간단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낯설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보니까.”

그렇게. 또래들에게 그녀의 장점은 외면받고 약점이 부각되었다.

이런 것도 모르냐. 넌 이런 것도 본 적 없냐?

장난스레 묻는 질문에도 그녀는 위축되어 갔다.

약한 모습을 보이자, 놀림감으로 전락하던 신세가 점점 괴롭힘이 붙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힘들고 서글퍼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죽긴 왜 죽어요.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고마워요….”

“아니. 그럴 거면 그냥 마을로 돌아가지. 왜 굳이 학교에….”

고개를 저으며 말해 준다.

한국은 어떨지 몰라도 중국의 시골은 상상 그 이상으로 가난하고 힘들다. 그런 곳에서 온 가족이 노력해 자기를 공부시켜 주고 있는데,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건 괴롭힘을 견디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단다.

“그렇다고 그냥 참는 건 더 힘들죠.”

“그래서 저도. 어떻게든 이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어요.”

“어떻게요?”

“복수해야겠다 마음 먹었어요.”

사랑스러운 표정과 달리 온몸에선 소름 돋는 기운이 느껴진다.

“써니 씨….”

“나에게 부족한 건 무엇인가. 내게 없는 저들만이 가진 건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이구나. 힘을 가진 이들 앞에서 개인은 무력한 존재다. 저는 그런 걸 빠르게 알았던 거 같아요.”

“…….”

우수한 성적도 인정에 기대는 호소도.

배경이 없음 무색해진다.

이 사회는 그런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

그럼 내가 살 길은 무엇인가? 저들의 배경에 영향받지 않을 사람은 누가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 답을 찾아다녔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어요.”

어느날 지역에서 큰 경시대회가 열렸단다.

수상자로 당 고위 간부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공부해 마침내 그를 만날 찬스를 얻는다.

“와. 열정.”

“맞아요. 정말 그땐 목숨을 건 열정이 있었죠.”

“그래서 그 사람이 다 혼내 줬어요?”

“아니요.”

“네? 그럼 굳이 그런 사람을 왜 만나려고?”

그 사람은 불쌍한 학생을 도와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그의 힘은 필요했단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그를 유혹하자. 확실하게 그의 힘을 얻기 위해선, 내가 그의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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