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60화 (360/401)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9)

정말 그날 아침의 짧은 순간이 뭔가 계기가 된 듯, 다음부터는 복싱 형들이랑 같이 밥도 먹고, 혼자 있어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찾아와 앉아도 되냐고 묻기 시작했다.

"진짜 잘 드신다. 소화가 돼요?"

"네. 제가 먹성이 원체 좋아서."

"하긴, 마하 씨는 육상 때도 보면..."

"근데 저는 이렇게 안 먹으면 오히려 체력이 무너져요."

"다른 선수들도 이렇게는 잘 안 먹죠?"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그동안 흔하지 않던 헤비급 출전 선수라, 코치님들도 여러모로 주의 중이시긴 해요."

"헤비급.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맞어. 오히려 슬림하지 않나?"

"하하하! 고맙습니다."

주로 체중에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배구 선수들도 있고 펜싱도 있었다. 물론 여자들만 있는 건 아니고 남자들도 있는데, 그저 내 눈과 귀가 그쪽으로 향하질 않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식단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알러지도 있고 못 먹는 음식들도 있어서 체력을 키우고 싶어도 먹는 게 힘든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줬다.

"잘 아시네요. 그런 건 학교에서 배우나요?"

"배우는 것도 있죠. 근데 일단 뭘 먹는 게 기본이니까요. 저도 저지만 형이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고."

"아! 저 거기 가 봤어요. 맛있었어요."

"고맙습니다. 근데 좀 이상한 직원 있지 않았나요?"

"아니요. 다들 친절하시던데?"

대화는 즐겁고 인맥이 넓어지는 것도 좋지만.

문제는 단지 밥만 먹고 간다는 거라... 쩝.

"젠장... 내가 상담사도 아니고... 변죽만 올리네..."

여자들과 가까워지는만큼, 풀리지 않는 욕망만 커져 간다.

이 사람이랑 하면 어떤 기분일까. 와, 저 사람은 보기와 다르게 가슴이 진짜 크구나. 그런 것만 보인다.

진짜 미쳐 가는구나. 이 정도로 변태 새끼는 아니었는데...

한편으로 내가 이렇게 밝히는 놈이었나 싶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 슈퍼스타. 오늘은 어째 혼자야?"

"왔냐. 앉어."

"복싱 형들은?"

"우리 시합 갔다 왔잖아. 한국 돌아와서 고향 가신 분도 있고, 시합 때 부상 때문에 잠깐 쉬는 분들도 있어."

"형은 어땠어? 잘했어?"

"일단 동메달 받고 왔는데, 잘 하더라. 어떤 사람들은 웬만한 프로들보다 낫대."

"그거 알어? 요즘 선수들이 형이랑 밥 먹으면 실력이 늘어나는거 같데."

"야. 넌 물이 뇌로 들어가냐? 그냥 밥 한 끼 같이 먹는 거라니까."

"정말 그럴까?"

"그럼 뭐가 또 있어?"

"있을 수도 있지. 어쨌든 형은 금메달 선수고. 잘 나가는 사람인데. 누구나 좋은 기운 받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

"좋은 기운 잘 받아가시라 해라. 난 가서 샌드백이나 줘팰 테니까."

"시합 끝나고 왔다면서 안 쉬어? 족발 먹으러 가자."

쉬긴 뭘 쉬어. 동메달인데.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잖아. 훈련해야지.

"보자. 가볍게 갈까."

무엇보다 샌드백을 두드려야 잡념이 떨쳐진다.

진 건 그렇다 쳐. 시합 질 수도 있지.

솔직히 말하면 여자들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힘들다 못해 이제는 괴로울 지경이다.

"훅! 훅!!"

정말 하고 싶어 미치겠다. 돌아버릴 거 같애.

복싱이라 그런가? 투쟁 본능이 성욕까지 영향을 미치나?

좋은 기운. 그래. 좋은 기운이지.

준다고. 얼마든지 줄 수 있다니까?

근데, 기운을 주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이론적으로 자동차도기름 넣으려면 어떻게 하냐고. 뭔가 삽입을 해야 기운이 들어가고 서로 영향도 받고 그러는 거잖아.

만땅 씨발...

"이런. 야! 이 녀석 구마하!"

"네. 코치님!"

"너 이자식... 너 오늘 쉬라고 했지. 시합 끝나고 왔다고."

"아. 네... 그냥 가볍게 몸만 풀고 가려고."

"가. 인마. 너 이럼 다른 선수들도 쉬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못쉬어."

흑흑, 코치님. 운동이... 운동이 하고 싶어요...

안 그럼 기운이 넘쳐서 더 힘들다고요...

태주도 이야기했지만, 확실히 밥 먹으러 오는 사람 중에 한두명 정도는 그런 걸 느낀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이 날 남자로 보는구나. 눈빛에 색기가 그냥...

그럼 뭐하냐고. 만날 시간이 없는데. 만날 장소도 없고.

젠장, 이 태릉이 문제야... 올림픽 선수촌이면 지금쯤...

"아우, 몰라. 잠이나 자자. 한숨 자고 일어나서 또 저녁 먹으러 가야지."

하지 마. 상상하지 마. 누가 올지 몰라. 꼴리면 더 힘들어...

만지지 마. 자. 그냥. 낮잠도 오랜만인데.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니 어딘가 정신이 말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 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D―DAY 시계 탑이 눈길을 끈다.

"73일이라. 두 달, 금방이지."

"마하 오빠."

"음? 누구? 은재구나. 왜 나왔어."

"오빠, 여기서 뭐 하세요?"

"아, 그냥. 산책."

"으음."

"너는?"

"저도요. 곧 지수도 나올 거에요."

배은재. 리듬체조 국가 대표 선수.

훈련 가는 운동복 차림이 아닌 평상복 차림의 은재를 보니, 그냥 예쁜 고등학생 여자애를 보는 거 같다.

"..."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그래서 고맙다.

진짜 얘네는 존재 자체가 감사한 애들인 거 같애.

보고만 있어도 뭔가 힐링 되는 기분이라니까.

"야, 너네 요즘 왜 밥 먹으러 안 와? 사람들 다 너네들 보려고 있는데."

"아. 저희도 가긴 가는데, 오빠 뭔가 여기저기 둘러싸여 있어서."

"그랬어? 그건 또 몰랐네. 난 또 주영이 누나가 나랑 가까이하지 말라고 그러는 줄."

"왜요? 언니 오빠 되게 좋아해요."

"하하하! 그래? 그분이 나 좋아해?"

"팬심으로 좋아하겠죠. 언니 사귀는 남자 친구 있어요."

그래? 그럼 그냥 갈 길 가시라 해라. 임자 있는 여자는 관심 없어, 나도.

"아, 덥다. 날씨 되게 후덥지근하죠?"

"그래도 이 정도면 선선하지. 여름인데. 체육관은 아무리 에어 컨을 켜도 열기가 안 빠지니까."

"우와, 근데 오빠는 진짜..."

"음? 왜? 나 뭐?"

"아니. 그렇게 먹는데 어떻게 몸이 그대로세요?"

"하하하. 은재야. 너 복싱 한번 해 볼래?"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수도 평상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 마하 오빠가 있었네."

그리고 김지수. 은재와 같은 리듬체조 국가 대표.

얘도 고맙다. 그냥 슬리퍼 신고 나와서 고맙고 반바지 입어서 고맙고. 가디건 걸치고 나와서 또 고맙고. 머리 묶어서 고맙고.

"뭐지? 야, 나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우리 일상복 입은 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아까 나도 한참 보셨어."

"오빠, 그런 거 보세요?"

"조금 낯설긴 하지. 그러고 있으니까 둘 다 운동하는 애들 아닌 거 같잖아."

"운동하는 애들 아닌데 여기 어떻게 있어요."

"하하! 그러니까요."

먼저는 조금 낯을 가리더니, 오늘은 두 번째 만나는 자리라 그런가, 애들이 평범하게 나를 대하는 거 같다.

대충 우연찮게 만난 김에 셋이 같이 산책을 나가게 됐다.

"뭔가 땡잡은 느낌이네."

"그치? 나도."

"땡이 뭐야?"

"오빠 유명한 사람인데, 이렇게 우리랑만 있으니까요."

"우와, 요즘 고등학생도 그런 단어를 쓰냐?"

"쓰는 애들은 쓰죠."

"오빠는 산책 자주 하세요? 보면 밤마다 나가시는 거 같던데."

"어? 니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언니들이 얘기해 줘요. 창밖 보면서 어? 구마하 또 혼자 어디 나간다 이러면서."

"진짜? 누구? 누가 그렇게 날 관찰하는데?"

"이 오빠는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는가 봐..."

"그러니까... 사람들 다 그러는데."

"산책 좋잖아. 에어컨 틀고 자는 것보다 몸도 자연스레 식고.

훈련 끝났다고 숙소 들어와서 씻고 바로 누우면 은근 근육 뭉치는 감이 있는데, 이렇게 돌면 다음 날 통증도 덜하니까."

"그쵸! 그것 봐 내 말이 맞잖아."

"뭐. 너도 그런 거 잘 몰랐잖아..."

"왜? 둘이 산책 문제로 싸웠어?"

"저는 잠깐이라도 돌고 오자고 하는데, 얘는 그냥 방에만 있고 싶어 해요."

"지수야, 가볍게 몸 푸는 건 좋아. 회복도 빠르고."

"저도 힘들어서 그러죠. 훈련 끝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움직이면 또 배고파지고..."

"그래. 이해된다."

와... 진짜 미치겠네.

바람은 선선하고 애들은 이쁘고 대화나 분위기가 완벽한데. 하필 둘 다 미성년자라...

아쉽지만 그래도 선은 넘지 말아야지.

"오빠?"

"응?"

"오빠는 여자 친구 있으세요?"

"어? 어. 지금은 없어."

"정말요?"

"진짜요? 사람들은 오빠 연예인 만난다고 그러던데."

"누가? 내가 무슨 연예인을 만나. 나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오~ 우와..."

"신기하다."

"왜? 뭐가 신기해?"

"오빠 정도면 연예인 만날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젤 잘 나가는 운동선순데."

"야. 만날 수는 있어도, 뭔가 접점이 있어야 사귀든가 하지. 아직은 그런 게 없어."

"모델 할 때도요?"

"모델들은 좀 뭔가 다가가기 어려워. 사람들 날카롭고."

"그럼 기회만 온다면 사귀실 거에요?"

"사람을 봐야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 단지 연예인이라고 사귈까?"

"그건 그래. 사람이 좋아야지."

"그래도 연예인이면 한 번은 만나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호기심에서라도."

"사람을 호기심으로 사귀냐."

"호기심으로 사귀죠. 그럼 뭐로 사귀어요?"

"아니지. 감정이 중요하지."

"호기심이 감정 아니야?"

"그런가? 듣고 보니 또 그런 거 같기도. 호감도 결국 호기심이 좋은 감정으로 느껴지는 거니까."

진짜 신기하네. 얘들이랑 있어서 그런가? 뭔가 나 자신이 새롭게 느껴져.

10대 소녀들이라 그런가 주제도 신선하고 편한데, 그런 질문에 답하는 나 자신이 은근 성숙한 어른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나도 단지 섹스에 미친 놈은 아닌 듯?

"오빠는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일단 예뻐야지."

"역시. 남자는 다 그러더라..."

"어쩔 수 없어. 여자들도 외모는 보잖아. 우리라고 그런 거 안볼까."

"그리고요? 스타일은? 키는?"

"왜 나만 질문을 받지. 나도 좀 묻자. 너네는 남자 친구 있어?"

"없어요."

"저도."

"뭐가! 너는 있잖아!"

"아니라고!!"

"오오~ 은재는 누구 있나 보지?"

"아니에요. 없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얘 사람들 모르게 만나는 오빠 있어요."

"오~ 은재. 이여~ 보기와 다르게~"

"아. 아니라니까! 너 왜 자꾸..."

"그럼 그때 그 오빠 뭔데?"

"그냥 친한 오빠라니까. 옛날에 같이 운동했던."

"왜? 누가 있었어?"

"얘 먼저 철봉 하는 오빠랑 둘이 나가서 밥도 먹고 왔어요."

"아. 그건 그냥 그 오빠가 사 준다고 하니까!!"

"알았어. 아니라고 해 줄게. 지수도 아니라고 해라."

"네."

"진짜 아닌데..."

"뭐 어때. 연애하면 좋지. 얘도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제가요? 아닌데."

은근 편을 들어줘서 그런가 은재가 씩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묻는다.

"오빠는 운동선수가 연애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완전 찬성이지.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네? 코치님들은 다들 반대하던데."

"맞어. 훈련에 집중 못 한다고."

"됐다 그래. 까놓고 연애한다고 운동 못 하면 그건 애초에 운동할 자격이 없는 거야."

"와, 완전 단호..."

"뭔가 이게 더 엄격한 느낌이..."

"안 그러냐? 좋아하는 감정이 누른다고 사라져?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란다고 그게 집중이 돼? 더 괴롭기만 하지. 컨디션만 떨어뜨리는 짓이야. 그럴 바엔 차라리 확실하게 연애를 하든가, 차이든가. 둘 중 하나가 낫다고 내 친구도 예전에 그랬었어."

"그렇긴 하죠."

"음. 그렇죠."

"연애할 수 있으면 해. 그거 한다고 하루 종일 애인이랑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둘이 같이 있는 시간 얼마나 되는데.

많아 봐야 하루 2시간 정도 아닌가?"

"주영이 언니는 남자 친구 있어요."

"하하하! 알어. 아까 은재가 있다고 해 줬어."

"주영이 언니 예쁘죠?"

"너네도 예뻐. 너희도 스무 살 넘고 올림픽 나가서 카메라 받고 그러면 남자 친구들 막 줄 서서 사귀자고 할 거야."

"으음."

"오빠는요?"

"나? 나 뭐?"

"아니요. 그냥... 남자들 줄 선다고 하니까..."

은재는 뒷말을 흘리고, 지수는 당황하면서 친구를 돌아본다.

나는 아는 척 모르는 척 흘려 버린 뒷문장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너희 좋아했으면 좋겠어?"

"좋죠. 오빠 싫어하는 사람들 어디 있다고."

"뭐야? 배은재, 너 지금 고백하는 거야?"

"아니냐? 너도 이 오빠 좋아한다고 했잖아."

"야! 나는 진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존경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야? 너 왜 이래?"

"하하하~!! 얘들아 왜 싸워. 그리고 나는 니네들 만나기엔 나이가 있지."

"별로 차이 안 나지 않나?"

"배은재, 정신 차려. 우리 마하 오빠 겨우 두 번 만났어."

"아니. 왜? 그렇잖아. 오빠 몇 살인데. 스물셋 아냐? 우리 엄마아빠도 7살 차인데. 아는 거야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고."

와, 얘네 진짜 귀엽네.

사랑에 당당한 은재와 그 감정을 숨기려고 하는 지수. 두 사람 다 진짜 10대라는 느낌이 막 팍팍 전해진다.

존재 자체가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아이들이야.

이런 경험을 다른 그 어떤 곳도 아닌 태릉에서 하게 될 줄이야.

문체부 만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