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줘요 (1)
황 선생님과 소소한 저녁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핸드폰을 여는데, 먼저의 곱절은 되는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번 올림픽을 찾지 못한 육상대표팀 동민이 진수 진운이. 대학 동기 익범이나 재민이. 누군지 잘 모르는 연세대 육상팀 아이들.
그리고 짧은 모델 시절 알게 됐던 지인들까지.
하나하나 답장하자니 너무 많고 어차피 다음 주면 돌아가니까 따로 자리를 마련해 인사를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그래도 이분 전화는 피할 수 없지.”
나의 은사이자 대표팀 선배 그리고 동료. 한상률 감독님께 전화가 들어왔다.
“감독님.”
―어디냐? 숙소?
“네. 아까 들어왔어요.”
―호텔? 아니면 선수촌?
“오늘은 호텔요. 선수촌은 어제 시합 때문에 하루 머물렀던 거 고요.”
―바쁘게도 산다. 잠깐만 있어 봐. 누구 바꿔 드릴 테니까.
누구를 바꿔 주시려고 이러나 가만히 긴장하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하야.”
―어? 대사부님!!
“이놈아.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었으면서. 그새 또 대사부님이냐.”
―하하! 아, 맞다.
나의 양부이자 육상계의 큰 스승. 천병욱 대사부님이셨다.
새롭게 복싱에 몰입하느라 따로 연락도 못 드렸는데, 대사부의 목소리를 듣자 그리움과 죄송함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지. 이제 항암 치료도 끝났어.
“정말요! 우와! 축하드려요!!”
―우리 마하가 잘하고 있어서 금방 나은 거 같다.
“아이고.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이번 대한민국 육상대표팀은 지난 아테네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지성이가 남자 단거리 100, 200m 결승까진 갔지만, 유진 볼트가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며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천병욱 사단이 떠난 박문기 체제에서의 첫 올림픽.
결과가 말을 해 줬으니 더는 박문기 회장에게도 악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을 거 같다.
―녀석,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요. 경기 보셨죠?”
―봤지. 그럼. 현석이 두희 영욱이 다 같이 모여서 봤지.
“영욱?? 그분은 누구시죠?”
―마하는 잘 모르나? 예전에 지성이 지도했던 감독인데.
“아아~ 아! 그분요!! 대한체고 감독님?”
―하하하! 그래. 잘 알지?
옆에 계셨는가 굵직한 목소리가 기쁜 듯이 “마하가 저 기억한다고 그래요?”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잊을 소냐. 우리 한상률 감독님에게 큰 아픔이 됐던 인물인데.
“어른들 많이 모이셨네요.”
―상률이가 다 같이 초대를 해 줘서. 덕분에 아주 즐겁게 경기관람했다.
“오~ 오 감독님.”
천병욱 대사부님은 끝까지 다치지만 말고 무사히 돌아오라신다.
메달도 영광도 몸 건강보다 중요하지 않단 말씀을 해주시는데, 크게 새겨듣게 된다.
통화가 연결된 김에 이두희 감독님. 이현석 교수님과도 잠깐 안부를 나눴다.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그래. 야, 근데 결승에서 붙을 양웨이란 선수가 오늘 시합한 애보다 잘한다면서?
“네. 아시안게임 우승자예요.”
―넌 올림픽 세계 신기록 보유잔데 그깟 아시안게임이 뭐라고.
“으핫하!! 감독님도 아시안게임 우승하셨잖아요.”
―난 육상이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육상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튼데. 후 후후.
―뭔 얘기를 했길래 저 양반을 저렇게 뻘쭘하게 웃냐?
“교수님. 잘 지내셨죠.”
―그래. 아까 선생님 말씀 들었지? 다치지만 말고 돌아와.
“네!!”
―어이구. 상률이 이놈은 왜 복싱 같은 걸 시켜 가지고….
마지막으로 감독님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우린 이따가 따로 연락하자면서 통화를 마치려 하셨다.
“그분은 안 바꿔 주세요?”
―누구?
“그. 지성이네 선생님이셨던.”
―너, 영욱이 형님 모르는 거 아니었어?
“아하하 감독님….”
세월이 흐르고 입장이 뒤집어졌어도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 걸까? 은근 속 깊은 거 같으면서 쪼잔한 구석이 있다니까.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과 연락해서 그런가,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잠실 주경기장의 밤이 떠올랐다.
그날 비공식 기록 측정이 있었고, 결과를 본 모두가 날 안아 들어 춤을 추셨는데.
처음으로 어른에게 기댄다는 느낌을 받은 날.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 생각했던 일도 이제와선 흐릿할 정도로, 돌이켜보면 나도 많은 경험과 시간을 이겨 온 거 같다.
“그만큼 나도 컸다는 거겠지.”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구마하란 존재를 일으켜 세운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
* * *
한 시간 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다시 한상률 감독님과 통화 시간을 가졌다.
“어쩐 일로 그런 모임을 마련하셨어요?”
―그냥. 나중에 다 끝나고 만나면 너무 바쁠 거 같고. 시간 있을 때 하자… 싶어서.
“술값 더 깨지기 전에 빨리 끝내자 하신 거구나.”
―그렇지. 으하하핫!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하핫하! 감독님!! 저도 지금 한국 돌아가면 몇 백 깨지게 생겼어요!”
이것저것 컨디션 관련해서 많은 것을 물어보셨다.
“괜찮죠. 보셨잖아요. 전 오늘 별로 맞은 것도 없었어요.”
―그러게. 너 잘하긴 잘하더라. 때리면서 상대방을 막 구석으로 몰아가던데?
“하하!! 실력이죠.”
―거들먹거리지 말고. 그러다 큰코다치는 법이야.
“보니까 시합을 빨리 끝내야 할 거 같더라고요. 경기장 분위기하며 심판 눈빛 하며.”
―심판은 왜?
“아무래도 관중들 함성이 세지면 세질수록 판정도 살짝씩 영향을 받거든요.”
―최두필 관장님도 중계 때 똑같은 말씀 하셨는데. 선수들은 그런 걸 느끼는구나.
“관장님은 어떠세요? 해설 잘해요?”
―관장님 지금 북경에 계셔. 결승 앞두고 어려운 거 있음 한번 전화 드려 봐.
“정말요? 저한텐 따로 연락 없으셨는데.”
―시합에 집중하라고 배려해 주시는 거지.
어느 정도 대화도 나눴고 통화를 마칠 때쯤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너 이 녀석. 참 보면 볼수록 기특하다.
“에이. 이제 와서 뭐 그런 말씀을 하실까. 제가 올림픽 메달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떠나서 이놈아. 너 혼자 이렇게 경기 치르고 있는 걸 보면 뭔가 뭉클한 게 있어.
“얼씨구? 정말 왜 이러세요? 감독님 술 드셨어요? 뭉클은 무슨. 그리고 내가 왜 혼자예요. 옆에 동료들이 몇인데.”
―그중에 니가 처음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은 없잖아.
감독님은 늘 내가 사람들과 못 어울리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하셨단다.
그래서도 토리노 때 정준이 형한테만 맡길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가 봐야겠다는 마음에 뒤늦게라도 훈련장을 찾아오고 보조 스탭을 자처했다.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어요?”
―그럼. 너 내가 니 걱정 많이 하는 거 몰랐냐?
“하하하! 진짜요? 왜요?”
―왜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마음 없을까.
초청 선수 자격으로 단둘이 찾았던 2004 아테네. 또 한 번 세계에 나를 알렸던 2005 헬싱키 육상세계선수권. 그리고 2006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감독님은 늘 크고 작은 대회에 앞서, 원치 않는 직책을 떠맡으며 나와 함께 하셨었다.
그러다 2006 가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혼자 국제대회에 보내셨는데, 그때도 친구들이 있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번 2008 베이징은 친구도 없고 종목도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이분의 시각에선 처음으로 내가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태릉부터 베이징까지. 오롯이 혼자.
물론, 수영의 김태주도 있었고, 이미 매스컴을 통해 알게 된 복싱 선수들이나 코치진으로 활약하고 계시는 최두필 관장님의 선·
후배분들이 있긴 했지만.
정작 민구 형도 내 옆에 없고, 최 관장님이나 정 코치님 등. 사회에서 알고 지낸 인연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내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러네요. 진짜 한 번도 생각 안 했는데. 감독님 말씀대로 전 이번에야말로 홀로서기를 한 거네요.”
사람들은 흔히 한상률이 구마하를 만나 인생을 폈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반대라고 하고 싶다.
구마하가 한상률을 만났기에 운동을 더 즐겁게 배울 수 있었고, 폭력과 기합이라는 스포츠계의 관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된 것이다.
이분의 커다란 실패가 있었기에 감히 쉽게 닿지 못할 기회도 손쉽게 얻었고, 찬스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온 함정을 피했고, 위기와 좌절 앞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평생이 걸려도 갚기 어려운 은혜라고 봤는데…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고 계셨구나.
“흐윽. 감독님….”
―넌 또 왜 그러냐?
“그냥요. 갑자기 막 보고 싶어서요.”
―주책을 떨어라, 주책을…. 전설이란 놈이 이깟 걸로 질질 짜기는….
“아! 감독님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이 자식이 어디서 소리를 질러. 난 그냥 기특하다고 한마디한 게 다였어!
하여간 사람이 감정적이 되려면 꼭 이렇게 초를 쳐요…
그래도 끈적끈적한 관계는 남녀 사이에나 오케이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러고 싶은 마음은… 특히 남자는….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메달 걸어 드릴 테니까.”
―그래. 그리고 정 지내는 게 불편하지 않다면 호텔보단 선수촌으로 돌아가.
“네? 민구 형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여기 완전 좋은데.”
―그래도. 선수촌은 IOC 책임하에 있지만 거긴 어쨌든 외부니까.
이야기 중 감독님도 민구 형과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너 누구 이상한 사람 만나거나 한 건 없지?”
“없죠… 제가 누굴 만난다고….”
“여자.”
“에이 감독님. 제가 애도 아니고.”
“넌 인마 애였을 때도 그러고 놀았어.”
“청소년이 무슨 애라고 그러세요. 그리고 그때도 엄밀히 고3인데. 19세면 외국에선 다 성인이죠.”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냐? 그리고 너 고3 땐 내가 니네 학교 선생님 아니었어?”
“크하핫!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감독님도 진짜 오픈 마인드긴해요. 그쵸?”
“허이구… 대책 없는 놈아.”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지금도 슈퍼스타지만, 이번 올림픽을 마치고 나면 위상이 더 높아질 거란다.
“여기서 더요? 더 올라갈 곳이라도 있어요?”
“모르지. 보통 사람들은 너 있는 위치까지도 갈 수 없으니까.”
“음….”
“다만, 성공과 실패를 떠나, 삶의 경험에서 생각해 볼 때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
사람이 그렇게 높은 자리로 가면 갈수록, 만나야 할 인물과 환경을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까지 경계를 해야 할까요…?”
“그래야지. 안 그럼 상처 입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야.”
이상한 사람을 만나 상처 입는 건 나라…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 속 한구석이 욱신거린다.
“저… 감독님?”
“음. 왜?”
“그게….”
“잘하고 있는 거 아는데. 그냥 노파심에 해 주는 말이니까. 부담 갖지는 말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상한 사람은 아니지만, 짧게 누구를 만나고는 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외교관이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고향을 사랑하며 그 고향도 내가 아는 곳이었다.
그냥 조금 놀라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내가 아는 최고의 섹스 머신 최다빈도 버거워하는 내 체력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렇게 여자 좋아하고 쾌락에 미치는 나도 잘 몰랐던 체위와 테크닉을 선사하고. 사람들은 핸드폰인지 mp3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최신의 스마트폰도 능숙하게 다루는 지성을 겸비했을 뿐.
결정적으로 선수촌을 나와 호텔로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만났지.
모두가 이상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 한 딱 그 시점부터.
―왜? 너 뭐 있어?
“아니요.”
―뭔데? 말해 봐.
“아니요. 없어요. 어쨌든 사생활이니까.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한다고요….”
―어이구. 알았다, 알았어.
“잘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자립심을 인정받은 순간 걱정거리를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민구 형이나 한상률 감독님은 우리 형 못지않게 나를 위해주고 신경 쓰는 사람들이다.
이분들이 한 입으로 똑같은 걱정을 한다면, 나도 그 믿음에 보답을 해 줘야지.
“…….”
이제부턴 써니 씨를 피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 주변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어.
심지어 함께 드나다는 걸 버젓이 본 황 선생님도 호텔방을 못들어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가드들을 통과해 나와 시간을 가졌어.
그건 단지 그녀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