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9)
"잠깐만요, 잠깐만요!! 회사를 대표해서, 매니저로서 한마디만 할게요."
민구 형이 나섰다.
"좋습니다. 경비 문제도 선수 문제도 훈련도 다 해결이 된다고 해요. 하지만 저한텐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중요한 거 뭐?"
"말씀하시죠."
"마하요. 마하는 생각 안 하십니까?"
"이놈이 왜?"
"관장님. 아까 왜 그렇게 속상해하셨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아. 이놈 몸?"
"네!! 외국 그렇게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운동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안 좋은데요."
형... 형은 왜 양 씨로 태어나서. 한 1000년 전쯤 구 씨로 태어나지...
"괜찮습니다."
이제는 특별하지도 않다. 그래. 나의 혈육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자.
"괜찮다고요?"
"네. 제가 옆에 있을 거니까요."
"..."
"형님이요?"
"네."
관장님도 이건 잘 모르겠다는 듯 형을 보며 묻는다.
"자네가 뭘 할 수 있나?"
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관장님을 자리에 앉도록 손짓한다.
"음주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뭐, 아무래도. 사는 게 사는 거 다 보니까."
"몸이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손을 잠시."
그리고는 여기저기 주물거리며 마사지 비슷한 걸 하는데.
"어어. 어라? 뭐야, 이거?"
"조금만 쉬시면 곧 몸이 편안해질 겁니다."
"으어어. 지... 지금 내 몸에 무... 무슨 짓을... 크어억, 크어억~"
물론 내공을 썼지.
뭔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관장님 몸 속 여기저기 기운이 막 움직이며 그대로 흥분해 날뛰던 양반이 고꾸라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커억, 크어억~~!!"
"..."
"뭐, 뭐... 뭐야? 마하야, 관장님 갑자기 왜 저러셔?"
당황해 하고 있는 민구 형을 향해서도 형은 거리낌없이 다가가 말했다.
"사형은 몸이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네?"
"잠시 어깨를."
"아. 저. 전 괜찮습!!"
그러나 내공이 움직이는 마사지는 사우나 뜨거운 물 저리가라할 정도로 육체의 긴장을 풀어주고 피로를 날려 버린다.
민구 형도 그간 고된 매니저 업무를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하, 하하하..."
"잠깐이면 돼. 한 30분 정도면 일어나실 거야."
"뭐해? 이제는 숨기지도 않네?"
"마하야."
"아니, 나한텐 힘자랑이니 뭐니 그러던 사람이. 자기는 진짜 일반인들 상대로 뭐 하는 거야, 지금?"
"미안하다."
아, 젠장. 진짜 짜증나게...
그렇게 나오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잖아...
"뭐가."
"내가 널 오해하고 있었어."
"아, 됐어. 치워."
"이 자식, 건방진 말버릇하고는."
제기랄, 젠장. 화가 나야 하는데. 화를, 화가, 분노가…….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리냐?"
"..."
"형이 미안하다니까."
"됐다고. 이제 와서 무슨..."
"비행이라는 거, 너 응원 갈 때나 수정이랑 여행갈 때 타 봤지만 힘들긴 하더라. 역시 사람이 구름을 넘어선다는 건 무리가 있는 얘기 같애."
"뭐야? 사과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딴소리를 해."
"니가 됐다며."
"하! 아... 진짜..."
"화 풀어. 형이 도와줄게."
형이 도와준다라.
잠깐만, 잠깐만... 좋아할 게 아니야.
이론은 좋아. 우리 형이 있으면 일주일 걸릴 회복이 하루도 안걸릴 수 있고. 그만큼 연습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까. 다만.
"가게는 어떡하고?"
"정석이 있잖아."
"그 새끼한테 가게를 맡긴다고?"
"이제는 맡아도 되지. 잘 하는데."
"..."
"이동은 최소로. 연습은 최고로. 그런 수행의 길이 되면 좋겠다."
"형수님은?"
"수정이는 너랑 화해하지 않으면 자기가 짐 싸서 친정으로 가겠다고 하고 있어."
"화해했네. 가서 형수님이랑 있어."
"후후후. 수정이가 그 정도로 봐줄 사람이 아니지."
진짠가. 우리 형이 가게를 벗어나 나랑 있는다고...?
"형, 지금 다 진심이지?"
"그럼."
"진짜에 진심이지? 맹세하는 거지?"
"그렇다니까."
"정석이가 가게 다 말아먹을 수도 있어. 형 없는 사이에 손님 다 사라지고. 상인회 사람들 막 형 찾아다니고. 수정이 누나 딴 사람이 다가와서 말 걸고."
"하하하! 그렇게 한눈팔 사람이면 내가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았지."
"난 형이,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던 걸 벗어나는 게 영 이해가 안 돼."
"무슨 상관이야. 내 동생이 구마한데."
"..."
"넌 니 친구를 그렇게 못 믿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설령 정석이가 가게를 못 지킨다 해도. 그때는 능력 있는 동생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되니까."
양쪽으로 관장님과 민구 형이 코를 골며 기절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야?"
"그냥. 이제는 너가 다 컸다는 걸 알았어."
"그럼 내가 컸지. 내가 형보다 키도 더 커."
"후후후. 그래. 몸도 더 커졌지."
감독님한테 이야기도 듣고, 어제 한주고 사람들한테도 내 얘기를 들었단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하고 있구나 싶었어."
"..."
"기분 좋더라. 뭔가."
"평상시도 가게 오는 사람들 내 얘기 많이 한다면서. 그땐 별로였나 보지?"
"그땐 체감이 잘 안 됐었어. 무엇보다 부와 명성이 너한테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고."
"음... 돈 많음 좋은 거지. 그게 왜 도움이 안 돼."
"너가 늘 힘들어하니까."
형은 내가 혜정이랑 헤어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황하고 지쳐 하는 것도 형은 못내 자기 탓인 것 같았단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전부 우리가 가지지 못 한 어린 시절 때문에 저러나 싶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
"많이 실망하시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너가 대회에 나간 것도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거야."
운동에 형이 참가하면, 나는 분명 지금보다 몇 곱절 이상은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선수가 아닌 형제로서 풀어야 할 일이 있었다.
"형, 지금 여기 나 혼자 운동하잖아. 월세가 얼마인 거 같애?"
"여기? 글쎄?"
"나도 몰라."
"하하! 근데 왜 말해."
"저기 저 기구는 얼마인 거 같애?"
"몰라."
"이 샌드백들은? 펀치 백들은?"
"흠."
"난 그냥 감독님한테 복싱을 하겠다고 했고, 훈련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만 했어."
"고마우신 분들이지."
"아니, 내가 회사에 그만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거야."
어제 정 사장님이 해 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선수를 키워 낸 건 구마윤이란 사람이고."
"니가 알아서 했지. 내가 뭐."
"혹시나 내가 무슨 일이 생기고. 무슨 사고를 쳐도. 내가 해 온 일들은 웬만해선 지워지지 않아. 부모님이 형을 봐도 뭐라고 못해. 만약 뭐라고 하면 그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야, 부모님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상관인데. 날 살리고 키운 건 구마윤이지, 부모님이 아니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복싱에 도전하는 진실을 알려 주었다.
"지금 내 명성에 만약 또 좋은 성과라도 난다면 그땐 정말 세상이 뒤집어질 거야."
"..."
"아프리카 산간 오지까지 내 이름을 알게 될 거야. 그럼 부모님이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 나 어린 놈 아니라니까?!!"
알았으니 그만 떠들고 팔이나 이리 줘 보란다.
여기저기 형이 온 몸을 꾹꾹 누르고 만지자 욱신거리던 통증이 한번에 잡혔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어렵지."
"알려줘 봐. 나도 내공은 있잖아."
"싫어."
"왜?"
"너보다 내가 잘하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싶으니까."
늘 어렵기만 했던 형의 장난스런 말은, 처음으로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 준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뭔가 마냥 기쁘다고 하긴 뭐하고, 슬프다고 하기도 뭐 한 기분이었다.
"됐어. 나도 익히면 돼."
"못할걸. 이건 혈을 알아야 하는데. 넌 혈이 뭔지 모르니까."
"하!! 그런 거 내공을 읽다 보면."
"좋은 혈이구나 하고 찔렀다간 사혈을 눌러 온 몸이 굳거나 내공이 빠지겠지."
"..."
"가만히 있어, 그냥. 까불지 말고."
그래도 구마윤은 언제든 구마윤이구나.
* * *
"으어어! 자네 대체 내 몸에 뭔 짓을 한 거야?"
"와. 뭐지? 나 지금 몇 시간을 잔 거지?"
30분이 조금 지나자 관장님을 시작으로 민구 형까지 일어나 눈이 번쩍 뜨였다는 듯 호들갑을 떤다.
형은 간단하게 기공 마사지를 익히고 있다면서 두 사람을 납득시키는데.
이상하게 그게 통한다.
"아. 그렇구나. 기공이라, 역시."
"이것도 한의학이죠?"
만약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운동을 한다면, 폭력은 있어도사기는 없을 거야. 이런 단순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좋아! 이런 게 있다면야. 환영한다!"
"그럼 진짜 수행의 길을 떠나는 건가요?"
"음! 니놈 생각은 어떠냐?"
나의 생각. 나의 생각은...
"당연히 가고 싶죠!"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우와... 하하하. 너 진짜 괜찮겠어?"
"제가 뭐. 형 있고, 민구 형 있고, 관장님 있고. 무서울 게 없죠."
다만, 아쉬운 건 있다.
수행의 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엔 남미 대륙이 떠올랐다.
"으으음!! 남미! 아르헨티나. 칠레! 복싱의 본고장이기도 하지!!"
"남미면 멕시코까지 올라가는 데 복싱 체육관이 적어도 몇백개는 있겠죠?"
"몇백 개? 아니지. 몇만 개가 있지."
"그 정도라면 마하를 상대해 줄 강자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겠네요."
진짜 아쉬운 게 있다.
남민데, 수행의 길인데...
여자들이...
라틴 아메리카 현지의 그 뜨거운 분위기를...
"으하하! 이런 훈련은 전세계 그 어디를 찾아봐도 없을 거다."
"꼭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같네요."
"그게 뭔데요 민구 형?"
"체 게바라라고. 남미 혁명가가 있는데, 오토바이 하나 타고 친구랑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이야."
"오~ 혁명."
"그래!! 혁명이다!!"
아이고, 관장님... 제발 저 흥분을 좀 어떻게...
"이건 복싱계의 혁명이야! 가자!! 다 쓰러뜨리는 거야!!"
스파링이 왜 또 혁명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뜨거워지고 싶진 않다고요...
"아, 맞다. 형."
"음?"
"여기까지 온 김에, 잠깐 누구 좀 만나고 가자."
"누구?"
"저기, 그. 나 밥 해 주시던 분."
"그런 분이 계셨어?"
"이자, 가끔 훈련도 도와주신 분인데."
.
.
.
"그... 그런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아, 그... 그래?"
형을 워낙에 보고 싶어 하던 정 사장님이었다.
다 같이 저녁도 먹을 겸 가게로 찾아왔다 어찌저찌 이렇게 하기로 했다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그렇구나... 그래. 훈련을 해야지..."
모두가 정 사장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데려가 줘... 라는 그 절박한 마음을...
하지만 이쪽이야말로 진짜 생계가 걸려 있어, 아무도 그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네? 제가요?"
"잠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땐. 꽤 긴 여행이 될 것 같은데.
영양 잡힌 식사를 담당해 주실 분이 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이... 제가 뭘요. 그 마하 씨 형도 식당 하시는 분이……."
"저는 따로 역할이 있어서요. 요리까지는."
"그... 그럼 저도 같이 갈 수 있나요?"
관장님도 슬쩍슬쩍 눈치를 보시며 한 말씀 거두셨다.
"그, 뭐. 정 사장이면. 이론도 많이 알고. 수석 트레이너 정도는 할 수 있지."
"...관장님?"
"아니, 멤버가 그렇잖아. 난 감독, 민구 이놈은 매니저, 마윤이 저 친구는 의무 팀. 트레이너가 없긴 하다고."
속닥속닥 민구 형에게 묻는다.
"형, 이렇게까지 우리 맘대로 해도 되는 거예요?"
"엄밀히 우리 맘은 아니지... 어른들이 다 결정하고 있잖아."
형이 물었다.
"함께 가시는 걸로."
"마하 씨...?"
"에이 모르겠다. 다 가요! 갔다와서 성과로 보이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복싱에서도 팀 구마하가 짜여졌다.
감독 최두필, 선수 구마하, 매니저 양민구, 의무 및 회복에 우리 형 구마윤, 마지막 식사와 트레이너에 정 사장님.
"그럼 앞으로 사장님을 코치님이라고 불려야 하나요?"
"에이! 에이~!! 마하 씨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코치야!"
"왜요, 좋은데요. 정 코치님."
"아하하하! 아, 하지 마. 민구 너까지 왜 그러냐."
"잘 부탁드립니다. 정 코치님. 식사 준비하실 땐 저도 돕겠습니다."
"어우, 어우! 무슨 말씀을! 제가 배워야죠. 사업으로선 한참 선밴데."
"으하하하! 어이! 다들 착각하지 말라고.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엄밀히 이건 도장 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