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야 (4)
"그럼 둘이 소꿉친구고 그렇겠네."
"그런 사이는 아니야."
"왜? 둘이 위아래층 살았다면서."
"언니. 아까 얘기하잖아. 10년간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냈다고."
"진짜로? 너 그런 얘기 했었어?"
"응... 괜찮아. 놓친 부분이 있었겠지."
"당연하지. 듣는 사람은 좀 놀랐냐."
친구들은 사생활보다 두 사람의 만남과 사귐을 더 궁금해했다.
이혜정은 감출 건 감추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마하가 거기랑 같이 운동하면서 조금 알게 됐지."
"한주 고등학교?"
"어떻게 알어...?"
"그 학교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도 있어?"
"맞어. 내 사촌 동생도 작년인가 거기 시험 봤다가 떨어졌다고 그러던데."
"그때는 그렇게 명문은 아니었는데..."
"진짜 신기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냥 뭐 그렇게 조금씩 알고 지내다가. 원래 서로 모르던 것도 아니고. 가까워지고. 그렇게 되고."
숨겨야 된다. 남들이 알면 흉이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것과 다르게 다들 호감 어린 시선으로 다가와 주고 있었다.
이혜정도 그래서 편안함을 느꼈다.
"근데, 얘기만 들어도 걔가 너한테 되게 다가가려고 노력한 거 같기는 해."
"그건 나도 느꼈어."
"알아. 마하가 착하지."
"실제 성격은 어때?"
"되게 젠틀하고 그렇다던데. 맞어?"
"아니야. 그냥 나가서 하는 말이고 행동이지. 집에선 헛소리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치고 그래."
"정말로 부모님 없이 형이랑 둘이 자란 거야...?"
"응."
"뭐야 이 언니. 완전 구마하 팬이었잖아?"
"팬이지. 나 진짜 구마하 스키 경기할 때 엄마랑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봤는데."
"위험했지. 본인은 뭐래?"
"괜찮았다고 하던데. 그냥 시합에만 신경 썼다고."
"역시. 그러니 금메달을 따지."
"넌 그럼 금메달도 봤어?"
"응..."
"우와."
"근데, 그거 진짜 금이야?"
"하하~! 아니야."
이렇게 편안할 거. 왜 그렇게 불안해했을까. 혜정은 또 한 번 후 회로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려 옴을 느낀다.
"정말 어떻게 그렇게 만났냐."
"드라마 같긴 하다."
"...드라마는 나보다 걔 삶이 드라마고."
"무슨 소리야. 너 아니었으면 어? 우리나라가. 하하하~~"
"하하. 왜? 왜 말을 하다가 웃어?"
"아니. 내가 말을 하면서도 웃긴 게. 얘 아니면 우리나라가 육상이랑 스키 금메달을 어떻게 땄겠냐 하려고 했는데."
"에이. 그건 아니지. 오버야."
"그러니까... 주책스럽네."
이혜정도 키득키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마하도 그런 얘기 하긴 했었어."
"뭐라고?"
"나 때문에 운동할 수 있었다고. 근데 모르겠어."
"오오~"
"야. 니 입으로 그러지 마. 조금 재수 없으려고 그래."
"뭐 어때. 얘는 당사잔데."
"어쨌든, 결국 본인의 선택이고 본인이 노력해서 된 건데.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해 주나 싶고..."
"넌 그럼 직접 경기장 가서 본 적 있어?"
"없어. 나도. 난 걔 대표 팀 갔다는 것도 아테네 때 처음 알았어."
"진짜? 여자 친군데?"
"그때는 몰랐다잖아. 아 왜 자꾸 말을 생략해서 들어, 저 언니는."
즐거운 이야기 다음에는 역시나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좋은 순간도 있는데, 부담될 때가 되게 많았어."
"버겁지. 선물도 그렇고. 남자애들 그런 거 그냥 주는 거 아니거든."
"진짜? 선물을 그냥 주는 게 아니면 뭐? 돌려받길 원해서 주나?"
"바라는 게 있기는 한데... 니가 듣기엔 수위가 너무 쌔니까 넘어가자."
"아 뭐야. 나도 남자 친구 사겨 봤다니까!"
투닥투닥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이혜정이 한숨을 쉰다.
"내가 봐도 내가 정 없게 굴었던 거 같긴 해."
"니가 한 건 그냥 애들 연애고. 응? 혜정이 뭐라고?"
"잠깐만. 뭐? 애. 들. 연. 애?"
"이따가 들어 줄게. 얘 지금 말하니까."
"뭐냐. 얘만 친구고 나는 친구 아니냐? 유명한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야.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하냐."
"너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아무튼,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이혜정은 다시 한번 속마음을 고백한다.
내가 봐도 참 매정하게 대했다.
착한 앤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 내고 살아가는 그런 앤데.
걔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뭘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만 받아 달라는 건데.
"넌 구마하 좋아해?"
"그래. 넌 그 사람 좋아하는 거 맞어?"
"좋아하지. 같이 있으면 좋아. 재밌고."
"그럼 됐네. 왜 그랬어."
"형이 결혼을 하시거든... 근데 그 소식 전하면서 애가 뭔가 눈빛이 달라지는 거야... 그때부터 결혼 이야기하는데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흠. 왜 그랬지? 혼자가 된다는 걸 느낀 걸까?"
"그 정도 성공을 했는데 외로움을 느끼나?"
"본인 아니고서야 모르는 일이지. 바로 옆에 있는 얘도 몰랐다는데."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니까 더 그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은 인생이 전부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무서웠었다.
이혜정은 그런 마음까지 전부 다 친구들에게 말해 주었다.
"뭔가... 음..."
"혜정아."
"어."
"너희 엄마 뭐하셔?"
"우리 엄마? 그냥 사업. 공인중개사."
"으음. 그렇구나."
"왜?"
"그러게 왜? 얘네 엄마 사업하는 게 왜?"
"아니. 실은 나도 그런 게 조금 있거든."
동갑내기 친구의 어머니도 직장 생활을 하신다고 말해 준다.
일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에 나도 당연하게 일을 해야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도 휴학 없이 빠른 취업을 생각하는 것이란 말에 한 살 많은 언니가 답한다.
"우리 엄마는 그냥 집에서 살림하는데. 나도 취직은 하고 싶어."
"아니. 뭐 꼭 다 딸이 엄마를 따라간다는 게 아니라. 보고 자란게 있다 보니까 더 그런 게 아닐까. 얘 얘기하는 거야."
"...근데 우리 엄마는 맨날 나한테 그래."
"뭐라고?"
"마하랑 그냥 둘이 계속 살라고."
"됐네. 그럼! 집안 반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얘 선택이 중요하지. 자기 인생인데."
"내 인생이라..."
"그렇긴 하네. 너는 조금 더 자립적인 여성이 되기를 원했던 거고. 구마하는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고."
"그러니까. 그래서도 둘이 계속 다투는 거고."
이혜정은 가만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담과 남들의 시선 같은 문제를 떠나, 그런 것도 갈등이 될 수 있었겠다 싶어진다.
"맞어. 나 그런 거 있는 거 같긴 해. 뭔가 남이 아닌, 내 인생을 조금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물론, 케바케고. 사바사라고 하지만."
"사바사는 뭐야?"
"사람 바이 사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본인이 좋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친구들은 그냥 그녀가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현명한이라... 지금은 뭐가 현명한 걸까."
"일단, 화해는 해. 끝내도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닌 거 같애."
"나도. 무엇보다 둘이 오래 알고 지냈다면서, 너 하루아침에 잘라 낼 수 있겠어?"
"..."
"그런 애들이 또 없으면 없는 대로 되게 허전해진다."
"그럴까...?"
일단, 친구들의 조언은 그렇게만 들었다.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수다는 한 사람이 입을 멈추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깊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혜정은 어둠 속에서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그녀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뭐가 됐든, 걔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건 용서가 안 돼.
뭐?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열린 뭐라고?
그게 나 좋자고 그랬어. 지가 좋아서 그렇게 된 거지.
사람 가볍게 보는 놈을 어떻게 사랑하라는 거야.
맨날 입만 열면 하자는 소리밖에 안 하고. 힘들다고 그러면 입으로 해 주면 안 되냐는 말도 안 되는 요구나 해 대고...
참을 만큼 참았어 나도.
남들 보기에만 그런 거지. 선수 구마하가 아닌 인간 구마하는 다른 존재야.
라는 자기변호에 맞서, 반대쪽에선 현실을 외면하는 듯한 덤덤한 표정의 자신이 말한다.
솔직히 좋아서 한 거 맞잖아. 왜 이제 와서 아니라고 그래?
남자애들 욕구 많은 거 모르는 거 아니잖아. 어릴 때도 그랬잖아.
지민이 오빠도. 그리고 걔도...
"..."
아니야. 마하만 생각하자. 지금은 내 남자 친구만... 내 옆에 있는 사람만.
얘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멀리 생각할 여유는 없다.
"후우..."
나지막이 내뱉는 한숨에 옆에서 자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왜 그래? 잠이 안 와?"
"아니야. 자."
"너도 자. 생각만 하면 뭐해."
"알았어. 고마워."
"혜정아."
"응...?"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뭐?"
친구가 부스럭 돌아누우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댄다.
"구마하든 뭐든 니가 행복해야 되는 거야. 난 그렇게 해야 된다고 봐."
"그래. 알았어. 고마워."
행복. 내 안의 행복.
주변에서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난 지금까지 마하랑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내 행복을 포기한 적은 없다.
처음은 어떻게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부터 관계를 열어 버린 건 자신이었다.
그것도 나의 행복이 우선이었다.
마하는 그때도 연애를 하고 싶어했지만, 거절한 건 나니까.
마음의 부담이 없는, 그저 스트레스를 풀 쾌락이 필요했으니까.
단지 그뿐이었는데. 그러다가 조금씩 마음이 생겼는데...
최다빈 선수가 나타났고... 다시 이어졌지만 민서가 나타났고... 셋이서 그런 일이 있었고...
"..."
걔라고 모를까?
걔도 사람인데, 내가 자기 마음 알면서도 그렇게 다가간 건, 오히려 저쪽이 더 상처받을 일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내 행복을 우선시하는 게 맞는 걸까?
이기적으로, 계산적으로 굴면 구마하의 제안을 잡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니까.
마하 말대로 평생 같이하자는 그 약속. 지키자고 하고 조금 늦추는 게 뭐 어때서?
그 정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애잖아. 그냥 그 마음 받아 준다는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어?
현실적인 이야기에 있어서도 이혜정은 구마하와 함께 있는 삶과 아닌 삶의 차이점을 경험했었다.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갔다 모녀끼리 백화점 쇼핑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친절할 수가 없었다.
아빠 때문에 엄마도 홧김에 돈 쓰러 간 거긴 하지만, 명품 판매장인데 지갑 하나 고르는데도 만지지 마라, 우리가 하겠다. 대우도 없고 존중도 없는 세상.
하지만 마하가 함께 있었다면?
아마 매장 직원들뿐만 아니라, 매니저가 나와서 먼저 웃으며 다가와 주고 친절하게 대해 줬겠지.
서비스직을 1년 넘게 해 봐서 잘 알고 있다. 웃음 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래. 이기적으로 굴자.
지금은 내 행복을 위해서 마하가 필요해.
그리고 잘해 주면 되잖아.
싫은 게 아니야. 부담이 될 뿐이지.
나도 얘가 좋아.
이상한 건 고치면 되니까. 그렇게 우리의 사랑을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일단 화해하고. 바라는 걸 더 수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그럼 마하도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 괜히 다른 사람 만나고 그러진 않어.
이혜정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서야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구마하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며칠 뒤 지난 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이유이 파리 패션쇼를 위해 출국길에 올랐다.
"혜정아."
"응."
일주일이 지났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구마하랑 화해했냐는 식으로 물었다.
이혜정은 고개만 가로젓는다.
"아니. 아직."
"왜 아직이야. 정말 이대로 끝내려고?"
"바쁜가 봐. 연락이 잘 안 되네."
"...뭐 때문에 그렇게 바쁘대. 은퇴한 사람이."
"그러게."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어떻게 되든 마하는 나한테 돌아올 거니까.
스케줄이 많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제는 전과 다르게 내가 마음을 열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얼굴만 보면 아무 문제없이 보다 더 단단해지는 우리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늦은 시간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들려온 한가십거리 기사는 이혜정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다음 소식입니다. 저희도 이 소식을 연예계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스포츠계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요. 지난 올림픽에서 전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던 구마하 선수가 핑크빛 열애설이 터졌습니다.]
두 사람이 다툰 그 날 밤.
이혜정이 친구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털어놓고 있을 때, 구마하는 한국을 찾아온 빅토리아라는 해외 유명 모델의 호텔을 찾아가 출국 날까지 머물다 파리 스케줄에 올랐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