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76화 (276/401)

손에 손잡고 (11)

지성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녀석도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건지 왜 주저하고 있는지. 자신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돌아보았단다.

준비는 됐다. 몸은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럼 왜 이렇게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는 것일까.

관중들 때문인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승리에 대한 압박?

하루 이틀 아니잖아. 근데 왜 이러는데.

지성이는 원인을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큰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 해 봤지?"

"당연하죠. 저도 무대가 갖춰지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죠."

"그럼 하면 되잖아."

"응... 여긴 내가 바라던 가장 현실적인 무대였는데..."

"꿈의 종착지에 도달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

"글쎄요. 난 아직 은퇴할 생각은 안 하고 있어서."

은퇴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생각한 일이 벌어진다면 하기 싫어도 떠날 것 같다.

"형."

"응?"

"아니다.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 좀 그럴 거 같다..."

"뭐. 다 말해 새끼야. 괜찮으니까."

"그래.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냐 너도."

"아니... 동민이 형 은메달 땄을 때. 형 막 울고불고했었잖아."

"그랬지. 동민이 새끼 뭔가 존나 서럽게 울었지 쪽팔리게."

"그래서. 난 동민이 형보다 아까 형같이 사람들이랑 막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싶은데."

내 모습에 자신을 대입해서 생각을 해 봤단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색하더란다.

마치 자신은 국제 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야지 정상인 것처럼.

"...뭔가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존나 욕을 해 줬을 거 같은데."

"병신같죠? 나도 아는데. 그냥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어요..."

"혼자 있으면 그래. 나도 그랬어. 나도 미국 갔을 때. 혼자 있다 보니까 막 별생각 다 들고."

"누나 그래서 7종 한 거야?"

"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아니라곤 못 하지."

지성이는 태극기를 어깨에 건다는 자체가 어색하단다.

나쁜 건 아닌데, 멋진데.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게 왜 부끄럽냐? 우승하고 태극기 어깨에 딱 걸고 있으면 얼마나 간지 나는데."

"...형이야 멋있으니까. 난 멋있는 거랑은 좀 다르고."

"뭐래 미친놈이. 아 씨발 진짜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이 새끼가."

"야. 왜 그래."

이래서... 이래서 지면 안 된다고...

패배감에 익숙해져 버리면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면서 그 모습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니까.

운동을 시작하기 전, 나는 기혈이 막혀 환골탈태를 겪어야만 했었다.

정말 죽다 살아났었다.

존나 아팠다 진짜.

아직도 누워서 똥오줌을 지리며 끙끙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면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

우리 집안은 알아서 양기가 쌓이는 신체 구조를 타고났기에, 그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내가 일찌감치 알아서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한 생각 하고 좋은 거 보고 좋은 거 먹고 했다면 지금의 이런 신체와 근력을 일찌감치 중학교나 고등학교 1학년 땐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건 패배감 때문에.

하루하루 가면 갈수록 더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좆같은 마인드 때문에...

이대로 가면 계주 경기 결과를 떠나 지성이가 그렇게 되고 말 거 같은데.

"형. 외국 애들이랑 그렇게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으면 어때요?"

"뭘 어때. 서로 암내나 맡는 거지 뭐."

"하하하. 아 그게 뭐야?"

"야. 이 새끼들 냄새 존나 나 진짜."

"근데 정말로 그래. 여자 선수들도 데오드란트 쓰는 애들은 좀 나은데, 인도 이런 애들은 냄새가 정말..."

"아 왜 누나까지 그래. 진지한 얘기 하는데 암내가 뭐야."

"정말로 있으니까."

"그래. 뭐 걔네도 우리한테 마늘 냄새 난다 이러긴 하겠지."

농담 섞인 이야기가 나오자 지성이도 한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좋다. 이래서 답답할 때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구나."

"답답해하지 말라니까. 새끼가 진짜."

"아 형. 그게 말같이 쉽지가 않다니까요..."

"야. 답답할 게 뭐 있어. 그냥 뛰면 되는 거지."

"하하하...! 형이면 몰라도 누나가 그냥 뛴다고? 형 그거 알아요? 이 누나 원래 시합 전날엔 장난 아니게 민감한 거?"

"알지 그럼. 누구보다 잘..."

"내가 민감해?"

"너 얘기는 이따가 하고."

우리는 다시 지성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녀석도 라이벌이라도 있었으면 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단다.

"니가 라이벌이 왜 없어. 진수 있잖아."

"진수 형은... 뭔가 형 혼자 그랬던 거지."

"오~ 진수는 내 라이벌도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형이잖아. 난 좀 어려웠어. 어렸을 때부터 그 형 그래 가지고."

"새끼들 친한 줄 알았더만 은근 쇼윈도였네."

"하하하.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고."

"그럼 얘는? 너 인터뷰 보니까 마하 목표로 한다고 말하더만."

"누나. 목표랑 라이벌은 다르지."

"동민이같이 자기 기록을 넘는 걸 목표로 삼든가."

"그것도... 딴에는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 다빈이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성아. 너 왜 이렇게 애가 갑자기 찌질해졌어?"

"어우... 다빈아?"

"누나?"

"뭐라는 거야. 이건 이래서 아니다. 저건 저래서 아니다. 너 원래 이런 애였어?"

"야 왜 그래."

"아 그냥 애 말하는 게 계속 답답하잖아!"

지성이가 다빈이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와 누나도 형이랑 있으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뭐라는 거야. 그럼 넌 얘랑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되는데?"

"난 여자가 아니니까."

"다빈아. 아까 동민이랑 내가 말했지? 이 새끼도 은근 헛소리 잘한다니까."

말이 나온 김에 우리 둘은 무슨 사이냐고 지성이가 물어본다.

"별 사이 아닌데?"

"그냥 친구야?"

"친구지."

"근데 왜 이렇게 붙어 다녀."

"야. 지금 내가 얘랑 있고 싶어서 있냐? 너 걱정돼서 찾아온 거잖아."

"괜찮으니까. 가. 나 좀 씻을게. 누나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지성이가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갔지만, 다빈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답답한 얼굴로 물소리가 나는 샤워실을 가만히 쳐다만 볼 뿐.

"안 피곤해?"

"쟤를 진짜..."

"어쩌겠어..."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니까.

친구 없는 외로운 엘리트 선수로 지내며 서로를 위해 왔던 다빈이와 지성이.

그런 만큼 저 녀석의 무너지는 모습을 가만두기 어려운 것 같다.

"하 진짜. 갑갑한 자식..."

"신기하네. 너도 남 일에 열정적일 때가 있구나."

"..."

다빈이가 슬픈 눈동자로 올려다본다.

딴에는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뜻으로 화 나서 쳐다보는 거 같은데, 애가 원체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뭔가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오늘 같이 있을까?"

"너도 내일 시합이잖아..."

"그래도. 이런 기분으론 나도 혼자 있고 싶진 않고."

"진짜 쟤는... 너한텐 이게 마지막 경긴데..."

"음? 나?"

"그래. 아까 이동민이랑 그랬잖아. 져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왜 그래야 돼. 어차피 떠날 거라면 좀 좋게 가면 좋잖아."

다빈이까지 감정이 깊어지며 울먹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됐어. 왜 니가 울고 그래. 사람이 질 수도 있지."

"그런 게 어딨어. 다 잘할 수 있는데.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잖아. 쟤도 실력이 안 돼서 못 하는 거면 말을 안 하겠는데!"

울먹울먹거리는 다빈이를 토닥거리며 안아 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흐응. 흐으응..."

샤워가 끝났는가 지성이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다빈이 울음소리에 우뚝 멈춰 말했다.

"누나 왜 울어요?"

"신경 쓰지 마."

"너 때문에 그러지!!"

"..."

"아니야. 그냥 잠깐 뭔가 억울해서 그랬대."

"뭐가?"

"다빈아. 우리 나가자."

"잠깐만. 야. 권지성 너 여기 앉아 봐."

그리고 다빈이가 채찍을 들었다.

"아까 이동민이 그러는데. 얘 올여름에 지 돈 써 가면서 너네 운동시켰다면서?"

"..."

"넌 그럼 사람이. 받은 게 있으면."

"에헤이. 다빈아. 왜 니가 그래. 내 돈 내가 쓴 걸 가지고."

"가만 좀 있어 보라고!"

최다빈을 말리고 있는데, 지성이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형 누나랑 다시 사귀어요?"

"아니."

"그럼 이 누나는 왜 그러는..."

"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차였어."

"형이요?"

"야. 내가 널 언제 차?"

"찼잖아. 연애 싫다며. 올림픽까지 선수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니가 먼저 너 좋아하는 애 따로 있다고 그랬으니까"

혜정이에 이어 다빈이까지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따지고 싶진 않고.

"그니까 왜 울어.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냐고. 사람이 열정적인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누나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럼. 이 마당에 내가 널 어떻게 믿겠냐?"

"계주는 잘할 거야. 걱정 마."

"퍽이나!!"

Fuck.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근데 진짜 누나 많이 변했다. 원래 이렇게 막 자기 감정 드러내는 사람 아니었는데"

"시끄러! 마하야 나 휴지 좀."

"어. 어라? 근데 휴지가. 여기 있었는..."

원래 선수들 방에는 아시안 게임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각 티슈나 물병 같은 게 방마다 있는데.

늘 있던 침대 옆 협탁에 있을 게 보이질 않는다.

그 순간이었다.

방에 들어와 본 어두침침한 지성이의 모습. 그리고 우리에게 닥친 상황. 내일 경기를 앞둔 무거운 분위기 등등에 미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지성이 베게 옆에 노트북과 각 티슈가 놓여져 있었다.

"..."

"아. 누나 휴지 여기."

의식하지 말자.

뭐? 괜찮아. 해도 돼. 나쁠 건 없어. 건강한 사나이가 스트레스에 딸 칠 수도 있지.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런 건 아무 문제 될 게 없다.

우리끼리는, 남자들끼리는 이해해 줄 수 있는 문제다.

알아도 그냥 의식하지 않고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고 그럴 수 있는데.

감정이 올라와 있는 여자 입장에서는.

"그 와중에 넌 니 할 건 다 하고 있었냐?"

라고 그냥 툭 쏘아 버리고 만다.

다빈이의 한마디 때문에 내내 침착 우울하던 지성이가 펄쩍 날아올랐다.

"뭘! 아니 내가 뭘!!"

"흥. 누가 남자 아니랄까 봐..."

"아 내가 뭘 어쨌다고!!"

"에헤이. 다빈아. 하지 마."

"뭐?"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뭐랄까. 나라는 놈의 성향이 그렇다.

섹스 좋아하고 여자 좋아해도. 그런 걸 말하기는 좀 애매하다.

나도 친구들이랑 있을 땐, 야동 뭐 봤네, 딸 몇 번을 쳤네. 그런 얘기를 할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란 선에서의 이야기지. 실제로 그런 걸 드러내는 건 좀 꺼려진다고.

차라리 여자들이랑 야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아. 그건 뭔가 발전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때가 많으니까.

근데, 성남 놈들도 아닌 운동하며 만난 친구들. 그중에서도 번듯한. 정말 딸딸이를 쳐도 야동이 아닌 여성 잡지 속옷 사진 이런 거 오려 놓고 혼자 몰래 화장실에서 눈치 보면서 칠 거 같은 지성이의 속사정을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니야! 나도 아까 잠깐 울어 가지고!!"

"알았어 그렇다고 해 줄게."

"뭘 그렇다고 해!! 누나가 뭘 안다고!!! 진짜라니까!!"

"알았다고. 흥분해서 난리야..."

언젠가 지성이한테 다빈이를 좋아한 적은 없었냐고 물어봤었다.

두 녀석은 정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왔으니까.

그리고 다빈이는 언제나 육상계의 아이돌이자 동급생이었고.

그러나 지성인 한 번도 다빈이를 친한 누나라고만 생각했지 여자같이 보진 않았다고 했는데.

"휴지는 제대로 버렸어?"

"뭐라는 거야! 이 누나 미쳤나 봐! 아 형!! 좀 가라고 그래요!!"

이 새끼 구라였네... 여자로 안 보긴 뭐?

다빈이도 지금 자기 속상하게 한 거 때문에 일부러 더 지성이를 자극하고는 있지만...

겨우 딸 친 거 걸린 것만 가지고 저렇게 된다고?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성이였다.

거기다 우리들 육상 선수는 원래도 그렇게 딱 끼는 바지를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지금 녀석의 리틀 권지성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와 다빈이 앞에서.

"아. 누나 제발 말 좀 가려서..."

"..."

"......"

다빈이도 눈치채고 흥분해서 버럭거리던 지성이도 뒤늦게 지 몸이 변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셋이 있는 공간.

없지 않아 위로하고 아껴 주던 그런 산뜻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존나 개뻘쭘의 최고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신의 계시가 들려오고 나는 그것을 필터링 없이 지성이에게 물었다.

"지성아."

"...예."

"너 혹시 아다냐?"

"..."

"......"

어쩌면 이놈의 자신감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지도.

하지만 그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넌 애한테 뭘 물어보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며 다빈이가 슬쩍 짜증 난다는 듯 돌아보는데.

뭐랄까 그 눈빛이... 진짜 뭐랄까...

그러니까 살을 맞대고 서로를 수없이 탐닉해 본 사이니까 느낄 수 있는 시선인데.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다빈이의 다람쥐 같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걱정이나 두려움은 담겨 있질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더 크다고 봐야 할지도.

"다빈아 이리 와 봐."

"어?"

"어서. 일로 와 봐."

이미 눈물을 닦아 주고 토닥토닥해 주느라 품에 안겨 있는 다빈이였지만, 이리 오라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으니.

"야. 어. 왜 이래?"

"지성이한테 보여 주자."

"뭘?"

"자신감을 갖는 과정을."

라고 말하며 그녀의 허리에 손을 슥 감아 바짝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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