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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359화 (359/401)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8)

"정말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요?"

"네. 그냥 잘 먹는 사람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요."

"불편하시면 갈게요."

"아니. 불편한 건 아닌데... 뭔가 좀 이해 안 되는 감정이라."

"저희도 오죽하면 이러겠어요..."

그런 건가? 미친 듯이 하고 싶을 때 야동 보면서 푸는 기분?

내가 이 사람들한텐 야동? 이런 건 딸감이 아니라 식감이라고 하나?

아무튼 신기하네. 그저 밥 잘 먹는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다니.

거부할 이유는 없어. 운동에 완전 몰입해 그렇지, 나에게 이성과의 만남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니까.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왼쪽부터 지수와 은재, 그리고 주영씨란다.

셋 다 리듬체조 선순데, 그런 걸 모르고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냥 말도 하고 밥도 먹는 인형들같이 보인다.

주영 씨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난데 동생 같고, 지수와 은재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누나들 같다.

"와... 리듬체조..."

"왜요?"

"그냥 있다는 건 들었는데, 선수촌에서 잘 못 봤거든요."

"저희가 선수 숫자가 원체 적어서."

"특히나 올림픽 같은 큰 대회는 더 출전권도 잘 없고..."

"그럼 지금 세 분은?"

"저희는 나가요. 먼저 열렸던 그랑프리에서 땄어요."

"우와! 축하드립니다."

리듬체조에 있어서도 올림픽은 최상의 꿈의 무대란다.

아무튼 태릉에 이런 인재들이 있었다니...

이래서 전쟁 중에도 아기가 태어나고 대기근에도 결혼을 하는 건가?

송하진 뭐? 걘 그냥 탁구 하는 애잖아.

"그래요? 여자들은 그런다고?"

"저는 여동생 있는데, 집에서 저 대신 동생 먹일 때 많아요."

"말을 안 해서 그러지. 은근 많을걸요?"

"일상이 다이어트를 끼고 살아야 하니까..."

"그럼 난 진짜 그냥 먹으면 돼?"

"네! 네!! 드세요!"

"저, 오빠?"

"응?"

"죄송한데, 이거랑 이거랑 같이 드셔 주시면 안 돼요?"

"그럼,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진짜 살다 보니 별 걸 다 경험하네. 솔직히 그룹으로 할 때보다 더 당황스런 순간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밥을 먹었고 세 사람은 자기들 접시에 놓인 사과 반쪽을 씹으며 그 모습을 보았다.

"이야아~~"

"진짜 잘 드신다..."

"뭔가 보고만 있어도 배불러지는 기분이야."

하하하.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긴 한데, 뭔가 민망하네. 그냥 여자들 앞에 놓고 혼자 자위하는 게 덜 부끄러운 기분이랄까...

"난 다 먹었어."

"언니, 저, 이거 드실래요?"

"아니야. 너 먹어..."

"근데 정말 그것만 먹고 운동이 돼요?"

"그럼요. 해야죠..."

"그래도 아침이라고 많이 먹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먹고 무슨 힘을 쓴다고. 이거라도 한 입씩 하든가."

"안돼요! 그러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먹고 싶으면 저희도 가져다 먹으면 되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이래요..."

"어이고... 이런..."

근데 진짜 굶어 가며 악착같이 운동해서 그런가, 뭔가 보통 사람들과는 선이 다르긴 다르구나.

라인이라고 하잖아. 그런 게 예뻐. 모델들도 많이 굶고 삐쩍 마르긴 했는데, 그쪽은 막 키도 크고 길쭉길쭉해서 여성스러운 느낌 잘 못 느꼈지만, 여기는 확실히 그런 게 달라. 목에서 어깨 라인 같은 게. 조그마한 입매 같은 것들이.

그래서 고맙다.

뭐가 고마운지 모르겠는데 그냥 고마워.

나도 몰라. 그냥 지금 세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 그래. 다 감사해.

"오빠도 다음 주 시합이시라고요?"

"음, 올림픽 전초전 같은 대회라서 꽤 중요하게 준비하고 있어."

"잘 되시면 좋겠다."

"근데 실제로 엄청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어. 나도 스포츠 뉴스에서 봤었어."

"안 그래요. 복싱은 대진운이라는 게 있어서 상대편 실력이나 그날 몸 상태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까지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뭔가 신기하다..."

"음? 왜? 뭐가?"

"아니. 그냥 오빠랑 직접 이야기 나누는 것도 그렇지만... 아, 이걸 뭐라고 해야 되지?"

"그런 거 아냐? 육상 선수다, 스키 선수다. 이렇게 알고 있었는 데, 이야기 나눠 보면 지금은 복싱 선수니까. 나도 니가 말하는 게 뭔지 알 거 같애."

"하하하. 그거는 뭐. 그냥 하는 거고."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세요?"

"그래요? 전 저보다 리듬체조가 더 빡신 운동 같은데."

"네? 저희가요?"

"하하..."

"왜? 지수는 갑자기 왜 웃어?"

"그냥 뭔가 마하 오빠가 그러니까 인정받는 기분 들어서..."

"고맙다. 좋게 봐 줘서."

"실제로 그렇잖아요."

"야. 내가 뭐라고."

"뭐라뇨? 구마하잖아요!"

"하하하! 아니, 피겨도 그렇더라고. 보기엔 고상한데, 알고 보면 엄청 위험하고 험난한 운동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느낌이랄까. 리듬체조도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맞아요. 둘이 되게 비슷해요. 그래서 선수 생명도 짧고."

"오빠 ,피겨 잘 아세요?"

"친구가 있었어. 들어보니까 고생이 만만치 않다데."

"피겨 누구요? 한국 분이세요?"

"일본. 사쿠라 아야라고. 토리노에서 만났어."

"사쿠라? 사쿠라.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인데..."

"아무튼 그랬어. 피겨도 점프를 해야 되는 종목이라 체중 관리 장난 아니고 부상 많다고. 심지어 미모도 평가 기준이 되니까 매일매일 신경 쓸 거 많은데, 돈은 막 쏟아부어도 답이 없다 그러고."

"아. 오빠 그러지 마세요..."

"어? 왜? 왜??"

"아침부터 울컥해져요..."

누가 그랬지? 여자의 눈물은 화장보다 아름답다고? 안 그랬어?

아무도? 그럼 내가 했다고 쳐.

애들이 운동이 고된가 보다.

고되지. 죽겠지. 저거 먹고 뛰라면, 씨발. 그게 고문이지 운동이냐.

"저기, 그냥 많이 먹고 훈련을 많이 하면 안 돼?"

"...그러면 근육이 막."

"근육이 왜?"

"몸이 우락부락해져서 가산점을 못 받아요. 저희는 리듬체조라."

어쩐지 체조복 입고 어깨 좋은 선수들이 있더라니 했는데 그건 뜀틀 마루 이런 거 뛰는 선수들이라 그러고, 기계 체조와 리듬 체조는 또 다른 거구나.

진짜 너무하네. 물론 뭐, 나도 리듬체조 좋아하는데,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말 곱씹을수록 내가 더 울컥해지는 기분이다. 뭐 기운 나는 얘기 없을까?

"저기, 은재라고 했지?"

"네."

"현대 올림픽이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왔잖아."

"네? 아. 네."

"아마 리듬체조는 그걸 거야. 신전을 지키던 여사제에 대한 헌사."

"여... 여사제요?"

"갑자기 무슨 얘기세요, 마하 씨...?"

"아니요. 그냥. 지금 이 친구들 힘들다고 하니까. 생각을 좀 달리 해 보면 어떨까 해서."

"근데 오빠, 여사제랑 리듬체조랑 관계가 있어요?"

"둘 다 어려운 일이다, 이거지. 실제로 그때도 막 고귀하고 순결한 사람들만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잖아. 그게 현대에 와서는 먹는 거 조심하고 살 안 찌게 주의하는 식으로 바뀐 거고.

일단 종목 자체가 건강함 플러스 아름다운 사람을 뽑는 거니까."

"지금 위로해 주려고 지어내시는 거 아니죠?"

"아니야. 책 찾아봐. 그런 내용 진짜 있어."

"고귀한 일이라..."

"한 번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봤는데..."

"시각을 다르게 보면 또 나름 의미가 있잖아. 힘든 것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뭐? 왜? 나 원래 여자들이랑 있으면 이런 소리 잘해. 나도 매너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나라고 다짜고짜 팬티 내리고 빨아 줘이럴 순 없다고.

그리고 생각외로 이런 대화가 은근 통해.

봐. 지금도. 주영이 누나는 20대 중반이라 밥 먹는데 이건 뭔 개솔? 같은 얼굴로 쳐다보지만 지수랑 은재는 눈빛에 감동이 비치잖아.

"진짜 그렇게는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는데."

"우린 그냥 체중 나가면 다 안 좋으니까 빼라는 줄..."

"좋게좋게 생각해. 뭐든 어떠냐. 안 그러면 이런 땀 냄새 파스냄새 풀풀 나는 공간 너무 삭막하잖아."

"그건 그렇죠."

"마하 씨는 선수촌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 모르세요? 저 태릉 극혐하는 인간 중 하나에요. 기회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우와, 진짜 의외다..."

그 외에도 짧게나마 서로들 많은 대화를 나눴다.

종목이라든지 채점 기준이라든지. 내가 알던 것보다 리듬체조의 세계는 심오했었다.

"그렇구나. 종목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난 리본 잘 하는 사람은 리본만 하는 줄 알았는데."

"주특기는 있어도 다 잘 해야죠."

"개인전 단체전 선수는 나눠지긴 해요. 근데 우리는 우리 세 명이 전부라."

"그럼 단체전은 참가를 못 해?"

"선수층이 얇아서 어려워요."

"거 참, 들을수록 심오한 세계네. 리듬체조."

"저 근데 오빠. 지금 일부러 관심 있는 척하시는 거 아니죠?"

"아니. 나 원래 할 수만 있다면 기계체조 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없어서 육상한 거야."

"하하~! 에이 거짓말!"

태주랑 떠들던 소소한 잡담은 진짜 그냥 잡담이었구나.

이거지, 이거라고. 아름다운 이성과 나누는 스몰토크. 웃음이 담긴 대화.

이게 진짜 힐링 아니냐? 애들 웃음에 막 없던 힘이 생기는 거 같다. 몸에서 단백질 생성되고 뇌에서 세로토닌 분출되는 거 같애.

"저... 마하 씨?"

"누나,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셔도 돼요. 제가 어린데."

"에이, 어떻게 그래요... 초면에..."

"뭐 어때요. 밥 같이 먹었으면 초면 아니지."

"근데 우리 가야 되는데..."

"네? 아. 네... 어. 벌써 시간이..."

"우와. 떠들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나도. 오빠 식사 다 안 하셨는데."

"근데 우린 진짜 가야 돼. 얘들아 일어나자. 미안해요, 마하 씨.

우리가 먼저 와 놓고..."

가... 가시나요? 난 아직 반도 다 안 먹었는데...

나 더 먹을 수 있는데... 쌈 싸먹는 거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갈게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 드릴게요 오빠."

"어. 그래. 가. 얘들아. 누나도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괜히 서운하네. 자기들이 먼저 앉아 놓고, 사람 다 먹을 때까지는 기다려 주지. 전화번호도 주고 가고...

"어우 씨! 형!!"

"깜짝이야. 뭐야?"

"형이야말로, 방금 뭐야?"

"뭐가 새끼야. 넌 또 왜 왔어."

"분위기 확 바뀌는 거 뭔데? 조금 전까지는 생글생글 잘만 웃어 놓고!!"

천사들이 다녀가니 물개가 와서 꾸잉꾸잉거린다.

뭐냐고 자꾸 묻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배고파서 앉아서 밥 먹는 거 보고 갔다고 해 줬다.

"쟤들 리듬체조잖아!!"

"알어. 나도. 인사도 했어."

"마하 형! 우오오~~"

우오오 같은 소리한다... 연락처도 못 받았는데...

하지만, 그날 아침의 짧은 만남은 모든 선수촌에 나름 화젯거리가 되었다.

"마하야."

"네! 선배님."

"야, 선배 아니라니까. 니가 나보다 선배라고. 형이라고 해."

"하하. 네. 형님."

"너 뭐, 리듬체조랑 잘 아냐?"

평상시 별로 얘기도 나눠보지 않던 복싱 형들이 오늘따라 엄청 친하게 다가온다.

어찌보면 당연한 거 아닐까? 그렇게들 이쁜데. 여기는 태릉이고. 우리는 매일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다 못해 터질 거 같은 남정네들이고.

"그냥 밥만 먹었다고?"

"네. 그것도 자기들 훈련 있다고 먼저 갔어요."

"야. 그동안 우리가 널 너무 혼자 놔뒀지?"

"네?"

"앞으론 밥 같이 먹자."

"하하하! 근데 형님들 감량 때문에 저랑 같이 식사 잘 안 하시려고 했잖아요."

"인마. 그건 우리도 힘들어서 그러는 거고."

"그래. 우리라고 일부러 너 따로 놓으려고 했겠냐."

"하하하! 아, 형님들. 으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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