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음식 (1)
다음 날. 차를 몰고 혜정이와 성남으로 출발하는데, 퇴근 시간 강변 북로가 같잖게 느껴질 정도로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와... 나 명절에 운전하는 거 처음인데, 사람들이 괜히 기차 타고 버스 타는 게 아니구나."
"여기는 평일에도 이러지 않아? 강남이잖아."
"아무리 강남이래도 이 정도는 아니지. 뭐야? 사고 났어? 어떻게 차가 그냥 도로에서 멈추지?"
"따로 움직이더라도 지하철을 탈 걸 그랬나?"
"왜 따로 가. 사귀는 사인데. 오히려 커플로 한복 입고 돌아다니진 못할망정."
"하하! 아하하하! 웃긴다 너. 한복을 왜 입어. 내가 언제 너랑 결혼했어?"
"결혼이라고 하니까. 난 명절 때 부부들이 왜 그렇게 싸우는지 몰랐는데, 오늘 좀 알겠네."
"왜?"
"누군가 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다 터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일찍일찍 준비하라고 했잖아!' 이러면서."
그러자 혜정이가 얼토당토않다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하. 하. 너 지금 나한테 늦게 준비했다고 뭐라 하는 거야?"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부부면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아내는 이렇게 얘기하겠지. '내가 늦게 출발하려고 늦게 준비했어? 당신이 늦잠을 잤잖아.'라면서."
"오~ 오 연기력. 너 지금 목소리 감정 실린 거 알어?"
"난 분명 TV 보지 말고 일찍 자라고 했다. 오늘 운전해야 한다고."
"아니. 어떻게 끊냐고. 장금이가 종사관 나리랑 궁을 빠져나간다는데."
원래 길 위에서 시간 버리는 걸 극도로 혐오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정이 말대로, 누군가 늦잠 자는 동안 얘가 과일도 챙기고 집에 남은 과자도 싸 들고 와서 먹을 것 풍부했고. 무엇보다 대화가. 명절이라 그런가, 평상시 집에서 잘 안 하는 또 다른 주제와 이야깃거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럼 큰집이 평택에 있어?"
"응.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해. 똑같이 차 막혀서."
"천안까지는 다 막히는 구간이라고 생각해야지."
"잘 아네."
"그럼. 알지. 나 작년에 맨날 전주 왔다 갔다 했었잖아."
혜정이네 친척 이야기. 명절 풍경. 아줌마 아저씨 싸웠던 이야기. 아줌마가 넌 이 담에 반드시 제사 없는 시댁으로 가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조언 등등.
매일 붙어 있어도 새롭게 접하는 주제에 대화가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아줌마가 바라는 게 완전 딱 나잖아! 우리 집 제사 없어! 나한테 시집오면 되겠네!!"
"마하야. 그럼 넌 지금까지 명절 때 뭐 했어?"
"다음에 만나면 말씀드려야지. 우리는 제사 같은 거 없으니까 혜정이 괴롭힐 것도 없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혼자 있었어?"
"뭐. 혼자도 있고. 형이랑도 있고."
"오빠는 주로 가게 여시잖아."
"흠."
형 말고 나의 유년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는 옆에 있는 그녀라고 생각한다.
친하진 않아도(물론, 아는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오며 가며 듣는 이야기가 있고, 8살 이후 지금까지 쭉 그 아파트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몇 집 없으니까.
혜정이는 어린 구마하를 생각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그렇게 나쁜 거 없어. 나 명절 좋아해. 재밌는 영화도 많이 봤고."
"음식이나 이런 건?"
"먹었지. 너 기억 안 나? 4층 할머니?"
"4층 할머니?"
"우리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왜. 주차장에서 사람들한테 시비 걸고 소리 지르고 하던 분 있잖아. 삐적 말라 가지고."
"아~ 그 막 쓰레기통 뒤지고 다니시던?"
"하하하! 어. 그 할머니."
"사람들 다 싫어했었잖아. 우리 엄마도 몇 번 싸우고 인사도 안 하고 다녔는데."
"그 집에 있었어."
"진짜...?"
"하하하! 아니야. 할머니 좋은 분이셔. 사람이 괴팍해서 그렇지."
혜정이가 누렸던 일반적인 명절과는 달라도, 나도 나름 명절 분위기를 즐겼던 적이 있었다.
"자식들이랑 갈라섰다는 건 들었는데..."
"그래서 형이 가서 부탁을 드렸지. 귀찮다곤 하는데 막상 가면 잘해 줘. 먹을 것도 많고. 좋았어."
"흠. 가끔 너랑 오빠 이야기 들으면 내가 되게 생각 없이 살았던 거 같아."
"하하하! 뭘 그렇게까지 말을 해. 그냥 각자 살아온 시간과 배경이 있는 거지."
어렸을 때를 생각하니 두런두런 다양한 감상이 떠오른다.
"그러게. 그때 나는 지금 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했을 거고."
"내가 이혜정이랑 연애를 하다니. 마하야 이놈아! 10년 뒤 니 꼬추가 드디어!!"
훈훈한 분위기를 몇 대 쥐어 터지면서 말끔히 날려 버렸다.
그렇게 안타깝게 쳐다보던 혜정이 눈빛에 분노가 서려 있다.
"하하 농담이야. 왜 그래 화 풀어."
"진짜 최악이다... 내가 왜 너 같은 놈이랑 사귄다고 해 가지고..."
"아니 근데 그때는 진짜 뭐랄까. 너랑 인사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 이런 시절이니까. 지금이랑 비교하면 세상이 뒤집혔지."
"..."
"아 참. 혜정아 나. 다음 달에 이유이 패션쇼부터 시작하기로 했어. 3월인데."
"꼭 지 불리하면 저런 얘기해..."
혜정이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릴 때 이야기를 해 준다.
"정말 초등학교 때는 너랑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니까. 대단한 거라니까. 사람 인연이라는 게 마음같이 되는 게 아니에요."
"..."
"왜? 아니라고 생각해?"
"으음. 그게 아니라..."
갑자기 목소리가 힘이 쭉 빠지길래 슬쩍 돌아보니, 혜정이 표정이 확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차 헛소리가 선을 넘었나? 섬뜩한 기분이 목덜미를 스치는 기분이다.
"장난이지 야. 아무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놓고."
"어? 뭐가?"
"음?"
"나 그냥 나 어릴 때 생각했는데."
"그냥. 표정이 어두워지길래. 아차 싶어서."
혜정이는 부드럽고 밝은 미소로 불안감을 떨쳐 줬다.
"후후후. 넌 왜 그렇게 내 눈치를 봐?"
"좋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기분 나빠지면 싫지."
"으이그. 그럼 이상한 헛소리를 하지 말든가!"
"아. 아여! 아퍼. 꼬집는 건 반칙이다."
잠깐 멍해진 건 어릴 때 꿈이 생각났기 때문이란다.
꿈이 뭐길래 기분까지 멍해지나 싶은데,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길래 깊게 묻지는 않았다.
"난 너 그런 거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뭐?"
"미스 코리아나 연예인 같은 거."
"한 번도."
"진짜?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 같은 화려한 직업 갖고 싶다며."
"그건 자기 전문 분야가 있는 거니까. 근데 내가 연예인을 할 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혜정이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꿈꾸는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모두가 그러지 않을까? 라고 했지만, 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누군가는 그럴지 몰라도 난 어차피 일할 거 그냥 대우받는 직업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흠."
"왜? 내가 너무 대충 사는 거 같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난 너 공부하는 거나 밤에 책 보고 이러는 거 보면, 뭘 하든 다 잘할 거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응."
"진심으로?"
"그럼. 진심이지."
"...그냥 나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지?"
"아니야. 내가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건 감정 문제랑 다른 이야기지."
잠깐 움직이는 거 같더니 차가 또 금방 도로에 멈춰 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혜정이를 보는데 애가 놀랍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진짜로? 진심으로 내가 뭘 하든 다 잘할 거 같다고?"
"어."
"그런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
미모에 대한 칭찬을 기본으로 깔고 사는 애라 그런가, 외모나 외형이 아닌,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처음 해 줬단다.
"진짜로?"
"아. 그렇다니까."
"정말? 나 뭐? 내가 뭘 잘하는데?"
"초콜릿도 맛있게 잘했고."
"그건 그냥 녹여서 틀만 만든 거지."
"어쨌든, 맛있게 했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또 뭐?"
"공부도 나쁘지 않고. 일도 책임감 가지고 매달리고."
"그런 건 남들도 다 하는 거잖아."
"야.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리고 알바도 나중에 형이나 정석이 만나면 물어봐라. 책임감 가지고 일하는 애들이 얼마나 보기 어려운데."
"알바야 그렇다 쳐도. 공부는... 우리 학교 뭐... 넌 연대 다니잖아..."
"그게 공부로 들어왔냐. 몸으로 때운 거지."
"너야말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체육으로 세계 1등을 한 건데."
"하하! 아무튼, 예전에 태윤이도 그랬었어. 인서울 자체가 쉬운 게 아니라고. 우리도 주변에 봐 봐. 서울로 대학 온 애들 얼마나 돼. 너 공부 고3 때 부랴부랴 시작했잖아."
"..."
혜정이가 내 얘기에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건 처음이다.
얘가 이렇게 칭찬에 목이 말라 있을 거라고는...
내 여자 친구지만, 난 혜정이는 세상 그 무엇도 부족하거나 갈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쁘게 생긴 애도 결핍이 있었구나.
"혜정아. 진짜야. 난 운동을 해서 그런가, 능력이나 꿈 관한 건 절대 빈말 안 해."
"그래...? 내가 뭘 하든 다 잘할 거 같다고...?"
"넌 근성이 있어. 끈기가 있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 파고들면 성공한다고 들었어."
"후훗. 뭘 하든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건 엄마의 영향을 받은 거 같아."
"형도 그런 얘기 했었지. 아줌마 보면서 배우는 거 많다고."
"그래? 내가 그런 재능이 있다고? 다 잘할 수 있다고?"
그때부터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가 혜정이가 자기 이야기를 막 꺼내기 시작했다.
"초콜릿 처음 만들었는데, 재밌었어. 크게 어렵지 않고."
"그래. 그것도 손맛 없는 사람들은 못 한다."
"나 유치원 다닐 땐 그림도 꽤 잘 그린다고 칭찬받았었어."
"아. 이거 고속 도로 포기하고 그냥 구룡 터널로 갈까..."
"야.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어. 어. 그럼. 유치원 때 그림 영재라. 아이고 안타까운 재능이 그렇게 사라졌구만."
"초등학교 땐 수학 좋았고. 아. 나 화학 이런 것도 엄청 관심 많았었어!"
그렇게 꿈 많던 소녀가 어여쁜 여대생이 되어 내 옆에 있구나.
귀엽다. 칭찬에 들떠 하는 모습이라니. 새롭고 사랑스럽다.
"그럼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일기를 써 온 거야?"
"쭉은 아니고. 그때그때 느끼는 게 있는 날만."
"오오~ 감수성. 오오~"
"너도 그런 거 하지 않았어?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쓴다고 하던데?"
"우리는 일기라기보다는 훈련 일지를 작성하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혜정이가 물었다.
"넌 어떻게 해 보지도 않던 운동을 생각했어?"
"..."
"응?"
2002년 6월. 붉은 함성이 전국을 뒤덮던 8강 스페인전...
너랑 지민이 형이...
"그냥 너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그럼 육상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야? 지민이 오빠?"
"오~ 니 입에서 지민이 형 이름이 나오다니..."
"뭐. 무슨 상관이라고."
"형 군대 갔어. 작년에 동민이랑 아시안 게임 하기 전에 이주영 감독님 만나러 갔는데, 입대하기 전에 인사하러 왔다고 하더라고."
"응."
"그리고. 지민이 형 바람 같은 거 피우던 형 아니야. 그런 오해는."
"마하야."
"응?"
갑자기 혜정이가 다가와 볼에 쪽 하니 키스를 해 줬다.
"뭐야? 갑자기?"
"그냥 해 주고 싶어서."
"오오~"
"멋있어 보이길래."
"지민이 형 얘기 그만하라고 입 막는 거 아니고?"
"그런 것도 있고."
"하하하! 하여간 너도 진짜. 말만 아무 상관 없다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니가 이상한 거지. 어떻게 내 앞에서 그 오빠 이야기를 꺼내?"
"나야말로 아무 상관 없으니까 그러지."
"왜? 내가 먼저 만났던 사람인데?"
"지금 너랑 있는 사람은 난데, 뭐 하러 딴 놈들을 신경 쓰냐."
"..."
"왜? 넌 나랑 만났던 사람들 질투해?"
"아니. 나도 뭐 그닥..."
"했던 거 같은데? 수빈이라든지, 빅토리아라든지."
"아니거든. 그리고 빅토리아 그 사람은 너랑 정식으로 사귄 것도 아니라며. 잠깐 올림픽 때 만난 게 전부라고 하지 않았어?"
"으하하하하! 와 진짜 대화 아슬아슬하다."
아슬아슬한 대화 속, 차도 아슬아슬하게 서초 IC를 벗어나 구룡 터널로 향해 간다.
"젠장. 역시 여기도 막히는구만... 이래서 내가 아는 길은 남들도 다 아는 길이라고."
"널 제일 좋아해."
"응?"
"..."
갑자기 뭔 소린가 싶어 혜정이를 쳐다보니, 창밖으로 시선을 피하고 바짝 굳어 있다.
"뭐야? 왜 뜬금 고백을 하지?"
"아이 고백이 아니라..."
"뭐? 야 크게 말해. 차 안에서 목소리가 안 들리게 말하면 어쩌라고."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단다.
"허허허..."
"진짜로. 그건 맞아."
"허허허허~"
"그때랑 지금 마음을 놓고 봐도 솔직히 지금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가장 커."
"허허허허허~ 일로 와 봐."
"왜? 운전해."
"아 빨리 와 봐. 어차피 차 멈춰 있는데."
고개를 내밀자 혜정이도 슬쩍 다가오며 눈을 감는다.
우리는 진한 키스를 나눴다.
마치 사랑을 나눌 때 같았다.
입술과 혀로 그녀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볼을 간지럽히고 가녀린 목선이 욕망을 부추긴다.
"흐읍. 됐어. 그만."
"뭐가 돼. 일로 와 봐."
"아. 운전해."
"어차피 멈춰 있는데 뭐 어때."
"뒤에서 보면 어떡하라고..."
"진짜로. 그건 맞아."
"허허허허~"
"괜찮아. 내 차 선탠 찐해서 밖에서 안 보여."
혜정이의 시선이 바지춤으로 내려간다.
그래. 방금 너와의 키스로 이렇게 불끈 서 버리고 말았다고.
"..."
"미안 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