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중독 (3)
시간이 흘러 완연한 봄이 찾아오고, 구마하의 환경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지난 시간 큰 감동을 안겨준 그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지난겨울 준비한 광고와 화보들이 오픈되자 인기는 더더욱 치솟기 시작했다.
식품과 제약. 의류와 가전의 매출이 증가하고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마침내 정상만이 찍을 수 있다는 금융과도 인연이 닿았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타고 다니는 차를 바꿔 줄 테니 우리 기업 모델이 되어 달라는 업체가 등장했는데, 일본 기업이라 국민 정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반려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렇게 구마하는 점점 스포츠를 넘어 새로운 영역에서도 입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중엔 방송도 있었다.
[여기가 스치기만 해도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옷긴도사님이 계신 곳 맞습니까?]
또 하나의 스포츠 스타인 강동호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한 구마하는 연맹과의 갈등이나 천병욱 전 전무 이사와의 만남 등.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며 그의 삶이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닌,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낸 휴먼 드라마라는 사실을 알렸다.
대중들은 그를 원했다.
방송과 예능, 어디든 구마하가 나오면 시청률이 확보된다.
패션계에서도 이유이 말고 다른 메이커가 그를 무대에 세웠다.
그렇게 점점 더 스케줄이 늘어났다.
감사한 일이지만, 늘어나는 수익과 정비례하여 인간 구마하의 삶이 조금씩 흔들렸다.
"후우..."
"갑자기 웬 한숨? 공부가 안 돼?"
"아니. 애초에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왜?"
"예능을 또 찍자고 그러네. 그것도 네 군데서나."
"토크쇼를 또 해?"
"아니. 이건 게스트 출연인데. 감독님이 운동하는 예능들이라고 꼭 좀 나가 보라고 하셔서."
"불러 주면 좋은 거지. 나가 봐."
"후우. 연기 배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예능이라... 아, 어렵다."
대학은 시험 기간이었다.
구마하는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이 안 된다.
모든 것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상률이 돈독이 올랐나... 사람 너무 굴리는 거 아니야?"
"아니. 이건 감독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운동선수는 엔터테이너라는 감독님 말씀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좀 과한 거 같다.
누군가는 돈 많이 주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막상 왜 이렇게 일상이 허전하게만 느껴지는지...
나는 주변의 과도한 기대와 열망이 버거워 대표 팀을 떠난 게 아니었나? 내가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는 존재가 맞나?
모델로서도 이정도 대우를 받는 게 과연 정당한가?
구마하는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연인에게서 갈구한다.
"혜정아. 너 오늘 언제 잘 거야?"
"안 돼."
"왜?"
"하자고 그러는 거잖아."
"아니 뭐... 하는 것도 있는데."
"나 지금 시험 기간이야. 공부 해야 된다고."
"...잠깐도 안 돼?"
"니가 하면 잠깐만 해? 아니잖아. 사람 완전히 지쳐 쓰러지게 만들 거면서."
"흠... 뭔가 너 요즘 좀 차가워진 거 같애."
"푸하하하! 뭐래 얘가. 누가 차가워지는데?"
"먼저 애들 오고 난 다음부터 이상하게 하자고 해도 밀어내기만 하고... 선물 사 와도 다 그냥 반품하라고 그러고."
"야, 무슨 맨날 명품만 들고 다니냐?"
"들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아무튼, 안 돼. 진짜 나 공부해야 돼. 장학금 받고 싶단 말이야."
"흐음..."
세상 모두가 나를 좋아해도, 이상하게 한 사람은 다가가도 다가가도 늘 거리가 있는 기분이다.
그것이 구마하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 * *
다음 날 서울 동국대학교.
집에 가면 남자 친구가 달려드니 이혜정은 캠퍼스에 남아 책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학교에 남은 그녀를 찾아 동기 여자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혜정아. 오늘은 학교에 있네."
"어, 언니. 도서관에서 볼 책들이 있어서."
"요거 요거 남자 친구랑 싸웠구만."
"음? 뭐래. 누가 누구랑 싸워."
"아니야? 맨날 알바 아니면 사람 귀찮게 굴 땐 언제고. 우리가 모를 거 같애?"
"뭐..."
"아무튼, 우리 저녁으로 빵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자."
"그래."
대학교 인근 전통 있는 빵집으로 자리를 옮긴 이혜정과 친구들.
그녀에게 질문 공세가 쏟아진다.
"솔직히 말해 봐. 누구야?"
"뭐가?"
"왜 숨겨? 누군데? 왜 말 안 해줘? 설마 연예인이야?"
"아니면 너 다시 재훈이 만나?"
"뭐래, 내가 걔를 왜 봐. 연락 안 하고 산 지 몇 년이 지났는데..."
"그럼 누군데 말을 안 해 줘?"
"그냥 있어..."
"맞네. 딱 보니까 연예인이네."
"아. 아니라니까. 언니는 내가 무슨 연예인을 만나..."
"왜? 그때 연영과에서 너 좋아한다고 했던 애 있었잖아. 누구였지?"
"최승기 아닌가?"
"됐어. 그것도 난 모르는 일이야."
"그거 알어? 최승기도 연애한다.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거 같던데."
"아 모른다고. 관심도 없고. 그리고 난 진짜 아니야."
시험 기간이었고,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게 다과를 갖춘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모든 걸 잊은 채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튼, 연애하는 건 맞네."
"하하. 그래 맞어, 맞다고..."
"누구야? 어디서 만났어?"
"알바? 아니면 소개팅?"
"아니야. 그냥 학생."
"으음. 우리 학교?"
"아니라니까. 얘 지금 누구 유명한 사람 만나고 있다니까."
"하하하. 다들 공부 안 해? 집요하다 못해 무섭네, 진짜."
거듭 대화를 피하는 이혜정에게 친구 중 동갑 나이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물었다.
"너 근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왜? 내가 뭘?"
"아무리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그렇지. 너 요즘 진짜 좀 말 걸기 어려운 그런 거 있어."
"미안... 그냥 좀 바빴을 뿐인데."
"그러니까 뭐 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바쁘냐고. 얘기를 해 주든가."
연예인이라... 요즘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완전 그런 건 또 아니고.
이혜정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연세대 다녀."
"오오~ 연대. 학교 괜찮네."
"무슨 관데? 나이는?"
"그냥 친구. 동갑."
"동갑에 연세대라. 언니는 이걸로 만족해?"
"아니지. 절대. 더 들어야겠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질문에 최대한 방어를 해 보지만 여자들은 대화의 파편을 주워 모아 큰 그림을 그려 냈다.
"사체과면 걔도 알겠다."
"누구?"
"구마하. 걔가 연대 사체과라고 하던데."
이혜정은 철렁하는 가슴을 누르며 태연히 웃음을 짓는다.
친구들도 차마 그녀가 구마하를 만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현재 세 살배기 어린 아이라도 이름을 알정도로 입지가 높은 인물이었다.
"너네 그거 알어? 나 아는 언니한테 들었는데. 이대에 재벌 딸이 있데. 근데 그 사람이랑 구마하랑 둘이 사귀었었다고."
"어어. 나도 들었어. 성악과라고 하던데."
"아이. 없는 사람 이야기를 뭘 그렇게들 해."
"뭐 어때. 유명인이 다 그렇지."
이래서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이혜정은 더더욱 철저하게 자신의 연애를 숨기고 들었다.
"니 남자 친구는 걔 봤다고 그래?"
"뭐. 보기도 했겠지."
"왜 그래? 뭐 안 좋아?"
"안 좋은 건 아니고..."
"그럼?"
"아, 이 언니. 왜 이렇게 분위기를 못 읽어. 얘 지금 남친이랑 싸운 거잖아."
"그래? 정말? 싸웠어?"
"하하하. 싸운 건 아니고..."
"뭔데 그럼?"
"뭔가 좀... 그냥..."
"너무 매달리지? 그치?"
"그렇다고 해야 될까...?"
연인과 섹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열광하는 주제에 구마하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고 여대생들의 수다는 끝날 줄 모르게 이어졌다.
"근데 나 아는 애도 그런 얘기 했었어."
"뭐?"
"남친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 안 하고 피했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어?"
"설마. 막 억지로 하고 그러나?"
"아니. 혼자 야동보고 막 그러고 있더래..."
"아 뭐야. 진짜 싫다. 왜 그래?"
"..."
"혜정아. 니 남친도 그래?"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닌 척 시침은 떼지만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심지어 자고 있는 사이에 혼자 거실에 나가 하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
"운동하는 애라니까 그쪽도 장난 아니긴 하겠다."
"하하하... 제발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안 돼? 밖에서 불편하지도 않어?"
"뭐 어때. 가뜩이나 공부도 지겨운데, 자극적인 이야기 해야지."
오고가는 대화 끝에 한 친구가 그녀에게 물었다.
"알바?"
"어. 나 방학 때 일하던 회사에서 연락 왔는데. 여기 S호텔에서 뭔가 행사가 있다고 그러더라고. 서빙할 사람들 구한다고 하는데.
난 시간이 안 맞아서. 혜정이 너 할래? 너 서빙 오래 했잖아."
"언젠데? 얼마 준대?"
"시험 끝나고. 급여도 꽤 주는 거 같던데. 큰 행사라고."
"아 진짜? 나도 할래!! 나 요즘 돈 없어. 혜정아, 우리 같이 하자."
"뭐, 시간만 맞으면."
"그래? 그럼 언니랑 두 사람 얘기해 본다."
시험 기간이 끝나고 다가오는 주말이었다.
이혜정은 친구와 함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구마하도 묻는다.
"언제?"
"5월 첫 번째 주말. 너 그때 뭐해?"
"나 그날 친구랑 약속 있는데."
"약속? 무슨 약속? 어기면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약속인가?"
"아 뭐야, 썰렁하게... 짜증나게 굴고 있어..."
"하하하! 그게 아니라. 나 어디 가는데 같이 가자고."
"됐어. 너 가는 자리에 내가 왜 가..."
"뭐 어떠냐? 파트너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하니까 그러지."
"야. 됐어. 뭐야. 내가 그런 델 어떻게 가. 그리고 나 그날 친구가 알바 소개해 줘서 일하러 가야 돼."
"알바면 어쩔 수 없지 뭐."
"시급이 좋다고 하더라고. 일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그러고."
"흠... 그래. 뭐 알았어."
"웬일이래? 어쩐 일로 순순히 물러나셔?"
"일하러 간다는데 별 수 있나. 그런 약속은 내가 물러나야지."
"흐음."
선아 말을 듣기를 잘 했다.
당당하게 요구하니 조금씩 그가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말을 안 듣는 애가 아니야.
요즘엔 관계도 선물도 일방적이지 않아서 함께 있어도 부담되지 않아서 좋아.
이혜정은 조금씩 서로의 거리감을 조율해 나가며 사랑에 용기를 얻었다.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뜬금?"
"이번에 돈 벌면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하하! 진짜? 오~ 감동인데."
"뭐. 늘 얻어먹는데 이 정도는 한번 해 줄 수 있지."
"그래? 그럼 난 그거."
"뭐?"
"란제린데. 바니걸이라고 들어봤나?"
"...어?"
"플레이보이에서 하는 그런 코스튬인데."
* * *
"진짜. 어쩔 땐 그냥 정신병자 같애... 뭐 먹고 싶냐니까 거기에 나를 넣고 있어. 사람이 무슨 음식도 아니고..."
"하하하... 짜증나긴 하는데, 근데 나는 니 남친 입장도 이해는 된다."
"왜? 뭐가 이해돼?"
"너 같은 여자 친구 사귀는데 얼마나 좋겠니. 걔도 이것저것 입히고 싶겠지."
"아 진짜, 이 언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후우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
"나 전에 사귀던 애도 그랬어. 걔는 지가 막 옷을 사 와. 이것도 입어 보라고 그러고. 인형놀이 하는 거 같애."
"옷을 사 온다고?"
"어~ 어. 막 그런 거 있잖아. 나가요들 입는 거 같은 거. 막 몸선 드러나는 거."
이혜정은 부끄러워 내 남자 친구도 그런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질 못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한두 번은 이해해도 자꾸 그러니까 얘가 나를 지 성욕 풀려고 만나나 싶기도 하고."
"..."
"그래서 헤어졌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르는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혜정이었다.
"후우... 아무튼, 답답하다."
"근데 너 그거 들었어? 우리 알바 가는 거."
"음. 그거 왜?"
"강동호 결혼식이래. 비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