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게 있다. (9)
“신장이 어디예요?”
“마하 씨는 어떻게 곤륜 사람이 한국인이 됐어요?”
“어렸을 때 형이 망명 비슷한 걸로 국적을 얻었어요.”
“전 마을이 쿤륜 바로 아래에 있었어요.”
세상 좁다고 하는데, 이렇게 좁을 수 있을까.
감정이 복받쳐 털어놓은 나의 뿌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곤륜에 반응하는 사람을 본 것도 신기하고 탈북자 버전을 말할 때와 다르게 가슴이 들뜨는 나도 신기했다.
이래서 어른들이 출신을 물어보는 건가?
속살을 느끼며 체액을 나눌 때보다 지금의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럼 곤륜이 신장이란 곳에 있어요?”
“잠깐만요. 마하 씨, 핸드폰 스마트폰이죠?”
“네.”
“저. 잠시만.”
핸드폰을 건네 주자 써니 씨는 능숙하게 지도 앱을 켜 타클라마칸 사막 아래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 맞죠?”
“어! 네! 맞아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가 신장이에요.”
“아. 전 지금까지 곤륜은 티벳인 줄 알았는데.”
“티벳에도 있죠. 여기. 하지만 신장이 더 많은 산맥을 가지고 있어요.”
“오~ 오~“
“정확한 위치는 모르세요?”
“그건. 종이 지도로 형이 대충 어디라고만 알려 준지라….”
사막. 그래. 맞아. 형도 사막을 건너면 마교가 있었다 뭐다, 했었는데. 그게 지역으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구나.
티벳과 신장. 바로 위아래에 있긴 하네. 꼭 성남 용인 가까이 있듯이.
“망명을 했었다고요?”
“아. 그게… 그러니까.”
짧게나마 집안 내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대충 이렇게 저렇게 괴한들이 쳐들어왔고 부모님이 갓 태어난 나를 형한테 맡겨 피난을 떠났다고 말해 주는데. 그녀가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며 답한다.
“맞아요. 지금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신장을 떠나고 있죠….”
“지금도 그렇다고요?”
“네….”
“왜요??”
내 얘기는 1,000년 전 이야기잖아. 지금은 현대고. 근데 왜 그게 지금도 그러는데?
말이 안 된다 싶어 물은 질문에 그녀가 맥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긴요…. 소수 민족은 힘이 없으니까 그렇죠.”
써니 씨가 말하길 중국은 땅이 넓은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단다.
상식 밖의 사건·사고도 많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해준다.
“아니. 그래도 나라가 있고 정부가 있는데….”
“깊은 곳이니까요. 법이 닿지 않는 곳도 존재하죠.”
“…….”
분명 다른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같은 상황으로 이해가 된다.
“중국은 한족이 아니라면 법의 보호를 받기가 어려워요.”
“한족이 본토 사람이죠?”
“한족은 한족이에요. 이 나라에 본토라는 개념은 없어요.”
“어. 그래요?”
“네. 그들은 모든 땅을 다 자기들 것이라고 하니까….”
“뭔가 차별이 있나 봐요.”
“후후…. 제 입장에선 답하기 어려운 문제긴 하네요.”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자세히는 몰라도 힘든 시간이 많았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게 맞겠다.
“아니 근데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다 같은 동양인 아닌가요? 왜 민족을 따로 나누지?”
“후후후. 마하 씨니까 할 수 있는 발언이긴 하네요.”
“그렇잖아요. 나나 써니 씨나 뭐가 다르다고.”
시작부터 쾌락과 섹스만을 추구하던 우리에게 새로운 주제가 생겨났다.
나도 그녀도 피차 홀딱 벗고 있음에도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전 가 보진 않았지만, 형이 그랬어요. 곤륜엔 늑대도 있고 곰도 있다고.”
“있어요! 정말로!!”
“그리고 하늘이 엄청 높고 산은 웅장했다고.”
“맞아요! 정말 그래요!!”
대충 형한테 들은 것과 차원 여행 때 보았던 풍경을 설명해 주는데 그녀가 손뼉을 맞춰 가며 기뻐했다.
사랑을 나눌 때보다 지금이 더 생동감이 느껴지는 건 그녀도 고향이란 존재가 주는 큰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이야기 끝에 부모님 사정도 털어놓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오셨다고요?”
“네. 형이 흔적을 찾았다고 하는데.”
복싱에 도전하게 된 계기. 내가 이번 올림픽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 등등.
나의 성공이 부모님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면서 이야기를 마치자, 써니 씨는 갑자기 두 눈이 빨개지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써니 씨?”
“…….”
“왜? 왜 그래요?”
“죄… 죄송해요.”
“뭐가요??”
“전… 저는… 그런 건… 정말 모르고….”
당연히 모르지 말을 안 했는데.
공감해 주는 건 고맙지만, 우는 건 조금 황당한걸?
“에이 왜 그래요. 세상 다 이런저런 사정 끼고 사는 거지.”
“흑… 흐윽….”
“그리고 저 괜찮아요. 나야 솔직한 말로 부모님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형 때문에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 거죠.”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추스른 써니 씨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죠. 그러자고 지금 고생하고 있는데.”
“안 되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하하!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아무리 외교관이래도 될 게 있고 안 될 게 있다.
섣부른 기대심을 가지기보단 마음이 고마워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살점있 는 몸을 다독이는데 그녀도 내 팔을 토닥여 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욕이 아닌 인류애를 느끼는 것 같다.
“외로워서 울었죠?”
“그렇게 보이셨어요…”
“가족이 그렇잖아요. 나도 아까 형 생각하니까 눈물 났는데.”
“마하 씨는 형님 생각하면 눈물이 나나 봐요….”
“안 그랬는데, 이번에 같이 여행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래서.
형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우애가 좋으시네요.”
“써니 씨는요?”
“저 뭐요?”
“써니 씨 부모님도 거기 신장이란 곳에 계세요?”
“전 부모님 없어요.”
“아… 어… 죄송해요.”
“괜찮아요. 살아는 계시니까.”
“네?”
“그냥 전 가족이란 존재를 지웠어요.”
이래서 사람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
곤륜 이야기에 그렇게 맞장구를 쳐주며 즐거워하던 사람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가족을 등지게 됐는지.
몰라도, 엄청난 일들이 있었겠지.
우리 형제 못지않은 수많은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소리 안 하고 그저 따듯하게 안아만 주었다.
“마하 씨….”
“네.”
“저는 실은….”
그러고 있길 잠시 그녀가 먼저 입을 여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려 대화가 멈추고 말았다.
“어…”
“…….”
“미안해요. 매니저 형인데.”
“받으세요.”
민구 형이 말하길 보안요원들이 입장을 막고 있어 선생님이랑 몇 시간째 로비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다.
어쩐지 선생님이랑 형들이 너무 안 돌아온다고 했더니. 이제 보니 부재중 전화도 몇 통 찍혀있었네.
“알았어요, 형.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
이상하네. 내가 이걸 언제 무음으로 해 놨지??
오히려 써니 씨 있어서 더 전화 올 거 대비하고 있지 않았나?
아무튼, 일행들이 돌아온단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더는 같이 있기 어려울 거 같다.
“저. 써니 씨?”
죄스런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가 먼저 옷을 챙겨입고 있었다.
“코치님이 오셨나 봐요.”
“아 그게…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러네요. 다들 제가자는 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말을 했죠.”
“네?”
“…미안해요, 마하 씨.”
“뭐가요?”
“…….”
뭐가 자꾸 미안하다는 거지?
미안한 건 나 아냐?
내가 필요하니까 부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이제는 사람들 오니까 가라고 하는 것도 나고.
이 사람이 왜???
“써니 씨, 저한테 뭐 할 말 있으세요?”
“마하 씨, 몸은 어떠세요?”
“저요? 아무렇지 않죠.”
“그래도 체력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나요?”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누군데.”
“그래도… 어제는 힘들어하셨잖아요….”
“하하! 어제는 그게….”
아이고 사람 난처하게 왜 또 어젯밤 이야기를 꺼내는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합이 낼 모래죠?”
“네. 준결승이요.”
“…꼭 이기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반드시. 그러셔야 해요.”
기분 탓인가? 뭔가 곤륜 이야기를 꺼내기 전과 다음의 그녀는 사람이 변한 거 같다.
“써니 씨도 저 응원 하실 건가요?”
“그럼요.”
“하하! 전 중국 선수 응원할 줄 알았는데.”
“…….”
“괜찮아요. 중국 선수 응원해도. 그런 게 올림픽이잖아요.”
딴에는 공과 사 구분한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는데. 그녀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써니 씨?”
아련하게 쳐다보던 그녀가 다가와 살며시 입을 맞춘다.
키스라면 이미 충분히 나눴는데. 우리는 외설의 끝을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왜 지금의 입맞춤에서 더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뭐가요? 아까부터??”
“전부 다요.”
써니 씨는 그 말을 끝으로 호텔을 나갔다.
어제와 똑같이 진한 잔향을 남기고 떠나간 그녀의 빈자리를 보며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다.
“뭐지? 뭐가 전부라는 거지??”
유혹 열정 환희 쾌락 그리고 공감과 정체 모를 슬픔까지.
그녀는 섹스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보여 주는구나.
뭔가 상황이 너무 오락가락해서 나도 이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맞다. 선생님!”
어쨌든 오늘의 만남은 끝났으니 또 다음을 기대할 수밖에.
* * *
[구마하는 만났나?]
[세 시간이 지났는데 연락이 안 되는군. 아직도 같이 있나?]
[어디 있든 연락 닿는 대로 보고 부탁하네.]
[방금 나왔다면서 설마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조직은 그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쿤륜 출신이라는 건 어떤 보고서에도 없었다.
설마 이 모든 건 우연인 걸까 아니면 조직의 함정?
“네. 팀장님.”
―드디어 연락이 닿는군.
“…방금 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닌가?
“분부하신 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실행했습니다.”
기뻐한다.
메달 하나를 뺏기 위해 저지른 일에, 내가 아는 정보는 의미 없는 것일까?
―구마하도 구마하지만, 자네도 대단하구만. 놀라운 체력이야.
“훈련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생각보단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
“…가족을 많이 아끼는 거 같더군요.”
―음. 형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구마하가 쿤륜 출신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
안다면 이번 작전에 나를 투입하지 않았겠지.
“팀장님. 저 피곤해서 그러는데….”
―그래 고생했고. 낼모레 구마하가 제 기운을 못 쓰기만 기다리자고.
통화를 마치자 깊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나름 이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 자부심이 내 안의 소중한 것을 짓밟는다.
민족 자긍심…
물론 구마하와 나를 하나로 묶는 건 과잉 해석이다.
그래도 세상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성역이 있기 마련 아닌가….
“…….”
나는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을…
가장 감추고 싶은 모습으로 망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