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10)
체육관에서 멀지 않은 곳. 테이블이 4개밖에 없는 정 사장님네 가게로 찾아왔다.
어두침침한 조명이나 낡은 인테리어가, 남수네 집 앞에 있는 애들끼리 모이는 호프집을 연상시킨다.
어딘가 그동안 찾았던 화려한 클럽이나 시끄러운 신촌 술집들과는 또 다른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안 되는 거야! 체격도 작은데 거리를 두니까 오히려 상대한테 압박을 당하잖아. 그럴 땐 피할 게 아니라 더 깊게 파고 갔어야지."
"관장님, 아까는 마하 코치해 주고 계셨잖아요."
"인마!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고."
"무엇보다 제가 그렇게 파고들 기술이 어딨어요."
"새끼야! 사람을 링 위에 올렸으면 그 정도 뱃심은 부려야 될 거 아냐!!"
옆 테이블에서 민구 형이 최두필 관장님한테 혼나고, 나는 정사장님 아저씨와 관원 몇 분들과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아까는 이쪽 편 들어 주시더니 지금은 또 저 친구한테 뭐라고 하시네."
"명승부를 봤는데, 저 양반도 피가 뜨거워지겠지."
"명승부요?"
"그럼."
명승부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니 정 사장님과 회원아저씨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준다.
"잘했어. 멋졌어."
"그런가요? 저는 제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 같은데..."
"마하 씨, 복싱은 오늘이 처음이라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저 친구는 운동 좀 했다면서요, 형님?"
"민구 오래 했지. 우리 가게 일하기 전에도 군대에선가 어디선가 샌드백 좀 두드렸다고 했으니까."
민구 형은 당장 아마추어 대회에 올려도 두 시합은 뛸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단다.
그런 사람이랑 처음으로 스파링을 뛰었는데 겁내지 않고 물러 서지 않은 것만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해 주신다.
난 내가 개처발린 줄 알았는데 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구나.
"역시, 국가 대표가 대단하긴 해."
"아, 그럼. 금메달은 아무나 따나."
괜한 띄워 주기에 머쓱해 술잔이나 비우고 있으니 아저씨들이 서로 잔을 채워 주려 하셔서 더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술만 먹고 다닌다고 혼나러 끌려왔는데 되려 술을 마시게 된다.
그렇게 엄한 모습으로 일침을 놓던 민구 형도 어른들 앞에선 철부지 20대 취급을 받는다.
모르겠다. 그냥 안주나 먹고 술이나 마실란다.
일단 다른 날보단 재밌으니까. 오늘은 땀도 뺐고.
"어땠어?"
"네? 뭐가요? 아. 맛있어요."
"아니. 음식 말고. 복싱 말이야. 실제로 해 보니까 어때?"
"복싱요? 재밌었어요."
"자네는 이런 투기 종목에는 관심 없지?"
"글쎄요. 지금까진 접할 기회가 없었던지라."
"으음?"
정 사장님한테 질문을 받았는데, 눈빛이 뭔가 내가 복싱이라도 시작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나저나 복싱이라.
좋았어. 나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내가 무림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 것 같다.
민구 형과의 10분 남짓 짧은 3라운드는 육상이나 스키와는 또다른 피가 달아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뭐 그냥 단순 맞고 때리다 보니 흥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이지 뭔가 운동과는 또 다른 희열이 아니었을까?
내공이 막힌 상황임에도 몸을 움직이게 만들던 고양되는 느낌.
투쟁 본능. 혹시 이게 투기?
"마하 씨,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요?"
"아, 아니요. 그냥 생각보단 힘들었고. 글러브도 꽤 무겁더라는 기분이 있어서."
"으하하! 아니. 이런 팔뚝으로 그걸 무겁다고 하면 어떡해?"
"처음엔 저도 가벼웠죠. 근데 하다 보니까 팔이 점점 무거워지고, 3라운드 때는 숨도 차는 거 같고."
꿍얼꿍얼 감상을 털어놓고 있는데, 아저씨들이 나는 복싱을 했어도 잘했을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복싱이라. 흠. 나쁘지는 않을 거 같기는 한데.
"아우, 우리도 이쪽으로 와야지. 좀 비켜 봐."
"그러니까 유명한 사람 놔두고 왜 저기서 시끄럽게 소리치는거 듣고있어."
"좁아. 왜 일로 와."
"좀 비켜 봐. 우리도 스타 좀 보자."
옆 테이블 사람들이 주섬주섬 건너온다.
왜들 그러나 다 같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몸짓으로 기술을 펼쳐주고 계셨고 민구 형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얘기만 들었을 땐 형이 타이틀 방어전에 실패해서 혼나는 것 같다.
열정이 많으시구나.
근데 이해는 돼. 나도 누가 육상이나 스키로 좋은 성과를 못 내면 똑같은 반응 보일 테니까. 그게 프로든 아마든 취미든 간에.
자기 종목이 있는 사람들한텐 다른 무엇보다 내 운동과 경험이 소중한 보물이잖아.
"근데 마하 씨 좀 의외다."
"네? 뭐가요?"
"얘기 들었는데, 오늘 혼나는 자리였다며?"
"아. 하하하! 네. 맞아요."
"왜? 뭘 잘못했는데?"
"그냥. 뭐. 방탕하게 살고, 술 먹고 그러니까."
"아니 술 좀 마시는 게 어때서! 지금도 술 마시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동안 열심히 운동했는데, 사람이 즐길 땐 좀 즐기게 해 줘야지. 안 그래?"
아저씨들의 너스레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나, 민구 형이 슬쩍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깊은 내막이야 우리만 이해하면 그만이니까. 웃어넘기며 가타부타 떠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팬들이 다가오고 그 팬들이랑 섹스도 하고 다녔지만, 여기는 왜 이렇게 분위기가 편하지?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긴장이 안 돼. 민구 형이 아는 분들이라 그런가?
뭔가 사람들이랑 있으면서 그동안 채워지지 않던 허탈한 감정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여자도 아닌 남자들인데. 그것도 아저씨들인데.
"한 라운드 더 했으면 마하 씨가 이겼어."
"어렵지. 마지막엔 다리가 굳는 게 보였는데."
"그래도 국가 대표 출신인데 기본 체력이라는 게 있지."
"그건 저 친구도 마찬가지지. 저쪽도 선수 출신이라더니만."
"복싱은 무제한 이런 경기는 없지?"
"없어. 체급이 있는데 사람 죽일 일 있나."
"그래도 이종격투기로 가면 무제한 이런 거 있지 않나요?"
"진짜 그때 그 시합 봤어? K1인가 PRIDE인가?"
조용히 사람들 대화를 듣고 있는데, 내가 이분들에게 왜 안정감을 느끼는지 알 것 같다.
격투기 이야기가 시작되니, 정 사장님 말고도 한분 한분 힘든 생업 중에 짬을 내며 운동을 통해 다져 온 내공이 느껴진다.
다들 강하다.
다들 이런 자리고 아는 사람들이라 그렇지, 여차하는 순간엔 상대방 콧대 무너뜨리고 합의 보느라 주변에 돈 구하고 다니실 분들이다.
정수된 강인함이 나에게 겪어 보지 못한 고향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곤륜. 고수들이 가득한 자리는 이런 분위기였겠지.
"..."
"마하 씨는 어떻게 생각해?"
"..."
"마하 씨?"
"네? 뭐가요?"
"아니. 취했어? 왜 이렇게 아까부터 대화를 못 따라와."
"다리는 빠른 사람이 귀가 느리네."
"하하하! 형님이 너무 느리게 말해서 못 알아듣는 거 아니에요?"
"야. 좁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서 떠드는데 그걸 못 들으면 이 친구가 문제 있는 거지. 내가 문제냐."
"발음이 어눌해서 그래."
"아, 왜들 지랄이야!"
어른들도 우리랑 똑같구나.
친하면 깎아내리고 가까우면 더 매몰차게 당한다.
대화 중간중간 적당히 버무려지는 아재 개그가 또 일품이라 웃고 있는데 한 분이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근데, 뭔가 실제로 이렇게 만나니까 진짜 다르다."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저요? 왜요? 저 어떤데요?"
"아니, 선배한테 혼도 날 줄 알고 보기보다 겸손한 사람인 거 같아."
빅토리아와의 열애설이나 육상연맹과 갈등. 대표팀 탈퇴 등등.
사람들은 내가 겪은 사건 사고들을 언급하며 언론을 통해 비치던 이미지를 말씀해 주신다.
결론은 엄청 싸가지없을 거 같았는데, 보니까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 주셨다.
"하하하! 제가요?"
"에이 씨. 말을 그렇게 해... 처음 보는 자리에서 실례되게..."
"아니, TV로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뭘 따져 따지긴. 마셔, 마셔. 마하 씨도 잔 들어!"
"네!!"
그때 민구 형도 우리 테이블로 잔과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형 왔어요?"
"어. 아니 근데 듣고 있자니까, 누가 우리 마하 욕해요! 여기 매니저 있어요.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욕이 아니라 이 친구야. 첫인상이 그랬다는 거지."
"관장님은 어디 가셨어?"
"화장실요."
"그래서? 다음 챔피언 타이틀은 언제로 잡으셨데?"
"하하하! 모르겠어요."
한참을 웃고 난 뒤에 민구 형이 버럭거리며 이야기했다.
"근데! 우리 마하 착해요. 진짜 사람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민구야, 성실하지 못하다고 끌고 와서 쥐어팬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아니요, 사장님. 그건..."
웃고만 있을 게 아닌 거 같아 민구 형을 두둔하고 나섰다.
"제가 실제로 기자 회견 같은 거 할 때 성질머리 있는 대로 부리고, 기자들 노려보고 그러긴 했었죠."
"에이. 그거야 언론이 문제지."
"그래. 우리도 이해해."
"마셔. 부담감이 얼마나 컸겠어."
다 같이 건배를 위해 잔을 높이 드는데, 가게 문을 열며 최두필관장님까지 손을 털며 들어오셨다.
"정 사장. 아니, 왜 화장실에 비누가 없어?"
"뭡니까. 언제는 손 꼼꼼하게 씻고 다니는 사람인 것처럼."
"그나저나 왜 다들 그 좁은데 옹기종기 모여 있나? 무슨 얘기들해?"
관장님까지 합류하려 드니, 다시 두 테이블로 사람들이 분산되어 앉는데, 나누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 갈 수 있었다.
"언론의 관심? 어이구, 배부른 소리 하는 거 봐라. 이 친구야, 그것도 자네가 유명하고 그러니까 기자들이 매달리는 거지. 우리 봐 봐. 대한민국에 누가 복싱 관심이나 줘?"
최두필 관장님이 말씀하시길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WBC 웰터급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는데, 국민 그 누구도 알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고 하신다.
우리로 따지면 세계 선수권이나 그랑프리에 나가 우승하고 금메달을 따온 건데, 관심이 없다니 서럽긴 하겠다.
"왜 그러지. 대단한 건데."
"복싱 인기가 다 죽었어."
"그래도 챔피언은 대단한 거잖아요?"
"대단하지. 암 그럼. 옛날 같았으면 광화문에 카퍼레이드하고 그럴 일인데."
"아이고, 관장님. 그건 너무 옛날이죠."
"옛날에 그랬다고, 옛날에. 나도 야구다 축구다 볼 거 많은 세상인 거 알아."
한 분이 육상은 좀 어떠냐고 하시는데, 민구 형과 나 둘 다 육상은 그래도 대중적인 인기는 있는 거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키도 요즘엔 많이들 타잖아."
"그것도 이 친구 덕이라고 봐야지."
"아니죠. 스키는 원래부터 대중스포츠잖아요."
"뭐. 따져보면 육상도 저 친구들 말대로 그렇긴 하지."
"뭐가 어쨌든 구마하 저 친구가 나가서 메달도 따오고 그러니까 더 인기가 오르는 거야."
스타와 국제 대회의 성과 여부가 그 종목의 저변을 넓힌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해 온 일들이 그런 것이고, 그로 인해 내가 부와 명예라는 걸 누릴 수 있었으니까.
관장님이 씁쓸하게 술잔을 털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우리도 그랬어. 올림픽에서 메달도 따고 세계를 상대하고 그러던 시절에는 복싱도 그 어느 종목보다 인기가 있었다고."
"지금은 스타가 너무 없지..."
"어쩔 수 없죠. 현실이 그런데."
스타의 부재라. 한국 복싱에 경쟁력은 있는데 스타가 없다 이 말인가.
"마하야?"
"..."
"어이."
"네? 어. 형, 부르셨어요?
"아니, 관장님이."
"예. 왜요?"
"취했어?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해?"
"아까부터 이래요. 뭔가 우리가 싫은가 봐요."
"어어! 절대 아니에요. 그냥 뭔가 오랜만에 운동하시는 분들 보니까 느낌이 달라서."
주절주절 변명하다 보니, 겸사겸사 지난 짧은 방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게 되었다.
잘 사귀던 여자 친구랑도 헤어지고, 운동도 안 하고. 모델 일 같은 걸 하고 있지만, 지금은 시즌이 아니라 일도 없고. 그래서 길을 잃은 거 같았다.
그럼 코치를 하는 게 어떠냐고 몇 분이 물어보시는데, 작년 친구들과의 경험을 언급하며 그거 때문에 연맹이랑 틀어졌던 거라고 내가 할 일이 아닌 거 같다고 하셨다.
"나름 이유가 있었구나."
"관장님은 은퇴하고 어떠셨어요?"
"은퇴라. 난 방황이고 자시고 빚부터 갚아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었어."
현실적이고 생활력 넘치는 고백에 또 한 번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최두필 관장님도 분위기에 힘입어 목소리를 높이신다.
"아니! 안 그러냐고. 방황이고 고민이고 그것도 시간 있고 여유있는 놈들 이야기지. 먹고 살길 막막해져 봐. 뭐든 안 하게 생겼나. 안 그래?"
"하하하... 네. 맞습니다."
"내 질문은 그거야. 왜 벌써 은퇴를 한 거야? 봤을 땐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기량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네 운동도 되게 늦게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나?"
"은퇴요... 그게."
이런 자리고 이런 분들이니까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꼭 이겨야만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뭔 소리야. 그럼 지고 싶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시합만 나가면 금메달이 당연한 것처럼 기사 나오고 그러는 게 뭔가..."
나도 질 수도 있는데. 스키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까지 가게 된 것이고, 육상은 엄밀히 나 이전에 결승전에 나가는 선수들도 없었던 세상이었다.
승리가 당연하고 이러다 지면 무슨 원망들을 하려는지, 그런 게 점점 압박감이 되어 운동이 즐겁지가 않았다.
해내지 못하면 질타를 받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더불어 나라는 존재 때문에 다른 선수들까지 가뜩이나 힘든 훈련, 더 힘들게 수행을 해야만 하는 것이 미안해졌다.
"그런 이유로 은퇴를 결정했어요."
"부담감이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당사자의 고민을 남들이 어떻게 알겠냐고."
우락부락 주름살 가득한 아저씨들이 상처 입은 어린 강아지 돌봐주듯 토닥토닥 해 주는 가운데, 관장님이 큰 소리를 내신다.
"뭔 소리야, 대체?"
"네?"
"자네 같은 선수가 있으니 남들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는 거고.
그리고. 부담이 어때서? 해냈을 땐 그만한 보상이 따라오잖아."
"어..."
"관장님. 술 많이 드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친구 얘기 들어보니까 주변엔 이런 걸 컨트롤해 줄 사람이 없었나 싶어서."
그것이 스타의 숙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사람은 다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음..."
"에이. 관장님. 아무리 그래도 마하 씨는 20댄데."
"맞아요. 그리고 종목이 다른데, 처한 상황도 달랐겠죠."
"이래서 복싱이 진짜 남자들의 스포츠라는 거야."
"하하! 갑자기 왜 또 말이 그렇게 돼요?"
"그렇잖아, 정 사장. 우리는 둘 중 하나밖에 없잖아. 이기느냐 지느냐! 안 그래?"
"그건 그렇죠."
최두필 관장님이 나를 보며 물으셨다.
"어이. 자넨 이기고 싶어, 지고 싶어?"
"..."
"짱구 굴리지 말고. 느낀 대로 딱 대답해 봐. 이기고 싶어, 지고 싶어?"
"이기고 싶죠, 저도."
"그렇지! 그게 우리 복싱이야. 깊게 고민하지 않어. 인간은 본디 단순하게 행동하는 게 본능이라고."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경기는 순위가 있지만, 복싱은 오직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복싱도 순위가 있지만, 그건 승자와 패자가 갈린 경기의 결과물일 뿐이다.
"중요한 건 승부야. 오직 한 판의 승부. 그 승부에 의해서."
"근데 관장님, 복싱도 무승부 있지 않아요?"
"맞어. 판정도 있고."
"어떤 자식이야! 누가 분위기 잡치는 소리하고 있어!!"
이야기만 놔둬도 피가 뜨거워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이분들을 통해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잘못하고 있는 줄 알았다.
상황이 악화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내가 해 온 것들에 대한 결과를 피하고 싶었다.
과중한 책임은 벗어던지고 달콤한 열매만 먹는 게 현명한 일이라 여겼지만, 좋은 것만 찾은 결과 혜정이를 놓쳤고 길을 잃어 방황을 하게 된다.
이제는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련다.
어찌 됐든 나는 사람들 말대로 챔피언이고, 그만한 성과를 냈기에 모두가 좋아해 주는 거니까.
나를 믿자. 혜정이한테도 그렇게 말했잖아.
나를 믿어야 당당함이 생긴다고.
저분 말씀대로 인간은 원래 단순하게 행동하는 게 본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